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 욕망의 덩어리
PRD로 독자적인 판타지 세계관을 구축하면서, 상혁을 가장 고민하게 만든 것은 대체 ‘마나’의 컨트롤을 유저가 어떻게 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PRD란 장비는 가상현실에서의 물리적 피드백을 게이머의 신체에 전달하는 장비지, 게이머의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장비는 아니었기 때문에.
물론 보드게임 버전에서의 YAS에서 마나를 이용한 오러 소드를 시전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그냥 마나 운공에 대한 스킬 카드를 펼친다 선언하고, 그와 함께 사용할 검술 카드를 내놓으면 되는 것뿐이었기에.
그러나 PRD에서 그런 방식을 사용하면 몰입감이 크게 떨어지기에, 상혁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음성으로 선언하면 어떨까요?”
“흠···. 그러면 구현이야 간단하지만, ‘조작’한다는 느낌이 좀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게다가 마나의 운영은 필수적으로 수련이란 과정을 따라가야 하는데,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운공법의 이름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느낌을 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PRS에 있는 온도 센서를 활용하는 건 어떨까요?
마나가 흐르는 감각을, 온도를 통해서 피부에 전달하는 거죠.”
“출력방식으로는 괜찮은 방법이지만, 유저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이상 피부에 느껴지는 감각만으로 뭔가를 입력받는 건 무리일 겁니다.
말 그대로 현재 기술로는 유저가 왼팔에 감각을 집중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른팔에 감각을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다른 직업의 수련 방식을 참고해볼까요?
농업은 어떤 식으로 난이도가 올라가죠?”
“작물의 강도가 높아지거나 낮아지거나 합니다.
예를 들어 5등급 과실인 ‘무지갯빛 사과’의 경우 조금만 힘을 줘도 과실 자체가 뭉개지게 되어 있죠.
반대로 ‘강철 벼’의 경우는 철로 된 낫으로는 흠집도 가지 않을 정도로 줄기가 단단하고요.”
“석공은요?”
“저희도 비슷합니다. 가공하는 소재를 다루는 난이도가 변하거나, 아니면 숙련도가 낮으면 같은 힘을 가해도 소재가 깨져버리기도 하죠.
딱히 생산 계열의 숙련 시스템을 참고해도 별 도움은 안 될 겁니다.
저희는 그냥 다루는 물건에 가해지는 물리적 피드백을 조정해서 수련 난이도를 조절하니까요.”
“흠···.”
잠시 고민하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구스타프에게 몰렸다.
일단 오늘 회의가 소집된 이유 자체가, PTW내의 최고 검술 전문가인 구스타프의 요청 때문이었기 때문에.
그는 YAS가 시작된 이후로 검술 수련을 위해 도장까지 등록하며 최선을 다해 YAS의 검술 시스템을 개선한 검술의 장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온갖 아이디어를 내어 완성된 검술 시스템이 PRD 버전의 YAS에 탑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테스트 룸으로 뛰어갔고, 그 안에서 자신이 상상만으로 창작했던 자신만의 검술을 마음껏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를 매우 실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근육에 무리를 주는 특이한 움직임의 검술이, 제대로 시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근육에 무리를 주었기 때문에.
원래 그의 설계대로라면 마나라는 개념의 보조를 받아 시전하는 플레이어에게는 검이 가볍게 느껴지고 검을 맞대는 상대에게는 중검의 무게감이 그대로 전달되는 시스템이어야 했지만, ‘기’의 개념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기에 그의 상상력 가득한 아이디어는 100% 구현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역시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자의 한 사람이기에, 적절한 입력 장치의 존재 없이 마나라는 가공의 존재를 게임에서 구현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회의를 요청하면서까지 그 문제의 개선을 요구한 것은, 판타지와 중세 검술을 사랑하는 유저로써 제대로 된 마나의 운용법이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게임회사인 PTW의 본사이기도 했고.
‘PTW라면 어떻게든 해 줄 것이다.’라는 믿음은 게이머뿐만이 아닌 PTW의 직원들 사이에서도 강하게 자리 잡은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PTW조차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힘은 없는 것 같아서, 구스타프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회의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무리한 요청을 한 것 같네요.
현실에도 존재하지 않는 마나의 운공법과 수련법을 게임 안에서 실제로 만질 수 있게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다른 직원이 구스타프를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
“너무 실망하지는 마세요. 완벽하게 만족할 만한 방식은 아니더라도, 지금도 특정한 구현 모션을 따라서 오러 소드 스킬이 발동하게 하는 시스템은 탑재되어 있으니까요.”
사실 이런 일은 이전에도 몇 번 일어난 일이었다.
게임 안에서 최초로 5등급을 달성했던 한 요리사 직원이, 어떻게든 게임 안의 요리 맛을 느끼게 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다가 실망하며 돌아간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기에.
그것은 수많은 직원의 욕구가 실제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기술적인 문제로 직업의 몰입도가 떨어지는 몇몇 직업 종사자들에게 생기는 자연스러운 불만이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바로 포기하는 다른 개발자들과는 다르게, 상혁은 그 모든 요청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운공이라···.’
유저가 몸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 가상의 에너지를 컨트롤 하게 하는 방법.
그것은 말 그대로 유저의 뇌를 스캔하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구현할 수 없는 기술이었지만, 상혁은 어떻게든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구스타프 씨.”
“예.”
“잠시 검술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보죠.”
“어떤 이야기를 말입니까?”
“아무 이야기나요. 당신이 원하는 YAS 속 검술의 이미지는 어떤 느낌이며, 실제로 구현된 버전을 플레이했을 때의 느낌은 어떤 느낌이었는지.
구스타프씨가 PRD안에서 검을 휘두를 때 전신에서 느끼는 감각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기대하는 감각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요.”
구스타프는 상혁의 요청대로, 자신이 원하는 판타지 세계의 검술이란 어떤 느낌인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실전성과 허구성을 적절히 갖추고 있으면서, 현실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감각을 느끼고 싶다는 그의 순수한 욕망을.
검 하나로 절벽을 베어버릴 때의 짜릿한 손맛을 느끼고 싶다는 그의 판타지를.
한 분야에 빠진 대부분의 오타쿠가 그러하듯이, 그는 검술이란 존재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는 한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혁은 1시간이 넘는 그의 긴 검술 예찬을 진지하게 경청하며, 그가 바라는 바를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검의 수련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상혁은 그의 말을 끊을 수 있었다.
“잠깐만요.”
“예?”
“그 검을 수련할 때요.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하셨죠?”
“발놀림입니다. 중요한 건 검을 포함한 몸 전체의 무게 중심을 탄탄하게 잡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몸의 균형이 흔들리게 되니까요.”
“그럼 휘두르려는 몸의 자세에 따라 발돋움도 다 달라지겠네요?”
“그렇죠.”
“그렇다면 말이죠. 구스타프 씨. 만약 이런 식으로 마나의 운영법이 구현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검술의 특정 동작을 시전하기 위해 발을 특정 위치에 내미는 순간부터, 온몸에 물리적 피드백이 걸리는 거죠.
마치 전신을 실로 약하게 구속하는 것 같은 감각이 온몸을 감싸는 겁니다.”
“동작 보정 시스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그건 유저가 특정 행동을 할 때 올바른 자세를 취하지 않을 때 강제로 동작을 정자세로 교정시키기 위한 시스템이고, 이건 반대입니다.
이번엔 힘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유도하는 거죠.”
상혁이 말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유저가 구스타프식 검술 1장 ‘횡 가로 베기’를 펼친다 가정합시다.
당신에게 배운 자세를 취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첫발을 디디는 순간, 그 수련생은 그 ‘동작을 취하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몸이 그 자세를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요.
그건 해당 동작을 취하는데 필요한 마나의 통로가, 그 수련생의 몸에 제대로 뚫려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니 온몸에 힘을 줘서 그 반동에 저항하며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거죠.”
“그럼 반복 수련을 하면 할수록···.”
“몸에 걸리는 힘이 줄어들고 동작이 원활하게 연결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숙달하더라도, 자세를 취하는 순간 각 자세가 요구하는 마나의 소모량에 따라 다양한 세기의 힘이 몸을 구속하겠죠.
자세 보정 시스템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가장 취하기 편한 자세가 정자세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반대로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자세를 유저가 취하려고 노력해야 하죠.
그리고 그 자세를 끊임없이 반복 수련할수록, 유저는 몸에 익은 검술이 자연스럽게 나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거고요.”
상혁의 제안을 들은 구스타프의 눈이 커졌다.
일단 들은 대로 구현되기만 한다면, 괜찮은 느낌의 검술 시스템이 완성될 것 같아서.
상혁은 그런 구스타프의 표정을 보며, 거기에 다른 직원이 던진 아이디어 하나를 더해주었다.
“그래도 신비한 느낌은 좀 있어야 마나를 다루는 기분이 들 테니 발동을 정확히 하는 상태에 따라서 동작마다 지정된 형태로 히터 유닛이 작동하게 만들어보죠.
정확한 검세를 취했을 경우, 미리 지정된 루트를 따라 따뜻한 기운이 전신을 휘도는 느낌이 들게요.”
구스타프는 상상만으로도 전신이 짜릿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상혁에게 허리를 숙이며 격한 감사의 의사를 표했다.
“그거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 감사합니다!”
그의 행동은 함께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들이 서로에게 흔히 하는 감사의 표현은 아니었지만, 구스타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상혁은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가상의 검술을 재현할 아이디어를 건네준 ‘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게 구스타프는, 상혁과 회의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혁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구현된 PRD 버전의 검술 시스템을 시험할 수 있었고, 무려 2시간 연속으로 한숨도 쉬지 않으며 PRD 안에서 무거운 중 검을 마음껏 휘둘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온몸에 느껴지는 강한 반발력과 단전 부위에서 퍼져 나오는 뜨거운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 감각을 느끼면서.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상 검술의 감각 그 자체였다.
“어땠어요?”
마침내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은 그가 PRD에서 내려왔을 때, 두 시간 동안 묵묵히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상혁이 타올을 건네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구스타프는, 이제 힘을 줄 때마다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힘겹게 들며 상혁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최고입니다.”
그런 그의 미소를 보며, 상혁은 또 하나의 기술적 장벽을 효과적으로 해결했다는 깊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
“저기, 이 게임이 기본적으로는 대규모 전쟁을 모티브로 한 MMORPG라는 건 알고 계시죠?”
상혁이 눈앞의 풍경을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가든 마스터’ 고창준이 미소로 답했다.
“멋지죠?”
“이걸 전부 고창준 씨가 키운 겁니까?”
“나무하나부터 풀 하나까지요. 아, 물론 제 근력 수치로 옮길 수 없는 커다란 자연석 같은 건 퀘스트를 발주해서 모험가 플레이어에게 맡겼죠.
현실의 정원이라면 굴착기를 불렀겠지만, YAS 안의 모험가는 웬만한 굴착기보다 힘이 좋으니까요.”
“나무 종류가 많네요.”
“처음엔 적었습니다. 추가해달라는 대로 자꾸 추가되기에 욕심껏 요청했더니 이렇게 되었네요.”
상혁이 작은 보라색 꽃이 달려있는 화초를 손으로 만지자, 창준이 말했다.
“해방울 꽃입니다. 1년생 화초로 여름에 꽃을 피워 가을에 지지요.”
상혁은 나무에 달린, 일반 복숭아의 두 배 크기에 달하는 거대한 복숭아도 보았다.
“수박 복숭아입니다. 맛은 구현이 되어 있지 않지만, 당도가 높고 수박처럼 즙이 많죠.”
“지금 구현된 오리지널 화초와 작물의 수가 얼마나 되죠?”
“화초가 1226종에 과실수가 98종입니다.”
“엄청나네요.”
“전 요즘 출근해서 제 정원의 화초를 돌보는 재미로 삽니다.
매일 아침 연못의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화초와 과일나무에 물을 주고,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치유하죠.
이제는 집보다 PRD 안의 세계가 저에게 더 큰 행복을 줍니다.
다만···.”
“다만?”
“정원이 하루에 소비하는 축복의 양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혁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만한 정원이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저같이 가드닝에 취미가 있는 플레이어들은 본인이 벌고 있는 수익보다 정원의 유지비가 더 나가는 것에 불만을 품을 겁니다.
매일같이 나가는 제물의 양을 보면, 저조차도 한숨이 나올 정도니까요.”
“좋은 화초나 작물도 성당에 제물로 바칠 수 있지 않나요?
여기 있는 작물들이라면 축복량도 상당할 텐데.”
“그럼 정원이 망가지죠. 힘들게 가꾼 제 자식같은 화초들인데 그걸 어찌 축복이랑 맞바꿉니까?”
“창준 씨.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정 축복이 부족하다면, 본인만의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보세요.”
“사업이요?”
창준이 흥미를 보이자, 상혁이 물고기에게 먹이를 뿌리며 말했다.
“이 정도로 정원을 이쁘게 꾸미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정원도 이쁘게 가꾸실 수 있겠죠.
지금 모험가 플레이어 중에는 집을 지어놓고 제대로 꾸미고 있지 못한 모험가도 많습니다.
그들의 집을 꾸며주는 대가로, 모험에서 나오는 성물들이나 골드를 받으면 되지 않겠어요?”
“오, 그런 방법이!”
“그리고 어린 화초들을 분양해서 정원을 꾸미길 원하는 다른 유저들에게 판매하는 방법도 있고요.
게임이 지원하는 시스템은 단순히 화초를 배치하고 육성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걸 활용해서 어떤 가치를 창출할지는 유저인 창준 씨의 몫입니다.
길드에 홍보 전단을 붙이고, 모험가를 상대로 장사를 해보세요.
저라면 더럽고 축축한 던전에서 돌아올 때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에서 몸을 쉬게 하고 싶을 것 같네요.”
“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정원은 가꾸는 것도 재미있지만 키우는 것도 아주 재미있죠!
아무것도 없는 타인의 땅을 가지고 제가 키우고 싶은 화초를 마음껏 키워보는 것도 분명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기뻐하는 집 주인의 반응도 절 기쁘게 해줄 테고요.”
“그럼 전 다른 지역을 검토하러 가보겠습니다.”
상혁은 창준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관리자 권한을 사용해 YAS의 다른 지역으로 텔레포트 했다.
도시와 성.
왕궁과 상아탑.
던전과 모험가 길드.
상혁은 종일 계곡에 진을 치고 낚시만 하는 ‘피싱 마스터’ 최호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지금은 수도에서 가장 큰 검술 도장을 운영하는 ‘검성’ 구스타프를 만나 도장 운영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찾아온 상혁에게 YAS 안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즐거운지 이야기해 주었다.
상혁은 AI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변방 영지의 외곽에서 무덤을 파 시체를 모으며 ‘불사자의 밤’을 준비 중인 있는 ‘엘더 리치 카라스트라스’와 대화를 나누고, 혼돈의 숲 근방에서 주변 세력을 규합하여 인간과의 전쟁을 시작하려 하는 ‘깨진 도끼 알렉사스’ 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주어진 정보를 얼마나 잘 활용하여 전략을 세우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유저들을 공격하려 하고 있는지에 대해.
그것은 상혁이 접속한 계정이 YAS의 관리자 계정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기본적으로 몬스터로 구분되는 AI들은, 플레이어가 보이는 순간 바로 공격을 시작하기 때문에.
상혁은 자신을 공격하는 대신,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관리자를 바라보고 있는 오크 군주에게 말을 걸었다.
“공격은 언제 진행하지?”
[우리의 아이들이 도끼를 들 수 있게 되고, 사냥을 멈추어도 충분할 정도의 식량이 모이면 공격할 것이다.]
“식량은 어떻게 모으고 있는데?”
[이미 사냥조의 숫자를 두 배로 늘렸다.
근방엔 사냥할 동물이 모두 사라져 멀리까지 원정을 나서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충돌은 없었나?”
[보고가 있었지만 전부 우리의 승리였다.]
“좋아. 계속 열심히 노력하도록.”
상혁은 오크의 공격 대상인 영지로 이동해 모험가 길드에 들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는 모험가를 보며 물었다.
“저기···.”
“아, 예?”
“여긴 왜 이리 바쁘죠?”
“곧 전쟁이 있을 테니까요. 최근, 숲 오크의 사냥조가 평소에 보이지 않던 곳까지 출몰하는 빈도가 늘어났습니다.
영지 외곽의 몇몇 사냥꾼 쉼터가 공격당했고요.
영주는 근방의 모험가들에게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소집령을 내렸고, 길드에서는 숲 오크 본대의 위치 파악을 위한 퀘스트를 발주했습니다.
보상이 꽤 쏠쏠한 편이라서, 외지의 모험가들이 엄청나게 몰려있는 상태죠.
덕분에 신전과 여관도 오랜만에 호황이고요.”
“감사합니다.”
상혁은 길드 접수원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저기···.”
“오! 마스터 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절 그 이름으로 부르는 거 보니 PTW 직원이시군요.”
“네! 원화 팀 소속 허윤희입니다!”
“근데 길드 접수원 자리에 서서 뭐 하세요?”
“뭘 하긴요. 제가 길드 접수원인데요?”
그녀의 말에 상혁이 놀라며 물었다.
“플레이어가?”
“어라? 모르셨어요? 해당 지역의 길드 마스터와 적절하게 관계만 잘 쌓으면 NPC의 직업도 접수 가능해요.
물론 일을 못 하면 바로 잘리지만요.”
상혁은 잠시 자신이 그런 기능을 업데이트했었는지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런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개발사가 업데이트하지 않았는데 유저가 이용하고 있는 기능.
그런 것이 있다면 그 원인은 단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직업 관리자 AI가 새 직업을 승인했구나.’
상혁은 가장 먼저 AI가 만들어낸 새 직업의 정상 동작 여부에 관해 질문했다.
“딱히 불편한 건 없어요? NPC는 할 수 있는데, 윤희 씨는 못 하는 일이라던가.”
“아뇨. 그럴 것 같았으면 이 직업에 지원하지도 않았겠죠.
매일 매일의 퀘스트 진행 사항과 보상 지급, 그리고 영지에서의 명령과 마을에 들어온 모험가 목록이 각각의 장부에 등록되게 되어 있어요.
제가 하는 일은, 모험가 카드에 등록된 모험가의 등급과 현재 장비 수준을 보고 적당한 퀘스트를 추천하는 거고요.”
“이곳의 길드 마스터는 NPC죠?”
“네. 엄청 잘생긴 꽃중년 아저씨입니다.”
“NPC 밑에서 일하는 게 힘들지는 않아요?”
“사람하고 똑같아서 구분이 안 되는데요.
사실 가끔 이야기하다 보면 나보다 NPC가 더 말을 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요.”
“그래서, 지금 여기는 전쟁 준비 중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죠?”
“최근 있었던 정례 보고에서 오크의 출현 지역이 크게 늘었다는 이야기가 오갔어요.
그리고 3등급 모험자 파티가 전멸하는 일이 두 번 있었고요.
원래는 안전한 수준의 임무였는데, 예상치 못하게 숲 오크를 만나 전멸하게 되었죠.
성당에서 부활한 모험가들은 숲 오크들의 장비가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고 증언했고, 길드 마스터는 즉시 지도와 자료를 들고 영주 성으로 이동하셨습니다.
돌아오고 나서는 습격이 임박했다고 말씀하셨고요.”
상혁은 자신에게 설명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NPC가 사람처럼 말하는 것보다, 사람이 NPC처럼 말하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투가 완전히 이 세계 주민이시네요.”
“당연하죠. 전 PTW 원화팀 소속 직원 허윤희이기 이전에 허스필드 영지 소속 길드 관리자 에델린이니까요.
이 영지의 모든 퀘스트의 성공 여부는 제 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죠.”
“조금 전엔 3등급 모험가 파티 두 개가 전멸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원래 그 지역엔 숲 오크가 나타나면 안 되는 지역이었어요.
그건 제가 플레이어여서가 아니라, NPC가 퀘스트 발주를 넣었어도 똑같이 발생할 사고였다고요.”
살짝 억울한 듯 따지는 그녀를 보며 상혁은 씩 웃으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좋습니다. 하나만 더 묻죠. 길드 관리자로서 살아가는 YAS에서의 삶은, 충분히 즐겁습니까?”
상혁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잠시 자신이 서 있는 길드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낡은 나무 상자를 옮기고 있는 수염난 난쟁이.
한쪽에서 검을 갈며 신나게 지난번의 모험담에 대해 떠들고 있는 검사의 모습.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활을 닦으며 안광을 빛내고 있는 엘프의 모습.
마치 판타지 세계 그 자체를 표현한 듯한, 한 폭의 일러스트 같은 건물 속 풍경.
그것은 그녀가 상혁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풍경이었다.
“네!”
그녀의 만족에 가득한 대답을 들은 상혁은, 조용히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상담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감사합니다. 윤희, 아니, 에델린 양.”
그리고는 PRD와의 접속을 종료하고 머리에 쓴 딥 다이버를 벗었다.
거기엔, 민준을 비롯한 PTW 임원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상혁이 진행한 최종 검수는, YAS라는 게임의 존재를 대중에 공개할지 결정하는 최종 확인 과정이었기 때문에.
민준은 상혁에게 타올을 건네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땠어?”
민준의 질문을 받은 상혁은 타올로 대충 머리와 목에 있는 땀을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타올을 목에 걸친 채 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픈은 힘들겠다. AI에게 게임의 관리자 권한을 부여한 건 게임에 개발자조차 예측하지 못한 변수를 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긴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으니까.
솔직히 까놓고 말해 매트릭스의 스미스처럼 개발사에서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나오면 X되는 거잖아.
아직은 좀 더 검증이 필요할 것 같아.
굴리고, 다듬으면서 좀 더 추가해야지.”
“AI는 어땠는데?”
“신기하더라.”
민준이 YAS에 적용한 AI의 대화 로직은, 커뮤니케이션 엔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적합한 대사를 뽑아서 전달하는 것이 아닌, 마치 NPC 마다 다른 성향의 대화를 만들어서 하는 느낌.
그것은 NPC임에도 불구하고 대화 속에서 ‘성격’이 느껴지는 인상적인 방식의 AI 기술이었다.
“뭐, 살짝 트릭을 쓰긴 했는데, 나쁜 느낌은 아닐 거야.”
“나쁜 느낌? 오히려 소름이 돋더라.
문제는 그거지. NPC가 너무 인간답게 느껴지면, 반대로 NPC의 인권 문제가 부각 될 수도 있어.
그러니 게임을 편하게 굴리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제약을 두는 편이 낫지.
지금은 성능이 너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
“그럼 좀 낮출까?”
민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상혁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 가자. 적어도 내가 본 직원들은 어느 한명 빠짐없이 NPC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데서 재미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굳이 그 행복을 어색함으로 뺏을 필요는 없겠지.
NPC의 인권 문제는 뭐 시비 거는 세력이 있으면 그때 적당히 생각해보자고.”
“그렇군. 그럼 당분간은 지금처럼 비공개로 계속 가는 건가?”
“아니, 공개는 할 거야. 단지 유저가 참여하는 오픈 베타만 좀 늦추자는 거지.
게임 자체는 지금 공개해도 손색이 없어.
난 이번 4차 NE 컨벤션에서, 우리가 어떤 게임을 개발 중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게임 내용만 공개하고 플레이는 안 시켜준다······. 그럼 기대감만 무지하게 커질 텐데?”
“그 정도가 딱 좋아. 유저들의 가슴 속에서 어떤 식으로 망상이 커지는지, 그리고 어떤 꿈을 꾸고 어떤 것을 해주길 원하는지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상혁이 말했다.
“현재의 YAS에는 PTW 전 직원들의 꿈과 망상이 구현되어 있지.
그걸 보여주고, 유저들이 원하는 꿈과 욕망은 어떤 것인지, 유저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피드백은, ‘플레이해보니 YAS가 끝내준다’라는 칭찬이 아니라, ‘YAS라는 게임이 나온다면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욕망의 덩어리니까.”
칭찬보다는 욕망을 듣고 싶다는 상혁의 결정.
그것이 4차 NE 컨벤션의 피날레에서 공개할 ‘마지막 카드’로, 상혁이 YAS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자 상혁의 말을 들은 민준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하지도 못할 게임 공개해서 유저 약 올린다고 욕먹는 거 아니야?
아마도 대부분의 유저들은, 트레일러를 보는 순간 바로 플레이 하고 싶어서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 같은데?”
“트레일러만 공개하는 게 아니야. 게임 소개 페이지도 만들어서 현재까지 구현되어있는 모든 기능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거야.
그리고 앞으로 구현하려는 기능에 대해서도 설명할거고.”
“그럼 더 불타지 않을까?”
“불타면 좋지. 우리가 만드는 게임 YAS는, 잿더미 속에서 날아오르는 불사조처럼 유저들이 피운 뜨거운 불판 위에서 날아오르게 될 테니까.
우린 거기에 열심히 부채질만 하면 되는 거고.”
상혁의 그런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2주 뒤 공개된 YAS의 게임 컨셉이, 판타지 라이프를 꿈꾸는 모든 유저들의 심장을 터질 듯이 두근거리게 만들었기에.
그것은 단지 게임을 플레이하는 최소 조건으로 3천만 원에 달하는 PRD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PRD 전용 타이틀’이란 디메리트마져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불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