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 히어로 프레젠테이션
폭풍전야(暴風前夜).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있는 가상광장의 분위기는 잠시 후 그들의 눈앞에 펼쳐질 쇼케이스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주위에 있는 아바타 무리를 둘러보던 리차드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허먼을 향해 말했다.
“뭔가 수천만 명이 모여있는 그런 압도적인 모습을 기대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네요.”
“그건 성능 낭비니까요. 실 접속자의 태반은 제가 모르는 타인들이고, 저에게 별 의미도 없으니 단순히 ‘사람이 북적거린다’라는 느낌만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숫자의 아바타만 출력하게 한 걸 겁니다.
게다가 그 정도 숫자의 인원들을 한군데 몰아넣으려면 광장 넓이가 엄청나게 넓어져야 할 테니 전체적인 행사 공간의 밸런스도 무너질 테고요.”
“그래도 수천만 명이 한번에 모여있는 장면을 보고 싶긴 하네요.
‘이 많은 사람이 PTW의 행사를 즐겁게 즐기고 있습니다!’라는 느낌을 PTW에게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PTW는 알고 있을 겁니다.
랜더링된 아바타의 숫자가 아닌, 서버상에 접속자로 처리된 유저들의 숫자로 말이죠.
아니, 굳이 접속자 숫자로 파악할 필요도 없죠.
그들이 발매하는 게임의 판매량이 충분히 팬들의 애정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요. 마 이번에 발매될 HC 101의 판매량도 기록적이겠죠.
사람들의 표정을 보세요.
조금 전까지 게임 속 세계를 헤매다 현실로 끌려 나온듯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요?”
딥 다이버는 발매 시점부터 유저의 표정을 스캔해 게임속 캐릭터에 반영할 수 있는 페이스 스캐너가 내장된 상태로 발매된 장비였다.
그렇기에 유저들의 아바타는, 그것이 3D 모델링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유저들이 짓고 있는 표정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3일간 이어진 완벽한 가상 세계 체험.
그것이 자신들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PTW가 어필한 ‘가능성’에 얼마나 큰 기대를 품고 있는지를 표정으로 표현하는 유저들을 보며, 허먼은 리차드를 향해 미소지었다.
“개인적으로는 행사가 끝나도 가상 컨벤션 회장의 접속 권한을 PTW에서 계속 유지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거 자체로도 롤러코스터만 10개나 탑재되어있는 훌륭한 테마파크인 데다 나머지 어트렉션도 아주 즐거우니까요.
행사장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게임이나 다름없기도 하고요.”
“혹시 쇼케이스에서 발표될 깜짝 발표가 그거 아닐까요?
행사가 끝난 이후에도, 쇼케이스 행사장 서버를 계속 열어둔다는 내용 말이죠.”
그러나 허먼은 리차드의 의견에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런 발표가 게이머들을 열광하게 만들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이번 쇼케이스는 단순히 팬 서비스 차원의 발표가 되어버릴 테니까.
그건 PTW스럽지 못한 내용이었다.
다른 게임회사라면 엄청나게 홍보할만한 이슈일지 몰라도, 적어도 PTW와 NE 컨벤션이 가지는 네임벨류에 비하면 그것은 ‘시시한’ 발표가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PTW라면 그런 내용은 그냥 ‘어차피 만든거 굳이 닫을 필요가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지나가듯 언급할 겁니다.
아니면 그냥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리던가요.
PTW의 쇼케이스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죠.
거기엔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성이 있죠.
PTW의 쇼케이스엔 발표를 통해 유저가 앞으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를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아, 오늘 발매될 게임을 사서 돌아가면 앞으로 몇 달 몇 년은 행복에 가득한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겠구나 하는 미친듯한 기대감을 부여하는 게 그들의 쇼케이스죠.”
“하지만 이번 컨벤션의 경우는 그들이 가진 가장 큰 카드를 3일간 오픈하지 않았습니까?
HC 101이요.
이미 그 게임 자체가 허먼씨가 말한 기분을 충분히 느끼게 해줬단 말이죠.
거기서 그 이상의 뭔가를 기대하는 건 아무리 그 상대가 PTW라도 너무 큰걸 바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PTW 직원이었다면, 이 정도까지 멋진 것들을 보여주었는데 아직도 ‘더’를 원하는 허먼씨 같은 유저들의 기대감에 숨이 막혔을 겁니다.”
“그건 언제나 그랬어요.”
“예?”
“메인 카드를 행사 시작 전에 오픈하든, 아니면 마지막에 오픈하든, PTW는 항상 자신의 과거와 싸워왔던 회사입니다.
매번 이뤄지는 컨벤션 때마다, 항상 ‘와, 이 이상의 컨벤션은 존재하지 않겠는데?’라는 느낌을 유저들에게 전달하죠.
그건 1차 때부터 계속 그래왔습니다.
저도 예전엔 항상 실망할 준비를 하고 행사에 참여했죠.
그래. 분명 이번 행사도 엄청나게 공을 들였겠지만, 지난 행사가 너무 끝내줬으니 이번엔 조금 실망하게 될지도 몰라.
그러나 PTW는 언제나 그런 제 준비를 박살내고 제가 상상한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었어요.
심지어 지난번 컨벤션에서는, 전 세계에서 글로벌로 진행되는 행사의 오픈 시간을 동시에 맞추는 무리수를 두었었죠.
야심한 밤에 미국의 컨벤션 행사장에 들어가며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라마다 따로 진행해도 되는 행사를 이렇게 강제로 시간을 맞춘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으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PTW를 비난하는 장문의 게시글을 남기겠다고 말이죠.
결과는 어땠습니까?
저희는 미국의 밤하늘 아래서 프랑스 르망 서킷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있었죠.
제가 직접 가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을 보면서.
강제로 시간을 프랑스 행사장의 아침 시간에 맞춰서 오픈한 PTW는, 유저들에게 그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보는 이를 강제로 납득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죠.”
“그러니 이번 쇼케이스도 뭔가 있을 것이다?”
“그렇죠. 사실 행사 자체가 거대한 쇼케이스나 다름없었던 만큼, PTW에서 별다른 발표 없이 행사를 종료해도 유저들은 충분히 만족했을 겁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술자리에서 오늘의 경험을 추억하며 다른 게이머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겠죠.
하지만 쇼케이스가 있다고 한 만큼, PTW에서는 그런 유저들의 기대감마저 깨부술 엄청난 무언가를 준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저희가 인생에서 절대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멋진 경험이 되겠죠.”
단호하게 말하는 허먼의 목소리를 들으며, 리차드가 씩 웃어 보였다.
“거의 종교에 가까운 믿음이네요.”
“PTW에 대한 팬들이 사랑은 종교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기적을 행사하고, 게이머들의 가슴에 행복을 가득 안겨주는 존재니까요.
전 제가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것이 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PTW라는 회사의 존재와 함께, 그들이 바꿔나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운 좋은 게이머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행사가 시작될 모양이군요.”
그때, 허먼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먼의 귓가에 감성적인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4대의 거대 드론이 자리를 잡고는 빛을 쏘아 거대한 스크린을 공중에 만들어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던 리차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허먼을 향해 물었다.
“여긴 가상 공간이니 저 드론은 필요 없지 않나요?
그냥 허공에 스크린을 만들면 되잖아요?”
“분위기입니다. 분위기. 저게 훨씬 현실다운 느낌이잖아요.
물론 단 4대 가지고 허공에 저 정도 해상도의 스크린을 만들 수 있는 드론 따위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말을 하던 허먼은 입을 다물었다.
드론이 재생하고 있는 영상.
그 안에서 보이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행사를 즐기던 자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저건 내가 처음 튜토리얼 존을 벗어나 행사장에 진입했을 때···.
내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PRD는 1인칭 시점의 가상현실으 지원하는 기기이기 때문에, 그 세계에 접속한 다른 유저들의 표정은 충실하게 전달하는 반면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이벤트를 즐기고 있는지는 거울 앞에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유저 본인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3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PTW는 허먼이란 인물이 이 가상 세계에서 얼마나 행복한 표정으로, 때로는 놀란 표정이나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3일간의 축제를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허먼 자신이 아바타가 주인공인 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프라이. 혹시 자네가 보고 있는 화면에는···.”
“제 캐릭터가 나오네요.”
“역시 그런가.”
이것 역시 PTW가 가진 가상현실에 대한 노하우를 제대로 표현한 연출이라 할 수 있었다.
하나의 화면을 바라보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전부 다른 화면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영상을 빤히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은 오로지 모든 것이 가상현실로 이루어진 이 공간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연출이었기 때문에.
허먼은 수많은 아바타가 마치 드라마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등장하는 영상에 주목하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자신이 등장하는 영화의 시사회를 보는 영화배우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제 HC 101파트네. 저게 백미지.’
영상은 3일간 이어진 허먼의 모든 플레이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 수많은 경험 중에서도 허먼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체험했던 중요한 장면들만을 마치 드라마의 요약본을 보는 느낌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히어로라는 존재로 활동하면서 어떻게 악에 맞서 싸우고 있었는지.
중요한 분기점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위험을 극복해 냈는지.
그것은 삼일이란 시간 동안 허먼이 ‘또 하나의 현실’에서 이루어낸 한편의 드라마였다.
“저 영상을 다운 받을 수 있다면, 나중에 제 장례식에서 틀고 싶을 정도로 멋진 영상이네요.
진짜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네.”
에스컬레이트 되는 음악의 템포와 함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프라이가 허먼에게 말하자 허먼도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마찬가지야. 진짜 멋진 경험이었지.
앞으로도 더 멋진 경험을 하게 해줄 게임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진지하게 묻겠는데 허먼 씨. 남는 PRD 저한테 파실래요?”
“꺼져.”
“웃돈 드릴게요.”
“절대 안 팔아.”
“젠장. 그럼 최소한 자주 놀러 가게는 해주세요.”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담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어느새 두 사람이 함께 싸우던 장면이 나오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영화의 클라이막스 장면처럼 긴장감 넘치고 화려한 장면이었다.
“내가 저때 저런 표정으로 저 대사를 했었군.”
“연기 잘하시네요.”
“아니, 연기를 한 게 아니니까 저런 느낌으로 말할 수 있었던 거지. 저 순간에 나는 허먼이 아니라 한 사람의 히어로.
‘프라임’이었으니까.”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진짜 연기라는 거군요.
그나저나 진짜 가슴이 벅차오르네요.
겨우 삼일이란 시간이었지만, 아마 전 평생 오늘을 잊지 못할 겁니다.”
“오늘 접속한 수천만 명의 유저들이 그 의견에 동의할 거야.
자신도 같은 심정이라고.”
마침내 음악이 끝나자, 절묘하게 편집된 영상의 재생이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유저들은, 화면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상혁의 아바타를 발견했다.
화면 속에 있는 상혁의 아바타는, 어느새 그들의 눈앞에 있는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참 좋은 시간이었죠.”
상혁의 말이 끝나자, 유저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엄청난 함성으로 상혁의 말에 화답했다.
자신들에게 그토록 멋진 3일을 선사한, 게임회사의 개발자에게 보내는 거대한 환호를 보내며.
“우우우와아아아아아아아!!!!”
“Yeeeeeeeeeeeeeah!!!!”
“PTW! PTW!”
상혁은 잠시 소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다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 있는 분들이 보신 영상은 전부 제각각 다른 영상이었겠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있었을 겁니다.
3일간 즐겁게 행사를 즐기는 자신이나 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거죠.
저희는 영상을 통해서, 3일간 여러분이 누렸던,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이 누리게 될, 저희의 신작 HC 101이 가진 가능성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저희의 진심이 잘 전달되는 영상이었을까요?”
“Yeeeeeeeeeeeeeeeeees!!!!”
“Yeeeeeeeeeeeeeeeaaaahhhh”
다시 한번 함성이 터져나오자, 상혁은 고개 숙여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먼저 PTW의 대표자로서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저희 직원들이 멋진 게임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게임은 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의미 없는 코드 조각에 불과하죠.
그 안에 있는 NPC가 얼마나 가련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존재들이든, 그들을 공격하는 빌런들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들이든, 결국 빌런이란 존재도 히어로가 되어줄 여러분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AI에 불가합니다.
NPC도 마찬가지죠.
그들은 여러분들에게 구원받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이고, 구원받기를 기다리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손으로 그들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세계는 여전히 구원을 바라는 그 상태 그대로 멈춰있었을 겁니다.”
상혁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게임의 본질 그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은, 아무리 잘 만든 게임이라도, 저희가 아무리 뛰어난 기술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더라도 그 세계는 여러분들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들이니까요.
여러분들이 세계를 바라볼 때, 저희 역시 세계를 통해 여러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저희는 3일이란 시간 동안 여러분이 얼마나 진지한 표정으로 저희가 만든 NPC들을 구해내는지, 얼마나 열정적인 감정을 토해내며 강력한 빌런 앞에서 맞서 싸우는지를 지켜보았죠.
그것은 개발자로서 참으로 감동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단순히 저희가 만든 세계를 게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활동하는 또 하나의 세계로 인정한 게이머 여러분들의 ‘진지함’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저희가 개발자로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여러분들의 그런 ‘진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희가 이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 투입한 몇 년간의 고생을 한번에 날려버릴 만큼 짜릿한 경험이었죠.”
간간이 상혁의 말에 여기저기서 환호하는 함성을 들으며, 상혁은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쇼케이스를 위해 그가 준비한, 마지막 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멋졌어요. 정말 멋졌습니다.
물론 저희는 저희가 개발한 게임에 긍지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여러분들이 이토록 멋지게 히어로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희가 작업한 대사를 따라 읽는 부분에서 조금은 어색하게 부끄러워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나는 히어로 아무개다!’같은, 어찌 보면 낯부끄러울 수도 있는 대사를 진지한 표정으로 외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여러분에게 전달하려 한 ‘히어로’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예. 여러분들은 가상의 NPC 임에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빌런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게임 오버의 위험을 알면서도, 불속에서 애처롭게 울부짖는 소녀를 위해 작열하는 화염 속에 몸을 던져 넣었죠.
PRS의 히트 센서가 통증이 느껴질 정도의 열을 피부에 가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러분은 뜨거운 불기둥을 붙잡고 시민들이 탈출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제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현재 행사에 접속해 쇼케이스를 보고 있는 3800만의 ‘게이머들’이 아닙니다.
제가 보고 있는 건, 그토록 영웅적인 위업을 또 하나의 세계에서 이루어낸 진정한 히어로들이죠.
현실의 세계에서 직장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고 옥상에서 담배 한 대 빨며 스트레스를 참고 있지만, 이 가상 세계 안에서만큼은 세계를 구원한 유일한 희망인 ‘히어로’들.
제가 보고 있는 여러분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상혁의 말을 들으며, 허먼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개발자가 게이머에게, 자신의 게임을 진지하게 대해줘서 고맙다고 감사하는 장면은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한 세계의 창조주가 자신의 세계를 구원해준 영웅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그리고 허먼은,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삐리들한테 두들겨 맞으면서도 내 정의를 관철하고, 마침내 얻어낸 능력으로 내 능력 이상의 빌런들과 싸우며 시민들을 구했지.
맞아. 이 게임을 하는 동안, 난 진정한 히어로였어.’
허먼이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에도, 상혁은 마이크를 붙잡고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이 수천만의 ‘히어로’들에게 이 행사의 클라이막스를 공개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그렇기에 저는, 오늘의 쇼케이스를 통해 진정한 히어로인 여러분들께 걸맞은 멋진 경험을 선사해드리고자 합니다.
적어도 3일간 히어로로서 멋진 활약을 펼쳐주신 여러분이 응당 받아야 할 멋진 경험을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 충격적인 고백을 하나 하려 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3일간 플레이하신 HC101이란 게임은, 가장 중요한 핵심 기능이 잠겨있는 상태로 진행되었다는 고백을 말이죠.
엄밀히 말하면, 여러분이 플레이한 게임은 반쪽짜리라는 말입니다.”
상혁의 말에 이곳저곳에서 유저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HC101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그 게임의 퀄리티는 핵심 기능이 잠겨있는 게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상혁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들을 그토록 감동하게 만든 게임이 ‘반쪽 짜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게임엔 아직도 더 멋진 부분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그 부분이야말로, 지금까지 즐긴 경험을 두 배로 즐겁게 만들만한 핵심 기능이라고.
허먼과 리차드 역시 그 말을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체험하고 파악한 HC 101은, 현재의 수준으로도 완벽한 게임 그 자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어지는 상혁의 말을 들은 유저들은 모두가 같은 표정으로 ‘아하!’라는 말을 내뱉으며 상혁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죠. 히어로물을 다루는 게임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히어로들의 존재를 배제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들에게 히어로라는 존재가 뭔지 알려주고, 우리가 히어로라는 꿈을 꾸게 만든 바로 그 존재들 말이죠.
사실 몇몇 유저 분들께서는 제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저희가 월드 곳곳에 잠겨있는 기능에 대한 힌트를 숨겨놓았기 때문이죠.”
상혁의 말이 끝나자, 영상의 화면이 바뀌며 HC 101의 세계 속 풍경을 비춰주었다.
그러자 히어로 활동에 집중할 때는 보지 못했던, 혹은 보았더라도 이스터 에그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던 수많은 요소가 슬라이드 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빌런이 탈취하려다 떨어트린 무기에 새겨진 ‘스터크 인더스트리’의 로고.
TV 매장에서 지나가듯 흘러나오는 ‘캡틴 어메리카’의 모습.
벼락이라도 맞은 듯 사방에 검게 탄 자국을 남겨 놓은 누군가의 흔적.
그것은 모두 현 시대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한 프랜차이즈의 존재들을 상징하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라이선스비가 장난 아닐텐데 저걸 해냈다고?”
“미친 거 아냐?”
“그냥 캐릭터만 가져온 거겠지.”
모두가 설마설마하는 그 순간, 누군가가 하늘을 보며 소리치는 것을 들은 상혁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늘에서 날아오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게이머가, 날아오고 있는 존재와는 정 반대 프렌차이즈의 가장 유명한 대사를 외쳤기 때문에.
“저기 보시오! (Look!)”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유저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바로 이어서 외쳤다.
“새다!(It's a bird!)”
“아뇨, 비행기인데요?(No, It's a plane.)”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날아오는 존재를 바라보며 동시에 외쳤다.
“아이론 맨이다아아아아아아!(It's a Ironmaaaaaaaaaaaaan!)”
그 순간, 화려한 불꽃이 무대 위에서 터짐과 동시에, 현 시대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슈퍼 히어로가 무대 위에 낙하했다.
그들이 영화에서 보았던, 바로 ‘그’ 포즈로.
육중한 강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멋지게 착지한 강철의 사나이는 귀가 먹어버릴 듯한 환호 속에서 천천히 자신의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린 강철 마스크를 위로 올리고 관객들을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새도 아니고, 비행기도 아니고, 슈퍼맨도 아닙니다.
아이론 맨이죠.”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아이론맨이다아아아아!!”
“미스터 스터크!!!!!!!!!!!!!”
거의 울부짖는 수준의 텐션으로 미친 듯이 환호하는 관객들을 보며, 로벗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진짜로 영화 속 인물인 토디 스터크였다면, 바로 지금 같은 기분이었을 거라고.
그것은 스튜디오에 서서 상상을 통해 펼치는 연기가 아닌, 인물 본인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진짜’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