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 내가 바라는 대로
허먼이 가장 먼저 시도한 테스트는, 프라이에게 아티펙트를 받아 실험실에 옮겨놓는 것이었다.
허먼의 능력의 베이스는 기본적으로 실험실에 있는 사물들을 자유롭게 소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환이 가능하면 사용도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허먼이 프라이에게 받은 마법 오브젝트를 소환하려 하자, 허먼의 AI 서포터인 옵티머스는 덤덤한 목소리로 허먼의 요청을 거절했다.
[해당 오브젝트는 사물의 구성 원리 및 설계를 이해할 수 없기에 전송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허먼이 빌려준 장비를 프라이가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저 허접한 쇳덩어리는 마력 회로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스트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군.
마력은 인간들이 말하는 ‘전기’라는 에너지로 변환하기엔 지나치게 고차원적인 에너지다.”
그리모어인 아바론의 말에 따르면 ‘동력원이 다르다’라는 이유로 허먼의 장비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프라이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먼에게 장비를 돌려주었다.
“마도 과학 장비의 꿈은 여기서 접어야 할까요?”
그러자 허먼은 고개를 저으며 프라이를 향해 의지에 불타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야. 날 믿으라고. 마도 과학 장비 루트는 무조건 있으니까.”
“아니 지금 시스템이 안 된다고 거부하고 있잖아요.
허먼씨의 실험실은 제가 사용하는 아티펙트를 분석하지 못하고 있고, 제 그리모어는 허먼씨의 과학 장비에 동력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이건 그냥 계열이 달라서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HC101을 플레이하면서 가장 좋아하게 된 이 게임의 강점은, 이 게임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게임보다 히어로물이라는 장르 클리셰에 충실하다는 거였어.
히어로인 플레이어의 유년기 시절부터 히어로로서의 능력을 습득하는 과정까지 충실하게 전달하는 인트로 파트는 둘째 치더라도, 항상 내가 현재 사용하는 전투 패턴을 비웃는 듯한 능력을 사용하는 빌런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그놈들을 무찌를 열쇠를 그 전까지의 스토리 파트에서 얻어내는 점도 그랬지.
한번은 실험실에서 트레이닝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옵티머스가 실험실 창고 정리를 시키더라고.
그때 창고 구석에서 발견한 장비가 파일드라이버였고.
그 전까지는 남은 제한 시간을 모두 사용하면서 에너지 출력의 5배 데미지를 입히는 장비를 쓸 일이 없었으니까, 난 그걸 장비를 놓아두는 선반에 놓아두고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아?”
“파일드라이버가 아니면 잡을 수 없는 빌런이 나타났겠군요.”
“맞아. 일정 수준 이하의 데미지는 전부 흡수해서 반사하는 빌런이었거든.
단 한방에 그 흡수량을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데미지를 줘야 하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창고에 처박아둔 파일드라이버가 떠오르더라고.
내가 파악한 HC101은 그런 게임이야.
마치 히어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게임 속 이벤트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힌트들이 내가 적을 물리치는 열쇠가 되는 게임이지.”
“그럼 마도 과학 장비에 대한 힌트를 보셨기 때문에 이렇게 집요하게 파고드시는 건가요?”
“그렇지.”
“그게 대체 어떤 힌트길래?”
“내가 생각하는 힌트는 두 가지야.
첫째는 조금 전 두 서포터의 언급이야.
옵티머스는 ‘이해하지 못하기에’ 전송을 하지 못한다고 했어.
그리고 아바론은 마력이란 에너지가 전기라는 에너지에 비해 ‘고차원’적인 에너지이기에 동력을 공급할 수 없다고 했고.
그 말은 돌려 표현하면 옵티머스가 마법 아티펙트의 해석에 성공하면 나도 마도 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그리고 아바론이 마력이란 에너지의 수준을 저차원적인 레벨로 낮출 수 있다고 한다면 너도 내 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못한다는 이야기를 그냥 그럴싸하게 돌려 표현한 게 아니라요?”
“거기서 내 두 번째 이론이 나오지.
일단 이상혁이 출연한 내 방송에서, 상혁은 히어로끼리 ‘유니언’이란 단위로 그룹을 맺고 활동할 수 있을 거라고 언급했었어.
‘업벤저스’나 ‘저스티스 파티’처럼, 여러 히어로가 동맹을 맺고 공통의 적에 대응하는 플레이가 가능하다고.
사실 그건 이런 게임에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개념이야.
콜라보이벤트는 히어로 장르의 꽃이니까.
게다가 다른 히어로가 쓰는 능력을 그 히어로에게 넘겨받아 사용하는 건 로망 중의 로망이라고.
이 정도로 말도 안 되게 기본에 충실한 히어로 게임을 만들어낸 PTW에서, 과연 그 부분을 구현하지 않았을까?
다른 게임회사도 아닌 PTW에서?”
허먼의 이야기를 들은 프라이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게임의 디테일을 보면, 그런 이벤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긴 해요.
하지만 지금은 양쪽의 서포터가 전부 장비 교환을 거절한 상태죠.
어떻게 이 상황을 풀 수 있을까요?”
“나는 HC101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로비에서 안내하고 있는 NPC에게 질문을 하나 했었지.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초반 팁 같은 게 있냐고.
그러자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지.
본인이 원하는 루트에 대한 힌트가 나타나면, 믿음을 가지고 그 힌트를 따라가라고.
본인의 욕망에 충실하게 플레이하는 것이 이 게임을 즐기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나는 초반부터 그렇게 했어.
SF 계열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 인트로 파트에서 과학 계열이 아닌 모든 제안을 거절했지.
심지어 친구가 농구 한판 하자고 한 것도 전부 거절했어.
잘못해서 신체 능력에 보너스가 들어가서 육체 능력 계열 보너스를 얻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대신 과학이랑 조금이라도 관련 있다고 생각한 모든 이벤트에 참여했지.
그리고 얻어낸 게 지금의 내 능력이야.
물론 내가 원래 바라던 능력은 아이론맨 같은 기계 슈트를 착용하는 히어로의 능력이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조금 다른 능력을 받은 건 맞지만, 나는 지금 내 능력에 100% 만족하고 있어.
게다가 아직 내 실험실에 있는 10미터짜리 거대 로봇 소환은 동기화 포인트가 모자라서 써보지도 못했지만, 그걸 쓰는 순간이 끝장나게 멋질 거라는 건 굳이 써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그 모든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난 이 게임이 플레이어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든 형태의 이벤트를 보여주는 게임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마도 과학 장비에 대한 이벤트도 분명 존재할 거야.”
“단지 허먼 씨가 그것을 바라고 있다는 이유로, 그게 게임 안에 존재할 거라고요?”
“이 게임의 개발사가 PTW이기 때문에, 유저가 바라는 형태의 이벤트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거지.”
“젠장, 평소 같으면 개소리라고 일축했을 텐데, PTW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소름끼치게 설득력 있는 말이네요.
맞아요. 거긴 퀘스트 설계하는 스토리 팀 인원만 100명이 넘는 곳이었죠.
설마 100명이란 인원 중에 단 한 명도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네요.
좋습니다. 그럼 마도 과학 장비라는 꿈의 콜라보 장비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 우린 뭘 해야 그걸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게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해보자.”
허먼의 황당한 말을 들은 프라이가 허먼을 보며 물었다.
“이 게임이, 지금도 현실과 헷깔릴 정도의 현실감을 주는 게임이긴 하지만 게임이 아니라고 가정하자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아니. 그러니까 일반적인 게임의 퀘스트 형태를 따라서 추측하는 게 아니라, 이게 우리가 주인공인 시즌제 드라마라고 생각해보자고.
그럼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콜라보 장비를 획득하게 되는 스토리 라인은 뭐가 될까?
주인공들을 돕는 서포터가 서로를 경멸하고 인정하지 않아서 콜라보가 진행되지 않는 상태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유저에게 와닿을 수 있는 형태의 스토리가 어떤 게 있지?”
“플레이어의 위기 앞에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힘을 빌리는 전개가 아닐까요?”
“그럼 그게 이 콜라보 퀘스트의 메인 스토리일거야.
이 게임은 ‘아니 이런 걸 구현했다고!?’같은 느낌의 게임이 아니라, ‘아니, 이런 것까지 구현했다고?’ 같은 느낌의 게임이니까.”
“세상에, ‘내가 바라고 있으니까 그들이 만들어 두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플레이하는 게임이라니···.”
“즐겁지?”
허먼이 미소지으며 말하자, 프라이가 마주 웃어 보였다.
“엄청요. 심장이 두근두근합니다.”
“그럼 그 믿음을 가지고 퀘스트를 살펴보자고.
솔직히 멀티플레이 합류 퀘스트가 발생하기 전까지, 내가 상대한 대부분의 빌런들은 나 혼자의 힘으로 어찌어찌 상대가 가능한 녀석들이었어.
보통 1시간짜리 드라마 분량에 걸맞게, NPC와의 이벤트 안에서 빌런에 대한 정보와 힌트를 얻고, 그걸로 전투에 들어가서 승리를 얻어내는 방식이었지.
하지만 이게 진짜로 시즌제 드라마 같은 형태의 스토리 라인을 갖춘 게임이라면, 콜라보 이벤트가 그 정도 볼륨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을 거야.
히어로가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다른 지역의 히어로가 합류하는 이벤트는 항상 몇 화 정도의 볼륨이 할당되어 있는 ‘빅 이벤트’니까.”
“그거라면 짐작가는 게 있어요.
그때 같이 힘을 합쳐서 상대했던 빌런은, 제가 퀘스트 도중에 힌트를 얻어서 추적 중이던 빌런 집단의 소환수였거든요.”
“빌런 집단? 딱 듣기에도 뭔가 빅 이벤트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중세시대에 마녀 사냥을 전문으로 하던 마녀 사냥꾼에서 갈라져 나온 집단인데, 스스로를 ‘정화자’라고 부르는 놈들이죠.”
“정화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능에 오염된 세상을 정화한다는 의미에요.
그 말대로, 이능을 가진 히어로들을 사냥하는 히어로 사냥꾼들이죠.”
“그런 놈들이니 마법사에게 마법이 통하지 않는 괴물을 내보낸 거겠지.
말하자면 히어로 사냥 전문가들이라는 거군.
근데 그런 사상을 가진 놈들이 시민을 왜 공격하지?”
“시민을 공격하면, 히어로가 등장하니까요. 시민은 미끼 역할이죠.
이건 제가 그들을 추적하면서 비밀기지에서 입수한 자료들입니다.”
프라이가 벽장에 손을 뻗자, 몇 개의 스크롤과 양피지 조각, 단검 따위가 프라이를 향해 날아왔다.
프라이는 그것을 잡아 테이블에 펴 놓고는 허먼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저를 유인하기 시작한 이유는, 저와 계약한 그리모어 아바론이 그들의 봉인 대상에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에요.
저주받은 13 마도 중의 하나라고 하던데, 나머지 마도에 대한 설명은 넘어갈게요.
아무튼 그들은 제가 유적의 봉인을 깨트렸다는 사실과 그 안에 있는 그리모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추적 끝에 제 존재를 파악했고요.”
프라이는 가장 큰 스크롤을 펼쳐 허먼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조직도처럼 보이는 선 위에 여러 인물의 초상화가 작은 동그라미 형태로 그려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저희를 고전 시킨 정화자의 정체는 여기 그려진 ‘희생의 령자(令子)’ 카드케우스입니다.
제물의 희생을 전제로 강력한 소환수를 소환하는 빌런이죠.”
“그럼 이미 괴물이 소환된 시점에서 희생자는 발생했다는 거잖아?
지난번에 그 녀석 수준으로 강력한 괴물을 소환하려면 몇 명이 필요한데?”
“최소 100명 이상.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진짜 위협은 카드케우스가 아닌 그 밑의 이녀석입니다.”
프라이가 카드케우스 밑에 선으로 이어진 작은 소년을 가리키자, 허먼이 말했다.
“별로 강해보이지 않는데? 게다가 계급도 카드케우스의 부하처럼 보이고.”
그러자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바론이 끼어들었다.
“녀석의 이름은 ‘환혹의 령자 보리스’. 녀석의 능력은 자신의 눈을 마주친 상대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프라이는 아바론의 말을 이어받으며 계속 설명했다.
“카드케우스의 능력은 희생이 전재인데, 희생은 살인과는 다른 개념이죠.
희생자가 스스로 목숨을 바쳐야만 카드케우스의 능력이 성립하니까요.
그래서 정신 지배 능력이 필요한 겁니다.
보리스가 돌아다니며 시민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카드케우스의 단검을 넘겨주면, 지정된 시간에 단체로 시민들이 자살하면서 소환주문이 완성되는 거죠.”
“그럼 이 보리스라는 녀석이 활동하는 곳을 찾아서 먼저 제거하면 카드케우스는 속 빈 강정이 된다는 소리 아냐?”
“어휴. 제가 그걸 시도 안해봤겠습니까? 가장 먼저 그것부터 시도했죠.”
“근데 실패했다고?”
“카드케우스가 소환한 괴물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기본적으로 보리스 자체가 엄청 강력한 정신 지배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아바론이 가진 정신 오염 저항 능력을 가볍게 파괴할 정도로요.”
“그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싸우는 방식은?”
“단순히 보리스의 눈과 마주치는 것 말고도, 보리스가 정신 지배한 대상과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능력이 발동해요.
저는 아바론 때문에 정신지배를 당해도 자살은 하지 않지만, 대신 아바론이 정신 오염을 해제할 때까지 1분간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되죠.
보리스는 일단 히어로와 마주치는 순간, 근처에 자신이 정신 지배해둔 일반 시민을 자살시키기 시작합니다.
히어로가 그걸 막으려고 움직이는 동안 자신은 몸을 피하고요.”
“시발 패턴 진짜 개 더럽네.”
“처음엔 한명이지 나중에 5~10명씩 동시에 단검을 뽑아 드는데 진짜 제가 걔 잡으려다가 떨어진 평판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아요.”
“네 능력으로는 역부족이란 말이군.”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허먼씨도 그런 종류의 빌런을 상대하는 건 어려울 거라고 봐요.
스피드가 빠르고 힘이 강하다고 상대할 수 있는 빌런이 아니니까.”
그러나 프라이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허먼은 싱글벙글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뭔가의 해결책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허먼은 밝은 목소리로 프라이를 향해 말했다.
“그런 타입의 빌런을 상대한 적은 없지만, 시선을 마주 보면 안 되는 형태의 괴물은 잡아본 적이 있지.
바실리스크. 마주 보는 순간 상대를 마비시키는 거대한 뱀 형태의 괴물이었지.
그리고 나는, 어째서 우리 두 사람의 콜라보 이벤트로 이런 형태의 빌런이 잡혔는지 슬슬 이해가 갈 것 같아.
이건 전혀 다른 두 히어로의 협력이 없으면 잡는 게 불가능한 빌런이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프라이에게, 허먼은 자신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오로지 HC 101이라는 게임에서만 가능할 법한, 매우 ‘황당한’ 계획을.
그리고 그것은 프라이가 듣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어보이는 계획이었다.
***
-미친 사람 더럽게 많네.-
귓가에 들려오는 허먼의 투덜거림을 들은 프라이가 말했다.
-긴장하세요. 제 감각대로라면 이중에 절반 이상은 이미 정신 지배된 상태니까요.
만약에 보리스를 잡더라도, 우리가 시민들의 희생을 막지 못하면 저희는 사상 최대의 참사를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될지도 몰라요.-
-그 감각이라는 건 어떻게 느껴지는 거야?-
-주변에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면, 그 방향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제 몸은 거의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뜨거운 상태고요.-
-쇼핑몰에서 계획을 진행하자고 한 게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네.-
-방법이 없었잖아요. 보리스가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으니까요.
아마 저희가 먼저 선공하지 않으면 다음 괴물 소환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겁니다.
저는 느낄 수 있어요.
지난번보다 훨씬 강력한 괴물을 소환하기 위해, 카드케우스가 훨씬 많은 제물을 준비했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렇군. 내 감각에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말이지.-
-그나저나 이 계획은 진짜 미친 것 같아요.
세상에 딥 다이버를 쓰고 PRD를 통해서 들어온 세계 안에서, 딥 다이버를 쓰고 돌아다닌다니.-
-TV도, 스마트폰도, PS같은 콘솔 게임기도 있는 세계인데 딥 다이버가 있다고 이상할 건 없지.-
-그건 그런데 딥 다이버를 쓰고 돌아다니는 건 좀···.-
-의외로 스트리머중에 그렇게 하는 사람 꽤 있어.
여행 스트리머 중에는 딥 다이버 방송 전용 스트리머도 존재하니까.
아무튼, 계획은 숙지하고 있지?-
-예.-
허먼이 세운 계획은 이전에 그가 바실리스크를 잡았던 경험에 기반하고 있었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시각 정보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옵티머스가 가공한 3D 시뮬레이터의 형태로 전달 받는 것.
그것은 폴리곤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전투하는 느낌의 독특한 감각이긴 했지만, 덕분에 허먼은 어렵지 않게 바실리스크를 물리칠 수 있었다.
문제는 히어로 슈트 자체에 영상 송출이 가능한 바이저가 달린 허먼과는 다르게, 마법으로 인한 인식 저하 주문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 프라이는 옵티머스가 가공한 영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먼은 근처의 게임 샵에 들러 딥 다이버를 하나 구매하여 프라이에게 넘겨주었고, 프라이는 지금 ‘딥 다이버’게임 안에서 ‘딥 다이버’를 쓰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영상이 송출되기 시작하면 시각에 의한 마력 감지는 불가능해지므로, 우선은 기능을 끈 채 AR 모드로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프라이는 정신을 집중하여 조금이라도 마력의 흐름이 강한 인물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수천명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쇼핑몰에서 감각만 가지고 특정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프라이는 정신을 집중하는 것에 꽤나 고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때, 프라이의 귓가에, 그리모어 아바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쉐이프 쉬프터 (형태변화자)다.
이전에 만났을 때의 이미지는 모두 잊어라.
현재의 보리스는 노인의 형태 일수도, 아니면 건장한 남성일 수도, 심지어 임산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눈으로 보이는 모습에 의존하지 말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하도록.”
문제는 마력의 흐름이란 것 자체가 인간의 신체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컬러로 표현되는데,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NPC들은 온갖 색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몸에 느껴지는 온도 감각과 시각 정보에 의존해서 찾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퍼즐이었다.
“X발 무슨 매직아이도 아니고, 슬슬 눈이 아픈데.”
그러자 허먼의 목소리가 무전으로 들려왔다.
-잠깐, 생각을 좀 바꿔보자.-
“예?”
-뭔가 기발한 방법이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이게 드라마라면, 주인공이 진짜로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매직아이나 하다가 적을 발견하지는 않을거란 말이지.
보통은 이럴 때 기발한 발상의 전환으로 적을 찾게 되기 마련이라고.-
“드라마라면 그렇겠죠.”
“드라마처럼 만들어진 세계니까 드라마처럼 사고하고 드라마처럼 행동해야지.
자, 생각해봐. 보리스의 역할은, 이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서 자신의 눈을 보게 하고, 희생 주문이 걸린 단검을 건네주는 거야.
그러려면 길가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 필요가 있겠지.
만약 이게 진짜 존재하는 세계이고, 보리스라는 빌런이 진짜로 존재한다면, 그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사람으로 변신했을까?
수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면서도 상대가 전혀 의심하지 않고, 무언가를 건네주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사람 말이야.”
순간 프라이의 머리속에 마치 번개가 때린 것처럼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그는, 눈으로 보이는 미약한 마력의 흐름으로만 빌런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허먼의 말처럼 ‘상대의 의도나 목적’을 고려해서 찾으려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프라이의 시야에, 수많은 인파 속에 몸을 감춘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허먼이 말한 것처럼, 누구에게 말을 걸어도 의심을 사지 않고, 누구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어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한 남자는, 몸에 백화점 스텝처럼 보이는 형광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잡았다!!(Gotcha!!)”
순간 프라이는 남자의 고개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꺾이는 것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바로 눈을 마주치려는 것처럼.
그러나 그 순간, 딥 다이버를 통해 들려온 옵티머스의 목소리가 프라이의 고막을 때렸다.
[타겟 발견. 시선 일치 차단을 위해 시각 모드를 폴리곤 모드로 전환합니다.]
프라이는 순식간에 VR모드로 전환된 딥 다이버가 자신의 시야를 순식간에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3D 월드로 바꾸는 것을 보면서, 이런 시야로는 저 많은 사람들 속에서 타겟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프라이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옵티머스는 오직 타겟인 남성의 몸만 형광색으로 밝게 빛나는 선으로 표현하여 프라이의 걱정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수천만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몰려 있더라도, 저런 색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일 것 같았기에.
눈앞에 있는 형광빛의 남자는, 자신과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정신 지배를 당하지 않는 프라이를 보며 매우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너! 넌 정체가 뭐지? 머리에 뒤집어쓴 것이 뭐길래 내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이냐!”
천천히 주먹을 뚜둑이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프라이에게 남자가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프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이전 퀘스트에서 보리스를 상대하며 받은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듯한 짜릿한 감각을 느끼며, 자신이 생각하는 이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사를 날렸다.
“내가 머리에 쓴 게 뭐냐고?
과아아아학이다! 이 X새끼야! (This is SScieeeeence! bi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