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PTW LAB
“PTW LAB···.”
존 카믹이 중얼거렸다.
상혁이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결정이 가져올 파급효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던 존 카믹은 상혁을 보며 질문했다.
“상혁 씨.”
“예.”
“전 이제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외부인입니다. PTW의 직원들이, 그런 저를 잘 따라 줄까요?”
그런 존 카믹의 질문에,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개발자가 그 자리를 맡는 것보다는 낫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PTW의 게임들을 떠올려보세요. 저희 게임들은 대부분 10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게임들이죠.
물론 출시 당시에는 그 정도가 아니었지만, 신작이 나올 때마다 구작 판매량이 올라가면서 지금은 평균적으로 그 정도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말은, 저희 PTW의 직원들 대부분이 지금까지 계속 밀리언셀러 이상의 판매 고를 기록한 프로젝트에서 일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직원들 개개인이 PTW라는 회사에 가지는 자부심과 긍지도 엄청나죠.
생각해보세요. 존 카믹 씨 급의 개발자가 아니라면,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책임자가 지구상에 몇이나 있을지.
적어도 성과가 아니라 이름만으로 납득할만한 수준의 개발자가 아니라면, 신규 레이블의 운영을 맡기는 건 무리죠.”
“무슨 의미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럼 한 가지 더 질문하죠. PTW LAB는, 어디까지나 PTW의 하위 레이블인 겁니까? PTW의 이름으로 정식 발매되기엔 스케일이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참신하고 자신만의 재미를 가진 그런 프로젝트들을 발굴하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무슨 의미입니까?”
“그건 존 카믹 씨가 잡는 방향에 따라 다를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존 카믹을 향해 말했다.
“결국 PTW든 PTW LAB이든,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은 개발자 풀을 공유하고, 같은 자본을 공유하죠.
사실 직원 소속도 딱히 구분을 두지 않을 생각입니다. PTW의 프로젝트에서 일하다 자유롭게 PTW LAB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도 있고, 그쪽에서 일손이 남는다면 이쪽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도 있겠죠.”
“실제로는 하나의 회사처럼 굴린다는 의미로군요. 그럼 레이블 구분이 딱히 의미가 있나요?”
“유저에겐 의미가 있죠.”
상혁이 말했다.
“기본적으로 PTW팬들은, PTW의 게임들에 특정한 감성을 기대합니다.
예를 들면 몇 회차를 하더라도 매번 새로운 느낌의 플레이라던가, 혹은 회차가 거듭할수록 증가하는 회차 특전, 그리고 최소 수백 시간 이상을 요구하는 플레이 타임, 런칭 타이틀로 발매되었음에도 해당 세대의 콘솔이 가진 성능의 한계까지 뽑아낸 퍼포먼스 등이죠.
말하자면 그냥 아무 고민없이 PTW라는 이름만 붙어있으면 믿고 산다는 소리죠.
그 게임이 설사 자신이 지금까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장르의 게임이라 하더라도요.”
“하긴, PTW의 게임들은 항상 장르를 바꿔가며 새로운 시도를 하곤 했었죠.
그래도 언제나 말씀하신 부분들은 만족하는 게임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문제는 장르에 따라서 그런 조건을 채우는 게 불가능한 게임들이 있다는 겁니다.
무작정 퍼포먼스를 올린다고 좋은 게 아닌 게임들이 있죠.
어떤 게임들은 최고의 그래픽과 깊이 있는 플레이를 가지고 있어서 좋은 게임들이 있는 반면에, 어떤 게임들은, 분명 심플해야 좋은 부분들이 있는 게임들이 존재하니까요.
혹은 지나치게 장르 특성에 집중한 나머지 유저 풀이 좁다던가.”
상혁의 말을 듣자마자 존 카믹의 머릿속에 한 개의 게임이 떠올랐다.
분명 장르가 가져야 할 특징을 최대로 극대화 시킨 게임이긴 하지만, 역으로 그 압도적인 공포감 때문에 진입 장벽이 생겨버린 ‘딥 다이버’를.
“그렇죠. 아무리 공포감을 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게임이라도, 그게 한도를 넘어서면 아예 손도 대기 겁날 정도로 무서운 게임들이 있으니까요.
너무 잘 만들어서 유저 풀이 좁아진다는 건 아이러니하군요.”
“매운 것도 적당히 매워야지 한도를 넘어서면 그냥 아플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안 무섭게 만들면, 게임 자체의 아이덴티티가 흔들리죠.
결과적으로 딥 다이버는 지금 그대로 가는 게 가장 좋은 형태일 겁니다.”
“그로 인해 판매량이 줄어든다 하더라도요?”
“판매량은 줄어들지 몰라도, 적어도 최고의 공포를 체험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멋진 게임이 되지 않겠어요?”
상혁의 말은, 존 카믹에게 어느정도의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게임이라도 그가 발매를 해주기를 원한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PTW LAB의 ‘LAB’은, 그런 의미였군요.”
“맞습니다. 설사 손해를 보더라도, 실험적인 도전을 통해서 게임이 가진 포텐셜의 한계를 시험해보자는 거죠.”
“그럼 자연스레 유저들은 PTW LAB의 마크를 ‘실험적인 타이틀’에 붙는 브랜드로 인식하겠군요.
그로 인해 어느정도 상업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라도, 자신의 선택이니 기꺼이 감수할 테고요. 대충 어떻게 굴리려는 것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상혁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제 계획에 흥미가 있으신가요?”
그러자 마치 상혁을 따라 하듯, 존 카믹 역시 커피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며 상혁에게 말했다.
“흥미요?”
그리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글쎄요. 아마 제가 PTW 내부 투어를 하기 전, 그러니까 PTW로의 이직이 결정된 직후에 그 제안을 하셨다면, 저는 아마 거절했을 겁니다.
상혁 씨가 지금 저에게 하신 제안은, 말하자면 PTW의 정규 레이블로 발매하기 어려운 타이틀들을 다듬어 발매하라는 일종의 ‘짬 처리’처럼 들렸을 테니까요.”
“이전에 들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거란 소리는, 지금은 다르다는 이야기겠군요?”
“그렇죠.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빛을 볼지 모르는 보물들을 보았으니, 생각도 바뀔 수밖에요.”
“좋습니다. 그럼 받아들이신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좋습니다. 아직 업무 적응도 제대로 하기 전에, 이직하자마자 매우 중요한 포지션을 맡게 되니 조금은 부담되지만.”
존의 말을 들은 상혁이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별명이 10억 달러의 사나이인데 그 정도는 하셔야죠.”
***
상혁과의 면담 이후, 존 카믹이 가장 먼저 실행한 행동은 바로 자신의 신규 레이블 런칭을 위한 특별팀(Task Force, TF)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물론 진행 중인 프로젝트 중에서 존 카믹이 신규 레이블의 런칭 타이틀로 점찍어둔 프로젝트들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프로젝트들이 바로 출시할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설의 개발자 존 카믹이 이끄는 특별 프로젝트.
거기에 기존에 모두가 아쉬워하던 사내 프로젝트를 재발굴하여 새 레이블로 런칭한다는 소식은 많은 직원들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 덕에 존 카믹은 능력자들로 구성된 자신만의 특별팀을 어렵지 않게 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멤버 중에는, 존 카믹의 PTW 내부 투어 때 깊은 인상을 남겼던 프로젝트의 책임자도 있었다.
“전에 한 번 뵀었죠? VR 공포게임 프로젝트 ‘딥 다이버’의 리드 기획자, 미야모토 카렌입니다.”
카렌이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자, 존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마주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왼쪽 의자를 당겨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며 말했다.
“혹시 그때 제가 지르던 비명을 들으셨나요?”
“이 게임 개발자 찾아서 죽인다는 그 비명이요?”
“그건 죄송했습니다.”
“아뇨. 이해합니다. 사실 기획자인 저도 무서워서 테스트 플레이를 거의 안하고 개발한 거거든요.
어차피 제가 테스트할 게 아니니, 미친 듯이 괴로울 만한 기믹으로 가득 채웠었죠.
원망을 사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기뻤습니다.
공포 게임인 딥 다이버를 개발한 당사자로서 개발자를 죽이고 싶다는 비명을 들으니 마치 칭찬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10억 달러의 개발자 존 카믹 씨는 신규 레이블의 런칭 타이틀로 뭘 생각 중이신가요?
일단 딥 다이버는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으니 확정일 거고, 나머지 프로젝트들도 궁금하네요.”
카렌의 질문을 들은 존은 미리 인쇄해서 철해둔 기획서를 카렌에게 넘겨 주었다.
“부시 크래프트 서바이벌?(Bush Craft Survival?)”
“모르는 프로젝트입니까?”
“워낙에 내부에서 만들다가 접힌 프로젝트가 많아서요.
그래도 어느정도 개발상황이 진척된 프로젝트들은 전부 알고 있는데, 제가 모르는 걸 보니 거의 초기 단계 프로젝트 같은데요?”
존 카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떤 프로젝트죠?”
“제목이 의미하는 대로, 야생 생존 게임 장르에 VR을 이용한 부시 크래프트를 접목한 게임이죠.”
“일반적인 생존 게임과 다른 점이 있나요?”
“다르죠. 아주 다릅니다.”
존이 말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생존(Survival)이란 주어진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부시 크래프트는 생존보다는 크래프트, 즉 제작에 좀 더 비중을 둔 캠핑 방식이라 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생존이 목적이면 굳이 굵은 나무를 구해다가 안에서 살 수 있는 베이스 캠프를 구축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캠프 구축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크니까요.
반면에 부시 크래프트는 조금 더 야생에서의 삶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편입니다.
어떤 도구를 만들었냐 보다는, 그 도구를 얼마나 잘 만들었느냐에 포인트를 두는 레저활동이죠.”
“그걸 VR로 구현한다고요?”
“놀랍게도 이미 해 놨습니다. 그리고 그건, 기존의 생존 게임과는 조금 많이 다른 느낌이었고요.
뭐랄까, 조금 독특한 면이 없진 않지만, 전 마음에 들더군요.”
그렇게 말한 존은 카렌을 보며 말했다.
“미야모토 양도 한번 테스트해 보시겠어요?”
***
카렌은 존을 따라 테스트 쳄버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호버 부츠를 착용하고는 딥 다이버를 뒤집어썼다.
“세팅 다 되면 알려주세요.”
그녀가 말하자 한쪽에서 개발용 콘솔 킷을 조작하던 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후 그녀를 향해 외쳤다.
“다 끝났습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시작하기 전에 먼저 경고드릴게 있습니다.
아까 미야모토 양도 말씀하셨다시피, 이 빌드는 딥 다이버처럼 퀄리티 높은 테스트 버전으로 빌드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아마도 이 빌드를 플레이하며 겪을 첫인상은 매우 실망스러울 겁니다.”
“첫인상보다 게임 플레이에 집중해달라는 이야기죠? 잘 알겠습니다.”
그녀가 대답하자 존이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개발용 콘솔에 연결된 노트북을 조작해 테스트 빌드를 구동시켰다.
[프로그램 로드 - Bush Craft Survival 기동 중]
순간 그녀 앞에 펼쳐진 테스트 챔버의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게임 화면이 로드되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 그녀의 앞에 있는 풍경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첫인상에 실망하지 말라고 했구나.’
카렌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앞에 펼쳐진 가상세계를 바라보았다.
딥 다이버의 놀라운 성능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 그대로 ‘개발 중인 빌드’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한 그래픽을.
그것은 마치 폴리곤으로 이루어진 숲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적어도 텍스쳐 정도는 가볍게 작업해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도 컬러는 설정되어 있으니 뭐가 나무이고 뭐가 흙인지는 알 수 있잖아요?”
카렌이 투덜거리는 말에 존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렌은 그런 존의 말을 듣고는 살짝 미소지으며 그에게 질문했다.
“일단 지금 숲 안인 것 같은데, 튜토리얼도 없고 UI도 잘 모르겠네요. 뭘 하면 되죠?”
“우선 근처에 캔버스 백이 하나 놓여 있을 겁니다. 그걸 찾아서 열어보세요.”
그녀는 존의 지시를 따라 이동해 캔버스 백을 찾았다.
그리고는 다시 질문했다.
“열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그냥 백 열 듯이 열면 됩니다. 손으로 잡고 벌리세요.”
“예?!”
카렌은 놀란 목소리로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 ‘가방을 여는 행위’가, 가상 공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브젝트 셰이프(object shape)를 손으로 조작할 수 있다고요?”
“예. 그게 이 게임의 핵심이니까요.”
그녀는 투박한 폴리곤으로 표현된 캔버스 가방의 입구에 자신의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양쪽 입구를 잡고 벌리자, 마치 진짜 가방처럼 캔버스 백의 형태가 일그러지며 안의 내용물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오, 이건 좀 인상적이네요.”
“그렇죠? 저는 실제로 만지고 조작할 수 있는 ‘가방’을 가상세계에서 구현한다는 발상 자체가 좀 기발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놀라긴 일러요. 이 게임의 플레이는, 진짜로 플레이어를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만들기에 충분하니까.”
그렇게 말한 존은 다음 지시를 내렸다.
“캔버스 백 안에 있는 나이프를 꺼내세요.”
카렌이 칼을 집어 들자, 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근처에 있는 나무 중에 적당한 굵기의 나무를 찾아서 아랫부분을 칼로 내려치세요.”
그 순간 그녀는 존 카믹이라는 세계적인 개발자가 어째서 이 허접한 그래픽을 가진 게임에 매료되었는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개발자들이, 어떤 기술적 도전을 위해 이 빌드를 만들었는지도.
그들은 VR이라는 가상의 세계에, 유저가 직접 만지고 그 형태를 조작할 수 있는 오브젝트를 구현하려 한 것이었다.
“잔가지를 칼로 다듬어요.”
“아랫부분을 깎아서 날카롭게 만드세요.”
“그걸 바닥에 꽂아서 기둥으로 삼고, 천장이 될 다른 얇은 가지들을 구해서 삼각형으로 만드세요.”
“이제 넓은 이파리를 구해서 그 위에 얹으면 됩니다.”
테스트 빌드가 주는 경험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게임 안의 모든 오브젝트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서 그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녀는 단단한 나무 기둥을 칼로 깎고, 마른 나무 두 개를 서로 마찰시켜 불을 일으키고, 그 불에 자신이 직접 만든 창의 끝을 그을려 단단하게 강화했다.
현실에서 가상의 사물을 의지대로 조작하는, 그 특이한 경험에 감탄하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이 프로젝트를 추천한 존에게 말했다.
“확실히, 일반적인 생존 게임이었다면 UI 버튼 몇 개 눌러서 끝날 일을 일일이 직접 손으로 한다는 건 굉장한 경험이네요.
생존을 위해 내가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기분이에요.”
“더 놀라운 건 실제로 유저가 만드는 도구의 모양새나 재질에 따라서 완성된 툴의 능력치가 변한다는 겁니다.
캠프를 만들 때도, 단단하지 않은 나무를 골라서 기둥을 세우면 지붕의 무게를 못 이겨서 나무가 부러지죠.
불을 피울 때도, 제대로 마른 나무를 구해서 마찰시키지 않으면 불이 붙지 않고요.
분명 이 게임은 다른 게임에 비해 유저가 만들 수 있는 생존 도구의 폭은 매우 제한된 게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직접 재질을 선택하여 형태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도구를 유저가 직접 쓰는 경험은 놀라운 경험이라 할 수 있죠.
전 이 게임이 저희 PTW LAB을 위한 두 번째 런칭 타이틀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생존 게임의 형태를 갖추려면 엄청나게 많은 추가 개발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요.”
그러자 열심히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모닥불 안에 집어 던지던 카렌이 행동을 멈추고는 딥 다이버를 벗어들었다.
그리고는 존을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그리고 개발 과정에서 이 테스트 빌드가 전달하려는 방향성을 잃지 않고 충실히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이건 굉장히 좋은 게임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문제는 이 프로젝트를 누가 개발한 것인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른 프로젝트와는 다르게, 이건 진행자 이름도 공백처리 되어있고 참가 인원도 적혀 있지 않았어요.
아마도 이 정도로 복잡한 물리 엔진을 구현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그 사람을 데리고 개발을 진행해야 할 텐데, 정보가 없으니 그 사람이 누군지 찾을 수가 없네요.”
“프로젝트 참가자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럼 오히려 찾기 쉽네요. PTW의 게임 개발자들은 워크 패스트의 업무 진행 프로세스를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니까, 그걸 빼먹었다면 아마도 게임 개발팀이 아닌 다른 개발팀에서 진행했다는 이야기일 테니까요.”
“다른 개발팀이라면?”
“PTW 내부에 있으면서, 이 정도 수준의 말도 안 되는 물리 엔진을 구현해놓고, 프로젝트 참가자 명단은 작성조차 안 할만한 사람들이 누가 있겠어요? 당연히 스컹크 웍스 멤버들이죠.”
“스컹크 웍스라면 그 민준 씨 산하에 있는 기술자 모임을 말하는 겁니까? STC를 제작한?”
“맞아요. 솔직히 이 정도 수준의 물리 엔진을 구현할 사람들이라면, 스컹크 웍스 멤버 말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게다가 그들이 이 경이로운 물리 엔진으로 만든 이 허접한 게임 시스템을 보세요.
이건 게임이 아니라 거의 테크 데모(Tech demo)에 가깝잖아요?
아마도 그건 스컹크 웍스 멤버들이 기술적인 실험을 위해서 만든 물건이지, 게임을 위해서 만든 물건이 아니라서 그런 거일 거예요.”
“확실히.”
카렌의 말을 들은 존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했다.
“문제는 스컹크 웍스는 기본적으로 작업의 자율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 사람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일하지 않아요.
PTW에서 진행하는 메인 프로젝트들에도 본인들이 흥미가 있으면 참가하고, 아니면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죠.
만약 존 카믹 씨가 그들이 만들다가 버려둔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싶으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게임이 완성되었을 때 얼마나 매력적인 형태가 될 것인지를 그들에게 설명하는 일일 거예요.”
“만약 설득에 실패한다면?”
“혹시 본인이 이 물리 엔진의 소스코드 전체를 다 파악해서 뜯어고칠 자신 있으신가요?”
“가능이야 하겠지만,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겠죠.
레이블 런칭을 한없이 미룰 수도 없으니, 제가 그 작업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요.”
“그럼 최대한 설득해보고 안 되면 다른 프로젝트를 골라야 할 거예요.
애당초 이 물건은 이 물건을 만든 개발자의 도움 없이는 완성할 수 없는 물건 같으니까.”
그러자 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렌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하나겠군요.”
“뭘 하려고 하시는 거죠?”
“민준 씨를 만나러 갈 겁니다. 전 무조건 이 게임을 PTW LAB의 런칭 타이틀로 만들 생각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존 카믹의 눈은, 자신이 찾아낸 보물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개발자의 탐욕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