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테스크 정리
첫 미팅 이후로, 상혁은 2주 정도를 미국에 머물며 컨소시엄 참여 업체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는 업체 담당자들과 X-BOX용 딥 다이버 게임들의 초기 기획을 마무리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연락을 통해 개발할 게임들의 퀄리티 관리를 약속 받은 후에.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한국에서, 상혁은 자신을 기다리는 엄청난 업무량을 맞이해야 했다.
“X발 단지 2주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상혁이 한탄하듯 말하자, 민준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벌려놓은 게 너무 많잖아. 어쩔 수 없지.”
“잠깐 교통정리 좀 해야겠어.”
상혁은 다시 임원들을 호출하여 회의를 진행했다.
자신이 부재중이었던 동안, 회사 내부에서 진행된 사항들에 대한 정보 공유를 받기 위하여.
그러자 PTW의 신규 레이블인 PTW LAB의 총괄을 맡은 존 카믹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먼저 말하죠. PTW LAB에서는 허먼 씨가 진행하는 TV쇼에 출연한 이후로, PTW LAV의 런칭 타이틀에 대한 준비를 해 왔습니다.
주로 메인 타이틀이 될 호러 게임 ‘딥 다이버’에 대한 준비였죠.
현재 버전은 일부 사람들에게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준의 위험성이 있기에, 저희는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 보시는 이것입니다.”
그가 스크린에 띄운 영상에서는, 심해 괴물을 피해 비명을 지르며 달아다니는 플레이어의 시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플레이어는, 곧바로 뒤에서 다가온 끔찍한 괴물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제 3자 시점으로 보면 조금 끔찍한 모습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PRD를 통해 플레이를 진행할 때는 충분히 심장마비를 일으킬만한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그러자 상혁이 손을 들어 존 카믹에게 물었다.
“이건 이전 버전 그대로잖아요?”
“이건 패치가 적용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비교를 위해 튼 거죠. 같은 장면을 저희가 수정한 것은 이런 느낌입니다.”
존 카믹이 버튼을 누르자, 똑같은 구도의 다른 화면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완전히 달랐는데, 몸에서 피처럼 보이는 진득한 액체를 질질 흘리며 플레이어에게 다가오는 괴물의 외형이, 폭신폭신한 느낌의 곰 인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테디베어?”
“예. 다가오는 괴물의 디자인이 귀엽고 폭신폭신한 느낌으로 바뀌면, 공포감이 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그 말을 들으며, 상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괴물의 외형이 문제가 아닐 텐데···.’
실제로 딥 다이버란 게임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가장 큰 요소는, 괴물의 외형이 아닌, 공간과 플레이에서 나오는 공포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동료 플레이어가 잠긴 문을 열어줄 때까지 문을 두드리면서, 뒤에서 미친 듯이 뛰어오는 괴물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그 플레이 자체가 무서운 게임이었기 때문에.
그건 단순히 괴물의 외형을 고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괴물의 외형을 바꾸면서, 또 다른 문제도 발생하고 있었고.
존 카믹은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 아이디어를 도입할 때만 해도, 저희는 사지가 조각나는 잔혹한 게임 오버 연출 대신, 폭신폭신한 테디베어가 플레이어를 포근하게 껴안는 느낌으로 게임오버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려고 시도했습니다.
어차피 잡혀봐야 테디베어에게 허그 당하는 게 전부라면, 공포심도 크게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실제로 테스트한 결과는 저희가 생각한 것과 달랐습니다.”
그 순간, 뒤에서 플레이어를 덮친 테디베어가 플레이어 캐릭터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영상 안에서, 테스트 플레이어로 보이는 플레이어의 비명 소리가 처참하게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으아아!으아아아!!-
그것은 대충 들어도 이전의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잡혔을 때와 비슷한 크기의 비명이었다.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 같네요.”
“예. 사실 게임 오버의 연출 자체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연출이 게이머에게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귀엽게 생긴 대상이라도 게이머가 그것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테디베어가 게이머를 껴안는 순간 게이머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게다가 괴물의 외형을 제외하면, 사운드나 지형 등 다른 공포 요소들은 그대로 유지하였으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나머지 맵들도 변화시켰습니다.
배경음악도 자장가 같은 느낌으로 바꾸고, 심해 기지 그 자체처럼 보이는 지형 오브젝트들도 베개나 과자처럼 귀여운 사물들로 바꿨죠.
그 결과물이 이겁니다.”
다시 나온 영상에서는 마치 즐거운 기분으로 산책이라도 하듯 폭신한 곰 인형과 플레이어의 술래잡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긴장감이라고는 1도 없는 느낌으로.
그리고 상혁은, 그 영상을 보며 카믹에게 말했다.
“이건 긴장감이 너무 없는데요?”
“그렇죠. 문제는 그겁니다. 이걸 유저가 데스 게임이라 인식하는 순간, 게임의 외형과 관계없이 공포심이 극대화되고, 이게 술래잡기라고 인식되는 순간, 공포심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거죠.”
그러자 상혁은 잠시 고민하다 카믹을 향해 말했다.
“우선, 레벨을 나눠서 공포심을 조절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게임이 가지고 있는 외형적 요소를 바꿔서 공포심을 해결하려는 방법엔 문제가 있어요.
실제로 광산 크래프트 가지고도 호러 게임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인간은 상상력만 자극할 수 있다면 충분히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눈앞에 좀비가 있을 때, 그 좀비가 거북이 같은 속도로 걸어 다니고 있다면 충분히 뛰어서 통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죠.
반대로 월드워 Z의 좀비들처럼 미친 듯이 빠르게 뛰어든다면 문밖으로 나설 엄두도 나지 않을 테고요.”
“스킨이 아니라 난이도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그에 맞설 수 있는 충분한 대항 수단을 준다면 괴물이 만만하게 보이게 될 겁니다.”
“레벨에 따라 괴물의 이동 속도를 조정하고, 막다른 곳에 갇히는 상황의 수가 줄어들게 하겠습니다.”
“그걸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아예 플레이어가 괴물을 쫒아낼 수 있는 무기를 추가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할 것 같습니다.
작살이든 스턴건이든, 맞추면 비명을 지르면서 괴물이 도망하게 할 수 있는 무기를 난이도에 따라 다른 수량으로 배치하는 거죠.
저 난이도에서는, 괴물을 상대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괜찮겠네요. 바로 적용해서 테스트해보겠습니다.”
“그 문제만 해결되면 ‘딥 다이버’는 런칭 가능한가요?”
“예. 원래부터 완성되어있는 게임이었으니까요.”
“그럼 준비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이번엔 민준이 손을 들며 상혁에게 질문했다.
“미국 출장 건은 어떻게 됐어?”
“일단 개발 방향성만 잡은 정도로.
하지만 이번엔 지난번처럼 별도 컨벤션을 통해 공개하진 않을 거야.
발표 일자도 MS에서 알아서 잡아서 진행할 거고.
이제 겨우 개발이 들어갔으니 우리가 지원해준다 해도 최소 1년 이상의 개발 기간은 필요하겠지.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될 거고.”
“거기엔 스페이스 다이버 같은 PTW 오리지널 게임은 제공 안 하나?”
“MYOM의 딥 다이버 버전 정도로 충분해. 이미 팬층이 두터운 게임이니까.
오히려 MS에서도 리스크가 있는 신규 게임보다 그쪽이 먼저 나오길 바라고 있을 거고.”
“좋아. 그럼 그쪽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
그럼 우리가 지금 해결해야 하는 주요 이슈가 뭐가 있지?
다들 자기 업무에만 집중하느라 디테일하게 전체 파악을 하지는 못하고 있으니, 상혁이 네가 한번 정리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상혁이 씩 웃으며 민준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으로 부른 거였어.
쌓여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슬슬 교통정리가 한번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상혁은 화이트 보드에 세로로 긴 줄을 긋고 나서, 왼쪽 공간 위에 이란 단어를 적었다.
그리고는 오른쪽 공간 위에 란 단어를 적었다.
“일단 구분 기준은 해당 프로젝트가 가져올 파급력이 아니라, 저희가 얼마나 많은 작업을 해야하는 가를 기준으로 나눴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MAIN항목에 있는 것들은 저희가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들이고, SUB항목에 있는 것들은 저희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외부에서 진행될 것들이나 약간의 노력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이죠.
그 기준으로 나눴을 때, 저희가 중점적으로 진행해야 할 메인 테스크는 대충 이렇게 구성됩니다.”
상혁은 마커를 들고 리스트를 적어나갔다.
그리고 상혁이 왼쪽으로 비켜나자, 화이트보드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 PTW LAB 런칭
▶ 프로젝트 히어로 공개
▶ 나이츠 어셈블 2 개발
▶ 리얼 엔진 개선
▶ PRD 보급을 위한 BM 확보
▶ 양자 통신과 관련된 연구 협력
▶ 레벨5 주행기술의 개선 및 이전
▶ 워 다이버를 위한 AI 센터 준비 및 설립
멤버들이 보드에 적힌 글을 읽는 동안, 상혁은 오른쪽 SUB 항목에 들어갈 리스트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SUB 프로젝트는 대충 이 정도가 되겠죠.”
▶ 워 다이버의 양산 및 보급
▶ CRD 및 PRD의 양산 및 보급
▶ PRD 센터를 위한 인프라 확충
▶ X-BOX용 딥 다이버 게임의 개발 관리
▶ 현재 늘어나고 있는 언론 비판 기사에 대한 대응
리스트를 충분히 읽어볼 수 있도록, 잠시 뜸을 들인 상혁은 보드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복잡하게 많아 보이지만 각 작업들의 순서는 논리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어요.
우선 리얼 엔진의 개선을 위해서는, 유저들이 자유롭게 퀘스트를 만들며 저희의 AI를 학습시켜줄 방대한 데이터를 제공하게 할 수 있게 만드는 나이츠 어셈블 2의 발매가 필수적이죠.
그것으로 모인 데이터를 활용해서, 저희는 리얼 엔진의 AI가 좀 더 다양한 형태의 게임들을 만들 수 있도록 학습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런 나이츠 어셈블의 발매를 위해서는 PTW LAB의 런칭 준비가 끝나야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메인 타이틀인 딥 다이버가 거의 완성단계에 있으니 그 부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있어요.
제 말이 맞나요?”
상혁의 질문에 존 카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다만 PTW LAB의 런칭이 되기 전에, 해당 게임들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PRD의 공개 및 발매가 선행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또 하나의 순서가 정해지네요.”
상혁은 오른쪽 공간에 있는 ‘▶ CRD 및 PRD의 양산 및 보급’이라 적힌 줄 앞에서 화살표를 시작해 왼쪽 공간의 ‘▶ PTW LAB 런칭’ 앞으로 죽 그어나갔다.
“해당 작업은 미 국방부와 DARPA, 그리고 PRD의 양산을 맡기로 한 테슬러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결과적으로 CRD와 PRD는 하드웨어적으로는 거의 비슷한 물건이고, 안에 탑재된 소프트웨어가 다른 물건이니까요.
그러니 같은 생산 설비를 가지고 두 가지 물건을 만드는 셈이죠.
현재 테슬러에서는 한국과 미국에 PRD 생산을 위한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 공장이 완성되면, 이후에 생산되는 PRD는 지금처럼 소량을 주문생산하는 방식이 아닌, 완성된 기성품을 부속 형태로 가져와 필요한 자리에서 조립하는 형태로 생산하게 될 거고요.”
“얼마나 걸릴까요?”
“이미 PRD를 군용인 CRD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테슬러 모터를 사용해 PRD를 만드는 작업은 끝난 상태입니다.
게다가 초기에 필요한 PRD의 공급이 충분히 가능할 정도의 양산 설비도 이미 준비가 되어있고요.
저희는 미국 테슬러 공장에서 생산한 PRD를 받아와 삼정에 넘기고, 삼정은 그 PRD를 가지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 PRD 센터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저희가 PRD를 시장에 성공적으로 공급하는 과정에, 삼정과 테슬러, DARPA가 모두 저희에게 협력하는 형태가 되겠죠.
그리고 그 과정에 함께 참여할 삼정과 테슬러의 협력사를 합치면, 꽤 거대한 규모의 프로젝트가 될 겁니다.
물론 저희는 감독만 하고 고생은 남들이 다 하게 되는 형태로요.”
“참여하는 업체가 늘어날수록 각 업체의 이윤을 보장해주기 위한 손해가 늘어나지 않을까?”
현주가 묻자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쩔 수 없어요. 물론 어느 부분에서는 저희가 모든 것을 감독하고 소유하는 게 더 큰 이득을 가져다줄 순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PTW라는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흰 게임 콘솔을 생산하는 업체도 아니고,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도 아니죠.
저흰 게임회사에요. 그리고 저희 회사 직원의 대부분은,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들이고요.
저는 PTW가 이런 큰 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게임회사로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그를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면 쓰는 거죠.
어차피 사내 유보금으로 가지고 있어 봐야 법인세로 몽땅 뜯길 테니까.”
“그러니 게임 개발 외의 다른 업무에 필요한 사람들은 협력사에서 고용하게 하자는 거지?”
“예. 저희는 개발과 R&D를 주력으로 하는 회사죠.
게임 외적인 부분에서 필요한 생산과 공급은 다른 업체에서 하게 두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돈이 더 들긴 하겠지만, 그건 게임 외적인 부분에서 버는 돈으로 메꾸면 되고요.
이번처럼 워 다이버를 미군에 공급하는 대가로 막대한 돈을 뜯어낸다던가, 아니면 앞으로도 꾸준히 팔려나갈 산업용 딥 다이버의 라이선스 비용으로 메꾼다던가.
결과적으로 저희가 이루려는 궁극의 목표는, 전 세계 게이머들의 가정에 가상현실 게임을 위한 장비를 보급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플랫폼에서, 리얼 엔진을 통해 수많은 개발사가 만든 게임들이 하나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거죠.
그건 지금의 콘솔 게임 시장과도, PC 게임 시장과도 다른 전혀 다른 게임 시장이 될 겁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해온 모든 것들은, 그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퍼즐 조각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럼 결국 리얼 엔진은 언리얼 엔진처럼 전체 공개가 되는거야?
누구나 리얼 엔진을 통해 쉽게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저희가 원하는 수준의 완성도를 갖추게 되면요.
지금은 조금 일러요. 아직은 후보정에 너무 많은 공이 들어가니까.
하지만 언젠가, 저희가 필요한 수준의 충분한 데이터를 쌓고, 저희가 학습시킨 AI가 개발자의 생각대로 개발자가 원하는 게임을 충실하게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리얼 엔진은 대중에게 개방될 겁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 그 안에서 또 다른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열리게 되겠죠.
제가 생각하는 궁극의 ‘갓겜’은, 게임이 아니라 게이머가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주는 게임 엔진 그 자체니까요.”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현주가 상혁에게 다시 질문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정말로 상혁이 네 말대로 그런 게임 엔진을 우리가 완성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볼 게.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우리가 만든 AI와 대화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즐겁게 논다고 가정해보는 거야.
그럼 그런 세계에서, 게임회사는 그 존재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누구나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는, 다른 의미로 말하면 굳이 특별한 누군가가 게임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잖아.”
그러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준이 입을 열어 현주의 질문에 답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왜?”
“상혁이 하는 말은, 말 그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에 가까운 이야기니까요.
결국 리얼 엔진의 AI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미리 준비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서 유저가 말하는 목적에 가장 근접한 모델을 가져와 기존의 게임에 조합하는 거죠.
그건 일종의 모드질에 가까운 행동이고, 창의력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건 마치 깃 허브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현하기 위한 코드를 찾아 기존 코드에 붙여넣기를 하는 것과 같은 거죠.
대부분은, 검색만 잘 하면 그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때로는 자신이 직접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때가 옵니다.
컴퓨터로는 할 수 없는, 인간의 창의력과 문제 해결 능력이 요구되는 때가.
그러니 AI가 개발자를 완전히 대체하는 그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거예요.
대신 지금의 개발자들이 하는 작업이 기존과는 조금 다르게 변하는 것뿐이겠죠.”
“그렇구나···.”
현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마커 줘봐.”
상혁이 마커를 넘기자, 민준은 화이트 보드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지우개를 들어 상혁이 적은 문장을 한 줄씩 지우기 시작했다.
“상혁은 우리의 메인 테스크가 지금 말한 것처럼 많이 있다고 말했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결국 지금 저희의 모든 계획의 기반을 이루는 대전제는, 오로지 하나의 작업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저가 볼 때 이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작업들은 SUB로 가야 맞습니다.”
이윽고 민준이 그 모든 작업을 마무리했을 때, 화이트보드엔 단 한 줄의 문장만이 남겨져 있었다.
▶ CRD 및 PRD의 양산 및 보급
마커의 뚜껑을 닫은 민준이 말했다.
“물론 대당 3천만 원에 육박하는 고가형의 장비를 각 주요 도시에 있는 체험 센터를 이용해 서비스하겠다는 상혁의 계획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돈이 없는 유저들에게는 시간당 5천 원이나 만원 정도의 가격을 내고 PRD라는 장비가 전해주는 압도적인 경험을 즐길 기회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경험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컨텐츠에는 시간에 따른 기댓값이 다르게 적용되니까.
저희는 그걸 고려해야 하죠.”
“그게 무슨 의미죠?”
존 카믹이 묻자 민준이 말했다.
“같은 소재를 가진 시즌 8개짜리 드라마와 2시간짜리 영화 한 편, 그리고 해당 영상의 스토리를 압축한 유튜브 영상이 한편 있다고 치죠.
만약 스캇 씨에게 오늘 쓸 수 있는 여유시간이 단 10분만 있다면, 스카믹씨는 어떤 걸 고르시겠어요?”
“그야 당연히 유튜브 영상 아닙니까?”
“그렇죠. 10분이란 짧은 시간만 가지고는, 드라마도 영화도 제대로 즐길 수 없을 테니까요.
반대로 시간은 썩을 만큼 많이 있는데, 이 3개 중에 단 1개만 볼 수 있다면 어떤 걸 고르시겠습니까?”
“그때는 시즌 8개짜리 드라마를 고르겠죠.”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쓸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된 상황에서, 게이머들은 오랜 시간 캐릭터 육성을 통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보다는, 단시간에 강렬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을 플레이하길 원하겠죠.
그리고 그건 유튜브 영상 속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짧은 시간 안에 완결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컨텐츠가 좀 더 높은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굉장히 긴 시간 동안 플레이가 진행되는 MMORPG류의 영상보다 짧은 시간 동안 꽉 찬 재미를 주는 인디 게임의 조회 수가 더 높은 편이죠.
만약 저희가 PRD 센터를 중심으로 VR 경험을 제공하게 된다면, 유저들은 대부분 그런 식의 짧은 게임을 고르게 될 겁니다.
정해진 시간 동안 클리어가 가능한, 짧고 강렬한 게임이요.
그건 마치 엄마를 따라 잠깐 놀러간 고모 집에서, 게임기를 발견하고 게임을 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내가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2시간뿐인데, 아무리 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플레이 타임만 1000시간이 넘는 대형 RPG를 고르기는 너무 부담스럽지 않겠어요?”
“겨우 오프닝 파트만 넘어가면 시간이 다 끝날 테니까요.”
“그렇죠. 그러니 유저들은 자신이 시간을 제약없이 쓸 수 있는 집에서 PRD의 경험 이어가기를 바랄 겁니다.
오늘 퇴근하고 얻은 새 장비의 강력함을, 내일 퇴근 이후의 플레이에서 즐길 수 있도록 말이죠.
상혁이 PRD 센터를 통해 공급하려 하는 RPD란 장비는, 말하자면 VR계의 페라리 같은 겁니다.
그리고 그걸 체험용 서킷에서 일정 시간 돈을 주고 타는 거죠.
물론 페라리를 타는 경험이 멋지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사람들은 굳이 페라리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아침에 출퇴근할 때 쓸 자동차를 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상혁이 미군을 상대로 그 ‘페라리’를 팔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스컹크 웍스에서는 DARPA의 도움을 받아 ‘폭스바겐’이 될 장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PRD 수준의 엄청난 가격의 장비가 아니라, 조금 큰맘 먹고 사면 즐겁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보급형 장비를 만들기 위해서요.
다행히도, DARPA에서는 슈퍼솔져 프로젝트를 위한 파워 슈츠 관련 기술을 여럿 보유하고 있었죠.
저희는 그것을 넘겨받아 기존에 저희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합쳐, 새로운 VR 장비를 개발했습니다.”
“보급형 PRD가 완성되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그 물건은, 지금 제가 입고 있죠.”
그렇게 말하며, 민준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그러자 마치 게이밍 기어처럼 생긴 멋진 외형의 금속 갑옷이, 검은빛을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외투 안에 입고 있으면서도 주변에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을 정도로, 얇고 가볍게 만들어진 외골격 슈트가.
그것은 영화 ‘아이론 맨’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만드는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상혁이 너도 처음보지?”
갑작스러운 자신의 발표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상혁을 보며, 민준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준에게 말했다.
“그거 목업 아냐? 진짜 동작해?”
“동작해.”
“바닥판 같은 별도 파츠도 없고?”
“없어.”
“그럼 이동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는데?”
PRD의 덩치가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유저가 가상 공간을 걸어 다니면서도 제자리를 유지하게 하는 ‘에어리얼 워킹(Aerial Walking)’ 기술 때문이었다.
호버 부츠나 옥토 부츠 같은 부산물도 그 기능을 위해서 만들어진 장비였고.
그러나 민준은 그런 장비 없이 이 장비가 새 장비의 구성품 전체라고 알려주었고, 상혁은 도저히 그 말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러자 민준은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이동해 신발 하나를 꺼내왔다.
자신이 지금 신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을 가진 신발을.
거기엔 마치 한때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바퀴 달린 신발, 힐리스(Heelys)에 달린 그것과 비슷한 바퀴들이 달려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힐리스와는 다르게 작은 바퀴가 여러 개가 달려있다는 점이었다.
상혁은 그 바퀴를 보는 순간, 어떻게 이 장비가 가상 공간에서 걸어 다니는 유저를 제자리에 고정하는지 단숨에 깨달을 수 있었다.
“바퀴에 모터가 달려있구나?”
“그렇지, 유저가 발을 앞으로 내디디면, 안에 내장된 바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부드럽게 유저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거야.
유저는 계속 앞으로 걸어가지만, 마치 러닝머신에서 걷는 것처럼 계속 제자리를 걷게 되는거지.”
“사람 체중을 옮기려면 그만큼 강력한 모터가 필요할 텐데? 신발 무게가 엄청나지지 않아?”
“맞아. 지금 이 신발만 한 짝에 거의 10kg 정도 하거든.”
“그럼 10kg짜리 모래주머니를 달고 걷는 거랑 같잖아. 엄청 불편할 거라고.”
“그래서 DARPA가 필요했던 거지.
늘어난 신발의 무게 만큼을 외골격에 설치된 와이어로 당겨줘야 했으니까.
이건 사실 절반 이상은 DARPA에서 개발한 파워 슈트 설계를 기반으로 한 거야.
장비의 성능을 위해 증가한 무게 만큼을, 장비의 파워로 보조하게 한 거지.
덕분에 전신에 착용하면 무려 80kg이나 되는 장비인데도 꽤 부담 없는 사용이 가능해진 거고.
물론 몸에 실을 수 있는 만큼의 모터만 설치할 수 있어서 출력은 기존 PRD보다 훨씬 낮아.
가상 공간에서의 벽도, 무리하면 뚫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와이어 강성도 낮은 편이고.
대신 훨씬 저렴하고 가볍지.
완벽한 VR 환경을 체험하지는 못해도, 비슷한 수준의 가성비 좋은 경험을 받고 싶은 유저들에겐 좋은 선택이 될 거라고.”
민준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자, 상혁이 물었다.
“그래서.”
민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신의 머릿속을 휘감았던, 가장 궁금한 내용에 대한 질문을.
“예상 출시가가 얼만데?”
그것은 상혁에게도, 그 장비를 구매하게 될 유저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될 질문이었다.
그러자 민준은 그런 상혁을 보고 밝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상혁이 바라던 것보다, 훨씬 놀라운 숫자를 부르며.
“150 만원대.. 1400달러 정도만 내면, 유저들은 자신의 집 거실에서 풀 다이브 VR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거야.”
그것은 상혁이 생각하고 있던 ‘풀 다이브 VR 보급’을 위한 마지노선인 ‘300만 원’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가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