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가상현실
열렬한 환호 속에서 등장한 존 카믹은 스튜디오 중앙에 놓여있는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존 카믹에게 허먼이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바로 그가 새로 이직한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PTW라는 회사를 막연히 동경하는 수많은 팬들에게, 오랜 업계 경력을 가진 존 카믹의 해설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었을 테니까.
“카믹 씨. 카믹 씨는 게임 업계에서 꽤 잔뼈가 굵은 개발자이시죠?”
“업력으로 따지면 꽤 되죠. 아타리 시절 개발자인 1세대를 개발자를 자처하긴 어려워도, 본격적으로 ‘PC 게임’이란 미디어가 등장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저도 1세대 개발자라 부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존 카믹 씨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어떻습니까? PTW라는 회사는.
업계 경력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PTW라는 회사의 첫인상이 꽤나 궁금합니다만.”
“글쎄요. 일단 누가 봐도 특이한 회사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기발하고 독창적인 회사들이 모여있는 실리콘 밸리에서도, PTW만큼 특이한 회사는 찾기 힘드니까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일단 시청자분들이 아시는 것보다도, PTW 내부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수가 엄청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출시하는 게임의 규모 때문에 인력이 특정 프로젝트에 집중되어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지금까지 PTW의 메인 프로젝트들은 ‘어떻게 그 인력으로 저 정도 규모의 개발을 해낸 거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소수정예 팀으로 개발된 게임들입니다.
그리고 그 소수정예팀들이 메인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사이에도, 수많은 개발자가 본인이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 바로 PTW죠.”
“그 말은 저희가 알고 있는 게임 외에도, PTW 내부에서 개발 중인 게임이 엄청나게 많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죠.”
“하지만 실제로 그 프로젝트들의 대부분은 세상에 공개되고 있지 않죠?
그럼 사실 그 고급 인력들의 시간과 노력을 허공에 날리는 셈인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메인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신 거로 아는데, 벌써 ‘우리’라고 하시네요? 적응이 엄청 빠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게임 개발자로서 제가 PTW에서 본 것들은, 제가 바로 직전에 다니던 옵큘러스의 모든 프로젝트에 대한 기억을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거든요.”
“그 정도입니까?”
“PTW라는 회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제가 말을 꺼내는 순간 전 세계의 유저들이 그 게임의 출시를 목이 빠질 정도로 기다리게 만들만한 프로젝트들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그중에서도 가장 보석처럼 반짝이는 혁신적인 프로젝트 몇 가지를 이 방송에서 공개할 예정이죠.”
“개발 중인 프로젝트를 공개하실 생각입니까? PTW에서 그걸 허락했다고요?”
“애당초 저를 이 방송에 출연시킨 게 PTW의 이상혁 CCO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으로 떠나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죠.
‘메인 프로젝트로 진행 중인 게임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면, 존 카믹 씨의 판단에 따라 회사 내부에서 진행 중인 모든 프로젝트의 보안 해제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그 권한을 충분히 활용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료도 준비해왔죠.”
“자료를요?”
보통은 게스트가 쇼에서 보여주고 싶은 자료가 있으면 방송국 측에 미리 데이터를 넘겨주고 내용을 검토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존 카믹은 일부러 자신이 가져온 USB를 방송국에 넘겨주지 않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라이브로 자신이 가져온 영상을 허먼과 함께 보고 싶었기 때문에.
존이 그것을 설명하자, 허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아이디어네요. 아마 평소처럼 자료를 미리 받아 봤더라면 지금쯤 입이 근질근질한 상태였겠지만, 지금처럼 시청자들과 세계 최초로 같은 영상을 함께 보는 것도 두근대는 일인 것 같습니다!
멋진 선물을 가져와 주셨군요!”
“내용은 더 멋질겁니다.”
“그럼 바로 영상을 틀 준비를 하도록 하죠. 자료는 무슨 포맷으로 되어 있나요?”
“간단하게 영상과 사진을 교대로 전환할 수 있도록 PPT 파일로 가져왔습니다.”
허먼은 바로 스텝을 불러 프레젠터를 가져오라고 부탁하고는 존이 가져온 USB를 넘겼다.
그러자 항상 무대의 뒤편에서 방송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스텝들이 무대 위로 뛰쳐나와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묘한 라이브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 방송이 짜인 각본에 따라 미리 조작된 연출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생방송으로 이루어지는 ‘진짜’라는 느낌을.
***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사실은, 제가 지금 보여드릴 물건들이 실제 PTW에서 작업 중인, 혹은 작업 중에 중단 된 프로젝트들이라는 겁니다.
PTW에서는 기본적으로 NE 컨벤션을 위해 CCO인 이상혁이 주도하는 메인 프로젝트와, 그와 동시에 스컹크 웍스나 메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다른 개발자들이 진행하는 서브 프로젝트로 모든 프로젝트를 이원화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중 서브 프로젝트는 개발자의 개인적인 목표나 실험적 도전을 위해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이죠.
어떤 개발자는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19금 에로 게임을 제작하기도 하고, 어떤 개발자는 절대 출시가 불가능할 것 같은 물건에 개발력을 쏟아붓곤 합니다.
회사 돈으로 고액의 연봉을 받는 능력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상부의 예산 허가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진행하는 모습은, 여타 회사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죠.”
“잠깐만요. 지금 그 말은, PTW에서 개발자가 신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상부 승인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PTW는 기본적으로 모든 프로젝트가 등록제니까요.
워크 패스트를 통해서 자기가 하려는 프로젝트에 대해 간략한 개요를 입력하면 바로 총무팀에서 카드를 한 장 가져다줍니다.
그걸 PTW 직원들은 ‘프로젝트 카드’라고 부르더군요. 그걸 받아서 그 카드를 가지고 외주를 주든, 아니면 장비를 구매하든 예산의 사용은 개발자 개개인의 의향에 철저하게 맡기고 있습니다.
원하는 컨셉 일러스트를 뽑기 위해서 외주 원화가에게 수백 수천만원을 외주비로 지급해도 그 모든 작업이 등록한 프로젝트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PTW에서는 직원에게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아요.”
“예산 낭비가 엄청날 텐데요?”
“하지만 상혁 씨 이야기로는 그 덕에 MYOM 이라는 희대의 게임을 개발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존 스캇은 MYOM의 숨겨진 개발 비화에 대해 털어놓았다.
상혁이 코넥트의 개발을 위해 뽑은 인력들이, 코넥트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멋대로 마법 시뮬레이터를 제작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회사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뛰어난 성능을 가진 장비를 만들어 냈는지.
그것은 상혁이 모르는 사이에 순수히 개발자들의 호기심과 의욕에서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코넥트의 부속 장비인 핸드 트래커는 상혁이 주문한 장비가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든 장비가 된 거죠.
그리고 MYOM의 개발자들은 거기에 더해 마나 엔진의 기초 데이터를 이룬 수많은 마법 설정들을 외부에서 멋대로 끌어왔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만들고, 오컬트 매니아들을 모아 코넥트의 프로토 타입을 선물하며 그들로 하여금 마법 체계를 연구하고 관리하며 완성하게 했죠.
현재 그 각 커뮤니티 담당자들은 PTW에서 ‘탑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마스터 급 직원으로 일하고 있고요.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임원들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PTW에서 자신만의 신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개발자들은 더 이상 회사의 시간을 몰래 빼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상혁 CCO가 등록만 하면 그게 메인 프로젝트와 관련없는 개인 프로젝트라도 회사 자금으로 진행할 수 있게 시스템을 바꿨기 때문이죠.
그리고 지금, PTW의 개발자들은 그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터무니없는 물건을 만들어 내고 있고요.”
그렇게 말한 존 카믹은 들고 있는 프레젠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스튜디오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조지 마틴이 개발한 체감형 VR 시스템의 사진이 띄워졌고, 그 기괴한 모습을 본 허먼과 관객들은 ‘X발 저게 뭐야!?(What the fuck is that?)’라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존이 스크린에 띄운 장비는, 좋은 말로 해도 도저히 게임과는 아무 상관 없는 괴상한 장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게임을 떠나서 그 장비의 외형은 대체 저걸로 뭘 하려는 것인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첫 이미지부터 충격적으로 시작하는군요. 대체 저게 뭡니까?”
허먼이 질문하자 존이 웃으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저건 PRD라고 하는 장비입니다.
스컹크 웍스 멤버인 조지 마틴 씨가 개발한 장비고, 정식 명칭은 ‘물리법칙 현실화 장비(Rhysics Realization Device)’즉, PRD라는 이름의 장비죠.”
“이름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VR 환경에서의 가상 3D 오브젝트가 주는 물리적 특성을 사용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장비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VR 공간에 있는 가상 물체를 유저가 직접 만질 수 있게 하는 장비죠”
허먼은 존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게 가능합니까?!”
“저도 저 장비를 보기 전엔 상상조차 못 했는데, 가능하더군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허먼 씨. 인간이 물체를 만질 때, 기본적으로 전달받을 수 있는 감각엔 어떤 게 있을까요?”
존이 질문하자 허먼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일단 바로 떠오르는 건 무게감이라던가, 촉감이라던가, 온도감이라던가, 단단함 같은 게 있네요.”
“그중에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힘든 촉감과 온도감을 제외하고, 무게감이나 단단함에 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예를 들어 야구공을 손에 쥐었을 때, 사람의 손가락은 이렇게 야구공 크기를 중심으로 구를 감싸는 듯한 모양이 되겠죠?”
존이 손을 오므려 공을 쥐고 있는 듯한 모양을 만들자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 손에 쥐어진 물건이 말랑말랑한 물건이라면, 제 손가락은 비교적 낮은 저항을 하고 이 구체 안쪽으로 파고들어 갈 겁니다.
반대로 야구공처럼 단단한 물건이라면, 제 손가락은 안쪽으로 더 이상 구부러지지 않겠죠.
제가 밖에서 누르는 힘과 같은 반발력을 가지고, 안에서 야구공이 제 손을 밀어내고 있을 테니까요.
우린 이것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PRD는, 기본적으로 손목에 달린 장치를 통해서 손바닥 쪽에 위치한 작은 판들을 가느다란 탄소 섬유로 조작하는 장비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강제로 손바닥을 펴게 만드는 장비라고 할 수 있죠.
자, 이제 제가 VR 공간에서 가상의 야구공을 쥐고 있다고 칩시다.
그럼 PRD는 제 손바닥의 판들과 연결되어있는 실들을 야구공이 가진 강성에 해당하는 강도로 잡아당깁니다.
밖으로는 펴지지만, 손가락이 야구공 안으로는 파고들지 못하게요.
그런 방식을 통해서, PRD는 손가락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과 없는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3D 공간의 물체를 만질 수 있게 해 주는 거죠.”
허먼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가상 현실 안에 있는 물건을 만질 수 있게 하는 기술.
그것이 VR이라는 컨텐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물건인지를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나 허먼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존은 나머지 설명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다음은 무게감을 이야기해 봅시다.
방금 전 제 손에 들고 있던 야구공을, 강철로 된 야구공이라고 가정하죠.
제가 팔을 휘둘러 야구공을 던지려 할 때, 만약 그것이 가벼운 물체라면 제 팔은 별 저항감 없이 부드럽게 뻗어 나가 물체를 집어 던질 겁니다. 그렇죠?”
허먼이 고개를 끄덕이자 존이 다시 말했다.
“반면에 제 손에 쥔 물건이 매우 무거운 금속으로 된 야구공이라면, 저는 그걸 휘두르는데 팔에 힘을 더 줘야 할 겁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저항감도 더 클 거고요.”
“그렇죠.”
“바로 그게 무게감이라는 개념의 본질입니다.
저희가 만지고 움직이려 하기 전에는, 아무런 감각도 전달해주지 않지만, 그것을 움직이려 하는 순간에 신체에 전달되는 반발력.
그것이 무게감의 정체죠.”
“그럼 그 무게감은 어떻게 구현합니까?”
“단단함을 구현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구현합니다.
PRD가 단단함을 재현하기 위하여 손바닥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처럼, 무게감을 위해서는 온몸의 움직임을 통제하게 하면 되는거니까요.”
허먼은 그제야 저 기괴한 장비의 디자인이 왜 저런 식으로 구현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신체 전체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해선, 지금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엄청나게 많은 ‘줄’이 필요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 검은 줄들은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사람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장비인 거군요?”
“그렇습니다. 대당 2억 7천만 원짜리 인형 조작 장치죠.”
장치의 성능도 놀라웠지만, 장치의 가격은 더 기겁할만한 가격이었다.
일반 사용자라면 절대 손도 닿지 않을 금액의 장비 가격을 들은 허먼은 기겁하며 존에게 질문했다.
“2억 7천이요? 뭐 그리 비쌉니까?”
“생각해보세요. 단순히 줄을 당겨서 고정하는 정도로는 제대로 된 감각을 전달할 수 없죠.
정확히 현실의 사물을 만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전달하려면, 유저의 움직임에 따라서 모터가 적당한 장력으로 줄을 풀어줘야 합니다.
그것도 전신에 연결된 모든 근육의 움직임을 동시에 통제하면서요.
왼팔은 무겁게 움직이면서도 오른 팔은 자유롭게 풀어져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줄끼리 서로 꼬이지 않도록 남는 줄을 적절한 길이로 회수해 줘야 합니다.
만약 저항감이 필요 없는 구간이라면, 움직임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힘을 약하게 전달해야 하고요.
그래서 PRD는 사람마저 공중에 띄울 수 있는 출력의 대형 모터 20개와 부드러운 저항감을 전달할 수 있는 수백개의 서브 모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모든 모터에 연결된 줄들이, 사용자가 입은 슈츠 안쪽에 연결된 복잡한 도르레 장치와 맞물려 정교하게 근육의 움직임을 통제하죠.
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슈트는, 사실 알고 보면 인류가 가진 기계 기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건 내부가 거의 아이론 맨 슈트 수준으로 복잡한 장비예요.
인간이 가진 복잡한 근육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내부 부속들이 들어가 있는 특수 복장입니다.
실제로 저 슈트 한 벌을 설계하기 위해서 개발자인 조지 마틴은 무려 파텍 필립의 시계 설계팀에게 협력을 받았습니다.
한없이 복잡한 기계식 시계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작하도록 설계하는 그들의 능력이 있어야, 이 슈트를 제대로 동작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거죠.”
“양산이 시작되면 가격이 내려갈 거라고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저도 그 점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장비가 가진 성능은 놀라움의 극치긴 해도, 대당 억대의 장비를 VR 게임하려고 구매하긴 어려울 테니까요.
무엇보다 장비 크기가 너무 커서 일반 가정집 거실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뭐, 저는 지금까지 항상 오파츠급 성능과 말도 안 되는 가성비의 장비를 내놓은 PTW이기에, 반드시 납득할 만한 크기와 가격을 갖춘 장비가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 해 보겠습니다.”
“10억 달러의 사나이이자, 세계 10대 개발자 중의 한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음이 가네요.”
그렇게 말한 허먼은 문득 의문점이 생겨 존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존 카믹 씨.”
“예.”
“뭐랄까, PRD는 PTW에서 개발된 장비라고 생각하기엔 조금 이질적인 면이 있는 것 같은데, 존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질적이라면?”
“바야흐로 지금은 PTW의 시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코넥트에서 딥 다이버로 이어진 PTW의 주변기기 라인 업은 전 세계 콘솔 게이머들의 거실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죠.
그리고 그 모든 기기는, 항상 해당 세대의 게임 콘솔과 함께 하는 기기였습니다.
그런데 저건 크기부터 시작해서 현세대 콘솔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를 가볍게 넘어서는 것 같군요.
아무리 크기가 줄어든다고 해도, 사용자의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싼 방식으로 동작하는 PRD의 크기는 가정용 주변기기라기보다 VR 센터의 체감형 아케이드 설비에 어울리는 크기 같습니다.
그리고 딥 다이버나 옵큘러스가 추구하던, ‘VR의 대중화’라는 목표와도 너무 먼 물건처럼 보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저런 장비를 구현한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그러자 존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먼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저도 PTW에서 이 장비를 처음 보았을 때, 그 구조와 발상에 경악한 이후로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 그거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장치의 개발자인 조지 마틴 씨는 그런 저에게 이 장치가 가지는 진정한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PTW나 옵큘러스가 추구하는 ‘VR의 대중화’라는 목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죠.
그의 설명을 듣는 순간, 저는 이 장비의 가격이 얼마가 되든 게이머가 무조건 이 장비를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단지 3D 공간의 사물을 만지기 위해서 2억 7천만 원짜리 장비를 사게 만드는 이유라···. 대체 그게 뭡니까?”
허먼의 질문을 들은 존 카믹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객석의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존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장비가 가진 진정한 ‘가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듣기 위하여.
그리고 잠시 후, 할 말을 정리한 존이 깊게 심호흡한 뒤 허먼을 향해 말했다.
“허먼 씨.”
“예.”
“혹시 이런 상상 해보신 적 있습니까?
안에 있는 모든 오브젝트를 실제로 만질 수 있는 가상의 게임 공간에서, RPG를 하는 상상이요.
손에 들린 묵직한 검을 휘두르면서, 몬스터와 싸우고 레벨 업을 하는 게임 말입니다.”
“당연히 있죠. 그건 모든 게이머의 꿈 같은 거니까요.
그렇기에 ‘쉴드 아트 온라인’같은 가상 현실 게임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대 히트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 멋진 상상에는, 기본적인 문제가 하나 존재합니다.
게임 속 캐릭터의 신체 능력과, 실제 유저의 신체 능력엔 차이가 있다는 거죠.
게임 안에서 스테이터스 시스템을 통해 아무리 힘을 올려도, 현실의 육체가 강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모션 인식으로 ‘철권’을 플레이하려고 했더니 다리가 안 올라가서 계속 중단과 하단 차기만 했다는 일화도 있고요.
그렇게, 현재의 VR 기술은 가상 공간을 다루고 있음에도 현실 유저의 피지컬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PRD는, 그것을 극복해서 진정으로 가상 현실 세계의 ‘스테이터스’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장비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PRD는 전신의 근육과 연결된 수많은 탄소 섬유 라인의 장력을 조절하여 무게감과 단단함을 구현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가상 공간에서 20㎏짜리 물체를 집어 들려고 하면, PRD는 정확하게 20㎏짜리 물체를 들 때 느껴지는 힘의 강도로 제 움직임을 통제하죠.
그리고 그 말은, 역으로 제가 가상 공간에서 제 힘을 두 배로 설정하고 20㎏의 무게를 집어 들으려 할 때 10㎏만큼의 힘만 가해지도록 설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 힘이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되죠.
게다가 PRD에 연결된 모든 컨트롤 라인은 양방향으로 동작합니다.
쉽게 말하면 근육을 잡아당기는 것뿐만 아니라, 반대 방향에서 잡아당겨 마치 미는 것처럼 동작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죠.
제가 민첩성 수치에 능력치를 투자하고 PRD를 장착한 채 가상 세계에서 뛰어다닌다고 하면, PRD는 제가 현실에서 움직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동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번개 같은 동작이나, 비정상적인 점프의 체공 시간, 원래라면 튕겨 나가야 할 강력한 충격을 한 손으로 막는 것 같은 ‘판타지스러운’ 일들이 모두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죠.
PRD를 입으면, 사용자는 가상 공간에서 땅을 가르고 바위를 던지며 진짜로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힘을 올리면 실제로 가상 공간에서의 물건들이 가볍게 느껴지고, 민첩을 찍으면 정말로 몸이 빠르게 움직이며, 체력을 찍으면 오래 움직였을 때 몸이 지쳐서 무거워지는 패널티가 적어지는 식으로.
정말로, 인류가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가상 현실이 ‘진짜’ 현실이 되는거죠.”
존이 말한 ‘아이디어’는, 허먼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것은 VR이란 컨텐츠의 기본 접근 방향마저 뒤집은 발상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VR이란, 가상의 공간에 현실의 유저가 개입하는 것을 전제로 개발된 컨텐츠였다.
현실의 육체를 움직여 가상 공간의 광선검을 휘두르고, 현실의 육체를 움직여 가상 공간의 테니스 채를 휘두르는 식으로.
그리고 그것은 손에 쥔 컨트롤러의 무게를 제외하면 현실의 육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PRD라는 장비는 그런 VR 장비의 기본 상식을 뒤집는 장비였다.
게이머가 게임 안에서 찍은 스테이터스의 변화를, 현실의 육체에서 바로 느낄 수 있는 장비가 바로 PRD라는 장비였기 때문에.
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진정한 가상 ‘현실’의 구현.
그 압도적인 가능성 앞에서, 장비의 가격이 얼마든 간에, 그것을 보고 흥분하지 않을 게이머는 없을 테니까.
허먼은 가상 세계에서 레벨을 올리고 능력치를 올려 몬스터와 싸우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마치 ‘쉴드 아트 온라인’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리고 허먼은, 만약 정말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은 기꺼이 2억원이 넘는 돈을 낼 생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존이 말한 ‘스테이터스의 구현’이란 개념은, 그 정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허먼은 존에게 물었다.
“카믹 씨.”
“예.”
“지금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이 장비가 앞으로 더 발전하면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지금 구현 되어 있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실제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전달되는 느낌도, 현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고요.
남은 건 장비 크기를 소형화시키면서 가격을 어느 수준까지 떨어트릴 수 있느냐의 문제죠.
그리고 이 기술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한 제가, 여러분께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게 한가지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 전까지 다녔던, 그때만 해도 VR 기술의 선구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옵큘러스’를 떠올리며, 존이 말했다.
“적어도 이 장비가 발매되는 순간, 다른 VR 장비는 전부 말라 비틀어진 오징어처럼 보이게 될 거라는 것을.”
존은 확신하고 있었다.
적어도 소설 속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에 쓰는 것만으로도 가상 세계의 감각을 전부 전달해주는 그런 장비를 가져오지 않는 이상은, PRD를 능가하는 VR 장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