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천외천
‘천외천이라.’
처음 상혁이 YAS의 등급제도를 설계할 때, 상혁은 현경 이상급의 강함을 가진 존재부터 ‘천외천’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강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 단어의 뜻에 걸맞게, 게임의 장르 자체를 바꿔버릴 것 같은 규격 외의 힘을 가진 존재가 될 것이라고.
지수의 머릿속엔 그 당시 상혁이 했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화경급 고수 1명을 상대하는데 초절정 고수 10명이 필요했다면, 현경급 고수 1명을 상대하는 데는 화경급 고수 50명 이상이 필요할 정도의 강함의 격차가 존재할 것.’
지수는 머릿속에서 ‘승리’라는 단어를 지워버렸다.
어차피 자신의 전력 100%를 사용하더라도, 이기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에.
찰나의 순간 탈출이라는 단어도 떠올랐지만, 지수는 그것조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화경의 절정에 이르지 못한 자신 조차도 초절정 고수가 자신 앞에서 도망가려 시도하면 웃으며 가볍게 죽일 수 있었다.
하물며 현경급의 몬스터라면 자신의 기동력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탐색 뿐이네.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상대의 능력을 파악해야겠어.’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무력하게 질 수 없다고 생각한 지수는 활대를 잡은 손으로 화살을 잡은 채 시위를 잡고 있던 손을 등 뒤로 돌렸다.
그리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UI를 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을 놀려 전투 세팅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돈은 고민하지 말자.’
지수의 고유 클래스인 스펠 슈터(spell shooter)는 궁수(archer)와 스펠캐스터(spell caster), 아이템 사용자(item user)의 복합클래스였다.
그것은 아이템 유저 클래스의 특성으로 화살 장비 수에 대한 패널티를 줄이고 화살의 특수 능력에 보너스를 받으며, 주문으로 화살의 움직임을 조작하고 궁술 스킬로 화살의 위력과 정밀도를 커버하기 위해 지수가 직접 찾아낸 스킬셋을 사용하는 고유 클래스였다.
물론 3개의 클래스 스킬을 동시에 육성해야 하는 만큼 성장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복합클래스는 구스타프처럼 단 하나의 스킬 유형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상황에서의 유틸성을 보장해주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고유 직업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에도 지금까지 겪어온 수많은 위기 속에서 그녀의 생존을 보장해준 직업을 믿기로 했다.
‘전투 초반의 회피능력을 희생하더라도,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최강의 아이템들로 상대해주지.’
지수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허벅지와 어깨 위쪽, 옆구리와 등에 아이템이 하나씩 생성되어 장착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세팅을 끝냈을 때, 그녀는 몸에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의 다양한 아이템을 착용한 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공격하지 않는구나.”
그녀가 활 시위에 손을 대며 말하자, 건너편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몬스터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인간과의 전투는 처음이다.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난 인간이 아니라 엘프야.”
“단순히 귀가 뾰족하다고 해서 본인의 정체성이 바뀌지는 않는다. 바깥의 자식이여.”
“바깥의 자식?”
“그래. 이 세계 바깥에서 태어나 세계의 규칙을 멋대로 빌려 쓰고 세계의 존재들에게 유희를 강요하는 존재들.
아버지는 너희 같은 존재들을 바깥의 자식이라 불렀다.”
‘아버지라. 혼돈을 이야기하는 건가?’
물론 눈앞의 존재가 실제로 혼돈을 담당하고 있는 AI와 대화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YAS 안에서 생성된 몬스터에게는, 신적인 존재인 ‘관리자’들과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으니까.
축복이라는 자원을 사용하는 플레이어와 NPC는 신탁이라는 형태로 관리자들과 직접 소통 가능한 권한을 가진 대신, 약하게 태어나 수련을 통해 강해져야 하는 패널티를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혼돈이라는 자원을 사용하는 몬스터들에게는 혼돈이 부여한 포인트와 지식에 따라 처음부터 강하게 태어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대신, 탄생 이후부터 관리자와 직접 소통할 수 없는 패널티를 부여했다.
월드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그 순간부터, 혼돈이 부여한 의식에 따라 목적의 달성을 위한 끝없는 갈증만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기에 몬스터의 행동 패턴은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맹목적이고 순수한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우정, 사랑, 승리, 성취, 희망, 긍지, 용기 등의 다양한 감정에 지배되는 축복 세력의 NPC와는 다르게, 몬스터들은 오직 목표에 한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그 과정에서만 즐거움이란 감각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지수는 지금까지 수많은 몬스터를 접하며 그 맹목성을 자신의 눈으로 지켜봤었다.
지식을 위해 부하 몬스터까지 모두 실험의 대상으로 사용하여 결국 거대한 영역을 혼자 지키다 최후를 맞이한 ‘지식의 탐구자’부터,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혼돈 영역 전체를 돌아다니며 기존 세력에 도전하다 플레이어가 잡기도 전에 몬스터들의 협공을 받아 사망한 ‘강함을 증명하는 자’의 최후까지.
지수는 장비 세팅 변경으로 인해 변화한 몸무게를 가늠하기 위해 제자리에서 가볍게 점프를 했다.
그러자 그녀의 전신에 단단하게 매여진 장비들이 덜그럭거리며 그녀의 전신에 무게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뭐, 대충 네가 무슨 목적으로 태어난 존재인지는 알 것 같아.
지금까지 내 대화를 받아주려고 기다린 걸 보면, 내 공격력을 가늠하려는 게 목적인 것 같고, 원래 이 근처를 지키고 있어야 할 엘더리치를 죽인 걸 보면 최대한 빠르게 적대 존재와 조우하고 싶었던 것 같고.
‘방황하는’ 키워드가 붙어 있으니 근거지를 두지 않는 타입의 몬스터겠지.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이름이 시체 포식자인데, 내가 예전에 본 그 키워드를 가진 몬스터는 시체의 뼈조차 남기지 않았었거든?
그런데 여기는 시체가 너무 많아.
왜 시체를 먹지 않은 거지?”
“그것들은 내가 먹을 수 없는 타입의 시체들이다.
아버지는 내가 동족의 시체를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까.”
자신의 질문에 대한 몬스터의 답변을 들은 지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시체 포식자가 시체를 못 먹게 했다고? 그럼 뭘 먹는다는 거지?’
그녀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개미를 닮은 몬스터의 입에서, 마치 피로 물든 듯한 붉은 혀가 징그럽게 그 존재를 내미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바라보는 몬스터의 눈빛은, 분명 맛있는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순간 지수는 몸을 움직여 양팔을 빠르게 교차시켰다.
“큭. 해주의 자세!”
그러자 그녀가 자세를 채 완성하기도 전에, PRS에 내장된 압력 패널이 일제히 부풀며 그녀의 전신에 엄청난 압박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마치 프레스 사이에 끼인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그녀가 가까스로 자세를 완성하는 데 성공하자, 전신에서 느껴지던 압력이 어느정도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기술 시전 없이 존재감 방출로만 이 정도 압력이라고?
이게 현경급 존재의 강함이라는 건가?’
그녀는 생각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빠르게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평소라면 1미터 두께의 아름드리나무도 가볍게 관통하는 그녀의 화살은, 가만히 앉아 있는 존재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마치 이쑤시개처럼 튕겨 나갔다.
‘패시브 방어력 수준만 5단계 이상. 일반 공격으로는 씨알도 안 먹히겠네. 주문 화살을 써야겠어.
캐스팅 시간을 벌 수 있으려나?’
서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면서, 지수는 허벅지에 달린 가죽 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의 화살을 꺼내 화살촉을 가죽 케이스 안에 처박았다.
그러자 흰색 풀같이 보이는 끈적한 액체가 그녀의 화살촉에 묻어나왔고, 그녀는 번개같은 속도로 그것을 몬스터가 있는 방향을 향해 발사했다.
-촤아아악!-
나무에 화살이 박히자마자 화살촉 끝에서 뿜어져 나온 실들이 거미줄처럼 숲을 가득 메웠지만, 지수는 마치 쇄빙선이 얼음을 가르듯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몬스터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경악의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미친?! 무슨 이동속도가?!’
9천 골드짜리 연금술 촉매가 아무 쓸모 없었다는 것이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다음 화살을 가죽 주머니의 다른 칸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찰칵 소리와 함께 마치 작은 호리병처럼 생긴 도구가 화살촉 끝에 딸려 나왔다.
“이건 어떠냐!”
화살이 발사되는 순간, 마치 공기를 찢는 듯한 엄청난 파공음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지만, 몬스터는 마치 조금 거슬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느낌으로 지수와의 거리를 더욱 좁혀왔다.
그것도 전력으로 도망가고 있는 지수와는 다르게,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느긋한 걸음으로.
그러나 그 느긋한 발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수는 자신과 몬스터의 거리가 수십 미터씩 사라지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으아아!”
전략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지수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전에 처음으로 화경의 경지에 도달한 구스타프에게 도전했을 때처럼, 적당히 탐색전을 하며 상대의 능력을 파악해보려 했던 생각 자체가 실수였다고.
6등급과 7등급의 격차는, 그녀가 아는 5등급과 6등급의 격차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 안 먹히고.’
현재 PTW 내부에서 가장 연금술에 정통한 연금 마이스터가, 맞출 수만 있다면 게임 내 어떤 존재든 죽일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던 독화살은 몬스터가 휘두르는 주먹 한 방에 안개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속성 공격도 안 먹혀.’
바위조차 녹여버리는 그녀의 불화살도 몬스터의 살갗에 약간의 그을음을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주력 공격 수단을 모두 쓰고는 도주를 멈추었다.
지금 이대로 전투를 지속해봤자, 탐색을 당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녀가 도주를 멈추자, 몬스터 역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과 똑같이, 그녀와 1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그 위치에서.
지수는 그제야 자신이 10분 동안 전력으로 공격한 존재의 데미지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예 데미지가 없는 건 아니었네.’
전신에 박힌 6발의 화살.
4개 중 한 개가 팔꿈치부터 잘려나가 3개만 남아있는 팔.
전신을 감싸고 있는 흰색 점액과 거기 묻어있는 반짝이는 가루들.
마지막으로, 아직도 얼어붙어 있는 왼쪽 얼굴.
지수를 바라보는 몬스터는 얼음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지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확실히, 같은 등급이라도 격의 차이가 존재하는군.
적어도 너는 내가 혼돈세력에서 마주한 다른 존재보다는 강했다.”
“그럼 칭찬하는 김에 살려줄 거야?”
“목숨을 구걸하는 건가. 어차피 너희들은 우리와 달리 얼마든지 부활하지 않나?”
“대신 우리는 데스 패널티를 받으니까.”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군.
지금 대화를 하는 이 순간에도, 내 본능은 너라는 존재를 찢어 내 입에 쳐넣으라고 날뛰고 있으니까.”
“시체 포식자라, 진짜 최악이네.”
YAS는 다른 게임보다 데스 패널티가 심한 게임이었지만, 그 심한 데스 패널티를 시체 회수라는 개념으로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던전에서 사망하더라도 다른 모험가가 시체를 발견하여 회수하면, 데스 패널티로 낮아진 능력치를 단번에 회복할 수 있도록.
그래서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시체 회수 주문을 위한 스크롤을 상비하고 다녔다.
그것의 한쪽 부분을 시체에 가져다 대고 스크롤을 찢으면, 나중에 교회에 가서 해당 시체의 주인이 자신의 시체에 건 포상금을 수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 시체 포식자 같은 특이체질의 몬스터에게 사망하면, 예외 없이 능력치 감소를 감수해야 했기에, 지수의 입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 어떻게 올린 능력치인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장비는 신전에서 귀속 절차를 통해 계정에 귀속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귀속된 장비는 시체의 손상 여부에 상관없이 부활한 육체로 자동 이전된다는 것이 지수에겐 그나마 위안이 되는 부분이었다.
물론 귀속 절차를 밟지 않은 대부분의 소모품과 식량, 그리고 이번 모험에서 얻은 보상들은 모두 자신이 죽은 자리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운 좋은 플레이어가 그것을 발견하고 좋아하게 되겠지.
아니면 근처를 이동하는 상급 몬스터의 부하들이 아이템을 주워 던젼으로 가져가거나.
지수는 활을 늘어트린 채 몬스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아···. 됐어. 이제 죽여도 좋아.”
“포기가 빠르군.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도 남아 있지 않나?”
“남은 아이템은 소모품이라 하더라도 너무 비싸서 신전에서 귀속시킨 아이템이야.
어차피 부활하면 알거지 신세일 텐데 밑천은 있어야지.”
“부럽군. 죽음 이후의 일을 고민할 수 있다는 게 말이야.”
“글쎄, 그건 좋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잃어버린 것을 후회하며 살아야 하는 고통의 과정일 수도 있지.”
그러자 몬스터가 분노한 듯한 목소리로 지수를 향해 불평을 쏟아내었다.
“네가 죽음을 무엇으로 포장하든, 내 귀엔 기만처럼 들릴 뿐이다.”
“기만이라니. 너 지금 내가 귀속 안 해서 날려 먹어야 하는 아이템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그거 복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어야 하는지 아느냐고!
하여튼 나도 운이 지지리도 없지!
너같이 센 놈이 왜 외곽지역에 있는지도 이해가 안 가고, 그걸 처음 만난 게 왜 나인지도 이해가 안 간다고?
몬스터인 네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불합리함을 이해할 수 있어?
어? 이해할 수 있겠냐고?”
“결국, 네 불만은 시간을 투자하여 쌓아 올린 물질적 재화에 대한 손실에서 오는 불만일 뿐이다.
게다가, 넌 지금 귀속인지 뭔지 하는 신의 축복으로 전신을 덕지덕지 더럽힌 상태에서, 자신이 잃을지도 모르는 아주 작은 손해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고 있지.
그게 나같은 존재들에게 얼마나 역겹게 보일지, 넌 이해할 수 있나?”
“내가 왜 그걸 이해해야 하지? 난 적어도 상대가 나보다 약하다고 10분 가까이 뜀박질시키면서 괴롭히는 악취미는 없거든?
이 변태 자식아!”
“그래. 이해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난 네가 이해해주길 바란다.
우리가 이 세계 안에서 느끼는 불합리함을.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글쎄,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어차피 네가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날 죽이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순간 지수의 머릿속에는 ‘실드 아트 온라인’에 나온, 게임 안에서의 사망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건 PRD에 한정해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을, 지수는 잘 알고 있었다.
물리적 피드백이 육체의 가동 한계를 넘지 않게 하기 위한 PRD 안의 안전장치만 해도, 그녀가 아는 것만 8종류가 넘었으니까.
그리고 시체 포식자는, 그 사실을 덤덤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지. 난 너를 죽일 수 없다.
내가 너를 어떻게 죽이더라도, 넌 빌어먹을 축복의 가호를 받아 계속 살아나서 내게 복수할 테니.
그건 시체를 씹어먹든, 고아 먹든, 삶아 먹든, 끝없이 이어지는 불합리의 반복이겠지.
너희들이 이 세상을 즐겁게 즐기기 위한 수많은 보험들.
장비를 영혼에 귀속시키고 재산을 보호하며 쌓아온 노력을 지켜주는 축복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막대한 불합리의 소용돌이.
이건 너희들이 만든 ‘규칙’이 존재하는 한, 절대 뒤집히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겠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난 단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적어도 우리가 겪는 고통과 공포를 이해할 수 없다면, 비슷한 경험이라도 체험해보라고.”
시체 포식자가 손을 뻗어 지수를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복잡한 시스템 메시지가 지수의 눈앞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신화급 활 ‘아르테미스의 나뭇가지’의 귀속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전설급 화살통 ‘베드리아의 연필꽂이’의 귀속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영웅급 방어구 ‘미스티아의 서클릿’의 귀속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야! 이 미친!?!”
[신화급 방어구 ‘엘펜시아의 목걸이’의 귀속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뭐?!! 뭐뭐?!? 이게 뭔데?!? 무슨 짓을 하는거야?!!”
“저주로 축복을 지우고 있는 것뿐이다.
혼돈에너지가 무지막지하게 들어가는군.”
“왜 그딴 미친 짓을 하는데?”
“흠···. 이 ‘속옷’이라는 물건은 귀속이 해제되지 않는군. 어째서지?”
“그건 애당초 귀속 절차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부활 시에 무조건 남아있는 절대 귀속 아이템이니까 그렇지!”
“그렇군. 포인트를 더 쓰면 해제할 수 있을까?
이 속옷이라는 거, 인간에겐 중요한 물건인가?!”
“사회적으로는 엄청나게 중요할지 몰라도 장비적인 측면으로는 딱히?
사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넌 아직 내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내 장비의 귀속을 해제한다 하더라도 넌 이 장비를 사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투를 이기는 데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냐.
왜 이런 쓸데 없는 짓을 시도하는거지?”
지수의 질문을 받은 시체포식자가
“죽음을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는 네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 속옷이라는 것은 남겨주도록 하지.
귀속을 해제하는 데 드는 포인트가 내가 가진 포인트를 아득하게 오버하는 군.”
“거참 아주 고맙습니다!”
시체 포식자는 투덜거리는 그녀를 무시한 채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장비의 귀속까지 모두 해제하고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자, 이제 공평한 조건이 갖추어졌군.
난 죽으면 존재를 잃어버리고, 넌 죽으면 네가 지금까지 모은 모든 장비를 잃어버리게 되겠지.
신도 이 정도면 공평하다고 말하지 않을까?”
“뭐?···. 공평??”
“너희가 그토록 좋아하는 ‘규칙’을 이용했을 뿐이다.
이 땅에서 합당한 조건을 지불했을 때, 이루지 못하는 것은 없으니까.
자, 그럼 이제 진지하게 싸워볼 마음이 생겼나?”
지수는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과는 다르게 부활이 가능한 존재인 플레이어를 향한 순수한 증오.
그리고 ‘승리’를 위해서가 아닌, 본인의 ‘복수심’을 위해 막대한 포인트를 지불하며 상대에게 패널티를 부여한 상대의 저의.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에.
‘AI가, 민준오빠가 만든 AI가 감정을 깨달은 건가?’
그러나 그녀는 곧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그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자신이 아는 민준의 성격이라면, 실제로 감정이란 개념을 깨우친 AI를 개발했다고 판단한 순간, 바로 100% 상혁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자랑하러 왔을 테니까.
그러니까 몬스터의 저런 반응 역시 일종의 유사 감성 시스템에 의한 것일 것으로 생각하며, 지수는 화살집에서 화살을 뽑았다.
지금은 AI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여부보다, 어떻게든 자신이 모은 장비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상혁 오빠라면 성격상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로 장비 복구는 해주지 않겠지?’
마치 손의 크기에 딱 맞춘 것처럼, 손에 감겨오는 활의 감각이 그녀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 획득한 신화급 장비이자,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장비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아르테미스만큼은 절대 안 뺏겨.’
그녀는 속으로 다짐하며 시체 포식자를 향해 말했다.
“좋아. 인정할게. 지금까지는 죽어도 크게 의미가 없어서 대충 상대했다고.
지금부터는 진심으로 상대해주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하지만 넌 인간이 처음이라고 했지? 그리고 화경급 이상의 플레이어와 싸우는 것도 처음이라고 했고.
그 말은 지금까지 네가 상대한 화경급 존재들은 전부 몬스터라는 소리지.”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 ‘화경급’ 몬스터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게 ‘화경급’플레이어란 말이야.
그리고 나 정도의 경지에 오른 대부분의 화경급 강자들은,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사용하지 않는 승부 카드를 한 장씩 가지고 있지.”
지수의 입에서 작은 구동음이 울려 퍼졌다.
“고유영역전개(固有領域全開).”
순간 그녀의 발치에서 녹색 기운이 뻗어 나가 300미터 반경의 모든 영역을 뒤덮었다.
그것은 구스타프가 최초로 화경의 영역에 발을 디딘 이후, PTW의 직원들이 화경의 경지에 도달할 때마다 각자에게 맞춰 시스템이 선물해준, 캐릭터 고유의 축복이었다.
모든 장비의 귀속 해제라는, 막대한 데스 패널티를 조건으로.
“내 고유영역의 능력은 300미터 반경의 모든 존재의 움직이는 속도를 절반 이하로 깎는 거야.
대신 다른 고유영역 능력처럼 장비의 귀속이 전부 해제되는 패널티를 받으니까 평소엔 절대 사용하지 않는 능력이지.
근데 어쩌지?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네가 내 장비의 귀속을 전부 해제해버렸으니 이제 이 스킬은 노 패널티 스킬이 되어버렸네?”
“그 ‘모든 존재’ 안에는 너도 포함되는 건가?”
“아니.”
“어차피 내 속도는 너보다 두배 이상 빠르니, 별 의미 없는 기능이겠군.”
그러자 그녀가 평소와 다름없는 움직임으로 활을 겨누며 말했다.
“아니. 좋은 능력이야. YAS의 능력 보정 시스템은 인간이 인간을 초월한 신체 능력을 발휘하게 해 주지만, 반사신경이나 동체 시력까지 늘려주지는 못하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마치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스킬을 수련하지.
머리보다 몸이 상황에 먼저 반응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내 고유영역 능력이 있으면,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어.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동작을 보면서,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어떤 움직임으로 대응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 주지.
플레이어가 스킬을 시전하는 즉시 컴퓨터처럼 반응할 수 있는 너 같은 AI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인간에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란 건 엄청나게 중요한 법이거든.”
말을 끝낸 지수가 화살을 놓자, 시체 포식자는 평소보다 힘을 두 배 이상 늘려 평소와 같은 속도로 회피 기동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였기에, 지수가 쏜 화살은 그대로 시체 포식자의 옆구리를 관통해버렸다.
그 화살의 속도는, 지금까지 지수가 쏘았던 화살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와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살도 다르군.”
“미안, 말하는 걸 깜빡했네? 고유 영역 안에서는 내가 발사하는 모든 투사체의 속도도 두 배로 증가한다고.
다친 네 몸으로는 조금 피하기 버거울지도 모르지만, 어디 잘 피해 보라고.”
그렇게 말하며, 지수는 한번에 5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쳤다.
“춤춰봐. 지금부터 날 절벽으로 몰아세운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러나 시체 포식자는 지수의 그런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멍뚫린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부상···. 부상이라···. 으하하하하!”
“뭐가 웃기지?”
“넌 지금 내가 다쳤다고 생각하는군?”
“팔 하나가 잘리고 옆구리에 구멍까지 뚫렸는데 그렇게 생각하는게 정상아냐?”
“그렇군. 그래. 인간이 보기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나도 보여주지.
현경급의 존재로 이 세계에 태어날 때, 혼돈이 내게 부여한 나의 고유 능력을.”
이어지는 장면을 보며, 지수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분신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앞의 괴수가 자신의 몸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그대로 탈피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슈트에서 아이론 맨이 탈출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슈트에서 나온 존재가 슈트 안의 존재보다 더 강력한 존재라는 것뿐.
이제 지수의 앞에 서 있는 건, 마치 처음부터 전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재생을 마친 괴수의 존재였다.
“춤추라고? 과연 누가 춤을 춰야 할지, 지금부터 천천히 확인해보자.”
고유영역을 전개했음에도 눈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시체 포식자의 미소를 보며, 지수는 ‘천외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혁 오빠. 아무리 경지의 차이가 있어도 이건 너무 밸붕인 것 같아요.
완전 재생이라니, 완전 밸런스 X망겜이잖아, 이거.’
그런 지수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입을 크게 벌린 채 자신을 머리부터 씹어먹으려 시도하는 시체 포식자의 소름 끼치는 눈빛이었다.
***
“꺄아아아악!!!!!”
PRD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 뛰어난 그래픽이 가져오는 높은 현실감이었다.
그렇기에 지수는 그것이 가상 현실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비명을 지르며 부활 장소에서 깨어나야 했다.
온몸을 적시고 있는 식은 땀의 존재와 함께, 지수는 몸에 느껴지는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아, 진짜로 속옷만 남기고 다 털어갔네······? 미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지수는 PRD의 와이어가 온몸을 구속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육체에 가해지는 피로를 물리적으로 구현하려는 PRD의 보정 시스템이 가하는 압력이었다.
“하아···. 데스 패널티···. 거기에 고유 영역 전개 패널티까지···.”
지수가 시체 포식자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고유영역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사용자의 기본 능력치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로 인한 능력치 감소가 해당 전투에서 진행되지는 않지만, 이후에 고유 영역을 펼친 시간만큼 다음 데스 패널티를 받을 때 능력치 감소가 적용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지수는, 바로 그 패널티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못해도 한 달은 미친 듯이 비싼 거 먹으면서 요양해야겠는데······.’
다른 것보다 우선 몸을 가리고 싶다고 생각한 지수는 속옷 차림으로 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지수가 사망한 초보 플레이어를 위해 벽에 걸려있는 허름한 로브를 걸치기도 전에, 지수의 눈앞을 가로막은 다급한 호출 메시지가 그녀의 앞에 펼쳐졌다.
[관리자 이상혁이 카운슬 미팅을 요청하였습니다.]
[관리자 김민준이 VR 스튜디오 미팅을 요청하였습니다.]
PTW안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하다고 평가받는 두 사람이 동시에 요청한 미팅에서, 한쪽은 YAS안에 존재하는 관리자 회의를, 다른 쪽은 YAS 밖에서 진행되는 VR 스튜디오의 회의를 진행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지수가 잠시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리자, 다시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관리자 이상혁이 카운슬 미팅을 취소하였습니다.]
[관리자 김민준이 VR 스튜디오 미팅을 취소하였습니다.]
[관리자 이상혁이 카운슬 미팅을 요청하였습니다.]
[관리자 김민준이 VR 스튜디오 미팅을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지수는 양쪽에 팀 통화를 걸어 상황을 중재하려 시도했다.
“오빠들. 한쪽만 해요 한쪽만.”
-아니 그래서 취소했더니 민준이가 취소하잖아!-
-난 네가 회의 소집했길래 취소한 거거든?-
-아니 그래서 다시 걸었더니 너도 다시 걸었잖아.-
-니가 다시 취소했으니까 내가 걸은 거지!-
“하아···. 그냥 한 군데로 정해요. 지금 둘 다 같은 안건으로 회의 소집한 것 같은데.
게다가 전 아직 방송 중이라고요.”
그러자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상혁이 말했다.
-일단 관리자 혼돈의 말도 들어봐야 하니까 카운슬 미팅으로 진행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생각하는 상황이 맞다면 혼돈이 회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더 문제가 될 수 있어.
게다가 필요하면 VR 스튜디오 내에서도 혼돈의 AI는 호출할 수 있고.-
-그럼 VR 스튜디오로 하자.-
“몇 번 회의실이요?”
-3번.-
“거기 꽤 큰 회의실 아니에요?”
-필요하니까.-
상혁이 말했다.
-지금 YAS 테스트에 참가 중인 모든 6등급 플레이어를 소집해야겠어.-
“23명 전부요?”
-전투계열부터 생산계열까지, 23명 전부.
그리고 어쩌면 그 이하 5등급 262명도 전부 불러야 할지도 몰라.-
게임 내에서 최초로 등장한 ‘현경급’ 적대 세력의 출현.
그에 대한 상혁의 대응은, 현재 게임 안에 존재하는 플레이어 세력의 모든 화경급고수들을 소환하는 ‘비상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