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나이츠 어셈블 2
나이츠 어셈블(Knights Assemble).
상혁이 민준과 둘이서 만든 무료게임 ‘익스트림 발리볼’을 제외하면, 나이츠 어셈블은 PTW에서 제작한 두 번째 상업용 게임이라 할 수 있었다.
전학을 가게 되면서 친구들과 헤어진 평범한 소년이, 이사 간 집의 다락방에서 마법에 걸린 D&D 룰북을 발견하고, 사건의 해결을 위해 친구들을 설득하여 판타지 세계를 모험한다는 이야기는 당시 많은 D&D 팬들을 나이츠 어셈블의 세계에 빠져들게 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구가하던 ‘발더스의 문’이나 ‘끝나지 않는 겨울밤’ 같은 D&D 기반의 CRPG와는 다르게, 나이츠 어셈블은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아닌, 현실에서 친구를 모아 판타지 세계로 들어간다는 D&D의 ‘오프라인 컨셉’을 그럴싸하게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가서, 새 친구들과 대화하고, 함께 D&D를 하자고 설득하면서, 초보 플레이어였던 NPC가 점점 D&D고수로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임 플레이는 D&D 팬이라면 매료될 수밖에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오프라인에서 그들이 추구하던 삶, 바로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싱글 플레이가 주는 재미에 빠져든 플레이어들은, 자연스럽게 나이츠 어셈블의 온라인 플레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발매된 시기를 고려하면 이미 시대를 초월한 수준의 완벽에 가까운 온라인 멀티플레이가, 나이츠 어셈블에 구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십만 가지의 파츠를 자유롭게 조합해서 오브젝트나 몬스터, 맵을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던전 마스터 툴’, 누구라도 쉽게 자신이 원하는 실력의 유저들과 함께 게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인 게임 커뮤니티 ‘모험가의 주점’.
그리고 D&D의 룰 북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엄청나게 빠른 주기로 새 룰 북의 규칙이 업데이트되는 지속적인 유지보수까지.
그런 다양한 이유 때문에, 나이츠 어셈블은 2017년 현재에도 ‘최고의 멀티플레이 D&D 툴’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서비스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나이츠 어셈블이라니, 저는 상상도 못 했어요.”
상혁을 따라 테스트 쳄버로 이동하며, 지수가 말했다.
그러자 상혁이 그런 지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가?”
“조금은요. 다른 좋은 IP도 많잖아요? 단순히 오래돼서 속편이 필요한 거라면, ‘마리의 눈물’의 우선순위가 높을 거고, IP가 가진 힘이 기준이라면 나이츠 어셈블은 PTW의 다른 게임에 비해서 네임벨류가 밀리는 편이니까요.”
“확실히, 전체 판매량으로 보면 나이츠 어셈블은 PTW 게임 중에 가장 마이너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지수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럼 왜 나이츠 어셈블이에요? 리메이크나 속편은 다른 게임의 팬들도 원하고 있잖아요?”
“마리의 눈물은 이미 해상도 패치까지 해서 무료로 온라인에서 배포했었잖아.
우리가 만든 TTS 엔진의 테스트 셈플로.
그리고 MYOM같은 경우는 지금도 딥 다이버 버전으로 개발하기 위해서 작업 중이고.
그 외의 나머지 게임은···. 뭐랄까, 솔직히 말하면 ‘견적’이 안 나와.”
“견적이요?”
“마리의 눈물은 TTS엔진의 테스트에 적합한 게임이었어. 당시 우리는 성우 녹음을 진행하지 않고 게임을 만들었고, 해외 국가 출시에 리소스를 쓰기 어려운 상황이라 모든 대사 스크립트를 TXT 파일로 별도로 뽑아서 쓰게 만들었거든.
그 파일만 번역하면, 게임 내 UI버튼에 달린 한글까지 죄다 번역되게 만든 거지.
그 덕에 우리가 일본에 마리의 눈물을 발매하기도 전에, 일본에서 이미 마리의 눈물은 꽤 인기를 얻을 수 있었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SANY같은 대기업과 준수한 조건에서 마리의 눈물 PS판 발매를 진행할 수 있었고.
그런 특징 때문에, 마리의 눈물은 TTS시스템을 테스트하기에 최적인 게임이라고 할 수 있었지.
다들 주인공인 마리나 주변 측근들의 연기를 음성으로 듣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리마스터 버전의 게임 플레이 적인 측면에서는, 마리의 눈물은 전혀 변화가 없었어.
그때까지 유지보수 차원에서 추가한 수많은 이벤트와 추가 NPC들이 기본 버전에 탑재된 것을 제외하면, 게임 플레이 자체는 시스템부터 UI까지 원작의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
“그건 무료 배포용 게임을 완전히 새로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아니었어요?”
“그것도 있긴 한데, 아예 완전히 다른 경험을 주지 않을 바에는 그냥 그대로 내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게 컸지.
당시 우리가 노리던 유저들은 마리의 눈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유저들이었고, 그런 유저들에게 오리지널 게임이 가진 게임 플레이를 무료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게 당시 게임 배포의 주요 목적이었으니까.
게다가 마리의 눈물은 지금 시대에서 봐도 매우 현대적인 UI와 플레이를 가진 게임이야.
당장 모바일로 플랫폼을 옮겨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건 우리 회사의 나머지 게임들도 마찬가지고.”
“마찬가지요?”
“대부분은 이미 그 상태로 완성되어 있다는 소리야.
지수 너라면 EOD나 GOS가 지금보다 완벽하게 더 완성된 버전을 상상할 수 있겠어?
기존 게임에서 스토리만 연장되는 게 아니라, 훨씬 즐겁고 발전된 전혀 색다른 게임 플레이를 전달하는 버전 말이야.”
잠시 생각하던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것 같아요. 이미 그 상태로 완벽한 게임들이라.”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일리는 있었다.
PTW의 게임들이 가진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그 게임이 언제 발매되었든 모든 게임들이 마치 시간이라도 뛰어넘은 것처럼 미래 지향적인 게임 플레이와 UI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혁은 그런 부분에서 나이츠 어셈블과 MYOM이 본질적인 면에서 다른 게임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MYOM의 초기 개발 버전 기억해?”
“마나 엔진 도입 전이요?”
“아니, 그거보다 훨씬 전.”
“아, ‘중2병 배틀러’ 시절 말씀이시구나. 으으···. 흑역사라 떠올리기 싫은데···.”
“뭐, 난 그때의 네가 귀여워서 좋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때 우리는 코넥트 전용의 모션 인식 게임을 개발하려고 하고 있었지.
하지만 스크린을 앞에 두고 테스트를 하면서, 나는 계속 VR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
이런 종류의 게임을 VR로 플레이한다면 정말 끝내주는 기분일 거라고.
하지만 기술의 한계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고, 결국 우리는 MYOM이란 게임을 VR이 아닌 단순한 모션 인식 게임으로 발매했었지.
기본 플레이 화면도 1인칭 시점 인데다, 게임 플레이 내내 유저가 화면 속에 있는 자신의 손을 보면서 플레이하는 게임인데도, 스크린을 통해서만 플레이할 수 있게 만들었던 거야.
말하자면 당시의 MYOM은 기술적 한계 때문에 반쪽짜리 게임이 된 거지.
그래서 MYOM은 개발 시점에서도 계속 VR로 리메이크하는 걸 고려하고 있었어.
이후에 더 높은 해상도와 퍼포먼스를 갖춘 VR장비가 나오면, 게임을 이식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어쩐지, 1080p밖에 지원하지 않는 게임인데 원본 리소스는 죄다 4K 해상도로 제작하라고 하셔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지수의 말대로, 상혁은 MYOM을 작업할 때 모든 모델링과 이펙트의 원본 해상도를 4K 해상도에 맞춰서 제작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해상도를 낮춘 최적화 과정을 거쳐 게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덕분에 리메이크 작업에 들어가면서, 지수는 원본 리소스들을 재작업 없이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감사하고 있었다.
“진짜로, 소름이 돋더라니까요? 별다른 작업 없이 기존 리소스를 4K 원본으로 교체하는 것만으로, 그래픽 부분에서의 리메이크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난 오빠가 미래라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요.”
“미래를 읽은 건 아니고, 목표를 미래에 둔 거지.”
“아무튼, 그럼 상혁 오빠는 나이츠 어셈블도 MYOM처럼 처음부터 VR을 고려하고 제작했다는 거예요?”
지수의 질문에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MYOM하고는 조금 달라. MYOM을 제작할 때의 PTW는 제작 단계에서 리메이크를 고려한 작업이 가능할 정도로 회사에 여유가 있었지만, 당시의 PTW는 그런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생각은 하고 있었어.
D&D란 게임의 진정한 재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VR 플랫폼이 최적일 거라고.
그러니까 나이츠 어셈블2는, 내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생각하던 D&D의 완성형 게임이 되는거지.”
두 사람은 어느새 테스트 쳄버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자 상혁이, 테스트 쳄버의 문을 열며 지수에게 싱긋 미소지었다.
“아마도 놀라게 될 거야.”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하며, 상혁은 지수를 테스트 쳄버의 안으로 안내했다.
***
“PRD도 있네요?”
테스트 쳄버의 안에 들어간 지수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기본적으로 PTW의 테스트 쳄버는 프로젝트 단위로 할당되기 때문에, 여기에 PRD가 있다는 이야기는 ‘나이츠 어셈블 2’가 PRD 플레이를 지원한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아까 말했지? 프로젝트 히어로는 딥 다이버와 코넥트로도, 일반 TV와 패드로도, 그리고 PRD로도 플레이 가능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이게 좋은 셈플이 되지 않을까 해서 보여주려는 거야.
나이츠 어셈블 2는 3가지 방식 모두 사용할 수 있거든.”
“그래요?”
“어. 물론 개발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게임 3개를 만드는 수준의 노력이 들어가긴 하지만, 그 정도 가치는 충분히 있지.”
“그럼 보여주세요. 그 가치가 뭔지.”
지수가 말하자 상혁은 그녀를 탈의실로 안내했다.
“오기 전에 미리 연락해서 지수 네 전용 PRD 슈트를 가져다 놓으라고 했어.
안에서 갈아입고 나오면 테스트할 수 있게 세팅해줄게.”
“오빠는요?”
“나도 해야지. 하지만 난 이번에 던전 마스터 역할이야.
지수 네 동료는 여기 있는 다른 개발자들이 해 줄 거고.”
“알았어요.”
지수는 상혁의 말대로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슈트의 안에 입도록 준비된 몸에 달라붙는 스판 소재의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슈트를 덧입었다.
그러자 완전히 그녀의 체형에 맞춰서 특별 제작된, PRD 슈트 특유의 압박감이 기분 좋게 그녀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이거, 착용감은 진짜 좋은데, 땀만 어떻게 하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뭐, 이건 괜찮을 거야. 기본적으로 턴제 게임이라서 그렇게 체력을 많이 요구하지 않거든.”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자신의 PRD 슈트 착용을 위해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직원 3명이 달려와 지수의 슈트를 PRD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내부에 있는 복잡한 선들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외부 모터에 연결된 선들과 연결하기 위해서.
이윽고 탈의실에서 나온 상혁의 세팅까지 마무리되자, 상혁은 딥 다이버를 착용한 상태로 개발자들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PRD가 두 대뿐이라서 나머지 멤버는 딥 다이버로 플레이 부탁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자주 있는 일이니까.”
한명이 웃으며 대답하자, 상혁은 웃으며 딥 다이버를 구동시켰다.
그리고 그런 상혁의 동작을 본 지수도 자신의 손을 머리로 가져가 딥 다이버를 구동했다.
그러자 딥 다이버를 통해 보이던 테스트 쳄버 내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지수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개발 버전이라 그런가? 아직 이 부분 UI는 개발이 안 됐나 보네.’
지수는 속으로 생각하며 상혁이 게임을 시작시키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 그녀의 시야가 밝아지며 상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테스트 쳄버 건너편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아닌, 딥 다이브의 헤드셋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나이츠 어셈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오늘 당신들을 환상적인 모험의 세계로 가이드 할 던전 마스터, 이상혁이라고 합니다.”
상혁이 말을 시작한 것과 동시에, 지수는 하늘에서 바라보는 시야로 다양한 지형이 눈앞에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나레이션이 깔린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으로, 상혁은 미리 세팅한 맵 영상을 지수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리고 앞으로 지수가 모험할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은 자연 다큐멘터리 같은 카메라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지만, 판타지로 가득한 세계를 비추고 있는 멋진 영상들이었다.
“오늘 여러분은, 저와 함께 나이츠 어셈블의 놀라운 세계를 함께 탐험하게 될 것입니다.
깊고 어두운 크론 산맥의 동굴부터, 가장 포악한 용 시나트라가 살고 있는 드래곤의 레어까지.”
상혁의 목소리를 따라서, 지수는 위압감을 전달하는 3마리의 거대 트롤이 있는 동굴과,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드래곤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상혁은, 그런 지수에게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모험가들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여러분은 한 명의 모험가가 되어 이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순간, 화면이 암전하며 바닥에 놓여있는 해골을 보여주었다.
“아니면, 시체가 되어 생태계의 순환에 이바지하거나.”
그런 식으로, 상혁은 마치 게임 오프닝을 연출하듯 미리 세팅한 영상을 자유자재로 부르며 그럴싸한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 어떤 결과가 발생하든 간에,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모험이라도 시작은 언제나 일상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죠.
그리고 그것은 이번 모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명성을 찾아 고향을 떠나온 모험가들이 모인 작은 주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험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죠.
미지근한 흑맥주와 딱딱하게 굳은 빵.
위대한 전설의 시작은, 바로 그런 사소함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게임 화면은 어느 새 지저분하지만 따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판타지풍의 주점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지수는, 게임 시점의 변화를 통해 본능적으로 게임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슈트와 연결된 PRD의 케이블이, 그녀의 손바닥에 압박감을 주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상 공간에 있는 자신의 손에 있는 맥주잔을 보고는, 웃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라본 곳에는, 어두운 로브를 끈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낡고 더러운 맥주잔을 들고서.
남자가 입을 열어 지수에게 말했다.
“그래, 또 다른 모험가로군.
죽고 싶어 환장한 불나방들이 자꾸만 모여드는구먼.”
그것은 상혁이 말하고 있는 대사였지만, 상혁의 목소리로 나오는 대사는 아니었다.
평소의 상혁이 내는 목소리와는 다른, 세월에 찌든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
지수는 그것이 게임에 내장된 목소리 변조 시스템을 통해 상혁의 목소리가 변화한 것임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목소리 변조가 엄청 자연스러운데?’
D&D에서 몰입감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NPC를 연기하는 던전 마스터의 연기력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던전 마스터가 연기력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기에, 상혁은 TTS 엔진을 개조한 음성 변조 시스템을 나이츠 어셈블 2에 탑재했다.
남성 노인부터 아름다운 여성 엘프까지, 성별과 종족을 넘어 어떤 연기든 던전 마스터가 자연스럽게 소화해 낼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은 진짜 판타지 속의 인물과 대화하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상혁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NPC의 목소리는, 헐리우드의 유명 영화 배우, 마이크 해밀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좋아, 좋아. 어찌됐건 나는 중개 수수료만 받으면 그만이지.
자네들이 죽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단 말일세.
그보다, 다들 초면인 거 같은데, 서로 자기소개나 하지 그러나?
어차피 다 같이 길바닥의 흙이 될 운명이라도, 최소한 살려달라고 할 때 이름 정도는 부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상혁의 말에 지수가 옆을 돌아보자, 거기엔 모험가처럼 보이는 다른 동료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지수는, 상혁이 어째서 D&D라는 장르를 VR로 만들고 싶어서 했는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에서, 그것도 완전히 몰입이 가능한 딥 다이버의 시야로 판타지 세계의 ‘동료’를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로 자신이 그 세계의 주민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몸에 비늘이 돋아나 있는 파충류 인간부터, 멀리 저편에 보이는 아름다운 엘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트럼프 카드를 들고 있는 여도적과 그런 여도적을 보며 고개를 젓고 있는 남자 검사.
판타지 세계의 ‘주점’이라고 하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때, 지수는 자신의 옆에 있던 모험가가 후드를 벗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분명 자신이 들어왔을 때는 전부 남자밖에 없었던 테스트 쳄버에서, 대놓고 ‘여성 캐릭터’를 골라 플레이하고 있는 개발자의 목소리를.
“나즈리엘이라고 해요. 종족은 하프 엘프고, 직업은 레인저. 모험은 이번이 3번째입니다.”
“란돌프다. 직업은 팔라딘. 이번 퀘스트는 교단의 조사 지시를 받고 파견 나왔지.”
지수는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직감하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상혁을 보며 말했다.
“저, 근데 이 캐릭터 세팅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데요?”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나 분위기를 완전히 깨부수는 그녀의 발언에, 그녀 앞에 있던 남자가 조용히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 분위기 다 깨지게 캐릭터 세팅이 뭐야?”
“아니, 그럼 캐릭터 시트라도 주고 시작하던가요!”
“없으면 그냥 애드리브로 적당하게 때우면 되잖아!
대충 ‘아, 저는 슬프게도 기억을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같은 대사로 때우던가.
나이츠 어셈블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를 연상하게 하는 발언은 금지되어 있다고!”
“···농담이시죠?”
“난 D&D까지고는 농담 안 해. 그리고 지금 나는 상혁 오빠가 아니라 이 주점의 늙은 죽돌이 ‘에드밀러’다.
앞으로의 모험에선 그 점을 주의하도록.”
“마이크 해밀 씨의 목소리로 그렇게 방정맞게 말하는 건 굉장히 특이한 기분이 들게 하네요.”
“그럼 짐 커리로 해줄까?”
“대체 할리우드 배우 목소리가 몇 개나 들어간 거예요?”
“지금 버전은 50개 정도.”
“헐···.”
“D&D에서 연기는 몰입감을 구현하는 중요한 요소니까.
익숙한 배우들의 목소리를 쓰면 마치 영화배우가 된 느낌을 줄 수 있지.
물론 그 배우의 말투나 억양은 던전 마스터가 따라 해야 하지만.”
“괜찮네요. 느낌 자체는 엄청 좋은 거 같아요.”
“실제 플레이는 더 좋다고. 지수 네가 메타 발언만 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그랬을 것이고.”
“예예. 사과드릴게요. 그럼 캐릭터 시트부터 주실래요?”
“잠깐만.”
그렇게 말한 상혁은 품 안을 뒤적거리는 듯한 행동을 하더니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 지수에게 건넸다.
거기엔 지수가 플레이하고 있는 캐릭터에 대한 정보가 마치 판타지 세계의 신상명세서 같은 느낌으로 적혀있었다.
그것을 읽으며, 지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신의 중2병이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진짜처럼 구현된 이 멋진 세계에서, 상혁이 건네준 시트의 캐릭터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한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좋아요.”
지수가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자, 상혁이 미소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이미 그녀가 이 세계의 모험가가 될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상혁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이 조종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좋아, 귀여운 아가씨. 이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해 소개해 주겠어?”
그러자 지수가 반짝이는 눈으로 상혁의 질문에 대답했다.
“제 이름은 노아 벨포트. 상아탑에서 이번 사태의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 나온 3서클 마스터의 마법사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지수의 목소리엔, 어느새 캐릭터에 완벽히 몰입한 그녀의 ‘연기’가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