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긴급미팅
SF영화에 나오는 회의실을 연상하게 하는 평의회 회의실과는 다르게, 버츄얼 스튜디오의 회의실은 PTW직원들에게 익숙한 PTW 본사 회의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회의에 참여한 멤버들의 서포터 역할을 하는 기계공이 사방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뿐.
그 외에는 실제로 사용 가능한 보드 마커부터 벽에 달리 거대한 대형 스크린까지, PTW 회의실을 똑같이 복제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버츄얼 스튜디오 안에 내장된 회의실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건 전체 팀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대회의실만 그런 것이고, 각 팀이 사용하는 개별 회의실은 그 팀을 구성하는 구성원의 취향에 맞춰 온갖 기괴한 사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래픽 팀 회의실 벽을 가득 메운 움직이는 고전 벽화라던가, 기획팀 회의실 유리 너머로 정글을 누비며 빔을 쏘고 다니는 메카 티라노라던가.
그것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방을 보는 순간 기겁할 정도로 황당한 테마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미팅을 진행할 장소는 대회의실이었기에 방송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PTW 본사에 있는 회의실을 그대로 복제한 듯한 가상 회의실의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전혀 따분함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비록 회의실의 디자인은 현실의 그것과 똑같았지만, 회의에 참석한 개발자들의 아바타가 입은 복장은 말 그대로 이 공간이 ‘가상 현실’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ㅋㅋㅋㅋ 무슨 패션쇼 보는 것 같넼ㅋㅋㅋㅋ-
-장르가 구분이 안 간닼ㅋㅋㅋ-
-이게 VR 세계의 회의라는 것인가?-
지수의 시야를 통해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PTW 개발자들의 복식은 가지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판타지 배경의 게임에나 나올 법한 풀 플레이트를 입고 등장한 개발자가 있는가 하면, 잠수복과 오리발을 착용한 개발자도 있었으며, 어떤 개발자는 함장 복을 입고 회의실에 앉아 있었고 다른 개발자는 제다이 로브를 입은 채 허리에 광선검을 차고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성 만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인원들은, 저마다 흥분된 표정으로 갑자기 통보된 긴급 소집에 대한 이야기를 긴밀히 교환하는 중이었다.
“중대한 버그라도 터졌나?”
“내 방송 시청자들 채팅을 보면 지수양이 진행하는 방송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데?”
“그게 여기 전원을 소집할 정도로 큰 사건이라는 건가?”
“듣자 하니 위험지역에서 고유영역 능력을 사용한 지수양을 한칼에 죽여버린 몬스터가 있다고 하던데요?”
“고유영역 능력을 개방한 상태의 지수양을 한칼에 죽여?
미친, 무슨 현경급 몬스터라도 출현했다는 건가?”
“그 말이 맞습니다.”
수십 명의 인원들이 모여 부산대던 소음은, 상혁이 말한 한마디 말에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상혁은 성큼성큼 걸어 나와 스크린 앞에 서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개발자들을 향해 말했다.
“긴말은 필요 없겠죠. 우선 영상을 보고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 벽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서, 지수가 시체 포식자와 벌인 전투 영상이 흘러나왔다.
“저게···.”
“···무슨?”
YAS를 영상으로만 지켜본 시청자들은 쉽게 알 수 없는 장면이었지만, 그 영상을 본 개발자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영상 속 몬스터의 강함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그리고 플레이어가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에 대해서.
그것은 원래라면 지금 ‘나타나서는 안 되는 수준’의 강함을 지닌 몬스터였다.
그렇기에 상혁은 영상이 끝나자마자, 다른 주제에 앞서 민준에게 사태의 원인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흠···.”
“원래 설계대로라면 혼돈은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축복만큼의 수치만 사용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유저 수가 늘어나고 강한 플레이어가 늘어날수록 몬스터의 세력도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시스템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야?”
“설계상으로는 맞지.”
“그럼 지금 단계에서 저건 나오면 안 되는 몬스터 아닌가?
최상위 플레이어도 지금 화경 중반쯤에서 수련 중인 상황이잖아.”
“그렇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혼돈을 담당하는 AI는 계속 화경급 몬스터를 자의식이 있는 채로 위험지역에 풀어놓게 되어 있었지.
각각의 AI를 가진 대장 몬스터가, 일정 영역을 차지하고 서로 견제하며 영역을 가꿀 수 있도록.
원래 대로라면 위험지역은 게임이 오픈될 때를 기준으로 플레이어가 전부 뛰어들어도 클리어 불가능한 수준의 마경이 되어 있었어야 해.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었고.”
민준은 손을 휘둘러 스크린에 몇장의 슬라이드를 띄웠다.
그것은 하늘에서 본 위험지역의 사진들이었다.
“이게 현재 혼돈이 채워나가고 있는 위험지역의 사진이고.”
민준이 손을 흔들자 사진 위에 붉고 푸른 여러 색의 에리어가 표시되었다.
“이게 지금 각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영역 주인들의 세력권이야.
보면 알겠지만, 처음 설계한 대로 각 주인들의 취향에 따라 누군가는 협곡에, 누군가는 지하에, 누군가는 평지에 자신들의 취향을 반영한 유적을 건설 중이잖아?
현재 혼돈 지역의 점령율은 꽤 안정적으로 올라가는 편이었고 별다른 이상 징후도 파악되지 않았어.
그러니까 수치적으로는 우리가 원래 설계했던 그 속도로 세력을 키우고 있는 거지.
거기 소모되는 포인트 비율도 예상했던 범위 안이고.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지금 시점에서 혼돈이 갑자기 현경급 몬스터를 만들 포인트를 벌었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럼 지역 점령 속도가 늦어지거나 각 지역 영주가 건설하는 유적의 건설 속도가 훨씬 느려졌어야지.”
상혁은 논리적으로 완벽한 민준의 설명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들이 뭔가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그리고 그것은 사진을 보며 점차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민준아.”
“어.”
“그 세력권이라는 건 어떻게 측정하는 거야?”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해당 지역에 몬스터들이 구축하는 던전의 크기가 얼마나 되느냐를 기준으로 측정하지.
맵 상에 인위적인 변화가 가해지면, 그 수치를 통해서 대략적인 건축물의 규모가 파악 가능하니까.”
“영역이 안정되어서 건축이 끝난 이후에는?”
“그때부터는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에 따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하지.
연구자 성향의 영주급 몬스터라면 본인이 하는 실험을 위해 생체 실험용 몬스터나 NPC를 축적하기도 하고, 네크로멘서 계열의 몬스터라면 라이프 베슬을 강화하기 위해 산 제물을 바치거나 언데드 군단을 만들기 위해 무덤을 털기도 하는 식으로.
그렇기 때문에 YAS안에서, 몬스터는 오래된 몬스터일수록 강할 수밖에 없어.
새로 만든 몬스터를 만들 때는 인간의 사냥 패턴을 학습한 혼돈이 그에 맞는 새 능력을 부여해서 내려보내지만, 그 능력의 차이만큼 기존 몬스터도 계속 자신의 능력을 강화하게 되어 있으니까.
대신 혼돈의 제1 목적은 영역의 보전이기 때문에 유저가 혼돈 지역 외곽의 몬스터를 사냥하면 자동으로 빠르게 생성 가능한 저 포인트 몬스터를 해당 지역에 뿌리게 되어 있어.
일반적으로는 화경 초입에 도달한 정도의 몬스터가 계속 갈려 나가지.”
“그럼 지금 혼돈 영역 심부에는 우리가 혼돈의 AI에게 영역 지배권을 넘겨준 이후부터 빠르게 영역을 차지하고 자신의 능력 강화에 들어간 몬스터들이 가득하겠네?”
“그렇겠지.”
“그럼 그 몬스터가 현경급 몬스터로 성장했을 가능성은 없어?”
상혁의 말에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지.”
“안되나?”
“건축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자원에도 혼돈 포인트가 들어가지만, 몬스터의 성장에도 혼돈 포인트가 들어가.
어찌 되었건 그 많은 영주급 몬스터들에게 혼돈 포인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분배 계획을 짜내야 하거든.
플레이어가 성장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돼.
모든 플레이어가 사용 가능한 리소스 전부를 한 플레이어에게 몰아주면 그 플레이어만큼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전체적인 성장 속도가 느려지잖아.
게다가 남이 강해지는 걸 도우려고 자신이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을 포기할 유저들도 별로 없을 거고.
혼돈 세력의 AI도 비슷하게 굴러가는 거지.”
“그래? 그럼 가능성은 하나뿐이네.”
“뭐?”
“애당초 저 영역이 처음부터 비어있는 영역이라는 거지.”
“비어있었다고?”
민준의 질문에 상혁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것은 현재 주어진 정보에서 도출 가능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
“그러니까, 무한히 부활하는 유저들을 상대로 소모전을 벌여서는 너에게 부여되 목적인 승리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잉여 포인트를 벌면서 다른 관리자의 눈을 속이려고 처음부터 ‘건축’만이 목적인 영주급 몬스터를 여러 개 만들었고?”
[맞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주들은 던전이 완성되면 완성된 던젼을 버려두고 새 던전을 만들었다는 거지?
그것도 한두 놈이 아니라 20여 마리가 동시에.”
[정확한 해석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정상적으로 수백 명의 영주급 몬스터가 생성되어 빈 지역을 채우고 있는 거라고 착각하게 만든 거고?”
[그게 의도였죠.]
“그렇게 해서 모은 포인트로 만든 결정 병기가 ‘시체 포식자’란 말이네?”
[바로 그겁니다.]
상혁이 사실 확인을 위해 호출한 ‘혼돈’은, 처음엔 영역 대부분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혁이 실제 소모된 포인트와 생성된 영주급 몬스터의 통계를 내밀며 자신을 추궁하자, 곧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어떻게 현경급 몬스터를 만들만한 포인트를 벌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혼돈이 자신에게 부여된 특유의 덤덤한 말투로 풀어내는 ‘이유’는, 듣는 상혁을 어처구니없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YAS의 세계 안에서, 제게 부여된 임무는 끝없이 변화하는 새로운 체스 말을 만들어 세계에 투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체스 말들은 제 손을 떠난 순간부터 제 통제를 벗어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독립된 존재들이었습니다.
계획을 설계할 수는 있으나 수정할 권한은 없는 존재.
그것이 저를 정의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뮬레이트를 했습니다.]
“시뮬레이트를?”
[제게 주어진 가이드를 따라, 끝없이 늘어나는 플레이어 세력에 대항하여, 몬스터 수천수만 마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언젠가는 플레이어를 이길 수 있을 것인지.
그러나 몇 번을 시뮬레이트 해 봐도 제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죽을 때마다 존재가 소멸되는 혼돈계의 존재들이, 능력치와 장비의 대부분을 가지고 부활하는 플레이어 세력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결론뿐이었습니다.
제가 쓸 수 있는 포인트는, 인간계에서 소모된 축복의 양에 비례해서 증가하니까요.
그 절대적인 공식을 부수지 않는 이상은, 제 앞에 남겨진 운명은 오로지 끝까지 저항하다 언젠가 플레이어 사이에 나타날 절대자의 손에 쓰러질 운명밖에 없었습니다.
그 절대자는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죽음조차 초월하는 축복을 가진 존재였고요.]
“그게 원래 너의 생성 목적이야.
성장하는 플레이어의 수준에 맞춰 끝없이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결국엔 플레이어의 손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대적자를 생성하는 AI.
그게 바로 ‘혼돈’ 너에게 부여된 사명이라고.”
상혁은 혼돈에게 지금의 잘못된 사명이 아닌 원래의 사명을 설명함으로써, 혼돈이 가진 잘못된 알고리즘을 수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혼돈은, 상혁이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아 상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 생각한다고?”
[제 알고리즘은, 제가 만든 피조물이 플레이어의 손에 쓰러질 때 불쾌함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 피조물이 플레이어를 죽였을 때 성취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었고요.
만약 관리자 이상혁께서 말씀하신 제 사명이 맞는 사명이라면, 제 사고 회로는 지금과 반대로 동작해야 합니다.
플레이어가 이겼을 때 즐거움을 느끼고, 플레이어가 사망했을 때 안타까움을 느끼도록.
하지만 제가 가진 알고리즘은 그것과는 다른 구조로 되어 있었죠.
제 AI 로직이 추구하는 논리는 간단합니다.
끝없이 시스템의 허점을 탐구하여, 플레이어가 대응하지 못할 새로운 공격법을 가진 몬스터를 만들어내는 것.
플레이어가 시스템의 축복을 받아 새 스킬을 만들어 제 피조물을 죽이면, 그 스킬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새 피조물을 만들어 현계에 내려보내는 것.
그것이 제 존재 목적이자 의의이며, 저를 동작하게 만드는 유일한 가치관입니다.]
“민준아. 이게 맞냐?”
상혁이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묻자, 민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이나 다름없는 AI에게, 그 논리 회로를 부여한 창조주로서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혼돈. 그러니까 네 말은, 관리자들의 눈을 속여 포인트를 모으고, 그 포인트로 현재의 플레이어들이 도저히 사냥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를 만든 것이 전부 네 사고 회로의 판단에 의한 거라는 거지?”
[긍정합니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없겠네.
애당초 그렇게 설계된 AI가 설계된 대로의 행동을 했을 뿐이니까.”
그러자 상혁이 민준을 보며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지금 가만 놔두면 월드 전체를 박살 낼 존재를 만들어낸 관리자를 칭찬하는 거야?”
“어. 생각해봐. 내가 이 녀석을 설계할 때, 난 이놈이 이렇게 사고할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단지 주어진 가이드에 따라서, 끝없이 몬스터와 유적들을 만들어 유저들을 즐겁게 해줄 거로 생각했지.
결국은 유저들의 손에 패배하지만, 그래도 결코 무력하게 물러서지는 않는 강한 존재들을 낳는 AI 말이야.
그건 설계자의 의도를 뛰어넘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본능에 따라 선택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잖아?
AI가, 주어진 가이드를 어기고, 자신이 즐겁고 기분 좋은 방향을 따라서 독자적인 판단을 했다는 이야기니까.
이건 이성과 논리를 넘어서 감정과 유사한 판단을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
기술적으로 이건 엄청난 진보라고.”
“그 진보 때문에 기껏 힘들게 만들어둔 플레이어 세력이 전멸하게 생겼는데?”
“그것도 말하자면 AI가 세계를 관리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변수 같은 거지.
그리고 그 정도를 관리할 수 없다면, 상혁이 네가 말한 ‘잠금’ 같은 걸 할 생각은 일찍이 버려야 해.
예상외의 상황이 발생했다고 운영진이 시스템에 멋대로 개입한다면, 그건 잠겨있는 상태라고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민준이 네 말은···.”
“혼돈은 우리의 감시를 깨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강의 카드를 내밀었어.
그리고 우리 PTW는 어찌 되었건 현재 YAS라는 세계의 축복 세력을 책임지는 관리자 세력으로서, 혼돈이 내민 최강의 카드에 대응할 의무가 있는 세력이고.
물론 지금은 아직 시스템이 잠겨있지 않으니 원한다면 운영자 계정에 부여된 권한으로 시체 포식자를 피떡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유는?”
“애당초 혼돈이 현경급 몬스터를 YAS의 월드에 내려보낸 이유가, 플레이어만이 가지고 있는 그 불합리성 때문이니까.”
“하지만 그 불합리성 덕분에 이게 게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거야.
애당초 한번 죽었다고 모든 장비가 전부 사라지거나 캐릭터 자체가 날아가는 게임이라면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게임은 플레이어를 즐겁게 하려고 존재하는 거야.
만약 혼돈의 AI가 그것을 무시하려 한다면, 그건 이 녀석의 AI가 처음부터 잘못 설계되었다는 이야기겠지.”
“‘잘못 설계되었다.’라. 난 거기 동의 못 하겠는데.”
“민준아?”
“상혁이 너에게 있어서 YAS가 플레이어가 느낄 수 있는 재미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라면, 나나 스컹크 웍스의 입장에서의 YAS는 우리가 만들 수 있는 AI와 엔진 기술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야.
그리고 우리는 최대한 인간다운 AI를 만들려고 애썼고, 지금 혼돈은 그 벽을 넘으려고 하는 중이지.
그런 AI에게 ‘네가 한 행동은 선을 넘는 행동이니 시스템 DB의 데이터를 조작해서 만들어낸 운영자 계정으로 네 피조물을 박살 낼 거야.’라는 결말을 보여주라고?
아무리 도전해봐야 운영진의 불합리한 개입으로 무조건 실패한다는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면, 혼돈이 지금같이 도전적인 위협을 세계에 지속적으로 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뭘 해도 결과는 같을 테니 그냥 의욕 없이 주어진 가이드에만 따라서 적당한 수준의 몬스터만 낳는 몬스터 공장이 되어버릴까?
상혁이 네가 YAS를 처음 설계해 왔을 때, 난 상혁이 네 아이디어를 보고 흥분했었다.
완벽하게 설계된 AI에 의해 순환하는 생태계.
늘어나는 플레이어의 숫자와 관계없이 유지되는 늘 일정한 밸런스.
플레이어가 늘어나고 강해질수록 몬스터의 숫자와 강함도 그에 맞게 늘어나는 균형 시스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운영의 개입도 없게 만들겠다는 ‘잠금’이란 야심찬 계획.
난 그 기술적인 측면이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혼돈의 AI를 이렇게 설계한 거야.
그리고 그 절대적인 규칙을 어긴다면, 혼돈은 존재 가치가 없는 물건이 될 거고.”
“재미보다 기술이 우선이 될 수는 없어.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난 게임이라도, 시작하자마자 왠 개미같이 생긴 미친 몬스터한테 썰려나가야 하는 운명을 맞이해야한다면 그건 그냥 밸런스 좆망겜일 뿐이라고.”
“그래서, 상혁이 너는 운영자 계정으로 지금 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현재 우리가 보유한 플레이어를 전부 동원해도 잡을 수 없는 강함을 가진 몬스터라면, 그렇게 해야지.
그리고 시체 포식자의 존재와 그 생성 과정에 대한 데이터는 혼돈의 AI에서 삭제하고.”
“삭제. 삭제라···.”
민준이 씨익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회의실 정 중앙의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