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 천외천의 세계
PTW본사 지하에 있는 스컹크 웍스 전용 회의실.
딱 팀의 구성원인 50명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회의실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민준이 전 세계 기업과 대학에서 긁어모은 스컹크 웍스 멤버들은, 각자의 전공 분야도 다르거니와 관심사도 전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평소의 스컹크 웍스 멤버들은 보통 자기가 하고 있는 개인 프로젝트에 매진하거나 혹은 PTW 사내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중 흥미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들에게 전달된 민준의 호출.
그것은 세계 최고의 기술자 집단인 그들을 묘하게 흥분시키고 있었다.
“스캇 씨. 혹시 뭔가 들은 거 있습니까?”
PTW LAB의 런칭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존 카믹은 갑작스러운 민준의 소집에 기대감을 품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PTW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의 존 중 나머지 한 사람인 존 스캇은 그런 카믹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전원 소집은 좀 이례적인 일이긴 하죠.
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거 아닐까요?”
“맘만 먹으면 고물 컴퓨터로 달에 사람도 보낼 전문가집단을 불러서 하려는 일이라는 게, 대체 뭘까요?”
“초조해하지 말고 기다리시죠. 어차피 잠시 후면 알게 될 겁니다.
저기 민준 씨가 들어오네요.”
마지막으로 회의실에 들어온 민준은, 중앙에 있는 단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스컹크 웍스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전 긴 설명에 익숙하지 않으니 여러분을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자료로 확인 부탁드립니다.
스컹크 웍스 자료 서버 메인 폴더에 기획서가 하나 올라와 있을 겁니다.
400페이지쯤 되는데, 지금부터 시간을 드릴 테니 찬찬히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민준은 자신도 단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있을 본격적인 논의를 위해 기획서를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타탁, 탁-
그 후로 한참 동안, 회의실은 50명의 인원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정적에 휩싸였다.
간혹 노트북에 붙어 있는 터치 패드를 누르는 소리나, 태블릿을 터치하는 작은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그 조용한 침묵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노트북으로 상혁이 건네준 기획서를 읽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알 수 없다.
자신의 회귀 전 지식을 사용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갖춘 컴퓨터 기술자들을 모은 집단이 현재의 스컹크 웍스다.
그리고 그 구성원은, 윈텔이나 암드 같은 칩셋 제조사, 그리고 NASA 출신 엔지니어, 존 스캇같은 구글 출신 프로그래머 등 게임 회사 출신 인력보다는 비 게임회사 출신 인력이 월등하게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51번째 멤버인 존 카믹처럼 게임회사 출신도 드문드문 있긴 했지만.
애당초 지금 수준의 기라성같은 멤버들을 모으면서, 민준이 약속한 것은 단 세 가지였다.
무조건 현재 받는 연봉보다 두 배 이상의 연봉을 지급한다는 약속.
본인이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에 대한 무제한 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사 그것이 민준의 부탁이더라도 어떤 프로젝트 간에 참가할지에 대한 결정은 본인이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약속.
그런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민준은 지금의 멤버를 모을 수 있었다.
반대로 그런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민준은 자신을 제외한 50명의 인원 중 몇 명이나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민준은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상혁의 제안서를 보고 확신하게 된 것처럼, 스컹크 웍스 멤버들도 이 기획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민준은 침착하게 모든 인원이 들고 있는 전자기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먼저 검토를 마친 스컹크 웍스 멤버들이 타블렛을 내려놓고 곰곰이 기획안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마침내, 긴 검토 시간이 끝나고, 마지막 한 사람이 노트북을 덮었다.
마지막까지 기획서를 검토하던 사람.
그는 스컹크 웍스 멤버 중 몇 안 되는 게임회사 출신 프로그래머인 존 카믹이었다.
“존 카믹 씨가 마지막이신 것 같은데, 다 읽으셨습니까?”
“예.”
“그럼 바로 회의를 시작하죠. 제가 여러분을 소집한 것은, 현재 PTW가 PRD용 게임 개발에 사용 중인 리얼 엔진에, 지금 보여드린 MMORPG의 개발을 위한 추가 기능을 얹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리얼 엔진의 개발 과정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리얼 엔진에서 PRD용 기능을 추가하려면 하드웨어의 성능을 100%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호환되는 플러그인을 짜서 집어넣어야 하죠.
그런 이유로, 저는 스컹크 웍스 멤버 전원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를요.”
그러자 조용히 민준의 말을 듣고 있던 존 카믹이 손을 들어 민준에게 물었다.
“질문 좀 해도 될까요?”
“하시죠.”
“지금 보여주신 기획은, 마스터 요다가 작업한 겁니까?”
“그 요다가 PTW의 CCO 이상혁을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그럼 베이더 씨는 이 기획, 아니. 기획이라고 부르기도 모호하네요.
이건 그냥 400페이지짜리 아이디어 모음입니다. 전부 개요만 들어있어요.
그 하나하나가 전부 구현하는데 피 토하는 노력을 요구하는 복잡한 아이디어들이고요.
게다가 MMORPG이기도 하죠.
마스터 민준은 이 게임을 구현하기 위해 들어갈 노력이, HC 101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전부 이해하고 계시죠?”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믹이 말을 이어나갔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전 세계의 어느 게임회사도, 이토록 커다란 스케일의 MMORPG를 만들려 시도한 적이 없다는 거죠.
이건 거의 새로운 세계 하나를 통째로 창조하겠다는 거랑 마찬가지입니다.
생략이나 건너뜀이 없는, 아예 독립적으로 굴러가는 또 하나의 세계를요.
어디서 충돌이 날지 모르고, 어디서 버그가 터질지 모릅니다.
이건 인간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스케일 이상의 프로그램이 될 테니까요.
제가 묻고 싶은 건 단 하나입니다.
이게 그럴 가치가 있을까요?”
민준은 잠시 게임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거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일 자신이 회귀하기 전이었다면, 오로지 동경심만을 담아 먼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했을 그의 눈을.
그리고 민준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존 카믹의 눈을 응시하며 자신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카믹 씨. 게임마다 서로 다른 수백 개의 엔딩을 보며 수천 개의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말이죠, 어느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 적어도 하나 정도는, 인생을 걸고 플레이할 만한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죠.
게임 회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메인 퀘스트를 모두 깨고 엔딩 이후에 2회차 플레이를 하거나, 아니면 그냥 소소한 재미를 느끼기 위해 반복 생성되는 서브 퀘스트를 질릴 때까지 플레이하거나, 아니면 다음 확장팩이 업데이트 될 때까지 잠시 동안 고인물의 기분을 즐기거나, 혹은 지인들이나 게임 속 다른 유저들과 커뮤니티를 즐기거나.
그런 형태의 지속적인 플레이가 아니라, 게임의 깊이 자체가 한 사람이 평생 플레이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게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의 삶을 살아가듯이, 가상 세계 안에서 제 두 번째 삶이 될만한, 그런 게임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요.
전 상혁이 만든 이번 기획이 그럴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게임을 위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무한대로 강해질 수 있기 때문에요?
결국, 그건 상대적인 겁니다. 제가 강해지는 만큼, 다른 유저도 강해질 수 있으니 결국 노는 물이 달라질 뿐 파워 밸런스 자체는 똑같이 유지되지 않습니까?
비슷한 발상의 게임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리니쥐’처럼.”
“리니쥐를 아십니까?”
“유명한 게임이니까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우리가 구현하고자 하는 ‘무한한 성장’은, 리지쥐의 그것과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존의 시스템에서, 스펙에 따른 유저의 강함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해 결정되죠.
‘장비’와 ‘캐릭터’.
그리고 대부분의 MMORPG에서는, 장비로 주어지는 강함에 특히 포인트를 많이 주고 있고요.
하지만 이 게임은 다릅니다.
이 게임에서, 유저는 다른 장인 유저가 만든 최강의 검을 거래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최강의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유저가 가진 검술 스킬이 그 검을 다루는데 부족하다면, 그 유저는 최강의 검을 가지고도 나뭇가지를 든 다른 유저에게 패배하게 되겠죠.
상혁의 이 아이디어는, 기본적으로 한국 현대 무협(Korea Chivalric Nove)의 파워 밸런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 무협(Korea Chivalric Nove)이요?”
그게 뭐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믹을 보며, 민준이 부연설명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면 쿵푸 팬더의 소설 판 같은 겁니다.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차크라 같은 신체 에너지의 일종인 기(qi)를 사용하는 쿵푸 고수들이 검으로 산을 가르는 힘을 선보이는 동양 판타지 소설이죠.
나중에 몇 개 보내드릴 테니 읽어보시면 좋을 겁니다.
생각보다 재미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그것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니, 설명을 부탁드리죠.
제안서에도 적혀있긴 했지만, 뭔 말인지 알기가 어렵더군요.”
“기본적으로 현대 무협에서 자주 쓰이는 파워 단위가 바로 경(Kyung)입니다.
무공을 사용하는 사람을 무인이라 부르며, 무인의 강함을 일종의 등급으로 나누는데, 자주 쓰이는 체계에서는 삼류 → 이류 → 일류 → 절정 → 초절정 → 화경 → 현경 → 생사경 → 자연경으로 구분을 합니다.
세계관마다 다르긴 하지만 각각의 경지의 차이는 들고 있는 무장의 수준으로 넘어서기 힘든 강함의 차이를 가지고 있죠.
쉽게 이해하시려면,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마법사의 서클 개념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하!”
“이런 장면을 떠올려보시죠.
온갖 아티펙트를 몸에 두른 9서클의 마법사 5명이, 한 명의 마법사를 추적해서 죽이려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공격받던 마법사는 깨달음을 얻고 10서클의 경지에 오르게 되죠.
판타지 세계에서, 서클의 차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합니다.
9서클 마법사 다섯 명으로는 10서클 마법사의 몸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죠.
이 기획에서 말하는 ‘천외천’의 고수란, 바로 그런 경지에 들어선 유저들을 말하는 겁니다.
바로 밑의 경지에 있는 수많은 유저들이 달려들어도 한칼에 쓸어버릴 수 있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존재를 말하는 거죠.”
“하지만 같은 등급의 다른 유저와는 싸움이 되지 않습니까?”
“됩니다. 그게 핵심이니까요. 결국 이 게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이 키우는 캐릭터의 스킬을 코스믹 스케일이 될 때까지 성장시키는 겁니다.
그게 목공이든, 대장이든, 검술이든 간에, 어떤 스킬을 골라도 그 안에서 끝없이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거죠.
단, 중간중간에 존재하는 통곡의 벽 수준의 허들을 넘어가면서요.”
“그럼 장비는 의미가 없습니까?”
“결국 통곡의 벽 앞에 가로막혀서 플레이하는 시간이 대부분이 될테니 그 안에서는 장비의 격차가 꽤 큰 차이를 불러오겠죠.
다만 기존의 게임과 이 게임이 다른 점은,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도 캐릭터의 육성만으로 다음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같은 경지의 유저들 사이에서는 장비의 차이가 승패를 가리겠지만.”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때, 존 카믹의 옆에 있던 다른 스컹크 웍스 멤버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좀 황당한 성장 트리도 있던데, 예를 들어 석공 같은 경우는 축성 스킬을 넘어서 나중엔 아예 석상에 생명을 부여하거나 파괴 불가능한 성벽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소환하게 한다는 아이디어가 있더군요.
요리도 계속 성장시키면 아예 유저의 등급 자체를 향상할 수 있는 요리를 제작할 수 있고요.
전체 직업군이 전부 그런 식이던데,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절대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뭐든지 뚫어버리는 창의 이야기처럼요.”
“그건 개발하면서 조정해나가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민준은 자신이 이해한 범위 안에서 상대가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열심히 부연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회의를 진행하면서, 민준은 살짝 힘에 부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제안서에 적혀있으나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던지는 질문이었지만, 몇 가지 질문은 매우 예리한 부분을 찔러왔기 때문에.
“무한대의 성장이라는 건 매력적인 요소이기도 하지만 늦게 합류하는 유저 입장에서는 디메리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허수아비 앞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다른 유저는 칼질 한번에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른다면 그 격차를 영원히 메울 수 없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할 거고요.
실제로 오랜 시간 서비스된 많은 게임이 점점 고인물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신규 유저들의 유입이 점점 줄어들었죠.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민준이 있는 방향이 아닌, 회의실 뒤쪽에서 들려왔다.
깨자마자 바로 달려왔는지, 아직도 반쯤 잠겨 있는 걸걸한 목소리로.
“그 문제는 유파(Clan)가 해결해 줄 겁니다.”
민준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고는 씩 웃었다.
거기엔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자신을 대신해서, 본인이 세운 기획을 직접 해설하기 위해 찾아온 상혁이 서 있었기 때문에.
상혁은 자신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는 민준을 보고 미소를 날리며, 민준이 있는 회의실 단상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민준이 받은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힘차게 설명하면서.
“이 게임의 모든 스킬의 핵심은, 현재 자신이 있는 경지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스킬별로 그 조건은 모두 다르며, 같은 스킬이라도 여러 가지 스타일로 경지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유저는 허수아비를 향해 10만 번의 칼질을 함으로써 다음 경지로 나아가고, 어떤 유저는 끝없는 전투를 통해 다음 경지로 나아가죠.
어떤 유저는 계속 벽에 부딫힌 상태로 고민하다 자신이 쓰던 검과 무게 밸런스가 다른 검을 휘두르는 순간 다음 경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A라는 유저가 특정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을, B라는 유저가 똑같이 시도한다고 해서 무조건 같은 시간에 돌파하게 되는 것도 아니죠.
기본적으로, 아무 도움도 받지 않은 유저가 경지를 돌파하기 위해 하는 노력의 대부분은 ‘삽질’입니다.
좋게 말하면 시행착오죠.
하지만 그 삽질을 통해서 스킬의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순간, 그 유저는 자신이 했던 삽질 중에 어떤 삽질이 유효했던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시스템으로 알려줄 테니까요.
그건 일종의 ‘속성 수련법’이며 그 유저가 경지를 돌파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가이드 라인이 됩니다.
그 유저는 자신이 파악한 가이드라인을 온라인에 게시할 수도, 아니면 자신이 직접 클랜을 세워 멤버들에게만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합류한 유저들은, 그런 클랜에 가입해서 적당한 노동력과 충성심을 댓가로 빠른 성장에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겠죠.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해서 새로운 가이드 라인을 세울 수도 있고요.
혹은 게임 속 유적에서 전대 고수가 절벽에 새겨둔 가이드 라인을 보고 수련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 게임에서, 앞서가는 이들은 시간적인 메리트를 얻는 대신 막대한 삽질을 감수해야 하겠죠.
결국 나중에 합류한 유저도 본인의 노력과 재능이 있다면 빠르게 고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게임은 그런 게임이니까.”
말을 마친 상혁은 어느새 민준의 곁에 도착해있었다.
그는 조용히 의자를 하나 당겨 민준의 옆에 놓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스컹크 웍스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1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백 가지의 방법.
1 종류의 스킬 속에 담긴 수백 가지의 파생 스킬.
그리고 그것을 현실처럼 만지고, 쏘고, 던지고, 부수게 해 주는 PRD라는 장비.
민준이 여러분을 부른 이유를,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현재의 데이터 처리 기술로는, 지금의 제안서에 담긴 게임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건 마치 고유의 법칙을 가진 세계 하나를 통째로 만드는 것과 같은 종류의 도전이 되겠죠.
하지만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갓겜이 될 거라는 확신 말입니까?”
존 스캇이 묻자 상혁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만약 이것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있다면, 그게 바로 여러분들이라는 확신입니다.
구골 할애비가 와도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진 못할 테니까요.
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는 1%의 가능성이라도 가지고 있는 전 세계 유일의 집단.
게임을 넘어, 유저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선사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
전 스컹크 웍스가 바로 그 집단이라고 확신합니다.”
스컹크 웍스 멤버들은 단호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상혁의 목소리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이 허무맹랑한 프로젝트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생각했기에.
상혁은 그런 그들의 생각에 쐐기를 박았다.
“여러분들 중에는 게임 회사 출신이 아닌 분들도 많고, 심지어 게임에 별 관심 없으신 분들도 있죠.
그리고 민준이 여러분을 영입할 때 걸었던 조건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 지원자의 수가 필요한 숫자에 미치지 못한다면, 전 이 400페이지짜리 기획을 깔끔하게 쓰레기통에 처박겠습니다.
이건 그냥 원래 버전대로 먼치킨 요소 없이 중세 시뮬레이터로 만들어도 충분히 갓 게임이니까요.
아마 그 버전을 완성하는 데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편하게,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해주시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희박한 가능성을 좇아서, 저와 함께 지옥 같은 삽질의 세계로 뛰어들 것인지, 아니면 그냥 원래 여러분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실지.
프로젝트가 무산된다 해도, 전 절대 여러분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을 겁니다.
애당초 이건 여러분들의 존재가 아니면 시도조차 불가능한 프로젝트니까.”
말을 마친 상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민준이 스컹크 웍스 멤버들에게 물었다.
“상혁은 지원자가 부족하면 기획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고 했지만 전 혼자서라도 작업할 겁니다.
대신 완성하는 데 50년쯤 걸리겠지만, 뭐 어때요.
저흰 신이 아니잖아요?
7일 만에 세계를 창조할 순 없으니까.
그러니 묻겠습니다.
앞으로의 제 50년을 5년 정도로 깎아주실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상혁은 민준이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는 감각을 느끼고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컴퓨터 엔지니어 50명이, 일제히 손을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상혁의 옆에는, 마찬가지로 손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오랜 친우의 모습이 있었다.
벅차오는 가슴을 조용히 부여잡으며, 상혁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이번에 만들 것은, 게임 이상의 무언가가 될 것이라고.
자신이 반드시,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게 만들 것이라고.
모든 게이머가, 진정으로 인생을 걸어보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무언가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상혁은 조용히 자신에게 다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새 세계를 창조한다.’
바로 그때가, 오로지 PRD로만 플레이 가능한 PTW 최초의 MMORPG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