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 역전 터치다운
지수와 혁찬을 중심으로 게임의 세계관과 캐릭터에 관한 설정 작업을 맡긴 상혁은 다음으로 카렌과 함께 신작의 시스템 기획 작업에 들어갔다.
전투가 전달하는 기본적인 이미지 자체는 GOS의 것을 따라간다 하더라도, 플레이어가 조작할 수 있는 기체의 개념이 추가되고 오픈월드로 게임 방식이 변화됨에 따라서 신작에서는 기존의 전투 방식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새로운 전투 시스템이 요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시스템 기획에 앞서, 상혁은 PTW 본사에 있는 내부 영화관으로 카렌을 호출했다.
그런 상혁의 왼쪽에는 하렘 전개나 로봇이 등장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블루레이와 DVD가 잔뜩 쌓여있었고, 오른쪽에는 캐러멜과 치즈, 버터 맛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맛의 팝콘이 트레이 위에 놓여 있었다.
자신을 굳이 버츄얼 스튜디오 안의 영화관이 아닌,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영화관으로 불러낸 이유가 궁금했던 카렌은 그런 상혁에게 질문했다.
“솔직히, 영상 감상이 필요했다면 그냥 버츄얼 스튜디오 안에서 봐도 됐을 텐데요?”
“그럼 팝콘을 못 먹잖아요. 아, 혹시 카렌 양은 나초나 감튀가 취향이신가?
아니면 버터구이 오징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옆 좌석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리는 상혁을 보며, 카렌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제로 콜라면 됩니다.”
“옛~썰! 여기 있습니다!”
상혁은 좌석 옆에 있는 트레이 하단의 이동식 냉장고에서 다이어트 코크가 들어있는 패트를 꺼내 카렌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자신은 트레이 위의 커다란 팝콘 통을 다리 위에 놓고는, 리모콘을 들어 준비한 애니메이션을 재생시켰다.
그런 상혁의 옆자리에 앉은 카렌은, 엄청나게 커다란 화면으로 재생되는 고전 애니메이션의 타이틀을 보며 상혁에게 말했다.
“마동왕 그랑죠트네요?”
“한국에서는 ‘뇌절전사 슈퍼 그랑드’라는 이름으로 방영된 애니메이션이었죠.
시작은 이걸로 할까 해서요. 혹시 카렌 양은 이 애니메이션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뇨. 이건 한국에서만 인기가 엄청 좋았다고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당시 ‘마진영웅전 와타루’가 인기였고, 그랑죠트는 인기가 없었거든요.”
“뭐 나라마다 취향이 다르고 시대가 요구하는 감성에 따라 흥행하는 작품이 달라지니까요.
그래도 한국인인 저로서는 이 작품에 더 애정이 갑니다.
커다란 머리에서 멋진 로봇으로 변신하는 변신 기믹.
마치 트리케라톱스처럼 생겨 아군보다 멋진 적 로봇들의 디자인.
어린 시절 상상으로만 가 볼수 있었던 미래의 달에 대한 상상.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좋은 애니메이션이죠.”
“이거 4쿨 짜리 애니메이션 아니에요?”
“정규 시즌이 41화에 OVA가 5편 있죠.”
“그걸 다 보시려고요?”
카렌은 옆에 있는 다른 애니메이션을 보며 물었다.
“그거 말고도 많은 것 같은데?”
“예. 그래도 그중에는 ‘인피니트 스트레이토스’같이 1쿨 짜리 짧은 애니메이션도 있어요.
비록 2기도 있어서 결국 2쿨 분량이긴 하지만.”
“전부 보려면 몇 주는 걸릴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적당히 지루한 파트는, 스킵하면서 진행할 거니까.”
카렌은 극장 안을 둘러보았다.
거기엔 상혁과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감상을 위해 모인 PTW 직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팝콘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매우 익숙한 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매 게임을 제작할 때마다, 여러 작업자가 해당 게임이 지향하는 감성을 공유할 수 있도록, 상혁은 자주 이런 감상회를 진행하곤 했기 때문에.
상혁은 그런 행위를 두고 ‘싱크로율을 올린다’라고 표현하곤 했었다.
한 작업자가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한 아이디어를 말했을 때, 다른 작업자가 그 아이디어가 가진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단체 관람.
그것을 통해, PTW의 개발자들은 모두가 같은 수준의 지식과 감성을 지닌 상태로 개발에 들어가고 있었다.
카렌은 그런 방법이 옆에서 볼 때는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애당초 히어로 물의 팬이 아니면서 히어로가 주인공인 게임을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처럼, 로봇과 미소녀 하렘물에 대한 감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멋진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녀는 이번 감상회를 ‘취향의 지평’을 넓힐 기회라 여기기로 하고, 옆에서 팝콘을 씹고 있는 상혁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 찾을 건 뭐죠?”
“찾을 거요?”
“지금까지 목적 없는 감상회는 없었잖아요.
이번엔 종전보다 감상해야 하는 작품의 가짓수도 많고, 장르도 천차만별이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에 집중해서 감상해야 할지에 대해 알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라···.”
잠시 고민하던 상혁은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기묘하게 생긴 총을 쏘아 로봇을 소환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상혁은 한동안 말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다, 카렌에게 말했다.
그가 직원들을 모아놓고 보여주려는 애니메이션들.
그 안에서 직원들이 찾았으면 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매우 심플한 하나의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로망이네요.”
“로망이요?”
“예. 로망. 인간은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죠.
예를 들면 지금 저 화면에 나오는 것처럼, 의식이 있는 로봇의 계약자가 되어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것도 로망이 될 수 있고, 아니면 여성만이 거주할 수 있는 금남의 공간에 거주할 권리를 가진 단 한 명의 남성이 되고 싶어하기도 하죠.
임무라는 핑계로 동년배의 미소녀와 한집에서 동거하고 싶어하기도 하고, 때로는 곤란에 처한 미녀를 구원하는 백마 탄 왕자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 보게 될 애니메이션들은, 그런 인간의 욕망을, 어찌 보면 유치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그런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입니다.
그 욕망은 책상에 코인을 집어넣었더니 초등학교가 갈라지면서 로봇이 출동하게 만들고, 할아버지가 천재 발명가라 지하실에 수십 미터 크기의 로봇을 만들게 하죠.
그런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아이들은 꿈을 꿉니다.
학교의 지루한 수업을 들으며 ‘내 책상에도 로봇을 출동시킬 수 있는 구멍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언덕에서 공놀이하다 우연히 기어들어 간 환풍구의 끝에, 경찰이 비밀리에 개발 중이던 최신형 인공지능 로봇이 있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하죠.
그런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가 바로 지금의 저희 세대고요.
저는 저희가 만들 새 게임이, 그런 어른 세대의 가슴속에 있는 욕망을 불러일으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패드를 잡고 게임을 하는 순간 만큼은, 진짜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으면 하고요.
저희가 이 애니메이션들에서 찾아야 하는 로망은, 바로 그런 로망입니다.
게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나 이벤트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게임을 하지 않을 때도 오늘 퇴근 이후에 패드를 잡고 무엇을 할지를 즐거운 기분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게임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주인공이 느끼는 것처럼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로망이요.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게임에 집어넣을 생각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번에 개발하는 신작은, 어른들의 마음속에 있는 유치한 욕망을 다시 끄집어내게 만드는 욕망의 항아리 같은 작품이니까요.”
상혁의 말을 들은 카렌은 조용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상혁의 다리 위에 있는 팝콘 그릇에서 팝콘을 한 웅큼 집어가며 말했다.
“요컨대 어린 시절 수없이 망상에 빠지게 했지만, 어른이 되면서 점점 잊고 있던 그런 감성을 자극하고 싶다는 거죠?
세상의 모든 미소녀가 나만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고, 세상의 모든 약자를 구원하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는 그런 어린애 같은 욕망이요.”
그리고는 손에 든 팝콘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좋네요. 로망. 저는 나이를 먹은 지금도 가끔 파킷몬 마스터가 되고 싶다는 망상을을 꾸곤 하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유치하면서도 부러운 게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죠.
남들 안 하는 짓만 골라 하는 게, PTW다운 개발법이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팝콘을 씹으며 상혁이 준비한 작품의 감상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되어, 영상이 보여주는 재미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
매달 2월은 미국인들에겐 축제와 같은 달이었다.
전 세계에서 미국 외에는 즐기는 인구가 극히 적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미국인만을 상대로 하는 로컬 스포츠.
그래서 이름부터 대놓고 ‘미식 축구(American football)’라고 붙여진 미국 최고의 스포츠 리그 결승전이, 바로 2월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이유로, 2월은 광고를 좋아하는 마케터들에게도 축제의 장이 되곤 한다.
매년 1억 명이 넘는 시청자가 주목하는 단일 이벤트.
그 뜨거운 열기에서 중간중간 나오는 광고들은, 미식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내용에 주목하게 만드는, 말 그대로 ‘광고의 꽃’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꽃의 가격은, 결코 싸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단 1초의 광고 시간을 받기 위한 비용이 2억 원.
참가한 기업에서는 웬만한 대기업이 아니라면 손도 댈 수 없는 광고 비용을 내고 나서야, 1억 명에 가까운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제품이나 브랜드를 홍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기업 측에서 비싼 돈을 주고 겨우 얻어낸 광고 시간에 최대한 기발하고 인상 깊은 광고를 편성하려 노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광고들이, 역대 광고제의 상위권을 수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렇게 슈퍼볼은 자연스럽게 미식축구를 사랑하는 미국인들과, 광고를 사랑하는 광고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멋진 축제로 발전해왔다.
그리고 PTW라는 회사가 존재하는 지금은, 슈퍼볼 결승전은 게이머들에게도 축제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올해 PTW가 슈퍼볼 광고에 참여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슈퍼볼의 시청율이 크게 널뛰기 할 정도로 PTW가 게이머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거대했기 때문에.
그리고 올해 PTW는, 슈퍼볼의 중간 광고에 참여하는 기업의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면서 안 그래도 뜨겁게 달아오를 슈퍼볼의 분위기를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었다.
특히 미식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게이머들이 대거 시청자로 참여하면서, 2019년의 슈퍼볼 시청률은 역대 최고 기록을 갱신하게 되었는데, 이는 BLM 운동의 여파로 10년 만에 1억 명 이하의 저조한 시청자수를 기록했던, 회귀 전의 2019년 슈퍼볼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엄청난 열기입니다. 이 열기가 경기가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PTW의 광고가 가져온 기대감인지는 알기 어렵지만요.”
“아뇨,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죠.
일단 오늘 경기 내용만큼은 역대 최악의 경기인 게 확실하니까요.”
진행자의 말대로, 경기는 매우 지루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우선 점수부터 슈퍼볼 역대 최저의 점수대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3쿼터까지 양팀 모두 단 한 개의 터치다운도 기록하지 못한 지루한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53회를 맞이한 기나긴 슈퍼볼 역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올 시즌은 그 어느 때보다 득점이 많이 나온 시즌이었고, 결승에 올라온 두 팀은 리그 득점 2위와 4를 기록한 팀이었죠.
모두가 화끈한 난타전을 기대하는 가운데, 두 팀이 보여주고 있는 경기 양상은 전형적인 방패와 방패의 대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나마 3쿼터 들어서 조니 해커가 기록한 65야드 펀트 기록 갱신이 유일할 볼거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율이 크게 떨어지지 않고 있는 건, 아직 방송되지 않은 PTW의 신작 광고 때문일까요?”
“그걸 노리고 마지막 광고로 PTW의 광고를 편성한 거라면, 슈퍼볼 운영 측엔 천재가 있는 게 분명하겠네요.
하지만 오늘의 지루한 경기 양상은 PTW측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 X같은 경기 내용을 기억하느니, PTW가 보여준 신작에 대한 기억만 머릿속에 남기려고 할 테니까요.”
“만약 그 PTW의 신작 광고가 실망 그 자체라면요?”
“설마 그럴 리가요.”
마이크를 앞에 둔 해설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PTW라는 회사에 있어서만큼은,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렵겠죠.”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슈퍼볼 결승전을 지켜보던 상혁은, 그런 해설자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친, 겁나 부담되네.”
그러자 옆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민준이 말했다.
“뭐, 알고 들어간 광고잖아. 그리고 해설자의 말대로, 경기 내용이 지루한 만큼 광고가 주는 임펙트는 더 클 테고.
그럼 좋은 거 아냐?”
“경기에서 받아야 했을 재미를 광고에 기대하는 상황은 좀 그렇네.
게다가 나이츠 어셈블은 민준이 너도 알듯이 D&D를 딥 다이버로 플레이할 수 있도록 만든 게임이야.
D&D 자체가 너드들이나 즐기는 마이너한 게임으로 취급받는 만큼, 많은 게이머의 공감대를 사는 게 어려울 수 있지.”
그러자 민준이 상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적어도 내가 아는 나이츠 어셈블 2 라면, D&D가 뭔지도 모르는 유저 조차 흥미를 가지게 하기에 충분한 물건이니까.”
민준이 말을 마치는 순간, 3쿼터가 종료되었다.
그리고 게이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마지막 중간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기 내용에 하이라이트라 할만한 장면이 없어, 광고가 하이라이트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재생되는, PTW의 신작 광고가.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란 테마를 그대로 현실로 옮긴 듯한 느낌을 주는 광고영상이었다.
“차라리 경기장에서 볼 걸 그랬나?”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를 보며, 상혁이 투덜거렸다.
경기장에서 보았더라면 오로지 PTW의 신작 광고를 보기 위해 슈퍼볼 결승전 티켓을 구매한 팬들의 반응을 바로 볼 수 있었겠지만, 중계방송은 객석의 반응 대신 광고 내용만을 통으로 틀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상혁은 팬들의 구체적인 반응에 대해서 알지 못한 상태로, 단순히 영상으로 흘러나오는 광고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광고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어린 소년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운동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닌.
놀기 좋아하고 망상하기 좋아하는 지극히 평범한 소년의 모습.
영상은 그 소년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유저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평범함’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너 진짜 운동 못 하는구나.”
함께 운동을 하던, 훤칠하고 잘 생긴 친구의 평가.
“이걸 지금 숙제라고 가져온 거야?”
어린 마음에 비수를 꽂는 듯한 선생님의 평가.
“대니는 놀기만 좋아하고 잘 하는데 하나도 없어요.
커서 뭐가 되려는지 걱정이네요.”
‘평범함’을 죄지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부모의 대화까지.
그것을 몰래 듣고 있던 대니라는 소년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는 방에 돌아가 딥 다이버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즉시 반전되는 음악과 함께, 전신에 로브를 두른 마법사의 모습이 된 대니.
그의 앞에는 조금 전 대니에게 운동을 못 한다고 구박하던 친구와 닮은 얼굴을 한 기사가, 무릎을 꿇은 채로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아름다운 엘프 여성도 함께 무릎을 꿇으며 대니에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관록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상황 보고를 요구하는 대니.
그것은 학교에서 그가 보여주던 소심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황은?”
“최악입니다. 1번 루트로 진격하던 부대는 이미 전멸당했고, 2번째 루트로 들어갔던 주 병력도 고전 중입니다.
유일한 우회로는, 고대의 악마 ‘발록’이 길목을 지키고 있고요.
저희의 힘만으로 뚫어보려 했지만, 발록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대니가 손을 휘두르자, 빛과 함께 기다란 지팡이가 소환되며 대니의 손에 잡혔다.
대니는 그것을 장난감처럼 붕붕 회전시키더니, 탁하고 지팡이를 잡으며 눈앞의 허공을 향해 외쳤다.
“마스터. 파티 레벨을 생각해야죠.
저 레벨 시나리오에 발록이라니, 제정신이에요?”
그러자 허공에서 거대한 사람의 상반신이 환영처럼 등장하더니, 지팡이를 든 대니에게 말했다.
“당연히 지금 파티 레벨을 고려하면 무리죠.
하지만 이 파티엔 당신이 있지 않습니까?
흑룡 시해자이자 동쪽 숲 엘프의 구원자이며, 왕국의 위대한 마법사이신 ‘백색의 대니얼’.
바로 당신이 말이죠.
당신이라면 발록 정도의 몬스터도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당신은, 제가 알고 있는 최고의 마법사 플레이어이니까요.”
던전 마스터로 보이는 환영의 말을 듣던 대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윽고 대니는 지팡이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자신의 옆에 무릎 꿇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말했다.
“잘 아네요. 좋습니다.
발록은 제가 상대하죠. 여러분은 제 뒤를 따라오세요.”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난 플레이어가 물었다.
“저희는 뭘 하면 되죠? 제 검은 발록 정도의 몬스터에게 닿지 못하고, 그 녀석의 단단한 피부는 미스릴로 만들어진 화살조차 튕겨냅니다.
솔직히 말해서, 별 도움이 안될 것 같은데요?”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전사의 말을 들은 대니가 무심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 세계’에서, 이런 일은 대니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에.
“제가 누구죠?”
“예?”
“제가 누구냐고요.”
“백색의 대니얼. 나이츠 어셈블 유저 중에서도 몇 안되는 상위 랭커이자, 최고의 마법사 플레이어시지요.”
“맞아요. 그리고 제 명성은, 원래 대로라면 캠페인에 참여한 파티원들이 절대로 깰 수 없는 고난이도 미션을 헬퍼로 참여하면서 쌓은 명성입니다.
제가 가장 잘 하는 것은 저보다 약한 플레이어를 보호하면서 강한 적을 무찌르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이 할 일은 간단합니다.
전투 경험치를 받을 수 있으면서도 적의 공격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열심히 광역 마법을 피해 도망다니도록 하세요.
적어도 전투가 끝날 때 살아있을 수만 있다면, 막대한 경험치를 받으실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발록은···.”
“제가 혼자 상대합니다. 지금의 제가 강함이라면, 적어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마스터?”
“여러분은 위대한 마법사 ‘백색의 대니얼’의 뒤를 따라 우회루트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미 한 번 여러분을 전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고대의 악마, 발록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마스터가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자, 눈앞의 풍경이 확 바뀌며 순식간에 어두운 동굴 안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느새 던전 마스터에서 발록의 모습으로 변신한 던전 마스터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량한 자신의 강함만을 믿고 죽음의 길로 기어들어 오는 필멸자여.
고대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껴보아라!”
‘발록’이라는 몬스터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정확히 이런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하는 목소리로, 던전 마스터의 실감 나는 연기가 전달되자, 대니는 손에 쥔 지팡이를 앞으로 휘두르며 온몸에 마법을 둘렀다.
그리고는 나머지 한 손을 까딱이며 고대의 공포를 향해 말했다.
“내 이름은 백색의 대니얼.
이보케이션(Evocation : 방출계)학파의 마스터 위자드이자, 앱져레이션(Abjuration : 방호계) 주문의 전문가.
수많은 고대 주문을 마스터하고 수 천년을 살아온 흑룡을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버린 위대한 마법사.
난 운동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지만, 단 한 가지는 잘한다고 자부하고 있지.”
“그게 뭐지?”
“이 세계에서, 단신으로 강자들과 싸우는 것.”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강자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그 광경은,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역동적인 전투를 보여주고 있었다.
X-BOX로 처음 출시되었던 도트 그래픽 기반의 ‘나이츠 어셈블’이란 게임이, 시대와 기술의 변화를 등에 업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상.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라는 욕망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영상이었다.
“앞부분은 PTSD 일으키기에 딱 좋은 영상이긴 하지만.”
영상을 보던 민준이 말하자, 상혁이 답했다.
“그게 좋은 거야. 애당초 D&D라는 게임 자체가, 완전히 다른 내가 되게 할 수 있는 마력이 있는 게임이니까.
이번 광고는 현실의 자신과 게임 안의 자신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그걸 보여주기 위한 광고이기도 하고.”
간단한 손짓과 음성 명령만으로, 목소리와 외형을 휙휙 바꿔가며 다양한 세계관 속 캐릭터를 연기하는 DM의 플레이 화면.
게임 요소를 소개하는 파트로 넘어간 광고영상 안에서, DM은 때로는 왕국을 지배하는 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술집의 주정뱅이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숲에서 혼자 살고 있는 아름다운 마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그렇게 연기하는 캐릭터를 바꿀 때마다, DM은 자신이 사용하는 보이스 체인저의 목소리를 바꿔 진짜 게임 캐릭터처럼 보이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멋진 연기를 선보이던 DM은, 갑자기 헐리우드의 유명 배우를 닮은 NPC로 변신해 플레이어들에게 연기를 펼쳐나갔다.
“내 이름은 막스무스 데스무스 마리디우스.
북부의 총 사령관이자 멜릭스 제국의 군단장이었으며, 진정한 황제였던 파르쿠스 파우렐리우스님의 충복이었다.”
갑자기 러델 크로우의 모습으로 연기를 펼치던 DM은 이번엔 늑대 가죽을 걸친 죤 빈의 모습으로 등장해 연기를 펼쳤다.
모두의 기억에 깊이 남아있는, 거대한 양손검을 든 상태로.
DM은 ‘그’ 유명한 대사를 죤 빈의 목소리로 실감 나게 연기했다.
“여름이 오고 있소. (Summer is coming).”
그와 함께 화면에 떠오르는, 해당 기능에 대한 설명.
[320명이 넘는 세계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와 모델링을 탑재.]
[일본 유명 성우들의 목소리로 자신만의 연기를 할 수 있는 보이스 체인저 기능 적용.]
[보이스 지원 목록은 향후에도 지속해서 추가 예정.]
[인기 드라마 ‘황좌의 게임’ 관련 전용 룰 및 연기용 캐릭터 제공.]
그것은 말 그대로 ‘황좌의 게임’의 배우들의 목소리와 외형을 가지고 D&D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PTW가 수많은 배우에게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며 받아낸 목소리 데이터를 나이츠 어셈블에 적용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최근 발표된 PTW의 가격 인상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고 있었던 일부 게이머들의 불만을 한방에 잠재울 수 있는 기능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배우의 목소리로 역할극을 할 수 있는 D&D 게임.
그것은 D&D와 역할연기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수십만 원을 지불해도 아깝지 않을, 미칠 듯이 재미있어 보이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이미 게임을 구매하여 좋아하는 캐릭터의 모습으로 연기를 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팬들을 뒤로하고, PTW가 준비한 신작 소개 영상은 그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절대로 후속작은 만들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었던, 그들의 고집을 깨부수는 타이틀 문구와 함께.
[Knights Assemble 2]
그러나 그 타이틀을 보며 PTW가 기존에 고집하던 철칙을 무너트렸다고 비난할 유저는 단 한명도 없었다.
2라는 숫자가 붙어있긴 했지만, 지금 공개된 신작은 전작과는 아예 다른 게임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완벽하게 진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전작이 가지던 재미를 몇십 배는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재미를 가진 또 다른 신작이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좋아해 줄까?’
화면 위로 떠 오르는 타이틀 메시지를 보면서, 상혁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까지 PTW의 게임을 사랑해주었던 팬들이, 이번 신작도 좋아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 광고를 마지막으로 다시 등장하는 경기장의 모습을 보면서, 상혁은 마침내 PTW의 새 게임이 팬들에게 끼친 영향을 두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Yeeeeeeeeeeeeeeaaaaah!!!!!”
“딥 다이버로 D&D라니! 거기에 배우 목소리까지 탑재한다고!? PTW 너희는 진짜 미쳤어!!!”
“12만 원이 아니라 20만 원이라도 산다아아아!!”
“드디어어어!!! 18년동안 매주 플레이라던 게임을 드디어 바꿀 수 있어어어!!
그것도 더 멋진 게임으로오오오!!”
“Fuuuuuuuuck!! Heeeeeeeell!!! Yeeeeeeeeeeeeeeaaah!!!”
“경기 내용은 최악이었지만 신작은 최고다아아!!”
마치 역전 터치다운이라도 일어난 듯한 분위기의 관중석을 보며, 해설자가 이야기했다.
“역시 PTW!!! 아마 오늘 경기를 지켜본 관중들은, 아마도 게임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무조건 조금 전의 광고만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내년도, 내 후년도 슈퍼볼 시즌이 올 때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참가 업체의 리스트를 살펴보겠죠!!!
그들은 슈퍼볼에 나올 때마다 언제나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최고의 게임을 내놓았으니까요!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슈퍼볼이 더 이상 미식축구 팬들과 광고인들만의 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PTW라는 단 하나의 회사의 존재로 인해, 매년 전 세계의 게이머들이 슈퍼볼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되겠죠.
이제 슈퍼볼하면 PTW! PTW 하면 슈퍼볼인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다시 한번 팬들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상혁은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민준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또 한 번 허들을 넘었네.”
“그러게.”
“그럼 이제 남은 건 다음 NE 컨벤션이군.”
“우리가 그때도 여전히 팬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거야. 적어도 지금 만들고 있는 신작은, 전 세계의 오타쿠들의 가슴을 대놓고 저격하는 갓겜이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눈빛엔, 현재 개발 중인 신작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오타쿠라는 사실에 자부감을 느끼는 ‘진짜’ 오타쿠만이 가질 수 있는, ‘덕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