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피떡
자신만만하게 모험에 뛰어든 세 사람은 오래 지나지 않아 상혁이 만들어둔 함정에 빠져 고블린들이 감시하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모든 장비를 빼앗긴 채로.
그리고 상혁은, 그들에게 어떤 힌트도 주지 않은 채 걸걸한 고블린의 목소리로 그들을 약 올리고 있었다.
“케케케. 두목님이 오시면 너희는 다 죽을 거다.”
“케케케. 어떻게 오늘 저녁은 신선한 인간 고기를 맛볼 수 있겠군.”
“케케케. 인간은 약해. 다리 하나만 먼저 뜯어먹고 싶지만 그러면 죽어버리겠지.”
“그 말투랑 목소리 무지 열 받는데 좀 그만두면 안 돼요?”
“케케케. 고블고블은 원래 이런 목소리로 말한다. 인간, 거기에 불만을 느끼지 마라. 케케케”
약 올리듯 말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고블린을 보면서,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이 게임에 익숙할 게 분명한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장비도 다 빼앗겼는데,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그러자 하프 엘프인 나즈리엘이 말했다.
“마법은 쓸 수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지수는 자신이 아는 주문을 시전하려 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나이츠 어셈블 2’의 캐스팅 시스템은 그녀가 개발한 MYOM의 그것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주문을 시전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생겨나지 않았다.
“케케케. 어리석은 인간 여자 같으니. 이 동굴은 암석 전체가 인간의 주술을 쓰지 못하게 방해하는 돌로 이루어져 있다.
케케케. 조금 무른 게 흠이지만. 케케.”
“이전까지 투입됐던 모험가들이 어째서 실종된 것인지 그 이유가 여기 있었군.”
팔라딘인 란돌프가 말하자,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마법을 쓸 수 없으면 그냥 민간인이니까요. 그나저나 곤란하게 됐네요.”
“아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적이 자기 입으로 힌트를 제공하지.
그리고 저 고블린은 이미 우리에게 힌트를 줬어.”
그렇게 말하며, 란돌프는 감옥 벽에 고정되어있는 쇠창살로 다가갔다.
“돌이 무르다면 쇠창살을 흔들어서 뽑을 수 있겠지.
아니면 고블린들이 만드는 쇠의 품질이 조악해서 힘으로 휠 수 있거나.”
그렇게 말한 란돌프는 온몸의 근육을 부풀리며 쇠창살을 잡은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쇠창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안돼요?”
“힌트는 맞는 거 같은데, 내 힘이 모자란 거 같아.
힘을 주면 흔들리긴 하는데, 아슬아슬하게 뽑히진 않네.”
“혹시 힘 증가 계열 축복 쓸 수 있어요?”
“케케케. 어리석은 인간 여자. 이 동굴의 암석은 신의 축복도 방해하는 재질로 되어있다.
케케. 상아탑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쳐주나 보지?”
“고블린 주제에 상아탑의 고귀한 이름을 입에 담지 마.
그리고 동굴에서만 처박혀 사는 주제에 상아탑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는 거야?”
지수가 은근슬쩍 상혁의 ‘설정 붕괴’에 대해 언급했지만, 상혁은 능숙하게 지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케케. 잘 알지, 이전에 왔었던 네 선배도 이곳에서 죽었으니까. 케케케.”
“선배가?”
“구석에 잘 찾아보면 네 선배의 해골도 찾을 수 있을 거다. 케케.”
‘아, 저 목소리 진짜 빡치게 만드네.’
아닌 게 아니라 고블린의 목소리로 연기하는 상혁의 말투는 진짜로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수는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괜스레 팔라딘인 란돌프에게 돌렸다.
“아니, 팔라딘이 힘이 얼만데 쇠창살 하나 못 휘어요?
고정하고 있는 돌이 무르다잖아요?”
그러자 란돌프는 그녀에게 자신의 캐릭터가 가진 충격적 진실에 대해 알려주었다.
“미안한데 내 힘 수치는 8이야···.”
“8?! 8?!!?!? 그 커다란 근육을 가지고 8?!! 내 힘 수치가 15인데?!”
“마법사가 15??!”
지수는 투덜대며 란돌프를 밀쳤다.
그리고는 쇠창살 앞에 다가가 손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으며 쇠창살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넌 뒤졌어.”
고블린에게 협박을 하면서.
“케. 케켁! 인간! 그만둬라! 탈출하면 동료를 부르겠다! 케켁!”
다급히 외치는 고블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수는 이것이 바로 이 감옥의 탈출법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쇠창살을 준 양손에 강하게 힘을 주어 양쪽으로 벌리려 했다.
-카카카캉-
그러나 힘 수치가 15라는, 마법사 치고는 비정상적인 괴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온 힘을 주어도 쇠창살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블린은, 그런 지수를 보면서 배꼽을 붙잡고 웃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될 것을 알고있었다는 것처럼.
“케케케. 어리석은 인간 여자. 모험가들은 다 똑같다.
바위가 무르다고 하면, 전부 쇠창살을 잡고 흔들려고 한다.
케케. 그런 녀석들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는게 정말 즐겁다. 케케.”
‘아니 무슨 테스트 플레이 난이도가 이따위야!?’
속으로 투덜대는 지수의 귀에 더욱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고로 그 쇠창살은 자신의 힘이 18이라고 말했던 인간 전사 외에는 아무도 휘지 못했다.”
“그럼 무른 게 아니잖아!”
“케케케. 금강석보다는 무르다. 강도란 개념은 상대적이다. 케케.”
“아니 무슨 고블린이 저렇게 유식해?!”
지수의 말에 고블린은 뭔가 뜨끔한 듯 고개를 돌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분노를 참으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장비도 없고, 마법이나 축복도 못 쓰는 상황에서 쇠창살을 뽑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지.
하지만 힘 18이라는 요구치는 지나치게 높아.
그럼 이 안에 다른 힌트가 있을거야.
고블린이 말했던 게 뭐가 있었지.’
잠시 고민하던 지수는 고블린이 언급한 ‘선배’의 존재에 대해 떠올렸다.
그리고는 구석에 쌓인 해골 더미로 다가가 그것을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다.’
시험관 형태의 약병과 함께 들어있는 작은 쪽지.
그것은 상아탑의 인장이 그려진 선배 마법사의 유언장이었다.
[이곳에 올지 모를 나의 후배를 위하여, 이것을 남긴다.]
그렇게 시작된 유언장은, 무려 일시적으로 힘을 두 배로 올려주는 포션을 가지고 있었지만 파티원 중에 누구도 힘이 9를 넘지 못해 안타깝게 전멸해야 했던 선배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모두 그에게 포션을 마시고 시도라도 해보자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자신의 뒤에 잡혀 올 다른 마법사 후배를 위해 포션을 쓰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상아탑의 선배로서, 후배를 지키기 위해.
지수는 포션이 발견되었던 해골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소중한 보물을 안고 있는 듯 무언가를 감싸는 형태로 놓여있었다.
‘감사합니다. 선배.’
지수는 포션 병을 들고 고블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분위기 변화를 감지한 고블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켁. 케켁! 뭐냐! 어리석은 인간 여자!”
“내가 여기서 나가면, 가장 먼저 네 주둥이부터 찢어놓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손에 있는 약병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고블린이 저지하기도 전에, 빠르게 입에 털어 넣었다.
“켁! 그 약은 뭐냐!”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PRD가 전신을 살짝 압박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녀의 근육에게 긴장을 유도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기분 좋은 압박감을 느끼며, 그녀는 쇠창살을 양손으로 잡고 가볍게 당겼다.
-끼이이익-
마치 말랑한 가래떡을 휘는 것처럼, 별다른 저항 없이 휘어지는 쇠창살을 보면서, 그녀는 힘 30이 주는 강력한 파워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힘으로 지금 해야 할 건 하나밖에 없겠지.’
지수는 주먹을 우두둑 꺾고는 자신을 ‘어리석은 인간 여자’라 놀리던 고블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케켁! 위험! 위험! 죄수들이 탈출했다! 경보! 경보!”
아까까지 그토록 기분 나쁘게 들렸던 목소리가 이제는 시원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상혁이 연기하고 있는 고블린을 말 그대로 ‘개 박살’ 냈다.
“케켁!! 인간 여자가 무슨 힘이 저렇게 강하냐! 케켁!!?”
“주먹으로 바위를 부순다! 케켁!”
“케켁! 두목님을 불러라! 케케켁!”
마지막으로 ‘케케케엑!’이라는 비명을 지르며 벽에 머리가 박살난 감시자 고블린은, 죽기 전에 동굴에 있는 수많은 동료를 호출했다.
그리고 상혁은 그 많은 고블린의 대사를 일일이 실감 나게 연기하여 지수의 기분을 에스컬레이트시키고 있었다.
그 전투의 한 가운데서, 지수는 상혁이 말했던 ‘턴제 전투’가 무엇인지, 튜토리얼이 아닌 몸으로 학습할 수 있었다.
[턴이 종료되었습니다.]
또 다른 고블린의 다리를 잡고 벽에 던져 고기 덩이로 만든 지수는 시야 중앙에 뜬 메시지를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
그렇다고 PRD가 그녀의 동작을 강제로 멈추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턴이 아닌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런 효과를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턴이 아니면, 칼을 휘둘러 적의 몸을 베어도 칼이 유령처럼 적의 몸을 통과하고, 적을 붙잡으려 해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턴이 시작되면, 턴이 종료되기 직전의 위치로 순식간에 텔레포트 되었다.
그래서 지수는, 자신의 턴이 종료되면 전황을 둘러보며 침착하게 자신이 다음으로 해야 할 것에 대해 파악하거나, 눈앞의 고블린을 어떻게 박살 낼지에 대해 편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수의 그런 고민은, 그리 오래 유지 되지 않았다.
장비도 없이 전투에 참가하기를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멤버들이 전부 자신의 턴이 돌아오자 마자 행동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전투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듯 지수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안전한 자리를 잡았다.
팔라딘인 란돌프는 식탁을 뒤집어 그 뒤에 숨고는 기도를 시작했고, 하프엘프 도적인 나즈리엘은 그림자 아래 숨어들어 어느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지수는 MK1 슈트를 완성한 토디 스타크의 기분이 되어 고블린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있었다.
“앗 따거!”
그때, 민첩 수치 굴림에 실패했는지 허벅지에 둔탁한 충격이 전해져왔다.
그러자 지수는 자신이 허벅지를 보고는 그것이 한 고블린이 던진 대거가 날아와 박혀서 생긴 통증임을 알아차렸다.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지수는 자신이 대거를 던졌음에도 그토록 공포스러운 상대를 도발했다는 사실에 지레 겁먹은 고블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감히 나를 아프게 해? 너 오늘 병풍뒤에서 향냄새 맡게 해주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수는 이 ‘회피 처리 시스템’에 대해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나이츠 어셈블2의 회피 판정은, 캐릭터의 민첩 수치에 영향을 받는다.
만약 플레이어의 민첩 수치로 인해 회피 굴림에 성공하면, 화면이 붉게 변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격이 슬로우 모션으로 다가온다.
유저가 적의 공격을 ‘직접’ 피할 수 있도록.
그러나 민첩 굴림에 실패하면, 아무런 어시스트 없이 공격이 진행되게 되어있었다.
아니면 반대로 플레이어의 동작을 강제로 느리게 만들어서 피할 수 없게 만들던가.
그것은 회피 굴림에 실패한 유저에게 자신이 공격을 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를 플레이어 본인의 피지컬에 맡기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면, 웬만한 공격은 다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마치 전투에 익숙해진 모험가가, 자신의 피지컬을 넘어서 경험을 통해 더 강해지는 것처럼.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모든 것들은 유저로 하여금 ‘진짜 모험가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하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었다.
“꺄하하하하! 고깃덩이가 되어라! 어리석은 고블린 녀석들아!”
어느새 지수는 환희로 가득 찬 대사를 내뱉으며, 게임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자신의 턴이 아닐 때 전체 상황을 파악하여 들어올 수 있는 공격을 판단하고, 자신의 턴에 최적의 위치로 이동하여 공격을 수행하며, 때로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의자나 집기들을 집어 던지고,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화살을 접시를 던져 맞추고, 주먹으로 바위를 부숴 여러 명의 고블린을 한번에 공격하면서.
지수는 자신이 진짜로 힘 30의 수치를 가진 괴력의 인간이 되었다는 느낌을 전달받고 있었다.
“아하하하! 이 게임 진짜 최고야!”
“케켁! 게임이라니! 인간 여자가 이상한 단어를 말한다! 케켁!”
“아, 정정할게! 이 모험은 진짜 최고야!”
“케켁! 인간 여자가 미쳤다! 케켁!”
그렇게 한 인간 여성의 기분 좋은 웃음과, 고블린들의 처절한 비명을 배경으로, 상혁이 준비한 테스트 플레이는 본격적인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
“그렇게 앞으로 가던 여러분의 앞에, 지금까지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거대한 문이 나타났습니다.”
상혁이 말하며 손을 휘두르자, 동굴 복도였던 주변 환경이 마치 텔레포트 하듯 순식간에 거대한 문 앞의 장소로 변했다.
굳이 상혁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눈앞의 문이 ‘고블린이 아닌 다른 존재’가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으로.
그러나 상혁의 나레이션은 시각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유저들이 주목해야 하는 포인트를 집어주는 것이었기에 지수와 동료들은 상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혁은 그런 멤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다른 존재가 만든 것이 느껴지는 문에서는 알 수 없는 음침한 힘이 느껴집니다.
왠지 문을 열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안에 있는 것처럼.
조용한 동굴 안에 울려 퍼지는 숨소리는 그것이 초보 모험가들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 위험한 생물의 숨소리임을 알려줍니다.
이 위기 앞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두 가지밖에 없어 보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던가, 아니면 뒤로 돌아가던가.”
상혁의 말을 들은 지수가 나즈리엘을 향해 물었다.
“나즈리엘. 어떻게 할래요?”
“글쎄요. 위험한 분위기가 느껴지긴 하는데, 저희는 이미 동굴의 나머지 부분을 전부 뒤졌어요.
이제 남은 건 이 방 하나뿐이고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가지고 온 장비가 아니라 마치 우리를 위해 준비된 듯한 장비를 찾았죠.
제가 지금 들고 있는 이 여신의 활.
그리고 란돌프가 들고 있는 전쟁신의 방패.
노아씨가 들고 있는 대지의 스태프까지.
이건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아마 힘들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겠지만, 이 모험의 끝을 내는 건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요.”
“란돌프 씨는요?”
조금 전 ‘전쟁신의 방패’를 손에 넣은 이후로, 란돌프는 묘하게 말투를 바꾸고 있었다.
마치 전쟁 신의 용기가 그를 감싸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용기와 피의 상징인 전쟁신 임 페르마께서는 후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진짜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고요?”
“예. 방패를 들고나서부터 제 귓가에 속삭이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해라 저렇게 말해라 하고요.”
‘상혁 오빠구나.’
지수는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끼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저도 그래요. 갑작스레 시작된 모험이지만, 정말 멋진 모험이었어요.
마치 한편의 동화책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의.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를 쓴 작가의 목적이 그 끝을 모두의 죽음이라는 허무한 결말로 이끄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분명 감동적인 이야기의 결말이, 우리의 모험담 마지막에 자리 잡게 되겠죠.”
“오, 우리가 동화책의 주인공이 되는 건가요?”
“예. 그리고 책 제목은 ‘아름답고 위대한 여 마도사 노아 벨포트와 두 똘마니들’이 되겠죠.”
“똘마니라니, 말이 심하군.”
“힘 수치 8인 팔라딘 란돌프씨. 힘수치 15인 여 마법사에게 힘으로 맞아볼래요?”
“똘마니가 맞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책의 주인공인 제가, 주인공의 권한으로 여러분들에게 명령하겠습니다.
이 모험을 끝내러 가자고.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라면 분명 이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지수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지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갑시다.”
“가죠.”
그곳엔 더 이상 개발 도중에 테스트 플레이를 위해 강제로 끌려온 3명의 개발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이 모험의 한 가운데서, 죽음의 위기를 넘나들며 협력한 3명의 모험가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아이러니하게도 마법사이면서 힘 수치가 파티 내에서 가장 높은 지수가, 육중한 문에 손을 대고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그러자 PRD가 전달해주는 무게감이 지수의 손에 육중한 반발력을 전달해주었다.
정말로 두꺼운 나무문을 미는 듯한 느낌으로.
그리고 지수는, 반쯤 열린 문을 통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확인하고는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를 지금 타이밍에 등장시킨 ‘던전 마스터’.
상혁을 향해서.
“게임 제목이 D&D(Dungeons & Dragons)라서 던전의 마지막에 드래곤을 배치하는 건, 너무 상투적인 방식 아니에요?”
그러자 이미 드래곤의 목소리를 준비해 놓았던 상혁의 대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영혼을 울리는 듯한, 마치 공룡이 말을 하는 듯한 떨림을 가진 목소리로.
상혁, 아니 드래곤은 그녀에게 이렇게 답했다.
“클래식이지.”
“그래요. 클래식이긴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전투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그럼 이야기의 결말도 클래식하게 용감한 모험가들의 승리로 끝내주실 거죠?”
“너희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면. 운명의 신은 너희에게 승리라는 미주를 마시게 해 주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도전한 수많은 모험가 중에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내겐 너희도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작은 트러블일 뿐이야.”
“그 트러블은 지금 여신의 활과 대지의 지팡이, 그리고 전쟁신의 방패를 들고 당신 앞에 서 있죠.”
“진정 그것들을 찾아서 내 앞에 선 것이 너희들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모험가의 오만은 참으로 기가 차는구나!”
드래곤의 목소리는 드래곤이 있는 방향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동굴 전체가 드래곤의 성대인 것처럼,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느낌으로 드래곤은 말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너희들을 죽이는 게 내 목적이었다면, 애당초 그 물건들을 내 둥지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너희들이 그것을 찾도록 내버려 두었지!
어째서인지 아나?
그건 그 빌어먹을 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한, 그 장난 같은 약속 때문에 말이다!
그 빌어먹을 자식은 그 주인공이 악당이라고는 알려주지 않았지!
덕분에 난 수백 년을 이곳에서 날 찾아오는 모험가들과 싸우며 지내야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지겨움을 느끼고 있구나.”
“저거, 엄청 열 받은 것 같은데요?”
란돌프가 진짜로 겁먹은 목소리로 묻자 지수가 답했다.
“그러게요. 저건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인데.”
지수의 말을 무시하며, 드래곤은 계속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침은, 어느새 드래곤이 아닌 상혁 자신의 불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수십 수백 번의 모험을 하면서!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로! 다들 나한테만 도전하려고 하지!
세상에 던전이 여기 하나뿐이더냐!?
맨날 똑같은 대사를 똑같이 던져야 하는 악당의 심정을 너희가 아느냔 말이다!”
“저거 무슨 뜻일까요?”
이번엔 나즈리엘이 물었다.
그러자 지수는 잠시 고민하다 그녀에게 답했다.
“테스트 할 때마다 던전 마스터를 본인한테만 시킨다고 빡쳤다는 말인 것 같은데.”
“아···.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요. 지금 보셔서 아시겠지만, 상혁 씨는 진짜로 던전 마스터를 잘하거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지수는 손에든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나즈리엘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상혁 오빠 말고 다른 사람도 던전 마스터를 자주 맡아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은근 그거에 대해서 불만이 쌓여있는 것 같으니까.”
“그럼, 말로 하면 될 것을···.”
“상혁 오빠가 은근 스타병이 있어서 그런 걸 또 거절을 못 하거든요.
지금은 저렇게 말하지만, 또 너무 안 시키면 섭섭해할 걸요?”
“복잡하네요.”
“애당초 이 게임의 개발 목적은 누구나 던전 마스터가 되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짤 수 있게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일 잘한다는 이유로 본인만 던전 마스터를 맡는 건 상혁오빠가 바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겠죠.
물론 상혁 오빠가 진짜로 실감나게 연기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러니 여러분이 상혁 오빠가 만든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던전을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상혁 오빠가 플레이하게 해 주시고요.
아마 엄청 기뻐할 테니까.”
“그러려면 우선 여기서 살아 돌아가야할 것 같은데요?”
“그건 괜찮아요. 아마 당분간 상혁 오빠가 던전 마스터를 하지 못할 정도로, 제가 아작을 낼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지수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상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놀란 목소리로 지수를 향해 외쳤다.
“그···. 그건?!?! 어째서 그게 남아있지?”
“당연히, 아까 절반만 먹었으니까.”
지수의 손에서 나온 ‘그것’.
그것은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지수가 마셨던, 힘을 ‘두 배’로 늘려주는 물약의 나머지 절반이었다.
“자, 상혁 오빠, 아니 드래곤 씨. 이제 힘 30의 여 마법사에게 두들겨 맞는 체험이 뭔지 몸소 체감하게 해드리죠.
이 이야기의 끝은 이렇게 날 거예요.
‘그렇게 사악한 드래곤은 아름다운 여 마법사의 주먹에 피떡이 되었습니다.’라고.”
그렇게 주먹을 우두둑 꺾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수의 모습은, 상혁에게 ‘어째서 물약을 무조건 한번에 다 먹게 패치하지 않았을까’란 후회를 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