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진짜같은
“저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존 카믹이 그 새 엔진의 테스트를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PTW의 신규 게임 제작 엔진인 ‘리얼 엔진’을 사용해서 작업하고 있던 개발자를, 지나가던 존 카믹이 발견한 것이다.
처음 그 장면을 본 존 카믹은 그것이 일종의 촬영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업자가 딥 다이버를 뒤집어 쓴 채로 이리저리 허공에 손을 휘젓고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길에 곁눈질로 살짝 봤음에도 존 카믹은 시선을 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존 카믹을 안내하던 존 스캇은 그것이 어떤 촬영이 아니라 PTW 내부의 자체 엔진을 사용한 3D 모델링 작업 테스트라고 설명해 주었고, 그 대답은 존 카믹의 흥미를 끌었다.
“지금 저게 작업하는 거라고요?”
“예. 키보드와 마우스가 아니라, 실제 VR로 구현된 공간의 3D 오브젝트를 만져서 3D 모델링을 다듬는 거죠.
옆에서 볼 때는 허공에 손을 휘젓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저 작업자의 눈에는 현재 작업 중인 3D 모델이 보이고 있을 겁니다.”
“흠, 직접 만져서 제작한다고요? 혹시 3차 NE 컨벤션에서 공개된 ‘아머드 코아’의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처럼 파츠를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붙이는 그런 걸 말하는 겁니까?”
“옆에서 볼 때는 비슷한데, 기능이 완전히 다르죠.
딥 다이버 전용 아머드 코아의 어셈블리 시스템은 정해진 위치에 선택한 파츠를 가져다 붙이는 행위를 단순히 손으로 조작하게 했을 뿐이고, 저건 실제 세부 위치나 오브젝트의 형태까지 조작할 수 있으니까요.
요컨대, 지금 저 작업자가 하는 작업은 점토를 가지고 피규어 원형을 만드는 작업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지금 조형 작업을 하는 사람도 피규어 원형사 출신이고요.”
“왜 게임 디자이너에게 시키지 않죠?”
“구동 방식 자체가 3D 모델링 작업이라기보다는 피규어 조형 작업에 가깝거든요.
전에 보신 부시 크래프트 서바이벌의 원형이 3D 점토를 조작해서 사물을 만드는 거라고 했었죠?
지금 저 직원이 하는 작업도 비슷한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직접 ‘만져서’ 모델링을 만든다라···. 재미는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냥 숙련된 전문가가 키보드랑 마우스로 작업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그게 그렇지도 않아요. 저 작업자가 조작하고 있는 ‘리얼 엔진’은, 3D 모델링에 대한 아무 능력 없는 초보자가 다뤄도 엄청나게 퀄리티 높은 결과물을 보장하는 물건이니까.”
“어떻게 그렇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데?”
“눈으로 보는 게 빠르겠죠.
딥 다이버엔 송출자가 보내는 시야를 다른 딥 다이버로 공유하는 기능도 있으니까, 한번 어떻게 작업하는지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스캇은 카믹을 향해 미소지었다.
“어쩌면 저 엔진이 게임 엔진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거니까.”
그의 말을 들은 카믹은 스캇을 따라 작업자가 있는 공간으로 함께 이동했다.
***
기본적으로 ‘딥 다이버’의 영상 송출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같은 딥 다이버를 사용하고 있는 유저가 송출자와 시야를 공유할 수 있도록 딥 다이버의 영상 자체를 그대로 전달하는 ‘시야 공유 모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원래 3D 로 촬영된 결과물을 일반 모니터나 TV에서도 어색하지 않게 볼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렌더링하여 보여주는 ‘평면 모드’.
현재 스튜디오에서 존 카믹이 틀어준 영상은, 그 평면 모드로 촬영된 영상을 그의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이었다.
사용자와 동일한 1인칭 시점으로, 실제 리얼 엔진의 3D 툴을 사용할 때 작업자가 보는 것과 똑같은 화면이 스튜디오의 스크린을 통해 보여지고 있었다.
“UI가 독특하네요. 무슨 작업을 하는 중인거죠?”
“게임 속에 들어갈 신규 몬스터의 3D 모델링을 처음부터 제작하는 겁니다.”
“그럼 지금 저게 리얼 엔진의 3D 작업 툴이라는 건가요?”
“그렇죠. 화면에 3D 작업에 필요한 UI가 보이지 않아서 잘 모르시겠지만, 지금 저건 실제 3D 모델링을 작업하는 리얼 엔진의 3D 툴을 구동한 화면입니다.
리얼 엔진은 기본적으로 AR이나 VR 환경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죠.
우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작업하고 있는 사람은 리얼 엔진을 굉장히 오래 다룬 전문 인력입니다.
그러니 작업하는 것도 매우 빠르고 능숙한데, 실제로 저 단계까지 가는 것은 꽤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뭐, 그건 다른 3D 툴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럼 계속 보시죠.”
대화를 위해 잠시 정지했던 영상을 다시 재생하자, 화면 손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짭비스? 오늘은 신규 모델링을 작성할 거야.-
화면 속의 작업자는 신규 파일 생성을 위해 파일을 생성하지도, UI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다.
단지 ‘말’로 자신이 할 행동을 지시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질문에 대답이 돌아왔다.
-사카모토 씨. 새 작업은 이전 작업의 연속입니까? 그렇다면 이전 프로젝트 폴더에 새 파일을 생성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줘.-
-그럼 전에 작업했던 판타지 컨셉의 추가 몬스터 작업이겠군요.
파일명은 지금 지정할까요? 아니면 작업이 끝난 후에 지정하시겠습니까?-
-끝나고. 아직 뭘 만들지 잘 모르겠으니까.-
-알겠습니다. 신규 모델링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3D 모델 툴 ‘피규어 메이커’ 모듈 가동.
3D 가이드 격자 생성.
평소 작업 스타일 대로, 스케일은 1:20 비율로 시작하겠습니다.-
-아냐, 오늘은 좀 큰 거 만들거니까 1:200정도로.-
-기본 스케일이 변경되었습니다.
몬스터는 인간형인가요? 4족 보행인가요?-
-4족으로 하지.-
-베이스 컨셉이 되는 키워드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좀 야성적인 느낌에 가까이 가기 싫을 정도의 위압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민첩해 보이면서도 강력한 느낌이 좋을 것 같아.-
-베히모스는 어떠세요?-
-보여줘.(Show me.)-
그러자 ‘베히모스’라는 신화 속 괴물의 수많은 형태가 마치 박물관 안에 들어온 것처럼 사방에 펼쳐졌다.
작업자를 위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달려드는 듯한 포즈를 한 몬스터의 모델링 중에서, 작업자는 하나의 모델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게 마음에 든다. 이걸로 하지.-
그러자 작업자가 가리킨 모델이 시야 가운데로 이동하며 나머지 모델들이 증발하듯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알겠습니다. 기존 작업물의 스타일을 참고하여 권장 라이브러리를 구성합니다.
···.
구성 완료.
작업을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텍스쳐 테마를 지금 바로 적용할까요?-
-그렇게 해.-
작업자가 말하자 눈앞의 모델링에 변화가 생겼다.
기존에 작업했던 다른 모델링들의 텍스쳐 스타일을 기반으로, 새 모델의 텍스쳐를 변경한 것이다.
뿔의 색이 변하고, 털의 질감이 변하며 전체적인 색감이나 상태가 즉시 변화하여 모델에 반영되는 모습은 매우 신기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황당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작업자는 매일 보는 것을 보듯 대수롭지 않게 작업을 이어나갔다.
-머리부터 시작하자고. 뿔 좀 띄워봐.-
-원하시는 이미지가 있으십니까?-
-좀 굵고 단단하면서 주름이 있는 뿔이 좋을 것 같아. 마치 링처럼 오돌토돌하게 굴곡이 돋아난 그런 뿔 말이야.-
-접수했습니다. 라이브러리를 출력합니다.-
이번엔 수십 개의 작은 뿔이 마치 장난감 같은 크기로 눈앞에 등장했다.
작업자는 그것을 마치 레고의 부속을 고르듯 이리저리 뒤집고 뒤로 던지더니 하나의 뿔을 들고 허공에 고정했다.
그리고는 양손을 ‘ㄴㄱ’ 자로 만들어 벌리며 그것을 확대했다.
-이걸 좀 다듬자.-
-어떻게 변경하시겠습니까?-
-색은 좀 더 회색빛으로, 그리고 내가 손가락으로 긋는 부분에 칼에 찍힌 자국을 추가해.-
그렇게 말한 그가 손가락을 뿔에 가져다 대고 긋자, 뿔에 실시간으로 두꺼운 칼에 찍힌 듯한 흔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가 말한 대로 뿔의 색이 회색으로 짙게 물들기 시작했다.
-링도 추가해. 재질은 황동으로.-
-좀 더 큰 링으로, 웨더링도 적용하고. 낡은 느낌이었으면 좋겠어.-
작업자는 마치 대화하듯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하고 있었고, 리얼 엔진은 마치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작업자의 요구사항을 모두 적용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진짜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적용해.-
작업자가 말하자, 그가 선택한 몬스터의 머리에 달린 뿔이 그가 수정한 디자인의 뿔로 즉시 교체되었다.
그는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몬스터의 머리 부분을 살펴보더니,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뿔에 있는 굴곡을 좀 더 키우자, 형태 변형 모드로 바꿔줘.-
-변경했습니다.-
작업자는 줌업을 통해 뿔의 크기를 테이블만한 사이즈로 확대 시켰다.
그리고는 뿔에 달려 있는 언덕 모양의 돌기를 손으로 만져 조정하기 시작했다.
마치 ‘점토’를 만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의 돌기를 마음에 드는 형태로 만든 그는 다시 입을 열어 외쳤다.
-나머지 돌기에도 적용해.-
그러자 그가 작업한 하나의 돌기뿐만 아니라, 나머지 돌기의 비율도 그가 조정한 비율로 즉각 조정되는 것이 보였다.
-돌기는 커졌는데 간격이 너무 빽빽하네. 돌기 수를 좀 줄여.-
-숫자는 그대로 유지할까요?-
-아니, 간격을 벌려야 하니 숫자도 줄여. 굵은 돌기가 조금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반영했습니다.-
-좋아, 그럼 이번엔 털을 보자고.-
솔직히, 개발자가 작업을 하는 모습은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과는 다르게 매우 지루하고 반복적인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보여지고 있는 ‘리얼 엔진’의 작업 모습은, 보고 있는 사람이 뺏어서 자신도 해보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매력적인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관객들과 허먼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시선을 화면에 빼앗긴 채 10분 길이의 긴 영상을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마이너리티 리포트’같은 영화 속 미래에서나 어울릴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마침내, 작업자가 10분 만에 수많은 라이브러리를 사용해서 애니메이션 작업까지 마치자, 영상은 종료되었다.
“대체···.(What the······.)”
영상이 끝나자마자, 허먼의 입에서 나온 작은 신음.
그것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 세계 수백만의 시청자가 내뱉은 단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허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존에게 소리쳤다.
“대체 저게 뭡니까?! 진짜로 저게 리얼 엔진이란 게임 제작 툴의 3d 모델링 과정이라고요?!!?”
그러나 허먼의 목소리는, 같은 타이밍에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며 소리치는 관객들의 환호성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게임 개발자가 아닌 일반인이 봐도 열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지금 보여준 영상 속의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우와아아아아아아아!!!!!!!”
“X발 미친 진짜 미래에서 타임캡슐 타고 왔나?!!?”
“PTW 지하에 외계인이 있다는 소문은 진짜였어!!!”
허먼은 손을 내저으며 관객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방송보다 방금 자신이 본 영상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한참의 소란 끝에 어느 정도 진정한 관객들이 자리에 앉자, 허먼은 존에게 자신이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저거, 진짜입니까?”
그러자 존은, 알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허먼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뇨, 사실 만우절 낚시입니다.
세상에 저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저렇게 엄청난 고해상도의 모델링을 자유자재로 실시간으로 렌더링하려면, 일반적인 게임 회사에서 사용하는 작업용 컴퓨터보다 월등히 뛰어난 슈퍼 컴퓨터가 연산을 보조해야 합니다.
기존 작업 툴로도 충분히 결과물을 뽑을 수 있는데, 수천억을 들여서 그런 미친 설비를 갖추려는 게임회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 그러고 보니 PTW엔 있군요?
게다가 지금 작업자는 대부분의 작업을 작업용 AI와 대화하는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마치 영화 ‘아이론 맨’에서 주인공이 인공지능 비서와 대화하며 슈트를 제작하는 것처럼 말이죠.
영상 속에서, 리얼 엔진은 작업자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즉시 그의 의도에 적합한 라이브러리를 보여주었죠.
그게 가능하게 하려면, 실제로 사람이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이 보여줘야 하는 데이터들이 어떤 데이터인지 ‘이해하는’ 초 고차원의 AI 모듈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어떤 게임회사가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어? 그러고 보니 PTW엔 있군요?
게다가 손으로 직접 모델링의 미세한 조작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 점토를 만지듯이 사물의 형태를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죠.
안 그러면 힘을 조금만 더 주더라도 손가락이 3D 모델의 안쪽으로 파고들 테니까.
그 정도로 섬세한 조작이 가능한 VR 컨트롤러 기술을 세상 어느 회사가 가지고 있겠습니까?
어? 그러고보니 PTW엔 이미 있네요?
예. 지금 보여드린 영상은 PTW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기술이 모여서 만들어진 일종의 마스터피스(Masterpiece : 결정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죠.”
허먼은 다시 입을 쩍 벌린 상태로 존의 말을 듣다가 머리를 좌우로 털으며 그에게 물었다.
“잠깐만요. 존 카믹 씨. 제가 알기로 PTW에서 만든 대화형 모듈은 저 정도 수준의 성능을 보이지 않았는데요?
가장 최신 버전인 2.0도 어디까지나 유저가 걸어오는 대화에 적합한 대사를 돌려주는 수준 아니었나요?”
“아머드 코아의 파일럿 보조 시스템으로 들어간 2.0버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가정용 콘솔의 성능 수준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수준을 뽑아내기 위해 만든 물건이니까요.
리얼 엔진에 탑재된 커뮤니케이션 엔진은 제작부터 렌더링 센터를 통한 클라우드 연산을 전제로 만들어진 물건이고, 그 말은 새 엔진은 애당초 플랫폼 성능이란 리미터 없이 제한 없는 수준의 연산 성능을 활용한 물건이란 뜻입니다.
덕분에 스컹크 웍스와 민준 씨는 자신들이 원하는 스펙의 고성능 AI를 만들 수 있었죠.
그게 바로 ‘커뮤니케이션 엔진 3.0’입니다.
회사 내부에서는 애정을 담아 ‘짭비스(Jjabvis)’라고 부르고 있죠.”
“짭비스요?”
“한국에서는 진짜 같은 가짜를 ‘짭’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진짜 자비스는 아니어도, 짭을 자처할 정도의 성능은 나온다는 거죠.”
존의 말을 들은 허먼은 자신이 앉아있던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솔직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보여주신 물건은, 제가 기대하거나 상상했던 모든 범주를 가볍게 벗어나는군요.
그리고 의문이 듭니다.
‘과연 저게 전부일까?’ 하는 의문 말이죠.”
“물론 저건 단순히 3D 작업용 툴일 뿐이고, 리얼 엔진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기능들의 일부는 현재 구현조차 하지 못한 물건들도 있고, 어떤 기능은 기술적인 벽에 막혀서 개발자들을 고생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제가 리얼 엔진을 보고 ‘이것이 게임 엔진의 미래다’라고 확신한 것은, 단순히 지금 보여드린 것처럼 화려하고 재미있는 기능으로 작업을 편리하게 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가 리얼 엔진에서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그 엔진이 추구하는 궁극의 이상 때문이죠.”
“궁극의 이상이요?”
“아이디어만 있다면, 초등학생도 쉽게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리얼 엔진의 개발 의도에 대한 존의 질문에 상혁이 했던 대답이었다.
“대부분의 게임 엔진 제작사들이 주장합니다.
자신들의 엔진은 배우기 쉽고, 성능이 뛰어나며, 범용성이 좋다고.
하지만 실제 게임 제작은 아무리 쉽다 해도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가장 간단한 개발 툴의 일종인 ‘RPG 만들기’ 시리즈로 게임을 만들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고요.
짧은 길이의 간단한 RPG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개발자는 몬스터를 배치하고 경험치 테이블을 만들고 이벤트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캐릭터 직업의 능력치를 결정하며 상점에서 파는 아이템과 몬스터의 드랍 아이템, 그리고 그 아이템의 밸런스 같은 수많은 요소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건 FPS도 마찬가지죠.
사실 게임 개발 과정의 90%에서, 창의력보다는 노가다가 요구됩니다.
아까 모델링 작업의 일부만 보더라도 그렇죠.
원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3D 툴에서 같은 작업을 하려고 했다면, 작업자는 심지어 다른 결과물에서 파츠를 가져다 쓰는 것초차 자료를 찾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했을 겁니다.
직접 깎아서 만들려면 더 오래 걸리고요.
제대로 정리도 되지 않은 수많은 참조 파일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부속을 정확하게 찾아서 잘라 붙이는 건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죠.
하지만 리얼 엔진에서는 다릅니다.
거기서는 AI가 그 지루한 모든 작업을 보조하니까요.
디자이너는 단지 자신이 가진 디자인적 감각을 활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가 조금 더 빛나면 좋겠다던가, 여기는 반투명한 재질이었으면 좋겠다던가.
그럼 AI가 알아서 의도를 알아듣고 작업자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을 보여주죠.
리얼 엔진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딥 다이버나 PRD 같은 오파츠급 성능을 가진 장비에 맞는 전용 게임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멋진 게임을 ‘쉽게’ 만들게 해주는 것에 그 가치가 있는 겁니다.
그것도 다른 회사에서 말하는 ‘쉽다’의 범주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그런 개념에서의 ‘쉽다’를 구현하려는 게 이 엔진의 목적이죠.
저는, 그래서 이 엔진의 캐치프레이즈가 아주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캐치프레이즈요?”
게임 엔진에 캐치프레이즈라니, 허먼은 의아해하며 존에게 물었다.
“아까 제 휴대폰의 영상 파일명을 기억하십니까?”
“‘나한텐 야동보다 더 흥분됨.avi 말인가요?’ 당연히 기억하죠.
세계 10대 개발자의 휴대폰 속 영상 파일 이름이 그 모양인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파일명을 그렇게 지은 건, 실제로 상혁 씨에게 그 캐치프레이즈를 들었을 때 제 전신이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렸기 때문이죠.
그가 말한 캐치프레이즈는, 사실 모든 개발자들의 꿈이나 마찬가지인 말이었습니다.
다들 막연하게 ‘그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구도 시도는 하지 못했던 그런 뻔뻔한 말이었죠.”
“그게 뭡니까?”
허먼의 질문에 존이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상혁이 말한 ‘리얼 엔진’의 캐치프레이즈이자, 엔진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말한 대로, 모든 개발자가 원하고 있지만, 엄두가 안 나 시도도 하지 못하던 ‘뻔뻔함’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아아, 귀찮은 건 전부 남한테 떠넘기고, 난 재미있는 부분만 했으면 좋겠다.”
존의 말을 들은 스튜디오가 정적에 휩싸였다.
세계 10대 개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너무나도 황당한 말이었기에.
허먼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존에게 질문했다.
“그거 대놓고 날로먹고 싶다 이런 뜻 아닙니까?”
“맞죠. 가능하다면 그게 이상적이지 않나요?
허먼 씨. 코딩을 하다 보면, 반드시 제가 아니면 누구도 풀 수 없는 난해한 파트가 있고, 반대로 누구한테 시켜도 비슷하게 작업 가능한 파트도 있습니다.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도 그런 것들은 혼재해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한 모듈을 나눠서 코딩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서로 실수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AI는 다릅니다.
AI는 필요한 상황에서 요구사항만 명확하면 정확하게 필요한 결과물을 찾아서 내놓을 수 있죠.
그러면 저는 재미있는 부분(Fun part)에만 집중한 채 지루한 부분들은 모두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게임 개발이, 비로소 재미있어지는 거죠.
그건 지금까지 어떤 게임 엔진도 이루지 못한 궁극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존 카믹 씨는 항상 기술적 난제에 도전하는 위대한 개발자이지 않습니까?
그 도전을 AI의 도움을 받아서 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으시나요?”
“AI도 불가능한 영역은 있으니까요.
심지어 리얼 엔진에서도, AI는 어디까지나 작업자의 충실한 보조자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어떤 것이 더 나아 보이는지 판단하기 어렵죠.
결국 가장 위대한 결과물은 사람의 창의력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리얼 엔진은, 단지 그 과정에서 감수해야 하는 지루함을 덜어주는 것뿐이죠.”
그렇게 말한 존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허먼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저는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PTW에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본 리얼 엔진의 완성도를 몇십 배로 늘릴 수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지금도 제 머릿속에 계속 떠돌고 있으니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재 존 카믹이 공개한 ‘리얼 엔진’의 영상은 단순히 해당 엔진의 3D 작업 툴을 보여준 것뿐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엔진일뿐더러, 개발 예정인 부분들도 많은 엔진이었기 때문에.
존은 그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아 실제로 게임 제작에 투입되고 있는 파트만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게임 엔진이라는 거대한 툴 모음의 아주 일부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 일부가 담고 있는 ‘의미’는, 전 세계의 시청자와 유저들을 흥분하게 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쉽게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세계.
자신이 원하고 자신에게 가장 매력적인 게임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세계.
‘리얼 엔진’의 진정한 의도는, 바로 세상 모든 게임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말했지만, 이 엔진은 게임 제작이란 개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할 거고요.
이건 세계 10대 개발자인 제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입니다.”
모두가 흥분과 벅참의 미묘한 라인에서 감정의 줄타기를 하는 와중에, 존 카믹은 대놓고 폭탄선언을 날렸다.
그리고 그의 그런 약속은, 전 세계의 게임 커뮤니티와 인터넷 게시판의 게시물 작성량을 몇십 배로 폭발하게 하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