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388화 (389/485)

388. 무너지지 않는 요새 평원 전투

수도 근교 ‘무너지지 않는 요새’ 근처의 평원.

왼쪽 저 멀리 보이는 숲을 제외하면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넓은 평지는, 원래대로라면 위험 지역을 향해 원정을 떠나는 일부 플레이어나 마차에 짐을 싣고 길을 따라 이동하는 상인 외에는 아무도 이동하지 않는 한적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한적했던 평원에는 거의 2만에 달하는 막대한 유저들이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제 방송 시청자분들은 이쪽으로 이동하셔서 제 제자들의 설명을 따라 석재를 가공해주시면 됩니다.

망치와 끌은 석재 가공 에리어 입구의 책상에 쌓여 있으니 한 쌍 식 가져가서 작업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대장장이 조합의 예비 가입자분들께서는 여기 있는 귀여운 가이드를 따라 대장간 에리어로 이동 부탁드립니다!”

“하나 둘 셋 하면 밧줄을 당겨 기둥을 세워주세요! 하나 둘 셋!”

“당겨!!!”

“허이짜! 허이짜! 허이짜아아!!”

한쪽에는 30미터 크기의 거대한 스톤 골램이 옮겨온 석재를 열심히 가공하고 있는 수천 명의 유저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뜨거운 용광로에서 쇳물을 퍼서 열심히 거푸집에 붓고 있는 수천 명의 유저들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어디서 베어왔는지 어른 6명이 손을 붙잡아야 겨우 감싸 안을 수 있는 크기의 거대 나무기둥을 수백 개씩 세우고 있는 수천 명의 유저들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중세시대에서나 볼법한 거대 토목공사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권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와 죽은 생선 같은 눈빛으로 토목공사에 동원되었을 중세시대 농민들과는 다르게, 2만명에 가까운 유저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번 이벤트에 참가한 유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잠시 후 벌어질 전투에서 수없이 죽음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방송으로만 플레이를 지켜보던 ‘꿈의 게임’을 갑작스러운 이벤트를 통해 플레이하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그리고 그렇게 들어와서 플레이한 YAS라는 게임의 시스템은, 그들이 방송으로 보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오오오! 숙련도가 올랐어! 망치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아!”

“돌 깎는데 삑사리 나는 것도 점점 줄어드는데?”

“나, 결심했어. 게임이 정식 오픈되면 난 무조건 석공 캐릭터로 갈 거라고.

게임 안에 모든 성벽과 신전 공사에 참여해서, 벽돌에 내 이름을 박아넣을 거야.”

“미친, 그냥 망치질하는 건데 왜 이렇게 즐겁냐?

좀 있으면 뒤질 운명인데도.”

한쪽에서 돌을 깎던 유저들이 떠드는 사이, 붉게 달궈진 쇳덩이를 두들기는 유저들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근데 어차피 우리가 검으로 때려봐야 데미지 1도 안 들어갈 텐데 검은 왜 만드는 거지?

못해도 수십만 자루는 만들려는 것 같은데.”

“게다가 숙련도가 엉망이라 품질도 완전 조악함의 극치인데.”

“저쪽 조에서는 갑옷도 만드는 중이던데?”

“그냥 그 개미 새끼한테 가서 죽으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굳이 검을 만드는 거야?”

그러자 말없이 망치를 두들기던 한 유저가 질문에 답했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지 안 보셨나 봐요?”

“공지요?”

“죽을 때 생성되는 포인트는 유저의 강함을 기준으로 생성되지만, 유저의 장비 수준이 높아져도 포인트 생성량이 올라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첫 돌격 때 유저 전체가 싸구려 장비나마 모든 장비를 차고 돌격하고 죽으면, 그 장비들을 귀속이 되어있지 않으니 그 자리에 떨어질 테고, 그럼 2번째 돌격하면서 죽기 전에 땅에 떨어져 있는 검을 들고 죽으면 또 포인트가 늘어나는 거죠.

솔직히 이 정도 등급 장비라고 해봐야 추가되는 포인트 생성량은 미미하지만, 조금이라도 유저가 덜 죽을 수 있도록 준비해주는 거죠.”

“아, 이유가 있었구나.”

“뭐, 그래 봐야 수십 번 죽어야 하는 건 변함없겠지만.”

“아프려나···.”

한 유저가 자신의 몸을 만지며 말하자, 다른 유저가 그에게 물었다.

“물리 피드백 옵션 조정 안하고 오셨어요?”

“하긴 했죠.”

“그럼 그리 아프지는 않을건데.”

“반대로 해서 그렇지.”

“엑? 왜요?”

“그편이 실감 나잖아요. 기껏 이렇게 큰 이벤트에서 수십 번의 죽음을 감수하는 건데, ‘별로 안 아프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조금 더 아프더라도, 나 자신을 희생해서 뭔가를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즐거울 것 같아서.”

“마조히스트라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회사에서 권장하고 있으니 옵션 치는 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는 대답 대신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번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수만 명의 유저들을.

그리고 그들이 내는 소음과 열기, 이어질 전투로 점점 달아오르는 흥분된 공기를.

PRD의 뛰어난 성능은 수천 개의 달궈진 쇳덩이가 내뿜는 열기와 더불어, 개방된 평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시원함도 함께 전달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진짜로 전쟁을 앞둔 병사가 된 기분을 그에게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역시 조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옵션을 최대치로 올려도 PRD는 어차피 몸에 휴유증이 남을 정도의 데미지를 주지 않도록 설계된 기기니까요.

전 이번 이벤트에서 전달받을 수 있는 100%를 전달받고 싶어요.

아플 땐 아프고, 죽을 땐 죽는 거죠.

어차피 YAS 안에서 죽는다고 해도 현실의 목숨이 날아가는 건 아니니까.

비록 적에게 데미지는 주지 못하더라도, 내가 이번 이벤트를 위해 뭔가를 감내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다른 유저는 자신의 손에 들린 망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휘둘러 옵션창을 호출해 물리적 피드백 옵션을 재조정했다.

“역시 저도 100%로 하겠습니다.”

“마조히스트라서요?”

“당신과 같은 이유로요.”

그렇게 마주 보며 웃는 두 사람 사이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

“잘못된 결정이었을까?”

수많은 유저들이 모여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무너지지 않는 요새’의 꼭대기에서, 유저들을 바라보고 있던 민준이 상혁에게 말했다.

그러자 민준과 마찬가지로 아래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상혁이 시선을 고정한 채로 민준에게 말했다.

“인제 와서 후회돼?”

“조금은. 괜한 고집 때문에 유저들에게 겪어도 되지 않을 수십 번의 죽음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차라리 롤백하고 월드 육성을 다시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글쎄. 이미 방송으로 모든 내용이 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AI가 제멋대로 생성한 몬스터를 못 막아서 게임 오픈이 1년 가까이 지연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 그걸 받아들일 유저들은 그리 많지 않을걸.”

“사실 혼돈의 행동은 나도 예상외였어.

애당초 혼돈의 알고리즘은 진영 간 전쟁에서 승리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구조가 아니었으니까.”

“무슨 말이야?”

“설계 자체는 상혁이 네가 요구한 대로 완벽하게 들어갔다고.

내가 혼돈을 설계할 때 혼돈에게 지시한 건, ‘최대 다수의 유저가 최대한 즐겁게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몬스터를 만들어라.’라는 거였거든.

근데 그 로직을 무시하고 어째서 승리를 고집하는지,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아.”

“넌 그 예상외의 판단을 내린 AI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이 말했다.

“우선 몇 가지 정정할 게 있는데, 지금 죄책감에 빠진 우리 김민준 선생을 위한 말을 먼저 전달하자면, 이 이벤트의 진행을 결정한 최종 결정권자는 나야.

그리고 그 결정엔 물론 네 부탁이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걸 부정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어.”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게 아니었다고?”

“어. 이번 이벤트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혼돈의 AI를 보전하려는 이유가 아니라 내 잘못된 판단을 바로 잡으려는 거였으니까.”

“잘못된 판단?”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민준을 향해, 상혁이 말했다.

“애당초 내가 YAS의 월드를 설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개념이 ‘잠금’이라는 건 알고 있지?”

“그렇지. 오로지 그걸 위해서 만든 AI가 ‘혼돈’과 ‘축복’이니까.”

“맞아. 사실 기존의 MMORPG에서, 보스라는 건 유저들에게 유흥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일종의 배우 같은 역할을 하는 몬스터였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얼마만큼의 강함을 가지고 있을지, 그리고 무슨 보상을 줄지, 어떤 스토리를 가졌는지, 그 모든 요소들을 개발사에서 결정하고 업데이트하면, 유저들은 신규 필드나 던전에 들어가서 그 잘 설계된 시나리오를 보면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기존의 MMORPG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어.

물론 개발사에서는 스토리에 무게감을 주기 위해서 해당 몬스터가 세계의 파멸을 위해서 나타난 마왕이라던가 하는 설정을 잔뜩 붙여서 업데이트하곤 하지만, 실제로 유저가 그걸 무찌르든 말든 세계엔 별 영향이 없지.

게다가 일부 유저만 그런 멋진 스토리 몬스터를 격파하게 둘 수는 없으니, 보스 몬스터는 끝없이 리스폰 되면서 매일같이 유저들에게 털리게 되어있었어.

문제는 그런 구조하에서 발생하는 괴상한 설정 붕괴가 끝없이 반복된다는 거였지.”

“괴상한 설정 붕괴?”

“그렇잖아. 매일 밤 보스가 대장간에서 보상으로 뿌릴 무기를 두들기는 것도 아닌데 개나 소나 보스가 가진 무기를 다 들고 다니게 되잖아.

나는 분명 지난주에 이리단을 쓰러트린 용사였는데, 이번 주에도 다음 주에도 이리단이랑 끝없이 싸우고 있단 말이지.

그건 그냥 한번 봤던 영화를 끝없이 반복해서 보는 거랑 다른 바가 없는 짓이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험이란 건, 그런게 아니었어.

그래서 YAS의 몬스터는 한번 소멸하면 다시 등장하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던 거고.

그래서 끝없이 새 몬스터와 보상 아이템을 생성해서 유저에게 갖다 바칠 AI가 필요했던 거지.

지금 생긴 문제는, 그 임무를 수행하게 하려고 잘못된 알고리즘을 심어서 발생한 문제고.”

“잘못된 알고리즘?”

“민준이 네가 말했지. 혼돈에게 심어진 알고리즘은 최대 다수의 유저가 최대한의 행복을 즐기게 하는 거라고.”

“어.”

“그 행복의 총량은 뭐로 판단하는 데?”

“어?”

민준이 당황하며 묻자, 상혁이 말했다.

“예를 들어 한 유저가 어떤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 100번을 사망했다 쳐.

그리고 마침내 성공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지.

그럼 앞에서 있었던 100번의 죽음이 가져다준 스트레스와, 단 1번의 승리로 얻을 수 있었던 기쁨을 정확하게 수치로 판단할 수 있냐는 말이야.”

민준은 대답하지 않자, 상혁이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너도 그 부분에 적합한 알고리즘을 설정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치를 설정해놓았겠지.

예를 들어 전투 패배는 -10점, 승리는 +200점. 보상 아이템의 수준에 따라 또 +몇 점.

장비 손실에 따라 또 –몇 점.

근데 말이지, 게이머가 게임에서 느끼는 재미라는 건 그렇게 수치로 잡을 수 있는 요소가 아니야.

나는 패배하고 장비를 잃어버렸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장비를 획득할 수 있어서 더 기쁠 수도 있고, 아니면 패배를 했지만 적이 사용한 스킬을 보면서 내가 수련 중인 스킬을 다음 단계로 성장시킬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하고 기뻐할 수도 있잖아.

아니면 수백 번을 시도하면서 –되었던 감정이 단 한 번의 승리로 순식간에 뒤집힐 수도 있고.

승리했는데 장비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장비보다 능력치가 구려서 엄청나게 실망할 수도 있지.

그걸 단순히 수치로만 환산한다면, 승리로 얻을 수 있는 수치를 엄청나게 높여놓지 않는 이상 무조건 –에 수렴하게 될걸?”

“어째서?”

“게임이란 건 원래 고통의 반복이니까.

우리가 괜히 레벨업이나 반복 사냥을 ‘노가다’라고 부르는 게 아니지.

단지 우리가 그걸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그 과정 자체가 나중에 찾아올 거대한 희열을 암시하기 때문인 거고.

결국, 과정이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게이머를 행복하게 만드는 존재가 게임이란 존재니까.

저기를 보라고.”

상혁이 손가락으로 성벽 아래 모여있는 유저들을 가리켰다.

“레벨 1에, 장비도 너덜너덜한 사람들이, 좀 있으면 수없이 달려가서 억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데도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망치를 두들기고 벽돌을 옮기고 있어.

그렇다고 전투 끝에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런 현상을 지금의 혼돈이 가진 알고리즘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상혁의 말을 들은 민준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마치 무언가의 힌트라도 잡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네. 이제 이해가 되는 군.

그러니까 혼돈은 이 YAS라는 월드 자체가 유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원인이라고 판단했다는 거네.

그래서 월드 자체를 박살 내서 게임을 못하게 만드는 게 유저 전체의 행복을 보장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거고?”

“내 추측으로는 그래. 민준이 네가 만든 AI가 멍청할 리는 없으니까.

단지 너무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하려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거지.

AI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게임플레이는 이런 느낌이었을 거야.

한 100번쯤 키보드에 샷건을 갈구다가 딱 1번 5분 정도 기쁨에 젖는 그런 행위가 바로 게임이라고.

그럼 그냥 샷건을 칠 일 자체를 없애버리는 게 임무를 수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겠지.”

“그럼 아이템 획득이나 승리했을 때의 스트레스 보정 값을 엄청나게 올려놓으면 해결되겠군.”

그러자 상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민준을 보며 말했다.

“아니, 그 프로그래머 적인 발상이 문제라니까?

뭐든지 숫자로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을 좀 버려.”

“무슨 말이야?”

“지금 혼돈이 학습해야 하는 내용은 단순한 즐거움의 크기가 아니라는 거지.”

그렇게 말한 상혁은 성벽을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민준을 향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일단 지금은 지켜보고 있어. 내 추측이 맞다면, 혼돈에 대한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어디 가는 데?”

“이제 곧 전투가 벌어질 텐데, 우리 때문에 이 난장판에 동원된 게이머들에게 응원의 한마디 정도는 해 줘야지.

수십 수백 번의 게임 오버와 바꿀 수 있을 만한 멋진 연설을 내가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상혁을 본 민준은 다시 성벽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전투 준비를 얼추 마무리한 수만 명의 유저들이, 오와 열을 맞춰 한 줄로 정렬하고 있었다.

***

‘미친, 진짜 많네.’

양 손에 검과 방패를 든 채 각양각색의 갑옷을 입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저들을 보며, 상혁은 깊게 심호흡했다.

물론 상혁이 딱히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고 긴장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쇼케이스같은 이벤트와 지금의 이벤트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상혁은 자꾸만 떨려오는 손에 힘을 주어 말고삐를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쇼케이스 와는 다른 감각.’

완성도 높게 잘 만들어진 게임을, 그 게임을 기대하고 있는 유저들에게 선보이는 것.

상혁에게 쇼케이스는 보는 이에게 순수한 즐거움을 전달하는 과정이었다.

마치 거대한 선물 상자를 뜯어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건 마치 ‘내가 준비한 선물이 얼마나 멋진 선물인지 보아주세요!’라고 자랑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발표하는 본인도, 발표를 보는 게이머들도 얼마든지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선을 다하더라도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게이머들에게 가능성을 위해 수십 번의 죽음을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게 진짜는 아니더라도, PRD의 성능에 의해 어느정도의 통증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부담을 게이머에게 요구한다는 것이, 상혁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자원해준 분들이지.’

무슨 말을 전달해야 이 고마움을 전달할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하던 상혁은 마침내 입을 열어 유저들에게 외쳤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롤백을 하고 싶었습니다.”

전이 마법을 통해 울려 퍼지는 나직한 목소리는, 상혁의 진심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이었다.

“적어도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PTW라는 팀이 만들어진 이후로, 저희는 단 한 번도 오픈하기에 부족한 게임을 공개한 적이 없었죠.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지금의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게임을 만들어 게이머들에게 전하자.

그게 지금까지 저희의 모토였습니다.

그리고 그건 이번 YAS의 개발 때도 마찬가지였죠.

전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모델러가 이리저리 모델링 툴을 조작해서 만들어낸 거대한 성벽과 구조물이 아닌, 개발자들이 여러분과 똑같은 조건으로 하나하나 쌓아 올린 성벽과 건물들을.

진짜로 화단을 가꾸듯 개발자들과 NPC가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 가꾼 멋진 화단을.

그냥 텍스쳐에 씌워진 그래픽 효과가 아닌, 진짜로 누군가가 매일 저녁 불을 붙이고 아침마다 끄면서 생긴 가로등의 그을음을.

길가의 깨진 화분을 보더라도 그것이 만들어지는데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를 상상하게 만드는 그런 세계를, 완전히 완성된 상태로 여러분께 오픈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리얼 엔진의 툴을 사용하면 하루도 안 걸려서 쌓을 수 있는 이 요새를 만들 때도, 수십명의 PTW 직원과 수천 명의 NPC를 동원하여 채석장을 찾아 돌을 자르고 운반하여 가공하고 쌓는 과정까지, 모두 하나하나 게임 안의 기능을 활용해서 요새를 쌓아 올렸죠.

그건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르지만, 전 거기에 로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죠.”

모두가 침묵하며 상혁의 고백을 듣고 있는 가운데, 상혁이 말했다.

“물론 축성에 대한 깊은 지식을 아는 직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설계한 이 요새도 멋지긴 합니다만, 제 눈에는 여러분이 단 몇 시간 만에 쌓아 올린 이 허술한 돌무더기가 더 멋지게 보이니까요.

이 게임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게임이었습니다.

길가의 보도 블럭 하나, 화단의 꽃 하나도 여러분들과 함께 쌓아 올려야 했던 게임이었죠.

그래서 지금은, 비록 미증유의 사태 때문에 내부 개발 중이었던 게임을 오픈 베타로 급하게 돌리게 되었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상태가 원래 이 게임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요.

제가 잘못 판단했던 부분은, 전문가에 의해 멋지게 만들어진 성벽과 건물이 이 게임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했던 점이었습니다.

피라미드 같은 유적을 볼 때 느껴지는 경이감을, 여러분께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여기 여러분이 이렇게 쌓아 올린 돌무더기에는, 이 월드를 지키고자 하는 게이머 여러분들의 간절함이 담겨 있으니까요.”

말에서 내린 상혁이 자신의 몸에 걸쳐져 있던 멋진 갑옷의 잠금쇠를 풀었다.

그러자 쿵 소리와 함께, 상혁이 걸치고 있던 갑옷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장비를 벗은 상혁은, 플레이어들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불규칙적으로 울퉁불퉁하게 파여있는 조잡한 갑옷을 몸에 걸쳤다.

그렇게 상혁은 다른 수만 명의 게이머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 된 채로, 게이머들을 향해 외쳤다.

“지금부터 우리는 수없이 반복되는 죽음을 통해 단 한 명의 게이머가 경지를 넘는 과정을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그 플레이어가 적에게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죠.

어쩌면 뒤지게 고생만 하고 월드는 붕괴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게임을 초기화하고 처음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월드를 구축하는 게 더 편한 선택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진짜로 이렇게 화끈한 이벤트로 월드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오늘 우리가 패배하면 진짜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서 초가집부터 지어가면서 월드를 다시 구축해야겠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월드를 위협하는 초유의 재앙에 맞서, 여기 모인 4만 명의 영웅들이 용감히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다면?

앞으로 이 게임을 시작하는 플레이어들은 이 평원을 승리의 평원이라고 부르게 되겠죠,

그리고 모두가 오늘의 일을 기억할 겁니다.

강하지도 않은, 고작 게임을 시작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는 수만 명의 게이머가, 자신의 목숨을 수십 번씩 바쳐가며 용감하게 싸운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그리고 자신들이 먹고 마시고 자는 모든 건물을, 바로 그 게이머들이 지켜내었다고.

X발. 저도 지금 상황이 어처구니없다는 건 잘 알지만, 게이머로서 이건 너무 멋진 이벤트 아닙니까!?”

그러자 수만 명의 유저들이 동시에 검을 뽑아들며 상혁의 외침에 답했다.

“맞다아아아!!”

“X발 이기면 우린 영웅이 되는거다아아!!”

“게이머의 집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저 개미 새끼에게 보여주자!”

상혁은 흥분하여 마구 소리 지르는 게이머들을 진정시키는 대신, 전이 마법의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이 시끄러운 함성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 될 수 있도록.

그리고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엔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전쟁의 앞에서, 수많은 장군들이 병사들에게 약속했을 겁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영원히 기억될 거라고!

근데 솔직히 말해서, 인간적으로 300 같은 영화라도 나오지 않으면 그 많은 전투를 누가 기억해줍니까?

보통은 그런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우리는 지금 유튜브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바로 이 전투에서, 4만 214개의 녹화 영상이 PTW의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업로드 될 겁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게이머들은, 우리가 오늘 벌인 역사적인 싸움을 보며 주먹을 쥐겠죠!

그리고 여러분은, ‘전 세계 최초로’ 아직 정식 발매도 되지 않은 게임 월드의 운명을 위해 맞서 싸운 4만 명의 용감한 게이머가 될 겁니다!

레벨도! 장비도 없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향해 용감히 돌진하여 죽음을 맞이한 영웅이 될 수 있겠죠!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저녁에 집에서 맥주 한잔 꺾으며 친구와 함께 오늘의 전투 영상을 틀어놓고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 이런 전쟁이 어디 있습니까?!!?”

상혁의 외침을 들은 수만 명의 플레이어가 일제히 답했다.

“없쑵니돠아아아아!!”

“으아아아아!”

“가즈아아아아!”

그러자 상혁은 더 큰 목소리로 게이머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니 저는 오늘, 자신 있게 여러분께 외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벌일 역사적인 전투는! 유튜브와 PTW 홈페이지를 통해 영원히 박제될 것이라고!”

“으아아아!!!”

“역사가 되자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상혁의 시야에 한 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제 1전투 구역에 타겟 진입.

정찰조 20명 중 1명 생존.

적의 강함.

예상보다 압도적.-

그것은 상혁이 시체 포식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보내놓은 정탐조에서 보낸 메시지였다.

‘시작되었군.’

상혁은 허리에 찬 검을 눈앞의 플레이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그 플레이어의 허술한 검을 받아 허리에 찬 뒤 힘차게 검을 뽑으며 외쳤다.

“뒈지러 가자아아아아!!!”

그러자 4만 명의 플레이어가 상혁을 따라 검을 내밀며 힘차게 외쳤다.

“가즈아아아아아!!”

“죽으러가자아아아아!!!!”

“게이머의 힘을 보여주자아아아!!”

흥분을 넘어 광기에 사로잡힌 4만 명의 우렁찬 발걸음 소리가 평원에 가득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상혁은 무리의 맨 앞에서 적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보다 몇 배는 되는 빠른 속도로 무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시체 포식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캐릭터가 사망하였습니다. 리스폰 에리어로 이동됩니다.]

상혁은 자신이 대체 무슨 공격을 당해 죽은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하게 각오하고 있었던 죽음의 직전, 자신의 눈에 보였던 시체 포식자의 눈에 보였던 감정은, 다른 어떤 감정도 아닌 ‘두려움’ 그 자체였다고.

그것은 오로지 죽기 위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만 명의 인파를 본 존재가 보일 수밖에 없는 당연한 감정이었다.

***

[포인트 정산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부터 현 지역에서의 수련 가속을 시작합니다.]

수도 외곽의 평원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던지던 그 순간, 근처 산맥 깊숙한 곳의 동굴에 한 남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 남자는, 귓가에 들리는 메시지를 듣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에 놓여있는 사람 키만 한 양손 검을 들어 올리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자신을 둘러싼, 30개의 강철 인형을.

그 인형들은 모두 무언가와 닮은 4개의 팔을 가지고 있었다.

스치는 순간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예리한 가시 칼날과 함께.

그리고 그 인형들에는,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붉은 점들이 숫자와 함께 적혀 있었다.

1부터 108까지의 숫자가 새겨진, 총 3240개의 붉은 색 점이.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점들을 노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YAS의 스킬 시스템은 단순하지.

어려운 과업을 연속으로 성공하면 그에 맞는 스킬을 주는 것.

그리고 지금은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수준의 수련치 보너스를 받는 상태고.

그럼 보통이라면 성공도 할 수 없는 수련법에 도전하는 게 가장 빠르게 경지를 뚫는 방법일 것이다.’

공중에 매달려 칼날 가시를 휘둘러대는 30개의 인형의 공격을 모두 피하면서, 3240개의 점 모두에 검격을 가하는 것.

그것은 현실에서는 시도조차도 할 엄두가 나지 않는 수련법이었지만, YAS 안에서는 ‘가능’한 수련법이라 할 수 있었다.

‘4티어 클래스인 내 캐릭터에 걸려있는 패시브와 신체 보정을 총동원하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상혁씨는 단 3번만 성공해도 무조건 스킬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

적이 플레이어의 무리를 뚫고 리스폰 포인트인 신전에 도착하기 전에, 무조건 3번을 성공해야 해.’

구스타프는 깊게 심호흡한 뒤 힘차게 검을 휘둘러 검풍을 일으켰다.

그러자 30개의 인형이 사방으로 휘날리며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안의 공간이 단 한 발짝만 들어가도 온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은 사지(死地)임을 보여주는 죽음의 소리였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심각한 난이도를 본 구스타프는 혀를 차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X발 이걸 하라고?”

그러자 구스타프의 머릿속에 이 수련 시설을 설치하며 상혁이 전해준 한 마디가 떠올랐다.

‘원래 리듬 게임 초고난도도 옆에서 보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인데 하다 보면 되는 법이잖아요?

이걸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게 해 보세요.’

마치 자신이 하는 것 아니니 알아서 잘 해보라는 듯한 상혁의 말투가, 구스타프의 미간에 작은 혈관이 돋아나게 하고 있었다.

“X바아아! 리듬 게임 노트엔 게이머를 찢어발기는 칼날 같은 건 들어있지 않다고 오오!!”

분노로 가득찬 한 검사의 포효.

그것은 검을 들고 그 칼날의 폭풍 속으로 뛰어 들어간 구스타프가 남긴 마지막 단말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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