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369화 (370/485)

369. 경계 허물기

비록 PTW의 스컹크 웍스 멤버들이 회귀 전 민준의 지식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능력 좋은 컴퓨터 엔지니어들을 모아놓은 집단이긴 했지만, 그들이 나선다고 해서 마법처럼 완벽한 가상현실 게임이 ‘짜잔!’하고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그들 앞에 놓여있는 과제는 상혁이 ‘그’ 스컹크 웍스 멤버들이 전원 참여한다는 가정하에 1%의 성공률을 언급할 만큼 현실화가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혁은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선택과 집중’임을 잘 아는 기획자였기에, 가장 먼저 현실적으로 구현이 불가능 한 문제들부터 쳐내기 시작했다.

“우선 특정 사물의 디자인적인 커스터마이징은 현재 리얼 엔진의 기능만으로도 충분히 지원할 수 있지만, 아예 게임 내의 오브젝트를 성형해서 새 기능을 가지는 사물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겠지.”

민준이 게임 내의 크리에이티브 시스템에 대해 지적하자, 상혁도 민준의 의견에 동의했다.

“되면 정말 좋겠지만 어렵겠지. 아무래도.”

그때, 옆에 있던 존 카믹이 끼어들며 말했다.

“흠.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PTW LAB에서 개발 중인 서바이벌 게임도 나무를 깎아서 창을 만들거나 나무 몽둥이에 깎은 돌조각을 끼워서 돌도끼를 만들 수 있는데요.”

“그건 유저가 만든 재료의 형태를 AI가 판정해서 자동으로 속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나무막대 한쪽에 돌이 고정되어 있으면 거기 들어간 재료의 강성과 날카로움, 무게를 가진 돌도끼라는 오브젝트의 속성을 부여하는 거죠.

쉽게 말해서 만드는 과정 자체는 완벽하게 물리 엔진의 적용을 받지만, 물체가 완성되는 순간 그건 그냥 공식에 따른 능력치가 붙어있는 3D 모델이 되는 겁니다.”

“사용하는 느낌 자체는 차이가 없지 않나?”

상혁의 질문을 들은 민준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둘은 완전 다르지. 현실에서 만들어진 오브젝트와 리얼 엔진 안에서의 유저가 창조한 오브젝트.

둘 사이의 차이를 쉽게 표현하자면 이런 거야.

게임 안에서 유저가 활을 직접 만들어 쏜다고 가정하자.

우선 활 몸이 될 재료가 있어야 할 거고, 시위로 쓸 재료가 있어야 할 거야.

손잡이 부분을 감싸기 위해 끈을 구해서 감고, 서로 다른 재질의 재료 두 개를 접착제로 접붙여 몸통을 만들고, 짐승의 힘줄을 꼬아 활시위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현실에서 활을 쏠 때, 현실의 화살은 굉장히 복잡한 물리적 과정을 거쳐서 결과물을 생성해내지.

활의 재료, 날씨의 상태, 활시위의 상태, 화살의 무게, 활과 화살의 형태, 시위를 당기는 힘은 얼마였는지, 활시위를 놓는 순간 얼마나 부드럽게 놓았는지, 화살이 쏘아진 각도는 얼마나 적절했는지.

그 모든 요소가 실시간으로 적용되면서 쏘아져 나가는 게 화살이지.

PRD에서는 조금 달라. 그냥 유저가 활을 만들면, 그 활의 장력, 재료의 재질 및 상태, 만든 사람의 솜씨 등을 종합해서 그냥 능력치가 붙어있는 활이라는 오브젝트를 만드는 거야.

실제로 시위를 당기고 재료에 힘이 가해지는 걸 물리적 연산으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 ‘이 활은 유저가 A만큼의 힘으로 당겼을 때 B정도 무게의 화살을 C 정도의 힘으로 발사함.’이라는 공식이 붙어있는 거지.

만드는 과정에서 아무리 기교를 부린다 해도, 결과물은 언제나 형태와 재료에 걸맞은 능력치가 붙어있는 특정 타입의 물건이 나오게 되어 있어.

현실에서의 활이 생산 과정 그 자체를 결과로 구현하는 거라면, PRD에서의 활은 생산 과정이 내놓은 결과물을 가지고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 거지.”

“그러니까, 예를 들어 PRD안에 머스켓 총이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강선에 의한 총알 회전 개념을 적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저가 강선을 판다고 그게 총탄에 적용되진 않는다는 거야?”

“그렇지. 애당초 그 세계 자체의 총 전부가 무회전을 전제로 개발되어 있다면, 금속 안을 아무리 정교하게 파서 강선을 만든다고 해도 총알이 회전하며 나가지는 않아.

만들어진 ‘결과물’에 탄의 회전수라는 수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PRD를 써도 게임 내의 재료를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서 에어컨이나 컴퓨터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지.

그 모든 연산을 MMORPG에서 물리 엔진으로 처리하는 건 연산처리에 특화된 렌더링 센터를 써도 무리가 있어.

HC 101의 크래프팅이 굉장히 제한된 영역으로 구현되어 있고, PTW LAB에서 개발중인 서바이벌 게임이 크래프팅에 특화된 대신 그래픽 수준을 희생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상혁은 대안을 제시했다.

“그 문제는 기획 파트에서 설정으로 커버하자.

새 세계에서 물건을 만드는 행위는 물건을 직접 뭔가로 바꾸는 행위가 아니라, 여신께 정성 들여 재료를 봉납하는 행위라는 설정으로 가는 거지.

유저가 자신이 만들고 싶은 기능과 형태를 가진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면, 최종적으로 여신께서 유저가 만든 결과물을 보고 그에 합당한 다른 물건으로 바꿔주는 거야.

게임 안에서 지원하지 않는 기능의 무언가를 만들려는 시도는, 여신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설정인 거고.”

“만들어진 아이템을 최종적인 결과물로 전환하는 AI의 존재에게 여신이란 이름을 붙이는 거군요.

지극히 판타지스러우면서도 합리적인 설정이네요.

그거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드웨어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아내면서, 상혁과 민준, 그리고 스컹크 웍스는 그들이 만들려는 ‘새로운 세계’를 구체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HC 101이 자신의 능력을 육성하는 방식에서 각 유저들의 플레이가 갈리는 방식이라면, 새 게임은 유저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따라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모험가 플레이어는 석공 플레이어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도적 플레이어는 농부 플레이어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죠.

유저가 선택한 각각의 직업 모두 그 직업이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재미를 전달받을 수 있는 퀘스트 라인과 시스템, 그리고 성장 모티브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의 직업이 석공이라면, 그는 AI에 의해 통제되는 여러 건설 현장들을 전전하며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는 삶을 살게 될 겁니다.

평소엔 자신의 고향에 있는 작업장에서 석재 가구나 조각상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지만, 대규모의 성벽 건설이나 석조 교회의 건설 수요가 발생하면 해당 지역으로 이동하여 다른 석공들의 협조 아래 함께 게임 내의 건축물을 만드는 식이죠.

반대로 플레이어의 직업이 농부라면, 지역의 영주에게 필지를 임대받아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가축을 키워 수익을 올리며 농한기엔 약초를 캐거나 부업을 해서 수익을 올리는 거고요.”

“농사라. 단어만 보면 자칫 지루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커스터마이징을 좀 해야죠. 현실에서의 농사를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을 겁니다.

수확 한 번 하는데 그것이 아무리 게임 안에서의 시간 개념을 따른다고 해도 반년에서 1년씩 유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세계관 자체에서 작물의 생장 속도가 빠르다는 설정으로 가는 겁니까?”

“정확히는 가속시킬 방법이 존재하는 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게임 속 세계에는, 실제로 세계 안의 사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고, 각 직업의 종사자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신의 축복을 받아 부스트를 받는 거죠.

마치 고대 로마 시절에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당시의 신앙적 관습들은 단순히 미신이었지만, 게임 속 세계에서의 신앙생활은 유저들로 하여금 실제로 세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신의 힘을 느끼게 해 줄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면 어떤? 말씀하신 대로 신전에 찾아가 제물을 바치는 겁니까?”

“섬기는 신에 따라 다르겠죠. 예를 들어 목공은 목수의 신에게 매일 자신이 만든 조각 하나를 공양하는 식으로요.

공양품에 쏟는 신자의 노력과 재료의 품질에 따라, 그날의 직업활동에 부여되는 축복의 질이 달라지는 겁니다.

또한 농사의 경우, 작물을 기르는 동안의 각종 돌발 상황에 대해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좀 더 게임다운 느낌을 줄 수 있을 테고요.

벼가 익지도 않았는데 잎이 노랗게 타고 있다면 숲에서 특정 몬스터의 분비물을 구해 공물로 바쳐야 한다던가, 아니면 특정 농작물은 특수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농기구로 밭을 갈아야 잘 자란다던가.”

“배울 게 많겠군요.”

“유저가 게임을 하면서 ‘이 세계는 원래 이런 세계구나.’라고 하나하나 익혀나가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쌓인 농사에 대한 지식은, 결국 그 유저의 노하우가 되어 다른 유저들에게 이어지게 될 겁니다.

농부들도 클랜을 구성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혹은 상인 클랜과 연합 해 이후에 수요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작물을 대량으로 기르는 식으로 이윤을 추구하게 되겠죠.

특정 지역에서 창궐한 네크로멘서가 뿌리는 시독(屍毒)에 대응하기 위해, 시독 내성을 올려주는 작물의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면 클랜에서 모은 정보를 통해 그 작물을 미리 집중적으로 키워 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 과정은, 게임 안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NPC 영주들이나 상인들에 의해 가이드 되게 될 거고요.

유저는 항상 게임 안의 뉴스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거죠.

어디 어디 지역의 교회에서 여신을 위한 초 대형 사원을 짓는다더라, 혹은 국경 근처에서 잦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어 여왕이 새 성의 축조를 명령했고, 그로 인해 석공 유저들이 대규모로 그 지역으로 이동 중이라거나.

우리가 현실에 관심을 가지는 것 이상으로, 이 게임의 유저들은 게임 속 세계의 뉴스를 서로 공유하며 유리한 방향으로 자신의 플레이를 끌어가려 할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의 직업에서 먼치킨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 테니까요.”

“그냥 혼자서 수련만 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 지역에 신전의 건설이 결정되었다고 해보죠.

교단을 통제하는 AI가, 특정 지역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해 거대한 신전을 짓기로 했다고요.

그럼 교단에서는 가장 먼저 새 신전의 설계자를 구할 겁니다.

그건 유저가 될 수도 있고, 또는 게임 안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NPC일 수도 있죠.

그렇게 설정된 설계자는 공사의 총 책임자가 되어 신전을 건설하기 위한 자재를 모집합니다.

모험가 길드에서는 퀘스트가 발주되고, 기존의 신전에서는 온갖 진귀한 재료를 가져오는 신자에게 더 많은 여신의 축복이 내릴 것이라는 공문을 발표하죠.

전 지역의 석공 클랜이 그 소식을 듣고 해당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목수 클랜은 그 석공들이 묵을 집을 짓겠죠.

상인들은 그 지역에서 발생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 겁니다.

거기서 유저들은, 평소엔 구경도 못하던 진귀한 재료들을 다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겁니다.

그것은 교단 측에서 가장 강력하고 유명한 모험가들에게 비싼 돈을 주고 발주한 퀘스트로 모은 재료이거나, 혹은 한 상인이 아주 먼 지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온 재료일 테고요.

그것을 다루는 것은 골방에서 매일 같은 돌조각을 만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치와 깨달음을 안겨줄 겁니다.

굳이 조각에 적당한 돌을 돈을 주고 사거나 직접 낑낑대며 작업실로 옮길 필요 없이, 공사 현장의 인부들이 가져다 놓은 돌을 깎기만 하면 되는거죠.

그리고 마침내 신전이 완성된다면, 그 유저는 위대한 유적의 건설에 참여했다는 긍지와 시스템에서 부여하는 막대한 경험치를 얻게 될 겁니다.

교단 측에서는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요청을 수행한 유저의 클랜에 대해 높은 신뢰를 가지게 되겠죠.

이 세계 안에서는, 그런 대형 퀘스트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할 겁니다.

게임 안에 접속한 수많은 유저들이 다 함께 즐기기에, 충분한 수준의 퀘스트가.”

“그럼 오래 지나지 않아 전 필드가 신전과 유적들로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게임 속에 존재하는 여러 세력들이 끊임없이 반복하고 서로를 공격하며 서로의 유적을 파괴할 테니까요.”

상혁은 회의실 스크린에 영상 하나를 띄웠다.

그것은 이전에 PTW에서 발매했던, AI가 통제하는 대규모 다중 접속 FPS 게임인 ‘워함마 40K:The Only War’의 전장 히스토리를 시각화한 영상이었다.

“TOW를 서비스하면서, 저희는 수십만의 유저들이 각각 구분된 인스턴트 필드에서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이게 만들었죠.

그리고 AI는, 행성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거대한 가상 전장에서 각 세력들의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유저들을 재배치했습니다.

유저들은 자신이 속한 세력의 승리를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시스템은 불리한 진영이 발생하는 즉시 해당 진영을 통제하는 AI측에 막대한 보너스를 부여함으로써 균형을 잡고 있었죠.

이 게임에서, 어느 한 세력이 진정으로 승리한다는 것은, 이 게임의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의미였으니까요.”

“그럼 유저들은 이길 수 없는 전장에서 끊임없이 싸운 겁니까?

그걸 유저들이 납득 하던가요?”

스컹크 웍스 멤버 중의 한 명이 질문하자, 상혁이 그의 질문에 답했다.

“납득하게 만들었죠. TOW에서, 저희는 불리한 진영 쪽이 더 화려하고 강한 장비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물론 이기고 있는 측에서도 퀘스트 보상 포인트를 모아 자신의 진영에서 사용 가능한 고급 장비들을 살 수 있었지만, 불리한 진영에는 그 고급 장비들이 더 싸게 제공되거나 무상으로 제공되었죠.

결과적으로, 게임은 유리한 진영보다는 불리한 진영 쪽에서 플레이하는 것이 더 시원하고 박진감 넘치는 재미를 얻을 수 있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저희는 세계관 내의 최강 전차 중 하나인 ‘베일 블레이드’를 뽑기 위해, 임페리얼 가드 진영의 유저들이 단체로 고의 패배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죠.

결국 최악의 상황에서 시스템은 임가 유저들에게 전황을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초중전차 1대를 선사해주었고, 그 모습을 보던 임페리얼 가드 유저들은 압도적인 전차의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상대 진영의 유저들이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았나요?”

“아뇨. 기뻐했죠. 상대의 고의 트롤링으로 인해서, 게임 안에서 거의 보기 힘든 멋진 전차를 상대로 싸울 수 있었으니까요.

저희는 이 게임의 AI 서버를 10년 가까이 유지보수하면서, AI가 부여하는 퀘스트를 통해 유저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쌓아왔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수준의 보상이 있어야 어떤 레벨의 유저들이 관심을 보이는가.

더 실력 있는 유저들의 전장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어떤 보상과 퀘스트가 제공되어야 하는가.

그건 PTW라는 회사가 가진 일종의 유산이죠.

저희는 새 게임의 각 세력을 운영하는 AI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저희가 TOW에서 쌓아왔던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할 예정입니다.”

상혁은 노트북을 조작해 PTW에서 발매한 다른 게임들의 타이틀을 띄웠다.

“PTW가 게임회사가 아닌 일개 동인 팀이었을 시절에 발매됐었던 ‘마리의 눈물.’

그 게임의 HD 버전을 무상으로 공개하면서, 저희는 유저의 플레이 로그를 저희 서버에 받아서 수집하는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그 데이터를 통해, 저희는 유저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정치적 난제에 대해 유저들이 어떤 식으로 각 문제를 해결해나가는지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했죠.

교회와 왕실 간의 알력 다툼이 발생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로 대립하는 두 정치 세력 사이에서 자신의 불리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어떤 성향의 측근을 고용해야 하는가.

유저들이 마리의 눈물 안에서 선택한 수많은 결정에 대한 데이터를, 저희는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저희가 만들 새 MMORPG에 존재하는 각 세력을 구성하는 NPC들의 AI를 구축하는 기반 데이터가 될 겁니다.”

상혁이 노트북을 조작하자, 다른 게임의 타이틀이 화면에 등장했다.

“이건 나이츠 어셈블입니다. PC게임으로 게임 제작을 시작했던 PTW가, 본격적으로 콘솔 시장에 집중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게임이죠.

지금은 ORPG 플레이의 기본 중의 기본 툴 같이 여겨지는 게임이라 아실 분은 다 아실 거라 생각되지만, 기본적으로 나이츠 어셈블의 핵심 재미는 멀티 플레이 파트에 있습니다.

유저는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던전과 스토리, 퀘스트를 만들고 다른 플레이어를 내가 만든 방에 불러들여 그들과 즐겁게 D&D를 플레이할 수 있죠.

개발과정 중에, 민준은 나이츠 어셈블의 온라인 지원을 위해 MS에 파견되어 X-BOX LIVE 서비스의 기초 부분을 직접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축한 네트워크를 통해서, 저희는 수백만의 나이츠 어셈블 유저들이 만든 수천만 개의 퀘스트와 던전, 몬스터와 캐릭터에 대한 데이터를 얻었죠.

현재 리얼 엔진에 적용되어 있는 자동 퀘스트 생성 시스템의 베이스가 된 데이터가, 바로 나이츠 어셈블에서 수집한 데이터들입니다.”

마치 퍼즐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추듯이, 상혁은 PTW가 지금까지 개발한 게임에서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데이터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MYOM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저가 패드를 들지 않고 오로지 손동작만으로 게임 안의 모든 기능에 접근할 수 있게 하려고 어떤 식으로 제스쳐 UI를 구성했었는지.

TAW를 만들면서 유저가 게임 안의 세계를 변화시킬 때마다 전체 NPC의 생활 방식이나 대화 내용을 바뀌게 하려고 어떤 방법을 썼었는지.

GOS를 개발하며 얻은 대규모 렌더링 센터를 이용한 3D그래픽의 효율적인 처리 기술.

EOD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NPC의 눈빛이나 표정 연기만으로도 유저가 상대의 공격 의사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던 ‘NPC 연기’의 노하우.

4차 NE 컨벤션을 진행하면서, 수천만의 유저를 한 지역에서 동시에 컨트롤 할 수 있도록 같은 지역을 여러 개의 멀티 유니버스로 나누어 통제했던 ‘서버 기술’.

상혁은 지금까지 PTW가 쌓아온 모든 기술을 합쳐서, 이 게임을 완성하려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단순히 합치는 것만으로도, 다른 게임 몇 개를 개발하는 것 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기술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물론 완전히 다른 각각의 게임에서 얻은 데이터를 하나의 게임에 전부 적용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 겁니다.

하지만 만일 저희가 해낼 수 있다면, 그건 MMORPG가 만들 수 있는 궁극의 게임 플레이를 제공하는 ‘씨앗’이 되겠죠.

이전에 MYOM이, 모션 인식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게임의 교과서 같은 게임이 되었던 것 처럼요.”

상혁의 말대로, MYOM의 출시는 게임 업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이후에 나온 다른 대부분의 모션 인식 게임들이, MYOM에서 쓰는 제스쳐 UI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에.

어떤 손가락 제스쳐를 취한 채 허공을 내리그어야 시스템 UI를 호출할 수 있는지.

잠시 게임을 음 소거 상태로 만들려면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하는지.

서로 장르는 달라도, 공유되는 기능에 사용되는 제스쳐가 모두 MYOM의 기초 동작을 따라가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게임 속 세계에서의 ‘수화(手話)’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 ‘기본 제스쳐’들은, 이후에 발매된 모션 인식 게임인 EOD나 HC 101, 스페이스 다이버같은 PTW의 다른 게임들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상혁은 이번에 개발할 새 게임이, ‘가상현실을 사용한 MMORPG란 이런 형태가 되어야 한다.’라는 일종의 가이드 라인이 되기를 원했다.

이전의 MYOM이 그랬던 것처럼.

“저희가 존 카믹 씨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리얼 엔진의 완성도가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면 저희는 리얼 엔진의 사용 권한을 무료로 풀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백 수천 명의 개발자가 참여하지 않아도 자신의 상상만 가지고 AAA급 게임을 마음껏 만들 수 있도록.

하지만 그전에 앞서, 저희는 리얼 엔진이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 적 포텐셜의 한계를 시험해야 합니다.

100% 현실과 동일한 수준의 게임 속 세계를 창조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만들면 그럴싸하게 동작합니다.’ 정도는 보여줄 수 있는 샘플을 통해서요.

저는 이 새 게임이 그 샘플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조용히 상혁의 말을 듣고 있던 존 스캇이 손을 들며 상혁에게 질문했다.

그것은 게임에 대한 질문이 아닌, 상혁이라는 개발자의 동기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스캇의 질문을 받은 상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직 자신도 스스로에게 이 기획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물어본 적이 없기에.

엄밀히 말하면, 상혁이 여기서 얼마든지 더 타협하더라도 유저들에게 주어지는 충격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일 것이었다.

PRD라는 장비 자체는, 그것으로 돌리는 게임이 아무리 시시한 것이라도 유저를 완벽하게 몰입하게 만드는 마법의 장비였으니까.

굳이 지금 시점에 이렇게 엄청난 개발기간과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의 유저들이 60점짜리 게임이 게임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굳이 100점짜리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70, 80점짜리 게임만 내놓아도, 그들은 그것이 100점짜리 게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게임에 대한 평가는, 결국 상대적인 것이기에.

상혁은 조용히 입을 열어 자기 생각을 말했다.

“결국, 게임이란 상상과 현실의 모방일 뿐입니다.

유저는 모니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며 자신의 캐릭터가 재생하는 애니메이션을 봅니다.

그리고 화면에 뜨는 숫자를 보며 그게 자신이 공격해서 상대에게 주는 데미지의 수치라고 믿죠.

그건 그게 바로 기존의 시스템이 제공하는 게임 속 현실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희가 ‘현실적이다’라고 말하는 목소리의 이면에는, 이런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게임 중에서는 비교적 가장 현실에 가깝다.’

그건 항상 그 시대의 기술적 한계를 따라가게 마련이고요.

GOS가 처음 발매되었을 때, 사람들은 저희가 세계 최고 수준의 렌더링 센터를 통해 구축한 그래픽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와! 진짜 같아!’

하지만 그 게임은 PS2의 낮은 그래픽과 해상도로 재생되었던 게임이었죠.

이후에 저희가 MYOM을 출시했을 때, 사람들은 TV 앞에서 손을 휘저으며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와! 진짜 같아!’

손을 휘두르는 동작에 맞춰서, 화면 속 캐릭터의 손에 마나가 휘도는 경험은 분명 충격적인 것이었겠죠.

그 이후에 EOD가 발매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저흰 언제나 그런 식이었죠.

매번 조금씩, 현실과 가상 세계가 가지는 벽을 무너트리며, 조금씩 그 경계를 허물어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상혁은 말을 멈추고 잠시 민준을 바라보았다.

현재의 자신에게, 감히 ‘지금이라면 해볼 만하다.’라는 발칙한 상상을 하게 해준 장본인을.

민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상혁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은 살짝 미소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저희는 PRD라는 장비를 출시하려는 중이죠.

그건 향후 10년 내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연산 성능을 갖춘 초고가의 가상현실 콘솔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PRD가 지원하는 수준 이상의 그래픽은 게임에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더 좋은 성능에 더 좋은 그래픽을 가진 장비를 만들 수는 있겠죠.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수준의 성능을 지원하는 장비가 바로 PRD입니다.

심지어 그 장비를 개발한 저희조차, 아직 PRD가 가진 장비의 포텐셜을 100% 끌어내고 있지는 못하니까요.

장비는 갖추어졌습니다.

남은 건 게임이죠.

그리고 저는, 이번에야말로 게이머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것이, 제 궁극의 목표이자, PTW라는 회사가 개발한 모든 게임이 지향하는 궁극의 지향점이니까요.”

“그게 뭡니까?”

회의실 구석에서 누군가가 터트린 질문을 들으며, 상혁은 조용히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외쳤다.

“와!! 진짜다!!(Wow!! it's real!!)”

그것은 더 이상 ‘가상(Virtual)’이라는 단어조차 듣고 싶지 않은, 한 개발자의 게임 속 세계에 대한 열망이 담긴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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