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370화 (371/485)

370. 스케일에 대한 문제

상혁이 구현하고자 하는 게임의 스케일이 워낙 방대하고 컸기에, 회의는 스컹크 웍스 멤버들이 전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일주일이나 진행되었다.

단순히 개발 과정에서 그들이 구축해야 하는 프로그램의 사양만을 확정 짓는 회의에만 그 정도 시간이 걸릴 정도로, 새 게임의 스케일이 기존에 존재하던 게임과는 격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장시간의 회의와 집단 지성의 힘을 빌려 수백 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체크리스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는, 거대한 체크리스트를.

그러나 아무리 엄두가 나지 않는 막연한 일이라도, 각 업무의 인과 관계를 잘 살펴보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마치 수백 층짜리 빌딩을 건설하기 위한 첫 단계가, 삽으로 바닥에 첫 삽을 뜨는 것인 것처럼.

민준은 그 리스트를 구현에 필요한 순서에 따라 레벨별로 정리해놓았다.

1레벨엔 다른 모든 기능이 기반이 되는 기초적인 기능이 되는 모듈에 관한 업무들로, 유저에게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지만 다른 프로그램들이 돌아가게 하는 기반이 되는 운영 체제 쪽의 작업에 해당하는 업무들이 배치되었다.

2레벨의 업무 프로세스엔 1레벨에서 개발한 운영 체제를 바탕으로 그 위에서 돌아가는 여러 기초 법칙을 통제하는 프로그램들에 대한 업무들이 배치되었다.

3레벨의 업무 프로세스엔 2레벨에서 구축된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실제 유저들이 만지고 활동할 수 있는 게임 속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배치되었고.

4레벨부터는 3레벨에서 구현된 세계를 직접 통제하고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배치되었다.

5레벨에는 4레벨에서 구현된 권한을 사용하여 게임 내부에서 각각에게 할당된 목표에 따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독자적 AI프로그램들에 대한 개발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 나오는 신적 존재가 혼돈 속에서 질서를 부여하며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과 비슷한 느낌의 작업이었다.

빛과 어둠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바다와 땅, 식물을 만든 후에야 해와 달과 별을 만든 것처럼.

민준은 각 모듈이 활동하는 시스템의 깊이를 기준으로 수만 가지에 달하는 작업을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상혁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거 레벨별로 색 분리해서 포스트잇으로 인쇄해줘.”

기본적으로 보드와 포스트잇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사용하는 PTW답게, PTW에는 원하는 색의 포스트잇에 필요한 내용을 인쇄할 수 있는 포스트잇 전용 인쇄 장비가 이곳저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상혁이 그것을 이용해 포스트잇을 가져오자, 민준은 스컹크 웍스 멤버들과 함께 회의실 벽면에 그것들을 하나둘씩 붙이기 시작했다.

각 색깔별로, 구획을 나눠서.

그리고는 1레벨에 해당하는 적색 포스트잇을 모두 붙인 뒤 스컹크웍스 멤버들에게 말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 중에는 기획팀과 협의하에 상세한 기획을 하고 구현해야 하는 작업들이 있고, 그냥 여러분들의 능력으로 알아서 구현해도 되는 작업들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어느 한 사람도 그 정도를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은 없으니, 본인이 적당히 살펴보고 작업하고 싶은 포스트잇을 떼서 가져가서 작업하세요.

기획 쪽과 협의가 필요한 부분은, 여기 상혁에게 다이렉트로 연락해서 뜯어내시고.”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가 벽에 붙은 포스트잇을 하나둘씩 뜯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민준은 상혁에게 이야기했다.

“워낙 큰 작업이기도 하고, 구현할 것도 많으니 스컹크 웍스는 바로 작업을 시작할 거야.

여기엔 게임의 기획적인 부분과는 관련 없는 작업도 많으니까 그걸 먼저 처리할 거고.

그동안, 기획팀에서도 해줄 게 있는데.”

그러자 상혁이 가슴을 치며 민준에게 말했다.

“뭐든 말만 해. 원하는 건 뭐든지 달라는 대로 다 줄 테니까.”

“우선 나와 스컹크 웍스가 해줄 수 있는 건, 네 이 말도 안 되는 기획을 ‘어떻게든 돌아가게’ 해주는 거야.

기획에서 설계한 의도대로, 각각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거지.

그게 정상적으로 굴러가느냐는, 기획의 영역이고.

네 모든 아이디어가 정상적으로 동작한다고 해도, 얽혀있는 요소가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유기적이라 그게 정상적으로 세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거든.

게다가 지금은 그 연결 상태에서 어느 부분이 빠져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상태고.”

“뭐, 그렇지.”

“그러니 넌 이게 실제로 굴러가는지 테스트를 좀 해줘야겠다.”

“테스트를? 프로그램 없이?”

상혁은 당황하며 민준에게 물었다.

지금까지의 PTW의 개발 방식은, 어딘가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프로그래머가 실제로 구현하면, 그것을 끊임없이 테스트하며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개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준은, 이번엔 조금 다른 방식을 써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야 이 정도 스케일로 복잡하게 얽힌 프로그램을 만들려 시도한 적이 없었지.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좀 달라.

그렇게 땜질하면서 간단하게 수정하는 방식으로 고칠 수 없는 경우가 생길 것 같거든.

예전에 MYOM 만들 때 완성했던 마나 엔진 기억나?

그때 만들어진 마나 엔진은 기본적으로 만들려는 효과를 하나하나 조립해서 붙여넣은 게 아니라, 그 모든 목적을 만족하는 통합 공식을 기반으로 해서 완성한 프로그램이었어.

프로그램이 완성된 이후엔, 심지어 코드를 짠 나조차도 핵심 법칙에 접근할 수 없는 괴상한 물건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MYOM에서 기존의 마법 법칙을 무시하는 특수 주문들은 아예 그 주문을 위한 별개의 모듈을 추가해서 구현했었지.

이번 것도 비슷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마도 스컹크 웍스에서 이 게임의 핵심 코드를 구현하고 나면, 거기에 손을 대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다는 예감이.”

“그러니까 완성된 코드를 다 뜯어고쳐야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구멍을 때워달라는 거네?”

상혁의 말을 들은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민준을 향해 말했다.

“좋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볼게.”

“할 수 있겠어?”

“뭐, 사실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건, 그 어떤 게임 엔진보다 범용성과 응용력이 높은 물건이니까.

인간의 상상력은 버그도 없고 코드 수정도 필요하지 않지.”

“언젠가 리얼 엔진도 그렇게 되게 될 거야.

인간의 상상력만 가지고,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어떤 게임도 구현할 수 있게 하는 게 리얼 엔진이 추구하는 목표니까.”

“죽기 전엔 가능했으면 좋겠네.”

상혁은 웃으며 민준에게 인사한 뒤, 아직도 벽에 들러붙어 서로 소리치고 있는 스컹크 웍스 멤버들을 뒤로 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런 상혁의 등 뒤에서는, 스컹크 웍스의 핵심 멤버인 존 카믹과 존 스캇이 포스트잇 하나를 붙잡고 서로 싸우는 중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 작업은 내가 할 거라고!”

“내가 먼저 봤으니까 빨리 놓으세요!”

“잡은 건 내가 먼저라고!”

“그때의 난 이걸 잡을지 말지 고민 중이었어요!

당신이 이걸 가지고 가려고 하는 건, 오로지 제가 이걸 흥미롭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상대보다 어려워 보이는 위업을 달성하는 것.’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민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 포스트잇을 주시하는 것을 보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일제히 민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뭡니까. 뭐 보고 계세요?”

“이거, 제가 가져갑니다. 30분 전부터 찜해둔 거였어요.”

“난 리스트 작성 전부터 찜해뒀는데.”

“난 이 기획을 듣는 순간부터 이 작업이 필요할 거라고 예상했다고!”

민준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조용히 웃더니 옆으로 이동해 다른 포스트잇으로 시선을 옮겼다.

탑 클래스의 프로그래머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 불러올 결과가, 프로젝트에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올지를 기대하면서.

***

“이건 한 2050년쯤에나 시도할 법한 아이디어인데요?”

회의실을 나선 상혁이 가장 먼저 호출한 것은, PTW내의 전체 기획자 중에 세계관 구축에 가장 재능을 보이는 마스터 클래스 기획자인 서지수였다.

그리고 지수는, 상혁이 건네준 400페이지 분량의 아이디어 모음집을 보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중이었다.

괜찮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녀도 제안서 레벨의 아이디어만 가지고 구현 난이도를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의 기획자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에.

PTW의 마스터 클래스 기획자란 자리는, 단순히 설정만 잘 짜는 것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지수 네가 봐도 안 되겠냐?”

“스케일이 너무 터무니없이 크니까요.

이건 한 개인이 상상으로 시뮬레이트 할 수 있는 범위를 가볍게 벗어나 있어요.”

“민준과 스컹크 웍스 멤버들은 어떻게든 돌아가게는 해 주겠다고 하던데.”

“어떻게든 돌아가는 것과 그게 잘 굴러가는 것은 완전히 별개잖아요.

저도 농구공과 골대가 있다면 3점 슛을 던질 수는 있어요.

골대에 안 들어가서 문제지.”

민준의 말을 듣지 않고도 민준과 완전히 똑같이 말하는 지수를 보며, 상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안서에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수는 한참의 시간을 더 검토한 뒤 쇼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천장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천장을 바라본 채로 상혁에게 말했다.

“만약에.”

마치 ‘그런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면’이라고 상상이라도 하는듯한,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만약 이런 게임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전 아마 게임 개발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하루 종일 이 게임에서 제2의 인생을 구축하는 데 모든 시간을 다 썼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이 체계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게 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네요.”

상혁은 커피를 내려 지수에게 건넨 뒤, 지수의 반대편에 앉으며 말했다.

“좋아. 지적은 발전의 원동력이니까.

나도 지금 이게 막연한 아이디어 수준이라는 걸 잘 알고 있고.

그러니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걱정되는 거야?”

“단 하나의 핵심 아이디어를 게임으로 구현하는데도 수십 페이지가 넘는 기획이 필요하죠.

근데 이건 아이디어만 400페이지짜리 기획이잖아요. 기획의 스케일이 얼마나 커져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아요.

세계가 돌아가는 전체적인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아니라, 세계의 디테일만 눈에 보이는 느낌이랄까?”

상혁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지수를 재촉했다.

“계속해봐.”

그러자 지수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조금 전의 막연한 말투와는 다르게, 굉장한 집중력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우선, 각각의 아이디어들이 가지는 매력은 굉장하다고 생각해요.

그 아이디어 하나하나만 가지고 별개의 게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요.

하지만 문제는 이 게임의 구현을 위해서는 그 모든 아이디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동작해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한쪽 전장에서 벌어진 전쟁의 승패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반대쪽 지역의 신앙 활동에 문제를 주는 식으로요.

나비 효과라는 게 아마도 그렇게 동작하겠지 라는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처럼요.

물론 개발 이후에 테스트를 통해서 문제를 발견하고, 끊임없는 수정을 통해서 세계를 완성할 수는 있을 거예요.

하지만 민준 오빠의 말처럼 프로그램이 완성되기 전에 기획된 설계 전체가 정상적으로 굴러가는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요.

이건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의 범위를 아득하게 초월하는 기획이니까.”

“하지만 민준은 이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민준이 그렇게 말하면 그건 실제로 정말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닭과 달걀의 딜레마 같은 거네요. 전체적인 세계의 구축을 위해서는 시스템 설계의 검증이 필요하고, 시스템 설계의 검증을 하려면 먼저 세계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되네.”

“그럼 이건 못하겠네요. 세상의 어떤 기획자도, 심지어 상혁 오빠라도 이 정도 스케일의 게임 전체를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구현할 순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말 그대로 상상만 가능한 게임이라는 거죠.

구현이 가능한 물건이 아니라.

그냥 평소에 하던 것처럼 작은 부분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요?

먼저 1차로 기본 틀을 구현하면, 거기서 돌아가는 것들을 테스트하고, 그걸 바탕으로 추가적인 것들을 구현하는 방식으로요.”

그러나 상혁은 그런 지수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상혁은 자신이 아는 민준이라면, 필요하지 않으면 절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준은 아마도 평소의 방식대로 구현하면 이 게임이 어느 정도의 스케일에 올라갔을 때 핵심 코드가 붕괴할 수준의 수정이 요구될 거라고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거야.

하지만 지수 네 말대로 그걸 파악하려면 이 기획을 실제로 굴려야 한다는 게 문제고.

그래서 나에게 그 구멍을 먼저 찾아내라고 요청한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 구멍이란 건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해 봐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에 존재할 테니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수십 가지 생각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머릿속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시뮬레이트하는 동안, 다른 어떤 아이디어에 그 결과가 반영될지 동시에 사고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렇다고 수십 명이 동시에 같은 사고를 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이건 마치 한 명의 던전 마스터가 동시에 수천 개의 세션을 진행하면서 그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다른 플레이에 적용하려는 시도랑 같은 거라고요.”

지수의 말을 들은 상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 던전 마스터의 존재였기 때문에.

수천 개의 세션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플레이를 전부 파악해, 각각의 플레이로 인한 결과를 유기적으로 파악하여 세계관과 규칙의 구멍을 찾아낼 방법.

지금 상혁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수천 개의 플레이를 동시에 파악해서 진행하는 던전 마스터라···.”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실 한쪽에 놓인 진열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놓인 판타지 스타일의 엄지손가락만 한 미니 피규어를 집어 들고는 가만히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 피규어의 안에, 정답이 들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자 지수는 가만히 서서 피규어를 만지작거리는 상혁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응?”

“지금 좀 변태 같아요.”

“어?”

상혁은 자신의 손에 놓인 피규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당황하며 급하게 피규어를 진열장으로 돌려놓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상혁이 아무 생각 없이 주물럭거리고 있던 피규어가 아름다운 엘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던 피규어였기 때문에.

“아, 진짜 아무 생각 없었다고.”

“아뇨, 사실 오빠가 너무 깊이 생각에 빠진 것 같아서 태클을 걸어보고 싶었어요.

그냥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우연히 그게 여 엘프의 피규어였던 거죠?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문지르고 문질러 주던 부위가 하필 옆에서 볼 때 오해하기 좋은 부위였고요.

뭐, 믿어드릴게요.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자신을 향해 싱글대는 지수를 보며, 상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뭔가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동작을 멈췄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게 그런 게 된다고?”

그러자 지수가 상혁을 보며 말했다.

“어? 뭐. 그렇죠. 본인이 야한 의도로 만진 게 아니라는데, 믿어야죠.”

“아니, 그런 의미로 물은 게 아니라, 내 말은.

실제로 내가 야한 생각으로 조금 전의 피규어를 만지작거렸을 수도 있잖아.”

“의도가 어쨌든, 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전 믿어야죠.

제가 오빠 머릿속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야한 의도로 이 피규어를 주물럭거렸다고 지수 너에게 말한다면 어떻게 되는데?”

“그럼 오빠가 조금 변태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나 보다 생각하겠죠.”

“그렇겠지. 실제로 대화라는 건, 상대의 생각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니까.”

“그···렇겠죠?”

슬슬 상혁이 생각하는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어진 지수가 상혁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게 왜요?”

“아니, 갑자기 든 생각인데. 사실 D&D라는 게임 자체가 대화로 이루어진 게임이잖아?

우리는 룰 북에 적혀있는 가상의 규칙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규칙인 것처럼 행동하는 거고.

그리고 마스터는, 때때로 유저의 돌발 행동에 대해 없는 규칙을 만들기도 하면서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지.”

“그렇죠.

그게 D&D의 매력이잖아요.

변신 능력을 가진 곰이 인간으로 변신해서 사람 흉내를 내도, 주사위 굴림만 성공하면 다 허용되는 게 D&D의 세계니까요.”

“그럼 이것도 비슷한 방법으로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상혁의 말을 들은 지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상혁에게 말했다.

“좀 더 말해주세요.”

“그러니까. 지금 이 아이디어들을 일종의 게임 규칙으로 만들어서, 직원들과 함께 플레이를 해보는 거지.

각 직원들에게 역할을 따로 부여하는 거야.

예를 들어, 나는 게임의 기초가 되는 기본 규칙만을 다루는 관리자가 되는 거야.

지수 너는 생태계의 변화를 관장하는 관리자가 되는 거고.

그리고 그 아래로, 각 지역을 관장하는 군주들과 각 직업을 관장하는 신의 역할을 하는 직원들을 배치하고, 나머지 직원들은 플레이어의 역할을 하는 거지.

아이템이나 축복은 카드의 형태로 거래를 통해 지급되는 거고.

예를 들어 어제 한 사냥꾼 플레이어가 덫을 설치했다면, 그 사냥꾼 플레이어는 생태계를 관장하는 너에게 덫 카드를 넘기고 내일 찾으러 오는 거지.

넌 그 사냥꾼에게 덫을 설치한 위치와 형태, 크기를 물어본 뒤 네가 가진 규칙에 따라서 사냥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거고.

다음날 사냥꾼이 찾아오면, 네가 관장하는 규칙에 따라서 토끼 카드나 사슴카드를 건네주는 거야.

만약 누군가가 네 룰 북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려 찾아오면, 넌 거기 맞는 규칙을 새로 작성해서 네 룰 북에 추가하는 거지.

말하자면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초거대 규모의 다중 플레이용 보드게임을 제작해서 실제로 굴려보는 게 되겠지.

하루에 할 수 있는 행동 자체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행동력 카드의 제한을 받을 테니, 결국 직원 대부분은 매일 아침 본인이 하고 싶은 행동과 한 행동의 결과를 바로 확인하게 될 거야.

그리고 매일 오후 ‘관리자들’이 모여서 새 규칙과 그날의 변화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는 거고.”

상혁의 설명을 들은 지수는 강한 흥미를 느꼈다.

현실적이고, 유동적이며,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같았기 때문에.

지수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상혁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실제 플레이어들이 게임 안에서 시도할 행동들과 우리에게 필요한 구멍이 뭔지 파악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

“어찌 보면 마스터 집단이 운영하는 거대한 D&D 세션같이 운영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그리고 판타지 풋볼과 비슷한 같은 느낌도 들고요.”

지수가 언급한 판타지 풋볼이란, 실제 존재하는 선수들의 로스터를 바탕으로 특정 그룹의 유저들이 자신들만의 리그를 구성하여 노는 일종의 가상 스포츠였다.

매 시즌마다 좋아하는 팀을 골라 구단주의 역할을 맡고, 서로 트레이드를 하며 이상적인 로스터를 구성하여 가상의 경기를 진행하는 게임.

그것은 그래픽도 없이 모든 것이 상상과 숫자로 이루어진 게임이었지만, 막대한 유저 층을 보유할 만큼 매력적인 게임이기도 했다.

그 판타지 풋볼에서, 참가자들은 서로 대화를 통해 본인이 보유한 선수들을 거래하고, 그 결과를 관리자에게 통보했다.

그러면 관리자는 실제로 벌어지는 경기의 결과를 참고하여 각 팀의 성적을 계산한 후, 각 참가자에게 그 결과를 알려주는 역할을 맡는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팀 목록과 경기 결과를 계산하는 관리자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다.

지수는 유저의 모든 행동에 관리자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판타지 풋볼을 떠올렸다.

그리고 심지어 그 관리자조차, 실제 경기의 데이터라는 상위 규칙을 참고해야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 게임에서도, 하위 관리자가 다른 영역에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상위 관리자의 허가를 받아야 할 테니까.

그것은 오로지 구현된 기능만을 이용할 수 있는 PC 게임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수와 상혁은 즉각 새 게임의 아이디어를 보드게임 형태로 제작하기 위한 회의에 들어갔다.

각각의 행동을 허가받기 위한 권한을 누구에게 줄 것이며, 각각의 행동을 허가하는 데 필요한 규칙은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것은 처음엔 수많은 메모장에 적힌 텍스트가 적힌 카드 게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 프로토타입의 형태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중간에 종잇조각을 잔뜩 쌓아놓고 열정적으로 토론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서연이, 두 사람의 작업에 흥미를 느끼고 프로젝트에 참가했기 때문에.

각 카드에 서연이 그린 매력적인 스케치가 추가되는 과정에서, 세 사람은 이 보드게임에 대한 묘한 애착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 상혁은 아예 TCG 형태의 제대로된 카드 게임을 제작하기로 결심하고 카드 전용 인쇄기를 구매하여 PTW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카드와 룰북을 뽑아대기 시작했다.

각 축복이나 아이템의 등급에 따라, 홀로그램까지 추가된 카드를.

그것은 이미 내부 테스트라는 초기 목적을 완전히 망각한, 바로 팔아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퀄리티의 멋진 보드게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두꺼운 고급 종이 재질의 패키지 박스까지 제작한 상혁에게, 그 보드게임의 이름을 결정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멋진 일러스트가 새겨질 새 게임의 박스엔, 새 게임에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 필요할 테니까.

포토샵으로 패키지 일러스트를 띄워놓은 서연은 상혁이 게임의 제목을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상혁은 마침내, ‘테스트 월드’라는 임시 제목으로 개발된 보드 게임의 새 이름을 불러주었다.

“당신의 모험 이야기. 새 게임의 이름은 당신의 모험 이야기로 하겠어.”

“영어로는 Your Adventure Story. YAS(와이.에이.에스)가 되겠네요?”

“그렇지. YAS(와이.에이.에스). 그게 우리의 새 게임의 약자가 될 거야.”

제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상혁은 두 가지의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는 알파벳 발음만으로 약어를 발음해보고 그것을 이어서 발음하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아직 ‘그 단어’가 한국의 인터넷에서 유행하기 전이었기에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회귀한 지 너무 오래되어 그 게임의 영문 약자가 어떤 의미가 있는 단어인지 잊어버린, 한 오랜 회귀자의 치명적인 실수라 할 수 있었다.

이후에 게임의 제목이 대중에게 공개된 이후에, 한국 유저들이 붙인 애칭을 보고 그가 매일 밤 이불을 차게 만든 치명적인 실수.

그것이 바로 새 게임의 제목이 ‘야스’가 된 진정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름을 붙일 당시의 상혁은 그 단어에 대해 전혀 인지하고 있지 않았기에, 상혁은 자신이 붙인 게임의 제목에 매우 만족하는 중이었다.

그 이름은 앞으로 전 세계의 게이머가, 그 게임의 제목을 부르며 환호하게 될 이름이었기 때문에.

상혁은 당당하게 YAS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는 보드 게임을 패키지를 늘어놓고 직원들을 모아 게임 패키지를 배포했다.

박스만 봐도 수만 원은 되어 보일 것 같은, 엄청난 퀄리티로 완성된 보드게임의 패키지를.

그리고 PTW 내의 전 직원들이 참가하는 거대한 보드 게임의 진행을 개시했다.

그것은 게임이 개시된 바로 그 날부터 PTW 회사 전체를 도떼기시장처럼 만들어버린, 전설적인 프로토 타입 테스트의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