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용사의 검
스티브는 상혁이 말한 ‘전문적인 회의’를 진행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중간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한 회의가 무려 한 달이나 걸리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한 이 회의의 목적은, 단순히 앞으로 이어질 프로젝트의 ‘견적’을 잡기 위한 회의였기 때문에.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두 천재가 대화를 시작하면, 웬만해서는 그것을 끊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론 물리학 교수 클라우드 바커입니다. 초끈이론을 전공하고 있죠.”
“아, 그 ‘마나 엔진’을 개발할 때 참여하셨다는?”
“예. 약소하나마 PTW와 협력했던 적이 있죠. 그래서, 이론 물리학자가 필요한 이유가 뭡니까? 이번엔 또 뭘 꾸미시는 거죠?”
민준은 대니얼과 대화하면서,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가 있으면 주저 없이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천하대 교수를 불렀다.
그리고 그렇게 불려온 교수들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오자마자 비밀 유지 서약서에 사인하고, 서약서 옆에 있는 현금 봉투를 품 안에 넣고는, 회의 내용을 파악하여 자신의 지식을 풀어놓았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해당 분야에 대해 더 잘 아는 교수나 연구원이 있으면, 그 사람도 호출해서 부르고.
결국, 민준과 대니얼, 두 사람으로 시작된 ‘전문가 회의’는 어느새 30명이 넘는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여한 토론의 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옆에서 업무를 진행해야 했던 상혁이, 참지 못하고 소리칠 정도로.
“왜 죄다 부실에 몰려와서 이러는 겁니까! 대회의실로 가세요!”
민준은 상혁의 말대로 교수‘군단’을 데리고 부실을 빠져나갔고, 상혁은 지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물론 양자 통신의 현실화를 위한 회의도 중요하긴 했지만, 자신에겐 그것 말고도 할 일들이 많이 있었기에.
그러자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온 스티브가 상혁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항상 이런 분위기입니까?”
“가끔은요.”
회의가 길어지면서, 상혁이 그가 PTW에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아예 책상까지 내어주었기에, 그는 현재 PTW에 출근하여 업무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가 본 PTW의 업무 모습은, 특이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째서 PTW가 발매하는 게임마다 독특한 매력을 담아낼 수 있는지, 단지 개발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스티브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일하는 DARPA와 PTW의 유사성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쪽은 군사적 사용을 목적으로 한 기술을, 다른 한쪽은 게임 개발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조직임에도, 두 조직이 움직이는 모습에서 묘한 공통점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스티브는 상혁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뭐랄까, 한달 가까이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낀 거지만, PTW가 목표를 향해 접근하는 방식은 DARPA가 하는 것과 유사하네요.”
“그래요?”
흥미를 보이는 상혁에게 스티브가 말했다.
“저흰 기본적으로 목표까지 필요한 로드맵을 그려놓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기술적 문제들을 파악합니다.
그리고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그 기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구자를 찾죠.
그렇게 하나씩 벽을 넘어서, 완성된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이 저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PTW의 작업 진행방식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단지 저희가 전 세계의 연구실을 대상으로 그 퍼즐을 맞추려 노력한다면, PTW는 천하대 내부에 그 네트워크를 갖추려고 노력한다는 점이 다르지만.”
“얼추 맞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굳이 천하대 내부에 한정 짓지는 않아요.
기본적으로 저희는 로봇 전문가가 필요하면 해당 전문가를 천하대로 불러오고, 해당 장비를 만드는 데 현재 연산 장치보다 높은 효율의 전용 칩셋이 필요하다면 파운드리 업체를 끌어들이는 식으로 작업하죠.
DARPA에서 그토록 탐내는 딥 다이버 기술도, SANY 카메라 개발팀의 광학 기술을 이전받아서 완성한 기술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게이머만을 위한 광대역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스페이드 X와 협업 중이고요.”
“하지만 SANY를 딥 다이버 개발에 끌어온 시점에서 SANY엔 해당 기술이 없지 않았나요?
제가 알기로는 합류 이후에 새로 개발한 기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것도 맞습니다. 애당초 그쪽에서 생각하는 VR 기기는, 딥 다이버와는 전혀 관련 없는 장비였으니까.
게다가 카메라 개발팀에서 VR 장비를 위한 광학 장비를 개발하게 될 거라고는 SANY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그러니 지금의 딥 다이버에 탑재된 SANY의 기술은, 전부 합류 이후에 새로 만들어낸 기술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럼 굳이 SANY일 필요가 있습니까? 세상에 광학 장비를 개발하는 업체는 많습니다.”
“저희가 협력사를 결정하는 기준은 꽤 간단합니다.
얼마나 목표에 절박하게 접근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결정하죠.
당시 SANY는 코넥트를 보유한 MS 때문에 콘솔 시장 점유율에서 심각하게 밀리고 있었고, 그만큼 새 장비에 대한 목마름이 큰 상태였습니다.
자연스레 그룹 전체의 지원이 알파 카메라 개발팀에 집중될 수 있었죠.
딥 다이버에 들어간 100만 원대 성능의 헤드셋 유닛도, 그런 전폭적인 지원으로 탑재할 수 있었던 거고요.
말씀하신 대로, DARPA와 PTW가 목표 달성을 위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저희는 원하는 목표가 있을 때 굶주린 사자처럼 먹이를 향해 달려든다는 점이죠.”
스티브는 PTW가 짧은 시간 안에 그토록 시대를 뛰어넘는 오버 테크놀러지를 몇 번이나 개발할 수 있던 배경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단순히 흥미 위주로 문제 해결에 접근하는 DARPA보다, PTW의 기술 개발 속도가 월등하게 빠른 이유도.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집착과 굶주림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스티브는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질문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조금 전 SANY는 MS에게 콘솔 점유율에서 밀렸기 때문에 절박함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렇다면 PTW가 기술 개발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뭡니까?
PTW는 이미 콘솔 게임 시장에서 절대적인 인지도와 판매량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상혁은 스티브의 질문을 듣고 미소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그건 간단하죠. 저희가 만드는 모든 기술은 ‘게임’과 관련된 기술입니다.
단순히 기술 자체나 돈이 목적이 아니라, 그 기술로 인해서 더 발전할 게임을 보죠.
요즘 들어서 사람들이 저희가 기술 혁신 기업이라고 떠드는데, 저희는 기술 그 자체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 기술로 벌 수 있는 돈에도 관심이 없고요.
오로지 그 기술로 만들 수 있는 게임에만 관심이 있죠.”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목소리엔, PTW라는 회사의 본질적인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
“저흰 게임회사니까요.”
그렇게 말한 상혁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하지만 지금의 DARPA처럼, 세상이 저희를 게임회사로 두고 보지 않으려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건 무슨 말이시죠?”
“저희가 가진 기술 그 자체가, 이제 저희가 만드는 게임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어버렸다는 거죠.”
그렇게 말한 상혁은 모니터를 돌려 스티브에게 보여주었고, 스티브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상혁에게 말했다.
“한국어네요.”
“아, 죄송합니다.”
상혁은 버튼을 눌러 워크패스트의 브라우저에 달린 번역 애드온을 실행시켰다.
그러자 한글로 떠 있던 기사가 원래부터 영문으로 되어있던 기사처럼 완벽하게 변형되었다.
“이건···.”
기사의 내용을 읽은 스티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기사의 내용이 황당했기 때문에.
스티브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상혁에게 물었다.
“이거, 번역 제대로 된 거 맞습니까?”
“아시다시피 전 세계 번역 기능 중에 저희 번역 기능의 퀄리티가 가장 높습니다.
번역 모듈이 문맥 자체의 의미까지 파악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엔진의 일부까지 탑재된 애드온이니까요.
그러니,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인데요?”
“한국에서는 흔한 일이죠.”
상혁이 스티브에게 보여준 기사.
거기엔 테슬러에게 자율 주행 AI 기술을 제공하기로 한 PTW를 비난하는 내용의 기사가 적혀 있었다.
[매국 기업 PTW.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가 될 핵심 기술을 해외에 팔아넘기다.]
***
사실 PTW라는 회사는 ‘기레기’라 불리는 집단과는 그리 사이가 좋지 못한 기업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면서도, 그 흔한 TV광고 한번 진행하지 않는 회사였으니까.
그나마 진행하는 유일한 메이저 광고가 슈퍼볼 광고였으니, PTW에서 마케팅 비용으로 국내 언론에 지불하는 비용은 아예 0원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 치고는 PTW 관련 기사의 내용은 지금까지 매우 호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딱히 돈도 되지 않는데 그 거대한 팬덤을 적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언론사는 없었기 때문에.
게다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PTW 뒤에는 삼정이라는 뒷배가 있었다.
건드려봐야 돈도 되지 않는데, 손해는 막심한 기업.
기레기들이 평가하는 PTW는 그런 기업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돈이 얽히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다.
애당초 ‘기레기’라 불리는 사람들의 목적은, 좋은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이 될만한’ 기사를 쓰는 것이기에.
이번 PTW의 비난 기사엔 바로 그 ‘돈’이 얽혀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수원에 있는 삼정 전자 본사 최상층.
언제나처럼 국내외 신문을 보는 것으로 아침을 맞이하려던 이주용 회장은 그날 올라온 기사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엔 자신이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파운드리 공정의 최대 고객사를 비난하는 내용이 실려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주용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기자는 PTW 뒤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나?”
주용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수행원이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쪽은 반 삼정 계열 언론사라 저희쪽에서 광고를 넣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담 없이 건드릴 수 있었다? 그렇다 쳐도 이 기사 내용은 말이 안 됩니다.
기업에서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적합한 상대에게 판다는 건데, 거기 매국이 왜 붙습니까?
PTW가 1년에 벌어들이는 외화가 얼만데?”
“그런 걸 신경 쓰면 대한민국에서 기자 못 하지 않겠습니까?”
“아뇨, 단순히 관심을 받기 위한 기사라고 보기엔, 생각보다 내용이 디테일합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대한민국 기레기들은, 절대 돈 없이 이런 기사를 쓰지 않죠.
PTW의 팬들에게 두들겨 맞을 테니까요. 이런 기사가 올라왔단 이야기는, 배후에서 제안한 맷값이 얻어맞아서 생기는 손해보다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배후를 조사해볼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만 보면 되니까.”
그렇게 말한 주용은 마치 무언가를 찾듯 신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는 자신이 찾은 페이지를 수행원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지금 신차가 나온 것도 아닌데 아무 메시지도 없는 전면 광고를, 그것도 양면을 다 써서 올렸어요.
그럼 거의 확실하게 이쪽이 배후라고 봐야죠.”
주용이 펼친 페이지.
거기엔 신문의 양면에 걸쳐 커다란 자동차 사진이 실린 ‘형대 자동차’의 광고 기사가 실려있었다.
그러자 주용의 옆에서 그 광고를 본 수행원이, 허리를 숙이며 주용에게 물었다.
“PTW측에 이 기사의 배후에 형대 자동차가 있다고 알릴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에 딥 다이버에 들어가는 메인 칩셋은 저희 삼정 파운드리에서 100% 생산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갤럭틱 M의 새 시리즈 판매량도 순조롭게 늘고 있고요?”
“예. 전 시리즈 대비 30% 이상은 성장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럼 이 정도는 제 선에서 처리해야죠. 우리 최대 고객사 중의 하나인데.”
공격적 확장을 시도 중인 삼정 파운드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고객’이었다.
이 업계에서는 얼마나 메이저한 고객을 확보하고 있느냐가 곧 그 업체의 신뢰도를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PTW가 삼정 파운드리에 가져다준 이익은 단순히 돈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대는, 바로 그런 삼정의 ‘최대 고객사’를 자극하고 있었고.
주용은 굳은 표정으로 수행원을 향해 말했다.
“형대 자동차 측에 연락하세요.”
“저쪽에서는 부정하지 않을까요?”
“이쪽 업계 돌아가는 사정을 저도 알고 그쪽도 다 아는데,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즉시 연락하겠습니다.”
달려나가는 수행원을 보며, 주용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혼자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형대는 이쪽에서 막는다고 쳐도, 이미 나간 기사가 복제되는 건 막기 어려울 것 같은데.
게다가 정치권에서도 이전 셧다운 폐지 건 때문에 PTW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의원들이 많고···.
이상혁이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가 궁금하군.”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상혁은 스티브를 향해 자신의 대응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주용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황당한 대응책에 대해서.
상혁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요. (We do nothing.)”
그러자 상혁의 대응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스티브가 물었다.
“아무것도요? 지금 아무것도 않는다고 하신 겁니까?”
“사자는 양들의 의견에 신경 쓰지 않는 법입니다. (A lions doesn't concern himself with the opinions of the sheep)”
상혁이 유명 드라마에 나온 대사를 인용했지만, 스티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계속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기사가 시간이 지나면 묻힐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상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한국의 인터넷 기사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보통 기업에서 돈을 주고 다른 기사로 도배를 시키거나, 아니면 반박 기사를 올리게 하지 않는 이상은, 일하기 귀찮은 기자들의 손에 의해서 계속 복사되고 확대되어 이슈로 발전하겠죠.
그리고 어쩌면, 표심에 민감한 정치인들에 의해 청문회에 불려갈 수도 있고요.”
“그럼 문제가 심각한 거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딥 다이버의 군사적 독점 권한까지 미국에 넘겨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PTW의 이미지에 큰 타격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죠.”
“그런데도 아무것도 안 하신다고요?”
“말했듯, 사자는 양들의 의견에 신경 쓰지 않는 법입니다.”
“PTW는 한국 기업입니다. 상혁 씨는 한국 정부가 양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뇨. 저는 저희가 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꽤 귀찮은 일이 될 거로 생각하고요.”
“그런데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스티브의 질문에 상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회사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를 덮기 위해서 다른 기레기에게 돈을 주고 싶지도 않고, 저희가 정당하게 개발한 기술을 적합한 회사에 넘기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개소리에 대응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상대방을 엿 먹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죠.
세상엔 저희 대신 움직여줄 ‘사자’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스티브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혁이 말하는 ‘사자’가 무엇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 불쌍한 노점상이 물건을 팔려고 하는데 더러운 깡패 새끼들이 와서 장사를 훼방 놓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 깡패들을 다 조져버릴 힘을 가진 영웅이 그 장면을 보게 되었네요.
게다가 그 노점상의 좌판에는 그 영웅이 그토록 찾고 있던 용사의 검이 놓여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웅이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요?”
“건달들을 물리치고, 노점상을 구한 뒤 용사의 검을 사야겠죠.”
“바로 그겁니다.”
상혁이 말했다.
“자, 그럼 용사님. 이제 당신의 힘을 보여주시죠.”
스티브는 어째서 조금 전 자신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는지를 깨달았다.
상혁이 시키려는 것은, 스티브가 PTW를 위해 ‘미국 정부’를 움직여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주를 아득하게 초월하는 것이었다.
“저는 미 정부를 위해 일하긴 하지만, 정치인이 아닌 일개 공무원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연결된 사람들은 미 정부에 연줄이 닿아 있겠죠.
제가 요구하는 것은 이번 거래에 대한 미 정부의 진심을 보여달라는 겁니다.”
“아직 성사되지도 않은 거래를 위해서 한국 정부와 대신 싸워달라는 요구는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도 하지 못한다면, 딥 다이버라는 기술의 군사적 독점 권한은 포기하셔야겠죠.
그 거래가 밝혀지는 순간, 아니, 사실 단 한 명의 미군 병사라도 딥 다이버 기술이 적용된 군용 헬멧을 쓰고 등장하는 순간 저희의 거래는 전 세계에 공개될 겁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리고 그것은 저희에게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겨 줄 것이고요.
한국 기업이 미군을 위해서 군사기술을 넘긴다는 건 두 나라가 동맹국임을 고려하더라도 엄청난 정치적 비난을 받을만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정도의 리스크를 감당할만한 힘을 가진 회사가 아니고요.”
“미국에서 페인트 북이나 헤지펀드와 싸울 때는 거의 무쌍을 찍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기업이나 금융인들이고, 지금 상대하는 건 정부죠. 정부는 정부만의 굴러가는 공식이 있습니다.”
“이제 삼정으로도 모자라서 미 정부까지 뒷배로 두실 생각이라는 거군요.
잘 알겠습니다. 솔직히 제 능력으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당초 이번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거래의 성립조차 불가능할 것 같네요.”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스티브 씨에게 빈손으로 가서 미국 정부라는 거대한 괴물을 설득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리라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도움이 될만한 물건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30억 달러쯤 들어있는 가방이 아니라면 도움이 될만한 물건은 없을 것 같은데요.”
“아뇨, 30억 달러보다 더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죠.”
상혁은 자신의 의자 옆 바닥에 놓인 종이 상자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스티브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게 ‘용사의 검’입니다.”
“이건 딥 다이버이지 않습니까?”
“예.”
“이건 저희 집에도 있는 겁니다만?”
“아뇨, 이건 보통의 딥 다이버가 아닙니다.
시간 관계상 외형적인 부분에서는 전혀 손을 대지 못했지만, 안에 들어있는 소프트웨어는 싹 다 뜯어고친 물건이니까요.”
그러자 상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고민하던 스티브가 경악으로 물든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그럼 혹시···.”
“예.”
“아니, 그걸 한 달 만에 완성하셨다고요?”
“하드웨어적인 개발이면 모를까, 소프트웨어 부분에 있어서 저희 PTW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니까요.”
“말씀드린 기능 중에 몇 %나 구현되어 있죠?”
“현재로서는 50% 정도지만, 시연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개발 완료된 부분에 대한 사용 설명서도 함께 드릴 테니, 비행기 안에서 검토해보세요.”
상혁이 스티브에게 건네준 딥 다이버.
그것은 일반적인 딥 다이버가 아닌, 군인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재 프로그래밍 된 프로토타입이었다.
스티브가 PTW와 함께 진행하려는 프로젝트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눈으로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의.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 스티브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용사의 검이 아니라, 세계를 멸할 수 있는 마왕의 검이라는 사실을.
상혁의 말대로 원래 구현하려던 기능의 50%만 제대로 구현되었다 하더라도, 이 물건은 충분히 그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좋습니다. 저는 한 달이란 시간 안엔 도저히 완성 근처에도 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프로토타입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그 말씀은···.”
“PTW를 위해서, 미국 정부를 설득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습니다. 비행기 티켓은 이미 끊어놨으니, 출발만 하시면 되겠네요.”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티브는 소중한 보물을 만지는 것처럼 품 안에 조심스레 딥 다이버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상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돌아올 때는, 사자와 함께 돌아오게 되겠군요.”
“글쎄요. 미국 정부라면 사자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겠죠. 레비아탄(Leviathan) 정도라면 모를까.”
“좋네요. 그럼 레비아탄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는 대로, PTW의 적들을 뭉게 드리죠.”
그러자 몸을 돌려 부실을 나서려는 스티브에게 상혁이 말했다.
“잠깐만요.”
“예?”
“그렇다고 아예 죽이지는 마세요. 어찌 되었건 미우나 고우나 제가 태어난 나라고, PTW라는 회사가 있는 나라니까요.”
“명심하죠.”
그렇게 대답한 스티브가 부실문을 나서자, 상혁은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군사용 딥 다이버의 프로토타입이 담겨 있던 상자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전쟁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을, 그런 능력을 가진 장비가 담겨 있던 상자를.
그것의 모습은 상혁으로 하여금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였던 맨하탄 프로젝트와 관련된 격언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가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것을 해도 되는가에 대한 문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