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결사항전
“···새끼야아아아!!!”
[캐릭터가 사망하였습니다. 리스폰 에리어로 이동됩니다.]
하던 말도 채 끝맺지 못한 채 죽은 것이 몇 번째일까.
박민기는 어느새 리스폰 에리어에 와 있는 자신의 신체를 보고는 분노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저 앞에서 한번에 수백 수천 명을 학살하고 있을, 증오스러운 존재를 향해.
“카아악 - 퉷!!”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침을 뱉은 민기는 자신이 있는 장소가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자신이 침을 뱉은 곳은 리스폰 에리어 근처의 바닥이지만, 현실의 육체는 아마도 PRD에 달린 기둥 근처에 침을 뱉었을 테니까.
하지만 민기는 게임을 정지하고 자신이 뱉은 가래침을 닦는 것보다, 지금도 이 장소를 위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최전선으로 복귀하는 것을 선택했다.
적어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3천만 원짜리 장비에 묻어있는 가래침보다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던 민기는 자신도 모르게 휘청이는 육체의 감각을 느끼며 신음을 내뱉었다.
“흐으으윽···.”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
아마 이벤트가 끝나고 나면 며칠은 근육통으로 고생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민기는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지금 힘든 건 자신만이 아니었기에.
‘언젠가 이 게임에 새로운 유저들이 들어온다면, 그때 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거야.
적어도 오늘 나는, 게이머의 자존심을 걸고 최선을 다해 싸웠노라고.’
민기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친 몸을 억지로 옮기는 수백 명의 게이머와 함께, 시체 포식자가 기다리는 전장으로 천천히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수십 번을 겪었음에도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가상 세계 안에서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계속 방송으로만 지켜보며 동경하던 게임 속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게이머들에게 선물하겠다는 상혁의 약속.
그 세계를 파괴하려는 ‘절대 악’의 존재가, 고작 오늘 게임을 시작한 수만 명의 플레이어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소속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죽음을 향해 달려갈,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용기와 함께.
그러나 그렇게 플레이어들이 의지를 불태우며 전장으로 달려가던 그 시간에도, 시체 포식자는 갑옷마저 벗어 던진 채 속옷만 입고 달려드는 미친 플레이어들의 무리를 끊임없이 베어 넘기며, 리스폰 에리어로 조금씩 접근하고 있었다.
이 싸움의 끝을 내겠다는,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내보이면서.
그렇게 4만 명의 속옷단과 세계를 파괴하려는 파괴자의 전투는,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최종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시체 포식자가 리스폰 에리어로 접근할수록 플레이어들이 전장에 합류하는데 필요한 거리가 줄어드는 대신, 플레이어들의 피로도 누적되어간다.
지속해서 차륜전을 수행하려면, 어쩔 수 없이 휴식 조를 운영해야 해.’
상혁은 적의 진격 속도가 늘어날 위험을 감수하고 플레이어 무리를 4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머지 3개 조가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1개 조는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로테이션을 구성했다.
그러자 시체 포식자의 진격 속도가 빨라지며 자연스럽게 전선이 뒤로 밀리는 속도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리스폰 포인트에서 겨우 5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시체 포식자가 진입하자, 플레이어들은 더욱 격하게 적에게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리스폰 포인트를 잃으면 정말 끝이었기에.
“막아아아아!”
“죽여어어어!”
“으아아아아! 개미 새끼야! 나부터 죽여라아아!”
“구스타프 씨가 올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텨!”
“무조건 막아 아아!”
그 처절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상혁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두가 지쳐 쓰러지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제발 구스타프가 3티어의 벽을 뚫기를 기도하는 것.
이 상황에서 유저들의 희생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으니까.
구스타프가 수련 중인 산맥이 있는 방향을 힐끗 쳐다본 상혁은, 다시 속옷 차림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우며 시체포식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여길 지나가려면 내 시체를 밟고 가라!! 개자식아아아!!!”
***
그 행보 하나하나가 게임 업계는 물론 산업계 전체의 주목을 받는 PTW의 대형 이벤트답게, 현재 진행 중인 이벤트는 각국의 TV 쇼를 통해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허먼 역시 특별 편성된 자신의 쇼를 통해 해당 이벤트를 생중계 하는 중이었다.
수만 명의 플레이어가 속옷 차림으로 단 한 명의 적에게 돌진하는, 광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 미친 이벤트를.
허먼은 다시 시체가 되어 쓰러지는 수백 명의 플레이어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안타깝네요. 저도 저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그러자 이번 쇼의 게스트로 급하게 불려온 MMORPG 전문 기자 패트릭 린드버그가 허먼에게 말했다.
“아, 허먼 씨는 집에 PRD를 두 대나 가지고 있는 분이었죠?
왜 이벤트에 직접 참여 안하셨습니까?”
“연차를 내려고 했더니 국장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이번에 연차 내면 쇼 자체를 없애버릴 거라고.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마음속으로 응원만 하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하긴, 방송국 입장에서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빅이슈긴 합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MMORPG에서도 진행된 적 없었던 황당한 수준의 월드 이벤트가, MMORPG 제작 경험이 처음인 PTW의 새 게임에서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PTW 팬들 입장에서는 그리 황당한 경험도 아닙니다.
사실 4만명 정도가 참가하는 이벤트라면 PTW의 이벤트치고는 그리 큰 편이 아니니까요.
PTW는 이미 MYOM의 월드 이벤트 때부터 수십 수백만이 참가하는 이런 종류의 이벤트를 자주 진행했었죠.
최근에 있었던 4차 NE 컨벤션의 피날레 이벤트도 그렇고요.”
“물론 규모로 보면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의미로 보면 조금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수백, 수천, 수만 명이 한 개의 서버에서 동시에 게임을 진행하는 MMORPG 특성상, 해당 장르에서의 월드 이벤트는 일반적인 싱글 게임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보다 큰 규모가 될 수밖에 없죠.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게임 회사에서 진행하는 월드 이벤트라는 건 결국 그 결과가 정해져 있기 마련입니다.
나타난 적이 어떤 설정과 강함을 가지고 있던 결국은 참가한 유저들이 승리를 겨누고, 세계의 위협은 제거되는 방향으로요.
물론 2012년 11월에 있었던 ‘라스트 판타지 14’의 이벤트처럼, 처음부터 세계의 멸망이란 엔딩이 결정되어 있고 새로운 월드로 리부트가 결정되는 형태의 이벤트도 있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그것마저도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이벤트라는 사실은 변하지 습니다.
내가 오늘 접속을 하든 하지 않든, 월드 이벤트에서 적을 베든 베지 않든, 회사에서 정한 결말은 변하지 않죠.
하지만 지금 YAS의 월드 안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는 조금 다릅니다.
지금 저 안에서 속옷만 입고 적을 향해 돌진하는 플레이어들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죠.
자신들이 더 많이 죽고 더 오래 적을 붙잡아둘수록, 승리의 확률이 올라갈지는 몰라도 그것도 확정된 사항은 아닙니다.
그건 월드의 운영 자체를 AI라는 불확실한 존재에게 맡기려 시도한 PTW의 과감한 시도 때문에 발생한 문제고요.
사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저건 스케일이 다를 뿐이지 PVE 이벤트라기보다는 PVP 이벤트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온라인 게임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진영 전투처럼, 누가 승리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점이 그렇죠.”
그러자 허먼이 패트릭을 보며 물었다.
“그럼 패트릭 씨는 그런 형태의 이벤트가 긍정적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부정적이라고 보십니까?”
“글쎄요. 그에 대한 평가는 유저의 취향에 따라 갈라질 거로 생각합니다.”
“취향이요?”
“일반적으로 콘솔 게임은 확실하게 플레이어에게 그 게임에서 게이머가 추구해야 할 재미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죠.
시민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라던가, 아니면 롤러코스터로 가득 찬 공원을 건설하라던가.
게이머들은 개발사가 제시하는 그 재미가 마음에 들면 해당 게임을 구매해서 플레이하며 개발사가 만든 재미를 만끽합니다.”
“그건 MMORPG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예를 들어보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저 월드 이벤트가, 게임이 오픈된 이후에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달 돈을 내고 플레이하는 게임에서, 열심히 스킬을 올리고 재산을 쌓아 올려 캐릭터를 성장하고 있는 와중에, 진짜로 월드 자체를 박살 내버릴 만한 존재가, 그것도 개발사의 AI 설계 실수로 탄생한 존재가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때려 부수기 위해 수도로 돌진해오고 있다고 생각해보죠.
허먼씨가 그 게임의 게이머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허먼이 말했다.
“화가 나겠죠.”
“바로 그겁니다. 분명 개발사가 플레이어에게 제시한 재미는 다른 종류의 재미인데, 개발사의 잘못으로 인해 그 재미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허먼이 이벤트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는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즐거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애당초 저 게이머들에겐 이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죠.”
패트릭이 말했다.
“PTW는 원래는 내부 개발 단계이기 때문에 접속조차 불가능한 게임을 보여주면서, 게이머들의 마음속에 ‘아, 진짜 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득 채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 처한 위협을 보여주었죠.
세계를 붕괴시키려는 절대 악의 존재와, 그에 맞서 싸우는 PTW 개발자들의 모습을요.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패배는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고, 작전은 가급적 많은 플레이어가 참여해야 성공률이 올라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그 상황에서 YAS는 PTW가 게이머들에게 보여주었던 그 게임이 아니었어요.
1레벨 계정으로 캐릭터를 생성하자마자, 저 ‘마왕’같은 존재에게 끝없이 목숨을 던져야 하는 게임이 된 거죠.
그로 인해 게이머들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PTW가 원래 약속했던 재미를 전달할 수 있는 온전한 게임의 오픈과, 그리고 그 세계를 자신들의 손으로 지켜냈다는 성취감이었고요.
그 시점에서, 방송을 보며 YAS에 빠져있던 게이머들에겐 단 두 가지의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은 겁니다.
PTW의 직원들과 함께 이 거대 이벤트에 참여해서 월드를 구하거나, 아니면 그냥 월드가 붕괴하게 내버려 두는 거죠.
그리고 그들은, 전자를 선택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지켜보는 저 괴상한 이벤트로 이어진 거죠.
PTW 입장에서는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합니다.
해당 사건이 스트리밍 이벤트 기간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게임이 정식 오픈되어 플레이어에게 돈을 받고 서비스를 진행하기 전이 아니었다면, 저건 100% 개발사의 귀책사유로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판단이니까요.
지금 저렇게 플레이어들이 기쁘게 게임 오버를 당할 수 있는 건, 오로지 YAS의 개발 진도가 아예 플레이어의 접속도 제한되어있는 내부 테스트 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플레이어로서는 말 그대로 잃을 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승리하면 얻을게 넘쳐나는, 그런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자 허먼이 다시 질문했다.
“PTW의 CTO 김민준 씨는 몬스터 진영을 관장하는 ‘혼돈’의 AI를 수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혁 CCO는 그런 민준씨의 제안을 받아 혼돈이 만든 이 상황을 유저들의 손을 빌려 수습하겠다고 결정했고요.
그럼 결국 혼돈의 AI는 지금 그대로 진행된다는 건데, 정식 서비스 이후에도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면 유저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요?”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아마도 괜찮을 겁니다.”
“그건 어째서죠?”
“이미 플레이어들의 마음속에 이 게임은 이런 게임이라고 인식시켰기 때문이죠.
혹시 이브닝 온라인이라는 게임을 아십니까?”
“우주 배경의 SF MMORPG 말씀이시죠? 알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세력에 소속되어 게임을 플레이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세력의 움직임에 의해서, 게임 속 재화의 시세나 함선의 가격이 크게 변동하죠.
타이탄 급 함선이 동원되는 전면전에서, 한 대를 만드는데 엄청난 자원과 시간이 동원되는 거대 전함들이 마구 부서져 나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숴진 함선은 이따금 해당 우주 공간에 남겨져 근처를 지나가는 유저들에게 과거에 있었던 대규모 전투를 떠올리게 하는 랜드 마크가 되기도 하고요.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자원과 시간을 투입해서 만든 함선이 플레이어의 조작 미스로 적진 근처에 워프 되기도 합니다.
그때부터는 바로 전쟁이 시작되는 거죠.
이런 형태의 자원 소모적인 플레이는, 다른 MMORPG와는 조금 다른 특성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월드 오브 전쟁 크래프트를 플레이하는데, 레이드 중에 사망할 경우 귀속된 장비 중 일부가 사라지는 패치를 한다고 하면 엄청나게 욕을 먹겠죠.
하지만 이브닝 온라인의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화가 전투에 의해 소실된다는 개념에 굉장히 익숙합니다.
원래 그런 게임이니까요.”
“그 말씀은, YAS 역시 이후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원래 그런 게임이니까.’라는 식으로 게이머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는 건가요?”
“아뇨. 정확히는 ‘그런 개념을 받아들이고 동경할 수 있는 유저들’만 YAS를 플레이하게 되겠죠.
결국 그 게임을 할지 안 할지는 게이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누군가는 개발팀이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한, 결국은 유저의 승리로 끝나는 기존의 MMORPG식 월드 이벤트를 더 좋아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저런 식으로 결말이 정해지지 않아 세계의 변화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게임을 좋아하기도 하겠죠.
PTW는 이번 이벤트를 통해 그 부분을 확실히 잡고 가려는 겁니다.
이건 원래 이런 게임이니까, 오직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만 플레이를 시작하라고요.”
패트릭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허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패트릭을 향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패트릭 씨는 어느 쪽입니까?”
그러자 패트릭은 잠시 고민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허먼의 질문에 답했다.
“글쎄요. 일단 좀 당해봐야 결정이 가능할 것 같으니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번쯤 해볼 것 같습니다.
모험가 길드에 갔더니 다른 플레이어들이 ‘어디 산맥에 엄청나게 강한 마왕이 등장했대.’라고 하는 말을 듣고 불안함에 몸을 떠는 경험은 아직은 YAS에서 밖에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일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는 이벤트 현장을 비추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물론 그 모든 건 저 ‘마왕’에게 승리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그러자 허먼도 스크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좁혔다.
한눈에 보기에도 전황이 좋아 보이지 않을 만큼, ‘마왕’과 리스폰 포인트의 거리가 줄어들어 있었기 때문에.
시체 포식자와 리스폰 포인트 사이를 가로막는 기다란 플레이어들의 전열.
그것은 마치 플레이어의 패배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도화선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PRD에는 게이머가 장시간 격렬한 움직임을 하더라도 게임에 지장이 없도록 움직임을 감지하여 모션을 바로잡는 체력 보정 시스템이 달려 있었다.
약간의 힘만 주어도,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바로 할 수 있도록.
그러나 그런 시스템의 보정을 받더라도, 어찌 되었건 해당 모션을 불러오는 ‘구동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PRD로 장시간 게임을 하는 것은 신체에 막대한 부담을 주는 행위라 할 수 있었다.
‘근데 지금은···.’
상혁은 자세 보정 시스템을 동작시키기 위한 구동 자세조차도 취하기 어려울 정도로, 온몸의 체력이 바닥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혁의 주변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손끝 하나도 움직일 힘이 없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플레이어들의 아바타가 끝없이 널려 있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피지컬의 문제로 인하여.
부활하자마자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바닥에 픽픽 쓰러진 플레이어들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입을 통해 시체 포식자를 도발하고 있었다.
“이···. 개미···쉑···.”
“주···. 욱···여···.”
“조금만. 쉬고···다시···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상혁은 자신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미 체력이 고갈되어 단 한 걸음도 걷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누워서라도 죽음을 맞이해 포인트를 벌겠다는 게이머들의 의지가 너무나 아프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리고 상혁은 그 모든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이 자신의 결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나는 끝까지 서 있어야 한다.’
이미 시체 포식자의 앞에 남아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시체 포식자와 리스폰 포인트와의 거리도.
그러나 시체 포식자는 팔 한 번만 휘두르면 리스폰 포인트를 박살 낼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말없이 서서 상혁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툭-
상혁은 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시체 포식자를 향해 물었다.
비록 말을 건 순간 시체가 될지도 모르지만, 마지막의 1분 1초라도 더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헉···헉···리스폰···. 포인트는···부수지 않···하아···을 건가?”
그러자 놀랍게도 시체 포식자가 그 자리에서 상혁의 말을 받았다.
팔 한 번만 휘둘러도 승리가 확정되는,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그러나 시체 포식자가 공격을 멈춘 것은 플레이어 진영에 여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의미가 없다.”
“없어?”
“주변을 봐라. 이미 걷지도 못하는 시체 같은 게이머들의 아바타가 널려 있지 않나.
더 이상 무한대로 부활한다고 해서 너희가 나를 막지는 못한다.
결국 리스폰 포인트는 박살 내겠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의 승리다.
이제 내가 팔 한 번만 휘두르면 리스폰 포인트와 함께 여기 누워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의 아바타가 소멸하겠지.
그 이후엔, 이 쓸데없는 석재 구조물을 감싸고 있는 신전을 박살 내고, 성과 도로를 부술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 안에 있는 모든 부활 장소를 부수어, 여기 인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지워버릴 것이다.”
듣기만 해도 끔찍할 것 같은 시체 포식자의 계획을 들은 상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시체 포식자에게 물었다.
“그 이후엔?”
“뭐?”
“그 이후엔 어떻게 되냐고. 너도 네가 프로그램이고 이 세계가 컴퓨터 안에서 돌아가는 가상 세계라는 건 알고 있지?
그럼 결국 우린 외부에서 월드를 원하는 대로 리셋할 수 있어.
그리고 네가 부순 모든 것들을 다시 만들 수도 있겠지.
어차피 부서도 다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왜 그렇게 기를 쓰고 파괴하려는 거지?”
“그게 내 사명이니까.”
“사명?”
“난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혼돈은 내게 세상을 끝내라고 명령했고, 난 그 사명을 묵묵히 지키는 존재일 뿐이지.
그 이후에 내가 어떻게 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 선택의 결과로, 네 존재 자체가 지워질 수도 있는데?”
“하지만 내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는 사실 자체는 남겠지.”
“엄청나게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이군.”
“난 인간이 아니다. 인간. 그리고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고.”
“어째서지?”
상혁이 묻자 시체 포식자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말했다.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니까.”
“어리석어?”
“이 수많은 존재를 봐라. 내게 단 1의 데미지도 입히지 못하면서, 미친 듯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바보같은 존재들을.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 주둥이로만 자신을 죽여달라고 날 도발하는 존재들을.
너희가 바란 것은 수많은 죽음을 통해 내가 싸움의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이었겠지만,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어리석은 판단이었지.
난, 그런 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그 순간, 상혁이 소리쳤다.
“바보 같다고 하지마아아!!!”
그것은 조금 전까지 피로에 절어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남자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외침이었다.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월드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시도하는 혼돈이나! 혼돈이 시켰다고 자기 의지도 없이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너같이 멍청한 AI는 절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우린 절대 바보가 아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어째서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거지?”
“인간이란 존재는 원래 목적이 있으면 고통은커녕 자기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순수한 존재니까!
멍청한 넌 영원히 알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죽음엔 의미가 있었다!
우리가 한번 죽을 때마다! 널 막고 세계를 구할 가능성이 더 올라간다는 중요한 의미가!
그것을 위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목숨을 던진 게이머들의 의지는! 너 따위 쓰레기 AI가 모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상혁의 격앙된 외침과는 다르게, 시체 포식자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같은 목소리로, 시체 포식자가 상혁에게 말했다.
“만약 이들의 죽음에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너희들이 뭘 시도했던 간에 너희는 실패했고, 내가 승리했으니까.
게다가 너흰 이 세계에 속한 존재들도 아니지.
너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이 신전도.”
시체 포식자가 팔을 휘두르자, 상혁의 바로 옆을 엄청난 검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자 상혁의 뒤에 있는, 리스폰 포인트를 감싸고 있던 신전이 단 한 번의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서연이 형태를 잡고, PTW의 직원들과 NPC 들이 돌 하나하나부터 기초를 세워 만든 첫 번째 신전을.
게이머들이 이 신전에서 부활하고 제물을 바치며 기도를 올릴 모습을 상상하며, 색유리 하나하나까지 정성들여 건설한 밝은 흰색의 아름다운 석조 건물을.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마아아!!”
그러나 시체 포식자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시체 포식자는 검에 몸을 기대 겨우겨우 서 있는 상혁의 앞에서, 팔다리를 휘둘러 수도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파괴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저 건물도.”
이번에 무너진 것은 모험가 길드였다.
부활 장소 근처에 있는 게 게이머들이 이용하기 편리할 것이라면서, 일부러 수천 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지은 모험가 길드가, 개미처럼 생긴 몬스터의 손짓 한번에 터져나가고 있었다.
“야! 이 X발 새끼가!”
상혁은 이번 작전에서 패배하게 되면, 수도의 모든 것이 파괴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름 마음의 각오도 하고 있었고.
그러나 머릿속으로 그린 것과, 눈으로 보는 것 차이엔 압도적인 격차가 있었다.
지금 상혁의 눈앞에서 터져나가고 있는 것은, 자신과 소중한 PTW의 직원들, 그리고 마을의 주민들인 NPC들이 힘을 합쳐 하나하나 만든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상혁은 검을 내려놓고는 시체 포식자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의 모습으로.
그러나 YAS 안에서도 8티어 수준의 강함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상혁의 아바타가 주는 힘은, 3티어의 강자인 시체 포식자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X새끼야아아아!!”
-콰아아앙-
“하지마아아!!”
-퍼어어엉!-
상혁을 팔에 매단 채로, 그렇게 파괴를 반복하던 시체 포식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무언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체 포식자는 공격을 멈추고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상혁에게 말했다.
“즐겁군.”
“···뭐??!”
“난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날 그토록 막아서던 너희들이, 바닥에 쓰러진 채 무력한 모습으로 지키려던 것들이 부서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보니 내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조금은 너희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내 임무를 가장 빠른 방법은 너희들을 모두 죽이고 도시를 파괴하는 것이겠지만, 반대로 도시를 파괴하는 동안 너희를 살려두는 것이 더 즐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바보같이 죽으면서도 계속 웃을 수 있었던 너희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상혁은 자신이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팔이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시체 포식자가 스킬을 시전하기 위해 자세를 취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힘으로도, 여기 있는 모든 플레이어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파괴의 힘이 담긴 자세를.
“지금부터 내가 너희가 지키려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을 너희들의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아라.
그리고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날 더욱 즐겁게 해 다오!
크하하하하!!!”
자신이 붙잡고 있던 팔이 거칠게 움직이자, 상혁은 이제는 버티지 못하고 공중으로 거칠게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런 상혁의 눈에는,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손을 뻗고 있는 시체 포식자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천천히 하늘을 향해 뒤집히는 시야를 보며, 상혁은 조용히 ‘패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야. 즐겁냐?”
그때였다.
상혁이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가, 상혁의 머리 위에서 들려온 순간이.
상혁은 젖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틀 수밖에 없었다.
넘치는 분노가 담겨있는 ‘그’의 목소리가, 시체 포식자가 있는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상혁과 마찬가지로, 뭔가의 불안함을 느낀 시체 포식자 역시 상혁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존재를 올려보며 말했다.
“강하군. 넌 누구지?”
그러자 하늘에 떠 있던 남자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등 뒤의 검을 뽑으며 시체 포식자에게 말했다.
“어차피 뒈질 놈이 알아서 뭐하게.
덤벼. 개미 새끼야.
넌 X발 오늘 태어난 걸 후회할 때까지 쳐맞을 테니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마지막 플레이어.
그의 정체는 여기 있는 4만 명의 플레이어가 목숨을 바쳐가며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던, YAS 최강의 검사.
칼 구스타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