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404화 (405/485)

404. B급 게임의 로망

“하렘물이라···.”

작업 때문에 이번 대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던 민준이 상혁이 넘겨준 컨셉 기획서를 보며 말했다.

“의왼데?”

“그래? 우리 게임 중에 연애 요소 들어간 게임은 꽤 있는 편이었는데?

마리의 눈물도 그렇고, TAW도 그렇고, OGC도 연애할 수 있고, 스페이스 다이버도 함내 승무원과 연애를 할 수 있는 데다 YAS도 NPC와 호감도 올려서 연애가 가능했잖아?”

“하지만 그 게임 전부 대놓고 이렇게 연애가 메인은 아니었지.

마리의 눈물은 왕국 재건과 후계자 쟁탈전에서 승리하는 게 목적이었고, TAW의 연애는 이세계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목숨을 구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 개념이었고, OGC는 게임부 멤버들과 이상의 게임 환경을 만드는게 목적이었지.

YAS도 메인은 MMORPG가 메인이지 연애가 메인 컨텐츠는 아니니까.”

민준의 말대로, PTW의 게임 중에는 연애 요소가 들어간 게임이 상당히 많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놓고 미소녀 하렘물에 가까운 설정을 차용한 게임은 지금까지 개발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PTW의 스타일이라면, 연애 요소는 서브 컨텐츠로 집어넣고 주인공의 모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췄을 테니까.

그것을 지적하는 민준의 말에, 상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거기엔 아주 슬픈 사연이 있지.”

“슬픈 사연?”

상혁은 대답 대신 회의 화면을 재생시켰다.

거기엔 원래의 기획을 현재의 하렘물 기획으로 변경하자고 주장한, 한 개발자의 가슴 저린 절규가 담겨 있었다.

***

“모든 머신 스피릿은 미소녀 형태를 띠고 있으며, 주인공을 제외한 파일럿은 전부 여성으로 하는 게 어떨까요?”

“전부 여성으로?”

상혁이 묻자 손을 들어 의견을 제시했던 개발자가 말했다.

“지금까지 논의했던 설정에 따르면, 주인공은 세계관 속 인물 중에 유일하게 머신 스피릿을 눈으로 보고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죠.

만약 머신 스피릿이 전부 미소녀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플레이어는 더욱 주인공의 특별함을 느끼게 될 겁니다.

새 로봇이 등장할 때마다, 심지어 그것이 적의 로봇이라도 이런 상상을 하게 되겠죠.

‘저 로봇에 깃들어 있는 머신 스피릿은 어떤 소녀일까?’

그리고 플레이어가 여행을 다니며 새 마을에 도착할 때도, 이런 마음으로 두근거리게 될 겁니다.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는 어떤 미소녀일까?’

게다가 주인공만이 남성임에도 나이트를 탈 수 있는 이유에 대한 합당한 설명도 가능하고요.

저는 이 정도로 하렘물에 최적화된 설정은 찾기 힘들다고 봅니다.”

“그야 설정을 그렇게 변경하면 하렘전개에 최적화된 설정이 되겠죠.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게임 전체의 목적이 일종의 미소녀 동료 수집이 되어버립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플레이어가 만들 하렘의 멤버가 될 여성 캐릭터를 수집하는 형태의 게임이 되겠죠.

그건 현재의 기획이 가진 방향성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물론 그런 형태의 기획도 나름의 재미는 있겠지만,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게임이 지향하는 방향성을 변경하는 건 리스크가 큰 선택입니다.

혹시 반드시 그렇게 했으면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형태의 게임으로 기획을 변경하면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재미라던가.

아니면 자연스레 하렘 전개로 흘러가는 설정을 메인으로 삼아야만 구현할 수 있는 특별한 강점이 있다든지요.”

상혁이 반대의견을 제시하자, 의견을 제시했던 개발자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상혁을 향해 말했다.

“···할 게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

“솔직히 말해서, 콘솔 게임에서 해당 타깃을 노리는 게임 중에, 진짜로 할만한 게임이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이 기획을 하렘물형태로 전환하면 분명 지금 바라보고 있는 기획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게임이 되겠죠.

아마도 소년이 모험을 통해 세상을 해방하는 이야기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이 아닌, 세계를 돌며 하렘 구성원을 찾아 연애 스토리를 즐기는 그런 게임이 될 겁니다.

말 그대로, 미소녀 파티원을 수집하는 그런 게임이 되겠죠.

하지만 저 같은 게이머는 오히려 그런 전개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느낍니다.

의외로 저 같은 게이머를 타깃으로 하는 콘솔 패키지 게임 중에는, 진정으로 푹 빠질만한 ‘AAA급 대작’을 찾기 힘드니까요.”

‘그랬나?’

상혁이 현재의 콘솔 패키지 게임 시장에 대해 떠올리기 전에, 그는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AAA급 게임에서, 연애라는 요소는 메인이 아니라 서브로 취급됩니다.

그냥 스토리 중간중간에 특유의 달달한 재미를 주는 감초 같은 역할로 등장하죠.

연애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게임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 게임들은 대부분 AAA급 게임이라고 보기엔 하자가 있는 게임들이 많습니다.

미연시를 만드는 대부분의 개발사들은 영세한 기업인 경우가 많고, 메이저 개발사에서는 연애를 메인으로 다루는 게임에 수백 수천억을 쏟으려고 하지 않죠.”

“모바일 쪽은 꽤 있지 않습니까?

현재 모바일 BM의 가장 큰 축은 ‘캐릭터 수집’이고, 대형 개발사에서도 거기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으니까요.”

“모바일은 그렇죠. 하지만 그 모바일 안에서도 원하는 캐릭터를 얻으려면 ‘돈’을 써야 하지 않습니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 ‘돈’ 으로 뽑은 캐릭터를 파티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스토리를 통해 맵을 탐색하여 캐릭터를 발견하고, 대화를 통해 캐릭터를 이해하며, 스토리를 통해 제 손으로 구원한 캐릭터를 파티에 넣고 게임을 하고 싶다고요.

넓은 오픈 필드를 자유롭게 누비면서,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캐릭터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게임을 하고 싶다고요.

상혁 씨. 현재 콘솔 패키지로 발매되는 대부분의 미소녀 수집형 게임들은 B급 게임이 많습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IP를 대충 따와서 얼기설기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턱없이 부족한 볼륨임에도 풀 프라이스에 DLC를 떡칠해서 발매되는 게임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같은 플레이어들은 마켓에 그런 B급 게임이 등장하자마자 구매를 하곤 합니다.

그 안에 예쁜 캐릭터가 들어 있으니까.

게임 속에서 만나 동료가 되고,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으니까.

저희는 그 게임이 스크린샷만 봐도 B급 게임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게임을 구매해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그 B급도 안되는 똥겜마저도 개발사가 개발을 포기할까 봐 응원하는 마음에서 사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슬픔 속에서, 저는 항상 꿈꾸고 있습니다.

언젠가 콘솔 패키지 게임 시장에서도 ‘백마 탄 초인’이 나타나, ‘미연시라는 장르를 메인으로 삼아도 이렇게 대단한 게임을 만들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 날이 오기를.

그리고 지금.

저는 이 작품이 그 백마 탄 초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게임이 하렘물 설정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고요.”

그렇게 말하며 상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그의 집 서랍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B급 게임’들에 대한 아쉬움이 서려 있는 듯한 눈빛이 서려 있었다.

“그러니까.”

민준이 상혁을 보며 말했다.

“미연시 장르 계의 백마 초인이 한번 되어보자, 라는 도전 정신으로 이 기획의 기초 설정이 변경된 거구나?”

“솔직히 그 바닥에 B급 게임이 넘쳐나는 건 사실이니까.

콘솔 패키지 시장에서 AAA급 스케일로 출시된 캐릭터 수집형 게임을 굳이 따지면 ‘원진 임펙트’ 정도인데, 그것도 기본 베이스는 모바일인 데다 가챠 시스템이 메인에 아직 출시도 되지 않았지.

AAA급 스케일의 예산이 투입된 ‘캐릭터 수집 컨텐츠’가 메인인 게임, 거기에 랜덤 박스 같은 추가적인 과금 요소 없이 게임 안의 플레이로만 그 많은 캐릭터를 전부 수집 가능한 게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

만약 우리가 진짜로 이 장르에 진심으로 투자를 해서, 시장에서 성공시킬 수 있다면 다른 개발사도 이 장르에 좀 더 적극적으로 투자하게 될지도 몰라.

직원들이 현재 설정에 표를 몰아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거고.”

“랜덤 박스 개념 없는 캐릭터 수집게임에, B급 감성으로 대표되는 하렘물 장르에 AAA급 개발력을 투자해서 장르가 가진 한계를 시험해보자는 거군.”

민준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흥하면 대박, 망하면 쪽박이겠는데?”

“망하지 않게 만들면 돼. 오히려 모바일이나 PC 게임만 하던 유저들이 이 게임을 보고 콘솔을 구매할 정도로, 매력적인 게임으로 만들면 되는거라고.”

“하렘물 자체가 B급 이미지가 강해서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이렇다 할 대작도 없었고.”

“우리가 그 이렇다 할 대작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문제는 이거야. 지금까지 나왔던 ‘오타쿠’를 타깃으로 한 게임 대부분은, 처음부터 판매량이 적을 거라는 선입견 아래서 개발되었다는 거지.

일본의 PC 미연시 업계에서, 10만 장을 팔면 그해의 판매 순위 톱을 찍고 20만 장을 팔면 우주 갓겜 소리를 듣지.

아무리 잘 만들어도 30만 장을 넘기지 못하는 시장에서, 섣부르게 수백억을 투자할 수 있는 간 큰 업체는 그리 많지 않아.

게다가 그 바닥은 워낙에 불법 복제가 판치는 바닥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업계에서는 보수적으로 이 시장에 접근하게 되지.

난 B급을 대표하는 이 장르도 충분한 투자와 능력 있는 개발자들의 투입을 통해 갓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포텐셜이 충분한 장르라고 생각해.

원진 임펙트의 사례를 보면, 패키지 콘솔 시장에서의 포텐셜도 충분히 있는 편이고.

문제는 장르 자체가 갓겜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거지.”

“두 마리 토끼?”

“연애 파트만 완벽해서는 안 돼.

게임 자체도 엄청나게 재미있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건 연애 요소가 아예 없었어도 순수하게 갓겜 평가받을만한 게임이다.’ 정도는 되어야, 연애 요소를 얹어도 포커스가 흐트러지지 않는 거야.

현재 시장에서 출시된 대부분의 B급 미소녀 게임들은, 바로 그런 부분을 충족하지 못해서 B급 평가를 받는 거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넘치는 세계관을 만들었지만, 게임 자체는 단순히 무쌍 시스템을 베껴온 것에 불과하다던가, 한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멋진 스토리와 연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투 시스템이 개판이라 전투 파트만 들어가면 무지막지하게 스킵하고 싶어진다던가.

캐릭터 수집형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주 관심사는 빠르게 지역을 클리어하고 새 캐릭터를 찾아내는 데 집중되게 되어있지.

그 집중을 흐트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까 캐릭터에 눈이 미쳐 돌아간 게이머가 이벤트 씬 보다 게임 플레이에 더 푹 빠질 정도로, 게임의 시스템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야 이 장르가 가진 B급 감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거야.”

“그런 사례가 있었나?”

“대표적인 예가 하나 있긴 하지. 19금 미연시임에도 에로씬 보다 게임 플레이가 더 재미있다고 평가받던 갓겜이.”

상혁의 말을 들은 민준은 잠시 고민하다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말했다.

“레어 짓는 드래곤.”

“어.”

“하지만 그건 역으로 게임 시스템이 너무 재미있어서 미연시 파트가 묻힌 게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아?”

“그렇지. 그건 반대로 게임 시스템에 포커스를 주다 보니 미연시가 곁다리가 된 느낌이고, 실제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상상해보라고.

만약 우리가 이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스토리를, ‘연애’에 포커스를 맞춘 갓겜 수준으로 구성할 수 있다면?

스토리 파트는 ‘클○나드’나 ‘페○트’급의 볼륨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게임 파트는 그 어떤 AAA급 게임에도 뒤지지 않는 충실한 게임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콘솔 게임과 미소녀를 좋아하는 오타쿠 유저들에게는 세상에서 유일한 갓겜이 되게 될 거야.”

“말 그대로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군.

그래서.

‘갓겜 제조기’ 이상혁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로봇, 모험과 캐릭터 수집이라는 이 해괴한 조합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생각이야?

이 경우는 참고할 만한 게임이 아예 없을 것 같은데?”

“성공 사례는 없어도, 잠재력을 보여준 사례는 있었지.

망해서 사라진 시리즈이긴 하지만, 미소녀와 로봇을 좋아하는 모든 유저들의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던 ‘죽은 시리즈’가.

일단은 그 시리즈를 바탕으로 개발력과 돈을 미친 듯이 쏟아부으면 어떤 형태의 게임이 되는지 보여줄 생각이야.”

“그게 뭔데?”

“파워 돌.”

상혁이 언급한 게임.

그것은 2004년 발매한 게임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미소녀와 로봇이라는 조합을 멋지게 구현했던 일본의 장수 시리즈였다.

***

파워돌.

그 게임은 1994년에 첫 번째 작품이 발매된 이후로, 한국에도 4편까지 공식 한글화가 되어 발매된 적이 있었고, 이전에 유명 게임 잡지에서 번들로 제공한 적도 있었기에 의외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소녀와 이족 보행 로봇이라는 멋진 컨셉에 낚여 게임을 시작한 게이머들은, 의외로 게임이 가진 헤비함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파워돌 시리즈 자체가 미소녀 요소가 들어가 있는 하드코어 전략 게임이기 때문이었다.

아군 로봇은 적의 공격을 몇 대만 맞아도 부서질 정도로 약하고, 그렇다고 추가 장비를 마구 장착하면 장비의 운용 한계가 추가되어 출동할 수 없어지며, 게임을 하기 위해 편성해야 하는 부대의 종류만 해도 미션마다 전혀 다른 구성을 요구하는 데다, 매 미션마다 캐릭터가 들고 나갈 무기와 탄종까지 선택해야 하는, 그런 미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게임이 바로 파워돌 시리즈였다.

게다가 안 그래도 어려운 시스템에 불친절한 튜토리얼과 불편하기 짝이 없는 UI도 게임에 적응하는 것을 방해했기에, 잡지에서 번들로 제공된 적이 있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지도에 비해 인기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닌 게임이라 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좋아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는 게임.’

그러나 미소녀와 로봇의 조합이라는, 장르가 가진 포텐셜 자체는 확실하게 갖추고 있던 게임이었기에, 제대로 엔딩을 본 유저는 없어도 재미있을 것 같은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유저의 수는 많은, 어찌 보면 굉장히 특이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재미있을 것 같은’ 게임이지만 그 재미를 느끼기는 힘든 하드코어한 게임이었지.”

파워돌이란 게임을 이렇게 정의하는 상혁을 보며, 지수가 말했다.

“뭐, 저도 그렇게는 생각해요. 저도 예전에 일러스트 때문에 한 번 집어 들었다가 2 스테이지도 못가고 바로 접었으니까.

게임 시스템이 너무 무거워서 익숙해지면 진짜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 익숙해지는 과정을 굳이 극복하고 싶은 수준은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던 거 같아요.

이렇게 공략집을 보고 있으니 그때 왜 제가 게임을 접었는지 더 잘 알 것 같네요.

미소녀만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한다는 매력적인 컨셉만으로 극복하기엔, 게임의 난도가 너무 높아요.

근데 보고 있으니 시스템이 어째 눈에 익은 것 같은데···.”

공략본이 실려있는 잡지를 훝어보는 지수에게 상혁이 말했다.

“그건 당연한 거지. 애당초 GOS의 기본 시스템이 이 파워돌의 시스템을 극도로 라이트하게 만든 버전이니까.”

“그랬어요?”

“매 스테이지마다 달라지는 지형과 적들.

그에 맞춰서 새로 설계해야하는 공략법.

작전에 맞춰 로봇들에게 장착하는 장비의 적절한 교체.

전투 화면에서 이루어지는 로봇들의 지휘 운용까지.

GOS의 게임 시스템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밑바탕엔 이 게임이 깔려있거든.”

“미소녀는 빼고 말이죠?”

“맞아.”

“하지만 GOS와는 다르게 이번 신작은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맵을 탐험하며 동료를 수집하는 오픈 월드 게임이잖아요?

어느 지역을 먼저 방문하느냐에 따라서, 파티의 편성도 완전히 달라질 거고, 공략의 난이도도 천차만별로 달라지겠죠.

게다가 GOS와는 다르게 이번 작품에서는 플레이어도 로봇을 조종하게 되니까요.

GOS의 시스템을 그대로 빌리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요.”

“그렇겠지. 게다가 스테이지 형식이 아닌 만큼, 필드에서 적과 만나거나 경험치를 위해 노가다를 할 수 있는 사냥터도 어느정도 확보해줘야 해.

문제는 그런 ‘게임적인 요소들’이, 작품이 가진 기존 감성과는 조금 다르다는 거지.”

상혁은 애니메이션 ‘뇌절전사 슈퍼그랑드’의 한 장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이런 형태의 로봇이 등장하는 모험물에서, 애니메이션의 전개는 특정한 형태를 따르지.

주인공이 새 지역에 들어가서 사건을 만나고, 위기의 상황에 적 로봇이 등장하면, 히어로처럼 자신의 로봇을 소환해서 적과 싸우는 것.

보통 24분짜리 애니메이션이면 앞의 15분은 적에 관한 내용이나 새 지역의 캐릭터와 조우하는 내용을 다루고, 뒤의 7분 정도는 전투에 할당하고, 나머지 2분은 지역 스토리를 마무리하는 전개를 많이 쓰는데, 이건 게임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야.

애당초 위기의 상황에서 ‘짜잔’하고 멋지게 등장하는 주인공을 보여주기 위한 스토리 전개 방식이니까.

이 방식을 그대로 게임에 쓴다면 플레이어는 플레이 시간의 대부분을 로봇에서 내린 상태로 플레이하게 될 거고, 전투는 매우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게 되겠지.

전투와 육성은 RPG의 가장 큰 재미 요소중 하나고, 우린 그걸 버릴 수 없어.

그러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는 ‘프리 나이트’소속의 파일럿이 되어 자유 토벌 임무를 수행한다는 설정을 넣을 생각이야.”

“자유 토벌이요?”

“대 회의에서 마력 엔진에서 흘러나온 마나로 인해 생물들의 모습이 변화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었잖아?

이 세계에서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 바로 그 오염된 생물들이고, 그 생물들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응 수단이 바로 ‘나이트’라고.

그건 마치 중세 봉건시대 같은 거지.

영지의 주민들이 영주나 기사에게 충성과 세금을 바치면, 그 대가로 보호를 받는 세계.

하지만 그러한 관계는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하기 십상이고, 이 세계도 그렇게 된 거지.

충성과 보호의 관계는 지배와 피 지배의 관계로 변질되고, 영주에게 제대로 세금을 내지 못하는 마을은 나이트의 보호를 받지 못해 마법 생물들에게 멸망당하는 세계.

그리고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이트를 타고 세계를 누비는 ‘날개 없는 천사들’이 바로 프리 나이트라는 존재들이고.”

“오, 그런 설정이라면 지역 이동을 위해 이동형 함선 같은 걸 추가하면 멋질 것 같네요.

플레이어와 다른 여성 파일럿들이 함께 시간을 보낼 기숙사 같은 공간이기도 하면서, 전투로 인해 망가진 나이츠를 수리하거나 보급할 수 있는 이동형 요새 같은 개념으로요.”

“그러고 보니 그랜다간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육상형 전함이 있었지?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혁찬도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프리 나이트들은 정규군 형태의 조직이 아니니 필연적으로 장비 관리에 고질적인 문제를 겪고 있겠네요.

가난한 마을을 돕는다고 해서 딱히 보상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고, 영지가 없으니 제대로 된 보상을 얻기도 어려울 테니 대부분의 나이트는 임시로 수리한 자국이 잔뜩 있는 너덜너덜한 고철에 가깝겠죠.

아예 로봇의 부상 상태가 머신 스피릿에 반영된다는 설정은 어떨까요?

주인공이 처음으로 합류하게 되는 프리 나이트의 함선에 가서, 다른 여성 파일럿이 조종하는 로봇의 머신 스피릿을 보니, 온몸에 부상이 가득한 거죠.

기계를 너무나 사랑하는 주인공은 자연스럽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어 그런 나이츠들을 수리하게 되고, 그 수리하는 과정에서 로봇의 파일럿인 히로인들과 수리를 받는 머신 스피릿들이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고요.”

그러자 서연도 혁찬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드는지 끼어들며 아이디어를 더했다.

“그렇게 된다면 주인공이 합류한 프리 나이트 소속 로봇의 성능이 점점 올라가면서 주인공이 유명해지게 되겠네.

다른 프리나이트에서 주인공을 유혹하면서 이적을 요구하는 전개는 어떨까?”

“오! 그건 완전 하렘 애니메이션의 왕도 같은 전개네요!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나이트 파일럿이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껴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스카웃 제의를 한다던가?”

게임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잡아가며 점점 달아오르는 회의를 지켜보던 상혁은 옆에 있는 민준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민준아.’

‘왜?’

‘뭐지. 쟤네 조금 무섭다?’

‘뭐가 무서운데?’

‘말하는 내용이 완전 진성 오타쿠 같잖아.

사실은 원래부터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어했는데 나 때문에 참고 있었던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러자 민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상혁에게 말했다.

‘뭘 저 정도로 그러냐? 내가 아는 찐 오타쿠는 쟤네랑 비교도 안 되는데.’

‘엥? 그런 놈이 있어?’

그러자 민준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상혁을 보며 말했다.

“너 말이야 너.”

“에엣?! 와따시!?”

“너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부정하려고 하지 마라.

애당초 지금까지 발매된 게임에서, 연애 요소 없어도 흥할 수 있는 게임에 굳이 연애 시스템 넣겠다고 박박 우겨서 집어넣은 건 상혁이 너니까.

어찌 보면 지금 상황은, 네가 뿌린 씨앗이 되돌아온 것 같은 상황인 거지.

그러니까 일반인 코스프레 그만하고 너도 저 오타쿠들 사이로 뛰어들라고.

저 오타쿠인 척하는 아마추어들에게, 에로 게임만 수천 개 이상 플레이한 찐 오타쿠의 포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줘.

네 말대로 지금 만들려고 하는 이 게임은, 연애면 연애, 시스템이면 시스템, 컨셉이면 컨셉.

어느 하나 놓치지 않아야 하는 특별한 장르의 게임이니까.”

그렇게 말한 민준은 상혁의 어깨를 경쾌하게 두드리며 외쳤다.

“가라! 이상혁! 에로 게임만 수천 개에 애니메이션만 수천 편이상 마스터한 찐 오타쿠의 광기가 무엇인지! 오타쿠의 의지를 보여주어라!”

“오덕오덕!”

민준은 웃는 얼굴로 자신의 농담에 장단을 맞추며 지수를 향해 걸어가는 상혁을 보았다.

그리고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이 게임이 하렘물이 아니었다면 그건 수많은 명작 게임 중의 하나가 되었겠지만, 이 게임이 하렘물이 된다면 너 같은 게이머들에게는‘유일무이한 게임’ 그 자체가 될 테니까.”

민준은 상혁이 만들어올 ‘또 다른 갓겜’이 어떤 형태가 될지를, 즐거운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 역시 상혁이 만드는 게임이니만큼, 분명 ‘세상에 없었던 멋진 게임’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기에.

자신 역시 또 한 명의 골수 게이머로서, 민준은 보지 못했던 게임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 무한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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