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냅스 블루 프린트 전개 – AI No.073. ‘혼돈’”
그러자 민준의 손에서 마치 은하계처럼 보이는 복잡한 홀로그램 구조물이 쏟아져 나와 허공에 투영되었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 속 은하수를 보는 것 같은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상혁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민준에게 말했다.
“이게 뭐야?”
“전에 OGC를 만들 때, 내가 커뮤니케이션 엔진에 대해 설명하면서 너에게 그려줬던 다이어그램 생각나?
AI가 새로운 개념과 키워드를 학습하면서, 각 개념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동 양식이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결정하는 로직에 대한 그림.”
“어. 근데 그때의 그건 뭐랄까, 쉽게 말하면 유머로 쓰이는 뇌속 사진 같은 모양이었잖아.
직장인의 뇌 속 사진 하면 안에 ‘퇴근’이랑 ‘퇴사’라고 쓰인 커다란 동그라미가 있고, ‘월급’, ‘승진’, ‘부장 개객기’ 같은 작은 동그라미들이 있는 그런 모양.”
“그치. 사실 그게 시냅스 모듈의 기초 아이디어였으니까, 상혁이 네 해석은 그렇게 틀리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좀 달라.
그 시넵스 모듈을 바탕으로, 스컹크 웍스 멤버들과 나는 계속 인간 같은 AI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지금 니가 보는 이게, ‘혼돈’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뇌 속 사고의 흐름을 보여주는 홀로그램이지.”
상혁은 민준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혼돈이 이 계획을 추진한 지 꽤 오래되었고, 혼돈세력에 있는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이 작전에 위장 역할로 동원되었으니, 그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지우는 건 불가능하겠네.”
“맞아. 억지로 지우면 지우지 못할 건 아니지만, 나중에 다른 부분에서 해당 부분에 대한 데이터를 호출할 때마다 계속 빈 데이터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겠지.
대체 그때 내가 왜 몬스터를 이렇게 배치했던 거지?
같은 식으로.”
[이야기를 듣는 당사자 앞에서 기억을 삭제한다던가 하는 말은 조금 두렵습니다만.]
혼돈이 투덜거리자 민준이 말했다.
“삭제한다는 게 아니라 삭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럼 좋습니다.]
그때, 운영팀 직원 중 한명이 손을 들어 민준에게 물었다.
“그럼 아예 구 버젼, 그러니까 시체 포식자를 만들기 전의 AI 데이터를 가져와서 다시 키우는 건 안 됩니까?”
“혼돈은 처음부터 YAS의 월드와 함께 성장한 AI입니다.
플레이어와 몬스터가 단 한 마리씩만 있던 시절부터, 지금의 넓은 월드가 가득 채워질 때까지, 모든 세계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해온 AI죠.
그걸 갑자기 구버전으로 돌리라고 하는 건, 방금 태어난 아기에게 갑자기 대통령 자리를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다른 직원이 손을 들어 민준에게 물었다.
“협상은 어떤가요? 시체 포식자의 존재를 PTW 직원들이 대응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잠시 봉인하는 대신, 혼돈에게 다른 대가를 지급하는 거죠.”
“그건 본인이 가진 유일한 유리함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민준이 그렇게 말하며 혼돈을 바라보자, 혼돈은 로브 속에 감춰진 고개를 끄덕이며 민준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세계의 최종 승리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면, 자신이 느낄 희열과 달성감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기에.
민준은 그런 혼돈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짓고는, 검지로 미간을 짚으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상혁에게 말했다.
“물론 지금의 AI가 상혁 네가 원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온 건 알아.
하지만 상혁이 너도 알다시피 YAS는 일반적인 MMORPG와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지.
나도, 상혁이 너도, 월드의 탄생부터 발전까지 완벽한 밸런스 안에서 돌아가도록 끊임없이 AI를 훈련하고 수많은 규칙과 규율을 만들어왔어.
그 모든 걸 단순히 플레이어 진영이 불리하다는 이유로 불합리로 덧씌우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로 인해 유저가 게임을 시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게임 속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그럼 그건 우리가 플레이어 세력의 잠재력을 끝까지 끌어내지 못해서 나온 결과가 되겠지.
이건 결국 AI가 사용할 수 있는 변칙적인 전략을 미리 틀어막지 못한 기술적인 실수야.
이미 한번 발생했고,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
상혁은 지금까지 한 땀 한 땀 힘들게 다듬어온 YAS의 월드를 통째로 포기한다는 민준의 발언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자신이 YAS의 세계를 ‘잠그려고’했던 것도, 민준과 같은 이유에서였으니까.
상혁은 보고싶었다.
민준과 함께, PTW의 직원 모두와 함께 가꾸고 완성한 이 세계에서, 유저들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나갈지를.
그 과정에서 유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PTW 직원들을 전부 쳐내고 세계의 주도권을 가져가더라도, 상혁은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결국은 그것 역시 게임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일부가 될 테니까.
결국,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달라도, 바라보는 방향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상혁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상혁은 허리를 펴며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민준의 말대로 운영진 권한에서의 개입할 수 없다면, 플레이어가 가진 권한으로 사태를 수습해야 했기에, 지금은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기 때문에.
“좋아. 애당초 유저가 월드를 개판쳐도 개입 안한다고 약속했는데, AI가 개판친다고 개입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지.
민준이 네 말대로 운영자 권한에서의 개입은 하지 않을게.”
“상혁이 너라면 이해해 줄줄 알았다.”
민준이 웃으며 상혁의 어깨를 두드리려 하자, 상혁이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기뻐하긴 일러. 나도 지금 사태는 운영진 개입 없이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운영자 권한을 쓰려던 거니까.
하지만 네 말대로 그 선택이 혼돈의 AI가 가진 도전적 성향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월드가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AI의 완전성을 지켜주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이라고 생각해.
혼돈의 AI는 나중에 리얼 엔진에 삽입되어 다른 개발자들이 만드는 MMORPG의 월드를 관리하는 기초 AI가 될 거니까.
하.지.만.”
상혁은 검지를 세우며 민준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손놓고 당하지는 않을거야.
애당초 자연경급 존재도 아니고 현경급 따위에게 월드 전체를 헌납하려고 지금까지 죽어라 관리한 건 아니니까.
YAS의 월드는 아직 봉우리는커녕 싹도 안 난 새싹 같은 존재라고.
어디서 튀어나온 개미 새끼 한 마리한테 영혼까지 털리는 건 절대 사양이야.”
“하지만 너도 말했다시피 운영자 권한 없이는 사태 해결이 불가능하잖아.
지금 PTW에서 가장 강한 구스타프 씨도 겨우 화경 중급인데 현경급 몬스터라니, 저건 구스타프 할아버지가 와도 못 이겨.
애당초 각 등급의 격차를 그 정도로 설계한 게 상혁이 너니까,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잖아?”
“그렇지. 하지만 민준이 네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뭐?”
“사실 YAS는 월드 전체가 히든 피스로 개 떡칠 되어있는 게임이라는 거.
그러니까 운, 그리고 스킬 시스템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 그리고 그 스킬을 익히는 지루한 과정을 버텨낼 수 있는 끈기와 재능만 가지고 있다면, YAS에서 경지를 올리는데 필요한 시간제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 말은 지금부터 PTW 직원 중 한 명을 현경급으로 육성한다고?
그 전에 월드 전체가 박살날걸?”
“그렇지. 아무리 히든 피스에 대한 정보를 우리가 다 알고 있어도, 그걸 모으는 시간과 경지 돌파에 필요한 시간을 버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러니까 민준이 네가 해줄 일이 하나 있다.”
“YAS의 기본적인 밸런스 규칙을 어기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민준을 향해, 상혁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것은 뭔가의 꿍꿍이가 있을 때 상혁이 늘 지어 보이던, 장난기 넘치는 미소였다.
“뭐···. 뭘 시키려고?”
그제야 불안해진 민준이 상혁에게 묻자, 상혁이 말했다.
“민준아. ‘정신과 시간의 방’ 좀 만들어주라.”
상혁이 민준에게 한 요구.
그것은 전 세계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도 ‘외계인’ 취급받는 민준이 듣기에도 너무나 터무니없는 요구 사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