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개발의 마감시간
[앞서 말씀드린 이유로, 정부에서는 기존의 인터넷 규제 정책의 방향을 선회하여 이용자 감시를 통한 일방적인 규제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범죄 추적 시스템을 중심으로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수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 나갈 계획입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 내용은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였다.
PTW의 ‘새 인터넷’ 뿐만이 아닌, 나머지 통신사에 적용되었던 패킷 감시형 규제를 일괄 철폐하고, 해외에서 한국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불법 사이트 운영자들에 대한 추적을 대폭 강화하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것.
그러나 20분 가까이 진행된 발표의 어느 부분에도, PTW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지 않았기에, 기자들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정책 변경 직전에, PTW가 정부를 상대로 특허 소송을 건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정보였기 때문에.
“만국 일보 기자 박정식입니다.
정부의 이번 인터넷 규제 정책 철회는, PTW가 정부에 제기한 특허 소송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에서는 처음부터 현재의 인터넷 규제 알고리즘이 VPN을 통해 쉽사리 뚫린다는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해결책을 꾸준히 찾는 중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이트의 접속을 막는다 하더라도, 해당 불법 사이트를 운영하는 범죄자를 검거하지 않으면 사이트는 주소를 바꿔서 또 새로 오픈되곤 하죠.
그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대한민국 국민을 타깃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각종 불법 사이트 운영자들을 검거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인터넷 문화를 만드는데 더욱 도움이 될 방향이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번 발표가 있기 바로 직전 PTW에서 소송을 취하한다는 발표가 있었는데요.
두 발표의 타이밍이 우연의 일치로 겹친다는 건 좀 억지스러운 주장이 아니겠습니까?”
“아뇨. 기자님께서는 지금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번 규제 완화가 PTW의 ‘소송철회’와 관련이 없다고 말했을 뿐, 이번 안건이 PTW라는 회사와 관련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당사자에게 설명을 듣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지금부터는 PTW의 CCO, 이상혁씨가 이번 인터넷 규제 완화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실 겁니다.”
“이상혁이?”
“청와대에 왜?”
정부의 발표에 기업 임원이 참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케이스였기 때문에, 기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패널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혁이 단상으로 걸어 나와 대변인과 자리를 교대했다.
그렇게 단상에 선 상혁은 마치 억지로 끌려 나오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부에서 양보를 한 만큼 이번엔 PTW에서도 대한민국 정부를 한번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무려 대통령에게 다이렉트로 걸려온 전화로 특별히 부탁받아 나온 기자회견장에서, 상혁은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19대 대통령 이상식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반갑습니다. PTW의 CCO 이상혁입니다.”
그러자 기자들이 미친 듯이 손을 들어 상혁에게 질문을 하려 했지만, 상혁은 손을 들어 기자들의 질문을 막았다.
“질문은 설명 이후에 따로 받겠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불려온 것은, 질의응답을 위한 것이 아닌 대한민국의 새 인터넷 규제 정책에 대한 설명을 위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질문이 있더라도 잠시 손을 내리고 설명을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소란이 가라앉자 상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가장 심각하게 오해받고 있는 사항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죠.
조금 전 청와대 대변인께서 밝히신 것처럼, 이번 정부의 규제 완화는 PTW의 소송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니 헤드라인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PTW에 백기를 들었다’던가, ‘PTW가 정부를 협박했다.’ 같은 제목은 사용하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그 반대니까요.”
그렇게 시작된 상혁의 설명은, 개인의 자유라는 소중한 권리와 국민의 보호라는 정부의 책임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인터넷이란 강력한 매체를 다뤄나갈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는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되, 심각한 수준의 범죄에 대해서는 이용자가 아닌 범죄자를 추적하여 응징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계획이었다.
“우선 가장 먼저, 현재 타 통신사의 기존 인터넷에 적용된 DNS Spoofing 기반 인터넷 검열 기능은 한 달 안에 모두 철회될 겁니다.
그 말은, HTTPS 기반 사이트에서 이제는 접속 불가 메시지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접속 불가 상태였던 많은 해외사이트에 VPN 없이 접속할 수 있게 될 것이며, 통신사는 이제는 여러분이 인터넷에서 보내는 패킷을 감시하지 않게 됩니다.
대신 인터넷을 사용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PTW에서는 새로 신설될 인터넷 범죄 추적팀에 기술적 지원을 할 예정입니다.
대상은 해외에서 해외 유저를 대상으로 서비스되는 사이트가 아닌,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으면서 한국의 유저들을 타깃으로 하는 불법 사이트들입니다.
이를 통해, 사설 토토나 리벤지 포르노, 아동 포르노 배포 등의 다양한 인터넷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을 국가에서 추적하여 체포할 수 있는 기술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게 될 겁니다.”
짧게 설명을 마친 상혁이 기자들에게 물었다.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질문할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질문받겠습니다.”
그 순간 무수한 질문 요청이 상혁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 해외 유저들을 대상으로 한 해외사이트에 대해서는 접속 금지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거기엔 해외의 성인 비디오 사이트들도 포함됩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대한민국 법을 어기는 게 아닙니까?”
“우선 그 부분에 관해 설명해 드리자면, 먼저 PTW에서는 대한민국의 인터넷 규제를 반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저희의 새 인터넷에 적용된 암호화 기술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현실적으로 정부에서 요구하는 인터넷 규제를 따를 수 없을 뿐이죠.
그 어떤 법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통신사의 규제도 한번에 해제되지 않습니까?
그 말은 다른 통신사는 충분히 규제가 가능한 보안 레벨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 규제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알고리즘은, 저희 PTW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법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어떤 법도 개인이 가진 특허의 권한을 억지로 다른 이가 뺏어서 사용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결국, 기존 통신사로서는 정부의 규제를 따르면 PTW의 특허를 침해해야 하고, 특허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인터넷 규제 법안을 어겨야 하는데, 어느 법이 우선인지는 참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죠.
그렇기에 저희는 각 통신사에 ‘PTW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 새로운 검열 방식’을 별도로 개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각 통신사에서는 그 요청에 응해 새로운 검열 방식의 개발에 들어갔고요.
그 말은 각 통신사가 법안의 준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PTW도 마찬가지로, 저희의 보안 수준을 낮추지 않는 적절한 검열 방식을 개발중에 있습니다.
그 모든 개발이 끝나면, 그때는 모든 통신사가 대한민국의 통신법에 따른 적당한 규제 방법을 적용하게 되겠죠.”
“그냥 PTW에서 타 통신사에 특허 사용 권한을 허용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요?”
“무슨 권한으로 저희가 가진 특허를 왜 다른 통신사에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겁니까?
특허는 출원자가 가진 고유의 자산입니다.
자유 시장 경제 사회에서, 법으로 개인이 가진 자산의 용도를 멋대로 지정할 순 없죠.
애당초 저희가 DNS Spoofing 기반 인터넷 검열 방식의 특허를 출원한 것은, 그것이 일종의 해킹에 가까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보안에 문제가 있는 방식이기 때문에 남들이 악용하지 못하도록 미리 출원해서 막아 둔 거죠.
개인의 패킷을 일일이 까서 대조하는 방식의 검열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의 검열이라면 저희도 환영하겠습니다.
만약, 그런게 가능하다면 말이죠.”
질의응답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그 압도적인 지지도를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려는 지에 관해 묻는 질문부터, 상혁 개인의 특정 정당에 관한 지지 성향을 묻는 질문까지.
상혁은 그 모든 의혹을 부정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전 그냥 게임 만드는 개발자일 뿐입니다.
게이머들이 편하고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게임을 즐길 수만 있다면, 전 그 정당이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노란색이든 녹색이든 민트초코색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게이머들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거나,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려는 개발자의 의지를 꺾는 정부가 들어선다면, PTW는 그 어떤 정책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싸울 생각입니다.”
“그 말은 결국 이번 규제 완화도 PTW에서 싸워서 얻어낸 거란 말 아닙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씀드렸지만 이번 사태에서 저희가 바라는 것은 규제 완화가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개인의 인터넷 패킷을 전부 까서 감시하는 현재의 검열 방식을 반대했을 뿐이죠.
그리고 지금도,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그런 저희의 우려를 깊이 있게 고민하여 방법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사용자가 아닌 공급자를 추적는 방식이고요.
저희 PTW는 그런 정부의 변화된 방향성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를 위한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늘 상혁이 단상에 선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정부가 PTW에 굴복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정부의 협상안을 PTW가 받아들인 모양을 연출해달라는 것.
상혁은 그런 정부의 요청에 충실히 응해 정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바람직한 기업인’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물론 그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러나 오늘의 기자회견을 통해 어찌 되었건 PTW는 ‘공식적인 입장’으로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인 기자 중에 PTW의 공식 입장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무슨 의견을 제시하든 빠져나갈 구멍은 확실하게 준비해놓았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날의 청와대 발표는 기자들이 기대하던 PTW와 대한민국 정부 간의 전면전 대신, PTW가 정부에 협력하여 새로운 인터넷 보호 방법을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한민국 네티즌들에게 X허브를 되돌려준 PTW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침묵에 들어갔다.
인터넷 규제 철폐에 대한 수많은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한 채.
다시 본격적인 게임 개발에 돌입하기 위해.
PTW에게 있어서, 지금은 ‘규제’ 따위보다 더 중요한 개발 이슈가 수없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회사라면 목숨을 걸만한 ‘정부의 규제’ 따위는, 대단할 것도 없는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
게이머들에게 있어서, PTW는 ‘원하는 것만 보여주는 회사’로 유명했다.
내부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지, 심지어 그 수많은 천하대 아르바이트생들을 손발처럼 쓰면서도 개발 중인 게임에 대해서는 철저히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PTW에서 천하대 학생들에게 일반적인 대학생의 시급보다 훨씬 높은 시급에 더해, 월급의 30% 이상에 해당하는 높은 비밀 유지 비용을 보너스 개념으로 지급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듯이, PTW에서는 시급 외에 별도의 비밀 유지 비용을 지불하는 대가로, 거의 천문학적인 수준의 정보 유출 위약금을 계약서에 명시해두고 있었다.
개발 중인 게임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새 나가는 순간, 죽을 때까지 일해도 평생 갚지 못할 위약금에 짓눌릴 정도의 위약금을.
그러나 천하의 PTW도 해외에서 진행되는 작업의 보안까지 그 수준으로 지킬 수는 없었기에, PTW에서도 가끔씩은 개발 중인 게임의 정보가 간간이 풀리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은 일반적으로는 핵심 정보라고 할 수 없는 부실하고 단편적인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작업이고, 꼭 숨겨야 하는 작업이라면 그런 작업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풀린 정보는, 듣는 팬들의 가슴을 매우 두근거리게 하는 핵심 정보라 할 수 있었다.
‘PTW가 중세시대 풍 범선을, 그것도 여러 척을 만들고 있다.’
어느 새부턴가 커뮤니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루머는,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PTW팬들에 의해 샅샅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작업을 진행 중인 조선소의 옆 도크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의 증언을 통해, 때로는 내부 장식의 조각을 맡은 조각가의 제자의 입을 통해.
흩어진 정보가 하나둘씩 모여 루머가 되고, 루머가 모여 가설이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가설은 교차 검증을 통해 확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정보의 교환 속에서, PTW의 팬들이 알아낸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무슨 게임을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현재 PTW에서는 7척 이상의 범선을 동시에 제작 중.
▶그중 가장 큰 범선은 배수량 3천 톤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목조 범선 기준으로는 상당한 크기이다.
(1500년대 핸리 8세의 기함 메리 로즈의 배수량은 700톤이며 400명이 탑승할 수 있었다.)
▶현재 NGC 채널 촬영팀이 범선 제작 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
▶ 배의 크기가 다양한데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는 범선을 건조하는 것으로 보아 차기작은 중세 함선이 등장하는 체감형 게임일 가능성이 크다.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은 지금 만들고 있는 범선이 다음 NE 컨벤션을 위한 세트 설비라는 가설.
PTW에서는 이전에도 오프라인 NE 컨벤션을 위해 미군 기지를 통째로 재현하거나 MYOM의 마탑 내부를 놀이공원 수준의 어트렉션으로 재현하는 등 이벤트 무대 제작에 매우 공들이는 회사였으니 다음 NE 컨벤션은 VR이 아닌 오프라인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대포도 만들고 있다 함.
▶중세 항해사에 조예가 깊은 교수가 천하대의 지인으로부터 자문 요청을 받았다고 함.
요청받은 내용은 쉽 비스킷과 장기 항해에서의 보존식에 관한 정보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까지 범선이 나오는 게임은 수없이 많이 있었다.
전설의 명작 ‘대범선 시대’ 시리즈부터, 영화를 원작으로 한 ‘캐러비안의 해적’이나, 만화를 워작으로 한 ‘원티스’도 있었고, ‘씨 오브 시브즈’같이 범선을 타고 싸우는 해상전투를 다루는 게임이나 ‘레이븐즈 크라이’같은 액션 RPG.
심지어 ‘암살자 크리드 : 검은 깃발’처럼 해상전을 핵심 컨텐츠로 하는 게임도 있었다.
해적을 소재나 배경으로 잡은 게임만 수십 개가 넘고, 범선이 나오는 게임도 비슷할 정도로 많은 상황에서, PTW의 팬들은 열정적으로 토론을 하고 있었다.
분명 PTW가 만드는 게임이니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은데, 그 ‘특별함’이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범선을 만들고 있다.’라는 사실만 가지고는 유추하기 어려운, 개발 내용을 봐야만 알 수 있는 핵심 정보였다.
뭘 만들고 있는지는 알 것 같은데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자연스럽게 ‘이럴 것이다.’가 아닌,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느낌으로 진행되었고, 팬들은 자신들이 각각 ‘범선’ ‘항해’ ‘해적’ ‘무역’ ‘중세’ 에 가지고 있는 온갖 로망을 게시판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역시 PRD로 즐기는 대항해시대 같은 느낌의 게임이 가장 좋을 듯.
실제로 범선을 만들고 있다니, 진짜 범선에 타고 바다를 누비는 느낌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만드는 게 분명하다.]
↳ 그건 NE 컨벤션용 세트라니까?
그리고 대항해시대는 컴퓨터로 할 때도 장거리 항해할 때는 아주 지루한 게임이었음.
진짜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서 하염없이 이동만 해야 하는데, 그걸 VR로 만들면 엄청 지겨울 듯.
↳ 선원들하고 커뮤니케이션하게 해주지 않을까?
심리 상태 같은 거 관리하고, 갑판 청소도 좀 시키고, 찢어진 돛도 좀 꿰매라고 시키고.
↳ 난 좀 라이트하고 만화다운 느낌으로 ‘원티스’같은 느낌으로 갔으면 좋겠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동료를 구하고, 다른 해적을 물리치면서 해적왕이 된다던가.
↳ 어차피 판타지로 갈 거면 캐러비안의 해적이 더 낫지.
우연히 도착한 섬에서 식인종에게 쫓겨 도망 다닌다던가, 데비 존스의 심장을 찾아서 보물 지도를 해석한다던가.
↳ 아니면 진짜로 범선은 NE컨벤션 용 세트고 만들고 있는 게임은 전혀 다른 게임일 수도 있지.
범선은 그냥 서브 콘텐츠고 전혀 다른 게임을 개발 중이라던가?
VR 스튜디오에서 홀로그램 스크린으로 게시판을 훑어보던 상혁은, 마치 항해에 대한 게이머들의 망상을 모두 모아놓은 듯한 게시글들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든 욕망의 파편들이, 저마다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유저들이, 자신의 생각이 맞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PTW에서 그 모든 것을 한번에 구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유저들의 글을 보며, 상혁은 조용히 시선을 위로 행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영화 스튜디오를 연상하게 하는 거대한 가상 공간에서, 단체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작업자들의 모습을.
그런 작업자들의 머리 위에는, 크기가 수백 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모험활극(冒險活劇)]
상혁이 이 게임의 지향점으로 삼은 단어가, 거대한 현수막에 적힌 채로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현수막 아래에서는, 수백 명의 개발자가 바로 ‘그 단어’를 게임으로 구현하기 위해 미친 듯이 작업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상혁은 가장 먼저 눈에 띈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3명의 작업자가 방금 해적영화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한 나무 교수대를 작업 중이었다.
“Ahoy! 마스터 요다님! 방금 오셨습니까!?”
“Ahoy! 넵. 방금 들어왔습니다. 작업은 잘 진행되어갑니까?”
“작업‘은’ 잘 진행되죠. 무시무시한 속도로 작업 중입니다.
문제는 그 무시무시한 속도로 작업 중인데도 작업이 끝이 안 보인다는 게 문제죠.”
“뭐, 그건 게임 방향성 잡을 때 이미 각오한 부분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지금까지 세상엔 범선과 항해, 해적을 소재로 한 정말 많은 게임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많은 게임 중에서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게임은 손에 꼽게 적죠.
사람마다 범선을 보면서 생각하는데 다 다르니까요.
어떤 사람은 원티스 같은 재미를 얻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대범선 시대 같은 재미를, 어떤 사람은 캐러비안의 해적 같은 재미를 얻고 싶어서 하죠.
세상에 둘도 없는 완벽한 해적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만족하게 해줘야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제가 이 게임은 어떤 게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죠?”
“바다에선 대범선 시대, 해상전 에서는 캐러비안의 해적, 항구에서 해군에게 쫓길 때는 언처티드, 유적에서는 툼라이더가 되는 게임이요.”
“토시하나 안 틀리고 다 외우고 계시네요.
자, 그 높은 벽을 위해서, 우린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저쪽을 보세요.
저쪽에서는 지금 아예 용궁을 만들고 있다고요.
나중에 우리 게임을 하는 유저들은 바닷속에 있는 용궁에서 세이렌이 던지는 삼지창을 피하며 이렇게 생각하겠죠.
‘미친, 무슨 게임에 용궁이 있어!?’
이 게임에 도저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요소를 넣어서 게이머를 놀라게 하는 경험은,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는 즐거운 경험이죠.”
“저것도 그래서 넣는 건가요?”
개발자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거대한 럭비공처럼 생긴 나무로 된 공중 전함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작은 곤충처럼 비공정 주변을 날아다니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작업자들과 함께.
상혁은 그것을 보며 씩 웃어 보였다.
“그렇죠. 얼마나 놀라겠어요?
목조 범선을 타고 돌아다니는 시대에, 유적 안에서 날아다니는 비행 전함을 발견한다면.
설마 이 게임에서 유적의 보상이 공중 전함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겠죠.”
상혁이 말했다.
“인간이 지금까지 상상해낸 거의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세계.
미신과 설화가 아닌, 진짜로 늑대인간을 사냥하고 흡혈귀와 만나며 저주받은 해적과 술 한잔 꺾으며 놀 수 있는 세계.
내가 가려는 곳에 무엇이 존재할지 절대로 예측이 가지 않는 세계.
어릴 적 숲 근처를 지나다 덤불 사이로 뚫린 작은 통로를 발견하면, 그 구멍 안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어요.
혹시 요정이 다니는 길은 아닐까.
아니면 저 너머에 무언가 보물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온갖 풀씨가 옷에 달라붙는 것을 참으며 통로 안으로 기어들어 가면,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대부분 징그럽거나 썩어있는 아무 쓸모 없는 것들뿐이었죠.
하지만 저는 거기에 모험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지 않은 곳.
어린 시절의 우리는 통로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망상하고, 희망하고, 상상합니다.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아니면 기대는 하고 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모르는.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법한 그런 마법 같은 일들이 통로 너머에서 일어나길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그런 감각은 크면서 사라져가죠.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을 보고 모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요.
어른인 저는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 숲에서 발견했던 그 작은 통로는, 너구리 같은 작은 동물이 지나갈 길을 확보하기 위해 뚫어놓은 통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너머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벌레들과 썩은 낙엽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세상은 알면 알수록 재미없는 일만 가득하죠.
저는 이 게임을 하는 유저들이 어린 시절의 그 느낌을 받았으면 합니다.
항해를 위해 배에 럼주와 쉽 비스켓을 실으면서,
‘Ahoy! 돛을 올려라!’
라고 외칠 때 속으로 생각하는 거죠.
’이번 항해에서는, 또 얼마나 멋진 모험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게임은, 바로 그런 ‘모험’이 가능한 세계니까요.”
상혁의 말을 들은 개발자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흔들며 상혁에게 말했다.
“말 그대로 ‘모험활극’이군요.”
상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개발자가 말했다.
“좋네요. 듣기만 해도 행복한 느낌이 듭니다.
진짜로 그런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건, 게이머들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축복 같은 일이 되겠죠.
새삼스레 말씀드리는 거지만, PTW에 입사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엥? 그건 뜬금없이 왜요?”
“전에 있던 회사도 게임회사였지만, 거기서는 승진이나 인사평가, 아니면 발매 후 보너스, 누군가의 인정을 위해서 게임을 만들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기분입니다.
오직 게임을 할 사람이 느낄 기분만 생각하며 게임을 만들고 있으니까요.
물론 작업량이 너무 많아서 가끔 힘들 때도 있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찾아오셔서 강제로 의욕을 불태워주시니, 즐겁지 않으려고 해도 즐겁지 않을 수가 없네요.
토디씨가 PTW에 대해 한 평가가 딱 맞는 것 같습니다.”
“토디 씨면 해저 괴수 전담 작업팀의 토디 제프먼 씨요?
그분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다른 게임회사는 성과로 사람을 피 말리게 하고, PTW는 로망으로 사람을 피 말리게 만든다고요.
몸은 힘들어도 의욕이 계속 불타올라서, 힘들어도 손이 계속 움직이는 회사니까요.
지금도 다들 쓰러지기 직전까지 작업을 붙잡다가 PRD 안에 매달린 채로 잠들곤 하죠.
그리고 좀비처럼 일어나서 또 작업하고요.
요즘은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은 기분일 때도 있습니다.
아, 일 많다고 투정하는 건 아니고, 죽을 정도로 피곤해도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즐거운 회사라는 겁니다.”
“그래도 과로사는 안 됩니다.
PTW에서는 버츄얼 스튜디오에 접속 중인 작업자의 바이탈 사인도 체크하고 있으니까, 경고 메시지 받으면 무조건 작업 중지하고 쉬세요.
그러다 PTW를 직원들 혹사해서 과로사시킨 회사로 만드시면 매우 곤란해집니다.”
“과로사가 맞긴 한데, 그냥 과로사라고 부르기엔 좀 그렇죠.
적어도 하고 싶은 걸 하다 죽은 거니, 그건 행복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짜로 무서워지려고 하니까 좀 쉬세요.
PRD에서 수면 모드 써서 주무시지 말고, 가끔은 와이어에서 떨어져서 편안한 파자마라도 입고 집 침대에서 주무시란 말입니다.
지금 만드는 게임의 스케일이 얼마나 큰지 저도 잘 알고 있고, 저희가 채워야 하는 캔버스가 얼마나 넓은지도 잘 알고 있어요.
게임 개발은 마라톤 같은 과정입니다.
절대 조바심을 가지지 마세요.
적어도 일정 가지고 재촉하는 사람은 여기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마감 일정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기세로 보면, 아마 마감을 안정하면 진짜 끝없이 개발할 것 같은 기세인데요?”
“마감이야 있죠.”
상혁이 웃으며 말하자, 개발자가 물었다.
혹시 마감일을 알려줄 수 있으면 알려달라고.
그러자 상혁은 미소지으며 손을 휘둘러 관리자 창을 호출하더니, 그 개발자의 PRD 접속을 강제로 해제시켰다.
12시간 이전에는, 다시 리얼 엔진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현실로 튕겨 나온 작업자의 귓가엔, 상혁이 접속 종료 직전 해준 말이 마치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
“개발자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하는 순간.
이번 게임의 개발 마감 시간은 바로 그때까지입니다.”
그것은 이번 프로젝트에 있어서, 어떠한 ‘부족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상혁의 굳은 의지가 담겨있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