420. 밀항자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채널의 PD로 일하면서, 해밀턴은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많은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민간인 신분으로 미군이 제공하는 헬기에 탑승해 공항으로 이동하는 것은 그가 겪었던 수많은 경험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특별한 경험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미군 헬기 안에서, 미군 병사로부터 머리에 쓰라고 건네받은 항공 헬멧의 익숙한 디자인은 그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다른 부분은 일반적인 항공 헬멧의 디자인을 띄고 있었지만, 눈 앞을 가리는 부분에 있는 투명한 고글 파트는 분명 딥 다이버의 그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고개를 돌려 조종석에 앉아 있는 미군 조종사가 같은 헬멧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상혁을 향해 말했다.
“딥 다이버는 이제 미군에겐 익숙한 장비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자 흠칫 놀란 상혁이 헬멧의 귀 부분을 툭툭 두드리며 해밀턴에게 말했다.
“그렇게 크게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혁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또렷하게 해밀턴의 귀에 들려왔다.
해밀턴은 그제야 자신의 귓가에 원래 들리고 있었어야 할 시끄러운 비행음이 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 해밀턴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상혁에게 되물었다.
“헬기 안이라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화에 방해되는 엔진 소음이나 바람 소리는 소프트웨어적으로 제거해서 들려주니까요.
그냥 평소처럼 대화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큰 소리도 없앨 수 있다니 엄청난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네요.”
“딥 다이버의 사운드 유닛은 SANY의 부품을 쓰고 있으니까요.
원래부터 음향기기 쪽에서는 알아주는 회사죠.
애당초 딥 다이버를 설계할 때, 저희는 SANY 측에 처음부터 수억대 이상의 판매량을 예상하고 수십만 원대 고급 헤드셋에나 들어가는 수준의 부품을 요구했었습니다.
그래서 게이밍 디바이스임에도 불구하고 딥 다이버의 음질은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죠.”
“같은 부속을 군용 장비에도 제공한다는 게 조금 놀랍네요.”
“반대입니다. 군용은 단가가 비싼 만큼 추가 기능이 더 들어갔죠.
지금 저희가 머리에 쓰고 있는 장비에 있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은 외부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는 게 아닙니다.
아군의 헬기 소리처럼 반복되는 노이즈만 차단하고, 총소리 같은 이레귤러 사운드는 오히려 확대해주죠.
AI가 사운드의 종류를 판단해서 전투에 필요한 소음은 증폭하고 필요 없는 소음은 자동으로 줄여줍니다.”
“PTW가 개인 일정에 미 해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해되는군요.
갑판 위에서도 보았지만, 미군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많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건 예전에 EOD 개발 시절에 미군과의 관계에서 쌓은 인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군의 훈련 시뮬레이터를 저희가 작업했었고, 저희는 그 시뮬레이터를 통해 일반인과 테러범을 구분하는데 필요한 훈련 데이터를 제공했었죠.
적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는 점령 상황에서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미군들의 노력을 게임으로 표현하기도 했고요.
게다가 지금은 미군의 정규 훈련 과정에 PRD를 통한 가상 훈련이 포함되어 있고, 전장에서는 워 다이버의 도움을 받아 전투를 수행하죠.
그게 보급계든 정비계든 수송계든 포병이든 보병이든 전차병이든 상관없이, 워 다이버는 미군의 모든 병종에 대한 다양한 메리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통신을 듣고 있던 조종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상혁 씨 말이 맞습니다. 아프간 작전에 참여했던 병사들 중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면, 워 다이버 덕분에 목숨을 구한 병사들의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을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헬기를 조종하는 과정에서도, 조종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AR 형태로 편하게 제공받을 수 있으니까요.
전 세계에서 이 장비를 미군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아주 뛰어난 특혜죠.
제가 확신하건대, 아마도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PTW에 매우 감사하고 있을 겁니다.”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해밀턴은 PTW가 미군에 단순히 워 다이버의 하드웨어 사용권만을 제공한 것이 아닌, 미군 병사들을 위한 수많은 기능을 지속해서 업데이트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가 지금 게임 회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세계 최고의 방산업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니, 그 어느 방산업체도 PTW처럼은 하지 못할 겁니다.”
“저희는 그냥 저희의 서비스를 제공 받는 고객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해밀턴은 상혁과 함께 플로리다에 있는 올랜도 국제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해밀턴은, PTW에서 준비한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전용기는, 소위 말하는 ‘재벌’들이 사용하는 개인 비행기와는 조금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전 좌석이 일등석인 비행기는 또 처음 보네요.
저는 조금 더 프라이빗한 형태의 전용기를 상상했습니다만.”
“예를 들면요?”
“아이론 맨 1편에 나오는 그런 비행기 말입니다.”
“그건 CEO나 임원들 같은 소수 인원만 데리고 이동하는데 쓰는 전용기고, 이건 PTW 직원들을 대량으로 옮길 때 쓰는 전용기니까요.
용도가 다르죠.
원래는 저희도 일반 항공기를 전세로 빌려서 썼었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크기의 항공기를 대여하는데도 무리가 있고, 게다가 등급별로 좌석 수가 제한되어있는 일반 항공기 특성상 한번에 많은 인원을 옮길 때 누군가는 무조건 비즈니스석이나 이코노미석을 이용해야 했죠.
그래서 예전엔 일등석을 타고 갈 직원을 뽑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대형 항공기를 통째로 개조해서 전체 좌석을 일등석으로 개조한 전용기를 쓰고 있죠.”
“하지만 이번처럼 매번 많은 직원이 한번에 이동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부분은 핵심 임원들만 해외 출장에 나서는 경우가 많을 텐데, 그때마다 이 큰 항공기를 띄우는 건 엄청난 낭비가 아닐까요?”
“그래서 통상적인 출장 때는 전용기 대신 일반 항공기를 이용합니다.
그리고 명절마다 시기를 맞춰서 직원들을 단체로 태우기도 하고요.
PTW는 글로벌 기업이라 한국이 아닌 해외 출신 개발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명절 전에 뭉텅이로 미국까지 전용기로 직원을 실어나르기도 하고, 유럽까지 실어나르기도 하죠.
거기서 각자의 고향으로 가는 데는 개인 항공편을 이용하게 하지만, 일단 한국에서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동하는 것까지는 회사에서 지원해줍니다.
장거리 비행이 필요한 경우에 최대한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는 회사 차원에서의 배려죠.”
해밀턴은 CEO나 임원들을 위한 전용기가 아닌, 직원들을 위한 전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PTW가 보통의 회사와는 기본 발상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인상은 한국에 도착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PTW에 방문하시는 방문객들은 따로 호텔을 잡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사 근처의 직원 아파트 단지에, 회사 방문자를 위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침구 교체나 청소 등 나머지 서비스는 호텔 수준으로 운영되니 무료로 편하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혁이 말한 ‘게스트 하우스’는, 다른 아파트에서 운용하는 것처럼 한두 개 호실을 손님용으로 운용하는 그런 개념의 게스트 하우스가 아니었다.
PTW에서는 아예 아파트 단지 내부에 호텔식으로 만들어진 전용 건물을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건 그냥 호텔 아닙니까? 이 정도 설비를 운용하려면 직원들의 숫자도 장난이 아닐 텐데, 겨우 방문자를 위해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겁니까?”
고급 호텔에서 제공되는 스파나 피트니스 시설, 수영장과 식당, 극장과 키즈시설이 완비되어있는 게스트 하우스를 보며, 황당해하는 해밀턴에게 상혁이 말했다.
“외부 협력업체에서 장기 출장 온 직원들에게도 제공하고, PTW 직원들의 호캉스 용으로도 사용됩니다.
게다가 일반 호텔처럼 비 관계자 대상으로도 장사를 하고 있고요.
이 호텔이 있는 아파트 단지를 포함해서, 천하대와 PTW 본사.
그리고 인근의 상권 지역 전부를 PTW가 관리합니다.
거기엔 매일같이 직원들이 사용하는 전용 대형 마트까지 포함되어 있죠.
그리고 PTW 직원들에게는, 이 모든 서비스가 마진율 0% 이하로 제공되고요.
이건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 외에 PTW의 직원들이 타사에 가지 못하게 붙잡는, 일종의 사내 복지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트를 운영한다 하심은···.”
“PTW 마켓에서는 저희가 직접 원산지와 계약해서 원가에 물건을 들여와 직원들에게 원가에 제공합니다.
직원 카드만 있으면, 시중가의 절반 이하로 대부분의 물건을 구매할 수 있죠.
해밀턴 씨가 묵게 되실 호텔 시설의 이용도 마찬가지고, 아파트 내부의 헬스장 같은 경우도 한 달에 몇천 원 수준으로 싸게 이용할 수 있죠.
영화관도 직원 전용으로 운용하는 영화관이 따로 있고요.
물론 PTW 직원이 키우는 아이를 위한 학원과 유치원, 어린이 놀이방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막대한 운용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일반 고객 상대로도 장사하긴 하지만, 마진을 남기는 건 일반 고객들을 대상으로만 한정됩니다.
직원에게는 모든 서비스가 원가에 제공되죠.
만약 해밀턴 씨가 PTW의 직원이 된다면, 해밀턴 씨는 직원 카드를 받아든 그 순간부터 그 어떤 걱정이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 그대로 직장부터 가정까지, 회사가 모든 것을 케어해서, 오로지 좋은 게임을 만드는 데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이 복지 시스템의 목적이니까요.”
그 말도 안 되는 복지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해밀턴은 입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혁이 말하는 혜택들을 합치면, 그 높다는 PTW의 연봉 이상의 혜택이 직원들에게 제공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어갈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그냥 1년에 버는 돈 대부분을 한 푼도 안 남긴다는 각오로 전부 꼬라박는 거죠.
덕분에 저희 PTW는 매출 규모로는 세계 굴지의 회사이면서 대출이 0원인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내 유보금 수준은 거의 바닥에 가깝습니다.
회사 안에 현금을 쌓아두지 않는다는 게 저희의 기본 운용 방침이니까요.
게다가 이런 복지 시설들은 사실 설치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거지 관리 비용 자체는 얼마든지 최적화가 가능합니다.
헬스장만 해도 그렇죠.
거기 들어가는 기구들의 가격은 매우 비싼 편이지만, 그 비용을 고객에게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면 유지비 자체는 그리 많이 드는 편이 아닙니다.
저희가 고용한 PT 전문가들의 인건비, 그리고 시설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관리비와 관리 직원의 인건비 정도가 들어가는 비용 전부죠.
PTW 마켓 같은 경우도, 철마다 적절한 공급처를 찾아 가장 신선한 상태에서 직원들에게 원가로 판매하다가, 팔다가 남은 상품은 구내 식당으로 돌려버리면 됩니다.
전체적인 물류 사이클 자체가 이 거대한 조직 안에서 회전되게 되어있죠.
그런 식으로 최대한 버려지는 돈이 없도록 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이 거대한 복지 시스템이 운영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을 관리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텐데요?
유통이든 물류든 호텔 운영이든, 그중 무엇을 꼽아도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습니다.”
“최대의 마진을 남기는 걸 목적으로 운영하는 거라면 어렵겠지만, 그냥 운영비만 뽑는 게 목적이라면 난이도가 낮아지니까요.
사실, 품질이 뛰어나면서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일반 고객을 상대로 한 장사가 매우 잘 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직원 복지를 위해 적자를 감수하고 시작한 사업들에서, 오히려 이윤이 나오고 있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건, PTW에 있는 한 사람의 천재 덕분입니다.
비록 그분의 이름은 게임 회사인 PTW의 특성상 저나 민준의 이름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분의 존재가 있었기에 지금까지의 PTW는 모든 게임이 최고의 퀄리티로 발매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거죠.”
“그분이 누굽니까?”
해밀턴의 질문에 상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김현주. PTW의 운영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책임지는 존재이자, PTW의 CEO를 맡고 계신 분입니다.”
***
“상혁 씨에게 들었던 것과는 이미지가 많이 다르시네요.”
PTW 본사에 도착한 해밀턴이, 자신의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는 현주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현주가 미소지으며 해밀턴에게 물었다.
“어머, 우리 이상혁 CCO가 저에 대해 뭐라고 설명했나요?”
“능력적인 부분에 관해서만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거대한 시스템을 뒤에서 떠받치고 있는 분이라고요.
그래서 저는 팔이 4개에 머리가 두 개 정도 달린 분이신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미인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해밀턴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PTW의 CEO 김현주는, 현재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게임 회사라고 하면 흔히 연상하게 되는, 살찐 개발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들 건강 그 자체처럼 보이네요.
표정도 활기차고요.
다들 회사에서 운영하는 피트니스 센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나 보죠?”
그러나 현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가 운영하는 피트니스 센터의 주 고객은 PTW 직원들이 아니라 근처에 사는 대학생들과 일반 주민들입니다.
가격에 비해 장비가 충실해서 매우 인기 있는 편이긴 하지만, 직원들은 거의 이용을 안 하죠.
저희 직원들이 건강해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PRD 때문일 겁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을 만드는 데도, 상당한 칼로리 소모를 요구하는 장비가 PRD이니까요.”
“하긴 요즘은 다이어트 장비로도 인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PRD-S 같은 경우는 스포츠 선수의 트레이닝 용도로도 많이 쓰인다고 들었고요.”
“물론 직원들이 건강하게 지내는 건 매우 좋은 일이긴 하지만, 요즘은 조금 걱정이 되는 중입니다.
다들 끼니를 거르면서 개발에 열중하고 있으니까요.
자세히 보시면 살찐 직원은 찾아보기 어려워도 눈 밑에 다크 서클이 드리워진 직원이 절반 이상입니다.
그런 직원들을 상대하다 보면, 이따금 게임에 푹 빠진 어린애를 상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CEO로서, 그런 직원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어떤 계획을 진행하고 계시는가요?”
해밀턴의 물음에 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부실 벽에 있는 캐비닛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보라색의 비닐에 싸여있는 초콜릿 바처럼 생긴 물건.
그것은 PTW에서 PRD를 이용하는 직원들을 위해 만든 일종의 ‘단백질 바’였다.
“개발이나 게임에 빠진 직원들은 식사조차 거를 때가 많죠.
그래서 저희는 천하대 영양학과와의 연구 협력을 통해 이 단백질 바를 만들었습니다.
오랜 시간 끼니를 걸러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면서, 최대한 짧은 시간에 식사할 수 있게 한 거죠.
작은 크기이지만, 이 단백질 바 하나의 열량은 1500㎈이 넘습니다.
시중에서는 ‘VR 바’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기도 하죠.”
“아, 이건 저도 압니다. PRD 유저들에게 꽤 인기 있는 간편식이라고 기사도 떴었는데, 이걸 만든 회사가 PTW였군요?”
“유통 및 개발은 협력사에서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단순히 연구 개발에 필요한 비용을 댔을 뿐이죠.
물론 그 투자를 통해, 저희는 원가에 이 물건을 받아오고 있긴 하지만요.”
현주는 해밀턴에게 단백질 바를 권했다.
“오늘부터 ‘무한의 바다’를 테스트 플레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테스트 장소 근처에도 쌓여 있겠지만, 지금 하나 먹어두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마도 게임을 시작하시면 식사를 거르시게 되실 테니까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하루 3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거로는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게다가 저 스스로가 게임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제가 게임 때문에 식사를 거르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상혁이 해밀턴을 보며 말했다.
“맛이 꽤 좋은 편이니 그냥 먹어두세요.
나중에 먹어두길 잘 했다고 생각할 때가 올 테니까.”
단호하게 말하는 상혁을 보며, 해밀턴은 프로틴 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맛은 있는데···. 굳이 이런 것까지 먹어가면서 게임을 해야 하나 싶네.
게다가 아침 식사도 든든하게 먹고 왔는데, 이것까지 먹으면 오늘은 완전히 오버 칼로리야.’
그렇게 ‘식사’를 마치자, 상혁은 해밀턴을 데리고 테스트 존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밀턴에게 게스트 계정으로 테스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PRD를 보여주었다.
보안을 위해, 개발 중인 게임은 오직 이 공간에 있는 PRD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다는 설명을 붙여서.
그곳에서, 해밀턴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촬영한 ‘범선 제작’을 게임 회사가 시도하게 만든 이유인, PTW의 신작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었다.
‘무한의 바다(Infinite Ocean)라.’
현재 PTW에서 개발하고 있는 해적 게임의 한국 발매 명칭은 ‘무한의 바다’였지만, 영문 타이틀 명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되어있었다.
굳이 직역하면 Ocean이란 단어는 바다라는 의미보다는 ‘대양’이란 단어에 가까웠으니까.
그 표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해밀턴의 귀에, 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자신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해밀턴 씨. 들립니까?-
“들립니다.”
-그렇겠죠. 연결 테스트는 이미 해 두었으니까요.
오늘 저는 해밀턴 씨에게 이 게임을 하는데 필요한 튜토리얼을 간단하게 안내해 드릴 겁니다.-
“게임 안에도 튜토리얼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 게임 특징 중 하나가, 발매 직전까지 계속 시스템이 개선된다는 거죠.
그래서 현재 적용된 튜토리얼엔 변경된 사항과 개선된 부분이 적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매번 마이너 체인지가 있을 때마다 튜토리얼을 새로 만드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과정이라서요.
보통은 모아서 한 번에 처리하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먼저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타이틀 화면에서 옵션을 조정해주세요.
눈앞에 있는 항해일지를 펼치면 게임 메뉴처럼 보이는 페이지가 나올 겁니다.
거기서 필기체로 옵션(option)이라고 쓰인 문장을 손가락으로 쓰다듬거나 누르면 옵션 페이지로 내용이 변경될 겁니다.
게임을 시작하고 나면 당분간 시스템 창 호출이 불가능하므로, 사운드의 크기나 화면의 밝기 같은 옵션을 미리 조정해두시고 게임을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TV로 플레이하는 콘솔 게임처럼 TV 리모컨으로 간단하게 볼륨을 조정할 수 없는게 PRD의 단점이니까요.-
“저는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은데요?”
-좋습니다. 그럼 항해일지의 페이지를 넘기거나 게임 스타트라고 쓰여 있는 단어를 터치해서 게임을 시작하세요.
그럼 오프닝 연출이 개시될 겁니다.-
해밀턴이 상혁의 말대로 하자, 마치 배의 선장실처럼 생겼던 타이틀 에리어가 순식간에 어둠에 물들었다.
그리고는 음악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하얀색으로 빛나는 글자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위대한 모험의 시대 속에서 대양을 넘나드는 영광스러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대 범선 시대 2의 오프닝을 떠오르게 하는 오프닝 멘트와 함께, 해밀턴의 눈앞에 음악의 템포에 맞춰 플래시 백 되는 다양한 장면들이 지나갔다.
마치 진짜처럼 보이는 수많은 범선이 늘어서 있는 모습.
지저분한 해적들이 주점에서 주사위를 놓고 내기를 벌이는 모습.
중세의 대표적인 검인 에스톡과, 전장식 피스톨을 들고 백병전을 벌이고 있는 해적의 모습.
그리고 심해의 깊은 곳에서, 공포스럽게 눈을 반짝이는 정체불명의 생물의 모습까지.
보는 것만으로 흥미를 느끼게 만드는 오프닝의 스틸컷 퍼레이드가 끝나고, 해밀턴은 음악 소리가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치 눈이라도 감은 것처럼 화면이 다시 어두워지는 것도.
그 어둠 속에서, 해밀턴의 귓가에 거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무리네.”
“세상에, 배에 몰래 숨어들려다가 굶어서 죽은 녀석은 이 녀석이 처음일 것 같은데?”
“눈은 안 떠?”
“이 몰골로 살아있기나 하겠어?
일단 바다에 버리자고. 아직 썩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썩어서 냄새를 풍기게 될 것 같으니.”
“잠깐,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르잖아?”
“머저리 같은 놈. 만약에 살아있다고 쳐도, 선장한텐 뭐라고 보고할 건데?
‘저희가 멋대로 럼주를 훔쳐 먹으려다 다 죽어가는 밀항자를 발견했습니다.
이 멍청한 녀석은 나무 통에 숨으면서 자기가 먹을 물과 식량도 안 챙긴 모양이더군요.’
이렇게 말할 거야?
그냥 버리고 입 닦자고.
그게 더 편하니까.”
아마도 주인공은 밀항 중에 술통에 몸을 숨긴 모양인데, 그 사실을 모르는 선원이 나무통을 그대로 봉인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식량과 물을 챙기는 것을 까먹은 나머지 탈진해 기절한 주인공을 선원들이 버리려는 모양이었고.
이 황당한 연출을 오직 소리만 가지고 들으며, 해밀턴은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뭐야, 진짜 죽어? 바다에 버려?
에이, 설마 버리기 전에 뭔가 이벤트가 발생하겠지.
선장이 구해준다던가?’
그러나 그런 행운은 발생하지 않았고, 해밀턴은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붙잡는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자연스레 몸의 방향이 전환되면서, 해밀턴의 몸이 천장을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누운 몸은 두어 번의 반동을 겪은 직후에, 갑자기 공중에 던져진 것처럼 갑자기 풀려났다.
“앗 차거!”
순간 밤바다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전신을 차가운 감각이 감싸는 순간, 해밀턴은 그제야 시야가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라앉는다.’
말 그대로 바다에 ‘던져진’ 상황에서, 해밀턴은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휘저었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물에 잠겨버렸기 때문에.
싸늘할 정도로 식어버린 바닷물이 전달하는 냉기, 진짜로 물에 잠긴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물소리 속에서, 해밀턴은 진짜로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살고 싶으냐.’
해밀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를 재촉했다.
‘살고 싶다고 말하라.’
“살려줘!”
그러자 혼란스럽게 마구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글자가, 해밀턴의 눈앞에 출력되었다.
[신의 축복 ‘게임화(Gamification)’를 습득했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1포인트 습득 했습니다.]
[위기 상황이므로, 해당 포인트를 강제로 스킬 ‘수영’에 할당합니다.]
[스킬 ‘수영’의 레벨이 1이 되었습니다.]
연속으로 출력되는 메시지와 함께, 해밀턴은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무리 팔다리를 세차게 휘둘러도 자꾸만 가라앉던 몸이, 수면을 향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을 버려두고 조금씩 멀어지던 범선에서 한 남성의 호통이 들려왔다.
“이 얼간이들아! 살아있는 사람을 바다에 던져?
지금 제정신이야? 당장 구하지 못해!?”
멀어져가던 배의 돛이 일제히 올라가는 모습을 보던 해밀턴은 갑자기 온몸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플레이어의 체력이 충분한 상태에서 캐릭터의 체력이 떨어졌을 때, PRD에서 강제로 플레이어의 행동을 제약하는 ‘포스 피드백’이 발동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감각이었다.
‘시작하자마자 바다에 던져져서 입수라니.
임펙트 하나는 확실하네.’
그렇게 ‘밀항자’로 시작된 게임은, 잠시 후 자리를 옮겨 플레이어를 바라보고 있는 선장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너무 지저분해서 성별도 알아볼 수가 없구나.
우선 좀 씻겨야겠어.
물에 빠진 쥐같은 몰골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냄새가 심한 상태니까.
욕조는 저기 있는 욕조를 쓰도록.”
해밀턴은 다른 게이머가 대부분 그러하듯 시키는 대로 욕조에 들어가는 대신 방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난 ‘선장’이 강제로 해밀턴의 뒷덜미를 잡아끌고는 욕조에 던져넣었다.
그곳에서, 해밀턴은 욕조 앞에 있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본인 확인 시퀀스 발동.
캐릭터 설정 화면을 호출합니다.
일부 항목은 최초 설정 이후로 변경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 대한 정보를 선택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거울을 보는 순간, 해밀턴의 앞에 마치 게임의 UI처럼 보이는 수많은 텍스트들이 떠올랐다.
[성별] [연령] [출신] [종족] [키] [체형]···.
그것은 바로 조금 전, 해밀턴이 익사하기 직전에 익혔던 ‘게임화’ 능력이 발현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해밀턴을 지켜보고 있던 상혁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허공에 있는 삼각형 버튼을 터치하거나 항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긋는 걸로 다음 옵션을 선택할 수 있어요.
원하는 캐릭터의 외형을 잡거나, 아니면 [기본 캐릭터] 버튼을 터치해서 원하는 캐릭터를 선택하세요.-
해밀턴은 기본 캐릭터 버튼을 터치했다.
그러자 이 게임에서 제공하는 기본 캐릭터들의 이미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에 잠입한 소년.
여성의 몸으로 해군이 되기 위해 대륙으로 떠나는 배에 잠입한 소녀.
위대한 해적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따라 해적이 되기 위해 밀항한 남자.
지도와 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빚을 내서 책을 사다가 빚쟁이들에게 쫓겨 밀항한 학생.
수많은 캐릭터를 보며, 해밀턴이 질문했다.
“이거 캐릭터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바뀌나요?”
-아뇨. 물론 초반 전개에는 좀 영향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게임 도중의 운명은 게이머가 스스로 개척하는 겁니다.
하지만 초반 캐릭터 셋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NPC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처음에 가지고 있는 스킬 셋의 종류가 달라지죠.
가급적이면 본인이 하고 싶은 플레이에 어울리는 배경을 가진 캐릭터를 추천합니다.-
해밀턴은 말끔해 보이는 학자처럼 보이는 캐릭터를 골랐다.
책을 너무 좋아해 빚을 내서 책을 사다가, 빚쟁이들에게 쫓기던 도중 밀항을 했다는 남자.
해밀턴은 그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 역시, 책과 지식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다큐멘터리 PD라는 직업을 선택했으니까.
그는 지식에 대한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처럼 생긴 캐릭터를 보면서, 본능적인 영혼의 끌림을 느꼈다.
[기본 캐릭터 중 <학자> 에른네스트 로테즈를 선택하셨습니다.
캐릭터의 이름이나 상세 정보를 변경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대로 하겠습니다.”
[결정이 반영되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목욕을 마무리해 주십시오.]
해밀턴은 마치 진짜 목욕을 하는 것처럼 스펀지를 잡아 온몸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몸까지 닦고는 옆에 준비된 옷을 입은 채 말끔한 모습이 되어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거기엔 조금 전까지 있었던 더벅머리를 한 정체불명의 인물 대신, 깔끔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있었다.
“외모를 보아하니 아카데미의 학자 같은데, 어쩌다 밀항을 한 거지?”
해밀턴에게 질문을 던지며, 선장은 들고 있던 파이프 담배에 불을 지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상혁은, 선택지를 능숙하게 연기하며 게임을 플레이하는 해밀턴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난이도도 확인하라고 할 걸 그랬나?”
그가 고른 ‘기본 캐릭터’의 난이도는, 전체 캐릭터 중에 가장 높은 캐릭터였기 때문에, 상혁은 그의 게임 플레이가 고난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빚쟁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끌려가는 것부터 시작하게 될 테니까.
해밀턴이 고른 캐릭터 ‘에른네스트 로테즈’.
해밀턴이 ‘영혼의 끌림’을 느낀 그 캐릭터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500만 두카트라는, 갚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빚을 지고 시작하는 캐릭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