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416화 (417/485)

416. 범선의 이름

“배수량이 3천 톤급이라길래 그리 큰 배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크네요?”

1795년 설립된 독일 최대 조선소 마이어베르프트(Mayer Werft)에 있는 특수 도크.

외부에서 촬영할 수 없도록 도크 자체에 거대한 돔을 씌워놓은 이 도크에는, 21세기에 완성된 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전 스타일에 충실한 배 한 척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독일로 날아온 PTW의 직원들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느낌의 범선을 보며, 잔뜩 신난 표정으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앞에 놓여 있는 배는, 그들이 버츄얼 스튜디오에서 3D모델링을 이용해 만든 가상의 범선과 한치의 틀림없이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 처음 보는 건데 익숙한 느낌이네요.

저쪽 문을 열어서 왼쪽으로 꺾으면 주방이 있겠죠?

역시 그렇군.

그럼 저쪽은 화장실일 테고요.

역시 그렇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이 배의 기본 설계의 원형이 된 15세기 함선의 경우 화장실이 대변을 보는 순간 배출한 대변이 바다로 수직 낙하하도록 아래가 뚫려있는 개방적인 구조를 하고 있었지만, 지금 완성된 함선은 선원들이 배출한 대변을 모으는 설비가 따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변기를 구성하고 있는 목재도, 오염을 막기 위한 특수 코팅이 되어있었고.

그러니까 재질만 나무로 되어있었지, 기본 설계는 현대의 수세식 화장실과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방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일부 설비를 제외하면, 함선의 내 외부는 완벽하게 15세기 범선의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기에, 직원들은 그것을 보며 흥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오, 해먹! 여기서 단체로 누워서 자는 건가? 땀 냄새 진짜 장난 아니겠는데?”

“식량고 가 봤어요?

진짜 쉽 비스킷이 있어요!”

“진짜?! 소문대로 그렇게 단단해?”

“돌덩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마치 놀이기구에 들어온 어린아이들처럼, 엄청나게 행복한 표정으로 사방을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보며, 상혁은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문 채로 민준을 향해 말했다.

“즐브특흔드그. 슨증.”

그러자 민준이 씨익 웃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아직도 삐졌냐? 이번 항해에서 선장을 정하는 건 PTW 직원들의 인기투표로 정하기로 했잖아.

이제 그만 결과를 받아들이라고.”

“은 쁘즜그든?”

한국에서 독일로 출발하기 직전, 상혁은 직원들을 상대로 인기투표를 진행했다.

독일에서 인수한 범선을 몰고 목적지로 이동하는 루트에서, 누가 선장 역할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자신도 후보로 입후보 했다.

이런 대형 범선에서 ‘선장 놀이’를 할 찬스는, 결코 흔히 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이 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번 항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에, 상혁은 간절하게 선장 역할을 맡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혁의 간절함을 무시한 채, 프로젝트에 참여한 팀원들은 압도적으로 민준에게 몰표를 밀어주었고, 결국 선장 역할은 민준이 맡게 되었다.

‘당연히 내가 이길 줄 알았는데.’

상혁은 민준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어디서 구해왔는지 ‘캐러비안의 해적’의 주인공 ‘잭 스퍼로우’의 코스튬을 입은 채 눈을 반짝이고 있는 민준의 모습이 있었다.

상혁이 그리 쓰고 싶어서 했었던, 해적 선장의 모자까지 머리에 쓴 채.

민준은 마치 상혁을 약 올리듯 손가락을 기묘하게 꺾은 채 잭 스퍼로우 선장 같은 말투를 하며 상혁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녀석. 이기고 싶었으면 전 직원이 아니라 승선하는 직원들에게만 투표권을 줬어야지.”

“무슨 의미야?”

“이번 항해는 못 해도 4개월에서 6개월이 걸리는 일정이었으니까, 상혁이 네가 회사에서 맡은 일의 비중을 생각하면 네가 승선하는 걸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는 뜻이지.

경영팀도, 회계팀도, 법무팀도, 운영팀도, 심지어 이 프로젝트를 제외한 다른 프로젝트 팀원들은 전부 나한테 몰표를 줬잖아.

그건 내가 너보다 인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네가 회사에서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거지.”

“그럼 너는 자리를 비워도 되는 사람이고?”

“어차피 항해 내내 스타링크의 지원을 받아 인터넷을 사용하며 항해할 거니 굳이 버츄얼 스튜디어가 필요 없는 내가 작업하는 덴 무리가 없고, 프로그래밍 팀은 내가 아니어도 스컹크 웍스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상혁이 너는 다르지.

넌 한 달에 최소 두 번 이상은 해외 출장을 다녀야 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부르는 데가 많잖아.

테슬러 같은 회사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죄송하지만, 저희 책임자는 현재 15세기 해적선을 타고 바다를 누비는 중입니다.’라는 황당한 대답을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겠지.

물론, 키가 작은 너보다 내가 해적 선장 역할에 더 잘 어울린다는 점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긴 했겠지만.”

민준의 말대로, 상혁의 범선 탑승을 반대한 반대표 대부분은 이 프로젝트가 아닌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한 직원들이 낸 표였다.

그러나 자신의 설명에도 상혁이 여전히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민준은 상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기분을 달래주려 애썼다.

“뭐, 좋게 생각하자고.

어차피 저 범선은 겉으로 보기엔 15세기 목제 범선처럼 보여도, 내부는 온갖 센서로 도배되어있는 최신 IT 장비나 마찬가지니까.

안에서 뭔가의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기술자인 내가 탑승해 있는 게 대응이 더 빠르겠지.

게다가 필요하면 센서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도 바로 할 수 있을 것이고.”

상혁은 그제야 민준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민준이 입고 있는 옷의 장식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근데, 선장 역할을 맡기 위한 준비는 다 한 거야?”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현재 프로젝트에서 범선과 파도, 바람에 관련된 시뮬레이션 파트를 제작한 게 바로 나야.

적어도 돛을 어떻게 운용해야 배를 앞으로 전진시킬 수 있는지, 파도의 상태에 따라 범선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는 이론적으로는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이론과 실전은 다르지. 로켓을 설계한 사람이 직접 로켓에 타지는 않잖아.”

“그래서 작년에 여수 범선 축제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가해서 범선 운용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테스트했다고.

아마 잭 스퍼로우가 모는 블락 펄과 내가 모는 함선이 싸우면 내가 이길걸?”

“그건 모르지. 애당초 블락 펄은 가장 빠른 함선이지 가장 강한 함선은 아니니까.

대포도 32문 밖에 안 되잖아.

대포만 200문 넘게 달린 저 괴물과 블락 펄을 비교하다니 양심이 없구나?”

그러자 민준이 웃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투덜대는 것 보니 아직도 삐져있는 것 같군.

좋아. 그럼 이 배의 선장으로서 상혁 너에게 이 배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역할을 맡겨 주지.”

“어?! 진짜!?”

보통은 건조 과정에서 이름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PTW에서는 자신들이 수주한 이 배의 이름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민준이 그 역할을 자신에게 맡긴다고 말하자, 상혁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단, 이상한 이름이면 거절할 거야.”

“젠장! 민준세기(MINJUNSEKI)호가 대양을 누빌 완벽한 기회였는데!”

“너···. 진짜로 그 이름으로 지으려고 한 건 아니지?”

민준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상혁이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범선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마치 중세 선원이 된 기분으로 배 안으로 물자를 옮기고 있는 PTW 직원들의 모습이 있었다.

“다들 즐거워하는 것 같네.”

“원래 힘든 일도 놀이가 되면 즐거운 법이니까.

적어도 중세시대 선원들은 짐을 옮기면서 저렇게 행복해하지는 않았을걸?”

“그렇겠지. 이건 오로지 게이머의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배니까.

살기 위해 돛을 내리는 게 아니라 돛을 내리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돛을 내리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쉽 비스켓을 씹는 것이 아니라 해적의 기분을 느끼기 위해 쉽 비스켓을 씹는 항해가 되겠지.

그리고 그 안에서 겪는 모든 체험은, PRD를 통해 게이머들에게 완벽하게 전달될 테고.

배를 구성하는 목재 구조물이 파도의 압력을 받으면서 지르는 나무의 비명 소리.

해먹을 고정하는 끈으로부터 전달되는 흔들리는 배의 진동.

온도와 소리, 압력과 습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12만 개의 센서들이 배에 전해지는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취합해서 게임 안에 적용하게 될 거고.

게이머들은 자신의 집 거실에서 완벽하게 바다 위를 누비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겠지.”

그렇게 말한 상혁은 말없이 범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민준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이 배의 이름에 대해 말했다.

“트리거(Trigger). 이 배의 이름은 트리거로 하겠어.”

“트리거? 방아쇠를 말하는 거야?”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배는, 말하자면 PTW라는 회사가 게임이란 컨텐츠를 대하는 기본적인 철학을 상징하는 물건이지.

안 그래도 언제나 진지하게 게임을 만들던 우리지만, 이번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진지한 태도로 만들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런 물건.

대양 항해 게임을 만들기 위해 실제 크기의 범선까지 만드는 미친 짓을 실제로 시도하는 게임 회사가 여기에 있다고, 우린 이 배를 통해 게이머들에게 소리치는 거나 다름없어.

그리고 나는 그 진지함이, 앞으로의 게임 회사가 지향해야 할 이상향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러니 난 이 배의 이름을 트리거라고 짓겠어.

우리가 만드는 이번 게임이, 게임의 미래를 바꾸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배가, 우리 게임의 미래를 바꾸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트리거···. 트리거라···.”

민준이 상혁을 보며 말했다.

“좋은 이름이네. 마음에 든다.”

그렇게 PTW가 만든 최초의 대형 범선은, 방아쇠라는 의미를 가진 트리거(Trigger)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

배수량 3200톤.

230개의 대포와 3개의 마스트.

1200명 이상의 선원을 실을 수 있으며 보급 없이 8개월 이상 항해가 가능하도록 설계된 PTW의 무동력 범선 트리거(Trigger)에는, PTW에서 파견된 400명의 직원과 함께 범선 운영 경험이 풍부한 200명의 전문가가 탑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PTW의 직원들은 일부러 고난을 자처하며 중세 선원들이 겪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모두 체험하는 중이었다.

배 멀미.

물에 불리지 않으면 이빨조차 들어가지 않는 딱딱한 비스킷.

목제 통 안에서 쉽게 변질되어버리는 더러운 물.

소중한 민물을 위생 용도로 사용할 수는 없기에 바닷물을 떠서 목욕했고, 그로 인해 직원들의 피부는 제대로 닦지 못하고 남은 소금으로 인해 언제나 끈적거리고 기분 나쁜 촉감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표정은 절대 어둡지 않았다.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스트레스’는, 그들이 원해서 겪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흥분하며 이번 체험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중이었다.

나무 국자로 통에서 떠낸 물에서 이상한 맛이 나더라도.

“오, 이래서 배에서는 술을 먹는 거구나!”

음식으로 제공된 쉽 비스킷이 너무 단단해 드라이버를 대고 망치로 내려쳐야 쪼갤 수 있을 정도여도.

“그래도 햄이랑 같이 먹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한 것 같은데?

햄이 오지게 짜서 그렇지.”

갑판의 방수 처리를 위해 끈적대는 타르를 걸레로 칠할때도.

“오, 영화에서 봤던 바로 그 장면이야!”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15세기식 항해’를 마음껏 체험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교대할 타이밍이 되자마자 함선 내부에 있는 작은 주점에 모여 럼주를 마시며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실제 배를 타는 과정에서 그들이 체험할 수 있었던, 온갖 것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고증에 따라 고기가 상하지 않도록 염도 비율을 높인 건 좋은데, 반대로 너무 짜기 때문에 물의 소비량이 커지는 위험이 있네요.

건조를 통해 수분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부패를 막는 건, 습도가 엄청나게 높은 배의 특성상 그리 효과가 없을 듯하고요.

그러니 실제로는 염도가 높은 보존 식을 가지고 다니되, 먹을때는 어떻게든 염분을 제거하고 먹었을 겁니다.

선원들이 모두 물을 찾게 만드는 것 보다는, 고기에서 최대한 소금을 제거해서 제공하는 게 물의 소비가 적을 테니까요.”

“테스트를 통해 실었던 와인은 벌써 상했어요.

지금은 거의 식초같이 변했습니다.

아마도 산소가 침투해서 생긴 일 같은데, 나무통의 밀폐성이 좋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죠.

그런 부분을 감안 해서, 점포별로 나무통의 품질에 차등을 두는 건 어떨까요?”

“준비하는 보급의 종류에 따라 선원들이 받는 스트레스에 차등을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항구에서 비싼 가격을 주고 제대로 준비를 해 출항하는 것과 식량과 물이 떨어진 상태에서 섬을 뒤져 대충 보급을 하는 것에는 꽤 큰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항해를 하면서 어떤 물건이 필요하고 어떤 물건이 얼마나 오래가는지는, 실제 항해 쌓인 경험이 필요한 법이죠.

게이머가 실제로 항해를 반복하면서 그런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컨텐츠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와인은 오래가지 않으니 도수가 높은 럼을 준비해간다던가, 오래 간다는 이유로 쉽 비스켓만 잔뜩 싣고 항해하다가는 선원들의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도록.”

“씻는 것도 꽤 스트레스인데 이건 해결 방법이 없나?”

“그나마 갑판에 있을 때는 바다 풍경도 좋고 바람도 시원해서 스트레스를 덜 받는 편이에요.

실내는 냄새가 심해서 잠자는 용도 외에는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고요.”

민준은 그들이 모아 제출한 회의록을 매일같이 상혁에게 인터넷으로 전송했고, 그와 동시에 함선에 장착되어있는 2만 개가 넘는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과 12만 개의 센서로 수집된 데이터도 함께 전송했다.

그리고 상혁은,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그 데이터를 받아 리얼 엔진에 적용하여, 가상의 함선에 적용된 데이터를 현실의 범선의 그것으로 계속 바꾸어나갔다.

좀더 현실적으로 배가 흔들리는 느낌을 전달할 수 있도록.

키를 잡고 돌릴 때 느껴지는 압력이 현실의 범선과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그 과정을 반복할수록, 게임 속 범선의 탑승감은 조금씩 현실의 그것과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3개월 정도가 지났을 즈음엔 버츄얼 스튜디오에서 움직이는 범선의 느낌이 현실의 그것을 거의 비슷하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따로 상기하지 않으면, 진짜로 범선을 몰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상혁은 스튜디오에 있는 가상의 범선에 달린 키를 시계방향으로 힘차게 회전시켰다.

그러자 소름 끼칠 정도로 현실적인 소리와 함께, 가상의 목재 구조물이 복잡하게 움직이며 배에 달린 키의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키에 전달되고 있는, 파도의 압력을 상혁의 손끝에 정확하게 전달하면서.

그것은 자동차의 핸들을 꺾는 것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쾌감을 상혁에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카리브 해의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민준 역시 상혁과 마찬가지로 키를 잡은 채 배를 몰고 있었다.

상혁이 느끼고 있는 것과 한치도 틀리지 않은, 똑같은 감각을 손으로 느끼며.

민준은 선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전속 전진! 돛을 전부 내려라!”

“Aye aye, captain!”

“돛을 내려라!”

“풀 세일(Full Sail)!”

“전원 위치로! 빠르게 움직여!”

3개월의 원양 항해는 원래 게임 개발자였던 직원들을 범선의 선원으로 완벽하게 환골탈태시켰고, 15세기 복장을 입은 선원들을 민준의 지시에 따라 갑판을 뛰어다니며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그런 선원들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짜 선장이 된 기분을 가슴 가득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민준의 기분은, 상혁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풀 세일(Full Sail)!”

“Aye aye, captain!”

“프로퍼 코스(proper course: 중간에 장애물이 없으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설정하는 임의의 코스)로!”

“캠을 풀어!”

“우물쭈물 하지 마! 빠르게 움직여!”

“머저리 같은 초보자식! 넌 여기가 아니라 저쪽 밧줄이다!”

상혁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하는 수많은 AI NPC들.

그들의 움직임은 민준의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실제 선원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닮은 모션만을 취하는 것이 아닌, 줄을 당길 때 힘이 들어가는 근육의 모양과 들어간 힘에 따라 선원들이 짓는 표정의 변화까지.

그것은 가상임에도 완벽하게 현실 그 자체의 느낌을 100% 전달해주고 있었다.

민준에게 밀려 배에 타지 못했던 상혁의 아쉬움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상혁은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돛이 펼쳐지는 순간, 강하게 흔들리는 배의 움직임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람 좋고.’

수많은 부자들이 떼돈을 벌면 꼭 사는 물건중의 하나가 바로 요트이다.

딱히 물욕이 있지 않은 상혁은 요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요트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모는 배를 바람에 태워, 시원하게 뚫린 바다를 가르는 느낌은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PRS의 쿨링 유닛을 통해 구현된 피부를 스치는 기분 좋은 바닷바람.

왼쪽 어깨 위를 따스하게 덥히고 있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빛나고 있는 가상의 햇살.

냄새마저 느껴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상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게임의 항해 시스템은, 이제 완성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혁의 생각일 뿐이었다.

지금 구현된 감각이 100% 현실적으로 구현된 느낌인지는, 카리브해에서 트리거를 몰고 있는 민준이 돌아와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현재의 가상항해가 주는 느낌에 100% 만족하고 있지만, 실제 범선을 몰고 바다를 누볐던 민준의 생각은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상혁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상혁은, 그 오차가 그리 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피부를 통해 전달되는 감각은, 민준이 입고 있는 ‘개발용 PRS’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였으니까.

민준의 전신에 있는 수만 개의 정교한 센서들이 민준의 몸에 가해지는 모든 데이터를 수집해 PTW본사로 전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감각을, 상혁의 PRS가 그대로 구현하고 있었고.

그러니 지금 상혁이 느끼는 감각은, 민준이 느끼는 감각과 거의 같은 감각이라 할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르는 배의 갑판 위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저항도, 민준이 잡은 방향타에서 느껴지는 손바닥의 압력도.

거기에 냄새까지.

코끝에 느껴지는 청량한 바다 냄새를 맡으며.

사실 이 부분은 조금 의외인 부분이었는데, 상혁이 기대하던 냄새는 조금 더 비릿한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상혁은 PRD에 내장된 디퓨저로 민준이 보낸 냄새 데이터가 재현되자마자 민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이게 진짜 바다 냄새가 맞냐고.

그러자 민준은 그런 상혁을 놀리며 이렇게 답했다.

-바닷가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냄새는 미생물이 만드는 거야.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넓은 바다로 가면, 그 냄새는 거의 안 나.

오히려 청량한 느낌이 나지.-

“아니, 그렇다고 막 청량한 느낌은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 시큼한 냄새도 좀 섞인 것 같은···.”

-아, 그건 아마도 내 땀 냄새.-

“이런 X친.”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선원들하고 똑같이 바닷물로 씻는 중인걸.

게다가 미리 실어놓은 민물은 통속에서 죄다 썩어버렸다고.

그거 가지고 씻으면 오히려 냄새가 더 날걸?

난 이미 익숙해져서 솔직히 모르겠는데, 많이 역하냐?-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닌데.

바다 냄새에 묻혀서 거의 안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군.-

“아무튼, 이게 진짜 대양 항해를 할 때의 냄새 데이터가 맞다는 거지?”

-못 믿겠냐?-

“장거리 항해를 안 해봤으니 알 리가 있나. 내가 아는 냄새는 조선소에서 맡았던 항구 냄새 정도라고.”

-너 대서양에서 범선 몰아봤어?-

“···아니.”

-안 몰아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

“젠장. 너, 돌아오면 두고 보자.”

상혁의 반협박성 발언을 들은 민준은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상혁의 협박을 되받아쳤다.

거기엔 상혁을 기겁하게 만드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난 지금 은퇴하고 남은 평생 범선이나 타고 다닐까 심각하게 고민 중인데?-

“죄송합니다. 민준.

아니 민준느님.

제발 빨리 돌아와 주세요.

PTW에는 당신이 필요해요.”

순식간에 180도로 태도를 바꾼 상혁의 말을 들으며, 민준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오랜 친우를 향해 말했다.

-상혁아.-

“어?”

-데이터 적용된 이후에 탑승한 범선의 느낌은 어때?-

“아주 좋아.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왜 부자들이 돈만 벌리면 요트부터 사는지 이해가 될 정도야.

가상 데이터로 전달되는 느낌이 이 정도라면, 실제 민준이 네가 경험하고 있는 감각은 훨씬 멋지겠지.

부러워서 미칠 것 같다.”

-그럼 그게 맞는 데이터일 거다.

나도 범선을 몰면서 그런 기분을 자주 느끼니까.

특히 바람 좋은 날에 돛을 전부 피고 달리는 느낌은 웬만한 게임이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즐겁지.

그러니 슬슬 다음 페이즈로 가도 될 것 같아.

물론 내가 직접 PTW 본사에 돌아가면 PRD로 최종 확인을 해야겠지만, 아마도 지금의 데이터가 거의 최종 데이터에 가까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상혁이 네 말을 들어보면, 운항 시스템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상태라고 판단해도 되겠지.-

“그럼 그 말은···.”

-맞아.-

딥 다이버를 착용한 상혁의 귀에, 민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함대전의 데이터를 쌓을 시간이라는 거지.-

지구 반 바퀴를 넘어 상혁에게 들려온 민준의 선언.

거기엔 실제 크기의 범선을 이용해 게이머에게 ‘완벽한 바다의 느낌’을 전달하려는 PTW의 계획이, 이제 다음 페이즈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는 민준의 판단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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