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갈아엎기
“일단 정리 좀 해보죠. 여기 모인 우리 모두, 프로젝트 히어로가 발매 직전 수준까지 개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PTW의 가장 큰 이벤트인 3차 NE 컨벤션이 끝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죠.
그 짧은 기간 사이에, PTW는 다른 게임회사가 몇 년에 걸쳐 발표할 수많은 빅 뉴스를 발표했어요.
딥 다이버의 X-BOX 지원, MYOM의 딥 다이버 버전 이식, PTW LAB의 출범과 인디 게임 프로젝트들, 그리고 PRD.
거기에 워 다이버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혁 씨는 개발 중인 프로젝트 히어로를,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자체 컨벤션을 통해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쇼 케이스를 통해 발표하려고 하고 있죠.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전 프로젝트 히어로의 공개 타이밍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워 다이버의 발표와 DARPA와의 협력으로 인해서, 현재의 PTW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강한 압력을 직면하고 있죠.
그리고 상혁 씨는, 그런 이유로 프로젝트 히어로의 조기 공개를 결정하셨다고 말씀하셨고요.
거기까지는 저도 이해가 갔습니다. 더 큰 이슈로 부정적인 이슈를 날려버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중에 가장 매력적이고 강렬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말씀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건 모순이지 않습니까? 완벽한 타이밍에 회사 내 최고의 게임을 공개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정작 둘 다 괜찮은 수준으로 완성되어있는 트레일러 두 개를 포기하고 다른 트레일러를 만들자고 하시는 것 말입니다.
물론 회사 내부에서 외부에 공개되는 모든 컨텐츠의 공개 시기나 내용을 결정하는 권한이 이상혁 CCO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전 좀 우려가 되는군요.”
가장 나중에 합류한 임원인 존 카믹이 우려를 표하자, 상혁이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방금 지수가 보여준 두 트레일러 모두 히어로 물이란 게임의 특성을 보여주고 게이머의 기대감을 부추기는 데 문제가 없는 수준의 영상들이었죠.
그리고 저희는, 정말 간절하게 ‘빅 이슈’가 필요한 상황이고요.”
“그런데 갈아엎고 새로 만들자는 이유가 뭡니까?”
“조기 공개가 필요한 회사 외부의 상황보다, 저희에게 중요한 건 ‘게임 그 자체’이기 때문이죠.
물론, 새 영상을 제작하기로 한 순간부터 저희가 다른 이슈로 부정적인 뉴스들을 덮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새 영상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엔 막대한 영향이 가게 되겠죠.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이유로, 저희가 만들려는 게임의 코어 이미지를 표현하지 못하는 트레일러를 프로젝트 히어로의 첫 번째 트레일러로 공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코어 이미지요?”
“이 부분은 게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고, 현재 리드 프로듀서를 담당하고 있는 지수에게 묻겠습니다.
지수야. 프로젝트 히어로라는 게임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지?”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지수가 말했다.
“히어로요?”
“그럼 히어로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기존에 유명한 프렌차이즈 히어로가 떠오르죠.
아이론 맨이라던가, 박쥐 인간이라든가, 스파이디 맨 같은 거요.”
“다른 질문을 할게. MYOM이란 이름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지?”
상혁의 두 번째 질문을 들은 지수는, 이번엔 한치의 주저 없이 단번에 답변을 뱉어내었다.
“캐스팅(주문 시전)이요. 팔 다리를 휘두르며 눈앞에 있는 마나를 조작해서 직접 마법을 창조하는 마법사의 이미지가 떠올라요.”
“반대로 캐스팅이란 단어를 들으면 뭐가 떠오를까?”
“그야 당연히 MYOM···. 아!···,”
“그게 코어 이미지라는 거야.
현대의 게이머들은, 이제 ‘주문 시전’이나 ‘마법사’란 단어를 들으면 어렵지 않게 MYOM을 떠올리지.
그건 그 게임이 가진 코어 이미지가, 해당 단어를 대표할 정도로 강렬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건 우리의 나머지 게임들도 마찬가지고.
후속작 하나 없는 GOS가 현재 ‘로봇 게임’ 하면 언제나 언급되는 걸 생각해봐.”
“하지만 로봇 게임은 당시 거의 불모지 상태였었고 그 이후로도 강렬한 게임은 거의 없었잖아요.
반면에 히어로란 소재는 영화나 만화에서 엄청나게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소재고요.
저희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어떻게 업벤져스나 아이론 맨을 이기겠어요?”
“이길 필요가 없지. 우리는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니까.”
상혁이 말했다.
“중요한 건 이거야. 지수 네가 만든 트레일러는, ‘히어로’라는 소재를 정말 잘 표현하고 있지만, ‘프로젝트 히어로’라는 게임을 잘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거지.
아니, 이 표현도 이상하구나, 게임 자체는 잘 표현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두 트레일러가 게임에서 부각해야 할 다른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는 거지.
그리고 난, 이 게임의 첫 번째 트레일러가 게임의 서브 요소를 강조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저 두 영상에서 전달하는 재미가, 프로젝트 히어로의 핵심 재미가 아니라고요?”
“난 그렇게 생각해. 물론 존 카믹 씨의 말대로, 우리가 영상을 새로 만들려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동안, 다른 국내 게임 제작사에게 의뢰를 받은 수많은 기자가 PTW에 대한 비난 기사를 엄청나게 쏟아내겠지.
사실 그 전에도 그런 기사들은 종종 올라오곤 했었어.
3차 NE 컨벤션의 주최국에 한국이 포함되기 전에는 국내 기업인데도 국내 유저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었고, 셧다운제와 싸우기 위해 워크패스트 카드를 썼을 때도 게이머들은 좋아했지만, 언론에서는 일개 기업이 국가를 협박한다고 비난받기도 했지.
그러나 이번엔 ‘중국 판호’라는, 우리에겐 쥐뿔도 관심 없지만 다른 게임사들에겐 엄청난 경제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카드가 걸려있고, 비난의 수준은 차원이 다를 거야.
그리고 우리가 프로젝트 히어로를 공개할 때까지, 우린 입을 다물고 그 비난을 전부 버텨내야 하겠지.”
그렇게 말한, 상혁은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난 다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건, CCO로서의 최종 결정인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난 단지 의결권에 1표를 가지고 있는 참여자로서, 내 의견을 말하는 것뿐이야.
어디까지나 프로젝트 히어로의 리드 프로듀서는 지수 너니까. 최종 결정은 지수 네가 해야지.”
“그럼 제가 두 트레일러 중에 한 개를 공개하겠다고 하면요?”
“그럼 난 그 의견을 따를 거야.”
“좋아요.
그럼 상혁 오빠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트레일러에 대해 말해주세요.
최종 결정은, 그 이후에 할 테니까.”
“좋아. 그럼 설명하도록 할게.
내가 생각하는 프로젝트 히어로의 이상적인 트레일러가 뭔지.”
그리고 상혁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히어로란 게임을 기획했던 초기부터, 단 한 번도 잊지 않고 있던 ‘게임의 방향성’에 대한 설명을.
그것은 충격적이게도 게임의 제목에 들어간 ‘히어로’라는 단어와는 꽤 동떨어진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프로젝트 히어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유저가 얻게 될 슈퍼 파워도, 게임을 하면서 구축할 히어로 베이스도, 혹은 함께 악과 맞서 싸우며 정의를 구현할 동료들도 아니야.
그건 영화 같은 다른 컨텐츠에서도 수없이 다뤘던 것들이니까.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지.”
“그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되는 대상이 바로 슈퍼 히어로잖아요.”
“아니, 비슷하지만 달라. 내가 말하는 건 슈퍼 히어로의 능력을 갖춘 플레이어가 아니라, 그 전의 플레이어를 말하는 거니까.
하나 질문할게. 만약 지수 너에게 슈퍼 파워가 생긴다면, 예를 들어 등에서 날개를 뽑아내서 하늘을 날아가는 ‘플라잉 지수’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순간부터 지수 너를 상징하는 단어는 날개가 되는 건가?
주변 사람의 인식이 아니라, 지수 네가 너 스스로를 인식하는 개념 말이야.”
잠시 고민하던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날개가 있든 없든, 저는 저니까요.”
“내가 트레일러에서 보여주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얻고 싶은 슈퍼 파워를 얻어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육성하며 빌런들과 싸우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원래부터 평범한 인간이었던 자신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잖아.
슈퍼 파워가 생겼어도, 주인공은 여전히 아침에 팬케이크와 시리얼을 즐겨 먹고, 자신의 또 다른 직업에 충실하며, 동료 직원에게 농담을 자주 던지는 유쾌한 인간일 뿐이지.
나는 프로젝트 히어로의 트레일러에서, 바로 그런 소시민적인 모습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 인간이 슈퍼 파워를 얻는 거고, 그 능력을 사용하면서 수많은 선택지 중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변하는지를 한편의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싶어.
그 영상을 보는 게이머들이, ‘아, 나도 슈퍼 파워를 얻게 되면 아마도 저렇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할 만한 영상을.”
“소시민이라···.”
상혁의 말을 들은 지수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건 히어로랑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인데요?”
“하지만 우리 게임엔 맞잖아? 애당초 우리 게임의 주인공은,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보다는 ‘스파이디 맨’이나 드라마 버젼 ‘플러시’의 주인공하고 닮았으니까.”
“그 부분을 강조했으면 한다는 거죠? 평범하지 않은 슈퍼 파워를 얻은 평범한 주인공의 허당스러운 모습이요.”
“맞아.”
“그리고 그건 강력한 파워로 한방에 빌런을 날려버리는 화려한 액션과, 유저가 육성하고 수집할 수많은 장비와 기지들 대신 들어가는 거고요.”
“그것도 맞고.”
“흠···. 보통은 자신들이 만든 게임에서 가장 멋지고 화려한 부분을 강조하려 하지 않아요?”
“보통은 그렇지.”
상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린 보통 회사가 아니잖아?”
“허당···. 허당이라···.”
상혁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고민하던 지수가 질문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이죠?”
“말로 하자면 좀 어려운 느낌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 이야기’같은 느낌이랄까?
주인공 캐릭터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히어로 드라마 시리즈의 파일럿 에피소드 같은 느낌으로 갔으면 하는데.”
“주인공의 독백으로 이건 제 이야기에요. (This is my story.) 라고 말하면서 시작하는 영상 말이에요?”
“어.”
“시작하는 느낌으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뭔가 마음에 걸려?”
“공감대는 있을거 같아요. 확실히. 상혁 오빠의 말대로라면 그건 확실하게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영상이 될 테니까.
그리고 허당기를 강조하는 시퀀스가 교차로 나오면서 웃음기를 자아내는 그런 트레일러가 되겠죠. 하지만 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거기엔 로망이 없으니까.”
“맞아. 그래서 우리가 만약 새 영상을 만든다면, 후반부는 바로 그 로망을 강조해야 할 거야.
평범한 사고 방식을 가진 평범한 주인공이, 슈퍼 파워를 얻게 되고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거지.
처음엔 겁도 내고 잘난 척도하고 때로는 공명심을 바라는 모습도 보이는 주인공이,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진정한 히어로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그건, 말 그대로 이 게임의 시작과 마지막을 보여주는 게 될 테고.”
“그리고 유저는 그 영상을 보면서 자신이 그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받을 느낌을 상상하겠네요?”
“맞아. 바로 내가 원하는 게 그거니까.
게임이 아니라, 그 게임을 하면서 느낄 유저 스스로의 감정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트레일러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존 스캇이 손을 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수 양은 알아들은 것 같은데,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비슷한 효과를 가진 영상 같은 게 있습니까?”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탐 클래시의 ‘디비전’ 1편의 오프닝 시퀀스가 그런 느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디비전이요?”
상혁은 대답 대신 노트북을 눌러 디비전 1편의 오프닝을 재생시켰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러자 조금 전까지 프로젝트 히어로의 트레일러가 재생되었던 스크린에서, PTW의 게임이 아닌 다른 회사의 게임 오프닝 영상이 재생되었다.
한 과학자의 악의에 의해 태어난 바이러스가, 수많은 희생자를 낳으며 세계를 붕괴시켰다는 뉴스가.
그리고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인물의 독백이 흘러나왔다.
[우리가 소집되었다는 것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의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
[우리는 평시에는 사회 곳곳에서 일하지만, 고도로 숙련된 정예 요원이며, 국가는 모든 시도가 실패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우리를 소집한다.]
[우리에겐 어떤 규칙도 없으며, 아무런 제약도 없다.]
[우리의 임무는 재앙으로 무너진 도시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영상에선, 디비전이란 게임의 상징과도 같은 영상이 나왔다.
직장에서, 술집에서, 가정에서 활동하는 평범한 ‘일반인’들의 시계 속에, 디비전의 상징과도 같은 주황빛의 호출 신호가 빛나는 영상이.
그리고 영상은, 그 영상 속 인물들이 ‘평범한 사람들’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의 동료이거나, 당신의 이웃이거나, 심지어 당신의 친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집 명령이 떨어지면, 우린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나야 하는.]
[우리는 ‘Division’이다.]
2분 남짓의 짧은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자, 상혁이 존 카믹을 보며 물었다.
“이게 제가 말한 디비전의 오프닝입니다.
어떤 느낌인가요?”
“흠···. 제 기억으로는 재난 상황에 대비한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들이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 있고, 국가에 위기가 닥쳐오면 질서 유지를 위해 그들이 호출된다는 설정의 게임이었죠?”
“예.”
“우선은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물론 그런 대규모 요원들의 입단속을 시키는 게 불가능할 테니 현실적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재난 상황에 대비해 특수 훈련을 시킨다는 설정이 흥미로워요.”
“그 외에는?”
“내가 저 디비전 요원이 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죠. 저 게임 속에서 말하는 ‘일반인’ 중엔, 플레이어 같은 평범한 인물들도 섞여 있으니까요.
디비전은 특정한 영웅이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누군가가 되어야하는 플레이어에 대한 이야기죠.
플레이어는 영상을 보면서, 나도 그 세계 속에서 ‘디비전’요원으로서 도시를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죠.
물론 이건 어두운 분위기의 트레일러입니다.
하지만 방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참고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희 영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거죠?”
“우선, 훨씬 가벼울 겁니다. 저희가 다루려는 ‘내 이야기’는, 특수 훈련을 받은 비밀 요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맥도날드에 가면서 시험 성적에 대해 고민하는 일반인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상혁은 스크린을 화이트 보드 모드로 전환 시켰다.
그러자 스크린의 영상이 꺼지며 흰색 백라이트가 스크린을 거대한 화이트보드로 변화시켰다.
그러자 상혁이 마커를 집어 들고는 방에 모인 PTW 임원들을 향해 말했다.
“우선, 아까도 말했지만,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건 이 프로젝트의 리드 프로듀서인 지수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안을 하는 것뿐이고요.
다만 저는 이런 식의 영상이 프로젝트 히어로를 좀 더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의 제안을 하는 겁니다.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제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 같은 느낌이니까, 혹시 더하거나 수정하고 싶은 의견이 있으면 중간에라도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상혁은 손에 든 마커의 뚜껑을 열고 자신이 생각하는 ‘프로젝트 히어로’의 이상적인 트레일러 시퀀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게임들이 추구하는, 게임에서 가장 멋지고 화려한 부분들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트레일러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구성을 하고 있었다.
“대충 이런 느낌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힘은, 언제나 더 거대한 힘에게 굴복당한다.]
그런 주인공의 독백과 함께, 영상이 시작되는 거죠.
아직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에 불과한 주인공이, 바닥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자신을 둘러싼 불량배들에게 두들겨 맞는 영상으로요.
그리고 다음 대사가 나오면서, 영상이 바뀌는 거죠.
[그런 힘의 역학 관계는, 자신의 힘과 관계없이 여전히 존재한다.
심지어 당신이 슈퍼 파워를 지닌 슈퍼 히어로라도.]
시퀀스는 같습니다.
똑같은 자세로,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에게 발로 밟히는 영상이 나오죠.
하지만 두 번째 영상에서의 주인공은, 소위 말하는 ‘히어로 슈트’를 입고 있습니다.
대신 좀 조잡한 느낌의 히어로 슈트죠.
그리고 그를 밟고 있는 것은 총을 든 빌런들입니다.”
“잠깐만요, 그럼 지금 주인공이 두들겨 맞는 장면에서부터 영상을 시작하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무지막지하게 파격적이네요.”
“보여주려는 것이 바로 ‘일상’이니까요.
바로 다음 컷에서, 주인공은 대학 식당에서 식사를 합니다.
후드로 머리를 가렸지만, 눈이 퉁퉁 붓고 광대뼈에 멍이 든 모습으로.
그리고 주인공의 친구가 다가와서 말을 거는 거죠.
[이봐, 슈퍼 히어로. 딱 보니까 어제도 정의가 악에게 패배한 것 같은데?]
일련의 대화를 통해서, 플레이어들은 아까 두들겨 맞던 주인공에게 아무런 슈퍼 파워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주인공이 직접 만든 허름한 슈트와 가면을 쓴 채로, 밤의 거리를 돌며 자경단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거죠.
주인공은 독백을 통해 말합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게 정의를 지키라고 말했지만, 그 정의를 지킬 힘이 없을 때, 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물론 나도 멋진 히어로가 되고 싶었지.
하지만 난 약하고, 평범하며,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 방 벽에 꽂혀있는 1000편이 넘는 코믹북을 제외하면.
용기만 가지고는, 히어로는 될 수 없지.
그래서 난, 내 스스로 내 힘을 찾아냈다.]
여기서부턴 음악의 템포가 바뀝니다.
에스컬레이트 되는 템포의 음악과 함께, 게임에서 주인공이 다양한 기연을 찾아다니는 파트를 소개하죠.
그 기연의 종류는, 다양한 NPC들을 통해 주인공에게 전달됩니다.
학생 식당에서 말을 걸던 친구가 다급하게 속삭이며 이야기하죠.
[야, 그거 들었냐? 이 학교 경비 아저씨가 전설의 싸움꾼이라는 거?
하룻밤 사이에 100명의 갱단을 박살 낸 적도 있대.]
여학생이 다가와 말을 겁니다.
[혹시 전에 말했던 우리 삼촌 기억나?
슈퍼 랩에서 유전자 연구를 하는 분 말이야.
그분이 지금 임상 시험을 할 대상을 구하고 있대.]
길을 걷는데 묘한 로브를 뒤집어쓴 점쟁이가 말을 걸죠.
[너에게서 운명이 느껴지는구나.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에 맞서, 보잘것없는 빛으로 맞서는 별의 운명이.]
[죄송하지만 전 돈이 없는데요?]
[난 지나가는 사람들의 점을 치고 돈이나 받기 위해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야.
운명이 이끄는 대로, 내 후계자가 될 사람을 찾기 위해서 이 먼 도시에 온 거지.]
[무슨 후계자요?]
[자네 혹시 ‘마법’에 관심 있나?]
다양한 기연을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보게 된 플레이어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 저 게임은 자신이 얻을 능력을 NPC를 통해서 넘겨 받을 수 있는 게임인가 보구나.’
그게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에요. 플레이어가 어떤 히어로든 될 수 있다는 것.
히어로물의 정석. 저는 이 영상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상혁이 NPC의 대사를 흉내내며 열연을 하는 것을 보며, 지수와 나머지 멤버들은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상혁이 말하는 오프닝 시퀀스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히어로 자체’가 아닌, ‘히어로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려 하는 상혁의 생각을.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매력적으로 들리는 제안이었다.
“그 이후에, 주인공은 실제 자신의 능력에 맞는 슈트를 디자인하거나 선물 받게 되죠.
그리고 멋지게 새 슈트를 입고 빌런 앞에 나섭니다.
[지금 당장 그녀를 놓아줘!] 라고 외치면서요.
그리고 그렇게 멋지게 등장한 주인공은···.”
여기까지 듣고 상혁의 의도를 대충 파악한 지수가 말했다.
“두들겨 맞겠네요.”
“맞아. 악은 거대하고, 주인공은 준비가 덜 되었거든.
그렇게 두들겨 맞은 주인공에게, 동료나 멘토 역할을 맡은 NPC가 말하지.
넌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이 파트에서, 우리는 ‘성장’에 대해 보여줘야 해.
진지한 분위기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얻은 ‘평범한 인간’이 어떤 식으로 능력을 습득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코믹하게 표현하는 거야.”
“코믹하게요?”
“예를들면 이런 거지. 두들겨 맞은 주인공에게, 과학자처럼 보이는 NPC가 말을 걸어.
[네 강점은 일반인을 초월한 스피드지.
하지만 지난번엔 상대가 더 빨랐어.
그래서 두들겨 맞은 거고.
하지만 지금 당장 네 속도를 올리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왔지.
이 장비는 네 부족한 힘을 순간적으로 증가시켜줄 거야.
날아오는 트럭을 맨손으로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대신 장비를 사용하면 쓴 힘만큼 속도가 느려지겠지만, 그 전에 적을 쓰러트리면 문제가 없겠지.]
[그 장갑이 뭔지는 알겠는데, 그럼 이 커다란 붉은색 버튼은 뭐죠?]
[거기 서 있는 너에게 1톤짜리 트럭을 집어 던질 테스트 장비.
하지만 테스트에 앞서, 주의할 점이 있는데···]
라고 NPC가 말하는 순간, 주인공은 장갑을 장착하고 버튼을 눌러버립니다.
그리고 트럭에 치여 벽에 처박히게 되죠.
그리고 그런 주인공의 귀에 장갑을 건네준 NPC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전원을 켜야지! 전원을!]
이런 정신 나간 돌아이색기야!]”
“푸훗.”
상혁의 농담에 지수가 웃음을 터트리자, 상혁도 그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대충 이런 느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게임이 가진 매력이란, 바로 그런 거죠.
친구와 웃고 떠들면서,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면서, 패배하고, 극복하면서, 자신만의 정의를 관철해 나가는 겁니다.
그 과정에 이 게임의 진짜 로망이 있는 거고, 그 과정에 이 게임의 코어 이미지가 있는 거죠.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어? 저런 상황이면 나도 저러겠는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하는 거죠.
‘나도.’
‘저.’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
라고.”
그렇게 말한 상혁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수는, 상혁의 그런 제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상혁이 말한 ‘과정’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의도한 대로 게임 안에서 유저가 얻게 될 ‘결과’를 보여줄 것인가.
리스크는 있다.
상혁이 말한 대로 영상을 새로 만들려면, 리얼 엔진의 보조를 받더라도 몇 주는 더 걸릴 테니까.
그리고 그 시간 동안 PTW는 PTW을 직접적으로 음해하는 외부 세력의 비난에 직면할 것이고.
그러나 상혁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하더라도 게이머들이 보게 될 첫 번째 트레일러가 지금 말한 것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제안을 받을지 받지 않을지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은, 바로 그녀에게 있었고.
“저는···.”
머뭇거리던 지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상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애당초 저한테 갈아엎자고 말했을 때부터, 제가 뭐라고 말할지 이미 알고 있었죠?”
“난 점쟁이가 아니야.”
“하지만 본인이 말한 게 더 이 게임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 거잖아요?
그리고 제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요.”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내가 알 수는 없지.
내가 한 건, 단지 네가 어떤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뿐이니까.”
“저는 처음엔 상혁 오빠가 어떤 제안을 하던 거절할 생각이었어요.
말했던 대로, 두 트레일러 모두 게임 자체를 왜곡 없이 잘 표현하고 있고, 둘 다 각자의 강점이 있는 트레일러였으니까.
하지만 상혁 오빠의 말대로 새 트레일러를 첫 번째 영상으로 고르게 된다면, 유저들은 두 번째, 세 번째 영상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겠죠.
‘아, 그 과정을 거쳐서 저런 것들을 누리게 되는 거구나.’라고.
세상에 그걸 거절할 기획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럼 지수 네 말은···.”
“맞아요. 쳇, 내가 이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그렇게 말한 지수는 눈을 반짝이며 임원들을 향해 말했다.
자신이 공개한 트레일러를 보고, 상혁이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갈아엎죠.”
그것은 상혁과 마찬가지로, 지수 역시 PTW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내뱉게 된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