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 컨셉에 몸을 지배당한 남자
[비록 PRS로 플레이 중이지만 HC 101정말 재미있게 하고 있습니다.
YAS도 기대되네요!
재미있는 게임 부탁드립니다!]
‘띠링’하는 알람음과 함께 허공에 출력된 메시지를 본 PTW직원은 힘차게 손을 흔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앗! ‘PRD갖고싶다’님! 십만원 후원 감사합니다!
하지만 닉네임을 보니 PRD는 아직 없으신 것 같네요!
도네이션 대신 그 돈을 PRD 사는데 보태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또다시 알람이 울리며 허공에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돈이 없어서 못사는 게 아니라 물량이 딸려서 못 사요. ㅠㅠ]
“아앗, 이런···. 안타까운···. PRD갖고싶다님이 PTW 직원이셨으면 좋았을 텐데···.
저희는 HC 101 보너스로 전 직원이 PRD 1대씩 전부 선물 받았거든요.
물론 YAS는 회사에 출근해야 할 수 있어서 이렇게 출근해서 게임 하고 있지만요.”
어찌 보면 기만처럼 들리는 직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수한 채팅의 행렬이 그 뒤를 이었다.
[기만질이다!]
[나도 PTW 가고 싶다!]
[보니까 종일 게임만 하던데 그럼 소는 누가 키우냐!
소는 누가 키우냐고!]
“공식적으로, 저는 지금 HC 101 개발에 참여한 전 직원에게 보장된 6개월간의 출시 보상 휴가를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 기간엔 회사에서 게임을 하던, 아니면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서브컬쳐 자료량을 자랑하는 PTW 자료실에서 영화를 빌려 사내 1인 극장에서 팝콘을 뜯으며 영화감상을 즐기던, 아니면 개인적으로 미뤄뒀던 공부를 하던 그건 제 자유죠.
뭐, 대부분의 직원들은 스트리머 소집 공고를 보자마자 하고 있던 해외여행까지 취소하면서 이렇게 방송을 하고 있지만요.”
평소엔 거의 군 기밀 시설 이상으로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던 PTW에선, 이번 스트리밍에 한정해서 원하는 직원 누구나 방송을 통해 유저와 소통할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 소통의 기회는, 게임 개발자로서 자신들이 만든 게임을, 그리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게임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PTW 직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지금 방송을 진행 중인 직원의 말처럼, 해외에서 워크패스트 공지를 본 직원이 해외여행을 취소하고 PTW 본사로 되돌아올 정도로.
덕분에 현재 PTW에서는 763명의 신청자에 의해 진행되는 763개의 YAS 스트리밍 방송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PTW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기술.
‘실시간 번역 기술’의 도움을 받아.
전 세계의 게이머들은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환경이라면 누구나 PTW 홈페이지의 스트리밍 페이지를 통해 자신이 보고 싶은 직원이 YAS를 플레이 하는 모습을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즐길 수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민준은 원래의 YAS CAM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은 기능을 하나 추가했는데, 그것은 팬들과 스트리밍을 하는 직원들을 매우 즐겁게 하는 기능이었다.
[게임과 관련된 질문을 해도 될까요?]
또다시 들어온 1000원짜리 후원 메시지.
그것은 돈을 지불해서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어필하고 싶어하는 유저들과, PTW나 직원들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유저들을 위해 추가한 ‘도네이션’ 기능이었다.
민준역시 스트리밍 방송의 감초는 도네이션으로 날아오는 유저들의 방송 참여라고 생각했기에.
YAS를 스트리밍 하고 있던 직원은 눈앞에 뜬 후원 메시지를 보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후원 메시지를 보낸 유저에게 답했다.
“보안 사항에 걸리는 일부 정보와 제 개인 정보가 아니라면, 웬만한 질문엔 전부 답변 가능합니다.”
[지금 플레이하시는 영상을 보면 이미 출시 가능한 수준으로 게임이 완성된 것 같은데, 왜 직원들을 통한 스트리밍으로만 게임을 공개하는 겁니까?]
“어라? 흠. 좀 진지한 질문이네요.
하지만 이미 그에 대한 설명은 임원진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답변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PTW가 YAS의 오픈 베타를 실시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 이 세계가 한참 더 성장해야 하는 세계이기 때문이에요.”
-성장?-
-세계가 성장한다는 게 어떤 의미지?-
쏟아지는 무수한 갈고리의 세례를 보며, 그녀는 조용히 YAS만이 가진 독특한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YAS에 있는 몬스터나 유적들은 게임의 제작자인 저희들이 고의로 만들어서 넣은 것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AI에 의해 통제되는 NPC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각각의 유니크 몬스터는 자신의 성격과 취향에 맞는 서식지를 구축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죠.
지금도 제가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진 필드에서는 수많은 유니크 몬스터들이 자신만의 던전을 생성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던전들은, 각각의 유니크 몬스터의 취향과 성향을 반영한 형태로 구현되고 있죠.
같은 리치라도, ‘교활한 시체’ 크락서스는 자신의 던전에 언데드가 넘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던전을 생명력을 흡수하는 라이프 드레인 트랩으로 가득 채워놓죠.
반면에 ‘시체 조종자’ 님블러의 경우, 클래스는 교활한 시체와 같은 엘더 리치이지만 트랩보다는 조종할 수 있는 언데드를 선호합니다.
그녀가 던전을 구축하는 지역에서는, 무덤의 도굴 사건이 자주 일어나곤 하죠.
YAS의 세계에서, 유니크 몬스터들은 소멸되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유저의 손에 아이템을 떨어트리고 허구 차원으로 쫓겨날지언정, 언제든 다시 돌아와 자신의 야욕을 이룩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죠.
PTW에서는 각 지역의 몬스터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춰 합당한 형태의 던전을 제대로 구축하고 있는지, 그리고 허구 차원에서 다시 돌아온 이후에 얼마만큼의 속도로 자리를 잡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오오. 쩐다!-
-미친, 몬스터가 직접 던전을 생성한다고!?-
[그럼 유저가 몬스터를 사냥해서 던전이 클리어되면 어떻게 되나요?]
“앗! 후원 감사합니다! 우선 던전의 종류에 따라 다른데, 토벌 퀘스트 중에는 각 영지의 거점 확보를 위한 토벌 퀘스트도 존재합니다.
그 경우 성이나 요새 형태의 레어를 구축하는 몬스터를 토벌해달라고 요청하는데, 몬스터를 퇴치한 이후에는 그 성을 영지에 종속시켜 방어 시설이나 지역 거점으로 활용하죠.
사실, 미니 공성전 수준의 전투가 되기 때문에 토벌이 어려워서 그렇지, YAS안에서 성이나 요새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 몬스터가 지은 건물을 빼앗는 겁니다.
직접 지으면 자원과 시간이 정말 어마어마어마하게 많이 들거든요.”
-그럼 몬스터는 자원을 어디에서 얻나요?-
-그러게. 결국 몬스터는 허공에서 자원을 얻어서 쓰나?-
“허구 차원을 통제하는 신인 ‘혼돈’이 그들의 자원을 관리합니다.
기본적으로 YAS의 세계 안에 들어올 때, 혼돈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정 수준의 권능을 유니크 몬스터에게 부여하죠.
그렇다고 그게 시스템이 쓰는 자원이라고 마구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금세 짐바브웨같이 화폐 가치가 떨어질 테니까요.
혼돈이 쓸 수 있는 권능의 양은, 유저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원의 수치에 따라 결정되죠.
유저의 수가 늘어나고 레벨이 올라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원의 가치 합이 커질수록, 혼돈이 쓸 수 있는 권능의 양도 늘어납니다.
반면에 모종의 이유로 유저의 숫자가 줄어들면, 시스템은 혼돈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을 조절하죠.
그런 유동적인 자원 조절 시스템은, 백신전의 신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기본적으로 YAS 안의 신들은, 자신이 거느리는 신도들이 바치는 제물을 통해 신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유저가 늘어나면 요구되는 축복의 양도 자연스레 늘어나지만, 그만큼 소모량도 늘어나죠.
게이머의 시선으로 볼 때, 이 세계는 지극히 유동적인 세계입니다.
다른 게임에서처럼 랜덤 스폰되는 몬스터를 사냥하면 일정 확률로 아이템이 생성되는 구조가 아니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게임에 대해 빠져드는 것 같은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게이머들은 아름다운 YAS의 그래픽을 통해 그 세계가 가진 깊이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스트리밍을 진행하고 있는 다른 직원들의 방송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3명의 직원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피싱 마스터’ 최호성과 ‘가든 마스터’ 고창준, 그리고 ‘소드 마스터’ 칼 구스타프였다.
방송 장면 자체가 거의 판타지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는 칼 구스타프의 방송은 차지하더라도, 의외로 낚시와 가드닝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그들이 하는 플레이가 YAS라는 게임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플레이였기 때문이었다.
피싱 마스터 최호성은 거의 매일 직접 만든 낚시대를 가지고 YAS의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눈이 돌아갈 정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한가로이 낚시를 하는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고, 가든 마스터 고창준은 돌과 진흙으로 가득한 황무지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드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오늘은 뭐 하실 건가요?]
“박줄스님 1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오늘은 황무지에 가득한 돌을 좀 제거하려고 특별한 농기구를 가져왔는데요, 그걸로 돌을 고를 겁니다.”
고창준이 들고 있는 농기구는 ㄱ자로 꺾인 삽같이 생긴 기구였는데, 삽과 다른 점은 커다란 구멍이 사방에 뚫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힘차게 땅을 파내며 구멍을 통과하는 흙은 남겨 둔 채 자갈 크기 이상의 돌들만 한쪽으로 모아두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에서라면 굴착기를 동원해야 겨우 할 수 있을법한 행동이었지만, 고창준은 마치 나이프로 버터를 가르듯 어렵지 않게 땅을 고르고 부수는 중이었다.
[엄청 쉽게 하시네요?]
“앗! 또 만원 후원 감사합니다!
분명 지금 제가 하는 행동은 현실에서는 엄청나게 힘이 드는 행동이죠.
하지만 제가 주문 제작한 이 농기구에 부여된 근력증가 옵션도 있고, 제 농사 숙련도로 인한 근력 보너스도 있어서 실제로 들어가는 힘은 부드러운 흙을 호미로 긁어내는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게임의 매력이 그거죠.
캐릭터를 육성한 정도에 따라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행동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거요.”
그렇게 말하는 고창준의 표정엔, 진심으로 자신이 개발한 게임을 사랑하는 개발자의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저들의 질문은 YAS라는 게임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번 스트리밍은 그들에게 있어서 철저하게 보안 속에 숨겨져 있던 PTW라는 회사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기에, 수많은 팬은 평소부터 PTW에 대해 궁금했던 모든 질문을 일말의 주저 없이 마구 던져대고 있었다.
자신의 궁금증을 절대 무시하지 못하도록, 5만원에서 10만원에 달하는 도네이션을 마구 던져가면서.
그리고 그 중에서도 PTW 직원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도대체 PTW에 입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이었다.
“입사요? 글쎄요. 사실 저는 게임 제작자 출신이 아니라서, 제 케이스가 모두에게 적용되는지는 모르겠네요.
기본적으로 PTW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분야가 어떤 것이든 한 분야에서 전문가, 혹은 매니아라고 칭할 수 있는 애착의 수준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TAW에 적용되어 있던 풍부한 식생과 계절과 기후에 맞춰 적용된 오리지널 생태계에 매우 매료되었죠.
안에 있는 동물의 형태, 식습관, 계절에 따른 행동까지 전부 합리적인 논리에 따라 구현되어 있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TAW엔 가드닝 시스템이 없었지만, 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식생을 키우고 관리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장문의 글을 써서 PTW 홈페이지에 올렸죠.
TAW에 가드닝 컨텐츠를 업데이트해달라는 글을요.
그런 제 요구에 대해 PTW는 가드닝 시스템을 업데이트하는 대신, 제게 메일을 한 통 보냈습니다.
전 지금도 그 메일의 제목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읽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니까요.”
-뭐라 보냈길래?-
-오오 PTW의 입사 제안 메일!-
-끝내줬겠다!-
-뭐라고 보냈어요?-
고창준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는 유저들의 간절한 질문에 대답했다.
“당신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했습니다.
혹시 PTW에서 직접 가드닝 시스템을 설계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오오! 오오오!-
-와! 나 당장 홈피에 글 올리러 간다!-
-나도 PTW 직원 할 거야!-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적어서 올리신 건가요?]
이어지는 창준의 대답은, 당장 홈페이지에 자신의 관심사를 올려 입사 제의를 받아보겠다는 유저들의 흥분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제가 당시에 올린 글은, TAW내에 존재하는 모든 식생의 계절에 따른 변화와 열매의 용도, 그리고 생물의 분포에 따라 설계 가능한 독자적인 가드닝 시스템에 대한 제안이었습니다.
테마와 기후에 맞춰 만들 수 있는 200개의 정원 타입에 대한 소개를 포함한, A4용지 분량만 700페이지가 넘는 글이었죠.”
YAS 안에서도 독보적인 농사 실력으로 ‘가든 마스터’의 칭호를 얻은 남자.
고창준은 PTW내부에서도 인정받는 진정한 ‘찐’ 중의 한 사람이었다.
***
“구스타프 검술 3식 8형! 손목 조지기!”
칼 구스타프는 우렁찬 외침과 함께 들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반월형으로 회전시켜 오우거 형태 몬스터의 굵은 손목을 단박에 잘라내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화려한 연계를 펼치며 오우거를 고기조각처럼 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라 할 수 있었지만,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진지한 목소리로 외치는 구스타프의 기술명을 보며 배꼽을 붙잡고 웃고 있었다.
“손목 조지기! 발목 조지기! 모가지 조지기! 배떼지 가르기!”
-ㅋㅋㅋㅋㅋㅋ 누가 저분 스킬 이름 좀 어떻게 해줘라!-
-쓰는 검술은 커플링의 제왕 속 아라곤 같은 느낌인데 기술명은 무식 그 자체인 듯-
-이거 번역이 이상한 거야 아니면 원래 저 이름의 스킬인거야?-
-독일분이라 그런지 스킬 명이 너무 직관적이네.-
-사실 슈타이어 AUG도 독일어로 Armee Universale Gewehr.
말 그대로 ‘군용 다목적 소총’이란 직관적인 이름이긴 하지.
원래 독일 이름은 다 저런 듯.-
-엄밀히 말하면 검도도 비슷하잖아. 검도 할 때도 머리! 허리! 옆구리! 하지 않나?-
-거기에 조지기가 들어가니까 웃긴 거지.-
-동작은 아름다운데.-
마지막 유저의 채팅엔 모두가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구스타프의 검술은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였으니까.
간결하면서도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의 움직임은 둘째 치더라도,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신을 감싸는 푸른 빛은, 마치 양손으로 다루는 라이트세이버를 다루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만둬요! 칼! 이미 그 오우거의 HP는 제로라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종료 자세로 검세를 연결한 칼은 조용히 자신이 도륙내고 있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우거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털어 검에 묻는 피를 제거하고는 등에 있는 고리에 검을 걸어놓았다.
그것은 그가 사용하는 클레이모어의 두꺼운 검신 아래쪽에, 마치 그 용도로 사용하라고 만든 것 같은 동그란 형태의 구멍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칼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무뚝뚝한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날아온 10만 원짜리 도네이션에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10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그는 편하게 독일어로 대답했지만, 그의 무뚝뚝한 독일어는 방송을 보고 있는 유저들의 귀에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즉시 번역되어 전달되었다.
그는 조용히 몬스터가 있던 자리로 다가가 품을 뒤지더니, 혀를 차며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반으로 쪼개진 부적같이 생긴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오러 소드를 쓸 때는 전리품의 손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되도록 맨살이 있는 부위만 공격하는 게 좋죠.
거의 광선검 수준으로 저항 없이 상대를 썰 수 있기에, 오러 소드를 사용해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가급적 지양하는 게 좋습니다.”
-방금까지 신나게 썰던 사람이 무슨 말을···.-
“그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는 걸 보여주려고 한 겁니다.
보세요. 길드에 제출할 증표가 반 쪼가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본드로 붙여요.-
-ㅋㅋㅋㅋ 진짜 본드로 붙이면 되겠다. 근데 YAS 안에 본드가 있나?-
“접착제 개념의 재료는 있는데, 여기엔 못 쓸 겁니다.
증표가 파괴되면서 안에 있던 혼돈의 힘이 사라졌으니, 이건 그냥 잡동사니가 된 거죠.”
그는 들고 있던 부적 반쪽을 집어 던지더니, 말없이 길을 재촉했다.
현재 시청자 수 1위를 찍고 있는 그의 방송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말없이 몬스터를 추적하고, 화려한 검술로 몬스터를 도륙하고, 잠시 유저와 대화를 나눈 뒤, 다시 말없이 몬스터를 찾아 나서는 방송.
그건 스트리밍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빵점짜리 방송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은 그런 그의 무뚝뚝함을 잘 버텨내고 있었다.
마치 마스 미켈센을 연상하게 하는 아바타의 멋진 외모와 무뚝뚝함 속에 다정함이 감춰진 그의 목소리에 더해, 화려한 그의 검술이 묘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PTW 직원들이라면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그의 그런 플레이는 일종의 컨셉이었다.
강함을 추구하며 끝없이 몬스터를 사냥하는 고독한 검사.
그것이 그가 이번 스트리밍에서 잡은 컨셉이었기 때문에.
그런 그의 컨셉은 의외로 유저들에게 ‘멋진 중년 간지 검사’같은 느낌으로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아, 자랑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그냥 앉아서 하루 종일 YAS이야기만 하고 싶다.’
그러나 정작 ‘고독한 검술가’컨셉을 유지하고 있는 칼 구스타프는 속으로 자신이 잡은 컨셉에 대해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번 스트리밍 이벤트에 참여를 신청한 다른 PTW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유저들과의 소통이 간절한 직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한적한 공터를 찾아 자리를 잡고는, 어른 3명은 팔을 벌려 잡아야 할 만한 아름드리나무를 단번에 베어내었다.
그리고는 모닥불을 피워 그루터기를 의자 삼아 걸터앉고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힘들게 정한 컨셉을 깨지 않도록, 마치 혼잣말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YAS라는 게임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었다.
“기본적으로 YAS안에서의 모험이란 보급과의 싸움이다.
이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 헤쳐나가기엔 너무나 방대하고 넓으며, 인간은 끊임없이 먹어야 사는 생물이니까.
YAS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지.
현실에서의 육체가 배고픔이라는 이유와 맛이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먹는다면, YAS안에서의 육체는 축복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필요로 한다.”
구스타프는 옆구리에 찬 가방에서 육포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씹어 삼킨 후,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YAS안에서, 육체의 성장은 자신이 먹은 음식 안에 담긴 축복의 힘을 받아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YAS안에서는 맛은 느낄 수 없어도 항상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을 추구해야 하고, 자신이 성장시키려는 능력치에 걸맞은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가 방금 먹은 육포는 겉으로 보기엔 그냥 말린 고기조각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매우 사냥하기 힘든 고급 몬스터의 고기를 비싼 향신료로 양념하여 만든 고급 요리지.
YAS안에서의 검사는, 이처럼 항상 자신이 먹고 마시는 것을 통제하며, 끊임없이 자신이 먹을 것을 사냥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부산물을 팔아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 노력해야한다.
그 노력들과 자신의 수련이 더해져, 몸 안에 있는 마나의 통로가 원활하게 개척되고 전신의 근육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민첩하게 반응하게 되는 법이기에.”
-야 또 구스타프 떠벌이 모드 들어갔다.-
-쟤는 말 거의 안 하다가 가끔 저렇게 한번에 말함.-
-사실 말 많은 성격인 거 아님? ㅋㅋㅋㅋ-
-저 아바타에 저 목소리로 수다쟁이 캐릭터는 좀 아닌 듯.-
-좀 닥쳐봐. 지금 엄청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잖아.
나도 YAS 시작하면 저렇게 검술만 죽어라 팔 거라고.-
그때, 유저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지만 청각 능력의 보조를 받는 구스타프의 귀에는 매우 크게 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발소리.
구스타프는 발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는 대신, 발소리만 듣고서 상대의 정체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하기엔 상대가 등장하기 전에 상대를 보지도 않고 정체를 맞추는 자신의 모습이 꽤나 멋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칼 구스타프.
그의 정체는 유저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컨셉충 플레이어라 할 수 있었다.
‘어린 개체? 아니. 몬스터의 발걸음이라 보기엔 너무 규칙적이야.
이족보행에 가벼운 몸을 가진 여성이겠군.
금속성 장비의 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렇다고 마을 처녀 NPC가 돌아다닐 수 있는 지역은 아니니 다른 플레이어인가?
내 청각 보정이 잡을 수 있는 거리는 300미터 정도이니 3분 정도면 여기 도착하겠군.’
구스타프는 조용히 발걸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커지는 소리의 크기로, 상대와의 거리를 짐작하면서.
구스타프는 슬쩍 몸을 돌려 일부러 발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자연스레 몸을 틀었다.
그리고 머리 너머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를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거기부터는 내 검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더 다가오면 베겠다.”
‘크!!! X나 멋있어!’
속으로 멋지게 말한 자신을 칭찬하며, 구스타프는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리고 자신의 시야 구석에 올라오는 채팅창을 통해,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자신이야 1인칭 시점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중이지만, 민준이 개발한 YAS CAM은 그런 자신을 3인칭 시점으로 비추며 방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다가오는 존재를 볼 수 없어도 유저들은 볼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그가 본 채팅창의 반응은, 온갖 미사여구로 가득한 감탄사로 가득 차 있었다.
-오! 이쁘다!-
-엘프? 엘프!? 엘프 궁수 등장하나요?-
-YAS에도 엘프가 있나?-
-귀는 뾰족한데 말이지.-
아마도 여성 엘프의 모습을 한 플레이어가 접근해온 모양이지만, 채팅창의 격렬한 호응과는 반대로 구스타프는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며 조용히 등 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실제 장비를 다루는 난이도가 현실의 그것과 거의 흡사한 YAS의 특성 상, 활을 다루는 플레이어가 별로 없다는 점을 간과한 구스타프의 실수였다.
그러나 그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기도 전에,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손등에 구멍 나고 싶지 않으면 그 손 그대로 내려놓으세요.
당신 정도의 검사라면 제가 접근하는 소리 정도는 다 들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전혀 방비하지 않는다니.
역시 컨셉에 몸을 지배당한 남자답네요.”
여성의 협박과는 다르게, 구스타프는 웃으며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반가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침입자를 반겼다.
“서지수 양. 설마하니 망각의 숲에서 뵐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찾아온 침입자의 정체.
그것은 현재 시청률 1위인 구스타프의 방송에 출연함으로써, 자신의 시청률을 높이러 찾아온 궁수계열 1위 플레이어.
서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