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폭풍전야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에 있는 마벌 본사에서 최종 사용권 협상을 마친 상혁은 그 길로 한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상혁을 맞이한 것은 공항을 가득 메운 기자들의 무리였다.
“PTW가 삼정과 손잡고 통신망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올해 예정되어 있는 5G 주파수 경매에 참여하실 생각인가요!?”
“한국에서의 PRD 서비스는 어떤 형태로 개시될 예정입니까?”
캐리어를 든 채로 플래시 세례를 받던 남자는 조용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기자들은 그가 상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한참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무슨 벌떼같이 몰려드네.”
같은 시각.
차에 올라타자마자 코와 턱에 붙어있는 가짜 수염을 떼며 상혁이 투덜거리자, 운전대를 잡은 민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변장까지 하게. 뭔 연예인이냐?”
“안 했으면 붙잡혀서 한 시간은 떠들어야 했을 거야.”
“미리 보안 요원들 불러서 돌파해도 되잖아.”
“글쎄, 그게 비쥬얼 적으로는 더 연예인 같은 느낌일걸?
그리고 난,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했거든.”
“더 중요한 일이 뭔데?”
“회사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공항까지 친히 나를 모시러 나온 CTO에게 이번 출장의 결과를 보고하는 것 같은 일.”
“좋은 태도야.”
민준이 웃으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물었다.
“마벌과의 협상은 어떻게 되었어?”
“우선 엔더 게임까지를 기준으로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나오는 캐릭터에 대한 사용권은 얻어낼 수 있었지.
다만 당연히 원작 저작권이 저쪽에 있으니, 검수는 받아야 해.
이쪽에서 퀘스트와 연출 등을 기획해서 보내면, 확인 과정을 거쳐 게임에 삽입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반대로 그쪽에서 제안하는 것에 대한 결정권은 우리 쪽에 있을 거고.”
“결국, 양사의 합의에 따라 일이 진행될 거라는 거네.”
“그렇지. 전반적으로는 우리가 저작권을 빌려서 그쪽의 캐릭터를 카메오 수준으로 활용하는 느낌이 될 거야.
표면적으로, 다즈니는 우리와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아 하니까.”
“그걸 노골적으로 언급했었어?”
“중국 쪽 서비스는 예정에 있는지 묻더라고.”
“하긴 다즈니가 친 중국 행보를 이어가고 있긴 하지. 그래서 뭐라고 답했는데?”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합니다.’라고 했지.”
“그런데도 사용권 계약을 받아들였다고?”
“그쪽에서는 손해 볼 게 없잖아.
어차피 다음 영화에서 최고 인기 캐릭터인 아이론 맨이 사망할 거고, 업벤져스의 세대교체를 해야 할 타이밍이니까.
코믹북으로 새 히어로를 접하는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야.
지금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히어로들은 이미 수십 년 전에 탄생한 오래된 프랜차이즈 들이고.
마벌과 다즈니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만들 새 히어로를 띄울 수 있는 플랫폼으로 HC101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지.”
“생각한거야?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거야?”
“뻔한 질문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상혁의 말에 민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HC 101 자체가 앞으로는 마벌의 새 히어로들이 데뷔하는 데뷔 무대가 되는 건가?”
“마벌에서는 그렇게 기대하고 있겠지만 그건 아니야.
그쪽에서 어떤 히어로를 내놓든지 간에, 최종적으로 게임에 삽입될 히어로에 대한 결정 권한은 우리에게 있으니까.
이번 협상이 질질 늘어진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고.
거기서는 자신들이 요구하는 새 캐릭터를 무조건 게임에 삽입할 수 있는 권리를 원했거든.”
“하지만 넌 그게 싫었을 것이고?”
“난 등신 같은 작가의 콤플렉스에서 탄생한 보기 싫은 PC 덩어리 히어로가 HC 101에 들어가는 꼴은 못 보니까.”
“근데 용케도 설득했네?”
사실 상혁이 마벌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캐릭터 사용을 위해 협상에 들어간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서로의 조건이 맞지 않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이번 미국 출장으로 최종 협약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그것도 성공적으로 ‘그’ 다즈니의 고집을 꺾으면서.
민준은 상혁이 어떻게 그런 결과를 얻어낸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뭐, 상황이 변했으니까. 혹시 내가 허먼 씨의 TV 쇼에서 엔더 게임의 핵심 대사를 스포일러 한 거 기억해?”
“나는 필연적인 존재다?”
“그거랑 ‘나는 아이론 맨이다.’라는 대사.”
“어. 그건 대체 왜 스포일러 한 거야? 지금 타이밍엔 아무도 이해 못 했겠지만, 마벌측에서는 기겁했을 걸?”
“안 그래도 지금쯤 관련자를 싹 잡아서 누가 유출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을 거야.
아무튼, 내가 그 대사를 스포일러한 이유는, 케븐 파이지에게 내가 엔더 게임의 스토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어.
출처는 밝히지 않았지만, 난 이미 업벤져스의 4번째 영화판의 시나리오를 알고 있고, 그 이후의 사태도 알고 있다고 넌지시 암시한 거지.
결과적으로, 그 역시 마벌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란 사실엔 동의했고.”
“거기에 HC 101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한 거구나?”
“그렇지. 뭐 결정적인 계기는, 마지막에 말한 협박이었겠지만.”
“협박?”
“DC와는 이미 협의가 끝났으니, 만약 이 제안을 거부하면 DC히어로들에게 미친듯한 뽕을 집어넣어서 엔더 게임 개봉일에 업데이트해버리겠다고 협박했거든.”
그러자 상혁이 케븐 파이지를 협박하는 모습을 상상한 민준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재미있는 광경이었겠네.”
“아니, 진짜 재미있는 건 아이론 맨의 주연배우인 로밧트 다우니 주니어를 만났을 때였지.”
“뭐!?”
“마벌 시네마틱 캐릭터의 사용권을 받아왔다고 해서, 그의 목소리 사용권까지 받아온 건 아니니까.
그건 배우별로 따로 계약해야 했거든.”
“X친. 진짜 좋았겠네.”
“좋았지. 같이 밥도 먹었거든.”
“서연이한텐 비밀로 해라. 걔 엄청난 로다주 팬이잖아. 아마 그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 안 데려갔다고 네 목을 조를걸?”
“어차피 TTS더빙 작업하러 한국에 한 번 들러야 해. 그때 보면 되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설득은 했고?”
“했지. 사실 마벌을 설득하는 것보단 배우를 설득하는 게 더 쉬웠어.
굳이 말로 설득할 필요 없이, 커다란 트럭에 PRD를 싣고 가서 게임에서 자신이 어떻게 등장할지 보여주면 전부 넘어왔거든.
그리고 한마디 하는 거지.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제안을 받아주신다면, 이 트럭은 놓고 가겠습니다.’
캡틴 어메리카도, 천둥신 토로도 거기 다 넘어왔다니까?
물론 아이론 맨의 경우는 좀 더 작업이 필요했지만.”
“구체적으로 뭘 준건데?”
“붉은색과 금빛으로 특별하게 커스터마이징 된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이론 맨 전용 PRD.
옆에 MK-0라는 넘버링까지 붙어있는 거로.”
“그래서 나한테 인터넷 연결 없이 HC 101이 구동되는 버전을 달라고 한 거였군.”
“맞아. 물론 최종 버전은 아니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 HC 101을 몇 달 전에 플레이 할 권한을 준거지.”
상혁의 말을 싱글벙글 웃으며 듣고 있던 민준이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잠깐만.”
“왜?”
“지금 마벌 시네마틱에 참여한 주요 배우들에게 오프라인에서 돌아가는 PRD를 줬다고 말한 거지?”
“몇 명한테만.”
“그러다 정보 유출되면 어쩌려고?”
“비밀 유지 서약도 받았고, 어차피 업벤져스 스토리에 대한 보안도 지켰던 사람들이야.
보안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건지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지.”
상혁은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스파이디 맨 배우인 탐 홀란드에게는 PRD를 안 넘겨준 거야.”
“100% 흘릴 것 같아서?”
“1000%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정보를 술술 푸는 타입이니까.
사실, 그런 치기어린 부분이 매력인 배우이기도 하고.”
“마벌에 DC, 헐리우드 유명 배우들까지. 너 같은 히어로물 덕후에겐 참 대단하고 보람찬 출장이었겠네. 이런 걸 덕업일치라고 하지 않나?”
“그렇지. 너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난 바빴잖아. 누가 말 그대로 ‘엄청난 임무’를 떠넘기고 가는 바람에 말이지.”
상혁이 다니는 대부분의 출장에서, 상혁은 민준이나 현주 두 사람 중 한 명과 반드시 함께 가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 출장은 현주도, 민준도 함께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상혁이 부탁한 ‘공동의 임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공동의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주와 민준의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기도 했고.
“그건 이번 4차 NE 컨벤션의 가장 핵심 발표가 될 테니까, 8월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완성이 되어야 해.
그리고 기술적으로 그리 복잡한 일은 아니잖아?
단지 법률적인 문제가 좀 얽혀 있을 뿐이지.”
“그거야 그렇지. 덕분에 현주 선생님이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어다니고 있고.”
“넌 어떤데?”
“나야 기존에 있는 기술을 그대로 우리 모델에 적용하는 거니 그리 크게 어려울 건 없어.
실수가 생기면 안 되는 부분이니까 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는 걸 빼면.”
“그 말은 준비는 이미 끝났다는 말이군.”
“맞아.”
민준이 미소 지었다.
“준비는 이미 끝났지. 우리에게 남은 건, 두꺼운 실타래로 몸을 감싸고 나비가 될 그 날까지 기다리는 것뿐이고.”
“결전의 그 날까지?”
“결전의 그 날까지.”
민준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말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어느새 천하대 안에 있는 PTW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
[이런 걸 폭풍 전야라고 하던가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가 예상되는 이벤트를 앞둔 것 치고는, 터무니없이 조용한 느낌입니다.]
[오, 벤. 그건 아니죠. 조용한 건 오직 태풍을 일으킨 당사자뿐입니다.
주변의 모든 환경은 이번 태풍의 크기가 얼마나 클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 힘으로 거대한 나무들을 뿌리째 잡아 뜯을지 보여주고 있죠.]
[영원히 굳건할 것 같던 AT&T의 상황처럼 말이죠?]
[그렇습니다. 버라이즌이 ‘새 인터넷’의 공급자로 선정된 이후, 그들은 새 인터넷 서비스 모델을 발표했죠.
자신들이 제공하는 인터넷 서비스를 미리 계약해서 이용하면, 추후에 새 인터넷이 공급될 때 같은 조건으로 새 인터넷을 우선적으로 공급받을 권리가 생기는 새 서비스를요.
그 덕에 AT&T의 인터넷 서비스를 사용하는 가입자의 절반 이상이 버라이즌의 새 서비스로 갈아탔습니다.
그리고 버라이즌에서 기존의 인터넷을 사용하던 가입자들도, 빠르게 새 상품으로 장기 계약을 맺었죠.
서비스가 개시되기 전에 미리 서비스를 판매한다니, 매우 똑똑한 플레이였어요.]
[대기자가 엄청나게 많으니까요.
PTW의 새 VR 장비인 PRS는 정식으로 서비스가 개시되기 전인 지금도 미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딥 다이버를 가진 유저 모두가, 가급적이면 4차 NE 컨벤션 전에 PRS를 입은 상태로 4차 NE 컨벤션을 즐기기를 꿈꾸죠.
물론 돈이 많다면, PRD도 함께요.
이미 인플루언서를 중심으로 자신의 집 거실에 설치한 PRD를 자랑하는 사진을 올리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8월 15일 전까지는 전원 버튼을 눌러도 불이 들어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장비인데도 말이죠.
참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만약 8월 15일에 그 장비들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면, 더 재미있는 사태가 벌어지겠죠.]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건 PTW의 책임은 아닐 겁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제품을 완벽하게 검수하니까요.
아마 문제가 생긴다면, 버라이즌 측의 실수로 생기는 거겠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가능성도 적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버라이즌이 ‘새 인터넷’의 구축을 위해 사용하는 모든 장비도, PTW가 개발을 맡은 장비니까요.]
[PTW라는 이름을 꽤 신뢰하시는군요.]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단 할 게 없으면, PTW의 게임을 켜라.
그럼 적어도 수천 시간은 할 일이 생길 것이다.
딥 다이버를 샀다면, 박스에서 꺼내자마자 머리에 써라.
1시간 동안 돋보기를 들고 살펴보아도 흠집 하나 찾기 어려울 테니까.
PTW 제품들의 마감은 완성도로 유명한 와플에 필적하는 수준입니다.
그들은 거의 편집증적인 수준으로 제품의 흠결을 찾아내니까요.]
[그 편집증은 이번에 발매된 PRS에도 이어지겠군요.]
미국에서 돌아온 상혁은 마치 등껍질 속에 머리를 숨긴 거북이처럼 두문불출했지만, 상혁이 뿌린 씨앗은 마치 산불처럼 번져나가 매일같이 전 세계의 뉴스를 점령하고 있었다.
버라이즌이 미국에서의 서비스 제공사로 지정된 이후에도, 각국의 유저들이 차례로 자신의 국가에서 새 인터넷을 공급할 서비스 업체를 결정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통신사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제공하던 서비스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걸어 유저들에게 제시했다.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버라이즌이 새 인터넷의 공급자로 지정되는 순간, AT&T의 주가는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폭락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다른 통신사들은, 이번 입찰에 회사의 미래가 걸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함께하던가, 아니면 뒈지던가.’라는 상혁의 메시지가,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것은 거대한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경쟁사에게 잡아먹히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이윤을 포기해야 하는 통신사로서는 매우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게이머들에게는 매우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 집에 택배가 와서 보니 발신자가 PTW더라.
박스를 열어보니 안에 PRS가 들어 있었어.
그리고 그건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끝내주게 멋졌지.]
[오늘 버라이즌에서 시카고에 있는 내 집에 새 통신선을 깔아주기 위해 방문했어.
지금은 프리 오픈 서비스 중인 새 인터넷을 통해 게시판에 접속 중이고.
세상에 난 인터넷이 이 정도로 황당한 속도로 동작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내가 월 200달러씩 내면서 쓰고 있던 프리미엄 회선은 개 쓰레기였어.]
[우리 집 근처에 PRD 센터가 들어온다고 하더라.
근처에서는 제일 큰 120대 규모로.
물론 4차 NE 컨벤션 날짜에 맞춰서 오픈한다는데, 그날 예약은 받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끝나버렸어.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120명이 오픈 당일 PRD를 쓸 수 있는 축복을 받았지.
그 120명 중의 한명이 누군지 맞춰볼래?]
게이머들이 품고 있는 감정은, 더 이상 막연한 기대감 수준이 아니었다.
집으로 배달되어온 만질 수 있는 제품, 설치기사가 찾아와 달아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의 인터넷.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오로지 8월 15일에 오픈할 새 가상 현실 게임의 서비스를 위한 ‘밑 준비’라는 사실이, 게이머들의 가슴을 미칠 듯이 두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주하게 될, 현실과 가상의 벽을 넘은 환상적인 가상 차원으로의 입장을.
그리고 서비스 지역에서 제외된 국가에 있는 유저들은, 미국이나 한국의 게이머들이 올리는 글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들도 하루라도 빠르게 그 문을 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루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을 만나기 위해.
그 기대감은, PTW에 대한 뉴스를 방영하는 것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몇몇 사람들조차 돈보다 컨벤션을 선택하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이번 주 방송을 쉬고 완벽하게 여러분과 같은 게이머의 입장에 서서, 저희 집에 설치한 PRD로 4차 NE 컨벤션을 즐길 예정입니다.
PTW가 준비한 4번째 컨벤션이 어떤 형태일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다중 접속 가능한 페스티벌 공간의 형태로 구현된다면, 어쩌면 VR로 진행되는 컨벤션 공간에서 여러분이 저의 아바타와 만날 수도 있겠네요.]
방송국의 공식 계정이 아닌 자신의 개인 개정으로 휴방을 알린 허먼의 트윗 역시 달아오른 4차 NE 컨벤션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좋은 사례 중의 하나였다.
물론 그 사실을 허먼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라 트윗을 통해 접한 PD는 미친 듯이 화를 내긴 했지만.
“아니, 저한텐 장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제정신입니까? 모두가 주목하는 NE 컨벤션이 생방송을, 그것도 PTW관련 뉴스를 메인으로 다루는 쇼 프로에서 방영하지 않겠다고요!?”
“생각해보라고. 어차피 PTW팬들은 누구나 딥 다이버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누구도 남이 하는 방송을 통해 4차 NE 컨벤션을 보고 싶어 하지 않겠지.
결국 PTW의 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3개라고.
딥 다이버를 통해서 행사를 보거나, 아니면 PRS를 입고 행사에 참여하거나, 운이 정말 좋고 돈이 많다면 PRD를 사용해서 축제를 즐기는 거지.”
“하지만 NE 컨벤션은 항상 최고의 방송 거리였다고요!”
“3차까지는 그랬지. 결국 5개 국가에서 동시 진행하는 것으로 참가 인원을 늘리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 팬 수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10만 명만 입장이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집 거실에서, 수천만 명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가상 컨벤션이 열리는 거지.
그리고 이번 컨벤션은, 게이머 인생에 있어서 평생을 돌아보게 될 가장 멋진 행사가 될 거라고.
난 방송인이기 이전에 PTW의 팬으로서, 다른 어떤 존재의 개입도 없이 순수하게 그 행사를 즐기고 싶을 뿐이고.
PTW의 이상혁 CCO는 이렇게 말했지.
PRD가 주는 경험이란 어차피 말로 전달하는 게 불가능한 물건이라고.
그럼 그건 내가 방송에서 떠들어도 마찬가지란 의미야.”
“그래서 생방송을 포기한다고요?”
“머저리들이야 얼마든지 하라고 해.
어차피 그놈들이 원하는 타겟 시청자들은 방송시간에 죄다 딥 다이버를 쓰고 행사를 미친 듯이 즐기고 있을 테니까.
그날은 역사적인 날이 될 거라고.
행사가 오픈되는 순간부터, 넷플릭스의 실시간 접속자 수가 바닥을 찍고 전국 TV의 생방송 시청자 수가 사상 최저 수치를 기록하겠지.
이미 실리콘 밸리에 있는 대부분의 대기업에선 그날 하루 전체 휴업을 선언했어.
연차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하다고 말이야.”
“젠장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요. 게이머들도, 그리고 허먼씨 당신도.”
“장례식에 참석한 100명의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만이 춤을 추고 있다면 그 사람이 비정상이겠지만, 99명이 춤을 추는데 한명만 울고 있다면 우는 사람이 비정상인 거겠지. 그리고 이 경우는?
전 세계 게이머들이 축제가 될 4차 NE 컨벤션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바보가 비정상이 되는 거고.”
결국 PD는 허먼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좋아요. 하지만 다음 주에 있을 특집 방송에서, 그날의 경험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방송시간 내내 털어놔야 할 겁니다.
무려 생방송 중계를 포기하고 순수하게 게이머로 돌아가서 즐긴 행사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빌어먹을 딥 다이버가 없는 시청자들에게도 확실하게 전달해야 할 거라고요. 알겠습니까?”
“좋아. 그렇게 하지. 그럼 다음 주는 휴방이로군. 자네 혹시 일정 있나?”
“있었는데 당신이 날려버렸죠. 원래는 오픈 시간부터 클로징 타임까지 실시간으로 생방송 할 예정이었으니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있었어야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내가 쉰다고 방송까지 쉴 필요는 없지. 앨런이나 스튜어드에게 시켜. 아마 잘 할 거야.”
“아뇨. 그냥 쉽시다.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게 시선을 끌 것 같으니.”
“그럼 당장 다음 주 일정은 없는 거네? 혹시 집에 딥 다이버는 있나?”
“딥 다이버도, PRS도 있으니 저도 행사나 즐길 생각입니다.”
“그럼 그날 함께 연차 내고 우리 집에서 컨벤션이나 즐기지.
내 집에는 차고에 있는 것까지 PRD가 두 대 있거든.”
“지금 대당 20만 달러를 줘도 수량이 달려서 못 구하는 PRD를 두 대나 구하셨다고요?
대체 어떻게요?”
“한대는 내가 개인적으로 예약했고, 한 대는 PTW에 연락해서 방송에 필요한데 장비 입수에 실패했다고 했지.
그러니까 한 대 보내주던데?”
“그거 사기 아닙니까?”
“다다음주 방송에서 쓸 거니까 사기 친 건 아니지.
방송에 사용하긴 할 거야. 대신 한주만 쓰고 다시 내 차고에 돌려놓을 거지만.”
“그럼 저한테 한 대 파시죠? 20만 달러는 못 드리지만 원래 판매가인 3만 달러는 드릴 수 있는데요?”
“PRD를?”
PD의 질문에 허먼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라면 전원만 키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입장권을 남한테 그렇게 쉽게 팔겠나?
가만 놔두면 가격이 얼마까지 올라갈지 모르는 물건을?”
“막상 까보니 게임이 엉망이라 똥값이 될 수도 있잖아요.”
“PTW의 신작이, 그것도 CCO인 이상혁이 이렇게까지 재미있다고 호언장담한 게임이 엉망일 확률이라.”
“게임사에서 재미있다고 미친 듯이 홍보했지만 까보니 게임이 별로인 경우는 꽤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건 그냥 게임사가 아니라 PTW잖아.”
그러자 PD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젠장. 그말이 맞아요. 차라리 로또 당첨자가 벼락 맞을 확률이 높겠네.”
“내말이 그 말이야. 그러니까 어때? 그날 나랑 같이 VR 공간으로 구성된 컨벤션 행사를 돌아보는 게?”
“PRD로요?”
“PRD로.”
PD는 허먼이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허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젠장. 좋습니다. 될 대로 되라고 하죠.
애당초 게임을 즐기려고 사는 게 아니라면, 게임 쇼는 뭣 하러 진행하겠어요?”
“좋아. 행사 시작은 대한민국 표준시로 아침 9시에 개시되니까, 동부 표준시로는 저녁 7시에 행사 시작이야.
그러니 5시쯤 와서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경건한 마음으로 샤워를 한 다음 PRS를 입고 PRD에 탑승하자고.”
“샤워는 왜요?”
“중간에 휴식은 없을 테니까. 젠장. 난 이번 행사 때 혹시라도 체력이 달릴까 봐 헬스장도 끊었다고.
자네도 그런 각오로 행사에 임하는 게 좋을 거야.”
반협박처럼 들리는 허먼의 목소리는 그가 이번 행사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를 전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방송 때문에 3차 NE 컨벤션을 현장에서 보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 지도.
결국 PD는 그런 허먼의 압력에 휩쓸려 그러겠다고 이야기한 뒤, 허먼이 있는 사무실을 나섰다.
자신이 일하는 방송국의 편성 국장에게, 대체 어떤 핑계를 대서 이번 주 방송을 빼먹을지를 고민하면서.
그리고 허먼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자신의 책상에 놓인 종이를 들어 올렸다.
거기엔 PRS의 예약 물량에 선물로 들어가 있던 4차 NE 컨벤션의 소개 포스터가 그려져 있었다.
PTW에서 4차 NE 컨벤션의 메인 카피로 결정한, 이번 행사의 제목과 함께.
[Game Changer].
그것은 이번 행사 이후로 전 세계의 게임이 ‘PRD용 게임’과 ‘그 외의 게임’으로 나뉠 것이라는, PTW의 목표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행사 타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