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 소송 예고
현재 PTW에서 메인 타이틀로 밀어붙이고 있는 타이틀은 캐릭터 수집형 메카닉 게임이었지만, 매 NE 컨벤션마다 여러 개의 게임을 한번에 발표하는 PTW 특성상 회사 내부에서는 나머지 프로젝트도 동시에 진행되는 중이었다.
고에이의 인기 타이틀인 ‘대 범선 시대’의 PRD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중세 판타지 배경의 해양 어드벤쳐 게임인 ‘무한의 바다’와, 플레이어가 마법 소녀의 변신 도구가 되어 마법 소녀를 발굴하고 육성시키는 RPG 게임 ‘매지컬 체인지’.
상혁은 메인 프로젝트인 ‘나이트 프로젝트’의 전투 시스템 기획을 진행하는 동시에, 나머지 두 게임의 개발에 대한 관리와 지원도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게임 모두, 일반적인 게임 개발 과정과는 거리가 먼 독특한 과정을 통해 개발되는 중이었고.
그중에서도 상혁을 당황하게 만든 요청은, ‘무한의 바다’를 개발하고 있는 담당자들이 상혁에게 요구한 요청이었다.
“범선을 만들어달라고요?”
상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현주를 향해 묻자, 현주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만들어달라는 게 아니라, 만들고 싶으니까 돈을 달라는 거지.
이미 개발팀에선 전통 방식으로 범선을 제작할 제작자도 섭외해놨고, 목재의 조달부터 돛의 제작까지 필요한 모든 견적을 구체적으로 잡아 놨어.
‘범선을 실제로 타본 느낌을 모르면서, 그 느낌을 게이머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라고 하면서.
실제로 영화 촬영을 위해 함선의 복제품을 만드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잖아?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거지.”
“캐러비안의 해적 촬영할 때도 실물 크기의 레플리카 범선 3대를 동원하긴 했죠.
근데 이건 그런 스케일이 아닌데요?”
상혁이 당황한 이유는, 개발팀에서 요청한 범선의 숫자가 무려 12척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항양범선(航洋帆船)의 기본형태라 할 수 있는 쉽 타입(ship type) 범선부터,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범선의 형태인 정크 타입(junk type) 범선까지.
개발팀에서는 다양한 형태를 가진 여러 함선을 종류별로 만들고 싶다고 요청하고 있었다.
단순히 돛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배의 종류에 따른 것이 아닌, 여러 크기와 용도를 가진 함선을 제작함으로써 각 함선을 탔을 때의 느낌을 최대한 전달하고 싶다는 것이 개발팀의 의도였다.
배의 크기와 파도의 세기에 따라 얼마나 흔들림이 달라지는지, 실려있는 짐과 대포의 무게에 따라 탑승감과 속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실제로 중세시대의 범선을 탔을 때 느껴지는 그 감각 그대로를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이, ‘무한의 바다’를 개발하고 있는 개발팀이 무려 12척의 범선을 제작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 배경이었다.
한두 척이면 모를까, 고작 고증을 위해 12척이나 되는 범선을 제작하게 해달라는 황당한 요청.
그것은 다른 게임회사라면 단박에 거절당할만한 요청이었지만, 개발팀은 무려 1200페이지에 달하는 자세한 견적서를 올림으로써 자신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범선을 제작할 것인가에 대해 회사 측에 설명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안서에는, 단순히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무시하기엔 지나치게 과할 정도의 열정이 담겨 있었다.
상혁은 1200페이지나 되는 범선 제작에 대한 구체적인 견적서를 꼼꼼히 훑어보고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현주를 향해 물었다.
제안서 내용에 문제가 없는 이상, 현주가 가진 권한으로도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개발팀에서 올린 기획안에는 문제가 없네요.
비용 쪽이 좀 애매하긴 한데, 실제로 이런 종류의 작업은 개발비용이 작업하면서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니까 그 부분을 생각하면 꽤 잘 짜인 예산안이고요.
만들고 싶어서 하는 범선의 숫자가 좀 많긴 하지만, 그것도 최대한 조합을 잘 고려해서 최대한의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네요.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어요?”
“승인하려고.”
“그럼 그냥 선생님 결정대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굳이 저한테 물어보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아니, 승인은 이미 했어. 맨 마지막 페이지에 도장이 찍혀 있잖아?”
상혁은 제안서를 끝까지 넘겨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했다.
거기엔 예산의 지출을 승인한다는 PTW의 법인 인감이 찍혀있었다.
그것을 본 상혁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현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 안건은 정보공유를 위해 가져오신 건가요?”
“아니. 조금 달라. 범선 제작의 필요성도 이해했고, 제작에 대한 구체적인 견적도 제대로 파악했지만, 단순히 고증을 위해서 진행하기엔 너무 큰 작업이니까.
설사 계획 전부가 제안서 내용대로 척척 진행된다고 해도, 12척이나 되는 대형 범선을 어디에 정박시켜야 할지, 사후 관리는 어떻게 할지, 그리고 비용대비 효율이 얼마나 잘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으니까.
오늘 널 찾아온 건 그래서 찾아온 거고.
굳이 말하자면···.”
현주가 웃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상혁이 너라면 이 범선들을 고증 용도 외에도 유용하게 쓸 방법을 알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거야.”
고증 작업이 끝나는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쪼가리가 되어버릴 12척의 중세시대 범선.
그녀가 상혁을 찾아온 이유는, 그 범선의 활용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아는 인물 중에서는, 그런 종류의 잔머리를 굴리는데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바로 상혁이였기 때문에.
그리고 상혁은, 그녀가 기대한 대로 21세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목조 범선을 사용할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내었다.
“우선 제작 도중에 사용할 수 있는 용도라면 역시 홍보 용도가 있겠죠.
중세 바다가 배경인 게임을 만들기 위해 게임사에서 직접 목조 범선을, 그것도 12척이나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홍보 거리가 될 테니까요.
NGC나 디스커버리 채널에 연락하면 범선과 게임 제작 과정 전반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하는 데 관심을 보일 겁니다.
그쪽에서는 수십 편짜리 멋진 TV 시리즈를, 촬영 비용만 가지고 뽑을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요.
범선이 완성된 이후에는, 고증에 필요한 최대한의 데이터를 뽑아내야겠죠.
여기 보면 제작 자체가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제작되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는데, 완성 이후에 아예 직원들과 전문가들이 탑승한 상태에서 한국까지 실제로 배를 몰아서 가져오는 식으로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겠네요.
당시의 범선에서의 생활상도 체험하고, 그 개같이 단단하다는 쉽 비스켓도 체험 삼아 먹어보고요.”
“중세시대 선원의 삶을 체험한다고? 직원들이 하려고 할까?”
“좋아할 겁니다. 애당초 그런 컨셉질에 미친 사람들이라서 범선을 12척이나 제작하자고 요청하는 거니까요.
다만 어디까지나 체험이 되어야지 실제로 해보면 일주일도 못 버티고 지옥 같은 스트레스를 겪을 수 있으니, 함선 내부에 따로 공간을 마련해서 발전 설비와 현대식 식사를 기구들을 별도로 준비해야 하겠죠.
그리고 안전을 위해서, 별도로 현대식 선박 몇 대가 운항 과정 내내 함께해야 할 거고요.
범선에서 문제가 생기면, 현대식 함선에서 바로 지원할 수 있도록.
여기 필요한 함선은 임대하도록 하죠.
모든 범선의 제작을 동시에 들어간다 해도 전부 완성하는데 1년 가까이 걸릴 테니까, 완성 시기에 맞춰서 배를 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럼 비용이 추가로 더 들겠네.
범선 제작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돛을 다루고 배를 운용할 전문가들도 고용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상혁아. 진짜 범선을 탄 느낌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많아도 두세 척이면 충분할 텐데, 굳이 12척이나 제작할 필요가 있을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지 않아?”
“요청받은 함선 중에 배수량 기준으로 3천 톤이 넘어가는 큰 범선은 3대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6대는 천 톤급이고, 3대는 몇 백 톤밖에 안 되고요.
12대 전부를 초거대 범선으로 만들겠다고 우기면 몰라도, 그 정도면 충분히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죠.
그 과정을 통해서, 무엇보다 게이머들에게 ‘그럴싸함’에 대한 믿음을 선사할 수 있을테니까.”
“그럴싸함에 대한 믿음?”
현주가 질문에 상혁이 답했다.
“선생님도 현재 오픈베타가 진행 중인 YAS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컨텐츠가 승마 관련 콘텐츠인 건 알고 계시죠?”
“알지. 진짜 말을 탄 기분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준다고 호평이니까.”
“근데 그게 진짜 그런 느낌인지, 게이머가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은 혹시 진짜 말 타봤어요?”
“어?어어???”
상혁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현주가 당황하자, 상혁은 씩 웃어 보였다.
“저희가 승마 컨텐츠를 제작할 때, YAS의 개발팀에서는 실제 말을 본사로 데려와서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측정했죠.
각 동작을 하는데 어떤 근육이 얼마만큼 부풀어 오르는지, 그를 통해서 유저와 말이 맞닿는 사타구니의 압박이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
맞바람이나 옆에서 부는 바람, 뒤에서 부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탑승자가 어떤 느낌의 공기 저항을 받으며, 안장의 재질에 따라 탑승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모두 수치로 측정해서 게임에 적용했고요.
게다가 수없이 많은 말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말의 품종과 성장, 먹이의 품질에 따른 건강 상태, 주인과 말의 신뢰에 따라 변하는 주행 감각의 차이도 전부 구현했고요.
실제로 개발 막바지 단계에서는, 전문 기수가 가상의 말에 탑승한 상태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말을 탄 것과 전혀 느낌이 다르지 않다는 검증까지 받았었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진짜 말을 타는 느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거고.”
“근데 사실 그건 말하자면 정보에 의해 생성된 일종의 고정관념에 가까워요.
만약 저희가 말을 탄 느낌을 100%가 아니라 80% 정도만 정확히 구현했다 하더라도, 게이머들은 그게 말을 타는 느낌이구나 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차피 말을 타본 적이 없으니, 진짜 말을 탔을 때 어떤 느낌인지 알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저희는 승마 모듈을 제작할 때 저희가 투입한 모든 노력을 투명하게 공개했죠.
실제 경마 기수들이 탑승감 조정에 참여했다는 정보라던가, 현실의 말을 측정실에 데려와 세부적인 데이터를 쌓은 과정을 모두 보여줬어요.
그로 인해 게이머들은, 단 한번도 말을 탄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YAS안에서 말을 타며 이렇게 믿게 되는거죠.
‘아, 내가 말을 타본 적은 없지만 이게 진짜 말을 탄 느낌이겠구나.’
그게 바로 제작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일종의 선입견이되는거죠.”
“하지만 실제로 말 타는 거랑 똑같은 느낌을 구현하려고 노력한 건 사실이잖아?
결과물도 그렇게 나왔고.”
“좀 다르게 생각해보자고요.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른 회사에서 리얼 엔진에 탑재된 승마 모듈의 개선 작업에 들어갔다고요.
그리고 그건 기적적으로 저희가 만든 승마 모듈보다 더 완벽하게 현실에 가까운 느낌을 재현했다고 치죠.
하지만 그 회사는 그 사실을 따로 게이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YAS에서의 승마감각에 익숙해진 플레이어들이, 다른 회사의 승마 시스템을 체험하면서 뭐라고 하게 될까요?”
잠시 고민하던 현주가 상혁의 질문에 대답했다.
“게이머들에게 있어서 현실적인 승마 감각의 기준은 YAS가 되어 있을 테니까, 다른 회사의 승마 모듈이 다른 느낌을 준다면, 오히려 그게 비현실적인 느낌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바로 그거에요. 현실에서 체험할 수 없는 감각에 대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알고 싶다면 그 분야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의 평가를 믿을 수밖에 없죠.
그리고 저희는, 12척이나 되는 전통 목조 범선의 제작이란 거대 이벤트를 통해서 그 과정에 대한 공신력을 얻을 수 있는 거고요.
PRD를 통해서, 가상의 범선에 탑승해 가상의 바다를 누비는 게이머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 이게 진짜 범선의 느낌이구나.’
게이머들이 가지게 될 그 믿음은, 무려 12척이나 되는 범선을 만들어 직접 테스트해보고 만들었다는 항해시스템의 제작과정에 대한 정보에서 나오는 거고요.
‘무려 12척이나 되는 범선을 실제로 만들어서, 개발자들이 온갖 측정과 체험을 반복하며 현실과 똑같이 구현하려 노력한 결과물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시스템이야.
그러니까 이건 진짜 범선을 탄 느낌과 100% 똑같을 거야.’
저희가 이번 투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값어치는, 바로 거기에 있을 겁니다.
게다가 게임 제작이 끝난 이후의 함선은, 나름 굴리기 좋은 자산이 될 수도 있고요.”
“자산?”
“내부 설비를 모두 뜯어내고 현대식 장비로 교체한 후에, 직원들이 요트처럼 사용할 수 있는 휴양 설비로 활용할 수 있겠죠.
아니면 게임 안에서 탑승할 수 있는 함선을 실제로 구매할 기회라는 타이틀을 달아서 게이머들에게 판매할 수도 있고요.
혹은 박물관에 기증하는 식으로 비과세 혜택을 받아도 되죠.
아니면 다음 NE 컨벤션을 오프라인으로 열되, 항구 도시에서 열어서 실제로 함선에 탑승할 기회를 참가자들에게 제공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고요.
그렇게 실제 범선에 탑승한 참가자들은 실제 PRD 안에서 얼마나 비슷하게 현실의 감각이 구현되었는가를 비교 체험할 수 있겠죠.
그리고 ‘내가 진짜로 범선을 타 봤는데 게임이랑 100% 똑같았다.’라고, 다른 게이머들에게 평생 자랑할 수 있는 체험을 얻을 수 있을 거고요.”
“NE 컨벤션 때 써먹고 나서 요트로 개조하거나 기부하는 방법도 있겠네.”
“순서를 생각하면 그쪽이 더 효율적이겠죠?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식으로 활용하기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활용하는 게 게임에 있어서 더 좋은 방식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른 방식?”
지금까지의 아이디어도 충분히 좋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현주는 상혁이 말한 ‘다른 방식’에 큰 흥미를 느꼈다.
현재까지 말했던 멋진 아이디어들보다 ‘더 좋은 방식’이라면, 엄청난 아이디어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눈을 반짝이며 자신에게 질문하는 현주를 보며, 상혁은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21세기에 목재로 만들어진 범선을 12척이나 만들겠다는 개발팀의 아이디어보다도, 그리고 완성된 범선의 내부를 현대식으로 뜯어고쳐 요트처럼 사용하겠다는 아이디어보다도, 더 황당하고 파격적인 아이디어라 할 수 있었다.
***
“···가 되는거죠.”
10분에 걸친 상혁의 기나긴 설명이 끝나자, 현주는 상혁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 인간이 지금 제정신인가?’라고 눈으로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로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게임의 현실감을 위해 목제 범선을 12척이나 제작하겠다는 계획이잖아요.
그럼 그 12척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도 게임의 현실성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겠죠.
그로 인해 나올 결과물은, 게이머들을 더 열광하게 만들 결과물이 될 거고요.”
“그럼 NE 컨벤션에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는?”
“굳이 범선을 활용하겠다는 목적으로 참가자 수가 제한되는 오프라인 행사를 진행할 필요는 없겠죠.
그냥 온라인으로 참가해서 가상의 범선에 탑승시켜도 충분히 화젯거리는 될 거고요.”
“요트처럼 개조해서 사원 복지에 쓴다는 계획은?”
“그거 개조하는 비용이면 고급 크루즈 여행을 보내주는 게 더 싸게 먹힐걸요?
게다가 전 이렇게 생각해요.
이 1200페이지짜리 기획안을 올린 미친 인간들이라면, 지금 제가 말씀드린 아이디어를 보고 미친 듯이 좋아할 거라고.”
상혁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기에,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해당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계획을 잡아야 하니 저는 개발팀과 별도로 미팅을 진행할게요.
이 아이디어대로 진행한다면, 그건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단 한 번의 시도가 될 테니까, 모든 부분이 한 치의 오류 없이 완벽하게 계획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진행하든 않든, 범선 제조는 올라온 기획안대로 진행해야 하니 그 부분은 선생님이 개발팀에 전달해주세요.
돈은 PTW에서 얼마든지 낼 테니까, 어디 한번 원하는 대로 마음껏 진행해보라고요.”
“그렇게 할게. 다들 기뻐할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네.”
그렇게 말하는 현주를 보며, 상혁은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현주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현주를 향해 물었다.
“뭐 다른 용건도 있었어요?”
그러자 조금 머뭇거리던 현주는 옆에 놓은 서류철을 펼쳐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그것은 PTW의 CEO인 현주에게, 정부에서 보낸 한 장의 이메일을 프린트한 것이었다.
상혁은, 현주가 내민 종이의 내용물을 읽자마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현주를 향해 말했다.
“미친, 이건 뭐예요?”
현주가 상혁에게 건넨 프린트.
그 안에는 굵은 폰트로 적혀진 다음과 같은 제목의 메일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RE: RE: ‘새 인터넷’의 불건전 사이트 접속 통제에 대한 정부 정책 협조 요청에 관한 공문]
***
사실 정부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인터넷 사업을 시작한 PTW에 https 차단을 위한 기술 도입을 지속해서 요청하고 있었다.
때로는 공문으로, 때로는 전화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PTW가 인터넷 사업을 개시한 이후로, 현재 대한민국의 인터넷 회선 중 인터넷 검열이 적용되어있지 않은 유일한 인터넷이 바로 PTW의 ‘새 인터넷’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https 차단이 있기 전부터, 대한민국에서는 ‘warning.or.kr’ 같은 인터넷 검열 수단을 통해 지속해서 대한민국 국민의 인터넷 접속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인터넷의 체계가 기존의 HTTP체계에서 ‘S(Secure)’가 추가된 HTTP‘S’체제로 전환되면서, 기존의 차단 방식은 쓸모가 없게 되었고, 정부에서는 발전한 인터넷 기술에 맞춰 기존보다 더 강력한 차단 기술인 ‘DNS 스푸핑’ 기술을 도입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2월부터 대한민국의 통신사 KT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인터넷 검열이 시작되었고, 나머지 통신사들도 그에 맞춰 정부 정책에 협조하라는 공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문은, PTW가 인터넷 사업에 진출하며 파트너로 선택한 ‘삼정 통신’에도 똑같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삼정 통신에서는 다른 통신사들처럼 적극적으로 검열 기능을 추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새 인터넷’에서 삼정통신의 역할이 단지 회선 설치와 가입자 관리만을 맡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새 인터넷의 구축에 들어가는 통신설비의 제작을 삼정 전자에서 맡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인 제품의 설계와 안에 들어가는 기술은 전부 PTW의 것이었으니까.
삼정 통신 입장에서는 검열 기능을 도입하고 싶어도 도입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기술 제공사가 거부한다는 핑계를 들어 지금까지 계속 정부의 요청을 거절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런 삼정의 탱킹으로 인해 지속해서 요청을 거부당한 정부에서는, 삼정 통신의 미온적인 태도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신규 가입자를 무지막지하게 유치하고 있는 삼정 통신에서 인터넷 검열을 반대함에 따라, 정부 정책에 참여한 다른 통신사들의 불만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제공하는 회선의 기본 속도 차이 때문에 수많은 가입자를 지속적으로 빼앗기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느린 인터넷을 사용하며 검열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반길 사용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아무리 삼정 통신에 협조 공문을 보내도 기술적 문제 해결을 위해 PTW에 협조 요청중이라는 답변만 반복해서 날아오는 상황이었고, 결국 정부에서는 PTW를 향해 직접 공문을 보내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새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기존 통신사들의 불만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PTW에만 특혜를 주고 있다는 비난을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PTW에 직접 공문을 보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삼정 통신에 공문을 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현주는 정부에서 온 메일에 ‘새 인터넷 회선에 정부의 차단 기술 적용을 위한 기술적 문제 해결을 위해 논의 중입니다.’라는 답변만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압박의 강도를 점점 높이는 것밖에 없었기에, 공문에 담긴 단어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강경한 단어들로 교체되었고, 구체적인 처벌 방안에 관한 내용도 시시각각 추가되기 시작했다.
현재 삼정 통신에서 낙찰받아 사용하고 있는 LTE 주파수의 사용 권한을 회수하겠다던가, 사용권 회수는 하지 않더라도 다음 재입찰 시기에 입찰 권한을 박탈하겠다던가, 최악의 경우 새 인터넷을 아예 사용하지 못하도록 영업 정지 처분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그리고 오늘, 소중한 제자들이 게임 제작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선에서 열심히 정부의 요청을 커트하던 현주는, 사태가 점점 심각해짐에 따라 상혁의 조언을 얻으러 온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혁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정부의 협박에 묵묵히 답변했을 현주를 생각하며, 오랜만에 매우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 상혁아. 내 선에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아.”
“괜찮아요. 제가 화난 건 선생님 때문이 아니니까.
선생님은 잘 하셨어요.”
“그럼 정부 정책에 불만인 거야?”
“저랑 민준이는 인터넷 검열을 반대하는 파니까요.
성인이라면 자신이 뭘 보고 뭘 보지 않을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어야죠.
그걸 자기들이 뭐라고 이건 접속해도 되고 이건 안돼 라고 결정하나요?
전 이런 형태의 검열에는 절대 반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르지 않을 수는 없잖아.
메일에 적힌 대로, 다른 통신사와의 형평성 문제도 있고.
어느 정도는 협조하는 액션을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선생님은 이게 옳다고 생각하세요?
국가가 인터넷을 통제하는 게?”
“아니. 나도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은 상혁이 너나 민준이와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정부를 상대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큰 것도 사실이고.
게다가 통신사업은 정부의 허가 아래서만 진행이 가능한 기간 산업이잖아?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하면, 우린 주파수 하나도 제대로 쓸 수 없어.
정부의 손을 빌리는 게 필수적인 사업을 진행하면서, 정부의 정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을까?”
“메일 내용을 보니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답변은 이미 보내신 것 같네요?”
“어. 새 인터넷은 특수한 보안 체계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부에서 요청한 방식으로는 사이트 차단이 불가능하다고 답변했었지.”
“그러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그럼 그게 왜 기술적으로 불가능한지 정리해서 보내달라던데?”
“지랄하고 자빠졌네. 진짜. 어떻게든 우리 인터넷을 틀어막을 생각인 거네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조심스레 물어보는 현주를 바라본 상혁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눈을 번쩍 뜨며 현주를 향해 말했다.
“좋아요. 저쪽에서 한판 붙자면 붙어 줘야죠.
지금 바로 법무팀을 불러 주세요.”
“한판 붙으려고? 대한민국 정부랑?”
“그래야죠. 아무래도 대한민국 정부는 셧다운 때 그렇게 처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그때의 기억을 싸그리 잊어버린 것 같으니, 친절하게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줘야죠.”
“뭐···. 뭘 어떻게 하려고?”
사악한 표정으로 씨익 웃는 상혁을 보며 현주가 불안한 듯 묻자, 상혁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단지 저는 이 친절한 공문에 대해 답장을 보낼 생각일 뿐이니까.”
“답장을?”
“예. 답장이요. 물론 그 내용은, 대한민국 정부가 기대하는 내용과는 안드로메다만큼 떨어진 답장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입가엔,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
정부에 의한 인터넷 검열은, 대한민국의 인터넷과 방송을 주관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PTW에 발송된 공문 역시, 방통위에서 보낸 공문 중의 하나였다.
방송과 통신.
둘 다 정부의 허가 아래 이루어지는 사업이기에, 해당 영역에서 방통위가 가지는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내로라하는 대기업 정도는 말 그대로 나락으로 보낼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그들이 접한 대부분의 대기업은 그런 느낌이었다.
정부를 거스르지 않는, 정부를 거스를 수 없는.
정부의 권한에 매달려 사업을 하는 사업자들.
그렇기에 다른 통신 사업자가 모두 정부 정책을 따르는 가운데, 홀로 정부에 대항하고 있는 PTW의 존재는 그들이 보기에 매우 거슬리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저항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통신 관련 사업을 진행하면서, 방통위라는 막강한 조직의 권한을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영업 정지라는 빅 카드까지 꺼내어 협박한 이상, 저쪽에서도 분명 모종의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는 게 방통위 내부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리고 PTW는, 수없이 많은 공문을 받은 끝에 드디어 통신 검열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담은 메일을 방통위로 회신했다.
매우 큰 용량의, 정성스레 만든 첨부 파일까지 담아서.
바로 어제 PTW에 공문을 보냈던 방통위 담당자 김근수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메일함부터 확인했다.
그리고는 메일함에 담긴 메일의 제목을 보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매번 답장을 보내던 PTW 김현주의 이메일 주소가 아닌, PTW의 공식 메일을 통해 답장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요청한 통신 검열 요청에 관한 내부 검토 결과를 전달 드립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근수는 메일함의 제목을 클릭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X발 이게 뭐야?!!? 아니 이 새끼들이 진짜 돌았나!!?!?”
그가 사무실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PTW에서 보낸 답장의 내용이 너무나 황당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내부 검토 결과,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서 요청한 통신 검열 방식인 DNS Spoofing 기반의 사이트 차단 기능 및 HTTPS SNI 필드 차단 방식이 2001년 등록된 자사의 통신 기술 특허 일부를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PTW에서는 공식적으로 해당 특허에 대한 권리 침해 소송을 대한민국 정부에 제기할 예정입니다.
첨부 파일에 해당 특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및 현재의 인터넷 차단 기술이 자사 특허의 어느 부분을 침해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정리해두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정부에서 보낸 강경한 어조의 협조 요청 공문에 대한 PTW의 공식 답변.
거기엔 대한민국 정부가 PTW의 국제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사용을 ‘중지’시키겠다는, 특허 괴물 PTW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