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기대감의 역전
PTW의 CCO 이상혁이 TV쇼에 출연해 4차 NE 컨벤션에 대한 정보를 풀 것이란 뉴스는 PTW 커뮤니티 내에서 격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찬성하는 측은 앞으로 7개월 가까이 남은 NE 컨벤션까지 무작정 기대감만 품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란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반대 측에서는 일종의 스포일러가 되어 NE 컨벤션이 주는 특유의 문화 충격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질 것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대립하는 양측 세력 모두 공통으로 동의하고 있는 사항이 단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PTW가 결정한 것이라면,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믿음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아는 PTW라면, 세상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게이머에게 손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PTW가 콘솔 게임 업계에서 20년 가까이 쌓아 올린 노력은, 이제 팬들이 상혁의 뜬금없는 방송 출연 발표를 보고서도 그들이 막연한 믿음을 가지기에 충분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예상대로, 상혁의 이번 TV 쇼 출연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있는 첫 번째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군요.
이번 4차 NE 컨벤션 발표는 정말 논란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 저 역시 PTW가 그토록 커다란 규모의 3차 NE 컨벤션을 성공적으로 치른 바로 다음 해에, 또 다른 컨벤션을 열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PTW는 작년 한 해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매우 바쁜 한 해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일을 수습해야 하는 와중에, 또 한 번의 NE 컨벤션을 굳이 올해 추진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 팬으로서는 매년 PTW의 새 게임이 나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긴 하지만, 과도하게 무리한 스케줄로 인해 발매되는 게임의 퀄리티가 낮아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으니까요.”
흔히 게스트가 등장하면 이어지는 근황 토크나 잡담 대신, 허먼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질문을 던지는 과감한 진행 방식을 선택했다.
쇼의 시간은 제한적이었고, 물어볼 것은 너무 많았으며, 무엇보다 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이 뻔하디뻔한 근황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게스트 입장에서는 마치 청문회처럼 바로 질문부터 치고 들어오는 그런 방식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지만, 상혁은 그런 허먼의 질문을 받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내놓았다.
“사실 퀄리티에 대한 우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PTW는 언제나 게임 개발을 할 때 장기적인 플랜과 여유를 두고 개발을 하는 편이며, 이번에 공개될 게임들도 최소 2년에서 긴 것은 4년 넘게 개발하고 있던 게임들이니까요.
저희는 여러 팀을 동시에 돌리고 있으며, 그 팀들이 유저들이 만족할 만한 퀄리티의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마치 와인을 숙성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품질 좋은 오크 통에 와인을 넣어서, 원하는 맛이 나올 때까지 숙성하는 겁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맛을 보다가, 지금이 이 와인의 최고점이라고 판단 될 때 병에 담습니다.
3차 NE 컨벤션 때 저희는 딥 다이버란 신규 디바이스의 공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저희가 개발 중인 게임들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죠.
그래서 저희가 3차 NE 컨벤션 때 스타 다이버라는 단 하나의 게임만을 출시했던 겁니다.
내부에서 개발 중인 다른 게임들이 충분히 완성도를 갖출 수 있도록.”
“그럼 지금에 와서야 나머지 와인들이 충분히 숙성되었다는 판단을 하셨다는 거죠?”
“그렇죠.”
“그럼 이전과는 다르게 개발 중인 게임들의 정보를 순차적으로 공개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까?
작년에 존 카믹씨를 저희 쇼에 출연시켜서 PTW LAB의 게임들을 공개한 것처럼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게임 회사들이 홍보를 하는 주요 목적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죠.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트레일러를 공개하거나 게임 플레이 영상을 공개하면서, 최대한 게임에 대해 기대감을 품을 수 있도록 영상을 만들곤 합니다.
우리 게임은 그래픽이 이렇게 뛰어나.
우리 게임은 이런 플레이가 가능해.
라는 식으로요.
그렇기에 그런 영상들의 대부분은 게임의 가장 멋진 부분들을 골라서 공개하는 방식이 되어버리죠.
막상 플레이해 보면, 정말로 멋진 부분은 게임의 10%도 안 된다는 사실을 유저가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심지어 심한 경우는 공개된 게임플레이 영상보다 그래픽이 다운그레이드되어 발매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상상력이 언제나 개발자의 구현 능력을 뛰어넘는다는 겁니다.
일반적인 게이머는 트레일러의 공개된 부분만을 보고 게임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마련이고요.
3차 NE 컨벤션까지의 저희의 주요 전략은, 그런 유저들의 기대감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컨벤션에 직접 참여하든, 아니면 다른 이들이 촬영한 영상을 보든, 아니면 PTW 홈페이지에 공개된 영상을 보든.
결과적으로 게임의 ‘광고’가 아닌, 게임 그 자체를 보면서 게이머들이 ‘와우, 이건 내가 상상한 그것 이상인데?’라고 생각하기를 바랐죠.
그리고 지금까지는 꽤 잘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신 이유가 있나요?”
“굳이 따지자면 밸런스 때문이라고 답해야할 것 같네요.”
“밸런스 말입니까?”
허먼이 되묻자 상혁이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조금 전 제가 일반적인 게임 트레일러는 유저의 상상력을 부풀리는 법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실제 게임은 그 부푼 기대감을 만족시키기 어렵다고도 했고요.
그건 말하자면 ‘기대’의 크기가 ‘재미’의 크기보다 크면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게임의 멋진 부분들만을 전달하는 기존의 광고 방식은, 항상 기대의 크기를 재미 이상으로 부풀리는 문제가 있었고요.
그러나 저희가 주력 플랫폼을 기존의 TV 스크린에서 딥 다이버로 옮겨 오면서, 그 문제가 반대로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죠. 허먼 씨. 혹시 딥 다이버용 VR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PTW 팬으로 유명하신 분이니 그 질문은 적절하지 않겠네요.
당연히 해 보셨겠죠?”
“물론이죠. 바로 어제까지 매일같이 플레이했고, 오늘도 출근 전까지 스타 다이버를 즐겁게 플레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혹시 딥 다이버용 게임을 딥 다이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유저에게 추천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주로 뭐라고 하면서 추천하시나요?”
“스타 다이버의 예를 들면, 우주 전함의 함장이 되어 드넓은 우주를 누비며 수많은 외계 종족을 만나고, 내 승무원들을 꾸려서 나만의 항해 일지를 만들어가는 게임이라고 설명합니다.”
“상대가 항상 흥미를 보이던가요?”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네요. 일반적으로 우주 전함에 로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미 스타 다이버를 사서 플레이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스타 다이버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쪽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럼 그럴땐 뭐라고 설명하시나요?”
“이건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함장 석에 앉아 내가 고용한 승무원들을 바라보며, 드넓은 우주를 가득 메운 적 전함을 향해 ‘제2 전속! 쉴드를 전방에 집중! 전탄 일제 발사!’라고 외치는 쾌감은 진짜로 딥 다이버를 사서 해보지 않는 이상은 절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하죠.”
“바로 그겁니다. 일반적인 광고 방식으로는, 딥 다이버가 전달해주는 경험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거죠.
그건 마치 구형 CRT TV에서 최신형 TV의 광고를 보는 거랑 같은 겁니다.
‘이 TV는 기존 TV 대비 수백 배나 화려한 색채 구현이 가능합니다!’라고 광고를 하지만, 실제 내가 보고 있는 화면은 구형 CRT의 화면이잖아요?
정말로 그 TV가 어떤 색감을 가지고 얼마나 압도적인 화면을 보여주는지는, 매장에 가서 그 TV의 화면을 실제로 봐야 알 수 있는 거죠.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VR 게임들은 게임성이 구려도 VR이라는 매체가 가져다주는 ‘경험’ 하나만으로 재미의 몇 배는 먹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실제로 플레이를 하며 만져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죠.
저희가 아무리 트레일러를 잘 만들어서 공개한다고 해도, 그 압도적인 경험 자체는 평면인 스크린으로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기대감의 역전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PRD를 통해 즐기는 게임 경험은 딥 다이버의 그것을 몇십 배는 상회하는 것입니다.
유저가 그 어떤 것을 상상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체험했을 때 전신으로 느낄 수 있는 압도적인 현장감엔 비할 수 없죠.
단순히 가상 공간에서 손을 뻗는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재미가 전달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 안에서 만지는 오브젝트 하나하나가, 그리고 눈앞에서 말을 거는 NPC의 표정 하나하나가 전부 ‘끝내주는 재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니까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제는 너희들이 뭘 상상하든 무조건 게임 자체가 끝장나게 재미있을 거니 기대감을 억제할 필요가 없어졌다.’라는 건가요?”
“요약을 잘 하시네요.”
“엄청난 자신감의 표현으로 들립니다. 물론 PTW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회사’로 유명하긴 하지만, 반대로 그 지금까지는 상상 자체를 할 여지를 크게 남겨주지 않는 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아예 ‘너희들이 뭘 상상하든 우리 게임이 너희 상상보다는 재미있을 거다.’라고 선언하시는군요.”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TV쇼에 나온 거죠.
광고로는 저희 게임의 대단함을 100% 전달할 수 없으니, 제가 제 입으로 직접 설명하기 위해서요.
전 오늘 PTW의 CCO 자격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시청자 여러분들과 똑같이, PTW의 게임을 사랑하는 게이머로서, 그리고 운 좋게 남들보다 먼저 ‘히어로 클래스 101’을 플레이한 게이머의 입장에서 그 게임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설명하러 나온 것이죠.”
“일부 유저들은 그것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요?”
“방송 시간 내내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히어로 클래스 101이 가진 재미의 10%조차 전달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숨 쉴 틈도 없이 떠든다고 해도, 저희 게임이 가진 컨텐츠의 10%도 설명하지 못할 거고요.
게다가 제가 설명해 드린 모든 것들을 게임에서 직접 경험하는 순간, 여러분은 느끼게 될 겁니다.
아, 알고 ‘보는’ 것과 알고 ‘경험’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대놓고 ‘모든 정보를 까러 왔다’고 선언하는 상혁의 이야기를 들은 허먼은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기대감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직 게임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하지 않았음에도, 사전 발언으로만 이렇게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든 상혁이, 게임 이야기를 시작하면 진짜로 얼마나 멋진 느낌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먼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상혁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질문했다.
“그럼 정말로 오늘 이 방송에서 PTW의 차기작과 다음 NE 컨벤션에 대한 정보를 아낌없이 푸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상혁이 씩 웃으며 허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오늘 밸런스를 잡으러 온 거라고.
물론 또 하나의 다른 목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공개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히어로 클래스 101에 대해서라면, 적어도 여러분의 기대감이 저희가 발매할 게임의 재미의 절반 수준까지는 근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설명할 생각입니다.”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의 아찔한 쾌감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감각을 느끼며, 허먼이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죠. 전 세계 게이머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올해 최대의 이벤트가 될 8월의 4차 NE 컨벤션에 대해서요.”
순간 방송을 보고 있던 수많은 시청자가 TV 앞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지만, 스튜디오에 있는 상혁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단지 상혁은, 최초에 자신이 이 방송에 출연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기대감 부여’를 위해서, 덤덤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혁의 의도대로 그 방송을 보고 있는 수많은 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이야기였다.
***
“그러니까 히어로 클래스 101, 줄여 말해서 HC101에서는 유저가 게임 속 대사를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인 거죠?”
“그렇습니다. 물론 주인공 성우의 목소리도 유저가 결정할 수 있고, 마이크 없이 패드만 가지고 미리 녹음된 성우의 연기를 들으며 게임을 할 수도 있지만, 이 게임의 백미는 역시 빌런 앞에서 재치있게 받아치는 유저의 창의력 담긴 개드립이라 할 수 있죠.”
“어떤 식으로 그게 가능한 겁니까? 설마 OGC처럼 NPC가 유저의 말을 이해하는 방식인가요?”
“그런 방식은 아닙니다. 단지 게임의 옵션에서 대사를 유저가 직접 말할지, 아니면 성우의 연기를 들으며 게임을 할지를 결정하는 옵션이 있고, 특정 상황에서 주인공이 해야 할 대사가 나오는 타이밍에 가이드가 제시되는 방식이죠.
구체적으로는 대본 모드, 연기 모드, 더빙 모드가 지원되는데, 예를 들어, 유저 연기 옵션이 켜진 상태에서 빌런과 대치 중일 때, 빌런이 이렇게 말한다고 치죠.
‘나는 필연적인 존재다.’
그때 유저의 눈 앞에는 자신이 해야 할 대사의 옵션이 주어집니다.
‘나는 아이론 맨이다.’
‘이피카이예이,머더X커(Yippee-ki-yay, motherfucker)’
‘똑똑히 보아라. 필연을 부수는 인간의 의지를.’
이렇게 3개의 대사가 주어진다고 할 때, 만약 자신이 더빙 모드로 플레이 중이라면 유저는 제스쳐 입력이나 패드의 버튼을 통해 그중 한 대사를 고를 수 있습니다.
그럼 미리 더빙된 성우의 연기가 그 대사를 재생하죠.
만약 대본 모드라면, 유저는 자신이 읽고 싶은 대사를 자신의 목소리로 읽으면 됩니다.
그럼 내장된 보이스 프로그램이 유저의 귀에 유저가 선택한 주인공 성우의 목소리로 유저의 목소리를 변환해서 들려주죠.
이 대사들은 같은 계열의 애드립을 허용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론 맨이다.’라는 대사는 상대가 자신을 정의하는 것에 대해 주인공이 자신을 정의하는 식으로 반박하는 대사죠.
그렇기에 그 대사는 대부분의 자기소개 대사 형태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사는 ‘I AM’으로 시작하는 문장이라면 어떤 문장이라도 얼추 맞아 떨어진다는 겁니다.
‘나는 히어로다.’
‘나는 이상혁이다.’
‘나는 인간이다.’
같이요.
그러니 유저는 대본 모드에서 주어지는 선택지를 참고하여 자신만의 대사를 만들어 연기할 수 있습니다.
그럼 거기 맞게 상대방이 적절한 반응을 보이죠.
마지막으로 연기 모드를 플레이하고 있다면, 애당초 대사 선택지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유저가 모든 대사를 창작할 수 있도록 해당 상황에서의 빌런이 어떤 대사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있는지를 보여주죠.
(긍정), (부정), (모욕) 같은 식으로요.
그럼 거기 맞게 자신이 대사를 만들어서 말하면 됩니다.
굉장히 진지한 장면에서, 그건 생각보다 굉장한 몰입감을 주죠.
마치 자신이 슈퍼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이 된 느낌을 주니까요.
물론 초 회차 플레이를 할 때는 더빙 상태를 추천해 드립니다.
이 게임의 멋진 대사들을 쓰기 위해, 저희 시나리오 팀 담당자들이 정말 노력을 많이 했고, 참여한 성우 분들도 최선을 다해 연기하셨으니까요.
그리고 그 멋진 대사들의 패턴이 어느정도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조금씩 내 대사를 만들어가는 거죠.
최종적으로는 플레이어가 주인공인 완벽한 한편의 히어로 드라마가 펼쳐질 겁니다.
시나리오 라이터가 쓴 대사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모든 체험을 담아 뱉어낸 자신만의 대사를 하는 게임이 되겠죠.”
“육성은, 육성은 어떤가요? 트레일러에서 공개된 부분은 매우 일부분이라 지금 많은 논란과 의견들이 오가고 있는데, 대략적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육성 시스템이 구성되어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HC101의 육성 시스템은 그것이 시스템임을 최대한 숨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PRD로 게임을 플레이할 때, 저희는 유저로 하여금 PRD에서 벗어나 게임 패드를 잡아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게임 내의 UI 등은 대부분 플레이어가 가지고 다니는 웨어러블 디바이스나 타블렛 PC, 혹은 스마트폰 등에 숨겨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료 중 한명이 슈트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특정 장비가 필요하다고 하면, 게임 내에 있는 타블렛이나 PC를 통해 웹으로 그것을 주문하거나, 혹은 동료가 전화로 플레이어의 자금을 써서 그것을 구매해도 될지를 묻는 거죠.
스테이터스의 분배나 스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 원하는 수치를 분배하고, 능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적용하게 되죠.
만약 당신이 마법 계열의 슈퍼 파워를 가진 히어로라면, 당신은 마법진이 그려진 서적을 펴고 그것을 이용해 몸에 새겨진 서클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칠 겁니다.
만약 유전자 조작 계열의 슈퍼 파워를 가진 히어로라면, 특별하게 제작된 캡슐에 들어갔다가 나옴으로써 변화된 스킬 트리를 적용할 수 있죠.
혹은 트레이닝을 통해 새 기술을 습득할 수도 있고요.
HC101에는 수십 가지 계열의 슈퍼 파워가 있고, 각 능력마다 육성 방식이나 스테이터스 관리, 히어로 활동을 하는 방법 등이 모두 다릅니다.
그 디테일은 능력을 바꾸면 아예 다른 게임으로 느껴질 정도죠.
스파이디 맨처럼 와이어를 통해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며 범죄 현장으로 이동하는가 하면, 박쥐 인간처럼 전용 차량을 타고 출동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마법으로 포탈을 열어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건 초반 파트에서 유저가 습득한 슈퍼 파워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고요.
저희는 그것을 ‘기연’이라 부릅니다.
중국 무협 영화에서 주인공이 은거 기인을 만나 전설의 무공을 얻게 되는 것처럼, 도시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자신의 운명이 될 능력을 찾아 나서는 거죠.”
허먼은 상혁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것은 물론 상혁의 화술이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게임 플레이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HC101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유저들에게 친숙한 ‘보편적인 이미지’를 기준으로 개발된 게임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과연 ‘게임’이란 카테고리로 구분해도 좋을지 의문일 정도로.
HC 101은 ‘주인공이 된다’라는 컨셉을 충실하게 구현한 게임이었다.
“그러니까 옵션을 전부 조정하면 아예 게임 UI자체를 호출하지 않고도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거죠?
마치 슈퍼 히어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게임 세계 속을 돌아다니고 약자를 구하며 빌런과 싸우고 동료를 구하는 과정이, 전부 현실처럼 구현되어 있다는 이야기인 거고요?”
“그렇죠. PRD라는 장비의 개발 목적 자체가 유저로 하여금 그런 느낌을 체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히어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데 게임 UI같은 건 집중력을 해치는 요소가 되니까요.
슈퍼볼 광고에서 보여드린 것과 같습니다.
방금까지 현실 속 모습인 줄 알았던 영상에, 단순히 [저장하기] 버튼만 띄워도 사람들은 그것이 게임이란 것을 알아차리게 되죠.
저희는 플레이어들이 HC101을 플레이하면서 그것을 잊기를 원했습니다.
적어도 게임을 하는 동안은, 현실에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게임 캐릭터 그 자체가 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목적은 잘 이루어졌나요?”
허먼의 질문에 상혁은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해 보시면 알 겁니다.
저희가 저희의 목적을 얼마나 잘 이루어냈는지, 전신으로 체감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도 지금 기대감이 차올라 미칠 것 같은데, 진짜로 플레이하면 지금 기대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거죠?
진짜입니까?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이 정도로 기대했는데 게임이 기대에 못 미친다면, 저는 실망감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될 겁니다.
PTW의 게임은 제게, 그리고 수많은 팬들에게 인생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존재니까요.”
“만약 당신이 PRD를 플레이할 수 있는 상황이고, 딥 다이버와 HC101을 가지고 있다면, 예.
저는 HC 101이 당신에게 현실의 삶이 아닌 또 하나의 삶을 열어줄 문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단지 그 조건을 갖추는 것이 조금 어렵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자 지금까지 기대감을 에스컬레이터처럼 계속 부풀리던 이야기와 다르게, 상혁의 말에 뭔가의 위화감을 느낀 허먼이 상혁을 보며 물었다.
“잠깐만요. 혹시 그 말은, PRD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런 멋진 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 딥 다이버로도 어느정도의 체험은 가능합니다.
심지어 게임 패드와 TV로 플레이해도 어느 정도의 재미는 느낄 수 있겠죠.
하지만 진정으로 다른 세계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PRD의 존재는 필수적입니다.”
“비싼 가격이 진입 장벽이 되겠군요.”
허먼은 당연히 3천만 원대에 달하는 PRD의 가격이 가장 큰 진입 장벽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지금까지 들은 상혁의 설명만으로도 3천만 원이란 가격이 아깝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러나 상혁은 허먼의 이야기에 고개를 저으며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치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주제에 대해 말해야 하는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아, 그것 말이죠. 사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제가 오늘의 TV 쇼에 출연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고요.”
“아까 말씀하신 ‘또 하나의 목적’ 말씀이신가요?”
“예. 그리고 그건 아마도 일부 유저분들에게 매우 실망스러운 내용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대체 그 내용이 뭐길래···.”
말을 이어나가던 허먼이 입을 닫았다.
상혁이 말했던, ‘PRD를 플레이할 수 있는 상황’ 이란 말을 통해, 상혁이 하려는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면, 그것은 허먼이 PTW의 팬이 된 이후로 인생 최악의 사태가 될 발표가 될 수도 있었다.
“PRD는···.”
허먼은 상혁의 입에서 제발 자신이 예상하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너무나도 냉정한 것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상혁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PRD는 발매 직후부터 당분간 한국 전용으로 서비스 될 예정입니다.
저희가 본격적인 해외 서비스를 구축하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때까지는 딥 다이버만 가지고 HC101을 즐겨야 하겠죠.”
상혁이 TV 쇼 출연을 결정한 두 번째 이유.
그것은 전 세계 수천만의 PTW 팬들이 기대하고 있는 PRD의 정식 서비스가, 오로지 한국에서만 먼저 시작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TV쇼를 통해 공개하기 위해서였다.
“이게 옳은 선택이었을까요?”
그 시각,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에서 그 영상을 지켜보고 있던 서연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영상을 보고 있던 민준이 그녀에게 답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잖아.”
“그렇긴 한데···. 그럼 차라리 기대감을 부풀리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잖아요? 굳이 PRD가 전해주는 멋진 경험에 대해 엄청나게 이야기해놓고 ‘근데 너희는 못 함’이라고 말하는 게 괜찮을까 싶어서···.”
“괜찮을 거야. 그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그래요? 하지만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간에, 팬들이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허먼 씨도 지금 당장 나라 잃은 김구 선생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잖아요.”
서연의 말대로, 허먼은 엠뷸런스를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수준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준은, 그런 허먼의 표정을 보고도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서연에게 말했다.
“필요한 과정이지. 상혁이가 알아서 잘 수습할 거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민준의 눈에 상혁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민준이 매번 터무니없는 무언가를 시도하려 할 때마다 상혁이 민준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