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남들이 안 하는 짓
미야모토 카렌이 아카데미 파트의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상혁은 본격적으로 게임의 메인 파트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플레이어와 하렘 구성원들의 생활 공간이 될 이동형 요새에 대한 기획부터, 게임 내내 유저들이 플레이하게 될 전투 시스템에 대한 기획까지.
그중에서도 상혁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역시나 전투 시스템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리 다른 파트가 잘 만들어져 있다 하더라도, 게임 플레이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전투 파트가 재미없다면, 결과적으로는 망겜이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반면에 이런 형태의 캐릭터 중심의 시뮬레이션 파트가 존재하는 게임에서, 전투 시스템의 지나친 재미는 게임의 포커스를 흩트려놓을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게임 중에는 전투가 너무 재미있어서, 스토리를 빠르게 스킵하고 장비 파밍과 전투만 즐기게 되는 게임도 꽤 있는 편이었으니까.
반대로 스토리나 이벤트의 재미에 반해 전투가 지루한 편이라 전투 파트에 들어가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게임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형태의 복합장르 게임에서,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혁은 지금 그 어려운 시도를 하려 하는 중이었고.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상혁은 전투 파트를 3개로 분리했다.
마나 엔진에서 흘러나온 마나에 침식당해 변이된 ‘마나 괴수’를 토벌하며 마을을 구하는 토벌 파트.
그리고 중간중간 보스급으로 등장하는 거대 마나 괴수를 토벌하는 ‘보스전’ 파트.
마지막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는 다른 프리 나이트나 정규군 소속의 나이트와 겨루게 되는 ‘나이트 배틀’ 파트.
상혁은 각각의 파트가 서로 다른 재미를 주는 상호 보완 관계가 되도록 전투 시스템을 설계했다.
“쉽게 말하자면 토벌 파트는 나이트를 타고 잡몹을 쓸어버리는 무쌍류 게임 느낌으로 진행되는 파트이고, 보스전 파트는 보스의 성향에 따라 공략법을 파악하고 파티 구성에 신경을 써서 도전해야 하는 ‘레이드’나 ‘헌팅 액션’ 같은 느낌의 전투.
그리고 나이트 배틀은 이 게임의 PVP같은 느낌의 파트로 갈까 해.”
상혁이 넘긴 기획서를 검토하던 지수는 상혁의 설명을 듣고 질문을 던졌다.
“흠···. 굳이 3개 파트로 가르는 이유가 있어요?”
그러자 상혁이 지수에게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우선 지금 기획대로면 이 게임은 캐릭터 수집형 게임이 되겠지.
근데 일단 발매 플랫폼은 PRD같은 초 고성능 머신 전용 게임이 아니라 PS4나 X-BOX ONE 같은 가정용 콘솔이 메인 플랫폼이잖아?
물론 딥 다이버가 엄청나게 풀린 지금 상황에서는 대다수의 콘솔 게이머들이 딥 다이버의 콘솔 부스팅 기능을 사용해서 게임을 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콘솔 게임인 이상 콘솔 부스팅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쾌적한 플레이는 가능해야 해.
콘솔 부스팅을 쓰고 쓰지 않고의 차이가, 게임 플레이 자체가 아닌 그래픽에서의 차이만 발생하도록.
그 말은···.”
“한 전투에 등장하는 나이츠와 몬스터의 숫자에 한계가 있다는 거군요.
PRD 전용 게임이라면 실사급 그래픽의 몬스터나 NPC를 원 없이 넣어도 되겠지만, 8세대 콘솔의 성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니까요.”
“맞아.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소수 정예파티가 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했을 때 남는 캐릭터들이 많이 생긴다는 거지.”
“그래서 파티 구성을 전투 상황에 따라 다르게 가져가도록 하겠다는 거죠?”
“맞아. 일단 내가 잡은 기획대로라면, 토벌 파트에서의 핵심은 ‘유지력’과 ‘광역 공격력’이 될 거야.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로 화력을 투사하면서,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형태의 전투가 되겠지.
반대로 ‘보스전’에서의 핵심은 얼마나 보스의 어그로를 잘 잡으면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지의 승부가 되겠지.
PVP배틀에 해당하는 나이트 배틀에서는, 상대 나이트의 특성과 전투 스타일에 맞춰서 파티를 구성하는 게 핵심이 될 거고.”
“버려지는 캐릭터가 줄어들게 되겠네요.”
“그게 목적이지.”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전투가 번갈아 가면서 나올 텐데, 그렇게 매번 파티를 바꾸는 건 귀찮지 않을까요?”
“일단 각 전투 타입별로 기본 출격 파티를 따로 구성할 수 있게 할거고, 그 안에서도 미리 준비한 세팅을 바로 불러올 수 있게 할 거야.
굳이 따지면 덱을 여러 개 준비해 놓았다가 필요에 따라서 원하는 덱을 꺼내쓰는 느낌으로.
핵심은 이거야.
특정 상황에서 특히 효율이 잘 나오는 멤버 리스트를 완성하려면, 결국 유저가 그 덱의 핵심 멤버를 얻어야 한다는 거지.
예를 들어 뇌전 타입의 공격을 필살기로 사용하는 히로인이 메인인 덱에서는, 상대 몬스터의 뇌전 계열 저항력을 낮추는 히로인과, 아군 뇌전 계열 공격의 공격력을 올려주는 히로인, 그리고 뇌전 속성의 부가효과인 마비 계열의 지속 시간을 늘려주는 특수 스킬이 있는 히로인 등으로 덱을 편성하는 거야.
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하는 덱의 종류가 많아지니 히로인이 멤버로 합류했을 때의 활용도도 높아지고, 멤버가 늘어났을 때 유저가 고민할만한 새 전략도 잔뜩 늘어나게 설계할 생각이야.”
상혁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지수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기획서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성립하는 구조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게이머들이 그대로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게이머들은 범용성 있는 세팅을 선호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녀의 걱정에도 일리가 있었다.
“의도는 좋은데, 실제로 해 보면 매번 세팅을 귀찮게 변경하는 것보다는 클리어가 가능한 범용성 있는 세팅으로 쭉 밀고 가는 유저가 많을걸요?
어차피 해당 상황에 완벽한 파티를 맞춰서 클리어하나, 아니면 그럭저럭 클리어만 가능한 파티로 클리어하나, 클리어했다는 사실 자체엔 차이가 없으니까요.
초반에야 어려운 배틀은 능력치 1이라도 아쉬우니 최대한 스펙을 맞춰서 가려고 하겠지만, 후반엔 어차피 파티 스펙을 올리면 딱 맞춰서 플레이하나 그냥 플레이하나 그게 그거가 될 테니 대부분 제일 센 파티원에게 경험치와 장비를 몰아주겠죠.
애당초 캐릭터를 ‘수집’해야 할 정도로 히로인의 숫자가 많은 게임에서, 모든 히로인을 전투에 골고루 참여하게 하겠다는 건 너무 큰 욕심 같아요.
초반에 얻는 히로인과 나이트는 밸런스를 위해 자연스럽게 약한 상태로 합류하게 될 거고, 장비와 캐릭터가 성장한 후반에 합류하는 히로인은 상대적으로 강한 상태로 합류하게 될 테니까요.
모바일 게임도 1성 캐릭터랑 5성 캐릭터의 성능 차이가 극심하게 나는 상황인데, 과연 저희가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해. 사실 지수 네가 말한 건, RPG의 딜레마 같은 거니까.”
“RPG의 딜레마?”
“게이머가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장비를 파밍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게임을 쉽게 플레이하기 위한 거잖아?
문제는 그렇게 고생을 해서 좋은 장비를 얻고 나면, 이번엔 게임이 너무 쉬워져서 재미가 없어지게 되지.
목표의 상실이랄까?
지수 네가 말한 밸런스대로 게임이 진행된다면, 아마도 게이머는 범용성을 가진 특정 세팅에 꼭 필요한 히로인을 얻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 히로인을 얻어서 원하던 세팅을 완성하게 되겠지만, 반대로 그 이후엔 사실 수집의 의미가 없어져.
새로 얻은 장비가 전에 얻은 장비해 비해 형편없이 쓰레기라 창고에 처박아두는 경험은, RPG 플레이어라면 누구라도 경험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번 작품을 통해 그 딜레마를 최대한 극복하고 싶어.
수백 수천 시간을 플레이하고 엔딩을 보는 그 순간까지, ‘어쩌면 난 아직도 이 게임의 끝을 보지 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하고 싶거든.”
“보통 그런 거는 엄청나게 어려운 도전과제나 무지막지하게 낮은 확률로 나오는 아이템으로 구현하지 않아요?
아이템 자체도 얻기 힘든데, 옵션이 랜덤이라 풀 옵션을 얻는 건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만든다던가.
라스트 판타지 10에서도 궁극 무기를 얻으려면 번개 평원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200번 피해야 하잖아요?
디아볼로에서 졸업 급 아이템을 얻으려면 미친 듯이 파밍을 해야 하고요.
그런 식으로 진짜 각 잡고 도전하지 않으면 절대 끝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죠.
아니면, PTW와는 가장 거리가 먼 방법이지만 돈을 수십억쯤 쏟아붓지 않으면 아예 졸업까지 도달조차 못 하게 만들던가.”
“그게 정석이긴 한데 내가 하려는 방식은 아니야.
지수 너도 알겠지만 난 확률보다는 고민과 연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걸 더 좋아하거든.”
“고민과 연구라···.”
지수가 말했다.
“하긴, 지금까지 만든 게임들이 다 그런 느낌이긴 했죠.”
지수의 말대로, PTW에서 나오는 게임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공략에 필요한 정보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노가다를 통해 육성한 캐릭터의 강함으로 난이도를 돌파하는 것이 아닌,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각종 정보를 통해 파훼법을 얻는 것이 PTW 게임을 공략하는 정석으로 여겨질 정도로.
그것은 최고의 게임을 꼽을 때 언제나 ‘대함선 시대2’와 ‘퍼스트 킹4’를 언급하는 상혁의 개인적인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였다.
그리고 상혁은, 이번에 만들 작품에도 그런 ‘지식 기반’의 공략법을 메인으로 잡으려 하고 있었다.
“제안서 127페이지에도 적혀 있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돼.
각 토벌 작전 및 보스전, 그리고 나이트 배틀마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스테이지를 공략했는지에 대한 계산을 보여주는거야.
그리고 더 높은 효율이 나올수록, 더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고.
이 게임의 설정상, 나이트라는 존재는 현재의 문명 이전에 존재했던 초 마도 문명의 유산이잖아?
그리고 세계관 속에서 머신 스피릿과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가 바로 주인공이고.”
“그렇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설정이 세워지지.
현재의 나이트 파일럿들은, 자신이 타고 있는 나이트의 진짜 성능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설정이.
그도 그럴 게 머신 스피릿과 다이렉트로 대화가 가능한 주인공 말고는, 나이트가 원래 어떤 식의 전투 방식으로 싸우는 게 맞는지 나이트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잖아?
아마도 그 세계의 파일럿들은 어딘가의 고대 유적에서 나이트들을 파냈겠지.
그리고 나이트에게 간택 받아 파일럿을 하게 된 것일 테고.
하지만 탑승은 허락했어도, 대화가 불가능한 이상 그 나이트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100% 파악하는 건 어려워.
그건 마치 자동차를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사람이 막무가내로 운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하지만 나이트 운용의 역사가 긴 만큼, 그나마 올바른 형태에 가깝게 나이트의 운용법을 파악한 파일럿들도 있을거야.
그리고 그런 정보는, 나이트와 함께 가문 대대로 내려오게 될 거고.
이 세계에서 파일럿의 강함이란, 바로 그런 개념인 거지.
얼마나 본인이 탑승하고 있는 나이트의 본 성능을 끌어낼 수 있는가.
그런 설정을 바탕으로 시스템을 구성한다면…….”
“초반에 약했던 파일럿이 주인공과의 상담이나 공동 전투를 통해 자신이 탑승한 나이트의 진정한 힘을 끌어올리게 되는 게 가능하겠네요?
그리고 그 올바른 방법을 찾는 것이, 캐릭터 육성 시스템의 메인이 될 거고요.”
“바로 그거지.”
“하지만 그런 시스템이라면 그냥 머신 스피릿과 바로 대화해서 장비를 교체하거나 스킬을 습득시키면 되는거 아니에요?
지금 말씀하신 시스템이 육성 시스템이 되려면 좀 더 살이 붙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상혁은 그에 대한 계산도 미리 해둔 상태였기에, 지수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 게임에서 호감도를 올릴 수 있는 대상은 크게 두 종류잖아?
머신 스피릿과 파일럿.
그러니까 초반엔 주인공 기체에 깃들어있는 머신 스피릿 말고는, 다른 머신 스피릿은 주인공에게 마음을 닫고 있는 거지.
호감도를 올리면서 조금씩 머신 스피릿에게 나이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필요한 장비를 모으거나 특정 던전을 공략하고, 파일럿을 훈련해서 전투력을 성장시키는 거야.
임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효율’은, 바로 그 부분을 계산해주는 거고.
구체적으로 효율 계산은 이런 기준을 가지고 계산되게 돼.
첫째, 나이트와 파일럿이 얼마나 조화롭게 전투를 수행하였는가.
둘째, 투입된 나이트의 종류와 장비가 얼마나 임무에 적합하게 편성되었는가.
셋째. 그 모든 세팅 위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는가.
이건 주인공 기체에 몰빵한 다음 혼자 무쌍 찍는다고 높게 나오는 수치가 아니야.
그렇다고 파일럿의 손에 맞지도 않는 엄청나게 강력한 장비를 나이트에 떡칠한다고 올라가는 수치도 아니고.
게다가 전투에 참여한 멤버들 사이의 캐미 역시 영향을 끼치지.”
“캐릭터들 간의 성격이나 능력에 따른 상호작용까지 고려해야겠네요?”
“맞아. 예를 들어 프리 나이트 출신 히로인이 원한을 안고 있는 다른 히로인과 같은 파티에 들어간다면, 최악의 경우 전투는 내팽개치고 둘이 맞짱 뜨는 장면도 볼 수 있는 거야.
일부 장비나 스킬 개방 조건의 경우, 그런 식으로 서로 싸우는 게 조건인 경우도 있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플레이어는, 본인이 데리고 있는 수많은 히로인들을 가지고 수없이 파티 편성을 바꿔가면서 전투 효율을 100%로 올리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 댓가로, 미션 효율이 100%에 도달하면 특정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거고.”
“그 보상은 히로인 육성이나 덱 구성에 필수적인 키 아이템이 되겠네요.
그리고 그렇게 얻은 키 아이템을 가지고, 다른 스테이지의 공략법도 풀리는거고요.”
상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가 말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다만 공략 조건이 너무 빡빡할 경우, 유저에게 특정 덱의 수집을 강제할 위험이 있을 것 같긴 하지만요.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시게요?”
“100% 보상을 두 종류로 쪼개면 돼.
그러니까 100% 달성 자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게 조건을 조금 느슨하게 하고, 100% 이상을 초과 달성했을 때 같은 키 아이템이지만 능력치가 좀 더 좋은 상위 보상을 주는 식으로.
퍼센테지가 높을수록 더 좋은 키 아이템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유저들은 원하는 세팅을 얻기 위해 최대한의 효율을 뽑으려 하겠지.
어떤 조합이 가장 먹히는 조합인가, 조합상으로는 완벽한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히로인들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공략에 필요한 핵심 아이템을 아직 습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체 장비로 어떤 장비를 장착시켜 전투에 투입할 것인가, 그리고 새로 얻은 히로인을 어떤 식으로 육성해서 스테이지에 투입해야 가장 좋은 전투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까.
난 이 게임이 게임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하루 종일 조합과 공략에 대해 고민하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게임이 되었으면 좋겠다.
게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게임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쌓이는 게임.
그리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게임을 떠올리는 순간 게임을 공략하면서 쌓인 수많은 지식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임.
이번 신작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이번 게임도 갓겜이 될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목소리엔, 자신이 생각하는 갓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혁과 오랜 기간 게임 개발을 함께한 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상혁이 좋아하고, PTW의 팬들이 좋아하는 지금까지의 게임 스타일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상혁의 기획을 좀 더 완성도 높은 상태로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도 아이디어를 짜내었다.
“일단 육성 시스템에 대한 기본 개념은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이 게임이 오픈월드 RPG를 지향하는 이상 발생하는 전투의 수량은 엄청나게 많을 거고, 그 모든 스테이지의 보상이 현재 파티에도 참가하지 않은 히로인의 키 아이템이라던가, 혹은 당장 쓸 일이 없는 아이템이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지루한 일이 되겠죠.
힘들게 100%를 달성했는데, 정작 당장 필요한 장비를 얻지 못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픈 일이니까요.
그러니 저는 보상으로 좀 다른 종류의 아이템도 추가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다른 종류라면 어떤?”
“이 게임의 또 다른 중요 요소는 연애잖아요.
그럼 연애 이벤트에 필요한 키 아이템도 보상으로 제공할 수 있겠죠.
예를 들면 시간 정지 마법이 걸려있는 상태로 완벽하게 보존되어있는, 구시대의 유물인 발렌타인 초콜릿 같은 거요.
그건 곰 인형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세계 어딘가에 있는 온천 유적의 이용권이 될 수도 있겠죠?
어찌 되었건 히로인과의 호감도 상승 역시 전투 효율을 올리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니까, 단순히 이벤트 감상용 아이템이 되지도 않을 거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데? 그럼 아예 캐릭터 전용용 복장도 보상으로 추가하자.
파일럿 슈트라던가 사복이라던가 잠옷이나 훈련복 같은 거.”
“오, 좋다! 복장도 의욕 이 불타오르는 좋은 수집요소니까요.
근데 잠옷이라니, 시간대에 따른 캐릭터의 복장 변화도 구현할 생각이세요?”
“이동 거점에서 히로인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는 게 핵심 컨텐츠 중 하나니까, 자연스럽게 밤에는 잠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던가 운동할 때 입는 옷 같은 게 따로 있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있는 게 재미는 더 있을 것 같네요.
다만 히로인마다 전용 복장이 엄청 늘어나게 될 테니, 작업량은 좀 걱정되지만요.”
“우리가 언제 작업량 걱정하고 게임 만들지는 않았잖아.”
상혁의 말을 들은 지수가 미소지으며 답했다.
“히힛!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자고.
잠옷이든 온천 여행 티켓이든 아니면 유적 폐허에서 발견한 욕조든.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이 기대할 만한 건 전부 집어넣는 거야.
어차피 음성 데이터는 전부 보이스 액팅 시스템으로 구현할 거니까, 음성 데이터로 빠지는 용량만큼 전부 컨텐츠로 채워 넣자고.”
“전 좋아요! 제가 예전부터 불만이었던 게, 대형 개발사의 AAA급 게임들은 용량이 100Gb 200Gb씩 하는데, 오덕들이 좋아하는 게임들은 대부분 볼륨이 작다는 거였으니까!
게다가 보통 그런 게임들은 성우들의 음성 데이터가 엄청 들어가는 만큼, 실제 게임 컨텐츠 용량은 더 작은 경우가 많기도 했고요!
이제는 오덕용 게임도 레데리2나 GTA5 같이 고용량 게임으로 발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오로지 오덕의, 오덕에 의한, 오덕을 위한 캐릭터 수집형 오픈 월드 RPG라니!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네요!
상혁 오빠가 보여준 육성 시스템 기획을 보니 그 마음이 더 강해졌어요.
저도 빨리 이 게임을 하면서 히로인 조합에 대해 고민하고, 온갖 복장을 모으고 갈아입히면서 나이트를 업그레이드 하고 싶은 기분이에요!”
그러자 상혁도 지수를 보며 흐믓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녀가 보여준 반응.
그것은 상혁이 생각하는 개발자의 이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좋아. 바로 그런 마음이야!
맞아!
‘내가 미치도록 하고 싶은데 아무도 안 만들어주니 내가 직접 만들겠다!’
그게 바로 이상적인 개발자의 멋진 마음가짐이지!
나도 그런 마음으로 이번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고!
지수야!
난 지금 이 게임이 하루라도 빨리 미친 듯이 하고 싶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저도 미친 듯이 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하고 싶냐!?”
“하고 싶어요오오!”
“좋아 그럼 이 마음을 가지고 지금 바로 이 시스템의 세부 기획에 들어가라!
나는 지수 네가 가져올 육성 파트를 바탕으로, 실제로 유저가 플레이하게 될 전투 시스템 작업에 들어갈 테니!
그리고 혁찬이와 캐릭터 관련 내용도 논의 해야 하고!”
그러자 지수가 귀엽게 경례 자세를 취하며 상혁에게 물었다.
“옛-썰!!! 근데, 캐릭터요?”
“어. 캐릭터. 전에 부탁했던 작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맞다. 혁찬 오빠는 스토리팀이랑 히로인 작업에 들어갔었죠?
요즘 그거 때문에 거의 파김치가 되었던데, 무슨 일 있어요?”
“별건 아니야. 그냥 양이 좀 많아서 그럴 뿐.
애당초 어떤 게임이든 연애 파트가 들어가면 스토리 볼륨이 엄청나게 커지거든.
근데 그걸 수집형 게임에 맞는 캐릭터 수량으로 작업하려니, 각 캐릭터들의 성격 차이에 따른 상호작용도 고려해야 하고, 캐릭터의 배경에 어울리는 성격 구성도 갖춰야하지.
누가 누구랑 라이벌 관계인지, 누가 누구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각 영지의 수호자인 파일럿은 누구이며 그 영지에서 활동하는 프리 나이트는 어떤 조직이고 어떤 구성원을 가졌는지.
일반적인 오픈 월드 게임이라면 세계관 설정과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메인 서사에 집중하면 되는 대신 메인이 되는 캐릭터의 숫자가 제한되고, 캐릭터 수집형 게임이라면 각 캐릭터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 대신 세계관이나 메인 서사의 비중이 줄어들지만 이건 둘 다 구현하는 게 목적이잖아.
우리가 이번 작품에서 RPG와 시뮬레이션 사이의 장벽을 허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혁찬이 소속된 스토리팀 역시 비슷한 도전을 강요받고 있는 거지.
게다가 월드의 스케일은 서양식 AAA급 오픈월드 게임 수준으로 큰 데 반해서, 캐릭터는 전형적인 일본식 미소녀 캐릭터가 될 테니까 그래픽 팀 역시 서로 다른 두 컨셉의 비중을 조화롭게 맞추는 데 중점을 두고 있고.
프로그래밍 팀 역시 PRD의 괴물 같은 사양에서 벗어나 현재 리얼 엔진에서도 지원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리얼 엔진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시스템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고.
결국 이번에 만드는 신작도, 플랫폼은 일반 가정용 콘솔로 돌아갔지만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력은 HC 101과 별반 다를 게 없어.
HC 101을 만들 때의 우리가 기술의 한계에 도전했다면, 이번 신작은 기술이 아닌 ‘개발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과정이 될 테니까.”
“편하게 가는 법이 없네요. 우리 회사는.”
지수가 그렇게 말하자 상혁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좋아하잖아? 남들 안 하는 짓만 골라서 하니까.”
그러자 지수도 웃으며 상혁에게 답했다.
“맞아요. 난 아무도 안 하는 괴상한 짓만 골라서 하는 우리 회사가 너무 좋아요.
무려 남들이 아무도 시도 안 하는 AAA 스케일의 오픈 월드 스타일 캐릭터 수집형 메카닉 RPG를 만들겠다고 수천억을 태우는 회사는, 아마 우리 회사 말고는 없겠죠.”
‘내년 9월 말에 원진 나오는데.’
상혁은 그 말을 굳이 입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아는 ‘원진’이란 게임에 대해 떠올렸다.
자신이 지금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툰 렌더링 기반의 그래픽으로 오픈 월드와 캐릭터 수집요소를 동시에 구현한 그 게임을.
상혁이 기억하는 원진은, 뛰어난 캐릭터성과 화려한 그래픽, 그리고 높은 완성도를 가진 좋은 게임이었지만, 상혁은 현재 만들고 있는 신작이 원진에 밀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상혁은, 원진이란 게임을 ‘넘어야 할 벽’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 1년 만에 누적 매출 2조 3천억을 기록한 희대의 ‘오타쿠 용’ 오픈월드 RPG.
물론 랜덤 박스 시스템의 도움 없이 원진의 매출을 압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상혁이 노리려는 것은 신작을 통해 원진의 매출을 누르는 것이 아니었다.
상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게임으로 얼마의 매출을 벌어내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이 얼마나 게이머들을 즐겁게 해주었는가’였기 때문에.
그리고 상혁은 적어도 그 ‘즐거움’의 측면에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인력도 이쪽이 더 작업 경험이 풍부하고 평균 연봉도 더 높은 데다 작업자들의 작업 의지도 이쪽이 더 충만하다.
제대로만 하면, 질 이유가 없지.’
주먹을 꽉 쥐어 보이는 상혁을 보며, 지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물었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어? 아냐. 그냥 혁찬이가 캐릭터를 멋지게 뽑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잘 뽑았겠죠. 그래도 혁찬 오빠가 작업하는 건데.”
“그래도 몰라. 이번엔 다른 게임의 메인 캐릭터 분량을 가진 히로인들이 무지막지하게 많이 필요하니까.”
“흠···. 얼마나 요구하셨는데요?”
“200명.”
“헉!”
세상에 히로인만 200명인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니.
상혁이 요구한 터무니없는 숫자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지수를 보며, 상혁은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캐릭터 수집형 게임이잖아. 200명은 있어야 모을 맛이 좀 나지.”
“올드 스크롤 하늘림에 등장하는 여성 NPC 전부 합쳐도 200명이 안 될 건데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그리고 우리 스토리 팀 규모 정도면 히로인 200명 정도 작업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어.
게다가 나는 원래 50명 정도만 하려고 했었다고.”
“근데 왜 50명이 200명이 됐어요?”
“혁찬이가 그러던데. 50명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냐고.
그러면서 200명 만들겠다고 본인이 호언장담했으니, 알아서 해 오겠지.
어차피 작업에 필요한 시간은 필요한 만큼 다 지원할 테니까.”
상혁의 말에 지수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현재도 작업실에서 미친 듯이 캐릭터 설정 작업을 하고 있을 혁찬을 향해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본인이 자청해서 200명 이상의 히로인을 작업하겠다는 혁찬의 마음만큼은, 지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육성 시스템 기획을 맡게 된 자신 역시, 더 이상 개선할 부분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개발을 마치기 전까지는 출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 가능한 개발력의 바닥까지 긁어모아 게임을 완성하는 것.
그것은 PTW에서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자들이 철저하게 추구하고 있는 공통의 가치관이었다.
‘유저들이 좋아할 테니까.’
200명이나 되는 히로인이 등장하는 오픈 월드 RPG를 기쁜 마음으로 플레이할 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수는 자신의 앞에 놓인 기획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말했다.
“좋아! 혁찬 오빠만 멋진 모습을 보여주게 만들 순 없어요!
기대하고 있어요! 히로인 200명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육성 시스템을 가져올 테니까!”
“그럼 난 그 육성 시스템도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한 전투 시스템을 만들어주지.”
그렇게 말하며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두 사이엔 오로지 자신이 만들고 있는 게임을 완벽한 상태로 개발하고 싶어 하는 개발자의 뜨거운 의지만이, 마치 불꽃처럼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