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 세상에서 가장 긴 기다림
[미국 최대 통신사 버라이즌, PTW가 준비 중인 새 인터넷(New Internet)확보 예고.]
[AT&T. ‘회사의 사운을 걸고 이번 계약에 도전할 것.]
[세계 최대 다국적 통신회사 보다폰(VODAFONE)에서도 이번 계약에 참여.]
[PTW가 쏘아 올린 거대한 공. 전 세계 통신사 생태계를 뒤집는다.]
[전운이 감도는 일본 통신사들. NTT도코모, KDDI등 주요 통신 업체 일제히 참여 결정.]
[PTW. ‘새 VR 슈트의 가격은 1600달러 이하가 될 것.’
이번에도 원가 이하로 손해를 감수하고 파는 것인가?]
[PTW가 그리고 있는 미래는 어떤 것?
PRS가 변화시킬 미래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자.]
[지긋지긋한 ‘느린 인터넷’을 벗어나는 것인가?
유럽 게이머들, 일제히 PTW의 ‘새 인터넷’에 대해 환영하는 의사를 밝혀···.]
결과적으로만 보자면, 결국 상혁이 한 이야기의 결론은 PRD의 서비스가 대한민국에서만 시작될 거란 것이었다.
물론 현지 통신사의 적극적인 계약 추진 여부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타 국가에서도 서비스 개시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확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나 서비스 조건에 대한 선택 여부를 유저들의 손에, 그리고 서비스 참여에 대한 책임을 통신사의 손에 넘겨버린 PTW의 결정은 원래대로라면 PTW가 받아야 했을 모든 어그로를 훌륭하게 통신사 측으로 넘기는 데 성공했다.
이미 일부 업체에서는 발 빠르게 견적을 냈다가 유저들에게 두들겨 맞고 조건 수정을 예고하기도 했고.
특히 인터넷 속도가 느린 유럽에서 거주하는 유저들은 PTW가 공개한 새 인터넷에 엄청나게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부에서 지원책을 발표하든 뭘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1순위로 독일이 새 인터넷을 낙찰받아야 한다.]
[지금도 초고속도 아닌 xDSL 방식 인터넷에 매달 30유로(한화 4만 원 이상)씩 내고 있는데 인간적으로 너무 느림.]
[세계 최대 통신사가 영국에 있다는 건 잊었음?
당연히 영국에서 시작해야지.]
[입 다물어라. 섬나라 놈들아. 예로부터 유럽의 중심은 프랑스였다.
PTW! 제발 프랑스를 1순위로 선정해주세요!]
[프랑스 놈들은 방송을 보긴 한 거냐? 이번 계약의 선택권은 PTW에 있는 게 아니야.
각 국가의 유저들에게 있지.
통신사가 얼마나 빠르고 싸게 공급을 약속하느냐가 중요한거라고.]
문제는 PTW가 제공하는 회선의 속도였다.
상혁이 말한 ‘기존 초고속 인터넷 대비 2배 이상의 속도’는, 유럽의 느린 인터넷망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닌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망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유럽 유저들 기준으로 보면 그 속도는 거의 ‘미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대표적 선진국인 독일에서조차, 일부 지역의 인터넷 속도는 말 그대로 ‘말보다 느린’ 속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혁이 회귀하기 전을 기준으로 2년 후인 2020년에, 독일의 사진작가 클라우스 페터 카페스트(Klaus Peter Kappest)는 재미있는 실험을 진행했다.
4.5GB 용량의 그림을 10Km 떨어진 인쇄소에 보내면서, 말을 탄 기수에게 그림이 담긴 DVD를 가지고 인터넷 전송과 동시에 출발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기수가 말을 달려 DVD를 인쇄소에 전달했을 때, 클라우스 씨가 사용하는 인터넷은 겨우 60%를 전송했을 뿐이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독일 정부에서는 낙후된 인터넷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 통신사에게 수없이 요청했지만, 그 요청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굳이 대규모의 투자를 감행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보유한 느린 회선만 가지고 월 30유로 이상 꼬박꼬박 유저들을 착취할 수 있었으니까.
더 빠른 인터넷을 제공할지 아닐지에 대한 선택권은 절대적으로 통신사에게 주어져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지만 상혁의 발표는 그런 통신사들의 서비스 체계 자체를 뒤집어 놓는 것이었다.
거의 깡패 수준에 가까운 속도를 가진 새 인터넷 기술을 먼저 선점할 수 있다면, 서비스하는 국가의 인터넷 시장을 아예 지배해버릴 수 있을 거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통신 사업자는 없었기 때문에.
전 세계의 수많은 통신 사업체에게, 상혁의 발표는 이렇게 들리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하던가, 아니면 뒈지든가.’
***
“오늘의 초대석에는 현재 가장 핫한 이슈를 몰고 다니고 있는 PTW의 CCO, 이상혁 씨를 모셨습니다!
이상혁 씨, 오늘 이렇게 저희가 요청한 인터뷰에 참석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상혁은 허먼이 진행하는 TV 쇼에서 폭탄선언을 한 이후에, 몇몇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를 더 진행했다.
‘뉴스 위클리’ 같은 주간 언론지부터, FAX 뉴스 같은 TV 뉴스쇼까지.
그것은 평소에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PTW의 행보와는 정반대의 행동이었지만, 상혁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참가하고 싶어도 참여할 수 있는 인원수가 제한되어 있어 홍보의 의미가 없는 종전의 NE 컨벤션과는 다르게, 4차 NE 컨벤션은 인원 제한 없이 VR 공간에서 진행되는 행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상혁은 딥 다이버를 보유한 모든 유저들이 4차 NE 컨벤션에 대한 정보를 접하길 원했고, 이번에는 이전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FAX 뉴스 채널에서 가장 많은 시청자를 보유한 터커 칼슨 투나잇(Tucker Carlson Tonight)에 출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칼슨에게 인사함으로써 이번 인터뷰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PTW의 CCO, 이상혁입니다.”
“그럼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점을 묻고 싶은데요.
혹시 PTW의 대회 발표를 CCO인 이상혁 씨가 주로 진행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다른 회사의 경우는 주로 CEO가 나서지 않나요?”
“다른 회사와는 역할분담 체계가 조금 다른 것뿐입니다.
저희 회사의 CEO인 이현주 씨는 회사 내부에서 주로 인사권과 퍼포먼스 관리, 그리고 성과급의 결정 등에 깊게 관여하고 계시죠.
반면에 회사 내부에서 최종적으로 출시되는 ‘컨텐츠’의 경우에는 CCO인 제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고요.
그 ‘컨텐츠’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은 CTO인 김민준 씨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외적인 활동이나 계약과 관련된 사항은 주로 제가 처리하는 편이고, 직원들과 관련된 문제는 대부분 CEO인 현주 씨가 처리하고 있습니다.”
“소문처럼 ‘바지사장이다’ 같은 평판과는 다르다는 겁니까?”
“그렇죠. 단지 서로가 가진 강점이 다를 뿐입니다.
저희 CEO는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고 상대의 상태를 파악하는 본능적인 직감을 가지고 계시죠.
만일 그녀가 제가 이름도 모르는 직원에게 100만 달러의 보너스 지급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건 필요한 지출인 겁니다.
심지어 그 직원이 하는 일이 화장실 청소부라 할지라도 말이죠.”
“그렇군요. 뭐, PTW의 CTO야 업계에서 괴물 그 자체로 불리는 인물이니 둘째 치더라도, 그럼 CCO인 상혁 씨 본인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요?”
칼슨의 질문을 받은 상혁이 씩 웃어 보였다.
“저는 사람을 잘 휘두르는 편이죠.”
“그게 강점일까요?”
“휘둘러야 하는 상대가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렇습니다.”
“하긴, 회사 규모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과거 시절부터, PTW는 대형 콘솔 개발사인 MS와 SANY를 들었다 놨다 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이번에 SANY측과 딥 다이버 출시를 하지 않았더라면, 8세대 콘솔 시장에서 MS가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거라는 보고도 있었고요.
지금은 비등비등하죠?”
“SANY가 역전했죠.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MS에서도 딥 다이버용 타이틀을 여러 개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앞으로도 게이머들은 콘솔 2개를 함께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 유지되겠군요.
넌텐도의 게임까지 좋아하는 유저라면, 3개의 콘솔을 집에 두어야 하는 상황이요.”
“그럴 수도 있죠.”
상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요. 미래는 모르는 겁니다.
3차 NE 컨벤션에서 시연했던 것처럼, 딥 다이버 자체는 안에 저장해둔 프로그램을 게임 콘솔 없이 자체적으로 돌릴 수 있는 충분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 머신이고, PRD에 들어갈 보조 장비와 합치면 8세대 콘솔의 성능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연산 성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이미 두 장비 자체로 기존 콘솔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게임 구동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 말은 PS 와 X-BOX에 의존하지 않는 PTW만의 자체 콘솔 생태계를 만들 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아뇨. 어찌 되었건 8세대 콘솔의 퍼포먼스와 퍼스트 파티 게임들을 빌려 쓰는 게 저희 쪽에서도 유리한 편이니까요.
앞으로도 지금의 관계는 유지될 겁니다. 양대 콘솔 개발사가 저희와 협력 관계를 이어나갈 의지가 있고, 게이머들을 위한 최고의 콘솔을 개발해서 공급할 의지가 있다면 말이죠.”
“그 말씀은···.”
“수틀리면 저희도 콘솔 개발사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능력도 있고, 자본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상혁을 보며, 칼슨은 상혁이 말한 ‘사람을 잘 휘두르는 능력’이 어떤 의미인지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공개적인 생방송 자리에서, 대놓고 협력사들에게 ‘알아서 기어라’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터커는 오늘의 인터뷰가 매우 흥미진진하게 흘러갈 것이라 직감하며, 상혁에게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한 질문을 던졌다.
“좋습니다. 보통 IT 관련 게스트를 초대하면 인터뷰가 지루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해 드릴 생각입니다.”
“그럼 우선 ‘새 인터넷’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지금도 검색어 순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PTW가 던진 폭탄선언에 대해서 말이죠.”
터커가 본 인터뷰에서 첫 번째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
그것은 현재도 전 세계의 수많은 통신사업체의 담당자들을 미칠듯한 연속 회의로 밀어 넣은 ‘새 인터넷’에 대한 이야기였다.
***
“익명의 통신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에 PTW가 발표한 ‘새 인터넷’은 악의적인 왜곡이자 멀쩡한 통신 생태계를 붕괴시키려는 사악한 음모라고 하더군요.
이 발언에 대해서, 상혁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근거가 있겠죠? 그 ‘익명의 관계자’는 뭐라고 하던가요?”
“결국 속도가 기존 인터넷보다 빠를 뿐이고 똑같은 인터넷인데도, 그것을 ‘새 인터넷’이란 단어로 포장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존의 인터넷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려는 마케팅적인 음모라고요.”
“뭐 어떤 의미에서는 틀리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새 인터넷 역시 구 인터넷의 기능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니까요.
하지만 저희가 제공하는 RPD 전용 게임들은, 오로지 새 인터넷의 회선으로만 동작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 인터넷이 하지 못 하는 일을, 새 인터넷은 할 수 있는 거고요.
그러니까 유저의 입장에서, 어떤 사람이 구 인터넷 대신 새 인터넷을 쓴다는 건 이런 의미가 되는 겁니다.
‘아, 저 사람은 이제 PRD를 사용한 가상 세계에서도 활동할 수 있겠구나.’
그건 매우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이번에 계약을 따내지 못한 기존의 인터넷 사업자는 PRD 시장에 아예 진출할 수 없는 겁니까?”
“아예 그런 건 아닙니다. 저희가 요구하는 필요 대역폭과 속도만 지원한다면, 기존의 인터넷 연결로도 PRD를 구동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희는 현존하는 모든 통신 장비가 그 정도 대역폭을 지원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래서 새 인터넷 망을 구축하려고 하는 겁니다.
과거에, 아직 ‘인터넷’이란 기술이 대중화 되기 이전에, 유저들은 전화선을 이용하여 PC 모뎀에 연결해 PC 통신이라 부르는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통신망을 사용하려면 뚜뚜뚜뚜 거리는 접속 음을 들으면서, 오래 쓰는 순간 전화비 폭탄을 감수해야 하고 통신을 사용하는 중에는 집에서 전화도 쓰지 못하게 하는 그런 기술이었죠.
그리고 지금은 누구나 무선이나 유선으로 자유로운 인터넷의 바다를 탐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린 그것을 PC통신이 아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죠.
사실 PC 통신 자체도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통신 방식의 일종이긴 했지만, 뭔가 구분할 필요가 있긴 했으니까요.
그리고 이제, 기존의 인터넷으로는 할 수 없는 새로운 무언가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등장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새 인터넷’이라고 부르는 것뿐이고요.
그걸 악의적인 왜곡이라고 부르신다면, 좋습니다.
얼마든지 비난하라고 하세요.
하지만 저희를 비난한다고 해서 그들이 가진 구형 인터넷의 속도가 갑자기 10배 이상 빨라지는 건 아니죠.
굳이 저희가 떠들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인터넷을 두 가지로 분류하게 될 겁니다.
PRD를 지원하지 않는 구형 인터넷과, PRD를 지원하는 새 인터넷으로요.”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게임도 그렇죠. 저희가 조사한 딥 다이버의 사용자 통계에 따르면, 딥 다이버를 구매하여 게임을 즐기는 유저의 50%이상은 계속 딥 다이버용 게임만 플레이합니다.
심지어 딥 다이버용 게임을 하지 않을 때도, 딥 다이버가 제공하는 가상 거실에서 70인치 크기의 대형 화면을 바라보며 게임을 플레이하죠.
버튼만 누르면, 혹은 몇 마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유저는 넓은 극장이나 쾌적한 가상 거실에서 넛플릭스를 보고 대형 TV로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유저들로 하여금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작은 TV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게 하죠.
단호하게 말하건대, PRD가 출시된 이후 게임은 두 가지로 나뉠 겁니다.
PRD용 게임과 그렇지 않은 게임들로요.
그리고 PRD로 단 한 번이라도 게임을 해본 유저들은, 다시는 평면 TV앞에서 패드를 가지고 깔작대는 플레이로 돌아가지 못하겠죠.”
“PRD라는 장비가 가져다주는 경험이 그토록 대단한 겁니까?”
“가상 현실의 사물을 실제로 만질 수 있다는 건 말로 들어서는 정말 알기 어려운 쾌감을 전달해줍니다.
그건 직접 해봐야만 알 수 있죠.
VR을 경험한 사람이 겪는 경험을, 그렇지 못한 유저에게 전달하기 어려운 것처럼요.”
“그래도 지금 이 방송을 보고 있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상혁 씨가 말한 ‘평면 TV’로 방송을 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해가 갈 수 있도록 설명을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 ‘만진다’는 경험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상혁 씨가 이토록 자신감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도록.”
칼슨의 질문에 상혁이 웃으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펜을 하나 꺼내 손 위에 올렸다.
“이건 한국의 학생들이 수업이 지루할 때 하는 ‘펜 돌리기’라는 놀이입니다.”
상혁이 화려하게 손가락을 놀리자, 상혁의 손에 놓인 펜이 환상적인 모습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떨어지지 않는 것인가가 궁금해질 정도의 움직임으로.
그 모습을 보던 칼슨은 상혁의 펜 돌리기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펜 돌리기 자체는 저도 알고 있는 놀이지만, 정말 잘하시네요.”
“연습을 많이 했으니까요. 아무튼, 이 펜을 돌리기 위해서, 저는 손가락을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며 중력을 거슬러 펜의 움직임을 조작해야 합니다.
제 눈으로 전달되는 정보뿐만 아니라, 펜의 무게가 제 손에 전달하는 미묘한 감각을 통해서 펜의 움직임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제가 펜을 움직이고 싶은 형태로 움직이기 위하여 5개의 손가락을 화려하게 조작해야 하죠.
그리고 그건 익숙해지면 꽤 재미있는 과정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팬 돌리기와 PRD가 무슨 관계가···.”
“이걸 키보드와 마우스로 조작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상혁의 말에 칼슨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재미없을 것 같네요. 어느 정도의 재미는 있겠지만···.”
“그런 겁니다.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게임이 존재해왔지만, 그 게임들이 유저들에게 전달하는 피드백엔 한계가 있었죠.
시각, 청각, 그리고 패드의 진동.
그 정도가 유저가 받을 수 있는 피드백의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PRD는 그 벽을 깨트리죠.
그건 ‘현실성’이란 단어 자체를 ‘현실’이란 단어로 바꿀 수 있는 마법 같은 물건입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 공간에서 농구공만 튀기고 있어도 기존 게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즐거운 경험을 선사하는 거죠.
게다가, 현실의 자신과는 다르게 시스템의 보조를 받아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강점도 있고요.”
“시스템의 보조라면?”
“농구를 예로 들어보죠. 실제로 저는 스테픈 커리처럼 3점 슛을 잘 쏘지 못하지만, 게임 속 세계의 저는 3점 슛의 마이스터가 될 수 있습니다.
온갖 스킬을 도배하고, 슛 폼을 커스터마이징하고, 능력치를 올리는 것으로요.
만약 제가 PRD를 사용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커스터마이징 된 캐릭터를 가지고 3점슛을 시도하면, RPD는 강제로 제 슛폼을 교정할 겁니다.
제가 단순히 스타트 동작을 취하는 것 만으로도, 시스템이 알아서 제 포즈를 스테픈 커리와 같은 자세로 교정하죠.
제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게 공을 받고 슛 폼을 시작하는 것뿐입니다.
몸에서 힘을 빼면, 자연스럽게 시스템이 제 자세를 교정해주니까요.
그건 판타지 세계에서 전투를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거운 철퇴를 미친 듯이 휘둘러도, 최소한의 체력 소모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죠.
물론 게임에서 설정된 스테미너 수치가 떨어지면 오히려 도움이 아니라 억제장치로 동작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장시간 게임을 하면서도 체력의 소모를 억제하고 게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비가 PRD라는 장비입니다.
수만 번의 슛 연습 없이도, 단순히 스킬을 찍은 것만으로 스테픈 커리의 3점 슛을 쏠 수 있도록.”
“PRD의 세계에서는, 태권도를 쓰기 위하여 굳이 태권도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하나의 현실’에서 ‘또 하나의 자신’이 될 수 있는 경험은, 절대 다른 게임 디바이스가 전달할 수 없는 감각이죠.
현재의 딥 다이버가 전달하는 경험을 다른 어떤 게임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상혁의 말대로, 딥 다이버로 게임을 플레이해본 유저의 대부분이 딥 다이버 용 게임 외의 다른 게임을 지루하게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 게임들이 자신이 이전에 좋아하던 게임이었다 하더라도.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게임이 유저에게 전달하는 ‘환상’을 깨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가 단순한 3D 모델링 덩어리에 숫자가 부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자신이 육성하고 있는 캐릭터가 단순히 애니메이션과 변형된 수치 공식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게임사들은 그래픽을 향상하고, 사운드에 힘을 주며 컨셉을 강화하고 스토리를 전달시키는 것으로 유저를 환상 속에 붙잡아두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사들이 그렇게 노력한다 하더라도, 결국 게이머가 PC 모니터나 TV 앞에 앉아 패드를 잡고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절대적인 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현실과 가상의 벽을 허무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러나 PRD는 태생적으로 그 벽을 허물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었다.
게임 속 가상의 세계가, 유저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현실’이 될 수 있게 하는 것.
오직 그것이, PRD가 개발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기 때문에.
그 부분을 강조하는 상혁에게, 터커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PRD가 그렇게 대단한 유저 경험을 제공하는 게 사실이라면, 많은 유저들에게는 엄청나게 아쉬운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상혁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PRD는 직접 써봐야 그 대단함을 알 수 있는 장비니까요.
하지만 4차 NE 컨벤션에 참여하는 유저들은 PRD가 아닌 딥 다이버만을 사용해서 컨벤션을 즐겨야 하지 않습니까?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인가요?”
“우선 가장 빠르게 새 인터넷을 제공할 수 있는 통신사가 결정된 국가를 우선으로, 3월부터 PRS의 예약 주문을 받을 생각입니다.
배송은 7월 말이 될 거고요. 물론 구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으니 4차 NE 컨벤션이 진행되는 8월 15일까지는 사용해볼 수 없겠지만, 물건을 먼저 받아볼 순 있겠죠.
그리고 해당 날짜까지 통신 인프라가 구축 완료된 지역을 대상으로, PRD의 모든 경험을 체험할 수 있는 ‘PRD 센터’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그건 컨벤션 이후에도 상시 운영될 예정이니, PRD센터가 있는 국가의 게이머들은 예약을 잡고 그곳에 들러서 PRD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게 정 어렵다면, 당분간은 대한민국의 PRD 센터에 예약을 넣고 관광을 오시는 방법밖에는 없지만요.”
“PRD를 개인에게는 판매하지 않습니까?”
“지금 구매하시려면 저희가 중계 센터에서 가정까지 직접 회선을 까는 비용도 함께 지불하셔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PRD 센터는 PRD의 체험뿐만이 아니라 저희가 구축한 새 인터넷의 기지국 역할도 하는 곳이죠.
만약 PRD 센터의 근처에 있는 집이라면, 예약을 통해 4차 NE 컨벤션 전까지 PRD를 가정에 설치해드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도시에 있다면 거기까지 회선을 끌고 가는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때는 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자신이 사는 도시에 저희가 개발한 새 인터넷의 회선이 깔릴 때까지요.”
“세상에서 가장 긴 기다림이 되겠군요.”
그때, 상혁의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리자, 상혁이 칼슨을 바라보며 양해를 구했다.
“바쁘신 분이니까요. 아무리 방송 출연 중이라지만 휴대폰을 꺼두실 수는 없었겠죠. 이해합니다.”
칼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이 휴대폰을 보았고 칼슨은 그런 상혁을 보며 단서를 달았다.
“대신 공개해도 되는 좋은 소식이라면 저희 방송에서 최초로 알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겠죠?”
그러자 휴대폰을 내려놓은 상혁이 그를 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러죠. 오늘 이 자리에서, 생방송을 지켜보고 계신 미국의 시청자 여러분께 기쁜 소식을 알려드릴 수 있어서 한없이 영광입니다.
바로 조금 전, 전 세계 국가들 중 대한민국을 제외한 1순위 서비스 국가로, 미국이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허먼의 TV 쇼가 끝난 지 단 3일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게이머들이 빠르게 연합해 통신사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칼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미친 타이밍에, 미친 소식이 들려온 것이기 때문에.
“통신사! 통신사는 어디죠?”
“버라이즌(Verizon). 미국 최대 통신사인 버라이즌 커뮤니케이션즈에서, 8월까지 뉴욕, LA, 시카고, 휴스턴, 필라델피아, 워싱턴의 6개 도시에 새 인터넷을 우선 구축하는 것으로 미국 게이머들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월 요금은···. 50달러 수준이네요.”
“비싼 건가요?”
“글쎄요. 한국에 비하면 좀 비싼 감이 없지 않긴 한데, 아무래도 게이머들이 비용은 비싸도 AT&T보다 더 빠른 구축을 약속한 버라이즌의 손을 들어준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 기간 안에 서비스를 구축할 수 있을까요?”
“해야죠. 약속한 거니까. 적어도 지금은 축하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PRD가 선사하는 놀라운 경험을 체험할 수 있는 유저들이, 바로 미국의 게이머분들이 된 거니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통신망 구축은 빠르게 진행하려 할수록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 모든 망 구축에 들어가는 인력을, 엄청나게 대량으로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비스 가격을 지나치게 올릴 수 없다는 제약까지 걸린 상태에서, 버라이즌은 새 인터넷에 완전히 올인하는 결정을 내렸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오직 이 ‘새 인터넷’을 가지고 있는 통신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기에 버라이즌은 압도적인 초기 투자금이 필요해지는 결정임에도 4차 NE 컨벤션 전까지 미국 주요 도시 6개에서 동시에 서비스 개시를 하겠다는 공지를 올렸다.
그것은 가격은 더 저렴해도 기간 내에 미국 동부에서만 서비스를 개시하겠다고 선언한 AT&T보다 게이머들에게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는 선택지였다.
“아마도 TV 앞의 시청자들은, 최소한 말씀하신 도시에 거주하는 시청자들은 지금 발표에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엄청난 발표네요.”
“저도 이렇게 빠르게 결론이 날줄은 몰랐습니다.
제 생각엔 AT&T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대항할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나쁘지 않습니다. 월 50달러면 한국에 비해서 비싸긴 하지만, 저희가 제공하는 인터넷의 속도를 감안하면 기존 인터넷 비용보다 훨씬 싼 비용이니까요.
발표한 도시의 수와 거리를 감안하면 절대 저 가격이 나올 수 없는데, 버라이즌이 적자를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군요.”
망 구축에 필요한 제반 비용은 PTW 홈페이지에서 엄청나게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주요 도시를 클릭하는 것만으로도 해당 지역의 예상 시가와 인건비까지 고려하여 구체적인 작업 비용의 견적을 잡아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상혁은 버라이즌이 제시한 가격이 절대로 이윤을 뽑을 수 있는 가격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득이 될 거라고 본 거겠지.’
월 50달러의 가격은 단순히 PRD를 위한 인터넷 회선의 가격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거기에 해당 망을 이용한 5G무선 인터넷의 비용까지 청구한다면 어느정도 손해는 메꿀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겠지만, 상혁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 PTW가 직접 미국에서 서비스를 개시한다 하더라도, 월 50달러의 비용에 서비스를 제공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미국 최대의 통신사에 훌륭하게 덤터기를 씌우는 데 성공한 상혁에게 칼슨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4차 NE 컨벤션 전부터 이토록 이슈를 몰고 다니는 그가, 정작 4차 NE 컨벤션에서 발표할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에.
“상혁 씨.”
“예.”
“오늘 발표는 아마도 미국의 게이머들에게 올해, 아니 21세기 들어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PTW에게는 4차 NE 컨벤션이라는 큰 행사도 남아 있죠.
시간이 다 되어가니 마지막 질문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혹시 최근 발표하신 것들이, 4차 NE 컨벤션에서 유저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아니겠죠?”
그러자 상혁이 웃으며 칼슨에게 말했다.
“오, 물론이죠. NE 컨벤션의 상징은 매번 공개되는 컬쳐 쇼크 수준의 무언가니까요.
그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제가 최근 발표한 모든 것들이, 결국 그것을 위한 포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엄청난 게 준비되어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적어도 후회는 안 할 겁니다. 앞으로의 일만 제 생각대로 잘 풀린다면 말이죠.”
터커가 물었지만 상혁은 그 ‘앞으로의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기대하라’라는 말만을 남겨둔 채.
상혁은 미국 최대의 TV 뉴스 쇼 촬영을 마치고 리무진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미국에서의 상혁의 활동을 위해, 윌 게이트가 상혁에게 빌려준 전용 리무진이었다.
“방송 봤습니다.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펄쩍 뛰었는데, 차 천장에 부딪힌 정수리가 지금도 아프네요.”
리무진의 운전을 맡은 게일 휘태커가 말하자 상혁이 그에게 물었다.
“게이머신가요?”
“게이머죠. PTW의 팬이기도 하고요.”
“아, 그럼 좀 곤란한데.”
“그런가요?”
“예. 다음에 가야하는 곳이, 아까 말했던 ‘앞으로의 일’과 관련된 곳이라서요.”
“이 바닥에서 기업 관계자들을 상대로 리무진 운전을 하다 보면, 그 정도 눈치는 생깁니다.
절대 발설하지 않을 테니, 편하게 목적지를 말씀하시죠.
전 오늘 아무 곳도 가지 않고 호텔로 돌아간 셈 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휘테커는 상혁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엔 놀랍게도 윌이 휘태커에게 작성하도록 지시한 기밀 유지 서약이 적혀있었다.
“위약금이 2천만 달러네요?”
“대신 돈도 많이 받았습니다. 윌 게이트 씨 대신 저를 고용한 크리스 씨가 그러더군요.
PTW는 언제나 비밀유지에 대한 정당한 가격을 지불한다고.”
“맞는 말입니다. 이번엔 MS에서 대신 낸 모양이지만.”
“그러니 안심하고 말씀하시죠. 어디로 모실까요?”
운전수의 말을 들은 상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뉴욕 공항으로요. 이번엔 캘리포니아로 가야 하거든요.”
상혁의 다음 행선지는, FAX 뉴스 스튜디오가 있는 뉴욕의 반대편에 있는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였다.
그리고 그곳엔, 현재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히어로 프렌차이즈를 보유한 회사의 본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마벌 스튜디오(Marval Studios).
허먼과 칼슨에 이어 상혁이 다음으로 만날 인물은, 바로 마벌 스튜디오의 수장인 ‘케븐 파이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