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소송전 준비
미국이란 나라는, 굳이 말하자면 소송을 통해 굴러가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병원만 해도 애당초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지불이 불가능한 수준의 엄청난 병원비를 청구하고, 병원 입구에서 기다리는 변호사를 만나 소송을 걸어 그 병원비를 깎는 것으로 협상을 시작하는 나라가 미국이었으니까.
게다가 미국에 존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때때로 정의 구현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수준의 소송을 남발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캠핑카를 구매한 고객이 크루즈 모드를 켜놓은 채로 샌드위치를 구우러 운전석을 비웠다가 사고가 나자, ‘크루즈 모드를 키고 운전석을 비우지 마십시오’라는 경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사에 소송을 걸어 무려 1,750,000달러(한화 19억원)의 보상금과 새로운 캠핑카를 회사에 뜯어낸 소송이라던가.
아니면 웨이터한테 주어야 할 팁 3.5달러(3700원)이 아까워서 나이트클럽 화장실 창문으로 도망치다 바닥에 떨어져 앞니 두 개가 부러졌다고 1300만 원을 소송으로 뜯어낸다던가.
그런 미친 내용의 소송이 가능하고, 또 이기는 것이 가능한 곳이 바로 미국이란 나라였다.
반면에 그러한 미국의 특수성은 로펌(Law Firm : 법률 사무소)의 비대화라는 결과도 가져오게 되었다.
아주 사소한 것도 소송전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특성상, 제품 설명서나 이용 약관을 만들면서 인간이 시비 걸 수 있는 모든 범위를 고려하여 법적 검토를 수행하는 것이 미국의 로펌이었기 때문에.
사실 엄청난 수임료를 받아가는 것 같은 로펌은, 오히려 회사의 비용을 줄이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기업에서 유명 로펌에 소속된 수준의 변호인단을 운영하려면 엄청난 유지비용이 들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PTW역시 뉴욕에 있는 유명 로펌에 매년 수백억의 고문료를 내며 법적 절차를 맡기고 있었다.
주로 국제 특허 출원에 관련한 절차를.
그러나 미국의 로펌은 각각의 장점에 따라 전문 분야가 달랐고 이번 소송은 특허 관련 법안이 아닌 증권 범죄 관련 소송이었기에, 상혁은 다른 로펌과 추가 계약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상혁이 홈페이지에 ‘PTW와 이번 주가 조작 소송전에 함께 할 로펌을 모집합니다.’라고 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번 소송전의 주인공인 MS의 회장 윌 게이트가 인천 공항으로 보낸 전용기 안에서, 상혁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기술적 증언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 데려온 민준과, 계약서에 최종적으로 사인한 당사자인 현주를 바라보면서.
“뭐, 굳이 저희가 로펌을 새로 섭외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정말로 능력이 있는 로펌이라면, 그쪽에서 저희 쪽에 다가올 테니까.”
“그럴까?”
“그렇겠죠. 어차피 승소하는 순간 모든 수임료는 상대방이 전부 내게 되어 있어요.
게다가 이쪽엔 방금 신작을 출시함으로써 엄청난 현금다발을 쥐게 된 우리 PTW와 당장은 적자 폭이 엄청나겠지만 주가는 하늘을 찌르고 있는 MS가 있죠.
만약 진짜로 능력있는 로펌이라면, 우리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알아서 접근해오겠죠.
게다가.”
상혁이 말했다.
“어찌 되었건 이번 소송의 주체는 PTW가 아닌 MS니까요.
저흰 단지 증언을 하러 온 것뿐이고요. 딱히 저희가 주가에 손을 대려는 의도로 뭔가를 조작한 건 아니니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않을까요?”
상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PTW는 IPO(Initial Public Offering : 기업 설립 후 처음으로 외부 투자자에게 주식을 공개하고, 이를 매도하는 업무. 쉽게 말하면 주식 시장 상장)도 진행하고 있지 않고, 주식 시장이랑은 거리가 먼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혁은 실제로 주가를 조작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니, 솔직하게 말하면 혐의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미국에 도착해 MS의 변호사에게 들은 상황이, 상혁의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에.
“몇 가지 중요한 문제 때문에, 이 소송을 그렇게 쉽게 흘러가진 않을 겁니다.”
MS 본사에 있는 회의실에서, 이번 소송 건을 맡은 뉴욕의 대형 로펌 K&L 게이트의 담당 변호사 클래시 하드록은 상혁 일행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한 것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가 있었다.
“이번 소송 건에 참여한 대형 헤지펀드가 5개고 그 뒤에서 소송을 밀고 있는 로펌이 5개입니다.
믿으세요. 진실이 어떻든 간에, 뉴욕의 대형 로펌은 단순히 수임료 때문에 소송을 맡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이길 수 있는 소송을 하려고 하죠. 그리고 뉴욕을 대표하는 5개 로펌이 이번 소송에 합류했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이번 소송에서 승기를 읽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클래시는 한 장의 서류를 상혁 앞에 내밀며 말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요.”
그가 내민 서류를 본 상혁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 상혁이 딥 다이버의 개발을 위해 SANY와 협력하던 시점에 상혁이 초안을 작성하여 SANY에게 제안한 계약서였기 때문에.
그리고 영민한 상혁은 클래시가 내민 종이를 보자마자, 무엇이 문제인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이번 소송의 쟁점은, MS가 딥 다이버의 X-BOX지원 여부를 사전에 알고 있었느냐가 되겠군요?”
“정황 증거로 보면 의심할 거리가 넘치니까요.”
클래시가 말했다.
“우선 계약 시점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3차 NE컨벤션의 첫날 행사가 끝나고, 윌 게이트 회장님이 일본에 가서 SANY와 미팅을 가진 날에 계약이 진행되었죠.
문제는 그 시점에서 이미 딥 다이버가 X-BOX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마치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처럼요.
제 말이 맞습니까?”
클래시의 말에 상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하셨죠? 만일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건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한데요?”
“그 시점에서 SANY의 PS 전용으로 출시된 주변기기가, 어째서 MS의 X-BOX에서도 돌아가게 설계되었는지를 물으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거라면 간단합니다. 전 애당초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알고 계셨다고요?”
“클래시 씨. 만약 클래시 씨가 먹으려는 스테이크에 파리가 접근한다면, 클래시 씨는 어떤 행동을 취하시겠어요?”
“아마 손을 휘둘러 파리를 내 쫓겠죠.”
“그렇죠. 그건 누가 예상하던 자연스러운 겁니다.
MS의 계약 성사 여부는 저에게 있어서 그런 문제였고요.”
“하지만 헤지펀드측에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MS와 밀약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일을 추진하고 계약만 그 시점에 진행한 것이라 생각하겠죠.”
“그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요?”
“맞습니다.”
“그들이 입은 데미지가 얼마나 되죠?”
상혁의 질문에 클래시가 씩 웃으며 답했다.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그렇죠. 애당초 그들이 행사한 풋옵션에 대한 회수 기한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니까요.”
“아···. 뭔지 알겠네요.”
상혁은 일이 어떻게 굴러간 것인지 알아차렸다.
애당초 이 소송을 급하게 그들이 제기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들이 소송을 제기한 이유가, 지금도 미친 듯이 오르고 있는 MS의 주가 상승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의도라는 것을.
그리고 프로그래밍에 대해서는 천재적인 재능과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의 것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민준이 손을 들어 상혁에게 질문했다.
“뭐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지 좀 쉽게 설명해주실 분 없나요?”
그러자 상혁의 옆에 앉아있던 현주가 민준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소송을 건 헤지펀드들의 풋옵션 마감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도 실시간으로 MS의 주가가 오르는 만큼 그들의 손실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하는 거지.”
“그게 그렇게 되나요?”
“응.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주식 선물 시장에서의 풋 옵션은 특정 기간에 내가 특정 주식을 특정 가격으로 팔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거야.
아마도 지금 소송에 참여한 헤지펀드들은 MS의 주가가 내려가는데 배팅한 거겠지.
그러니까 권리 행사의 마감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1주일 안이겠지.
예를 들어 3차 NE 컨벤션이 시작되기 직전에 주당 100달러에 거래되던 MS 주식을 3차 NE 컨벤션이 끝나고 일주일 후 시점에서 100달러에 팔 수 있는 권리를 구매했다 치면, 마감일에 MS 주식이 50달러가 되어버리면 50달러의 차익을 남길 수 있는 거지.”
“만약에 100달러 이상으로 오르면요?”
“그럼 그때는 권리를 포기하면 돼. 물론 애당초 풋 옵션을 구매하는 시점에서 풋 옵션 프리미엄을 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손실은 감수해야겠지만.”
“어라? 그러면 실제로 손해는 그리 크지 않지 않아요?”
“맞아.”
현주가 말했다.
“풋 옵션을 아무리 많이 구매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손실률 이상이 발생한다 치면 그냥 권리를 포기하면 그만이니까.
손해는 있어도 해지펀드가 망할 수준은 아니겠지. 그런데도 소송까지 감수하면서 MS의 주가를 떨어트리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그건···.”
“아마도 공매도에 손을 댄 거겠죠.”
“그건 또 뭐야.”
“그건 주식을 빌려서 파는 거야. 예를 들어 3차 NE 컨벤션 이전에 미리 MS의 주식을 시가인 주당 100달러에 미리 빌려서 파는 거지.
만약 마감일에 주가가 50달러가 되면, 100달러에 판 주식을 50달러에 사서 갚으면 되는 거고.
문제는 풋옵션에는 손실의 한계가 있지만, 공매도엔 없다는 거야.
갚아야 할 날이 다가오는 순간, 그게 얼마든 빌려 판 주식의 수만큼 그걸 주식으로 갚아야 하거든.
그리고 지금 현재 MS의 주가는 이전과 비교해서···.”
“3배 가까이 늘었죠. 이건 전쟁입니다. 상혁 씨.”
클래시가 상혁의 말을 이어나갔다.
“저쪽에선 모든 것을 걸고 부딪혀올 겁니다. 필요하면 지금 발매 중인 딥 다이버의 판매 중지를 요청하는 강수를 둬서라도요.
그들이 가진 자산 전부를 쏟아부어서라도 MS의 주가 상승을 막으려 하겠죠.
그리고 아주 작은 트집거리라도 있다면, 그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는 상혁 앞에 놓인 종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게 바로 그 트집거리고요.”
“하지만 이 계약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일이 이렇게 풀릴 거라고 예상하던 것은 저 혼자뿐입니다.
상식적으로 그 시점에선 누구도 MS가 SANY가 감수해야 할 적자폭을 전부 떠안는 조건으로 딥 다이버를 가져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죠.”
“하지만 MS는 그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으로 계약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3차 NE 컨벤션에서 공개된 딥 다이버를 보았기 때문이죠.”
이번에 입을 연 것은 MS의 대표 윌 게이트 회장이었다.
“솔직히 3차 NE 컨벤션의 쇼케이스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저는 아무리 PTW라도 시장을 그 정도로 뒤집어 놓을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이전 작품인 코넥트 조차도, 그 정도로 압도적인 제품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실제 공개된 딥 다이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없는 콘솔을 아예 구매하지 않게 만들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저희가 ‘죽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조건이 아무리 MS에 불리하더라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었죠.
상혁 씨는 자신이 만든 제품이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런 계약을 진행한 것일 테고요.”
“그 조작에 가까운 선택들이, 자신의 회사가 만든 제품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고요?
배심원들은 절대 믿지 않을 겁니다.”
“그걸 믿게 만드는 게 클래시 씨의 역할 아닙니까?”
상혁의 말에 클래시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모두를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하아···. 어쩌면 이번 소송은 제가 맡아본 소송 중에 가장 어려운 소송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글쎄요, 어쩌면 가장 쉬운 소송이 될 수도 있죠.”
상혁이 말하자 클래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무슨 의미죠?”
“그러니까 애당초 지금 MS의 주가가 올라가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과를 보죠. 우선 이번 계약의 가장 큰 수혜자는 저희 PTW입니다.
첫째로 저희가 만든 플랫폼을 양대 콘솔에서 빠르게 보급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는 SANY에서 막대한 기술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취득했죠.”
“어? 그런 거야? 코넥트 때처럼 원래 기술료는 안 받는 거 아니었어?”
“정확히는 SANY에서 산업용 딥 다이버를 팔아서, 게이밍용 딥 다이버 판매로 발생하는 모든 적자를 회수한 이후부터 라이선스 비용이 발생하게 되어 있었지.
그리고 MS가 게이밍용 코넥트의 모든 적자를 감당하겠다는 계약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적자가 0원이 되면서 앞으로 산업용 딥 다이버에서 발생하는 수익에 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SANY측에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거지? 천재적인데?”
“뭐 우리도 이제 뭐 만들면서 돈걱정은 좀 그만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렇다고 게이머용 딥 다이버의 가격이 증가하거나 게이머가 그에 대한 부담을 지는 건 아니잖아?
SANY는 SANY대로 발매 직전에 적자가 0원이 되었으니 지금까지 투입한 금액에 대한 부담을 크게 덜 수 있었고,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는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게이밍용 딥 다이버를 5천만 대 공급해야 산업용 딥 다이버의 판매가 가능하니까, SANY입장에서는 최대한 빠르게 시장에 게이밍용 딥 다이버를 공급하고 싶어지겠지.”
“결과적으로 MS와의 계약 추진으로 기기의 보급속도와 라이선스 비용, 두 가지 모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거네.”
“맞아.”
“그럼 SANY는?”
“SANY는 이번 계약의 두 번째 수혜자지.
우선 X-BOX진영에서 딥 다이버가 사용 가능해진다고 해도, 3차 NE 컨벤션에서 공개된 4개의 독점작을 확보한 상태가 되는 거고, 그 정도면 충분히 지금의 형세를 역전할 힘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지.
둘째로 원래대로라면 이번 분기에 SANY가 감수해야 할 적자 폭은 조 단위가 넘어갔어야 해. 워낙에 큰 비용이 들어간 장비니까.
그러나 그걸 MS에서 내게 됨으로써 결산 내용이 마이너스에서 막대한 플러스로 전환되게 되었지.
게다가 이미 주가는 MS와 더불어 천장을 찍고 있고.
사실 이 계약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된 것은 MS라고 할 수 있어.
그 막대한 적자를 홀로 감수해야 하는 데다, 산업용 딥 다이버 판매로 인한 모든 이윤은 PTW와 SANY가 나누어 가질 거고, 원래는 SANY의 분기 결산에 찍혀야 했을 마이너스 적자를 MS가 가져가게 되었으니까.”
“당사자가 듣고 있는데 아픈 소리를 너무 쉽게 하는군.”
상혁의 말을 듣고 있던 게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에겐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상혁은 그런 윌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MS는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만약 진짜로 PS 진영에서만 딥 다이버의 사용이 가능하고, X-BOX에서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MS측에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엄청나게 올랐잖아? 당장 이번 분기부터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며?
그런데 주가가 오른다고?”
민준의 질문에 상혁이 답했다. 자신이 회귀하기 전에 있었던, 주식 시장의 광기를 떠올리면서.
상혁이 떠올리고 있는 사건은 2021년에 발생했던 공매도 헤지펀드와 개미투자자들의 전쟁.
‘게임 스탑 주가 폭등 사건’이었다.
“주식 시장을 결정하는 건 숫자가 아니라 이미지니까.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되겠지.
원래대로라면 콘솔 시장 철수도 고려해야 할 만큼 거대한 디메리트를 지니고 있던 MS가, 그것을 해소 하고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고.
그리고 그들에게 그 계약은 상식 밖의 것이었겠지.
SNAY가 미쳤다고 앞으로 20년은 콘솔 시장을 리드하게 만들어줄 주변기기의 라이선스를 MS에 허락했겠어?
민준이 네가 SANY CEO라면 그렇게 할래?”
“절대 안 하지.”
“원래대로라면 SANY는 적자폭이 얼마든 MS에 딥 다이버를 넘기고 싶지 않았을 거야.
당장의 적자 폭이 얼마든, 주가는 폭등할 테고 어차피 산업용 딥 다이버의 생산이 시작되면 그 정도 적자 폭은 얼마든지 눌러버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계약서에 그렇게 사전에 명시했기 때문에 SANY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지.
MS와 손을 잡고, 양대 콘솔에서 딥 다이버를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그러니까 처음부터 계약이 그렇게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 SANY가 MS와 손을 잡을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어.
공매도 새력은 그렇기 때문에 공매도 포지션을 잡은 거겠지.
MS가 어떤 조건을 내밀더라도, SANY에서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계약이 바로 이번 계약이었으니까.”
“전부 맞는 말입니다.”
클래시가 말했다.
“실제로 저도 SANY와 PTW간에 이뤄진 딥 다이버의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요.
제가 SANY CEO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계약을 밀어붙이셨더군요.
미친 듯이 황금알을 쏟아내는 거위를 만들어서, 경쟁사와 그 과실을 나누게 하다니,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PTW의 협상 전략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꼬우면 하지 말던가.’죠.”
“그러니까 이 계약 모두 SANY나 MS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유도하셨다는 거군요?”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든 사건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조성되긴 했네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배심원들의 귀에는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짠 시나리오처럼 들릴겁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죠.”
상혁은 클래시의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하긴 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모든 것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도록 계획된 일이었지만,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의 흐름을, 세계 탑 클래스의 변호사가 어떻게 배심원들에게 설명할지가 궁금했기 때문에.
그리고 클래시는 그런 상혁의 앞에서 턱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기며 상혁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먼저 한 가지만 확인하죠.
모든 것을 이렇게 흘러가도록 의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갔다는 상혁 씨의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겁니까?”
“없습니다.”
“그럼 절대로 사전에 MS와 이렇게 될 결과에 대해서 협의하거나 하신 일도 없다는 거고요?”
“그렇죠.”
“윌 게이트 씨에게도 묻죠. 오프 더 레코드로, 솔직하게.
정말로 3차 NE 컨벤션의 첫날 쇼케이스가 끝나는 순간까지 SANY와 계약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하셨습니까?”
“상혁 씨가 말했듯이, SANY CEO가 제정신이라면 절대 이번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거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계약을 제안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상혁 씨가 그에 대한 안배를 SANY와의 계약 시점에서 이미 해 두었다는 건, 솔직히 저도 들으면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 좋습니다. 두 분의 말을 진실이라 믿고 이번 소송은, 제가 책임지고 승리로 이끌어드리죠.”
클래시가 웃으며 말했다.
소송에서의 승리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라, 애당초 이 소송의 내용 자체가 그에게 너무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에.
속으로 SEC의 검사들이 울상짓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클래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로 향했다.
그리고는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변론 전략을 세워 봅시다.
증권 위원회의 검사들과, 헤지펀드 뒤에 서 있는 로펌 변호사들을 어떻게 울릴지를 고민하면서 말이죠.”
그리고는 마커의 뚜껑을 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되는 물건에, 말이 안 되는 계약에, 말이 안 되는 상황 예측이라.
아마도 이번 소송은, 전설이 되겠군. PTW가 만들었다는 그 새로운 장비처럼.”
겉으로 보기엔 누가 봐도 말이 안 되지만, 설명을 들어보면 누가 봐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황당한 케이스.
그것은 뉴욕 최고의 로펌에 소속된 대표 변호사인 클래시로 하여금, 그가 가진 변호사의 피를 뜨겁게 달구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