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 냄비 뚜껑과 나무칼
“마스터 요다는 저 그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보고 계신 가요?”
누군가가 상혁의 별명을 부르며 질문하자, 상혁이 말했다.
“글쎄요. 마치 대멸종 이후의 시대처럼 보이는 황량한 지평선.
아무것도 없는 폐허를 로봇과 돌아다니는 어린 소년.
제가 이 이미지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올린 작품은 로봇 애니메이션인 ‘만원돌파 그랜다간’이었습니다.
그건 절대적인 위협 아래 땅속으로 숨어버린 인간들을 해방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였죠.
이미지 타이틀인 ‘작은 반란’에도 잘 어울리는 이야기고요.
그와 동시에, 저는 이 이미지를 보면서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인 ‘뇌절전사 슈퍼그랑드’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건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인 로봇을 타고 다니며 마왕을 물리치는 판타지 로봇물이었죠.
둘 다 매력 있는 작품입니다.
현실의 지구와는 전혀 다른 배경은 게이머의 모험심을 자극하고, 세계를 억누르는 거대한 악의 존재는 플레이어의 도전 욕구를 자극하죠.
그렇기에 저는 이 컨셉이 굉장히 매력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말은 아직 구체적인 그림은 잡히지 않았다는 의미겠군요.”
“정확히는 ‘잡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의 의견도 듣고 싶었으니까요.”
PTW에서 이런 종류의 ‘아이디어 회의’는, 다양한 규모로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버츄얼 스튜디오 체제가 도입되기 전부터, PTW는 파트에 따른 소속이 매우 불분명한 회사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게임 회사에서, 개발자는 자신이 게임을 개발하는 ‘스튜디오’에 소속되어 게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프로젝트’단위로 그룹이 갈리고, 그 안에서 ‘작업 그룹’ 단위로 또 한 번 소속이 나뉘게 된다.
결국 개발자는 ‘XXX게임사 - YYY스튜디오 소속 - ZZZ 프로젝트 개발팀 - 그래픽 파트 팀원’ 같은 식으로 자신의 위치가 정해지게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프로젝트가 종료되더라도 함께 일하던 그룹과 계속 같이 일하는 것이 작업 면에서 편리하므로 프로젝트만 변경되고 소속은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PTW는 기본적으로 본인이 개발하고 싶은 게임이 없다면 작업자가 아예 일하지 않아도 일절 터치하지 않았고, 개발자는 회사 안에서 자유로이 소속팀을 옮기며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특이한 구조로 운영되고 있었다.
심지어 상당수의 개발자는 각 프로젝트의 특정 파트만 담당하고 프로젝트를 옮기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런 직원 중 가장 유명한 직원이 바로 상혁에게 방금 질문했던 ‘알렉시 로레’였다.
프랑스 출신의 마스터 클래스 직원인 로레는 ‘PTW의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PTW의 모든 프로젝트를 찾아가 오직 광원 효과만 잡고 다른 프로젝트로 빠지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평소엔 말도 없이 찾아와서 빛의 색이 어떻다느니 그림자를 고쳐야 한다느니 등의 훈수만 잔뜩 두고 슥 사라지는 그가 프로젝트 자체에 대해 질문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회의에 참석한 PTW직원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로레와 상혁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로레는, 그런 동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상혁을 향해 계속 질문을 던져나갔다.
“혹시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느낌을 생각 중입니까?”
“저는 동화라기보다는 신화 같은 느낌으로 생각했지만, 동화라는 느낌으로 잡아도 좋은 느낌이 될 것 같네요.”
“앞서 말한 두 작품 외에, 모티브가 될 만한 다른 작품은 없나요?
제가 두 작품 모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느낌인지 구체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네요.
일러스트가 전달하는 느낌은 대략 느껴지지만….”
“애니메이션은 잘 안 보시나 보죠?”
“로봇 애니메이션을 잘 보지 않습니다.
물론 이 회의가 끝나면 말씀하신 두 작품을 보러 갈 생각이지만, 아직 보지는 못했네요.”
“그럼 다른 예를 들어드리죠. 제가 이 작품에서 추구했으면 하는 감성을 갖춘 또 하나의 작품은, 고전 게임 ‘구란디아’ 1편입니다.”
“구란디아요?”
“콕 집어서 말하긴 했지만 사실 고전 JRPG류가 가진 특유의 감성을 다룬 게임은 많으니까요.
게임의 시작 파트에서, 모험가인 아버지를 따라 모험가를 꿈꾸는 주인공 저스틴은 냄비를 투구처럼 머리에 뒤집어쓰고 냄비 뚜껑을 방패처럼 들고 다니는 활기찬 소년이었죠.
반면에 이미 유명한 모험가인 히로인 피나는 모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주인공을 보며 거북한 감정을 가집니다.
구란디아의 세계는,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거대한 장벽 때문에 더 이상은 모험할 곳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죠.
그 세계의 모험가는 일종의 관광가이드같은 역할이 되어버렸지만, 저스틴은 꿈을 잃지 않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세계의 끝을 넘어 진정한 모험을 떠나게 되죠.”
“로망 있네요.”
“로망 있죠. 사실 어린 시절 우리가 보았던 동화들은 그런 로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냄비뚜껑과 나무칼을 들고 동네에서 용사 놀이를 하던 소년이, 세계를 구할 운명을 등에 지고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
구란디아의 저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나디아의 쟝이 그랬던 것처럼, 라퓨타의 파즈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사건에서 시작된 모험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게 되는 그런 형태의 이야기는 언제나 절 행복하게 합니다.”
“좋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형태의 이야기입니다.”
로레가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다른 개발자가 손을 들며 물었다.
“말씀하세요.”
“만약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PRD 전용으로 출시하게 됩니까?”
그 질문을 들은 개발자들은 다들 속으로 ‘당연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웬만한 게임을 단순히 이식하는 것만으로도 갓겜으로 만들어버리는 PRD의 물리적 피드백은, 솔직히 말해서 거의 치트에 가까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상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깨버리는 것이었다.
“아뇨.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물론 리얼 엔진을 이용해 개발은 진행하겠지만, 메인 플랫폼은 PS와 X-BOX같은 일반 콘솔이 될 겁니다.”
“어?”
“지금 타이밍에 일반 콘솔 게임을 내신다고요?”
“PTW LAB 타이틀도 아닌데?”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상혁이 말했다.
“거기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RPD는 아직 보급 수량이 그리 많지 않은 신생 콘솔입니다.
이미 여러개의 PRD 전용 게임들이 보급된 상태에서 굳이 무리해서 또 하나의 PRD 전용 게임을 출시하는 것보다는, 좀 더 많은 유저들이 즐길 수 있는 플랫폼을 노리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로, 이건 여러분도 동의하는 사실이겠지만, PRD는 엄청나게 피곤한 머신입니다.
이동도 전부 직접 걸어서 움직여야 하고, 게임 내내 뛰어다녀야 하며, 포션 한 병을 마시는 행위에도, 밭에 있는 조약돌 하나를 치우는 행위에도 전부 유저의 모션을 요구하는 장비죠.
물론 그 피로도를 줄이기 위해 움직임 보정 기능이 있긴 하지만, 보정 기능을 받아도 PRD가 연속으로 플레이하기에 빡센 머신인 건 사실입니다.
특히 전투에서요.
옴파블레. HC 101의 전투 화면을 재생해줘.”
상혁이 말하자 허공에 떠 있던 홀로그램들이 HC 101의 전투 영상이 흘러나오는 홀로그램으로 교체되었다.
그것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보이는 영상이었지만, 그 안에서 뛰어다니는 플레이어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무리한 액션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HC 101에서는 그런 전투 피로를 조정하기 위해 게임 템포 자체가 좀 느리게 설정되었죠.
기본적으로 중간에 잠깐씩 나오는 필드 빌런들은 대부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총든 양아치들입니다.
아니면 야구 빠따를 든 깡패들이거나요.
그나마도 자주 발견되지는 않으며, 플레이어는 큰 전투를 제외한 시간 대부분을 아르바이트나 정보 수집, 개인 능력의 육성에 쏟게 디자인되었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메인 빌런이 등장하고 그 빌런과 맞서 싸우는 전투가 개시되기까지 일반적으로 2~3시간의 템포를 가지도록 전투 흐름이 조정되어 있습니다.
지나치게 연속으로 전투를 강요받아 유저가 피로함을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서요.
골든 라이탄. YAS의 전투 화면을 재생해줘.”
상혁이 말하자, 이번엔 YAS에서 몬스터를 추적하는 모험가 플레이어의 홀로그램이 등장했다.
“YAS도 마찬가지입니다. 플레이어는 길드에서 퀘스트를 받아 몬스터의 흔적을 추적하고 공략법을 찾으며 중간 지점에 캠프를 설치하죠.
YAS의 능력치 상승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식사 보정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될 수 있는 대로 안정적인 보급 상황에서 모험을 진행하려 합니다.
식사 버프가 없는 상태에서 전투를 치르면 능력치 성장 보정이 낮게 적용되니까요.
게다가 데스 패널티가 큰 편에 속하기 때문에, 최대한 안정적으로 사냥을 하려 하고, 이는 개별 전투가 개시되는 텀을 늦추는 역할을 합니다.
알래스카의 사냥꾼이 총이 있다고 하루에 순록 몇백 마리를 사냥할 수 없는 것처럼, YAS의 전투도 하루 종일 숲을 뒤졌지만 고블린 한 마리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곤 합니다.
그런 식으로, PRD 전용 게임들은 필연적으로 ‘느린 템포’를 가지고 게임을 진행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인 게임에서는, 그런 상황이 지루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대부분 필드를 적으로 가득 메우게 되죠.
어차피 버튼만 누르면 되니 체력소모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 프로도가 자신의 모험을 일기로 적었다면 이런 내용으로 일기가 가득했을 겁니다.
X월 X일. 오늘은 종일 걸었다.
X월 X일. 오늘은 종일 걸었다.
X월 X일. 오늘은 종일 걸었다.
영화에서는 그 부분을 빠르게 건너뛰죠.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와 함께, 다양한 지형을 가로지르는 주인공 일행의 모습을 잠깐 보여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게 실제 모험이었다면, 그건 엄청나게 지루하고 지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겠죠.
영화의 한 장면에서, 프로도는 지평선 저 너머에 보이는 운명의 산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드디어 다 왔어.’
하지만 저는 그 장면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죠.
‘아니 X발 저기까지 언제 걸어가?’
PRD는 양날의 검입니다.
필요한 장면에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몰입감을 제공할 수 있지만, 반면에 다른 게임에서는 버튼 하나로 처리될 일을 엄청나게 어려운 과정을 통해 수행하게 하죠.
만약 이 프로젝트를 메인 프로젝트로 진행하게 된다면, 저는 이 게임의 포지셔닝을 이렇게 잡을 겁니다.
‘퇴근하고 한두 시간 YAS나 HC101을 열심히 플레이하고, 체력을 회복할 동안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게임.’
그 비어있는 라인업에 넣을만한 적절한 게임으로, JRPG는 좋은 선택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혁의 말을 들은 개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PRD 게임을 미친 듯이 좋아하긴 하지만, 때때로 몸이 너무 힘들어 게임을 종료하고 쇼파에 앉아 콘솔 게임을 플레이하거나, 멍하니 휴대폰을 볼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남는’ 시간에 하기 좋은 감성 충만한 JRPG를 만들자는 상혁의 제안은, 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제안으로 들렸다.
상혁은 그런 개발자들을 보며, 작게 미소짓고는 부연설명을 이어나갔다.
“다들 아시다시피 딥 다이버에서 가장 호평받는 기능 중의 하나가 ‘게임 룸’ 기능입니다.
좁은 거실에 있어도, 넓은 집에서 대형 TV를 보며 콘솔 게임을 하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기능이죠.
그리고 그 기능은 PRD에도 이어져 있습니다.
굳이 PRS를 벋고 PRD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플레이어는 하던 게임을 종료하고 그대로 ‘가상의 쇼파’에 앉아 ‘가상의 TV’를 보며 게임을 할 수 있죠.
지금도 많은 플레이어들이 PRD에 셋톱박스와 PS4 콘솔을 연결해두고 PRD 전용 게임을 플레이하는 짬짬이 다른 게임을 플레이하곤 합니다.
저는 그 게임도 저희 게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좋네요. 확실히 TV로 즐기는 콘솔 게임에도 PRD로 즐기는 풀 다이브 게임과는 확연히 다른 매력이 있죠.
요즘 PTW를 완전히 VR 전문 회사로 취급하는 게이머들에게도 좋은 메시지가 될 수 있겠네요.
‘PTW는 VR게임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모든 게임을 잘 만드는 회사야!’라는 메시지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봅시다.
아직 이 프로젝트는 일러스트에 나온 배경만큼이나 공간으로 가득한 상태니까요.”
다른 회사와 다르게 PTW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을 하나 꼽으라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직원의 모습을 꼽아야 할 것이다.
보통은 업무 부담이나 윗사람의 비난이 두려워 쉽사리 낼 수 없는 아이디어도, PTW에서는 자유롭게 던지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PTW의 아이디어 회의는 수천 명의 직원 각각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온갖 욕망이 충돌하는, ‘아무 아이디어 대잔치’ 같은 모습으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등장하는 로봇은 멸망 전 인류가 사용하던 고대 병기라는 설정이 멋지지 않을까요?”
“사실은 세상을 멸망시킨 장본인들이지만, 후대에서는 그 사실이 잊혀져 마을의 수호신 같은 존개가 되어 있다던가?”
“전문적으로 그런 로봇들을 발굴하여 악한 용도로 사용하는 악당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히로인. 이런 작품은 히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VR 스튜디오의 모든 회의 내용은 AI가 자동으로 정리하기 때문에, 수천 명의 직원이 말 그대로 수천 개의 아이디어를 마구 던져대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단순히 자신이 상상하는 즐거운 게임이 갖췄으면 하는 요소들에 대해 마구 쏟아낼 뿐.
그러나 상혁은 그 모든 아이디어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여 게임의 구체적인 형태를 잡아나갔다.
때로는 선을 넘은 아이디어를 보류 상태로 두기도 하고, 때로는 직원이 던진 아이디어를 더 멋지게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던지기도 하면서.
그것은 게임에 미친 광인들이 이상의 게임을 창조해나가는 과정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난장판.
누군가 이 회의를 옆에서 지켜보았다면 그런 표현을 썼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마구잡이식 회의에는 일련의 규칙과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리 과열된 상황이라도, 회의를 진행하는 상혁이 말을 하면 한순간에 회의실이 조용해지는 암묵의 규칙이.
상혁은 그 ‘암묵의 규칙’을 능숙하게 사용하며, 중간중간 아이디어의 포커스를 잡아가며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
“잠시 히로인 이야기를 해보죠.”
상혁이 말하자 다시 한번 회의실의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았고, 상혁은 침묵 속에서 아이디어가 향해야 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이런 장르의 스토리에서, 주인공의 능력에 해당하는 ‘로봇’과 ‘소년’의 만남은 운명적인 느낌으로 연출되곤 합니다.
그건 마치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죠.
저는 주인공과 히로인의 만남도 그러한 느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자칫하면 스토리의 포커스가 갈라지게 만들 위험이 있죠.
그 부분을 확실하게 잡고 가야 합니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주인공은 히로인을 따라 스토리에 개입하게 됩니까?
아니면 로봇을 따라 스토리에 개입하게 됩니까?
어느쪽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상혁이 묻자 직원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 직원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구했다.
“말씀하세요.”
“둘 다는 안될까요?”
“둘 다? 어떻게요?”
“애당초 로봇이 2인승인 거죠. 이동을 맡는 서브 파일럿 자리와, 전투를 맡는 메인 파일럿 자리가 나뉘는 겁니다.
그렇기에 로봇을 발견한 시점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자리 살짝 앞에 있는 서브 파일럿 석에 잠들어있는 히로인을 발견하게 되는거죠.”
“로봇과의 퍼스트 컨택 씬과 히로인과의 퍼스트 컨택 씬을 하나로 합친다는 거네요?”
턱에 손을 대고 잠시 고민하던 상혁이 말했다.
“좋은 거 같은데요?”
그러자 다른 직원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논의하던 설정에서, 주인공이 발견한 로봇은 오랜 시간 땅속에 묻혀있던 고대 유물같은 느낌이었죠.
그 안에서 히로인이 잠들어있다면, 히로인의 나이가 수천 년쯤 된 할머니가 되었거나 아니면 썩어버린 해골만 파일럿 석에 앉아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흠···.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요.
해결책은 말씀하신 대로 히로인의 종족을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긴 특수 종족으로 설정하거나, 아니면 로봇의 파일럿 석에 생명 유지장치가 있어 히로인을 영구 동결상태로 유지했다는 설정을 부여하거나, 아니면 애당초 히로인 자체를 생명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생명이 없는 존재라 하심은?”
“워함마에 나오는 머신 스피릿 같은 존재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설정에서, 히로인은 서브 파일럿이자 로봇의 영혼 같은 존재가 되는거죠.”
“그 설정에서는 빌런이나 동료가 조종하는 다른 로봇에도 전부 머신 스피릿에 해당하는 존재가 탑승하고 있겠군요.”
“그게 맞는 설정이긴 할 텐데···.”
잠시 고민하던 상혁이 말했다.
“그걸 주인공만 볼 수 있다는 설정은 어떨까요?”
“예?”
“그러니까, 사실 머신 스피릿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같은 존재인 거죠.
하지만 주인공은 세계관 속에서 유일하게 그 머신 스피릿을 보거나 이야기하는 게 가능한 존재가 되는 거고요.
이쪽이 주인공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전개가 될 수 있으니 좀 더 매력 있는 전개가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주인공이 그런 능력을 얻을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혈통 같은 설정을 추가해도 좋겠지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냥 주인공이 기계 덕후라는 설정을 넣는 거죠.
매일 고물상에서 망가진 기계를 고치며, 녹슨 토스터에 말을 걸고 망가진 엔진을 쓰다듬는 녀석인 겁니다.
고장 난 기계를 보면 사람이 다친 것처럼 마음 아파하고, 망가진 부속을 보면 그 부속이 튼튼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자.
기계를 사랑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소년이었기 때문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머신 스피릿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설정은 어떨까 싶네요.”
때때로 올바른 방향으로 제시된 아이디어는 마치 기름 웅덩이 위에 쏘아진 불화살처럼 개발자들을 불타오르게 한다.
그리고 상혁이 쏘아낸 주인공에 대한 이미지는, 회의실에 모인 개발자들의 상상력을 뜨겁게 불태우고 있었다.
“오, 좋다. 나한테만 보이는 히로인이라니. 엄청 고전 틱한 느낌이네요.”
“그럼 다른 로봇에 탄 머신 스피릿과도 주인공만 유일하게 친해질 수 있으니 거기서 파생되는 이야기도 많을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적 로봇의 머신 스피릿을 주인공이 구원해주는 종류의 이야기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인간 종족’인 서브 히로인들과 머신 스피릿들간에 벌어지는 주인공 쟁탈전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도 6시간이 넘는 아이디어 릴레이가 이어지고 나서야, 회의는 일단락되었다.
수없이 많은 아이디어 메모로 가득한, 거대한 홀로그램 칠판만을 남겨두고서.
그 중앙엔 다른 메모보다 커다란 글자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 시대는 마도 공학에 의해 세계가 한번 멸망한 이후 수천 년이 지난 시대.
▶ 주인공은 유적에서 발굴되는 과거의 기계를 수리하여 먹고사는 고물상 소년.
▶ 세계엔 ‘나이트’라 불리는 고대의 유물이 존재함.
로봇처럼 생긴 나이트는 독자적 사고가 가능한 머신 스피릿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머신 스피릿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함.
▶ 흔히 알려진 나이트는 2인승이지만, 조수석에 해당하는 자리는 머신 스피릿이 조작하기 때문에 조종이 불가능.
그러나 머신 스피릿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움직이는 조수석을 보며 그것이 일종의 오토 파일럿 기능으로 동작한다고 오해함.
▶ 나이트를 수집하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 있으며, 사람들에게 나이트는 공포의 존재가 되었음.
▶ 망가진 마도 엔진에서 흘러나온 오염된 마나에 의해 생물이 변이하여 인간을 위협하고 있으며, 나이트는 마나 생물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수단.
▶ 지배자층은 그러한 나이트를 독점하여 피지배층이 복종하도록 만들고 있고, 그런 세력에 반발하여 세계를 돌며 사람들을 구하는 ‘자유 기사’ 세력이 존재함.
▶ 주인공이 사는 마을도 피지배 계층이 사는 마을로 매달 상납금을 내지 않으면 보호를 받지 못한다.
큰 글자로 정리되어있는 메인 설정과 함께 수많은 서브 설정들이 가득 차 있는 홀로그램 칠판을 보는 상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상혁의 시선 끝에는, 마지막까지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킨 메인 설정의 마지막 줄이 적혀 있었다.
▶ 모든 머신 스피릿은 여성형이며,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나이츠 파일럿은 여성(미소녀)만 존재한다.
그것은 상혁이 반대한 설정이었지만, 찬성파가 더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차용된 설정이었다.
하지만 상혁은 이것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게임이 추구하는 방향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서 ‘오타쿠가 좋아할 법한 하렘물’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위대한 조각가는 돌 안에서 조각상의 모습을 본다는 말이 있다.
상혁은 게임도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개발자들의 선택이 이 게임의 운명을 하렘물로 이끌어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아이디어 자체가 그런 방향에 대한 늬앙스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어차피 초기 기획대로 계속 진행되는 개발도 없긴 하니까.’
일단은 이대로 두자고 생각한 상혁은 칠판에서 몸을 돌려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개발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한번 시작해볼까요?”
서연이 그린 단 한 장의 일러스트에서 시작된 아이디어 회의.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은, 이후 PTW에서 만든 게임 중 가장 ‘오타쿠스러운 게임’으로 평가받게 되는, 또 하나의 전설이 될 게임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