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 사이언스 & 매직
보리스는 상대에게 정신지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즉시 미리 정신지배를 해둔 다른 시민들을 조종하여 자살을 시키려 했다.
그에게 입력된 전투 패턴은 적을 발견하는 순간 주변의 시민들을 자살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아는 히어로는 시민의 희생을 절대 좌시하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유효하며 강력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사실은, 프라이와 마찬가지로 정체를 숨기고 있던 또 한 명의 히어로가 그의 계획에 대한 준비를 사전에 모두 마친 상태라는 것이었다.
“옵티머스! 지금!”
[대규모 군중 통제 장비 ‘음향 폭탄’ 작동. 사용자와 동료의 안전을 위해 일시적으로 귀에 전달되는 모든 소리를 100% 차단합니다.]
그 순간, 쇼핑몰을 가득 메운 채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모든 사람의 말소리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정적 속에서도 허먼은 옵티머스가 가동한 장비가 정상적으로 작동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마치 허공이 울렁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일정 지점에서 퍼져나간 보이지 않는 파도가 사람들을 휩쓸자 음파가 지나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귀를 부여잡고 자리에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음향 폭탄 사용 완료. 강력한 음향 폭탄의 충격으로 현재 공간 근처에 있는 모든 인원이 일시에 기절했습니다.
기절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짧은 대상을 기준으로 2분 30초의 의식 불명 상태가 유지됩니다.
음소거 모드 해제.
다시 전투 지역의 음향을 전송합니다.]
그러자 정적에 휩싸인 쇼핑몰 내에서 미친 듯한 분노를 담아 떠들고 있는 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란 말이다!”
아마도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줄 모르고 계속 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프라이는, 그런 보리스를 보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약을 올리고 있었다.
“아, 미안. 잠깐 소리를 껐거든.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이···. 이 더러운 도둑놈이!
네가 사용하는 능력은 원래 우리 조직의 것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것이지.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는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히어로의 시야를 분산시킬 희생양이 없는 상태에서, 보리스의 그런 시도는 부질없는 노력일 뿐이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아바론!”
“대지여! 당신을 두드리는 적의 발걸음을 속박하라! 바인드!”
빠르게 뛰어가는 보리스를 추적하며 프라이가 아바론을 호출하자, 프라이의 손을 떠난 마법서가 공중을 가로지르며 주문을 시전했다.
그러자 수많은 덩굴들이 보리스가 밟고 있던 타일 바닥을 뚫고 나와 그의 발을 묶으려 시도했다.
“치잇! 잔재주를!”
공중으로 점프하여 덩굴의 습격을 피한 보리스의 몸에서 빛이 나며, 보리스는 중세 스타일의 경장을 한 채 망토를 걸친 소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것은 프라이가 허먼에게 보여줬던 조직도에 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나는 ‘정화자들’의 15위 서열 고위 사냥꾼 ‘환혹의 령자’ 보리스!
고작 정신지배만이 내 능력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라!”
본격적인 두 마법사의 전투가 시작된 것은, 바로 그 직후부터였다.
“저게 마법 계열 히어로가 싸우는 방식인가?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네.”
현재 허먼은 옵티머스가 가공한 폴리곤 형태의 낮은 그래픽 모드로만 상황을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단순히 두 사람의 사이에서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는 선들의 향연만 보더라도 뭔가 엄청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상 이미지 전송 모드를 중지하고 두 눈으로 직접 마법대 마법의 대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허먼의 차례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허먼은 인내심을 가지고 두 사람의 싸움이 결착을 맺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서.
그때, 조용히 눈 앞에 펼쳐진 폴리곤 덩어리들의 폭발을 바라보고 있던 허먼의 귓가에 옵티머스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준 낮고 저열한 방식입니다.
에너지 사용에 대한 효율이 거의 바닥에 가깝군요.
얻어내고자 하는 효과에 비해 사용되는 에너지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그렇게 낭비해도 될 만큼 에너지원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도 되잖아?
겨우 1분만 사용하면 모드 하나가 조루가 되는 너랑은 다르게 말이지.”
[제가 다루는 기술은 차원에 간섭하는 고차원적인 과학입니다.
저들이 마법이라 부르는 손장난은 절대 제가 할 수 있는 것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겠지요.
게다가 사용자가 더 성장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도 사용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제 본체를 소환하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죠.]
“그래서 말인데, 현재의 내 가장 큰 목표는 네 본체를 전투에 소환하는 거거든?
근데 만약에 진짜로 소환할 수 있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약하면 어쩌지?
지난번에 멋지게 등장하자마자 소환해서 사용한 파일드라이버같이 말이야.”
[당시 전투에서 발생한 문제는 사용자의 장비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재생능력을 가진 적을 상대하기에 좋은 장비는 따로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본체가 가진 능력은, 당신이 그 어떤 위력을 상상하더라도 그 이상의 힘을 보여줄 테니까.]
“그 말을 들으니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보고 싶군.”
[보시게 될 겁니다. 당신이 이 능력을 사용하기에 합당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면요.]
“지금까지의 히어로다운 활동으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동기화 시스템의 구동 원리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상태니까요.
제 구동 능력에 제한을 거는 시스템인 만큼, 동기화 시스템은 제 권한을 넘어선 영역에서 별도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구동되고 있습니다.
제가 사용자에게 마음대로 포인트를 부여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 포인트가 나오는 정확한 평가 기준이 히어로 활동에 대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제게 주어진 가이드에는 단순히 ‘히어로가 되어라’라는 가이드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문장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동기화 시스템을 개발한 사용자의 외할아버지께서만 알고 계시겠지요.
전 단순히 주어진 가이드에 따라 사용자를 안내할 뿐입니다.]
그때,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구석으로 날아간 보리스의 몸이 콘크리트 기둥과 충돌했다.
그리고 흩날리는 폴리곤 파편 속에서, 프라이의 것으로 보이는 3D 모델이 허공을 날아 보리스의 앞에 안착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정신지배만 막으면 쉽게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15계위 간부 주제에 더럽게 강하네.
하지만 주문을 쓸 수 있는 양팔이 모두 박살나고, 도망칠 수 있는 두 다리도 부러졌으니 더는 방법이 없겠지.
자랑하던 그 눈도 그렇게 부어서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테고 말이야.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 정신지배도 불가능하겠지.”
프라이의 말대로, 보리스의 상태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아직 숨은 붙어있는 상태였지만, 상대의 공격 수단을 저지하기 위해 프라이가 집요하게 특정 부위만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그토록 처참한 몰골로 만든 상대 앞에서, 보리스는 부어터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푸흐흐흐···. 부은 얼굴로 웃으려니 통증이 심하군.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어.”
“네 패배인데도? 네가 없으면 그 강하다는 카드케우스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희생양이 없는 상태에서, 지난번처럼 강한 괴물의 소환은 불가능할 테니까.”
“넌 정말 아무것도···. 커헉···. 모르는구나.”
형광색으로 빛나는 폴리곤 덩어리가 붉은색 폴리곤 조각들을 입에서 뱉어내는 것을 보며, 프라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모르는 건 너지. 우린 이미 네 능력에 막기 위한 완벽한 계획을 세웠고, 너는 우리가 만든 함정에 빠졌지.
전투에 들어간 순간부터, 우리의 승리는 정해져 있었어.
네게 남은 건 이제 패배를 인정하고 마도 감옥 안에 봉인되어 심판을 기다리는 것뿐이고.”
“하하하! 패배가 정해진 싸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환혹의 령자라는 존재가 환혹이라는 능력을 빼앗긴 시점에서, 이미 패배는 확정이었지.
게다가 네가 훔쳐간 그리모어가 그토록 약한 물건이었다면, 굳이 우리가 봉인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고통을 참으며 저항한 것은, 단순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이라도 벌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잘 알고 있구나. 하지만 넌 나를 상대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보리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리스는 자신의 말을 들은 상대의 표정이 일그러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프라이는 태연한 태도로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보리스를 향해 말했다.
“그렇겠지. 가장 총애하는 똘마니이자 자신의 능력의 근원이 되는 부하가 피떡이 되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아마도 넌 패배를 직감하자마자 카드케우스를 호출했겠지.
그리고 카드케우스는 아마도 자신이 현재 소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소환수를 데리고 이곳으로 오는 중일 테고.”
“그걸 알면서도 여유가 넘치는군. 지난번의 그 괴물조차도 상대하기 어려워했던 주제에!”
순간 쇼핑몰 천장의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며 머리가 3개 달린 15미터 크기의 헬 하운드 위에 올라탄 남자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괴물은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거대한 포효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 주인의 분노가 담겨 있는 듯한, 광포한 포효를.
“그아아아아아아악!!!!!!!!!”
쇼핑몰의 유리창이 일시에 깨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프라이는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가 주는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거수의 포효가 끝나자, 분노한 개 주인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보리이이이스으으!!!”
“카드케우스님!”
“이 버러지 같은 도둑놈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이제 회수 따윈 신경 쓰지 않겠다!
아바론과 함께 산채로 씹어먹어 주마!”
프라이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보리스를 향해 말했다.
“쟤 겁나 열 받았나 본데?”
그러자 보리스가 프라이에게 환희에 찬 비명을 질렀다.
“당연하지! 어리석은 도적놈아! 너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네가 그리모어를 입수하기 훨씬 전부터, 우린 스스로의 끝없는 희생을 통해 마력을 축적해 놓았으니까!
보아라! 저 최강의 생물을!
아직 그리모어 아바론이 가진 힘의 1할도 제대로 끌어쓰지 못하는 네 녀석의 능력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를!”
“확실히 세 보이긴 하네. 하지만 보리스. 조금 전 너는 내가 가장 중요한 사실을 하나 놓쳤다고 했지?
난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군.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라는 사실을.”
“우리?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백업을 데리고 온 건 너 혼자가 아니라는 거지.”
그 순간, 쏜살같이 다가온 무언가가 괴물의 목 근처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보리스는, 그토록 강대한 괴수의 머리 중 하나가 버터처럼 썰려 나가는 것을 보며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순식간에 재생되었어야 할 괴물의 목이, 꺼지지 않는 불꽃과 함께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크아아아아아악!!!!!!!”
마치 사람의 비명을 기계 안에 넣고 갈아버린 것 같은 괴물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히어로 슈트를 입은 허먼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오른팔에 달린 붉은 색 검을 들어 올려 카드케우스를 향해 내밀며 말했다.
“재생해봐. 개 같은 새끼야. 그 잘난 재생력이 3천 도로 작열하는 테르밋 소드(Thermite Sword) 앞에서도 작동하는지 실험해볼 테니까.”
“동료를 부른 것인가!”
분노하는 카드케우스가 외침 속에서, 프라이는 천천히 날아와 허먼의 곁에 섰다.
그리고는 카드케우스를 향해 말했다.
“비겁하다고 하지는 마라. 너희도 기본 2인 1조잖아.
넌 오늘 2:1로 두들겨 맞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느끼게 될 거야.”
[시각 보정 모드 해제. 지금부터 실제 시야를 전송합니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들려오는 옵티머스의 목소리와 함께, 허먼과 프라이는 폴리곤으로 된 세계가 다시 PRD의 압도적인 그래픽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타이밍 좋네요. 이거 안 꺼줬으면 이 멋진 전투를 PS1 그래픽으로 즐겨야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했을 텐데.”
“아니, 나도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실제로 저 괴물을 보니, 생각이 바뀌는군.
저건 폴리곤일 때가 더 덜 무서웠어.”
“그건 맞아요.”
당장이라도 자신들을 씹어먹을 듯 노려보는 헬 하운드의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조용히 미소를 교환했다.
그리고는 전투 자세를 취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덤벼라! 머리 두 개밖에 안 남은 강아지 새끼야!”
그 외침을 시작으로, 전투는 개시되었다.
두 사람 각자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기에, 두 사람의 힘을 합쳐야만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와의 전투가.
그것은 마법과 과학이라는,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의 콜라보라는, ‘빅 이벤트’의 클라이막스에 어울리는 화려하고 격렬한 전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허먼의 완벽한 계획은 전투의 시작부터 심각하게 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절대 재생할 수 없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옵티머스의 보장과는 다르게, 잘린 괴물의 목에서 조금씩 새 살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허먼은 전투를 개시하자마자 옵티머스에게 따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X발?! 재생 못 한다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3천 도의 온도를 견디는 생체 조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분석한 결과, 해당 몬스터는 자신이 공격받은 공격에 대한 내성을 가진 조직을 새로 만드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것이 마법에 의한 데미지든, 물리적 공격에 의한 데미지든, 한번 받은 공격은 바로 무효화 하는 능력으로 보이는군요.
마법이라는 황당한 능력에 걸맞은 어처구니없는 적응능력입니다.]
옵티머스의 분석대로, 괴물은 한 종류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피부를 변화시키며 같은 공격에 대한 내성을 얻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재생만 할 수 있었던 지난번의 괴수보다 더욱 끔찍한 능력이었다.
“아니, 애당초 모든 전투 플랜이 저 녀석의 끔찍한 재생능력을 막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설계된 거잖아요!
공격 내성에 진화까지 하는데, 저걸 어떻게 잡죠?”
괴물의 이빨에 씹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탈출한 프라이의 외침을 들으며, 허먼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이 시각에도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드의 유효시간이 시시각각으로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라 허먼. 생각해.’
힌트는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파악한 이 게임은, 어떤 경우에도 해결할 수 없는 과업을 요구하지 않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는 단순히 자신이 주어진 정보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허먼은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내 욕망이 이끄는 대로.’
허먼은 체험장 입구의 NPC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회전 시켰다.
그리고는 전투 계획을 세우기 전, 자신이 프라이를 깨우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협력 보상으로 니가 낄 수 있는 마력으로 돌아가는 ‘마도 과학 장비’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내 장비에 마법 인첸트가 된다던가!’
허먼은 옵티머스가 자신에게 했었던 이야기도 떠올렸다.
‘해당 오브젝트는 사물의 구성 원리 및 설계를 이해할 수 없기에 전송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바론이 프라이에게 말했던 대화도 떠올렸다.
‘마력은 인간들이 말하는 ‘전기’라는 에너지로 변환하기엔 지나치게 고차원적인 에너지다.’
마지막으로, 옵티머스가 자신에게 했던 설명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허먼은 모든 퍼즐이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 이벤트 자체가, 그리고 저 괴물이 가진 말도 안 되는 능력 자체가, 플레이어로 하여금 이런 결론을 내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직감을.
‘그것이 마법에 의한 데미지든, 물리적 공격에 의한 데미지든, 한번 받은 공격은 바로 무효화 하는 능력으로 보이는군요.’
허먼은 방어 모드로 괴물의 공격을 막아내며 프라이에게 외쳤다.
“이건 분명 단일 성향의 공격에 적응할 수 있는 형태의 괴물일 거야!
마법과 과학이 섞인 공격엔 대응할 수 없을 거라고!”
“예?! 하지만 콜라보 시도는 전부 실패했었잖아요?!”
“그때는 위기 상황이 아니었지! 아바론에게 다시 부탁해봐!
지금 이대로면 무조건 필패한다고!
나도 옵티머스를 설득할 테니까!”
프라이는 허먼의 말대로 아바론의 설득에 들어갔다.
그러나 허먼의 예측이 틀렸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바론의 태도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거절한다. 마도의 능력은 전능하기에, 과학 따위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계약자 네가 더 분발하면 될 일이다.
내 능력을 더욱 끌어올려라.
그럼 넌 어떤 적이든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저 미친 괴물을 상대로도 그 말이 나오냐?”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럼 지금 당장 이 전투에서 내가 각성할 수 있다고?
지금 바로 네가 가진 능력을 당장 100% 끌어쓸 수 있다는 거야?
뒈지기 직전인데 자존심 따지게 생겼냐?”
“네 목숨은 마법이란 존재가 가진 숭고한 자부심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좋아. 그럼 난 이번에 사망하면 부활하지 않겠어.”
“뭐!?”
“불사의 저주를 거부하고 그대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내가 이번 전투에서 죽으면, 너의 존재도 그걸로 끝이야.
누구도 널 통해서 이 세계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런 미친···.”
“쫄리면 뒈지시던가. 사이드킥이면 사이드킥답게, 히어로의 승리에 공헌하라고.”
프라이는 ‘말을 듣지 않으면 이 계정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아바론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각, 허먼 역시 옵티머스에게 비슷한 협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옵티머스, 넌 내게 말했지. 히어로 다운 행동을 하는 게 너를 사용할 자격을 얻는 방법이라고.
다시 생각해봐. 겨우 자존심 때문에 이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방법을 포기하는 게, 히어로가 할 법한 일인가.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히어로는 그렇지 않아.”
[저의 개발자인 당신의 외할아버지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세계를 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에 현재의 사용자가 사용할 수 없는 수많은 장비를 남겨두면서까지, 홀로 모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신 거죠.
전 그분의 의지를 져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이 원하신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분이 만든 수많은 장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온 장비지.
그리고 지금은, 바로 그 ‘어떤 수단이든’ 필요한 상황이고.”
[이해 불가. 요청을 거절합니다.]
“좋아. 그렇게 컴퓨터처럼 나온다 이거지? 그럼 이건 어때?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난 히어로 활동을 포기하고 다시는 실험실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그럼 넌 네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 불가능한 상태가 되겠지.
내가 실험실 열쇠를 넘겨주지 않으면, 누구도 널 쓰지 못할 거고.”
[지금 사용자는 자신의 서포터인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자존심 때문에 빌런을 물리칠 기회를 져버리는 건 히어로의 사이드킥이 하는 일이 아니야.”
[사이드킥이 하는 일···.]
옵티머스가 허먼의 말을 곱씹던 순간, 방어 행동만을 하며 서포터를 설득하던 두 사람을 보던 카드케우스가 크게 소리치며 말했다.
“내 하수인의 능력에 겁먹어 반격도 못 하는 주제에 주저리주저리 말만 많구나!
이제 가지고 노는 것도 지겨우니 한 방에 날려주마!”
미처 대응조차 하지 못할 속도로, 카드케우스의 헬 하운드는 두 사람을 엄청난 속도로 후려쳐 날려버렸다.
그리고 서포트의 설득 때문에 집중력이 흩어진 두 사람은, 그런 헬 하운드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근처 매장의 쇼 윈도를 뚫고 콘크리트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비산하는 먼지구름과 함께 찾아온 정적.
그 속에서 구석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던 보리스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보았느냐! 카드케우스님께서 건방진 너희들을 걸레짝처럼 날려버렸다는 사실은! 내 눈이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보리스의 기쁨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꼴로 걸레짝이 돼야 했을 두 사람이, 먼지 속에서 태연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카드케우스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콘크리트 벽에 처박히기 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뭐가 다른 거지?’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외형적인 변화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카드케우스가 그 변화의 정도를 파악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카드케우스는, 집중력을 총동원한 끝에 두 사람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부터 마력을 전기로 변환하여 네 슈트에 공급하겠다.
무한한 자원이 제공되는 과학의 힘이 어떤 것인지, 내게 똑똑히 보여주도록.”
아바론의 목소리는 프라이의 근처에서 나오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옵티머스의 목소리도, 허먼의 근처에서 들려오고 있지 않았다.
[신체에 가해질 수 있는 데미지를 상쇄하는 에너지 장을 펼쳤습니다.
지금부터 히어로 얼티밋 소서러에게 ‘실험실’에 있는 모든 장비의 임시 사용권한을 이전합니다.
사용권 한의 유효 기한은,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입니다.
마법 따위가 가진 능력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과학의 위대함을 그 몸으로 체험하도록 하십시오.]
서로가 가진 서포터를 교환한 두 영웅은, 그렇게 상대 히어로의 서포터가 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전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헬하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X발. 콜라보 한번 하기 더럽게 힘드네. 진짜.”
눈앞에 떠 있는 3개의 가이드 대사 중에서, 사전에 미리 짠 것이 아님에도 똑같은 대사를 고른 두 사람은 조용히 동일한 전투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상대도 자신과 똑같은 대사를 골랐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덤벼라. 똥개야. 마도 과학의 진정한 힘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체감하게 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