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 위대한 승리의 서막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갈라진다.
시체 포식자가 가시 칼날이 달린 팔을 휘두를 때마다,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찢어발길 기세의 붉은 강기 다발이 쏟아져나왔고, 구스타프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푸른 강기 다발이 그것들을 튕겨내었다.
마치 분신술이라도 쓴 것처럼 잔상을 남기며 사방을 공격해 들어가는 시체 포식자의 공격에 대응해, 구스타프는 단순히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이는 거대한 검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두르고 있었다.
검과 육신이 부딪힐 때마다 나는 거대한 금속음과 불꽃들, 그리고 폭음과 함께 전신으로 전달되는 싸움의 여파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강자의 싸움’이 어떤 느낌인지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천외천’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싸움이라 할 수 있었다.
“맹호세(猛虎勢). 호랑이 발톱!”
구스타프가 자세를 취하며 스킬을 발동하자, 시체 포식자도 스킬을 시전했다.
“죽음의 자세. 만상(萬狀) 가르기!”
“구스타프 씨가 지금 쓰고 있는 저 스킬의 원래 이름은 ‘구스타프식 검술 3장 발목 조지기’였는데 스킬 이름을 바꿨나 보네요.
저 네이밍 스타일은 지수가 주로 쓰는 방식인데.
원래의 기술명이 멋이 없다고 생각해서 변경한 건가?”
그리고 그 시각, 상혁은 전투 장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주변에 모여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전투 상황을 중계하는 스피드 웨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앉아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그때 두 사람의 싸움을 보고 있던 한 플레이어가 상혁에게 물었다.
“근데 아까 방어전에 참여한 4티어 직원분들도 그렇고, 다들 스킬명에 ‘뭐시기세’나 ‘뭐뭐의 자세’같은 이름을 붙이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러자 상혁이 그 유저의 질문에 답했다.
“사실 이건 시스템적 한계랄까, PRD의 기술적 체계 때문에 생긴 문제인데, 여기가 게임속 세계가 아니라 진짜 판타지 세계라면 아마도 플레이어는 몸 안의 마나를 움직여서 스킬을 발동했을 겁니다.
뭐 그게 마나 서클이든 마나 회로든 아니면 챠크라든 기든 아무튼 자신이 사용하는 특별한 에너지 컨트롤 체계를 이용해서 스킬을 펼쳤겠죠.
하지만 그건 가상 세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고 실제로 현실엔 ‘기’나 ‘마나’처럼 인간의 의식대로 조작 가능한 가상의 에너지가 없어요.
그래서 MYOM 시절부터, PTW의 VR 게임들은 대부분 음성과 모션을 통한 캐스팅 시스템을 사용해왔죠.
만약 진짜로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마법사란 존재가 있다면, 자신이 워프하고 싶은 좌표를 머릿속에 그리고 마나를 움직여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겠지만, 딥 다이버와 PRS, PRD의 센서를 모두 동원해도 유저의 생각을 읽을 순 없으니까요.”
“아, 그래서 자세를 취하면 스킬이 시전되는 건가요?”
“그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죠.”
상혁이 말했다.
“YAS에서 자세를 통한 스킬 호출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합니다.
하나는 음성을 통해 내가 시전하려는 스킬의 모션 셋팅을 소환하는 것이고, 하나는 그렇게 불러낸 모션 셋팅이 완료된 상태에서 완벽한 시전 자세를 취함으로써 스킬의 성공적인 시전 여부를 판단하는 거죠.
예를 들어 조금 전 구스타프씨가 했던 것처럼, YAS 안에서 맹호세(猛虎勢)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PRD의 와이어는 전신에 물리력을 전달합니다.
그 스킬의 난이도와 숙련도에 따라, 해당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어렵게 방해를 하는거죠.
숙련도가 낮으면, 진짜 온몸의 힘을 다 쥐어짜야 겨우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세를 어느정도 필요한 모션으로 조정하고 나면, 그때 스킬 발동이 판정되는 방식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전투 스킬에 ‘뭐뭐의 자세’ 같은 이름이 붙는 거고요.”
“그럼 뒤에 붙은 호랑이 발톱 같은 이름은요?”
“그것도 의미가 있긴 한데, 같은 시작 자세라도 파생되는 기술이 다를 때도 있어요.
그래서 사전에 PRD에 ‘난 이 자세에서 파생되는 이 스킬을 쓸 거다.’라고 선언하는 거죠.
그럼 PRD가 그 스킬을 펼치는데 필요한 난이도를 산정해서 플레이어의 몸에 물리적 피드백을 전달하는 거고요.”
그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포탄같이 쏘아져 나간 구스타프의 검격이 시체 포식자의 옆구리를 치자, 시체 포식자가 수백 미터를 날아가며 지면에 긴 궤적을 남겼다.
그것은 마치 대포알이라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거대한 충돌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그 강렬한 일격보다 플레이어들을 더욱 흥분시킨 것은, 구스타프의 검격을 맞아 너덜너덜해진 시체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
“Yeeeeeeeeeeeeeeahhh!!!!!”
“꼴좋다!!! 개미 새끼야아아아!!”
4개의 팔 중 하나는 팔꿈치 언저리에서부터 잘려나가고, 반대쪽 팔은 어깻죽지부터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우며, 가슴 한가운데 새겨진 거대한 검상에서는 끊임없이 녹색 진물 같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수만 명의 플레이어가 환호성을 지르자, 시체 포식자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다 이긴 것처럼 환호하지 마라아아아!.”
시체 포식자가 고함을 지르며 팔을 벌리자, 마치 풍선이 터지듯 전신의 피부가 찢겨나갔다.
그리고는 전신이 온전한 형태의 시체 포식자가 찢어진 피부 아래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런 미친···.”
“탈피? 저거 쿨타임 같은 건 없나?”
거의 치트급 능력에 가까운 완전 회복 능력을 본 플레이어들이 당황하며 외치자, 상혁이 전음으로 분위기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세요. 원래 4티어 이상급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저 정도 수준의 액티브 스킬을 가지고 태어나니까요.
저건 혼돈 계열 상위 몬스터들의 고유 권능입니다.
어떤 녀석은 완전 회복을 쓰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분신술을 쓰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피부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죠.”
“그럼 사기 아닙니까?”
“사기는 아닙니다. 각각의 능력은 얼핏 보면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전부 파훼법이 있는 능력들이니까요.
YAS 안에서, 강한 능력들은 반드시 그 강함에 비례한 페널티와 함께 주어집니다.
그리고 시체 포식자의 완전 회복 스킬인 ‘탈피’ 역시, 분명 페널티를 가지고 있을 거고요.”
“그 페널티가 뭘까요?”
플레이어의 질문에 상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설계한 YAS의 시스템에 대해 떠올리며, 탈피 능력에 부여된 페널티가 무엇일지를 생각했다.
‘4만 명이 전부 달려들어도 제대로 된 데미지를 주지 못하던 전반부 페이즈에서, 시체 포식자는 단 한 번도 탈피를 시전하지 않았어.
유일하게 시전했을 때는, 지수양이 자신의 고유 영역 스킬을 발동해서 상당한 데미지를 입혔을 때고.
그리고 지금이 두 번째 탈피.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때, 상혁의 귓가에 구스타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혁 씨?-
“예? 구스타프 씨?”
-방금 전 공격은 꽤 진심으로 후려진 건데, 데미지가 제로네요?
만약 저 스킬에 페널티가 없다면, 전투는 제가 지게 될 겁니다.
지금도 무리하게 3티어의 벽을 뚫으려다 생긴 데미지 때문에 전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그나마 상혁 씨가 제시한 수련법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거죠.-
사실 3티어의 벽을 뚫는 데는 수없이 많은 방법이 존재했다.
아직 그런 방법을 시도한 플레이어가 없을 뿐이지, 예를 들어 검으로 폭포를 가르려고 시도해도 끊임없이 도전한다면 언젠가 벽을 뚫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혁은 지수가 고유 영역까지 발동시켜가며 수집한 적의 전투 데이터를 통해 가장 역상성이 될 수 있는 스킬을 얻을 수 있도록 수련 방법을 설계해주었다.
인간의 반사 신경으로 도저히 대응할 수 없는 수준의 초고속 연격(聯擊)에 대응하기 위해, 굳이 의식적으로 피하지 않아도 데미지를 회피하며 공격을 가할 수 있는 패시브 스킬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수백 수천 개의 검강이 교차하는 초고속 전투 속에서, 고작 평범한 인간의 반사신경만을 가진 구스타프의 신체가 그나마 온전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굳이 그가 대응하지 않아도, 시체 포식자가 공격하는 순간 수많은 검강이 전신에서 쏟아져 나와 시체 포식자의 공격을 무효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공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효한 공격은 전부 패시브에서 발생했지 제가 직접 한 타격은 다 피해버리고 있어요.
게다가 제 공격 패시브는 맞든 안 맞든 제가 공격을 시도하는 찰나에만 발동하기 때문에 공격하려면 계속 검을 휘둘러야 합니다.
이대로 계속 소모전을 계속하면 저는 무조건 져요.-
“잠깐 기다리세요.”
상혁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전투력에 손실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체 포식자가 즉시 탈피를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지.
그리고 어째서 몸이 너덜너덜한 상태에서만 탈피 스킬을 사용한 것인지.
발생하는 결과는 하나였지만, 추정되는 이유는 너무 많았다.
‘혹시 어느정도 처맞아야 차는 게이지 같은 게 있어서 그걸 채워야 시전 가능한 스킬인가?
아니면 쿨타임 같은 게 있나?’
상혁은 페널티 조건이 쿨타임이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구스타프의 협력이 필요했다.
“구스타프 씨.”
-예.-
“일단 지금 가장 의심 가는 건 쿨타임 페널티에요.
그리고 그걸 확인하려면···.”
-다시 한번 걸레짝으로 만들 필요가 있겠군요.
해보겠습니다.-
구스타프는 다시 한번 시체 포식자에게 돌진했다.
그리고는 시체 포식자를 조금 전과 똑같이 걸레짝 같은 상태로 만들어 지면에 처박아주었다.
이번엔 팔다리가 전부 잘린고 머리 반쪽이 날아간 상태로.
그렇게 몸통만 남아 날아가는 시체 포식자를 보며, 상혁과 구스타프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쿨타임···.’
저 정도 효용을 가진 스킬의 쿨타임이 짧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상혁은 페널티 조건이 쿨타임이라면 아직 재 시전 가능한 상태가 절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체 포식자가 지면에 처박히며 일어난 거대한 먼지구름이 사라지자,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시 한번 멀쩡한 상태로 먼지구름 속을 걸어 나오는 시체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쿨타임은 아니구나.’
딱히 탈피 전과 후의 전투력이 크게 차이나지도 않는 상황이라, 상혁은 해당 스킬의 페널티가 없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전투를 수행해야한다고 결론내렸다.
“구스타프 씨.”
-듣고 있습니다. 쿨타임은 확실히 아닌 것 같네요.-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그럼 몇 가지 가설이 남는 데, 하나는 횟수 제한입니다.
특정 횟수를 사용하고 나면, 영구히 스킬이 봉인되는 페널티죠.
아니면 한번에 몰아서 쓰고 일정 기간 못쓰게 쿨타임이 편성되어 있거나요.”
-만약 그렇다면 횟수는 얼마나 될까요?-
“해당 스킬이 3티어급 고유 스킬인 점, 그리고 영구 봉인 급의 페널티가 막대한 점을 고려하면 임시 봉인의 경우 5회 사용에 6개월 봉인이나 10회 연속 사용 가능에 영구 봉인?
확신은 할 수 없어요.”
-그럼 지수 양이 1번, 제가 두 번 발동시켰으니 최소 2번은 더 공격해야 알 수 있겠네요.-
“가능하시겠어요?”
-해 보겠습니다.-
재개된 전투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상혁을 보며, 한 플레이어가 걱정스러운 듯 질문했다.
“옆에서 대충 들었는데, 지금 구스타프 씨가 불리한 입장인 게 맞나요?”
상혁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플레이어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말투로 물었다.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이는 데도요?”
“그건 스킬의 상성 차이 때문입니다.
애당초 구스타프 씨가 3티어의 벽을 뚫을 때, 시체 포식자를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스킬을 획득할 수 있도록 수련법을 편성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캐릭터가 강하다 하더라도 그 캐릭터를 조작하는 건 인간이죠.
구스타프 씨는 PTW 안에서도 엄청나게 튼튼하고 건강한 분이긴 하지만, 수련 도중에 쌓인 데미지는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겁니다.
지금은 온몸의 통증을 참으며 억지로 전투에 임하는 중이겠죠.”
상혁의 대답을 들은 플레이어는 입을 다물고 간절함을 담아 멀리서 싸우고 있는 플레이어 진영의 대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가 상혁에게 물었다.
“근데 듣고 있자니 좀 불공평한 것 같은데요.”
“예?”
“몬스터는 수련 과정 같은 거 없이 혼돈인가 뭐시깽이인가 하는 AI가 태어날 때부터 강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거죠?
지금 이 모든 사태가 그것 때문에 발생한 거니까.”
“그렇습니다.”
“게다가 완전 회복 같은 말도 안 되는 치트급 스킬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고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하죠. 플레이어는 죽어라 수련해야 경지를 뚫을 수 있고, 그나마도 지금 수만 명이 목숨을 던져가며 포인트를 바쳐서 겨우 3티어의 벽을 뚫었는데, 그렇게 고생해서 태어난 존재가 처음부터 강한 존재한테 밀린다는 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렇네?”
“그러게?”
수많은 플레이어가 웅성거리며 그의 의견에 동의하자 상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째서죠?”
“혼돈이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태어나자마자 쓸 수 있는 강한 힘을 부여하듯이, 축복 역시 수련을 통과해서 경지를 뚫은 강자에게 노력에 걸맞은 선물을 주니까요.
심지어 그 선물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4티어급의 강자가 3티어급의 강자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선물이죠.”
“고유 영역!”
한 플레이어가 소리치자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유 영역.
플레이어가 경지의 벽을 넘을 때, 축복이 플레이어에게 선물하는 유니크 스킬.
그것은 혼돈이 부여하는 고유 스킬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페널티를 감수해야 하지만, 위력 면에서 보면 경지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함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스킬이었다.
“그럼 구스타프 씨는 왜 고유 영역 스킬을 쓰지 않는 거죠?
처음부터 바로 발동해서 쓰면 되지 않나요?”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겁니다.
고유 영역 스킬의 페널티는 스킬마다 전부 제각각이지만, 구스타프 씨의 스킬은 그중에서도 페널티가 가장 심한 편이라서요.”
상혁의 말대로, 구스타프는 고유 영역 스킬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가 가진 고유 영역 스킬인 ‘절대 검역’은, 일정 영역 안에 있는 파괴 불가 속성이나 불사 속성이 부여된 사물까지 모두 절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절삭력을 구현하는 스킬이었지만, 그만큼 막대한 페널티를 가진 스킬이기도 했기에.
‘발동 자세를 취하는 데 들어가는 요구 근력이 일반 스킬의 5배···.
게다가 사용 이후에는 24시간 동안 모든 패시브와 검기 관련 스킬을 쓸 수 없다.
쓰면 무조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당초 지금 몸 상태로는 발동 자체가 무리지.’
풀 컨디션 상태에서도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야 시전 가능한 스킬을, 3티어의 벽을 뚫으며 지칠대로 지친 지금의 육체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구스타프는 고유 영역 스킬의 발동 없이 일반 전투로만 전투를 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체 포식자가 6번째 탈피를 시도하면서, 그런 구스타프의 싸움에도 점점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구스타프는 다시 한번 재생을 마친 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시체 포식자를 향해 분노를 담아 외쳤다.
“야! 이 개사기 새끼야!”
“사기?”
“그럼 싸우면서 노 데미지로 계속 회복하는 게 씹사기지 아니냐?”
그러자 시체 포식자가 억울한 듯 구스타프를 향해 소리쳤다.
“사기는 지금 네가 하는 짓이 사기지!
너와 나는 분명 같은 3티어 수준의 강자다!
그런데 어째서 내 공격은 죄다 빗나가고 네 공격은 전부 내게 맞는 거냐!
더러운 인간 같으니! 넌 분명 ‘규칙’에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하다!”
“이 스벌럼은 내가 그 스킬을 얻으려고 뭔 개삽질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뭐?! 규칙에 뭔 짓을 해?
야 이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물고 태어난 몬스터 새끼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큼은 다진고기로 만들어주마!”
“그렇다면 나는 네가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몇 번이고 부활해주겠다!
그리고 쓰러진 너의 시체를 밟고 이 세계를 박살 내주마!”
“주둥이 털지 말고 덤벼! 이 개자식아!”
“난 개가 아니라 개미다! 더러운 원숭이 새끼야아아!”
“으아아아!”
더욱 격렬하게 격돌하는 두 사람의 싸움을 보며, 상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
‘몇 번이고 부활한다고? 그럼 쿨타임이 페널티가 아닌 건가?’
상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게임의 보스 몬스터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구스타프에게 다급히 메시지를 날렸다.
-구스타프 씨!-
“죽어! 뒈져! 이 개자식아!”
한참 검을 휘두르며 시체 포식자를 육편으로 만들고 있던 구스타프는, 상혁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계속 시체 포식자를 두들겨패고 있었다.
그러나 상혁이 계속 큰 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상혁의 메시지에 대답했다.
-구스타프 씨!-
“아, 예! 상혁 씨!”
-싸우는 건 좋지만, 적의 상태도 봐 주세요!-
순간 다시 한번 탈피를 시도한 시체 포식자가 가시 칼날을 휘두르자, 구스타프의 얼굴에 긴 혈흔이 새겨졌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화를 내는 대신 뒤로 물러나며 상혁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지금 어떻게든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에 대한 정보가 하나라도 더 필요했기 때문에.
“뭘 하면 됩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시체 포식자의 탈피는 아마도 일정 % 이하로 생명력이 떨어져야 발동하는 스킬일 겁니다.
지수와의 싸움에서도 그렇고, 구스타프 씨와의 싸움에서도 몸이 걸레짝이 되기 전까지는 탈피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탈피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떻게 잡죠?”
-그런 종류의 보스를 잡을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하나죠.
탈피 가능한 한계까지 아슬아슬하게 데미지를 준 다음, 탈피하기 전에 한 방에 죽이는 겁니다.-
“한방에요?”
구스타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시체 포식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걸 말입니까?”
-안타깝지만 그게 유일한 방법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지금 그 정도 데미지를 주려면 고유영역 스킬을 발동해야합니다.
지금 제 체력상태로는 무리고요.”
-시간을 벌어드린다면?-
“그럼 가능하죠.”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상혁의 질문을 들은 구스타프의 눈이 이글거리며 불타올랐다.
“3분. 3분만 쉬게 해주시면 온몸의 근육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해내겠습니다.”
상혁과 구스타프의 통신은 그것으로 종료되었다.
그러자 상혁은 PTW의 전 직원을 향해 메시지를 날렸다.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PTW의 직원들에게.
-여러분.-
-알고 있습니다.
3분만 벌면 되는거죠?-
자리에서 일어나는 5천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상혁에게 말하자,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스타프 씨가 딱 탈피 직전 수준까지만 데미지를 주고 빠지면, 저희가 시간을 벌면 됩니다.-
-데미지는 주면 안 되겠네요. 티어가 높은 직원들은 장비를 전부 해제하고 공격해주세요.-
-3분이라······. 가능할까요?-
-해봐야죠.-
유저 사이사이에 앉아있던 직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며 말하자, 유저들도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PTW의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서운하네요. 여기까지 함께 싸웠는데, 적어도 마지막 정도는 함께 하게 해주셔야죠.”
“여러분···.”
“3분이라···앞에서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요.
벌써 쉴 만큼은 다 쉬었습니다.
3분만 더 버티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죠.”
다시 한번 싸움을 위해 일어서는 수만 명의 유저들 사이에서, 한 유저가 말했다.
“갑시다! 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개미 새끼 밟아 죽이러!”
“으아아아아아아아!!”
“죽여! 조져! 아주 박살을 내버려!”
그렇게 전투를 지켜보던 4만 명의 플레이어들은, 구스타프의 공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시체 포식자를 향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직 속옷 하나만을 몸에 걸친 채로.
그러나 확정된 승리를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눈빛은, 막연한 죽음을 맞이하러 달려가던 조금 전의 눈빛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드디어 힘이 빠졌나 보구나!”
시체 포식자는 공격하다 말고 뒤로 길게 물러나는 구스타프를 보며 기쁨에 찬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멀어져가는 구스타프를 향해 대포알 같은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이미 조금 전의 공격으로 온몸이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시체 포식자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의 몸 상태로도, 지친 구스타프와 4만 명의 유저들을 쓸어버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구스타프를 향해 쇄도하던 시체 포식자의 발걸음은 원하던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멀어지는 구스타프 대신, 이제는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지긋지긋한 ‘그 광경’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에.
“으아아아!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들아! 방해하지 말란 말이다!”
시체 포식자가 반쯤 잘린 팔을 휘두르자 다시 수백 명의 속옷 입은 아바타들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러나 수백을 죽이면 수천이, 수천을 죽이면 수만이 그 빈자리를 채우며 시체 포식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구스타프는, 그렇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유저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회복의 자세. 근육 마사지.”
그러자 구스타프의 의지를 인식한 PRD가 전신에 연결된 와이어를 당기며 온몸의 근육을 조이기 시작했다.
뭉친 근육 사이사이에 끼인 피로를 빼고, 전신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하여.
구스타프는 깊게 심호흡하며 전신의 근육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긴 휴식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다급해진 시체 포식자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체력을 회복하는 건가?’
대량 학살을 위해 만들어진 자신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자신의 공격만을 저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스킬을 가지고 나타난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이 지키려던 수많은 유저의 목숨까지 바치면서 하려는 수상한 회복은, 시체 포식자의 논리 회로에 ‘수상함’이라는 단어를 아로새겨 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설마 이걸 위해서 딱 탈피 전까지만 데미지를 준건가?’
지금의 찬스를 놓치면 무조건 패배한다는 생각에, 시체 포식자는 더욱 격렬하게 유저들을 베어 나갔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한 여성 유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넌 여기서 한 걸음도 더 못 가!”
“그때 그 엘프!”
물론 지수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원래는 4티어급의 전투력을 가진 그녀도, 앞서 있었던 전투로 인해 있는 대로 데스 페널티를 받아 거의 7티어 수준으로 능력치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수는 젖 먹던 힘까지 밀어 넣어 부족한 능력치를 보완하고 있었다.
“비켜! 비키라고!”
“죽여! 개자식아!”
“한 걸음도 못 간다!”
“You!!! shall not pass!!!”
다가가기만 할 수 있다면 단번에 베어버릴 수 있는 적.
그러나 자신과 그의 사이를 가로막는 수만 명의 고기 방패는 AI로 이루어진 시체 포식자의 눈에 공포라는 감정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질린다.’
바로 앞에 다가온 승리를 붙잡고자 하는, 수만 명이 내뿜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시체 포식자의 전신을 감싸 안자, 시체 포식자는 분노의 절규를 내뱉었다.
“내 앞을 막지 말란 말이다아아!!”
그 순간이었다.
복수심과 승리욕에 뜨겁게 불타오르던 수만 명의 유저들이 동시에 멈춘 순간은.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멈추게 만든 것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거대한 힘의 폭풍이었다.
“고유영역전개(固有領域全開). 절대 검역(絶對劍域)”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구스타프의 목소리와 함께, 세상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어둠 안에서, 오로지 구스타프와 시체 포식자만이 서로를 바라본 채 대치하고 있었다.
구스타프를 죽을 듯 노려보는 시체 포식자의 몸 상태는 도저히 온전한 상태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실제로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쪽은 스킬을 시전한 구스타프였다.
그의 고유 영역이 안겨주는 막대한 페널티가, 그의 전신을 찌부러트릴 듯이 쥐어짜고 있었기 때문에.
‘뒤질 것 같다!’
3분 동안 필사적으로 신체의 피로를 회복했지만, 아직도 그의 근육 하나하나가 욱신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단순히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검이 무겁다.
경지에 오르고 나서는 마치 나뭇조각을 다루는 것처럼 신체의 일부가 되었던 그의 검이, 지금은 건물 기둥이라도 휘두르려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이겨내며, 눈 앞의 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으로 멋진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입을 벌리는 순간 모든 체력이 호흡과 함께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에.
‘멸절세(滅絶勢).공간절리(空間節理).’
구스타프가 마음속으로 기술명을 외치는 순간, 마치 그 공간 자체를 갈라버리듯 한줄기의 금빛 섬광이 공간을 가르며 시체 포식자가 있는 방향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검기의 파도를 보며, 시체 포식자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가진 그 어떤 권능과 스킬을 동원해도, 저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수없이 많은 죽음을 낳았던 자신의 최후 앞에서, 시체 포식자는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속옷 차림의 유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즐거워보였지.’
경험치를 위해서가 아닌, 그렇다고 보상을 위해서도 아닌 행동에 그토록 전력으로 뛰어드는 인간이란 존재를, 시체 포식자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체 포식자는 그런 유저들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었어도, 왠지 모르게 부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끝에서, 결국 승리를 쟁취한 수만 명의 플레이어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어 있을 테니까.
‘아! 어쩌면 혼돈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을 것 같은 감각이 시체 포식자를 사로잡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구스타프가 날린 강기의 파도가, 그의 신체를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분해해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최후를 맞이한 시체 포식자의 신체는, 마치 별처럼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플레이어들이 머리 위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이···겼어?”
말없이 흩날리는 가루들을 바라보던 한 유저가, 자신의 머리에 묻은 가루를 손으로 잡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주먹을 꽉 쥐며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다.
“이겼다아아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수만 명이 동시에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치는 함성.
자신의 방송을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허먼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기라고 한 것처럼,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러자 그 모습을 보던 스튜디오의 방청객들도, 그리고 PRD가 없어 TV로 이번 싸움을 지켜봐야 했던 전 세계의 팬들도 TV 앞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일궈낸 승리는, 그것이 비록 게임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고작 게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었기에.
그것은 이제 겨우 탄생의 시간을 맞이하기 시작한, 풀 다이브 MMORPG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위대한 승리의 서막이었다.
“하나 둘 셋! 훠이!!!”
“하나 둘 셋! 으쌰아아아!”
그 시각, 상혁은 도대체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있었는지 자신을 붙잡고 헹가레를 치는 플레이어들의 무리에 사로잡혀서, 멀미가 날 정도로 공중에 마구 던져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혁은, 유저들의 손에 잡혀 공중에 던져지면서도 필사적으로 민준을 향해 메시지를 전했다.
상혁은 이 이벤트의 끝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야 했기에.
“민주우우운으아아아아!!”
-목소리가 왜 그러냐?-
“헤에에엥가레에에를 다아앙하고 이이있어서 그으으래!!”
-그럼 다 끝나고 말하던가.
나도 지금 손 하나 깜짝할 힘도 없어.-
“아아아아니야. 지이이이금 해야아 돼애애.”
-뭔데?-
민준의 물음에 상혁이 답했다.
결과적으로 다들 즐겁게 즐길 수 있었던 이벤트가 되긴 했지만, 이런 개고생을 하게 만든 존재를 그냥 방치할 순 없었으니까.
“호오오온도오온이랑 추우우욱복을 부우울러줘아아아악!!!”
그리고 그때, 장난기가 발동한 유저들이 상혁을 바닥에 내팽겨치면서 상혁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상혁은 화를 내는 대신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민준에게 말했다.
“혼돈이랑 축복을 불러. 너도 참석하고.
4명 이서 대화 좀 해야겠어.”
-무슨 대화?-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지. 걔넨 뒤졌어. 진짜.”
상혁의 말을 들은 민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만든 AI가 이번에 일으킨 문제는, 그 일을 벌인 것이 AI가 아닌 직원이었다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사태였으니까.
민준은 심각하게 AI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회초리 같은 물건을 만들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혼돈과 축복을 호출했다.
이 거대한 이벤트의 뒷면에 가려진, 사태의 뒷수습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