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손맛의 가치
“잠시 정비 및 충전하겠습니다.”
아직 멀쩡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나머지 7척의 배에서 내린 로봇들은, 상혁이 있는 항모로 이동하여 일제히 충전과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중에는 앞선 테스트에서 거의 반파 수준으로 박살 난 로봇들도 꽤 있었지만, 수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당초 전부 모듈식으로 설계되어 부서진 부품만 갈아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손이 으깨져 있으면 팔꿈치 아랫부분을 통째로 교환하고, 허벅지가 박살 나 있으면 허리 아랫부분을 통째로 교환한다.
그런 방식으로 보수과정을 진행하면서, PTW 직원들은 부서진 로봇의 부속들을 한군데에 던져 넣고는 새 부품을 박스에서 꺼내 쉴 새 없이 교체하고 있었다.
“괜찮아 보이는 부품도 교체하는 것 같은데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질문하는 해밀턴에게, 상혁이 답했다.
“다음 테스트에서는 닻을 이용한 급선회 테스트가 있으니까요.
캡스턴을 잡고 돌려야 해서 미리 내구도에 문제가 될만한 부속을 교체해 두는 겁니다.”
“캡스턴이요?”
“닻을 감을 때 쓰는 장치입니다.”
상혁은 노트북으로 다음 훈련의 시뮬레이션 테스트 영상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최고속도로 항해하는 도중에 닻을 풀어 급선회하는 함정의 모습이 있었다.
“제일 큰 배로 하는 게 아니네요?”
“3천 톤이 넘는 배를 닻으로 드리프트 시도하면 사슬이 끊어지던가 배 앞부분이 박살 나겠죠.
철제함선이면 모를까, 저 범선은 목재로 되어있으니까요.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에서 닻 드리프트를 시도했던 블랙 펄도 대포가 달랑 32문밖에 안 되는 작고 빠른 배였잖아요?
게다가 포격 테스트에서는 사격 때마다 대포를 뒤로 당겨서 화약을 넣고 탄환을 재장전한 다음 원위치시켜야 하죠.
테스트 도중에 작동 불량이 날 위험을 감수하느니 그냥 조금이라도 맛 간 것 같은 부속은 교체해버리는 게 낫습니다.”
상혁은 이번 테스트의 대략적인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기본적으로 이번 테스트에 사용하는 함포인 전장식 카로네이드(Carronade)함포는 단거리 철제 활강포입니다.
가벼운 대신 포신이 짧기 때문에 사거리가 겨우 1~2km밖에 되지 않아요.
게다가 함선 옆구리에 고정되어 있어서 조준 같은 행위가 불가능하고요.
그런 상태에서 적에게 최대한의 데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최고로 화력이 집중되는 함선의 측면으로 적을 노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적 역시 계속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아군 함선의 움직임, 그리고 적군 함선의 움직임을 종합적으로 계산해서 가장 최적의 타이밍에 발사를 해야 하죠.
하지만 당시 범선의 선회 능력이라는 게 고만고만한지라, 급하게 방향을 틀거나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닻을 써서 드리프트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요.”
“하지만 큰 함선은 그렇게 하면 망가질 위험이 있다면서요?”
“망가지지 않더라도 크기와 무게 때문에 운동에너지가 커서 한쪽을 붙잡고 잡아당기면 배가 선회하는 게 아니라 아예 뒤집힐 수 있죠.
이번 테스트는 돛이 달린 범선을 가지고 영화에서처럼 닻을 이용한 드리프트를 했을 때 선체에서 느껴지는 충격량을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입니다.”
“그 외의 테스트는요?”
“함수포를 가진 배에게 뒤에서 사격 당했을 때(Raking Fire) 포탄이 배를 가로지르며 박살 낼 때의 충격량.
가장 큰 함선에 달린 114문의 일제 사격을 받았을 때의 충격량.
직격은 아니더라도, 함선의 지근거리에 포탄이 착탄 했을 때 전해지는 간접 충격량.
각 포탄의 무게와 함포의 종류, 사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충격량을 고르게 확인합니다.”
“어째 전부 충격량만 테스트하는 것 같은데, 데미지 테스트는 안 하나요?”
“애당초 각 포격에 따른 데미지는 PTW 지하의 연구실에서 수만 번씩 테스트했으니까요.
그에 따른 물리 시뮬레이션도 엄청나게 많이 진행했고요.
그러니 저희가 이번 테스트로 확인하려는 건 물리 엔진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손맛’에 해당하는 감각을 얻어내려는 거죠.”
“손맛이라구요?”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대부분의 전투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주로 키를 잡고 있을 겁니다.
저희는 키를 잡은 상태에서 포격을 받았을 때 손끝에 어떤 느낌이 전달되는지, 배는 얼마나 흔들리며 발밑의 진동은 어떤 느낌인지를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테스트는 그 손맛을 100% 구현하기 위해서 진행하는 거죠.”
“손맛이라···.”
해밀턴은 정비를 마치고 다시 함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줄을 서서 보트에 오르는 스턴트 봇들을 보며 생각했다.
‘겨우 손맛 때문에 1조를 태워?’
그 ‘손맛’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PTW 이토록 집착하는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신호에 맞춰 닻을 풀도록!!”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민준은 전속력으로 전진하는 배 위에서, 반대편에 보이는 거대한 전함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키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지금이다!!!!! 풀어!!!!!!!!”
“닻을 풀어라!!”
“래칫을 풀어!!!”
민준이 소리치자마자 갑판 위의 선원들이 민준의 명령을 복창했다.
그것은 선원들끼리 음성 명령을 전달함으로써, 갑판 아래에 있는 선원에게 민준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갑판 아래의 기관부에서, 래칫 앞에 있던 두 대의 로봇이 손에 든 거대한 해머를 들어 올렸다.
그 앞에는, 힘을 주어 당기지 않아도 평상시에 닻이 풀리지 않도록 톱니 바퀴 형태의 기어를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크기의 목제 암(ARM)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두 대의 로봇이 온 힘을 다해 해머로 후려치자, 목제 잠금장치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톱니바퀴에서 이탈하려 했다.
그러나 수 톤에 달하는 무게가 걸려있는 톱니바퀴의 압력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한 번 더!”
다른 로봇이 소리치자, 두 로봇은 다시 한번 목제 잠금장치를 해머로 후려쳤다.
그러자 ‘타아앙’하는 소리와 함께 목제 부품이 기어에서 튕겨 나오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기어가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민준은 PRD 안에서, 자신이 조작 중인 로봇의 센서를 통해 배 위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실시간으로 듣고 있었다.
잠금장치가 풀릴 때 들린 파공음과 함께, 3톤짜리 돛이 수면에 처박히며 울려 퍼진 폭발음까지도.
로프가 미친 듯이 나무를 긁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민준은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그리고는 20을 세었을 때, 갑판위의 로봇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원 충격에 대비하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닻이란 물건은 그 무게만 가지고 함선을 멈추게 만드는 물건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톤짜리 함선의 움직임을, 함선 무게의 1/100도 안 되는 가벼운 쇳덩어리가 막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대신 닻은 다른 방식으로 배의 움직임을 제약한다.
수면 아래로 파고들어, 대지와의 결합을 통해 강한 힘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키를 잡은 민준은 닻이 바닥을 긁으며 배에 전달하는 진동을 발바닥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뭔가에 걸린 것 같은 둔탁한 충격이 전달되자마자, 키를 잡은 손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콰드드드드득-
닻에 매달린 로프가 범선 중심에 있는 기어에 엄청난 힘을 전달하면서, 목재가 압력으로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민준은 마치 청룡열차에 탄 것 같은 강한 원심력이 배에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키를 잡은 손에 준 힘을 푸는 순간, 배 밖으로 튕겨 나갈 것 같은 거대한 힘이었다.
“으에에에에엑!! X바아아알!!”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붙잡혀 강제로 농락당하는 듯한 기분 속에서, 민준은 자신이 조작하는 범선이 거의 쓰러질 듯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닻이 걸린 지점을 중심으로 말도 안 되는 선회 기동을 하는 모습도.
그것은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끝내주게 멋진 선상 드리프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울어진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사격이 불가능하기에, 빠르게 배의 균형을 잡을 필요를 느낀 민준은 안 돌아가는 키를 억지로 돌려 배의 방향을 틀었다.
전신에 연결된 PRD의 와이어가, 자신의 몸을 붙잡는 힘에 정면으로 대항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배의 기울기가 안정권으로 다가왔을 때, 민준은 목표로 삼은 적함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군 함선의 측면은 완벽하게 적군 함선을 바라보고 있지만, 적군 함선의 조준선은 아군 함선을 대각선으로 빗겨나간 상태.
그것은 적의 포격을 피하며 최대한의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최적의 각도였다.
‘함대전을 해보니 확실하게 알겠네.
이 게임의 함선 운용이 어떤 느낌으로 구현될 것인지.’
현존하는 게임 회사 중, 아니 전체 IT 기업 중에 가장 기술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PTW가, 완벽하게 현실의 해전에 기반을 두어 개발한 해상전.
그 시스템의 핵심은, 아이러니하게도 MS - DOS 시절의 고전 명작 ‘대 범선 시대 2’의 전투와 닮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은, 구성과 포지션 싸움이라는 거지.”
이어지는 전투 테스트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민준은, 잠시 쉬는 동안 상혁에게 말했다.
“대 범선 시대 2에서, 플레이어는 함선의 종류와 그에 따라 대포의 구성을 바꿀 수 있잖아?
그리고 함선의 종류에 따라 한 턴에 움직일 수 있는 이동 거리나 방향 전환에 제약을 받고, 함포의 종류와 수량은 사거리와 위력을 결정하지.
근데 이건 실제 함대전도 똑같더라고.”
민준의 말을 들은 상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민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네. 결국 사거리가 긴 대포를 쓰면 거리가 멀어지는 만큼 조준이 어려워지고, 장전 시간도 오래 걸릴 테니까, 화력에 영향을 끼치겠지.
반면에 사거리가 짧은 대포는 가볍고 재장전이 빠른 대신 사거리가 줄어들 거고.”
“배도 마찬가지지. 아까 내가 한 것처럼 작고 가벼운 함선은 닻을 이용해서 드리프트를 시도한다던가, 아니면 빠른 선회를 통해서 좋은 사격 포지션을 잡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포문의 숫자가 부족하므로 화력에서 손해를 보게 될 거야.
아까는 진짜 좋은 각도에서 13발이나 맞췄는데 구멍만 나고 침몰할 생각도 안 하더라.
여기도 체급이 깡패인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로.”
“그야 오늘 사격에 사용한 포탄은 이름만 포탄이지 그냥 쇠 구슬이니까.
관통한 다음 안에서 터지는 작열탄 계열이었으면 13대 맞고 걸레짝이 됐을 걸?”
“하지만 그 쇠구슬도 한 층당 50개씩 100문에서 한 번에 발사되면 거의 샷건이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모든 대포를 단거리 포만으로 편성하는 건 미친 짓이니까, 장거리포도 몇 문 정도는 편성하잖아?
결국 그 비율을 얼마나 적절히 잡느냐도 함대 운용의 중요 포인트가 되겠지.”
“그런 부분도 대 범선 시대 2와 묘하게 닮았네.”
“직접 키를 잡고 배를 몬다는 점에서 손맛이나 현실감은 완전히 다르지만.”
웃으며 말하는 민준을 보며 상혁이 물었다.
“그래서, 스턴트 봇은 어때?
민준이 네가 항해 중에 완성된 물건이라, 설계와 기초 프로그래밍은 네가 했어도 실전 테스트는 이번이 처음이잖아?
솔직한 감상이 듣고 싶은데.”
“좋아. PRD에서 내가 취하는 움직임을 그대로 취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안에 있는 센서가 현장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도 매우 좋은 느낌이야.
솔직히 말하면, 촉감 빼고는 내가 로봇을 조종 중인 것인지 아니면 직접 배에 타고 있는 건지 구분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더라고.”
“그건 다행이네. 네가 그렇게 느꼈다는 건, 나중에 그 데이터를 그대로 가지고 PRD를 통해 게임을 할 게이머들도 그 느낌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상혁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필요한 데이터는 90% 이상 모았어.
민준이 네가 조종한 스턴트 봇은 한 대지만, 실제로는 함선에 탑승한 스턴트 봇 전부가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으니까.
플레이어가 키를 잡고 있던, 아니면 갑판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고 있던, 아니면 갑판 아래서 대포를 쏘고 있던, 어떤 포지션에 있더라도 그에 맞는 감각을 전달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전부 모아놓고 있지.
그리고 한정된 테스트로 모을 수 없는 부분은, 이미 모아놓은 데이터를 적용해서 시뮬레이션 하면 될 테고.
최종적으로는 PTW 본사에 돌아가서 민준이 네가 PRD 버전으로 게임을 플레이해보고, 실제 함선 조종과 얼마나 다른 느낌인지 최종 확인을 해주면 이번 테스트는 마무리될 거야.”
“쉽 비스킷과 육포로 점철된 이번 프로젝트도 이제 끝이란 소리군.”
그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해밀턴이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결과적으로 항해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각적인 부분만을 구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맛도 느껴지지 않는 PRD에서 굳이 쉽 비스킷과 육포 같은 항해식을 고집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
그러자 상혁은 그런 해밀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해 주었다.
“이번 항해 프로젝트는 단순히 물리적인 피드백 데이터의 수집뿐만이 아닌, 정신적인 데이터의 수집 목적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번 항해 기간 내내 저희는 함 내에 설치된 4만 개의 카메라를 통해, 항해에 참여한 직원들과 전문 선원들의 모든 행동을 관찰했죠.
보름 연속으로 같은 식단이 나왔을 때 오늘도 같은 점심이 나온 걸 보고 어떤 표정을 짓게 되는지.
더럽고 냄새나고 비좁은 함 내에서 오랜 시간 지내면서 어떤 종류의 스트레스를 받는지.
저희 직원들이 경험한 그 경험은, 게임 안의 NPC의 표정과 행동으로 게임 안에 반영되게 될 겁니다.
그것을 통해, 게이머들이 자신의 배에 탄 선원들을 단순한 NPC가 아닌 진짜 살아 숨 쉬는 인간처럼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하지만 게임은 게임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현실적으로 만든다고 해도 NPC를 사람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분명 어려운 일이긴 할 테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거죠.
영화 속의 캐릭터를 볼 때도 관객들은 그게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인 줄 알고 있어도 배우의 연기 실력에 따라서 진짜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몇 달째 면도하지 못해 덥수룩한 수염에 엉겨 붙은 소금 결정을 무심히 털어내는 NPC의 행동.
더운 햇살 속에서 자연스럽게 상의를 벗어젖히는 NPC의 행동.
그런 작은 행동들을 모아서, 진짜로 인간 같은 NPC를 만들 수 있다면, 현실과 가상의 차이는 딱히 의미가 없어지겠죠.
현실에서 선장이 선원들의 스트레스를 관리할 때 고려하는 것처럼, 게이머도 게임 안에서 NPC의 스트레스를 관리하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장거리 항해에서의 스트레스 관리는, 저희 게임에서의 또 다른 핵심 컨텐츠이기도 하고요.”
“스트레스 관리가요?”
“플레이어가 항해를 떠나면서 무조건 쉽 비스켓이나 육포 같은 보존식만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니죠.
말린 과일이나 와인, 조금 서늘한 곳에 보관해두면 한 달 정도 보관이 가능한 야채들도 보급품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가격이 비싸고 관리가 힘들지만, 선원들의 스트레스 관리에는 도움이 되겠죠.
이 게임에서, 선원들은 정말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선원은 항해 거리에 따라 필요한 보급품의 리스트를 정확하게 산출하기도 하고, 어떤 선원은 흥정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며, 어떤 선원은 지식이 풍부해 여러 퀘스트의 정보를 제공하고, 어떤 선원은 검술이 뛰어나 다른 선원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기도 하죠.
결국 이 게임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나만의 함대를 꾸리는 게임이 될 겁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고, 인연을 쌓아서 동료들을 모으며, 배를 타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임.
물론 그 꿈은 게이머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자신의 목표를 바꿀 때마다 전혀 다른 게임을 하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게임이 단순히 함선을 타고 모험을 즐기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 게임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죠. 저희가 베이스로 잡은 ‘대 범선 시대 2’도, 처음 고르는 캐릭터에 따라서 목적이 모두 달라지니까요
만약 해밀턴 씨가 세계 지도의 완성을 목표로 삼았다면, 가장 먼저 작은 유적부터 탐험하여 조금씩 명성을 높여야 할 겁니다.
그렇게 명성을 높이면서, 결과적으로는 유명한 가문의 후원을 잡아 커다란 모험을 기획하고 그에 맞는 크루를 모집하게 되죠.
그 계기는 어디선가 전해져오는 엘도라도에 대한 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술집에서 도박으로 딴 보물 지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무엇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잡히면, 그 계획을 후원할 후원자를 찾아 나서야 하죠.
큰 모험일수록 비용이 많이 드니, 예산을 빵빵하게 지원해줄 수 있는 가문을 찾아야 할 테니까요.
그렇게 모험가로서의 명성을 높이다 보면, 왕실의 후원을 받아 귀족 작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플레이어의 목적이 ‘해군’이 되는 거라면, 게임의 플레이 스타일과 요구되는 선원의 구성이 완전히 달라질 거고요.
원한다면 이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는 바다에서 죽은 선원들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데비 존스’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죠.
물론 엄청나게 많은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긴 하지만.
저희는 이 게임을 엄청나게 많은 섬과 퀘스트로 채워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퀘스트들이 다른 게임의 메인 퀘스트 수준의 볼륨을 가질 수 있도록 개발했죠.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희 게임은 항해 시스템만 빼면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번 테스트를 통해, 유일하게 부족하던 ‘탑승감’도 해결될 겁니다.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내 배’에 오르는 순간, 발끝에서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도 ‘감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요.
그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면, 이번 테스트를 위해 들어간 비용은 매우 싼 편이라고 봐야겠죠.”
그렇게 말한 상혁은 해밀턴을 향해 살짝 미소지었다.
“해밀턴 씨도 동의하시겠지만, 감동이란 건 어지간한 금액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잖아요?”
“어지간한 금액으로 살 수 없다는 이야기는, 어지간한 금액 이상을 내면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그러자 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사실 금액보다 중요한 건 개발자의 의지니까요.
사실 버는 돈의 크기로 따지자면 PTW는 세계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게임 회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희가 만드는 게임은 언제나 팬들의 마음속에 감동을 선사하죠.
그건 저희가 돈이 많건 적건, 게임을 만들 때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게임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12척의 범선을 박살 내면서 진행하는 이 테스트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말씀이겠네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상혁과 민준을 보며, 해밀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PTW라는 회사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테스트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 모든 것이 일종의 ‘돈지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PTW가 아니었다면, 그 어떤 회사도 이런 식으로 돈을 허공으로 날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마 대충 범선에 탄 느낌을 그럭저럭 구현만 해 놓아도, 게이머들은 재미있게 게임을 플레이하겠죠.
상혁 씨가 말한 게임의 스케일이 진짜로 그렇게 크고 방대하다면, 분명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GOTY정도는 휩쓸 수 있을 테고요.
하지만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PTW가 게임을 대하는 마인드가 다른 회사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상혁이 묻자 해밀턴이 답했다.
“제가 볼 때 여러분은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거죠.
단순히 재미가 목적이었다면, 그냥 ‘게임다운 게임’을 만들면 그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명백하게, 여러분은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려 하시는군요.”
“맞습니다. 저희의 목적은, 단순히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느낌입니다.
상혁 씨. 게임 회사인 PTW에서, 게임이 아닌 게임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대체 뭘 만들려고 하는 겁니까?”
해밀턴의 질문에 상혁이 내놓은 답은, 오래전 민준에게 상혁이 말했던 PTW의 ‘존재 의의’에 대한 대답이었다.
“저희가 만들고 있는 것.
그리고 만들려는 것.
굳이 그것에 대한 답을 내자면, 딱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뭐죠?”
“인생입니다.”
“인생이요?”
생각보다 무거운 단어에 해밀턴이 되묻자, 상혁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람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의 기준이 전부 다른 법이죠.
누군가는 직업에서의 성취를, 누군가는 가족의 완성을, 누군가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저희는 PTW가 만드는 게임이, 게이머들에게 그런 ‘목적’이 될 수 있는 게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희 게임을 하면서 자라온 게이머가, 언젠가 늙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PTW의 게임이 있었기에 자신의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고 말할 수 있는 게임.
PTW의 게임이 있었기에, 나는 궁중 암투에서 살고자 발악하는 왕녀도 될 수 있었고, 지구를 구하는 로봇들의 지휘관이 될 수도 있었으며, 이세계에서 환자를 구하는 의사도 될 수 있었고, 게임 동아리 최고의 인싸도 되어보았고, 은하를 가로지르는 우주 전함의 함장도 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진정으로, 해적선의 함장이 되어 소중한 선원들과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험’을 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흐믓한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게이머의 인생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게임.
저희는 게이머의 ‘인생’을 만들기 위해 게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상혁의 말을 들으며, 해밀턴은 문득 PTW의 팬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개발자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이 게임의 긍정적인 미래를 가로막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지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PRD의 보급률은 그리 높지 않은 편입니다.
작년 한 해 유럽과 일본에서 새 인터넷의 보급이 완료된 이후로, 테슬러에서 PRD의 생산을 위한 기가 펙토리를 3개나 확장하면서 보급률이 꽤 오르긴 했지만, 3천만 원짜리 ‘게임기’의 가격에 거부감을 가지는 게이머들이 아직 세상에 많으니까요.
아마 현재의 보급률을 생각한다면, 이 게임을 아무리 ‘갓겜’으로 만든다고 해도 판매량은 1000만 장도 찍기 어려울 겁니다.
그럼 무조건 적자를 보겠죠.
그 모든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상혁의 말을 들은 해밀턴이 이유를 묻자, 상혁이 답했다.
“애당초 저희 게임은 첫 작이 마지막인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게임은, 이전까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유일무이한 게임이 되겠죠.
그런 게임에, 발매 직후 판매량은 의미가 없습니다.
HC 101이 그랬던 것처럼, PRD를 사는 게이머들은 모두 이 게임을 구매하게 될 테니까요.
심지어 해적과 범선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게이머라도요.
해밀턴 씨. 이 게임은 말하자면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겁니다.
이 게임 안에는 단순히 대 범선 시대 2의 재미만이 들어있는 게 아니니까요.
유적을 뛰어다닐 때, 플레이어는 툼 라이더의 로로 크로프트가 됩니다.
범선을 몰 때는 캐러비안의 해적의 잭 스피로우 선장이 되고요.
배 위에서 칼을 휘두를 때는 검투사 막시무스가 될 겁니다.
개 썰매를 몰고 설원을 탐험하고, 탄압받는 노예를 해방하며, 왕국의 가장 위대한 모험가가 되고, 전세계를 주무르는 무역상이 되겠죠.
올드 스크롤, ‘하늘 림’이 발매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그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게이머가 그 안에서 ‘되고 싶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현대 게임의 존재의미이기도 하죠.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는 것.
그리고 이 게임은, 저희가 만든 수많은 게임 중에서도 그런 ‘자기완성 욕구’의 끝판왕이 될 겁니다.”
“엄청난 자신감이네요.”
“그게 자신감인지 확신인지는, 게임을 해 보면 알 수 있겠죠.
민준아?”
상혁의 말을 들은 민준은 다시 PRD를 향해 몸을 돌렸다.
게임 개발 과정의 한 부분임에도 전혀 게임 개발같이 보이지 않는, 이 기묘한 테스트의 마무리를 위해.
그 뒷모습을 보며 상혁이 말했다.
“해밀턴 씨. 마지막 테스트가 끝나면, 저희 직원들은 미군의 도움을 받아 범선의 잔해를 회수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저는 이곳 항모에서 민준과 함께 헬기를 타고 플로리다의 올랜도 국제공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갈 거고요.
그때 해밀턴 씨도 같이 가시죠.”
“한국으로요?”
“예. 저희가 이번 테스트를 통해 얻은 데이터가 적용된 ‘완벽한 해적 게임’이, 어떤 게임인지를 직접 체험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상혁의 제안은, 해밀턴의 가슴을 미친 듯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파이널 테스트를 시작한 범선에서 발사된 대포 소리보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