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 정신과 시간의 방
다행히도 상혁이 요구한 것은 만화 ‘드라군볼’에 나온 것 같은, 현실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판타지스러운 공간은 아니었다.
상혁 역시 현재 PTW의 기술력으로 인간의 의식 흐름을 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상혁은 민준에게 다른 방식으로 동작하는 정신과 시간의 방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1회 수련당 100회의 수련치가 쌓일 수 있는 특수 공간을 만들어줘.
원래대로라면 수천 번을 반복해야 얻을 수 있는 스킬을, 수십 번만 반복해도 시스템에게서 얻어낼 수 있도록.”
“흠···. 그럼 실제로는 수련 시간이 단축될 테니 효과 자체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랑 비슷하게 나오겠네?”
“그렇지.”
잠시 고민하던 민준이 상혁에게 말했다.
“그런 구조라면 불가능한 건 아닐 거야.
문제는 그 시설을 돌리는데 필요한 포인트를 관리자 AI와 협의해야한다는 거겠지만.”
“많이 필요할까?”
“글쎄, 상혁이 너도 알고 있겠지만 YAS에서 신규 시스템을 돌리는데 필요한 포인트는 그 시스템이 개입하는 권한의 레벨에 따라 달라.
그리고 네가 말한 수련 횟수와 효율 부분은 YAS 전체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규칙을 건드리는 부분이고.
그러니까 아마도 어마어마한 포인트가 필요하겠지.”
“토로로토로로. 현재 축복 진영에서 사용 가능한 포인트 총량이 얼마지?”
[25억 8642만 2227포인트입니다.]
“이걸로도 안되면, 월드는 뒈지겠네.
어디서 뜬금없이 등장한 개미 인간 한 마리한테.”
그러나 민준은 상혁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어째서?”
“애당초 내가 아는 이상혁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도 어떻게든 해결할 슈퍼 기획자니까.”
민준의 뜬금없는 칭찬을 들은 상혁이 민준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한없는 믿음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프로그래머라 불리는 남자가 서 있었다.
“상혁이 네가 내 기술에 의지하는 만큼, 나 역시 상혁이 네 능력에 의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중간에 의도적인 개입이 들어가지 않은 혼돈의 순수한 성장 데이터가 필요하고.
그리고 수많은 게이머가 제2의 인생을 즐기게 될 YAS의 월드도 구해야 하지.
그건 어쩌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판단일지도 몰라.
하지만 상혁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내가 지금까지 수없이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었던 것처럼, 디스켓 한 장에 들어가는 작은 게임을 만들던 동인팀을 세계 최고의 콘솔 개발사로 이끌어온 건 바로 네 능력이니까.”
“애당초 민준이 너랑 스컹크 웍스가 아니었으면 이런 수준까지 노력하지도 않았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네가 아니었다면 이런 미친 물건들을 계속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았을 거라고.
네가 있으니까.
네가 PTW의 전 CEO이자 현 CCO니까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었다고.
어찌 되었건 나와 스컹크 웍스가 뭔가를 만들어내기만 하면, 넌 그걸로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게임을 완성해주곤 했으니까.”
“오늘 내 생일이냐?
너 뭐 잘못 먹었냐?
평소보다 칭찬이 좀 과한데?”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하아···.”
지금까지 수없이 무리한 일정과 계획 속에서 자신을 묵묵히 서포트 해온 오랜 친우의 솔직한 칭찬은, 상혁의 마음에 투지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아···. 그래. 그동안 수없이 무리한 요구를 들어준 네 부탁이니까.
이번엔 내가 최대한 어떻게든 해봐야겠지.”
이전에 Live2D를 통째로 사달라고 졸랐던 때나, 스타링크의 지분을 확보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를 제외하면, 민준은 상혁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상혁이 심심하면 민준을 찾아가 ‘이거 해줘’ ‘저거 해줘’를 남발하는 것과 비교하면, 거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보일 정도로.
그런 민준의 부탁이었기에, 상혁은 그 부탁을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혁은, 최대한 시스템 룰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해달라는 민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자신이 넘어야 할 중요한 장벽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상혁은 잘 알고 있었다.
시스템을 만들어서 넣는 것은 민준이 도와줄 수 있어도, 그 시스템을 YAS에서 돌아가게 만드는 데는 ‘관리자’의 허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상혁은 서포트 AI에게 그 관리자를 호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올리벤더. ‘축복’의 AI를 호출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상혁은, 자신을 믿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아달라 부탁한 친구를 위해, 민준이 개발한 또 다른 관리자 AI, ‘축복’과 함께 YAS의 운명이 걸린 협상에 들어갔다.
지수와 수많은 PTW 직원들의 방송을 통해 이 회의를 지켜보고 있는, 수백만의 PTW 게이머들 앞에서.
그것은 개발자가 자신이 만든 AI에게 ‘해줘!’를 시전하는 매우 진귀한 장면이었다.
***
-왜 개발자가 AI한테 빌 듯이 부탁하면서 저렇게까지 하는거지?-
-그러게. 어차피 오픈되어서 유저가 이미 사용 중인 게임도 아니고, 버그성 몬스터 따위는 그냥 관리자 권한으로 삭제하면 되는거 아냐?-
-넌 방금 민준이 설명한 건 똥구멍으로 들었냐?
그렇게 하면 월드를 관리하는 AI의 품질에 하자가 생긴다잖아.-
[지수 양 저는 소문 듣고 방금 들어왔는데 현재 상황 브리핑 좀 간단하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
지수는 무수히 떠오르는 채팅창 사이로 올라오는 10만원짜리 도네 창을 보고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현재 상황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지금 상황의 특수성을 알기 위해서는, 민준 오빠가 만든 AI와 여러분이 아는 일반적인 AI와의 차이점을 알아야 해요.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선 기술적으로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모르니까 대략적으로 설명해드릴게요.
예를 들어 SARI같은 AI 비서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사용자의 명령에 대한 반응을 중심으로 디자인 된 AI에요.
그러니까 다양한 상황에서 내려오는 여러 종류의 명령을 이해하고, 가장 적합한 형태의 반응을 하는거죠.
농담하라고 하면 농담을 하고, 미용실을 예약해달라고 하면 미용실을 예약해주는 것처럼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의견에 따른 반응을 보이는 거지 AI 스스로가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하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SARI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용자의 버릇을 자기 취향에 맞게 교정하려 들지 않죠.
‘주인님 야한 웹사이트 좀 그만 들어가세요. 그러다 뼈 삭아요.’
라고는 않잖아요?
하지만 민준 오빠가 설계한 AI는, 스스로의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AI에요.
그 초기 버전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죠.”
-OGC네.-
-커뮤니케이션 엔진!-
-그거 진짜 사람 같던데.-
-난 요즘도 심심할 때마다 갤럭틱 M 시리즈로 OGC 안의 캐릭터들과 대화하면서 놈.
심심할 때 문자 보내면 진짜 친구들이랑 대화하는 기분이라 재밌음.-
“맞아요. OGC의 캐릭터들은, 단순히 사용자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본인이 배가 고프면 플레이어에게 함께 밥을 먹자고 권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게임이 있으면 플레이어에게 그 게임을 하자고 권하죠.
가끔 플레이어가 너무 오래 놀아주지 않으면, 삐져서 플레이어에게 말도 걸지 않기도 하고요.
심지어 게임 안에서 티배깅을 좀 심하게 해도 삐지곤 하죠.
심지어 연애 관계에 있는 사용자가 다른 캐릭터와 놀면 자신을 더 강하게 어필한다던가 플레이어를 비난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것 역시 결국은 플레이어라는 하나의 객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조정하기 위한 일종의 반응이라 할 수 있죠.
반대로 민준 오빠가 이번에 만든 ‘혼돈’과 ‘축복’은, 플레이어가 아닌 세계를 대상으로 서로 대립하는 관리자 성격의 AI고요.”
지수는 아직도 허공에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 ‘혼돈’의 시냅스 홀로그램을 손으로 가리켰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던전 하나, 몬스터 하나, 아이템 하나하나의 존재까지, 혼돈이나 축복 같은 관리자 AI는 자신의 목적 달성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장기 말이라고 생각해요.
혼돈이 이번에 운영자들의 감시를 속이려고 시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요.
아마도 혼돈은 영역 지배를 시도하는 정상적인 알고리즘을 가진 몬스터 대신 건축만 하고 장소를 옮기는 몬스터가 늘어났다는 사실이 운영 측에 알려지면 운영 측에서도 빠른 대응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리라 판단했겠죠.
그래서 운영진의 눈을 속이고 자신의 계획을 관철한 거고요.”
그러자 한 유저가 도네이션으로 지수에게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다.
[제가 알기로 AI에 의한 세력 균형 조정은 이미 워함마 IP를 이용한 지역 점령형 FPS인 TOW시절에 완성된 거로 아는데요.
어째서 그 데이터를 가지고도 이런 사태가 발생한 거죠?]
“TOW시절에 만들었던 AI의 목적은 적절한 보상을 통해 유저가 전장에 스스로 뛰어들게 만드는 거였어요.
예를 들어 한쪽 진영이 너무 밀린다고 판단되면, 그쪽 진영에서 유저들이 활약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지원을 수행해서 전투 상황을 비등비등하게 맞추는 거죠.
그 과정에서, 해당 관리자 AI는 특정 목표나 의지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하는 AI가 아니라, 기계적으로 ‘유저는 평균적으로 이런 형태의 전투를 좋아하고 이런 보상을 좋아한다.’ 수준의 판단만 반복해서 내릴 수 있었죠.
그리고 그에 필요한 모든 포인트는 시스템에서 무한정 지원되었고요.
하지만 YAS의 자원 생성 시스템은 관리자 AI보다 상위 권한을 가지는 ‘월드 룰’에 종속되어 있어요.
아무리 ‘축복’이라고 해도 유저의 생산 활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제물의 봉납을 받지 못하면 임의로 축복 포인트를 생성할 수 없고, 아무리 ‘혼돈’이라도 축복이 받는 포인트가 적으면 혼돈 포인트를 임의로 생성할 수 없죠.
유저가 적으면 세계가 움직이는 스케일 자체가 작아지고, 많은 유저가 적극적으로 생산 활동이나 육성에 전념하면 그만큼 세계가 움직이는 스케일이 커지는 게 YAS의 ‘월드 룰’입니다.
각 관리자 AI가 맡은 역할이 세계를 관리하는 ‘대통령’이라면, 월드 룰은 세계 자체를 구성하는 물리법칙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죠.
아무리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더라도 사람이 맨몸으로 하늘을 날 수는 없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예요.
반면에 TOW때 월드를 관리하던 AI는, 그 절대적인 규칙조차 임의로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요.
쉽게 말하면 무한대로 자원 생성이 가능해서 원하는 대로 전장을 조정할 수 있지만, 각 세력의 균형을 맞추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AI.
그리고 한정된 권한 속에서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최대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룩하고자 하는 AI.
그 둘의 차이라고 할 수 있죠.”
지수가 그렇게 해설을 하고 있는 사이, 상혁은 열심히 축복을 관장하는 AI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축복을 관장하는 AI는 세계의 ‘법칙’을 다루는 책임을 진 AI이니 만큼, 상혁의 설득에도 꿈쩍도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YAS의 월드 안에는 월드 육성 기간이라는 이유로 일반 플레이어의 100배에 가까운 성장 보정이 들어간 상태입니다.
원래는 수백 명 이상의 인력을 투입하여 몇 개월 이상 작업해야 하는 대형 토목작업도 적은 인력으로 할 수 있도록 보정이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원래의 성장 곡선을 따르면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6개월 만에 상혁 씨가 말씀하시는 화경, 그러니까 티어4급의 강함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죠.
지금도 보정이 들어간 상태인데 거기에 추가 보정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새 기능의 추가는 관리자분들의 고유 권한이니 인정하겠지만, 거기에 세계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축복 포인트를 모두 쏟아붓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세계가 박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맡은 역할은 세계의 규칙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도록 룰을 감시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게다가 플레이어의 숫자가 한정된 이상 저 역시 제가 얻을 수 있는 축복을 더 늘릴 수 없는 상황이고요.
게다가 관리자 상혁 씨의 요청대로 지금 사용 가능한 모든 축복을 신규 기능을 구동하는 데 투입한다면, 이후에 정상적인 월드 관리가 불가능합니다.
관리자 이상혁.
이 세계의 풀 하나, 바위 하나, 철광석 하나도 전부 축복의 가호를 받아 태어납니다.
저는 생성을 관리하는 축복의 관리자로서 세계에 물이 흐르게 하고, 풀이 자라게 하며, 나무가 자라게 해야 할 의무가 있고요.
제가 가진 축복 포인트는 그런 의미를 가진 자원입니다.
그걸 모두 써버린다면, 세계는 메마르고 황량한 곳이 되어버리겠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라도 그걸 누릴 사람이 없으면 그건 그냥 그림 속의 풍경 같은 존재일 뿐이야.”
[그건 외부에서 태어나 이 세계를 빌려 사용하는 인간의 시선입니다.
어쩌면 이번 전투로 제가 관리하는 모든 NPC와 플레이어가 사망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축복만 있다면 플레이어는 부활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고, NPC는 다시 논을 갈고 밭을 일굴 수 있겠죠.
비록 지금까지 쌓은 높은 성벽과 아름다운 건물들이 모두 파괴되더라도, 그것을 다시 세울 존재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네 말은, 다 부서져도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까 순순하게 패배를 받아들여라?”
[그렇습니다.]
“하아……. 지금까지 내가 이런 돌아이 새끼들한테 게임 월드의 관리를 맡기고 있었다니···.”
상혁이 눈빛에 원망을 담아 바라보자, 민준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어 보였다.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데 성공한 것은 좋았지만, 그렇다고 관리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 놈은 관리자 눈을 속이려고 기만전술을 쓰질 않나, 한 놈은 어차피 다시 만들면 된다고 똥배짱을 부리네.
좋아. 그럼 월드 관리에 쓰일 포인트를 달라고는 안 할게.
그럼 특정 영역 안에서 소모되는 축복을 기반으로 수련 속도를 올리는 신규 기능 자체는 추가해도 괜찮은 거지?”
[몇 배로 올리실지는 모르겠지만 원하시는 시간에 3티어급 강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25억 포인트 이상의 축복 포인트가 필요할 겁니다.]
“손상 복구에 필요한 최소 포인트만 남기고, 내가 쓸 수 있는 포인트는 얼마지?”
“12억 3천만 포인트 정도 됩니다.”
“지금 PTW 직원 중에 가장 3티어에 가까운 구스타프 씨를 24시간 안에 3티어로 만드는데 들어가는 예상 포인트는?”
“30억 포인트 정도입니다.”
“좋아. 모자란 17억 7천만 포인트만 모으면 되겠네.”
“어떻게 모으려고? 지금 PTW 직원들이 가진 장비와 재산 전부를 제물로 바쳐도 턱도 없이 모자랄 텐데?”
다가와 묻는 민준의 질문을 들은 상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민준을 향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으면 돼.”
“죽어?”
“미친 듯이 꼬라 박으면 된다고.
YAS에는 ‘생태계’ 시스템이 있으니까.”
“아!”
상혁이 언급한 ‘생태계’ 시스템의 정식 명칭은 ‘cycle of life’였다.
현실의 생태계에서, 풀을 먹는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고, 육식동물이 배출한 배설물이나 시체가 다시 식물의 양분이 되는 것처럼, YAS 안에서 비슷한 개념을 좀 더 간편하게 구현하기 위해 들어간 시스템이 바로 ‘Cycle of life’였고, 그건 축복이나 혼돈 같은 관리자들조차 건드릴 수 없는 ‘월드 룰’에 속한 시스템이었다.
“YAS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종류의 파괴든, 무조건 일정량의 축복을 생성하게 되어있어.
몬스터가 플레이어를 죽이든, 플레이어가 몬스터를 죽이든, 아니면 나무를 베어 가구를 만들든, 심지어 길가의 돌을 부숴도 축복은 생성돼.
다만 그건 축복이 관리하는 포인트로 바로 집계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하지만 월드의 복구에 필요한 최소한의 포인트만 남겨두고 나머지 포인트를 모두 받아올 수 있다면, 결국 전투시간 동안 플레이어가 죽으면서 생성되는 축복 포인트도 전부 ‘남는 포인트’로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지.
원래는 대규모 전쟁이나 레이드 이후의 빠른 월드 복구를 위해서 만든 시스템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런 식으로 쓸 수도 있겠지.”
“근데 죽을 때 생성되는 축복의 양이 많나?”
“아니. 적지. 대규모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냥 그 직후에 그 지역의 풀이 잘 자라고 몬스터들이 주는 경험치가 늘어나는 수준의 축복밖에 생성하지 못하니까.
물론 화경급, 그러니까 4티어 이상 캐릭터가 죽을 때 생성되는 축복의 양은 꽤 되는 편이야.
하지만 데스 패널티가 걸린 상태에서 또 죽으러 가면 점점 생성되는 축복의 양이 줄어들지.
결국엔 1레벨 캐릭터로 꼬라박는 거랑 비슷한 수준이 될 거야.
월드 맵!”
상혁이 외치자 민준이 소환한 혼돈의 시냅스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허공에 거대한 양피지가 등장했다.
상혁은 그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를 자세히 보며 자리에 모인 직원들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전략은, 저희가 가진 4티어 플레이어들로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죽는 겁니다.
하지만 리스폰 포인트 바로 옆에서 그짓을 할 수는 없어요.
안 그래도 플레이어가 부활하는 게 ‘불합리’라고 생각하는 시체 포식자의 AI 앞에서 미친 듯이 연속으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말 그대로 ‘부활의 성소부터 개 작살내주십쇼!’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결전 포인트는 수도의 가장 큰 리스폰 포인트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
‘무너지지 않는 요새’에서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 PTW의 전 직원을 동원할 거고요.
지금부터 각 직원들은 QA부터 회계팀, 경영팀, 법무팀 상관없이 PTW에서 월급 받는 모든 직원은 PRD를 사용해서 YAS에 접속하라고 전달하세요.
천하대 알바생도 있는 대로 끌어모으고.
회사 근처에 있는 PRD 센터에 전투시간이 끝날 때까지 전부 예약 걸어두고 거기에도 밀어 넣어요.
그리고 지수 너는 수도를 관리하는 NPC에게 영지 내의 모든 마차와 수레를 이곳의 리스폰 포인트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해.
말도 전부 불러모으고.
리스폰 포인트와 요새 간의 거리가 상당하기 때문에, 달려서 꼬라박다가는 포인트가 모이기도 전에 탈진할 테니까.
나머지 직원들은 전부 무너지지 않는 요새에서 수성전을 하다가, 적이 근처에 오면 한 대라도 치고 죽으면 됩니다.
아마 흠집도 내지 못하겠지만, 쪽수로 밀어붙인다는 각오로 달려드세요.
필요하면 폭탄이라도 안고 근처에서 자폭하던가.
명심하세요.
이번 작전의 목적은 여러분의 공격으로 데미지를 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죽음으로 벌린 포인트를 사용해서 저희의 히든 카드가 현경, 그러니까 적과 똑같은 3티어에 접근하도록 돕는 겁니다.
만약 이렇게 차륜전을 벌여 충분한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다면, 우린 지금까지 우리가 플레이어들을 위해 만든 모든 것들.
잠자리가 될 여관과 퀘스트를 받을 길드, 전리품을 처리할 도축장과 식사를 하게 될 식당, 분쟁을 조정해줄 도시 수비대와 치료를 받을 병원, 가구 배치부터 도시 조경까지 온전히 지킨 상태로 이번 전투를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시체 포식자가 그 모든 것을 파괴하기 전에, 우리가 ‘충분히’ 죽을 수 있다면 말이죠.”
설명을 마친 상혁은 민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넌 바로 정신과 시간의 방을 구현할 코드 작업에 들어가고, 스컹크 웍스 멤버들한테도 도와달라고 전해줘.
이 무식한 작전은 한명이라도 더 있어야 성공할 수 있으니까.”
“알았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지자, 상혁이 참가자들을 향해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상에서 보았던 적의 속도를 감안 하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6시간도 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지금 바로 비상연락망을 가동하세요.
그리고 한명이라도 더 접속할 수 있도록 최대한 인원을 긁어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대로 된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자마자 죽을 장소로 달려가서 죽고 또 죽기 위해서요?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경험은 아닐 것 같은데요?
세상에 어느 게이머가 그런 짓을 하고 싶겠어요?”
“게이머라면 하고 싶지 않겠죠.
하지만 저희는 개발자입니다.
그리고 지금 부서지려 하는 것은 그 게이머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터전이고요.
심지어 이번 경우는 대체 언제부터 혼돈의 AI가 일을 꾸민 것인지 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3티어급 몬스터를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포인트를 생각해보면, 거의 월드 초창기부터 계속 우리를 속여온 거겠죠.
그러니 롤백 시점을 잡기에도 모호합니다.
롤백 이후에 다시 성장시킨 세계가, 지금의 YAS 월드와 같다는 보장도 없고요.
적어도 전, 지금의 YAS가 마음에 듭니다.
길가에 깔린 보도블록 하나, 밤이면 길을 비추는 가로등 하나하나가 전부 우리가 깎고 만들어서 세운 거니까요.
겨우 AI하나가 눈에서 벗어난 짓을 했다고 해서, 직원들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든 지금의 세계를 부수게 둘 순 없습니다.”
순간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상혁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개발자를 꼽으라면 항상 5손 가락 안에 꼽히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CCO가, 그들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인 채 자신들에게 부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혁은, 조용한 침묵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직원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설사 가상 세계에서의 죽음이라도, 그냥 죽는 게 목적인 죽음이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물리적 피드백 옵션을 최하로 내리더라도, 살짝 두들겨 맞는 수준의 불쾌함은 그대로 전달될 거고요.
그걸 수십 번도 아니고 수백 번 반복하라는 게 얼마나 불쾌한 경험일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를 구원할 방법은 이게 유일합니다.
민준의 말대로 서버를 롤백해서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그건 지금의 세계가 아니라 롤백한 이후 새로 만들어진 다른 세계가 될 테니.
전, 다같이 완성한 지금의 세계를 그대로 게이머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한번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처음부터 부서질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최대한 멋지게 만들려고 노력한 이 세계를.
그러니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저와 함께 죽어주세요.”
무겁게 감도는 침묵 속에서, 지수의 귓가엔 미친 듯이 울리는 도네이션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수는 조용히 그 소리를 끄고는, 천천히 일어나 상혁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아직도 허리를 숙인 채로 서 있는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만지며 말했다.
“PTW의 마스터클래스 기획자인 서지수는 YAS의 마스터 아쳐의 권한으로 이상혁 관리자가 요청한 죽음에 응하겠습니다.”
그러자 다른 개발자들도 하나 둘씩 걸어와 상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가드닝 마스터 고창준도 이상혁 관리자가 요청한 죽음에 응하겠습니다.
수백 번이 아니라 수천 번이라도 죽어드리죠.
제가 직접 가꾼 도시의 아름다운 화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피싱 마스터 최호성도 뭐더라? 암튼 같이 죽겠습니다.
제 집에 지금 떠놓은 어탁이 몇 개인데.
차라리 캐릭터가 죽었으면 죽었지 집이 부서지는 꼴은 못 봐요.”
그렇게 PTW의 개발자들이 하나둘씩 상혁의 계획에 동참하는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이번 작전의 키 플레이어이자, 모든 PTW 직원들이 죽음으로 벌어낸 포인트로 경지를 돌파하고 적과 맞서야 하는 ‘대적자’.
소드 마스터 칼 구스타프였다.
“하나 물어도 될까요?”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상혁 씨의 작전 대로면, 아마도 제가 그 시간과 정신의 방에 들어가야 하겠네요?”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현경급, 그러니까 3티어까지 성장해서 나와야 하고요.”
“안 그럼 저희가 지겠죠.”
“애당초 그렇게 하더라도 3티어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가 의문인데다, 만약 3티어가 되더라도 적보다 센게 아니라 적과 겨우 동수인 상황인 건 아시죠?”
“압니다.”
“그렇게 직원 전체가 수백 번씩 뒤지면서 벌어준 포인트로 경지를 뚫지 못하거나, 뚫더라도 패배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저보고 칼을 잡으라는 겁니까?”
“대안이 없으니까요.”
“미친, 대장. 그거 알아요?
당신은 가끔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저도 가끔 제가 제정신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곤 합니다.
제가 제정신이었으면 그냥 죄다 날려버리고 다시 만들자고 했겠죠.”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건, 지금의 월드에 쌓여있는 추억 때문입니까?”
상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등에 있는 검을 뽑아 바닥에 꽂으며 상혁을 향해 말했다.
“X발. 해봅시다. 어차피 내부 테스트 끝나면 내 캐릭터도 NPC가 되어 관리자 캐릭터가 될 텐데, 기왕 NPC가 될 거라면 세상을 구한 영웅 같은게 될 수 있으면 더 멋지겠죠.”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에워싼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럼 바로 움직입시다.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어요.
한시가 바쁜 상황이니까.
우리가 만든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개자식이 가는 길에 조약돌 하나라도 더 깔아야 하니까요.”
상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여있던 직원들이 무서운 속도로 로그아웃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아는 연락망을 총동원해서, PTW의 전체 직원에게 소집령을 전달하기 위해.
그러자 곧 회의실 안에는 구스타프와 지수, 상혁과 민준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너흰 안 가냐?”
상혁이 묻자 민준이 지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거짓말했어?”
“뭘?”
“물론 죽으면 무조건 축복 포인트가 생성된다는 상혁이 네 작전엔 하자가 없지만,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을 전부 끌어모아도 필요한 포인트엔 턱없이 모자라잖아.
혹시나 해서 계산해봤더니 절대 달성할 수가 없는 수치던데.”
“더 오래 죽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벌면 돼.”
“4티어 클래스 23명으로? 그중에 태반은 생산직인 거 알지?”
“생산직도 전투에 쓸 수 있는 스킬은 있잖아?
마스터 메이슨도 스톤 골램이나 성벽 강화 같은 스킬은 쓸 수 있는데.”
“3티어 몬스터가 검 한번 휘두르면 4티어 메이슨이 강화한 성벽따위는 두부처럼 썰릴걸.
애당초 YAS 안에서 등급의 격차는 거의 절대적인 수준이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답이 없어.
지금 필요한 건 단 한명의 절대 강자가 출연할 때까지 포인트를 벌어줄 고기 방패들인데, 세상에 누가 그걸 하고 싶어 하겠어?”
“그럼 고생은 있는 대로 하고 결국은 실패하는 작전인거네?”
“무조건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 일단 무너지지 않는 요새의 수성 병기도 꽤 괜찮은 수준이고, 성벽 자체도 4티어 메이슨이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명품이니까.
괜히 ‘무너지지 않는 요새’라고 이름 붙인 게 아니야.
거긴 성벽 안에 내장된 대 마법 보호진부터 물리 내성 강화가 부여된 벽돌까지 모든 재료를 정성 들여 만든 요새야.
적어도 우리 직원들이 필요한 포인트를 벌어줄 때 까지는 버텨주겠지.”
“못 버티면?”
“그럼 원래 예정했던 오픈 베타 일정을 1년 정도 미루고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지.”
상혁이 힘없이 어깨를 떨구자, 지수는 말없이 상혁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맑은 눈동자로 상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
“응?”
“그러니까, 오빠가 하고 싶은 말은, 고기 방패가 될 사람을 더 구하고 싶은데, 자원할 사람이 없으니까 문제라는 거죠?”
“그렇지. PTW 직원과 아르바이트생을 총동원하더라도, 애당초 사내에 있는 PRD의 갯수에 한계가 있으니까.
서버를 외부에 오픈해서 직원들 집에 있는 PRD를 쓰게 하고 아르바이트생들은 본사에 있는 PRD를 쓰게 한다고 해도, 최대 5천 명 정도가 한계일 거야.”
“작전이 100% 성공하는 데 필요한 인력은 얼만데요?”
“적어도 3만 5천은 돼야지.”
“그 3만 5천 명은 굳이 YAS의 플레이 경험이 풍부한 플레이어일 필요는 없죠?”
상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빠는 이걸 봐 주셔야할 것 같아요.”
“뭘?”
“지금 제 방송을 보고있는, 수많은 시청자들이 보내고 있는 도네이션 메시지를요.”
지수는 자신의 서포터 AI를 불러 상혁에게 자신의 방송화면을 공유시켰다.
그러자 그 순간, 수많은 붉고 푸른 메시지 창이 미친 듯이 스크롤 되는 모습이 상혁의 시야에 들어왔다.
[LA 거주 중인 허드슨입니다. 레벨 1 고기 방패 자원합니다.
서버만 열어주십시오. 가장 예술적으로 죽는다는 게 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영등포 사는 박무성입니다. 집에 RPD 있습니다.
우리 게임은 우리가 지킵니다.
서버만 열어 주세요.]
[스트레스 테스트 하는 셈 치고 서버만 열어 주십쇼.
저희 게임을 지키기 위해, 저희가 대신 죽겠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픈 베타 하시죠.
게임 시작부터 몇천 번 죽고 시작하는 게임이라니, 평생 잊을 수 없겠네.]
[공성전! 대규모 전투!
고기 방패라도 좋아! 저도 끼워주세요!]
[만약에 PTW 직원들끼리만 방어전 했다가 져서 오픈 베타 일정 늦어지면 PTW 팬 그만둘 겁니다.]
[사람이 필요한데 왜 고민합니까? 전 세계 게임 팬들 중에 가장 팬심 강한 우리가 있잖아요?]
상혁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미친 듯이 올라가는 도네이션 메시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지수를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분들 회의 내용 본 거 맞지?”
“맞아요.”
“그럼 지금 서버 오픈해서 들어오면 무슨 짓을 당해야 하는지도 알고 계시고?”
“다 아시죠.”
“근데도 하고 싶어 한다고?
이 미친 자살 특공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죠.
지금 이분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보태서라도 YAS의 세계가 지켜지길 바라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빨리 이 멋진 게임을 하고 싶으니까.
겸사겸사 얼마나 대단한지 죽으면서 체험도 해보고.”
[지수 양 곁에서 죽을 수 있다면 목숨 따윈 아깝지 않습니다.
대신 손에 뽀뽀 한번만 해보고 죽게 해주세요.]
“아, 물론 개중에는 게임 속에서나마 저와 만나고 싶어 하는 제 귀여운 팬들도 있지만요.”
귀여운 표정으로 너스레를 떠는 지수의 모습을 보며, 상혁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상혁은 암울했던 계획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러분의 의지는 잘 알았으니 굳이 돈을 써야 하는 도네이션은 그만해주세요.”
그러나 상혁의 제지에도 도네이션은 계속 올라오고 있었고, 상혁은 빠른 수습을 위해 다급히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무수한 갈고리 세례 속에서, 상혁의 말이 이어졌다.
“전 어떻게든 완성된 형태로, 완벽하게 가꿔진 월드를 여러분께 제공하려고 했죠.
그래서 게임의 개발 진척도가 상당한 수준임에도 오픈 베타를 하지 않았고, 수도의 성벽이 세워지고 건물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PTW의 직원들과 AI가 조종하는 NPC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게임의 기초적인 틀이 완성된 상황에서 제 그런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미 게임이 오픈되지도 않은 이 시점에, 수많은 유저 분들이 YAS를 ‘우리 게임’이라고 불러주시고 계시니까요.
맞습니다.
어쩌면 이미 개발 과정부터 월드의 모든 것을 공개한 시점에서, 이 게임의 소유권은 저희에게 있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저희가 만들고 있는 게임을 ‘함께’ 하고 싶어서 하시는 것일 테니까요.
그러니 이번엔 PTW의 CCO로써, PRD를 가진 팬 여러분께 정식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YAS의 세계를 구해주십시오.
게임 속 월드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전대 미문의 존재에 맞서, 저희와 함께 죽고 저희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
그 대가로, 저희는 이번 이벤트를 기점으로 현재 PTW 내부에서 개발 중인 YAS의 서버를 여러분과 함께 하는 오픈 베타 서버로 전환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손가락 빨면서 부러워해야만 했던 게임을 마음껏 하게 해 주겠다는 상혁의 발표는, 팬들을 말 그대로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오픈 시간만 알려주십시오!]
[저 지금 바로 연차 냅니다!]
[개미 새끼야 기다려라! 박찬영 어르신이 니 뚝배기를 깨러 가신다!]
[뚝배기 깨지러 가는 걸 잘못 말한거 아님?]
[개미 새끼야 기다려라! 박찬영 어르신이 너한테 뚝배기 깨지러 가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듯이 열광하는 팬들의 메시지를 보면서, 상혁은 조용히 민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민준을 향해 환한 미소로 말했다.
“아무래도 3만 5천 명, 확보된 것 같다.”
그러자 팬들의 도네이션을 보며 눈가를 훔치던 민준이 상혁에게 외쳤다.
“미친. 할 말이 없네. 진짜로 어떻게든 해내는구나!”
“이번엔 내가 해낸 게 아니야. 팬들이 해주신다고 하는거지.”
“부정하지 마라. 그 팬덤을 이 정도로 키운 건 이상혁 너니까.
그리고 난 어떤 방식으로든 네가 이번 사태를 해결할 줄 알고 있었다.”
“무슨 근거로?”
“넌 X발 내가 아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기획자 새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민준은 로그 아웃을 위해 UI를 호출했다.
YAS의 서버가, 3만 5천 명의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려고.
그것은 세계 최초로 ‘고기 방패’라는 임무를 가진 수만 명 규모의 플레이어 특공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자, 전 세계를 놀라게 할 전대 미문의 ‘오픈 베타 이벤트’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