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 유니티 제도
기자회견에 참여한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들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상혁이 발표한 ‘게이머 연합(Gamers Unity)’에 대한 뉴스는 전대미문의 빠른 속도로 콘솔 게임 업계를 뒤집어 놓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애당초 이 제도 자체가 단 한 번도 전례가 없었던 대형 게임사 대부분이 참여한 초유의 연합 정책이었기 때문이었다.
SANY와 마이크론 소프트, 넌텐도를 가리지 않는 콘솔 게임기 업체들의 집단 참여.
그리고 그 산하에 있는 대부분 협력업체가 참가한 거대 조직의 등장은 게이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파급력을 지닌 뉴스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제도의 등장이 각 개발사의 자율성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함께 나오긴 했지만, 상혁은 이어진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길 기대하고 있다고 자기 생각을 밝혔다.
“저희가 이 제도의 출범을 통해 기대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매우 잘 만든 게임이지만 인지도가 낮아 게이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게임들이 좀 더 이름을 알릴 좋은 기회가 되겠죠.
리얼 엔진을 사용하는 이상, 대형 개발사와 소규모 스튜디오의 그래픽 퀄리티 격차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겁니다.
이제는 게임 개발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아마추어 개발자도 손 쉽게 AAA급 게임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다만 소규모 스튜디오에서 AAA급 게임을 적은 인력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PTW의 기본 라이브러리 사용이 필수적입니다.
유니티 마크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라이브러리 사용료의 부담을 단번에 덜 수 있는 좋은 방법처럼 보일 테고요.
결국 게임을 홍보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마케팅 비용.
그리고 PTW에 지급해야 하는 라이선스비를 고려하면 대형 개발사 측이나 소형 개발사 측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그건 바로 게임의 재미에만 집중하여 최대한 유니티 로고에 부끄럽지 않은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죠.
무리하게 과금유도를 하면서 발생하는 추가 수익보다, 유니티 로고를 달고 출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판매량에서 기대되는 이득이 더 클 테니까요.”
상혁의 말을 들은 기자가 물었다.
“두 번째는 뭡니까?”
“둘째로 퍼블리셔 측에서 개발자를 압박하는 압박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는 거겠죠.
DA나 UDI, 액트비젼 같은 거대 퍼블리셔 소속 스튜디오는, 퍼블리셔의 규모에 걸맞은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많은 압박을 받기도 합니다.
가장 큰 압박은 역시 발매시기에 대한 압박이죠.
수많은 게임이 더 다듬어 출시하면 더 좋은 퀄리티를 약속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발매일정을 맞추기 위해 조급히 출시되곤 합니다.
하지만 유니티 제도가 출범한 이후로, 퍼블리셔에는 이런 형태의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유니티 로고를 포기하고 발매 시기를 무리하게 앞당길 것인가.
아니면 게임의 완성도를 최대한 끌어올려 유니티 로고를 붙여서 발매할 것인가.
전자를 선택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게이머들의 비판과 판매량 감소를 생각하면, 후자의 선택지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퍼블리셔 측에서 개발 스튜디오에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그 시스템을 넣으면 유니티 로고를 넣어도 될만한 게임이 될 수 있겠나?’
그건 개발자 입장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발매 스케쥴이나 매출에 대한 압박보다는, 순수하게 재미에 대한 압박을 받는 편이 게임 개발자에겐 조금 더 편한 압박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아닌 분들도 계시긴 하겠지만.’
상혁이 한마디를 덧붙이자, 기자가 물었다.
“그럼 마지막 3번째는 뭡니까?”
“개발사의 뻘짓 방지입니다.”
“뻘짓이요?”
“게이머들에겐 익숙한 일이죠. 처음엔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재미 가 가득했던 게임이, 몇 번의 패치로 인해 희대의 쓰레기 게임이 되는 경우가요.
반대로 그보다는 희소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출시 시점에서는 망겜이었던 게임이 지속적인 사후관리를 통해 꽤 괜찮은 게임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유니티 로고를 출시 시점의 평가로 바로 박탈하지 않습니다.
개발사에서 평가가 최악인 게임에 유니티 로고를 달고 출시했더라도, 문제를 수습할 충분한 시간을 주죠.
그 수습 과정에서, 개발자의 자존심이나 사내 정치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평가는 유저들이 하는거니까요.
유니티 로고를 달고 출시한 게임의 평가가 좋지 않다면, 퍼블리셔 측에서는 빠르게 유저들의 피드백을 받아 게임을 수정할 것을 개발 스튜디오에 요구하겠죠.
그런 식으로 게임이 개선되는 과정을 보면서, 게이머들도 이 제도의 신뢰성에 믿음을 가지게 될 거고요.
저희가 바라는 게임 업계의 진화는 그러한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게이머는 게임에 믿음을 가지고 돈을 쓰고, 개발사는 그런 게이머들에게 재미로 보답하는 미래.
그것이 유니티가 그리려고 하는 게임 업계의 미래죠.”
“확실히. 유니티 제도 발표 이후에 업계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그러한 변화가 조금씩 눈에 띄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익명의 개발자가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현재 개발 중인 게임에 대한 임원 회의가 소집되었다고 하더군요.
그 회의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난 업계에서 꽤 유명한 연작 시리즈의 차기작을 개발 중인 개발자인데, 얼마 전 참여한 임원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받았다.
현재 발매 이후 DLC로 출시할 예정이었던 모든 과금 장비들을 인 게임 컨텐츠로 전환할 것.
그리고 그 장비의 배경에 걸맞은 멋진 퀘스트 라인을 추가할 것.
준비한 과금 유저용 장비의 숫자가 꽤 많이 있었고, 그 능력치 역시 과금유도를 위해 꽤 높은 효율로 잡혀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게임 안에서 그냥 분해되어야 했을 퀘스트 보상의 상당수가 과금 장비로 교체되었다.
그 말은 유저들이 퀘스트를 하면서 퀘스트 보상에 더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는 의미이고, 게임을 하면서 좀 더 자주 장비를 갈아입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완성도에 자신이 없으면 출시를 미뤄도 좋다는 보장까지 받으면서,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 밝아졌다.]”
“좋은 일이네요. 저희가 목표한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불만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죠.
일부 개발자들은 ‘PTW가 콘솔 게임 업계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좋은 게임의 기준을 다른 개발사에게 강요하려 한다.’ 라고 비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로고의 부여는 어디까지나 업체의 자율적인 선택입니다.
불만이 있다면, 그냥 로고 없이 하던 대로 개발해서 출시하면 되겠죠.
물론 저희는 유니티 로고가 부여된 게임들이 더 많은 판매량을 기록할 수 있도록 회사 차원에서 많은 지원을 할 생각이지만, 로고가 없다고 그 게임을 비난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게이머들도, 유니티 로고가 붙어있지 않은 게임이라고 해서 그 게임을 외면하거나 비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올 게임 중에서도, 유니티 로고 없이 정말 내용적으로 좋은 게임들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유니티 로고는 어디까지나 게이머들을 위한 보험 같은 제도입니다.
개발사가 로고에 부끄럽지 않은 멋진 게임을 만들었다.
만약 불만이 있다면 확실하게 사후관리를 해 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게임이 유저들에게 불만족스러운 게임이 되었다면, PTW측에서 해당 게임에 대해 확실하게 책임지고 환불을 해 주겠다.
저희가 만든 유니티 로고는 바로 그런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고니까요.”
“환불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지는 않겠습니까?”
“PTW에서 보장하는 환불은, 일종의 ‘리콜’개념에 가깝습니다.
일부 게이머의 불만 때문에 개별적으로 환불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게임의 평가를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환불이죠.
예를 들어 유니티 로고를 붙여서 발매된 게임이 게이머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해당 개발사와 협의해 개선 계획을 전달받고, 사후관리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 이후에도 게임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대로 게임을 방치하면 로고 부여 자격을 박탈하고 리콜을 실시하겠다고 통보하죠.
그 이후에도 또 리콜을 막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부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게임을 수정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오히려 더 욕을 먹는 방식으로 게임이 점점 망가진다면, 저희는 게이머스 유니티 브랜드의 주최자 자격으로 리콜을 결정합니다.
판매된 해당 게임의 모든 패키지 판매 수익과 DLC 수익을 유저들에게 환원하고, 해당 개발사에 구상권을 청구하죠.
로고의 부여 권한을 받은 시점에서 계약서에도 명시된 사항이기에, 그것은 법적으로도 합의가 된 사항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로고를 부여해서 게임을 판매한 회사가 사태를 수습하기 전에 부도가 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해당 게임의 사후관리에 대한 권한을 PTW에서 넘겨받습니다.
브랜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해당 게임을 유저들이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개선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내는 거죠.
다만 그 경우 권한과 함께 책임도 저희에게 넘어오기 때문에, PTW에서 사후관리를 맡았음에도 유저들이 만족할 만한 개선을 하지 못했을 땐 저희가 모든 리콜 비용을 책임지게 됩니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리콜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의미입니까?
아니면 PTW가 사후관리를 했는데도 게임을 고치지 못할 경우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의미입니까?”
“둘 다입니다. 수습의 의지만 있다면, 게이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변화는 즉각적이었다.
기자회견이 발표되자마자, PTW에는 매일같이 로고 부여 자격을 받을 수 있을지를 묻는 개발사들의 메일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이미 로고의 사용 권한을 부여받은 퍼블리셔에서는 산하의 개발 스튜디오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게 돈이 되는 방향인가’가 아닌, ‘이것이 유저를 즐겁게 할 수 있는가’를 묻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에 대한 개발자들의 증언이 하나둘씩 올라오면서, 게이머들의 기대감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로고 정책 발표 이전의 게임들과, 로고 정책 발표 이후의 게임들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기대감.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연달아 나오는 대형 프렌차이즈 게임들의 언론 인터뷰였다.
[UDI 소프트의 ‘어쌔신 크로드’신작에 대한 발표.
‘신작은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재미를 선사할 것.
그 누구도 이번 작품에 유니티 로고를 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오웨더의 신작 RPG ‘랜썸’.
출시 직전 출시일정 연기 발표.
개발 책임자 사퇴.
퍼블리셔인 DA관계자의 인터뷰.
‘DA에서는 현재의 랜썸을 그대로 발표하기보다, 스튜디오의 역량을 믿고 게임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쳐 유니티 로고를 붙인 두 발매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현재는 프로스트바이트 엔진에서 리얼 엔진으로 게임 데이터를 이전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PTW에서 해당 작업에 필요한 기술 지원을 받고 있다.’]
[프룸 소프트웨어, 올해 출시 예정인 신작 및 개발 중인 게임에 대해 유니티 로고를 부여할지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 중.]
[2월 출시 예정인 UDI소프트의 ‘리비전 2’.
내부 검토 결과 유니티 로고 없이 발매 확정.
내부 관계자의 인터뷰.
‘상부에서는 유니티 로고를 사용하고 싶어 했으나 심각한 고민 끝에 로고 없이 발매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리비전 2가 나쁜 게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
다만 PTW에서 제시한 기준이 꽤나 높은 수준이었기에 로고를 달고 발매하기엔 부담이 너무 큰 상황이었다.’]
업계 전반에서 이러한 변화가 생기는 가운데, 유일하게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룹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게이머 그룹으로 성장한 PTW의 열성 팬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PTW의 게임은 유니티 로고가 있든 없든 별다를 것이 전혀 없는 게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PTW의 신작에 유니티 로고가 붙어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신작’의 소식만을 애타게 기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팬들의 간절한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혁은, 차기작에 대한 발매 계획을 착실히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번 나이츠 어셈블 2는 다음 달 4일에 있을 슈퍼볼 광고와 동시에 발매되게 될 겁니다.
발매 플랫폼은 PS4, X-BOX ONE, 그리고 PRD입니다.
8세대 콘솔 버전의 경우 딥 다이버 전용 게임으로 출시되며 PRS를 지원하게 될 겁니다.
없어도 플레이는 가능할 거고요.”
이전에도 논의한 적이 있었던 내용이었지만, 임원들을 모아놓고 다시 한번 발매 일자를 정리하는 상혁에게 현주가 질문했다.
이번 나이츠 어셈블 2의 발매 방식은, PTW가 이전에 하던 방식과는 조금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별도로 NE 컨벤션을 열지 않고 슈퍼볼 광고만 하면서 발매하는 거야?”
“예.”
“흠···. 유저들은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나이츠 어셈블2의 진짜 목적은 단순히 유저들이 즐길만한 게임을 하나 더 내놓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전작인 나이츠 어셈블 1편에서 쌓았던 데이터도 리얼 엔진의 개선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2편으로 쌓일 데이터는 한층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유저들이 게임을 통해 만들 던전과 몬스터, 스토리를 참고해 리얼 엔진의 AI를 학습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목적을 고려한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이른 시일 내에 발매하는 게 이득이겠죠.
그리고 타사에서 유니티 로고를 붙인 게임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정작 그 정책을 발안한 PTW에서는 유니티 로고가 붙어있는 게임이 하나도 없다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저희가 만들자고 제안한 제도이니, 저희도 참가해야겠죠.
하지만 오늘 대 회의의 목적은 이미 완성된 게임의 발매 스케쥴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달에 발매할 나이츠 어셈블 2 이후에, 다음 NE컨벤션을 위해 준비할 PTW의 차기작 라인업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자리죠.
오늘 회의를 위해, 저를 포함한 마스터 클래스 개발자분들은 사내 프로젝트를 통해 제출된 수많은 아이디어를 검토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렇게 검토한 수많은 프로젝트 중에 HC 101의 뒤를 이어 다음 컨벤션의 메인 타이틀이 될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HC 101에 이은, PTW의 메인 타이틀.
그 이름이 가진 무게감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기에, 회의실에 모인 모든 직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수많은 사내 프로젝트 중에서, 과연 어떤 프로젝트가 다음 NE 컨벤션의 메인 타이틀이 될 것인가.
PTW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서, 상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수많은 프로젝트의 홀로그램이 투영되며 마치 밤하늘의 별 무리 같은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상혁은 인간의 상상력을 환영으로 구현한 듯한 홀로그램을 보며, 순서대로 하나하나씩 프로젝트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먼저 소개하고 싶은 건, ‘넬슨 좋아’팀에서 제출한 대항만시대 컨셉의 프로젝트입니다.
고전 게임 대항만시대를 바탕으로, 범선의 운용과 조작, 그리고 특유의 항해에 대한 로망을 PRD와 리얼 엔진을 통해 구현해보자는 프로젝트였죠.
원래도 괜찮은 프로젝트였지만, 메인 프로젝트가 되기에는 약간 부족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넓은 바다가 멋져 보이는 것도 잠깐이지, 게임 내내 파란 바다만 봐야 할 텐데 그게 반복되면 금새 지루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원작의 심심한 맛을 충분히 보강할 수 있다면, 이것도 메인 타이틀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는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있는 홀로그램의 내용물이 바뀌었다.
항구에서 거대한 범선에 화물을 싣고 있는 선원들의 모습에서, 작살을 들고 거대한 크라켄과 사투를 벌이는 범선의 모습으로.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유명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마법과 부두, 화약과 주술이 공존하는 시대.
바다에선 데비 존스가 플라잉 더치 맨을 몰고 다니고, 심해엔 크라켄이 잠들어 있으며,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틀란티스를 직접 가볼 수 있는 세계.
주점의 술꾼들이 내뱉는 헛소리에도, 술 한잔에 노래를 파는 음유시인의 이야기 속에도 ‘진짜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살아있는 시대.
저희가 충분히 그 세계의 매력을 전달할 수 있다면, 저는 범선과 대포가 주는 로망으로 충분히 멋진 게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배경인 수많은 게임 중에서도, 독보적인 재미를 가진 전무후무한 대작 게임을 말이죠.”
상혁이 손을 휘젓자, 다른 홀로그램이 확대되며 중앙으로 이동했다.
“이것도 내부 평가 점수 상위권에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상혁이 확대한 두 번째 홀로그램 안에는 흉측한 악마와 싸우고 있는 한 마법소녀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상혁은 그것을 놓고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를 시작했다.
“이미 이 프로젝트에 평가점수를 주신 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이건 마법 소녀를 소재로 하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이 게임 안에서 도시 안에 있는 다양한 소녀들과 계약을 맺어 그들을 성장시키고, 악에 맞서 도시를 지키게 되죠.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와 계약을 맺은 소녀들은 다양한 고민을 하고 수많은 벽에 부딪힙니다.
그것은 때로는 좋아하는 이성과의 연애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동료와의 불화가 될 수도 있죠.
그 나이 즈음의 여학생이 가질법한 수많은 고민을 마법의 힘으로 해결해주면서, 플레이어는 한 명의 여학생이 진정한 마법 소녀로 거듭나는 과정을 함께하게 됩니다.
처음에 얻는 능력에 따라 스토리가 완전히 변하게 되는 HC 101과 마찬가지로, 이 게임 역시 플레이어와 계약한 소녀의 성격과 플레이어가 고른 능력의 계열에 따라 매번 완전히 다른 게임 플레이를 보여줍니다.
변신을 통해 싸우는 강령술 계열의 마법 브로치로 플레이를 할지, 아니면 육체적 능력 계열의 강화를 돕는 팔찌가 되어 소녀와 함께 싸울 것인지, 아니면 자유자재로 변형되는 타입의 밀리터리 계열 마법봉으로 소녀의 주 무장이 되어 싸울 것인지.
그 모든 것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한참 고민이 많을 나잇대의 소녀와 함께 고난을 헤쳐나간다는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요소가 좋은 평가를 받은 프로젝트였죠.
이것도 메인 프로젝트가 될 포텐셜이 충분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상혁은 나머지 프로젝트들도 차례로 소개했다.
그것들은 어느 하나 빠짐없이 각자의 개성을 가진 좋은 아이디어로 반짝이는 프로젝트들이었기에, 회의에 참여한 직원들은 쉽사리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하나만을 골라서 개발하기엔, 나머지 프로젝트들이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에.
그것은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는 상혁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상혁은 일단은 최종 결정을 보류한 채로, 계속 사내 프로젝트의 소개를 이어나갔다.
“물론 지금 제가 소개한 프로젝트가 아니라고 해서 그 프로젝트들이 재미가 없거나 혹은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게임 자체가 아무리 탄탄한 재미를 가지고 있어도, 메인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스케일이 확보되지 않으면 메인 프로젝트로는 적합하지 못할 뿐이죠.
어떤 게임은 자본과 인력을 쏟아부어야만 그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반면에, 어떤 게임은 심플함이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게임은 PRD로 해야만 진정한 재미를 전달할 수 있는 반면에, 어떤 게임은 오히려 PRD로 플레이하면 지루한 게임이 될 수도 있죠.
각 게임엔 그 게임에 맞는 최적의 플랫폼과 장르가 존재합니다.
그러니 혹시 이번에 ‘메인’ 프로젝트로 선정되지 않은 게임들도 개발 자체는 계속 진행할 예정입니다.
PTW LAB으로 발매를 해도 좋고, 아니면 NE 컨벤션의 서브타이틀로 발매를 해도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스케일’을 기준으로 현재 제출된 프로젝트 중에서 제가 가장 큰 잠재력을 느낀 프로젝트는, 바로 이 한 장의 컨셉 아트였습니다.”
다른 프로젝트의 소개가 전부 끝나고 나서야 상혁이 띄운 한 장의 일러스트.
그것은 ‘프로젝트’라고 부를만한 수준도 아닌, 한 원화가의 상상이 담긴 단 한 장의 그림이었지만, 상혁은 그 안에 담긴 커다란 매력을 보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이건 알파 버전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컨셉 아트라고 보기도 어려운 그림이죠.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폐허에서, 절벽 위에 서 있는 한 소년이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마치 기사처럼 보이는 한 로봇이 무릎을 꿇고 있고요.
사실, 제가 발견했을 때는 이 한 장이 이 프로젝트의 전부였습니다.
다른 일러스트도 없고, 게임에 대한 소개도 없죠.
그러나 이 한 장의 일러스트는, 제 안에 있는 작은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일까?’
‘저 소년은 왜 저기 서 있을까?’
‘저 로봇은 왜 저기 있을까?’
그림을 그린 주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제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서연아?”
상혁이 말하자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에 관해 설명해줘.”
그러자 서연이 말하기 시작했다.
“상혁 오빠가 말한 대로, 이건 딱히 특정한 게임을 상상해서 그린 일러스트는 아니에요.
그냥 평소처럼 흐르듯이 여러 음악을 랜덤 재생하다가, 이미지가 떠올라서 그려본 그림일 뿐이죠.
이런 종류의 감성을 가진 컨셉 아트는 그리 보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요.”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 근데 내가 이 그림에 주목했던 건, 내용이 아니라 제목 때문이었어.
서연이 너는 이 일러스트의 이름을 뭐라고 붙였지?”
상혁이 묻자 서연이 답했다.
“Tiny Riot(작은 반란).”
서연이 자신의 그림에 붙인 제목.
그것은 상혁이 회귀 전 좋아했던, 지금은 아직 발매도 되지 않은 노래의 타이틀이기도 하면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장의 컨셉 아트가 거대한 의미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스케일’이 담겨 있는 제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