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 나이츠 어셈블 2
단순히 게임을 위한 보조 콘솔을 넘어, 실시간 번역 기능이나 현존하는 VR 디스플레이 중 가장 강력한 성능, 그리고 워크 패스트와 연동되어 돌아가는 수많은 보조 기능 덕분에, 딥 다이버는 게임 콘솔을 가지지 않은 사용자들에게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제품이었다.
심지어 게임에 흥미가 없는 수많은 사용자들은 딥 다이버를 일종의 업무 보조 장비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에 딥 다이버의 강력한 AR 기능보다 뛰어난 전달수단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현재의 딥 다이버는 교육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도 인기가 높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교실에서 수많은 학생이 단체로 딥 다이버를 쓴 채 AR 기능을 활용하여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은, 그리 보기 힘든 모습이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산업 현장에서도, 딥 다이버는 그 놀라운 기능성으로 수많은 직장인들의 업무 생산성을 크게 올려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아마존같은 거대 물류 기업에서는 물자를 분류하는 직원들이 딥 다이버를 쓰고 상자를 보기만 해도 물품의 최종 목적지 같은 정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고, 어떤 상자를 어느 위치로 옮겨야 하는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자동차 생산 업체 중 딥 다이버의 독점 사용권을 인정받은 테슬러의 제조 공장에서는, 딥 다이버를 착용한 직원들이 생산 라인에서 차량의 조립 방법 및 순서, 각 공정의 불량 여부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차량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2019년 2월을 기준으로 산업용 및 일반용을 포함하여 무려 1억 2천만의 판매량을 달성한 딥 다이버는, 이제는 스마트폰이나 TV처럼 현대인의 생활 속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장비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슈퍼볼 광고와 함께 발매된 나이츠 어셈블 2.
최근 발매되었던 PRD를 메인으로 한 PTW의 라인업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딥 다이버 유저에게 최적화된 형태로 개발된 나이츠 어셈블 2의 등장은 게임에 관심이 없던 일반 사용자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사용자가, 이전까지는 D&D라는 게임의 존재조차 모르던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이번 주엔 바로 지난주에 있었던 슈퍼볼 광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정말 엄청난 반응이었죠.
물론 전작이었던 나이츠 어셈블 1편도 아직까지 플레이하는 유저가 상당수 있을 정도로 고정 팬층이 탄탄한 게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D&D라는 매니악한 시스템을 사용하는 게임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나이츠 어셈블 유저들은, 그 게임을 ORPG 플레이에 최적화된 온라인 게임 툴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실제로는 판매량도 PTA 게임 중에서는 가장 낮은 편이죠?”
“그렇죠. PTW의 게임들은, 그게 어떤 게임이든 신작으로 유입된 유저들이 회사의 전작도 구매해서 플레이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HC 101을 구매한 유저들은, 게임을 하다 PTW 게임 특유의 재미에 빠져들게 되고, 다른 PTW의 게임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죠.
그렇게 작품을 하나하나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최초의 상업용 타이틀이었던 마리의 눈물까지 플레이하게 되는 것이 PTW의 팬이 되는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PTW의 구작들은 발매 당시엔 십만에서 백만 단위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타이틀 대부분이 천만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죠.
‘명작은 시대의 흐름을 타지 않는다.’
PTW 팬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나이츠 어셈블은 그중에서도 좀 예외적인 타이틀이고요?”
“그렇습니다. 애당초 나이츠 어셈블이란 게임 자체가, D&D에 로망을 느끼고, 역할연기라는 플레이 스타일 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플레이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니까요.
물론 나이츠 어셈블의 싱글 플레이 역시 좋은 스토리 라인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무장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이츠 어셈블은 멀티 플레이가 메인인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모험가의 광장이라 불리는 멀티 플레이 로비에서 자신이 참여할 세션을 찾고, 다른 플레이어가 DM역할을 맡아 진행하는 스토리에 참가해 게임을 즐기죠.
그 과정에서 나이츠 어셈블의 진정한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DM을 맡은 플레이어의 능숙한 진행 기술이 요구됩니다.
나이츠 어셈블의 멀티 플레이 툴을 자신의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정말 능숙한 DM이 진행하는 세션에 합류할 수 있다면, 나이츠 어셈블은 그야말로 D&D가 지향하는 재미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갓겜’이 됩니다.
반면에 툴을 잘 다루지 못해 배경 하나 바꾸는 데만 몇 분씩 걸리는 초보 DM과 함께 게임을 하면, 대체 이 게임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 건지 이해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갑갑함을 느낄 수 있죠.
그렇기에 나이츠 어셈블은 무려 PTW의 게임임에도, 현재까지 천만 단위 이하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작품이었습니다.
‘절대 속편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유명한 PTW가, 자신들의 철칙을 깨고 나이츠 어셈블2를 최초의 후속작으로 발매한 이유는, 발매 당시에 성능과 제작력의 한계 때문에 넘어설 수 없었던 전작의 부족함을 커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D가 추구하는 역할연기의 재미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후속작인 나이츠 어셈블 2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이번엔 어째서 같은 D&D를 소재로 잡은 게임임에도 이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던 걸까요?”
“그건 아마도 ‘가이드’의 존재 때문이겠죠.”
“가이드요?”
쇼를 진행하던 허먼이 자신의 쇼에 게스트로 참가한 조니 갈레키에게 질문했다.
그는 D&D의 라이선스를 개발한 ‘소서러 오브 코스트’의 직원이자, D&D의 5번째 판본 개발에 참여했던 개발자 중 한 명이었다.
허먼의 질문을 받은 갈레키는, 잠시 슈퍼볼에서 공개되었던 나이츠 어셈블 2의 광고 시퀀스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허먼의 질문에 답했다.
“허먼 씨, D&D처럼 진입장벽이 높은 매니악한 게임이, 대중성을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흠···. 글쎄요?”
“바로 옆에서 볼 때 재미있어 보이는 겁니다.”
그가 말했다.
“세상엔 매니아를 위한 수많은 게임이 있고, 그 게임들은 대부분 익숙해지면 푹 빠져 들만한 멋진 게임들인 게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신규 유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옆에서 보고 ‘어? 저거 재미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D&D도 그렇습니다.
멋들어진 형태의 주사위.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그림이 그려진, 양피지 느낌의 멋진 캐릭터 시트.
분위기를 살려주는 보기에도 무서워 보이는 몬스터의 피규어.
그리고 게임을 진행하는 DM의 숨 막힐듯한 연기.
D&D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그런 게임의 요소를 보고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주사위의 숫자에 따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환호하는 플레이어들을 보고, 나도 그 안에 들어가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다고 생각하죠.
반대로 몇몇 게임들은, 옆에서 아무리 지켜보아도 저 게임을 왜 재미있게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게임들도 있습니다.
그런 게임들은 대부분, 게임의 내용 자체는 엄청난 깊이를 가지고 있지만, 게임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게임들이 많죠.
‘이 게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게임에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태양의 제국(Empire Of the Sun) 보다는 D&D가, D&D보다는 PC 게임이 좀 더 직관적으로 보기 쉬운 매력을 어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PTW의 슈퍼볼 광고에서, PTW는 게이머들에게 확실하게 못을 박는 광고를 진행했죠.
‘너희들이 이 게임을 한다면, 너희는 이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황좌의 게임과의 콜라보는 그래서 진행한 것일 테고요.
생각해보세요.
이미 나이츠 어셈블 2가 나오기 전부터, 기존의 나이츠 어셈블 유저들은 룰 크리에이티브 모드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황좌의 게임을 TRPG 형태로 즐겨오고 있었습니다.
나이츠 어셈블에는, 단순히 시나리오 에디트 기능만 들어있지 않았으니까요.
그 게임에서, 유저는 자신이 원한다면 현대 배경의 TRPG나 펄아웃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오리지널 룰, 혹은 유명한 다른 프렌차이즈의 룰을 마음껏 차용해서 게임을 즐길 수 있었죠.
어차피 개인이 만들고 지인들과 세션을 만들어 플레이하는 게임이니, 조금 어설프더라도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게임에 매우 익숙해진 유저들을 위한 컨텐츠죠.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고인물 유저들이 나이츠 어셈블의 멀티 플레이세션에서 무슨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D&D를 온라인으로 플레이 하는 거겠지.’ 정도로 생각하죠.
PTW의 이번 광고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정확한 가이드를 제시한 겁니다.
320명이 넘는 헐리우드 인기 배우들의 목소리와 모델링.
그리고 일본 유명 성우들의 목소리.
거기에 드라마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황좌의 게임의 등장인물들까지.
그 영상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하겠죠.
나도 저 게임을 하면서 타리엘 라디스터나 돈 스노우 같은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내 입으로, 내 감정을 담아서, 죤 빈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고.
‘여름이 오고 있소.’
그 광고야말로 이 게임에서 유저가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재미가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더 큰 가능성을 보여주는 광고이기도 하고요.”
“더 큰 가능성이라면?”
“PTW가 보여준 광고에서는 ‘황좌의 게임’ 외에 ‘그라디에이터’의 한 장면도 등장했죠.
그리고 320명에 가까운 헐리우드 배우들의 보이스 체인저가 탑재되었다고 언급하고 있고요.
그 문장을 보면서, 허먼 씨는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허먼이 답했다.
“혹시 스○워즈에 나온 배우들도 리스트에 있다면 스○워즈로 TRPG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바로 그겁니다. 결국 PTW에서 맺은 라이선스 계약은 각각의 배우들과 목소리 사용에 관한 계약을 맺은 것뿐이지만, 그걸 활용하는 측에서는 기존의 프렌차이즈를 이용해서 자신만의 스토리나 역할연기를 펼쳐나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나이츠 어셈블 2는, 원래 그렇게 가지고 노는 물건이 맞고요.
애당초 리얼 엔진 기술의 일부가 탑재된 게임이라, 숙련된 마스터가 작업한다면 원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 NPC를 만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PTW가 제공하는 방대한 라이브러리 속에서, 원본 배우의 모델링을 불러 거기에 입히고 싶은 복장을 입히면 끝이죠.
이제까지 D&D 유저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게임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쓰곤 했습니다.
D&D 라는 게임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그래픽 프로세서인, ‘인간의 상상력’을 이용해서 플레이하는 게임이라고요.
하지만 이제 그것도 의미가 없어졌네요.
나이츠 어셈블2를 플레이한다면, 마스터가 상상한 그대로를 너무나도 쉬운 방법으로 플레이어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 허먼이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배우의 외형과 목소리를 사용한다고 해서 원작이 주는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스○워즈의 한 장면을 재현하고 싶다면, 우선 그 한 장면을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니까요.”
“그렇죠. 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되지만, 연기력이나 스토리 구성 능력, 임기응변이나 디자인 능력은 모든 DM마다 다릅니다.
그러니 어쩌면, 나이츠 어셈블 2의 등장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 직업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새 직업이라면?”
“오로지 나이츠 어셈블 2의 스토리 진행만을 담당하는 전문 DM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스○워즈라는 프랜차이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스○워즈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해내는 DM에게 돈을 내고서라도 게임 진행을 맡기려 할 테니까요.
안 그래도 나이츠 어셈블의 전작에는 세션에 참가한 플레이어가 DM이 만든 세션이나 DM 본인에 대해 평점을 매길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능숙한 DM은, 그 평가 점수에 따라 랭크를 부여받기도 했고요.
그 시스템은 이번 작품에서도 적용되어 있으니, 랭크가 높은 DM은 정기 후원을 받는 방식이나 한번 세션 진행에 얼마를 받는 방식으로 게임으로 돈을 벌 수도 있겠네요.”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나이츠 어셈블 2가 발매된 지난주 이후로, 주변에서 D&D를 플레이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는 유저들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하니까요.
학생들이 주로 다니는 커뮤니티에서도, 이제는 D&D를 능숙하게 플레이하는 친구를 추천하는 게시글이 자주 올라오고 있죠.
바로 지난주까지, D&D는 너드의 상징 같은 존재였지만, PTW가 발매한 나이츠 어셈블2는 그런 그들을 학교의 인기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D&D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너드 취급을 받던 저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사태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라고 할 수 있겠네요.”
허먼의 말처럼, ‘인싸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헐리웃의 셀럽들이 대거 참여한 나이츠 어셈블 2의 보이스 체인저는, 그런 셀럽을 동경하는 수많은 ‘인싸’들이 게임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말을 걸지 않거나 심지어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던 ‘아싸’들에게, 친근한 척 말을 걸어 게임의 플레이 방법에 관해 물어볼 만큼.
나이츠 어셈블2와 딥 다이버가 유저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폭풍처럼 커져가고 있었다.
“마이클에게 들었는데, 토니, 네가 나이츠 어셈블 1편에서 플래티넘 DM이었다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주변의 주목을 받아본 적 없던 평범한 소년 토니는, 갑자기 자신의 자리로 찾아와 말을 거는 소녀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말을 건 소녀는, 반에서도 소위 말하는 ‘인기인’ 그룹에 속해있는 인기녀, 제니퍼였기 때문에.
갑자기 자리를 찾아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그녀를 보며 토니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응.”
“오, 진짜야? 그럼 나이츠 어셈블 2도 샀겠네?”
“나온 날 바로 샀지.
매장에는 물건이 없어서 다운로드로 구매했지만.”
“그럼 그 DM이라는거, 너 잘해?
스트리머가 하는거 봤는데, 잘하는 DM은 막 진짜 영화속에 들어간 것처럼 연기도 하고 그런다는데?”
“어? 음···.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연기 못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거 같은데?
DM 등급도 플래티넘이기도 하고, 난 1편에서도 원래부터 음성 연기를 지원하는 플레이를 해왔거든.”
“플래티넘이면 높은 거야?”
“나이츠 어셈블에서는 높은 거지. 마스터 밑에 다이아 바로 아래니까.”
“오! 그럼 혹시 나한테 게임 하는 법 좀 가르쳐줄 수 있어?
난 배우가 꿈이라 연기학원을 다니는 중인데, 주변 친구들은 다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잘하는 DM이랑 하면 진짜 연기하는 느낌이라고 해서 알아봤는데, 네가 제일 잘한다고 하더라?
혹시 오늘 학교 끝나고 같이 할 수 있어?”
“1:1로 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닌데 나이츠 어셈블은 4명 정도가 하는 게 제일 재밌어.
혹시 친구 중에 하고 싶어 하는 애들 있어?”
“캐런이랑 클라크도 끼고 싶대.
나머지 한명도 찾아보면 금세 찾을 수 있을걸? 지금은 학교 전체에서 유행 중이니까.”
“그래도 초보만 4명이면 진행이 너무 갑갑하게 느껴질 거야.
어느 정도는 플레이팀에도 숙련자가 끼어 있어야 진행이 빠르거든.
나머지 한 명은 내가 진행하는 정기 세션 멤버로 넣어도 될까?”
“오, 뭔가 말 하는 게 전문가 같아! 네가 그게 편하다면 원하는 대로 해도 돼.”
“좋아. 그럼 리퀘스트를 받을 게.”
“리퀘스트?”
“지금 학교에서 나이츠 어셈블2를 플레이하는 애들은, 대부분 좋아하는 영화 속 배우로 플레이하고 싶어 하잖아.
그러려면 영화에 맞춰서 미리 배경이랑 룰, 시나리오랑 캐릭터를 준비해야 해.
원한다면 업벤져스 멤버가 되어서 뉴욕을 구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닥터가 되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과 공간을 여행할 수도 있어.
네가 하고 싶은 체험에 관해 이야기해주면, 내가 거기 맞춰서 세션을 준비해놓을게.”
“진짜로 그런게 가능해?”
“가능해. 나이츠 어셈블 1편에서도 가능했던 거긴 하지만, 2편에서는 더 쉽고 완벽하게 씬 구선이 가능하거든.
예전엔 일주일 꼬박 걸리던 작업이, 지금은 반나절이면 끝날 정도로.
DM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다루기 편해졌다고 할 수 있지.”
“흠···. 하지만 나는 오늘 바로 해보고 싶은데···.”
“그럼 오리지널 말고 기본으로 제공하는 설정으로 플레이하면 바로 할 수 있어.
특히 황좌의 게임은 아예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거라 나이트 워치부터 레드 킵까지 7 왕국의 모든 장소와 소품이 구현되어 있거든.
그걸로 해보고 싶다면, 오늘 방과 후에도 바로 플레이할 수 있을거야.”
그러자 제니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 나 황좌의 게임 좋아해.”
“그럼 내가 만든 황좌의 게임용 시나리오로 플레이 하는 걸로 하자.
원래는 나이츠 어셈블 1편 용으로 에다드 스터크가 레드 킵에 도착한 직후의 이야기를 다룬 시나리오인데, 평가가 괜찮은 편이었거든.”
“오, 그럼 거기 나오는 배우들 연기도 토니 네가 하는거야?”
제니퍼의 질문에 토니가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오직 하나야. 그 신의 이름은 죽음이지. 우리가 죽음에게 하는 말은 하나밖에 없어.
오늘은 아니야.”
황좌의 게임의 인기 캐릭터이자 바라보스 제일검 ‘시레오 포렐’을 따라하는 토니의 소름 끼치는 연기를 들으며, 제니퍼는 토니의 연기가 연기학원에서 보았던 다른 어떤 동기의 연기보다 뛰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나이츠 어셈블 1편부터 수없이 많은 세션을 DM으로 진행하며 다져진, 플래티넘 등급 DM의 실력에 어울리는 ‘실전 연기’라 할 수 있었다.
***
그렇게 게이머들이 ‘나이츠 어셈블 2’의 매력에 열광하는 사이, 상혁은 PTW에서 차기작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게임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메인 컨텐츠를 결정하는 ‘초기 기획’ 단계야말로, 기획이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동료 개발자로부터 올라오는 ‘욕망의 덩어리’ 중 게임에 집어넣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
그것은 일관성 있는 게임의 플레이가 유지되는 데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올린 제안은, 게임 안에서 학원처럼 다닐 수 있는 아카데미 형태의 로봇 교육 시설을 넣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상혁의 앞에서 기획 내용을 보고 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 전까지는 하렘 애니메이션의 ‘ㅎ’에도 관심이 없던 PTW의 마스터 클래스 기획자, 미야모토 카렌이었다.
그녀는 상혁과 함께 감상한 애니메이션 릴레이 이후로, 완전히 오타쿠의 감성이 되어 매일같이 오타쿠들이 좋아할 만한 기획을 올리는 중이었다.
어느 하나 작업량이 만만치 않은, 그것만으로도 게임 하나를 만들 수 있을 만한 규모의 기획을.
그리고 그녀가 오늘 가져온 기획은, 오픈 필드에서 전함 형태의 거점을 통해 이동하는 게임의 기본 구성과는 완전히 다른 컨셉을 포함한 기획이었다.
“프리 나이트 소속인 주인공과는 다르게, 정규 나이트 소속의 파일럿들은 일정한 교육 기관에 소속되어 나이트 조종법을 익히는 게 자연스럽겠죠.
그리고 나이트의 파일럿이 여성으로 한정된 이상, 그 장소는 자연스럽게 여학교 같은 금남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공간에서, 세계에서 오직 단 한 명, 나이트를 조종할 수 있는 남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오타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멋진 전개라고 생각합니다.
상혁 씨가 저에게 추천하신 애니메이션, ‘인피니트 스트레이토스’도 비슷한 설정을 하고 있고요.”
“하지만 그런 컨텐츠를 넣으려면 프리 나이트 소속의 주인공이 정규 나이트들만 갈 수 있는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는 타당한 설정이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순간, 오픈 월드 탐험이라는 메인 컨텐츠는 잠시 중단될 테고요.
월드를 돌아다니며 약자를 구원해야 하는 프리나이트가, 굳이 구원 활동을 멈추고 정규 나이트만이 가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이유는 뭐가 적당하겠어요?”
“졸업 시험 보상이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설정은 어떨까요?
나이트의 구동에 꼭 필요한 에너지 코어라던가?”
“클래식하고 좋은 설정이긴 한데, 애당초 프리 나이트들은 망가지고 버려진 나이트들을 분해해서 장비를 수리하잖아요?
에너지 코어라는 물건이 필요할 때마다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한다면, 프리 나이트라는 조직은 존재하기 어려웠겠죠.”
“저는 더 생각나는 아이디어가 없는데, 혹시 상혁 씨는 있으신가요?”
“프리 나이트의 입장에서, 정규 나이트만이 다닐 수 있는 아카데미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잠입 업무라고 할 수 있겠죠.
아카데미에 잠입해야 할만한 이유를 만들어서, 원하는 캐릭터 한 명과 신분을 속이고 입학하는 전개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플레이어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나머지 시간에도 아군 프리 나이트들이 약자 구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거고, 필요하다면 외부 지원 형태로 주인공의 퀘스트에 개입할 수도 있겠죠.
무엇보다 누구를 데려가는지에 따라서 이야기 전개가 달라질 테니, 몇 번을 플레이해도 질리지 않는 컨텐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잠깐만요. 그럼 데려가는 캐릭터에 따라서 아카데미에서 겪는 이벤트가 전부 달라질 텐데요?”
“그렇겠죠.”
“그럼 컨텐츠의 볼륨이 지금의 몇 배는 커질 겁니다.
게다가 회차 플레이를 하지 않으면 나머지 캐릭터의 이벤트는 전부 버려지는 이벤트가 될 거고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서브 컨텐츠에 불과한 아카데미 파트에, 그 정도 작업을 투입할 가치가 있을까요?”
카렌의 질문에 상혁이 답했다.
“이건 서브니까 이 정도 볼륨으로 작업해도 돼.
이건 메인이니까 이 정도 볼륨으로 작업해야 해.
저는 게임을 만들 때 그런 기준으로 컨텐츠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컨텐츠를 두고 보았을 때, 어떤 볼륨으로 들어가야 최고의 재미를 줄 수 있을까만을 고민하죠.
카렌 씨가 가져오신 아카데미 파트에 대한 기획은, 그 자체만으로 게임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볼륨이 되어야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물건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여학생밖에 입학하지 못하는 금남의 공간에 플레이어 혼자 남자의 몸으로 입학한다는 전개는, 오타쿠들에게 있어서는 꿈같은 전개 그 자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막상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갔더니 그 안의 컨텐츠가 부실하다면, 그 꿈은 배신당하게 될 겁니다.
저희가 기대하게 만든 그대로의 재미를 전달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개발력의 투입이나 리소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저희 개발자들에게 있어서 PTW가 가지는 의미는, 바로 그런 부분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회사 차원의 충분한 서포트를 해 주는 회사가 바로 PTW라는 겁니다.
그러니 적어도 PTW에서 게임을 만들 때만큼은, ‘이거 만들려면 엄청 오래 걸릴 텐데’라던가, ‘이거 구현하려면 수백 명은 투입해야 할 텐데’ 같은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맥시멈으로, 시대가 구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재미를 목표로 하는 게 저희의 모토니까요.”
상혁의 말을 들은 카렌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올린 기획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CCO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니, 저도 자제하지 않겠습니다.
원래 제가 잡은 기획은 이거보다 몇 배는 컸지만, 그렇게 만들면 메인 컨텐츠의 위치가 흔들릴 것 같아서 엄청나게 깎아냈거든요.”
“기획서를 보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기엔 분명 뭔가가 더 붙어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메인 컨텐츠의 위치가 흔들릴까봐 서브 컨텐츠의 볼륨을 억지로 줄이는 판단은 하지 말아주세요.
현재 메인 컨텐츠의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기획자는 저고, 저는 카렌 씨가 아무리 무지막지한 볼륨의 서브 컨텐츠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 같은 메인 콘텐츠를 만들어낼 생각이니까.”
“그럼 이 관계에서, 저희는 라이벌이군요.
제가 기획한 아카데미 컨텐츠가 더 재미있을지, 아니면 상혁 씨가 기획한 메인 컨텐츠가 더 재미있을지를 겨루는 라이벌.”
“저는 그것이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자들이 지향해야 하는 올바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100미터를 달리면, 또 누군가는 200미터를 달리고, 그걸 본 제가 또 300미터를 달리는 거죠.”
“바운스(bounce)말씀이시군요.”
“맞아요. 기획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상대에게 부딪히는 직업이죠.
그 과정에서, 상대가 맞받아친 힘이 더해지면서 공은 더 빨라지고, 더 높게 튀어 오릅니다.
그러니 현재 카렌 씨가 할 수 있는 전력으로 기획을 가져오세요.
그럼 전 제가 할 수 있는 전력으로 그 기획을 뛰어넘을 테니까.”
“그러다 상혁 씨가 패배하면요?”
“그럼 그때는 게임의 장르가 오픈월드 RPG에서 아카데미 물로 바뀌는 거죠.
가장 재미있는 컨텐츠가, 메인 장르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상혁의 말을 들은 카렌이 ‘풉’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기획서를 옆구리에 끼며 말했다.
“그거 아세요? 상혁 씨는 제가 아는 기획자 중에 제일 미친놈 같은 기획자예요.”
“좋은 의미로?”
“좋은 의미로.”
“그럼 저도 한 말씀 드리죠.
그 미친놈은, 웬만한 각오로는 쓰러트리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아이디어 하나하나에 목숨을 걸고 전력으로 달려드세요.
제가 바라는 건, PTW의 모든 직원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게임을 개발하는 거니까.”
카렌은 대답 대신 고개 숙여 상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그녀가 나가자, 이번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혁찬이 들어왔다.
카렌이 가져온 것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봐도 수백 페이지는 될 것 같은 엄청난 제안서를 들고서.
그렇게 혁찬이 들어온 문 너머에는, 마찬가지로 제안서를 들고 있는 수많은 개발자가 마치 맛집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