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쥐와 고양이
일반적으로 회귀물 소설에서 회귀전의 지식을 이용하여 주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내용이 나오곤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주식 투자에 대한 명확한 근거 없이 미래 지식이라는 불명확한 논리를 바탕으로 주식 시장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면 SEC의 양복 입은 검사 아저씨들이 내부 정보 유출 등으로 소송을 걸기 때문에.
실제로 2003년에 월가의 전설로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자신을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앤드류 칼슨이라는 투자자가 단 2주 만에 126회의 주식 매매를 통해 800달러를 3억 5천만 달러로 만들어놓은 사건이 있었다.
그 모든 종목들은 예측하기 힘든 신기술 개발이나 인수 합병 등을 이유로 폭등했고, FBI에서는 누군가가 내부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그런 식의 투자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그를 체포했다.
그러자 FBI에 체포된 앤드류 칼슨은 자신이 2256년에서 온 시간 여행자이기 때문에 그런 투자가 가능했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FBI는 그를 뉴욕시에 있는 감방에 가둬버렸다.
사실 ‘시간 여행자’ 앤드류 칼슨의 이야기는 만들어진 가짜 뉴스지만, 실제로 미국 증권 시장의 감시체계를 보여주는 좋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담보할 수 없는 증권 시장에서 가장 확실하게 수익을 낼 방법은, 바로 내부 정보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일반에 공개되기 전에 내부 정보를 받아 주식 투자에 활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고,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무언가 엄청난 신제품을 발표하기 직전에 주식을 왕창 구매하고, 발표 이후에 주식을 판다면 아무 리스크 없이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까.
현재 PTW와 MS에 걸린 혐의는 바로 그것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상혁 씨. 저는 미 증권 거래 위원회(SEC) 국장 조지 벤자민입니다.”
“국장급이 나설만한 일인가요?”
“사안이 워낙 커서요. 그리고 저희만 나온 것도 아니고요.”
“옆에 계신 분들은?”
“상품 선물 거래 위원회(CFTC, Commodity Futures Trading Commission)국장 고든 존스.
금융산업감독규제위원회(FINRA,
Financial Industry Regulatory Authority)국장 핸리 마크빌입니다.
그 옆은 미국선물협회(NFA, National Futures Association)부국장 카일 게너 이고요.
이 정도면 미 정부가 이번 사안에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이 되겠습니까?”
“이해했습니다.”
“그럼 사전 청취를 시작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시죠.”
클래시와 윌 게이트가 동석한 자리에서, 상혁과 민준, 그리고 현주가 자리에 앉자 미 정부 요원들에 의한 사전 청취가 시작되었다.
카메라와 속기사가 참여한 상태에서, 법정에서 증언으로 쓰일 수 있는 질문에 대한 사전 증언을 얻어내기 위해.
“우선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현재 SANY와 PTW의 계약서라고 알려진 이 계약서의 내용이 실제로 쓰인 계약서인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상혁 씨. 이것이 딥 다이버의 양산 계약을 체결할 때 PTW가 SANY와 계약한 계약서의 내용이 맞습니까?”
상혁은 벤자민이 건낸 계약서의 내용을 읽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그럼 이 계약서에 MS가 코넥트의 사용 권한과 딥 다이버 양산으로 인한 적자를 보전할 경우 X-BOX로도 딥 다이버를 사용할 수 있다는 부가 조항이 들어가 있습니까?”
“들어가 있습니다.”
“이 계약서에 사인 된 날이 언제죠?”
“2016년 1월입니다.”
“MS와 해당 계약이 체결된 날짜는요?”
“2017년 8월 16일이죠.”
“그럼 1년 8개월 전에 미리 이런 사태가 발생할 거라고 예상하고 그 조항을 넣었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이번엔 윌 씨에게 묻죠. 윌 게이트 씨는 이 계약서의 내용을 8월 16일 이전에 알고 계셨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8개월 전에 이미 경쟁사 계약서에 적혀 있는 계약 조건을 그대로 들고 와서 제안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왜 다른 조건을 걸지 않으셨습니까?”
벤자민의 질문에 윌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조건이 아니면, 계약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지금 두 분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두 분은 자각하고 계십니까?
MS가 거대한 손해를 껴안게 된 이런 계약이, 사전에 협의도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되었다고요?”
“글쎄요, 그 계약은 그 타이밍에만 유효한 계약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하루라도 전에 계약 조건을 게이트 씨에게 내밀었다면 게이트 씨는 그 계약을 받지 않았을 테니까.”
“그건 무슨 말이죠?”
“벤자민 씨도 보셨다시피, 이번 계약으로 MS가 지급해야 하는 금액은 천문학적인 수준이죠.
저희는 딥 다이버를 시장에 싼값에 공급하기 위해 적자 폭을 엄청나게 높여 놓았으니까요. 상식적으로 볼 때, 그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계약이었어요.
저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사전에 MS측에 제안을 하지 않은 거고요.”
“그러나 MS는 그 조건에 계약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3차 NE 컨벤션의 쇼케이스가 이루어진 이후에(After) 이루어진 계약이죠.”
그러자 윌이 상혁의 말을 이어받았다.
“3차 NE컨벤션에서 공개된 딥 다이버의 쇼 케이스를 보았을 때,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저게 없는 X-BOX는 무조건 콘솔 전쟁에서 패배하겠구나.’라고요.
원래부터 딥 다이버의 존재 자체는 저희 직원인 크리스의 이야기를 들어서 인지하고 있었죠.
엄청난 기기이고, 게임 업계의 흐름을 바꿔놓을 만한 힘을 가진 장비라고요.
하지만 그건 단순히 기기 자체만의 포텐셜을 이야기한 것이었기에, 저희는 저희가 대응할 수 있는 카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저쪽의 주변기기가 좋더라도, 이쪽에서 착실하게 독점작을 모으고 이미 저희가 보유 중인 기기이자 이미 5천만 대 이상이 보급된 코넥트에 집중하면 어떻게든 될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저희의 그런 수많은 계획은, 상혁 씨가 한국 행사장에서 첫 번째로 손가락을 튕겼을 때 전부 날아가 버렸습니다.
딥 다이버는 저희의 생각보다 너무 강력한 기기였고, 저희를 콘솔 시장에서 퇴출할만한 기기였죠.
제가 SANY 사장이었다면 절대로 MS에 라이선스를 허가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군사적인 용도든 산업적인 용도든 게이밍 적인 용도든, 딥 다이버는 단순히 그 장비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윤을 창출해낼 만한 장비니까.”
“그런데도 SANY측에 협상을 제안하러 가신 이유가 뭐죠?
방금 본인 입으로 자신이라면 절대 받지 않을 협상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제가 노린 쪽은 PTW였습니다. 애당초 딥 다이버에 대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회사는 PTW니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SANY회장이라면 몰라도, PTW는 MS가 이대로 콘솔 시장에서 물러나게 되는 걸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죠?”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코넥트 시절부터 함께 해온 MS에 등을 돌리고 죽어가는 SANY와 손을 잡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마치 이 모든 것이 필연적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군요.”
“아닐 것 같습니까?”
이번에 입을 연 것은 상혁이였다.
상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이 모든 과정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흘러간’ 사건들의 연속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단어가 있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의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 말입니까?”
“아무 힘없는 한낱 나비의 날갯짓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막대한 힘과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 의도를 가지고 움직인다고 하면, 그것이 끌어내는 효과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죠.
사전에 이렇게 될 줄 알고 모든 것을 진행했느냐고 묻고 싶으신 거라면, 저는 ‘YES’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이렇게 되도록 모든 일을 꾸민 게 저니까요.
겉만 보기 전에, 안의 내용을 보시죠.
각 회사가 결정한 모든 판단의 배경에는 그에 따른 근거가 있습니다.
저희가 MS에 등을 돌리고 SANY와 협력한 이유.
그리고 SANY가 그 말도 안되는 계약서의 부가 조항을 받아들인 이유.
그리고 그 조항을 MS가 나중에 그대로 받아들인 이유.
그 모든 것에 이유가 있죠.
저흰 그 이유에 대해 법정에서 충분히 설명할 생각이고,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아무리 SEC가 상대이고, 그 SCE에 압력을 넣은 거대 헤지펀드들이 뒤쪽에 있다고 하더라도요.”
상혁의 말에 벤자민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상혁을 보며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월가는 소문이 빠르고, 뉴욕은 좁으니까요.
이번 딥 다이버 사태로 인해서 헤지펀드들이 수십조 단위의 투자금을 날리게 될 예정이라는 건 월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죠.
게다가 그 수십조가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수백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자 벤자민이 급하게 손을 뻗어 캠코더의 전원을 껐다.
그것은 이후의 대화가 공식적인 대화가 아닌, 오프 더 레코드로 진행되는 대화라는 의미였다.
“여기서부터는 오프 더 레코드로 대화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좋습니다. 우선 저희 쪽에 수사 의외를 넣은 쪽이 헤지펀드에 고용된 대형 로펌이라는 부분은 인정하겠습니다.
굳이 숨기려고 해도,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니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저희라고 단순히 수사 의뢰가 들어온다고 무작정 달려드는 건 아닙니다.
소송전에 자신이 있으신가본데, 저희도 가지고 있는 카드가 있으니까요.”
“카드라···. 혹시 3차 NE 컨벤션 직전에 MS가 시행한 자사주 매입에 관련된 건인가요?”
클래시의 말에 벤자민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헤지펀드에서 공매도를 치면, 회사 측에서는 주가 방어를 위해 자사주 매입을 시도하죠.
그리고 그 자사주 매입을 시도하던 시기에, MS는 지금 문제가 되는 그 계약을 할 생각도, 그리고 그것으로 공매도 세력을 엿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단순히 그쪽의 주장이죠. 실제 펙트를 알려드릴까요? 공매도로 인해 주가가 폭락하자, MS는 자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3차 NE 컨벤션 진행 도중에 X-BOX에 딥 다이버가 지원된다는 빅 뉴스를 발표했죠.
그리고 주가는 폭등했고요.
객관적으로 누가 보아도 이건 내부 정보를 이용하여 자사주의 주가를 조작한 악랄한 사례의 교과서로 보일 텐데요?”
“그래서 SEC, CFTC, FINRA, NFA의 4개 주요 증권 감시 기관이 동시에 달려든 겁니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것으로 보이는데요.”
“연기금(pension fund)이 관련되어 있겠군요.”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상혁이 말하자, 벤자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상혁은 그런 벤자민의 표정은 상관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생각을 이어나갔다.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연기금을 운영하는 펀드가 미쳤다고 공매도 같은 도박수를 굴리지는 않았을 테고, 아마도 이번에 공매도에 참여한 헤지펀드들의 모회사가 연기금 운영에 관여하고 있겠죠.
그리고 해당 헤지펀드들이 공매도로 본 손해를 메꾸다 무너진다면, 모회사에 맡겨놓은 연기금에도 손실이 있을 테고요.
정부 기관이 어째서 이렇게 달려들었나를 추론해보면 간단한 이야기죠.”
연기금.
연금기금의 줄임말로 연금 지급을 위해 모인 자금을 투자사에서 운용하여 수익을 남기는 형태의 기금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는 국민연금 기금 운용본부라는 국가 기관에서 그 일을 처리하지만, 미국의 경우는 기금의 주체에 따라 수많은 민간 투자 기업이 연기금 운용에 참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선생님들의 퇴직 연금을 운용하는 업체도 주마다 전부 다를 정도로.
그리고 그런 연기금의 붕괴는, 심각한 경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SEC에서 이번 사태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고.
“잘못하면 저희는 이번 사태가 서브 프라임 모기지 이후 최악의 금융사고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공매도에 참여한 헤지펀드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굴리는 자금이 워낙 크니까요.
전국의 수많은 교사, 소방관, 군인, 공무원들이 연금을 잃게 되겠죠.”
그러자 주식 시장에 대해 잘 모르는 민준이 조용히 상혁에게 귓말로 질문했다.
“상혁아?”
“어.”
“그 연기금이라는 게 모회사에서 굴리는 기금이면 그냥 원금 보전해서 회수하면 되는 거 아냐? 공매도가 망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헤지펀드가 이번 공매도에 모든 자금을 몰빵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러니까 확실한 수익을 기대하고 전체 펀드 자금의 한 20% 정도를 밀어 넣었다고 치자고.
공매도의 문제는, 수익은 상한이 있지만 손실은 거의 무한대라는 거야.
당장 빌려 팔은 주식을 갚아야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주가가 미친 듯이 폭등하고 있지.
아마 마감 시점에는 그 비싼 MS의 주식임에도 불구하고 3차 NE 컨벤션 직전에 그들이 판 주식 가격보다 10배 이상 지급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아까 20%정도를 밀어 넣었다고 가정하자고 했지? 그렇게 가정하면 펀드 자금 전체를 전부 밀어 넣어도 그들이 막을 수 있는 최대 손실은 5배가 한계야.
그리고 그건 전부 손실이니까 투자자들은 그 많은 투자금을 눈앞에서 날리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 나머지 80%는 현금이 아니라 다른 주식이나 부동산의 형태로 투자되어 있을 거야.
그걸 급하게 메꾸려면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진 걸 다 팔아야겠지.”
“그 냄새만 나도 뉴욕 증시는 박살 나는 거야.
그 말은 현재 주식 시장에 들어가 있는 모회사의 연기금에도 영향을 크게 끼친다는 거고.”
“나비효과네.”
“나비효과지.”
상혁은 상대가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영어로 민준에게 대답했고, 상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벤자민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상혁을 보며 말했다.
“아까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계획한 게 이상혁 씨라고 했었죠? 지금은 그 말을 믿고 싶어지네요.
맞습니다. 지금의 문제는 단순히 일부 헤지펀드가 망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에요.
잘못하면 미 정부에서 수십조의 기금을 투입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항이죠. 저희는 그것을 막고 싶은 거고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면?”
“그 시점에서 저희는 정말로 계약 성사의 여부를 알 수 없었다는 거죠. MS의 자사주 매입은 공매도 실행에 따른 당연한 대응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게이트 씨에게 굳이 묻지 않아도, 그 자사주 매입 규모는 통상적인 대응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겠죠.
정말로 MS가 공매도 세력을 엿먹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MS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컸어야 정상입니다.
게다가 지금 MS의 주가를 올리는 것은 MS가 아니에요. 공매도 세력이 마감일에 주가가 얼마든 무조건 그것을 사서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다른 투기 세력이 MS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거죠.
그건 저희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말씀하신 자사주 매입은 법정에서 좋은 카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반면에 저희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엄청나게 많고요.”
“그 말은 법정에서 SEC와 싸워 이기고 싶다는 겁니까?”
“법정에서 헤지펀드들과 싸워 이기고 싶다는 겁니다.”
“피해가 엄청날 겁니다.”
“저희의 피해는 아니겠죠.”
상혁이 덤덤하게 말하자 벤자민이 다시 캠코더의 전원을 올렸다.
그리고는 상혁을 보며 말했다.
“그럼 합의를 진행하실 생각은 전혀 없는 거군요?”
“저희가 이길 싸움인데 뭣하러 합의하겠습니까?”
“SEC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시면 큰코다치실 겁니다.”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PTW를 물로 보지 마세요.”
상혁의 경고를 들은 벤자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젊은 사업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목소리 안에 담긴 확신과 열정이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 같아서.
벤자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혁에게 악수를 청하며, MS의 회장 윌 게이트를 향해 말했다.
“처음에 계약서를 볼 땐 MS가 미쳤나 싶었는데, 이상혁이란 사람을 만나보니 윌 게이트 회장님이 마음이 이해가 되네요.
설사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그가 가는 길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사람이라는 걸, 오늘 잘 알게 된 기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봐주시진 않으시겠죠? 연기금이 걸린 문제이니.”
“그렇죠. 오히려 최선을 다해 싸울 겁니다.”
“그럼 다음은 법정에서 만나겠군요.”
“예. 법정에서 뵙죠.”
그렇게 말한 벤자민은 나머지 일행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이번 소송의 변호인을 맡은 클래시가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보통 사전 청취에서 고객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만···.”
“그런가요?”
“상혁 씨는 예외입니다. 변호사 하셔도 되겠는데요?”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의 문제는 따로 있죠. 원래 저희의 계획은 이 문제를 소송으로 끌고 가서 법원에서 저희의 억울함을 알리는 거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으니까요.”
“역시 연기금이 문제인가요?”
“미 정부에서는 주식 시장 붕괴나 연기금이 보는 손해를 절대로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매우 빠른 시기에 대응책을 수립해서 압박하겠죠. 그리고 그 압박은···.”
순간 클래시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클래시는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상혁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딥 다이버의 판매 중지 가처분 신청이 되겠네요.”
클래시가 상혁에게 넘긴 휴대폰.
거기엔 미 법원에서 MS의 대리인인 그에게 보낸 통보 메일이 열려 있었다.
[MS의 주가 조작에 대한 혐의가 풀릴 때까지, PTW의 새 제품인 딥 다이버의 판매를 일시적으로 중지할 것을 SEC에서 요청하였습니다. 판매 중지 처리에 앞서 양측의 사전 협의를 위해 오늘 오후까지 뉴욕 법원에 출석을 요청합니다.]
메일을 본 상혁은 잠시 고민하다 클래시에게 물었다.
“이거 막을 수 있습니까?”
“어렵죠. 일단 당사자인 MS의 주가가 계속 치솟아 오르는 원인이 그거니까.”
“일단 딥 다이버가 MS의 X-BOX를 지원하는 것이 주가 상승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달라는 요청에 합리성이 있다는 거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클래시 씨 생각은 어떤가요?”
“막을 방법이 없으니 일단은 받아들여야죠. 저쪽에서도 그로 인해서 MS의 주가가 떨어진다면 한숨 돌릴 수 있을 테고요.”
“그건 저희가 한발 물러나는 선택지 아닌가요?”
“싸움을 위해서는 물러설 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요.”
상혁은 다시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클래시에게 말했다.
“아뇨, 쥐가 고양이를 물 것을 걱정해서 쥐에게 살길을 터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죠?”
“저희는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렇게 말한 상혁은, 이번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윌을 향해 말했다.
“게이트 회장님. 제게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는데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습니까?”
“예.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면서도, MS의 주가엔 손실이 없게 만드는 방법이죠.”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법원에서 저희 측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면요. 그리고 저쪽은 쓸 수 있는 하나의 카드를 잃어버리게 되겠죠.
클래시 씨.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셨나요?”
“예.”
“그럼 저 쥐새끼들에게 보여줍시다. 차마 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도록. 저희가 고양이가 아니라, 강철로 된 거대한 호랑이라는 걸.”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얼굴은, 지금까지 PTW에게 도전한 상대를 밟아줄때마다 그가 지었던 사악한 미소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