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전장의 파트너
‘아, 좀 더 새로운 어셈블리 시스템을 즐기고 싶었는데······.’
오퍼레이터의 안내를 들은 아라키는 진심으로 아쉬운 감정을 느꼈다.
‘딥 다이버’란 기기를 만난 아머드 코아가 새롭게 선보인 어셈블리 시스템은, 그가 아머드 코어 시리즈의 골수 팬이 아니었다고 해도 종일 만지고 싶을 만큼 즐거운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전의 시리즈에서 그가 즐겨 하던 ‘기동형’ 세팅에 맞게 설계를 변경하고는 완료를 선언했다.
부스터를 쓰지 않아도 고속으로 이동 가능한 가벼운 기체에, 탄 수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 근접 공격용 레이저 블레이드를 장착한 세팅으로.
그는 매 시리즈마다 이런 세팅으로 고속으로 전장을 누비며 근접전을 통해 적을 물리쳐왔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고.
아라카니는 세팅을 마치고는 세팅 종료를 선언했다.
어떤 특정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육성을 통해서.
아라키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었지만 마치 자신의 음성을 인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했고, 어셈블리 시스템은 그런 아라키의 믿음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끝났어.”
[수고하셨습니다.
설정하신 세팅을 즉시 반영합니다. 변형 공정을 지켜보시겠습니까?]
“보여줘.”
[공정을 출력합니다.]
순간 메인 카메라가 켜지며 그가 앉아있는 콕핏의 주변이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마치 로봇의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느낌으로.
그리고 오퍼레이터의 목소리와 함께, 그가 선택한 부품을 들고 있는 수십 개의 기계 팔들이 동시에 카메라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라키에게 그 모습은 마치 슈트를 갈아입히기 위해 토디에게 다가오는 기계 팔을 연상시키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긴, SF 로망의 정수가 담겨있는 영화긴 했지.’
원래 있던 파츠가 떨어져 나가고, 복잡한 기계들이 다른 파츠로 그것을 교체해 나가는 과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즐거운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로 로봇 안에 탄 파일럿, 그 자체가 된 느낌이었기에.
[변경된 어셈블리의 적용이 완료되었습니다. 지금부터 긴급 출격 모드에 들어갑니다.
사출 베이에 기체 결착 완료.
임무 투입용 기체 사출 게이트 기동.]
그러자 갑자기 밝은 빛이 새어나오며 기체 앞에 있는 거대한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아라키는 자신이 있던 공간이 ‘공장’이 아닌,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요새같은 구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태빌라이저(Stabilizer : 자세 안정 장치 ) 온.]
AC가 안정적인 사출을 위해 무릎을 기울인 듯, 콕핏의 시야가 살짝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출 예상 지점까지 남은 시간 5초. 4···3···2···1.
행운을 빕니다. 레이븐.]
순간 콧핏 주변의 모든 오브젝트가 뒤로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아라키가 탄 기체는 탄환처럼 전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아라키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새로운 아머드 코아의 전장···?”
탁 트인 전장을 배경으로, 하늘에서 수많은 강철의 거인이 마치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착지까지 남은 체공 시간 3초. 2초. 1초.]
마치 히어로 랜딩이라도 하듯 멋진 포즈로 육중한 강철의 몸을 착지시킨 아라키의 기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렇게 바로, 전투는 시작되었다.
아머드 코아의 기존 팬에게는 약간 생소한 느낌의, 배○필드 스타일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전장 위에서.
***
‘이게 아머드 코아가 맞나?’
전투를 개시하자마자 아라키를 당황하게 한 것은 이 시리즈를 처음 하는 유저 뿐만 아니라 기존의 시리즈에 익숙한 유저들도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변경 사항이었다.
특히 조작 방식은 패드에서 조이스틱으로 변경된 컨트롤러의 변경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변한 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묘하게 변한 게 더 복잡한데 편한 느낌인데?’
이전의 아머드 코아 시리즈는 기체 세팅에 따라 해당 기능을 사용하기 위한 버튼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은 게임이었다.
단순히 걸어 다니거나 바퀴로 굴러 다니던 로봇의 부스트를 작동시키는 것만 해도, 단순히 이동 속도를 올리기 위해 토글로 동작시키는 일반 부스트, 그리고 출력을 한번에 터트려 폭발적인 속도를 얻어내는 글라이드 부스트, 기체 중량을 이용해 부스트 사용과 동시에 적을 차버리는 부스트 차지, 관성 회전을 시스템화 시킨 드리프트 등의 다양한 컨트롤을 지원했는데,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작은 게임 패드로 전부 재현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시리즈에서는, 유저가 특정 상황에서 원하는 부스트를 쓰기 위해 어떤 버튼을 써야 하는지 외울 필요가 없었다.
그가 하려는 것을 옆에서 붙어서 도와주는, 또 한 명의 파일럿이 있었기 때문에.
[3시 방향 300 미터 전방에 장거리 표적과 교전 중인 적 AC 발견.
조금 전에 사용하신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개전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자고. 시계 방향으로 길게 돌아서, 적의 사각에서 글라이드 부스트로 뛰어드는 거로.]
[알겠습니다. 적절한 공격 포지션이 될 때까지 일반 부스트 모드로 기동합니다.]
놀랍게도 아라키를 도와 전투를 지원하는 것은 방금 전까지 어셈블리 세팅을 돕고 있던 오퍼레이터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역할을 ‘PCA(Personal Combat Assistant)’라고 밝힌 오퍼레이터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통해 복잡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기동을 AI 컨트롤로 커버하고 있었다.
때로는 파일럿에게 지시를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사각에서 다가오는 적 미사일을 요격한 후 선조치 후보고를 수행하기도 하면서.
그것은 마치 영화 ‘아이론 맨’의 AI인 ‘차비스’와 함께 전투를 수행하는 토디 스타크의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적 기체 배제 완료.]
마치 영화에서 나올 법한 멋진 기동으로 적의 품으로 파고든 아라키는 레이저 블레이드를 휘둘러 단숨에 적을 베어냈다.
원래의 아머드 코어라면 ‘사각으로 일반 부스트 버튼을 눌러 이동 ▶ 일반 부스트를 끄고 글라이브 부스트 버튼으로 돌격 ▶ 왼손 장비 공격 버튼 사용’이라는 순서로 공격해야 했겠지만, 지금의 아라키는 단순하게 이동과 시야 전환, 그리고 공격 버튼을 누르는 것 만으로도 같은 수준의 공격을 멋지게 해 낼 수 있었다.
자신의 옆에서 전투를 돕고 있는 멋진 목소리의 AI가, 그가 버튼을 눌러서 처리해야 할 복잡한 고급 기동을 전부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물론 아라키는 자신이 원한다면 그 모든 것을 수동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탄환을 다 쓴 무기를 버림으로써 기체 중량을 가볍게 하려면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망가진 파츠를 교체하기 위해서 가야 하는 보급 포인트를 찾으려면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AI에게 물어보는 순간 친절하게 버튼에서 LED 조명을 켜 표시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복잡해지려면 한없이 복잡해질 수 있지만, 간단해지려면 한없이 간단해질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진 조작법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까지 자신이 컨트롤 할지를, 유저가 선택하라는 거네. 프룸 소프트웨어에서 아주 좋은 결론을 내려줬어.’
이 정도면 신규 유저도 어렵지 않게 게임의 고급 기동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AI와의 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딜레이를 줄이고 싶은 고인물 유저들은, 자신이 직접 수동조작을 함으로써 베테랑 파일럿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아라키는 대부분의 베테랑 유저들이 이 게임을 구매하여 플레이한다면, AI와 대화를 통해 공격 방법을 결정하는 새로운 조작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딜레이를 감수할 만큼, AI와 대화하며 수행하는 전투는 진심으로 멋진 느낌이었기 때문에.
‘뭣보다 서로 소통하며 작전 계획을 짜는 것 같은 기분이 끝내주는 것 같아.’
레이더가 3명의 적기를 포착하면, AI가 상대의 정보를 스캔하여 어떤 순서로 요격할지를 파일럿에게 물어본다.
화력이 부족하다면 근처의 보급 포인트에서 무장을 교체할 것을 권하기도 하고, 혹은 가장 위협이 될 것 같은 적을 기습하기 위한 최단 루트를 제시하기도 하면서.
그런 대화 속에서 짧은 시간 안에 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하는 일련의 ‘루틴(Routine)’이야말로, 미야자키가 만든 새로운 아머드 코어의 핵심 재미라고 할 수 있었다.
작전(Plan)의 연계.
그것은 순발력이나 반사신경, 컨트롤의 익숙함과는 다른 능숙함을 게이머들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단순히 적의 공격을 잘 피하면서 화려하게 움직이며 적을 요격하던 기존의 시리즈와는 다르게, 전체 전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식의 전투는 단순히 컨트롤 만을 요구하는 전투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다.
적에 대한 지식이나 자신의 기체에 대한 이해도 외에도, 맵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과 자신의 전투 지속 능력, 그리고 적들이 배치된 형태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숙지해야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원래대로라면 화면에 수많은 UI를 가득 띄워놓고 그 모든 정보를 유저가 확인하면서 수행해야 하는, 로봇 액션과 전략 시뮬레이션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었다.
‘초기 버전까지는 그랬지.’
게임에 푹 빠진 관객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미야자키가 중얼거렸다.
자신이 지금 공개한 플레이의 최초 테스트 데모는, 그 모든 것을 유저가 확인하고 제어해야 하는 끔찍한 복잡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야자키는 복잡성을 감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구현하고 싶어 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로봇 시뮬레이션’의 이상향은, 바로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상혁은 그 복잡한 테스트 데모를 해보고는, 한숨을 쉬며 미야자키에게 말했다.
“이건 아머드 코아로 구현한 배틀 로열식 전장이네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재미는 있어요···. 확실히 재미는 있는데···.”
상혁이 말했다.
“이걸 유저가 전부 확인하고 컨트롤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진짜 파일럿이 된 느낌만큼은 제대로 주고 있지 않습니까? 전에 ‘로망’이 있으면 유저는 복잡함을 감수할 수 있다고도 하셨고요.”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변태적인 수준으로 복잡한 걸 감수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상혁의 말에도 미야자키는 자기 생각을 꺾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쪽이 숙련된 유저라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기에.
그가 게임을 디자인하는 방식은 그런 방식이었다.
해결을 향해 가는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해결 해낸 이후에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프룸 소프트웨어의 게임들이 전반적으로 가진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뭐랄까,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조금 타협을 볼 수 있겠지만 핵심 플레이만큼은 이대로 가고 싶습니다. 어느정도 복잡함을 감수하더라도요.
물론 상혁 씨가 걱정하는 게 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이게 저희가 추구하는 게임의 가치입니다. 바꾸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자 상혁이 고개를 저으며 미야자키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정정해주었다.
자신이 시스템의 복잡도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그것을 가볍게 만들어달라는 의도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뭐랄까.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게 너무 복잡하니 단순하게 만들자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이건 이거대로 멋지니까요. 아마도 제대로 완성되면 진짜로 로봇 파일럿이 된 기분 그 자체를 느끼게 해 줄 수 있겠죠.
거기에 원래대로라면 패드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수준의 다양한 기능도, 이번에 개발할 게이밍 체어를 사용하면 구현이 가능할 거고요.”
“그럼 이대로 내도 될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말씀드렸지만 이건 너무 복잡하니까요.”
“너무 복잡하다면서 단순하게 만들라는 게 아니라면 여기서 뭘 더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미야자키 씨. 운전을 처음 배우는 사람을 혼자 차 안에 집어넣는 교사는 없죠.
보통은 그것을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선생님이나 코치가 함께 타는 법이고요.
제가 말씀드리는 건, 그런 복잡한 시스템을 유저가 사용하게 하려면 그에 맞는 어시스트도 제공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시스트요?”
“아이론맨 슈트의 동작을 전부 토디가 컨트롤 한다면 슈트 내부에 컨트롤 버튼이 수백 개는 달려있어야겠죠.
하지만 실제로 토디는 말 몇 마디로 차비스를 통해 모든 것을 수행하지 않습니까?
제 생각엔 이 게임에 필요한 건 바로 그런 AI에요.
유저가 해야 할 복잡한 정보 파악과 컨트롤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어시스트해주는, 파일럿 보조 AI요.”
“차비스 같은 AI요?”
확실히, 새로운 아머드 코어의 복잡한 기능을 보조하는 AI가 있다면 그건 정말 멋질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AI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미야자키는 허탈한 목소리로 상혁에게 말했다.
“뭐, 그런 게 있다면 당연히 좋죠. 진짜 멋질 겁니다. 저희 게임의 가장 큰 단점인 복잡한 컨트롤을 극복하면서도, 가장 큰 강점인 멋진 기동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게 있으면 저희가 왜 안 넣겠습니까? 그런 걸 만드는 게 불가능하니까 문제죠.”
“확실히, 프룸 소프트웨어엔 그런 기술이 없죠.”
상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야자키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희에겐 있습니다.”
“예?”
“잊으셨습니까? 저희 회사가 가장 최근에 낸 게임에 들어간 AI엔진의 이름을?”
“그건···.”
현재 가장 뛰어난 대화형 AI라고 평가받는 엔진.
미야자키라고 그 엔진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미야자키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어찌 보면 PTW의 가장 커다란 자산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그 기술을 이전해달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애당초 NPC의 성격을 사람처럼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엔진이라 아머드 코아에 탑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그런 미야자키에게 상혁은 시원하게 자신의 제안을 건넸다.
미야자키 입장에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을.
“실제로 잘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안되면 되게 만들면 되겠죠.
미야자키 씨. 저는 당신이 만든 이 새 아머드 코아에 PTW의 커뮤니케이션 엔진이 들어가면 정말 멋질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수많은 유저들의 입에서 감탄사를 자아내고 있는 아머드 코아의 AI는, 바로 그 ‘커뮤니케이션 엔진’을 기반으로 개발된 AI였다.
***
“미칠 듯이 즐겁다는 건, 지금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귀를 찌르는 부스트의 굉음을 들으며, 아라키가 소리쳤다.
그러자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아라키의 귓가에 들려왔다.
[사용자의 목소리 레벨로 판단할 때, 현재 사용자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7시 방향 장거리 타입 적기 다수 출현.
현재 본체의 존재는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적 스캔을 막기 위해 레이저 재머를 사용하겠습니다.]
“나도 동의해. 구체적으로 몇 마리야?”
[3기입니다. 기동형 일반 병기 2정. AC로 보이는 적 기체가 1정입니다.
적 AC 기체의 무장 레벨은 5.
지금까지 교전한 적 기체 중 위협 레벨이 가장 높습니다.]
“지금 내 장비로 잡을 수 있나?”
[기체 상태 확인 중.
좌우 양측 백웨폰 남은 잔탄 0.
메인 웨폰 잔탄 수 5% 미만.
가동 불가 상태까지 남은 기체 손상율 66%
제네레이터 출력 정상.
레이저 기능 일부 고장.
부스터 기능 일부 손실.
퀵 부스트 사용 불가.
일반 부스트와 글라이더 부스트는 사용 가능.]
“그래서, 할 수 있다고?”
[현재까지 사용자가 보여준 전투 수행능력으로 전투 시뮬레이션 수행 중···.
성공률 15% 미만으로 확인.]
“높은 건 아니네.”
중간에 보급 포인트를 돌면서 미션을 수행했음에도, 꽤 많은 손실이 있었기에 아라키는 마지막 전투가 꽤 어려울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AI는 스스로가 수행한 시뮬레이션 결과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할 수 있습니다.]
“15%라며?”
[그것은 시뮬레이션 엔진의 분석 결과입니다.
함께 전투를 수행한 저는, 사용자가 충분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래?”
아라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아마도 저 대사는, 미리 입력된 일종의 연출이겠지.’
그것을 알면서도 멋진 기분이 드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겨우 10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전투를 했지만 아라키는 지금까지 자신을 도와 전투를 수행한 AI와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애당초 ‘아머드 코아’의 새 AI는, 오직 그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니까.
‘그래. 연출이든 뭐든, 너희가 준비한 장단에 놀아주지.
지금은 그게 이 순간을 즐기는 최고의 방법인 것 같으니까.’
지금까지의 플레이 전체가, 아라키에게 ‘주인공이 되어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미야자키가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부터 시작된, 그 모든 과정이.
앉아있던 의자가 순식간에 변신하며 펼쳐진 현실에서 가상의 콕핏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연출도.
오퍼레이터의 음성 지시를 따라 홀로그램을 조작하며 자신이 탈 기체를 고르던 연출도.
그리고 마침내 전투에 투입되어 AI와 작전을 세워가며 수없이 많은 적기와 싸우던 매 순간들도.
그 모든 순간이 지금 아라키로 하여금 마지막 전투에 승리하여 주인공이 되라고 말하고 있었다.
두근대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아라키는 양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저 멀리 있는 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말씀하십시오. 사용자.]
“나 아직 네 이름을 모르는데.”
잠시간의 침묵.
오퍼레이터의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아라키의 귓가에 들려왔다.
[제 이름은 PCA(Personal Combat Assistant)-ENTRY 73.
글라디스(GLaDIS)입니다.]
“좋아. 내 이름은 아라키 시게루야.”
[아라키 시게루 사용자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좋아.”
미야자키가 말한 대로, 지금 자신이 즐기고 있는 아머드 코아는 어디까지나 체험판이었다.
발매까지 앞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를.
그러나 아라키는 그 짧은 체험판 플레이를 하면서, 마음속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나고 게임을 끝내더라도, 자신은 몇 년이든 글라디스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아라키는 속으로 다짐하며 글라디스에게 말했다.
“가자.
이 전투를 끝내러.”
[전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사용자 아라키.]
그리고 그렇게, 시작부터 전 세계 유저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든 아머드 코아의 체험 플레이는 피날레를 맞이하게 되었다.
임무에 실패한 유저들의 탄식과, 임무에 성공한 유저들의 환호성을 낳으며.
[임무 종료. 전투 모드를 해제합니다.
현재 본부에 복귀를 위한 회수 신호 발신 중.
전 레이븐 요원은 복귀 준비 바랍니다.
접속 신호 해제 중.
체험 플레이를 종료하고 행사장으로 복귀합니다.]
체험이 시작되었을 때와는 정확히 반대의 순서로, 체험의 종료 연출이 재생되었다.
조금 전까지 전장 위의 로봇 안에 있던 콕핏에서, 다시 호주에 있는 아머드 코아의 공개 행사장으로.
마치 로봇이 해체되듯 눈앞의 스크린과 부속들이 조각조각 날아가 사라지는 모습은 모든 관객들의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조금은 애매한 기분도 함께 느끼게 하고 있었다.
‘환호성을 질러야 하나? 아니면 여운에 잠겨야 하나?’
아라키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체험이 끝났으니, 응당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는 게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보다, 이 꿈같은 시간이 끝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게 끝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게임이 그에게 전해준 임펙트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그러나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조금 전까지 그를 그렇게 즐겁게 해주었던 ‘AI’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체험하는 시간 내내 터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감정을 단번에 터트리는 한마디를 전하며.
그것은 게임이 그에게 보내는 작별 메시지였다.
[다시 만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파트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2만 명의 관객이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절규하는 것을 들으며, 미야자키는 속으로 생각했다.
상혁의 아이디어로 마지막에 들어간 그 대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했다고.
세상 어떤 게이머도 그런 체험을 한 뒤에 그 말을 듣고 게임을 구매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테니까.
‘차라리 칼 들고 게임 사라고 협박하는 게 덜 먹히겠네.’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환호성 속에서, 아라키는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외쳤다.
“이미 스테이지에 들어간 순간에 눈치 채셨겠지만, 지금 정식으로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아머드 코어 7에는 PTW의 지원을 받아 커뮤니케이션 엔진의 최신 버전인 ‘2.0’이 탑재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단 두 개의 게임에만, 그것도 PTW의 게임에만 탑재되었던 초고성능 AI 엔진이 타사의 게임에 쓰였다는 것.
그것은 행사장에 있는 관객들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 가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발표였다.
“발매가 언제야!!!?!?”
“이 의자 파는 겁니까?!!? 제발 판다고 해줘!!!!”
“으아아아아아아!!!”
아예 언어를 잃어버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만 쏟아내고 있는 관객들과,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게이밍 체어’를 가지고 싶어하는 관객들.
조금이라도 조금 전 플레이했던 게임과 떨어지는 시간을 줄이고 싶은 게이머들의 절규가 회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라키의 발표는, 나머지 관객들의 가슴 속에서 언어를 앗아가기에, 충분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 의자는 정식으로 발매 예정입니다.
누구나 집에 앉아서 이 멋진 게이밍 체어에 앉아 전투기 파일럿이나 로봇 파일럿이 될 수 있죠.
지금 탑재된 모든 악세서리는 쉽게 교체가 가능한 모듈식입니다.
조이스틱을 떼고 페달과 포스 피드백 기능이 달린 핸들을 달아 레이싱 머신으로 쓸 수도 있고요.
그리고 안 쓸 때는 지금 앉아계신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편한 의자가 되겠죠.
이제는 넓은 집에서 대형 TV앞에 앉아있을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딥 다이버를 사용하면, 1칸짜리 원룸에서도 70인치 TV가 있는 넓은 거실에서 게임을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방이 우주선의 함교이자 로봇의 콕핏이며, 전투기의 조종석이자 스포츠카의 운전석이 될 겁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이 모든 것이, PTW가 여러분을 위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으알하앟앓알아아아아!!!”
마지막엔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괴성이 되어버린 비명을 들으며, 미야자키는 눈시울이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게이머라도, 누군가 자신들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한다는 것을 안다면 저렇게 소리치고 싶었을 테니까.
그가 참여한 이번 NE컨벤션은, 게이머들에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그런 행사였다.
“좋습니까! 여러분!?!”
“Yeeeeeeeeeeeeeahh!!!!!!!!!!!!!”
“즐기고 계십니까! 여러분!!!”
“으아아아아아아아!!!!!!!!!!!!!”
“그럼 이제 마지막 피날레를 향해 달려갑시다!
저도 함께 할 테니까요!!
이번 NE 컨벤션의 최종 장!
일본을 향해서!!!!!!!!!”
“Japan!!!Japan!!!Japan!!!”
“가즈아아아아!!!”
미야자키는 생각했다.
아마도 지금 관객들이 지르고 있는 소리가, 앞서 공개된 행사에서 지른 소리보다 가장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리고 그건 미야자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긴장되는 마음으로 호주 행사를 지켜보던 칸베도, 속으로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X발 진짜 순서 잘못 정했다.’
무려 ‘그 PTW’가 진행했던 오프닝 쇼케이스도, 그리고 스테론이 깜짝 등장했던 구란트리스모의 쇼케이스도, 파일럿 뽕을 제대로 자극했던 스페이드 컴뱃의 쇼케이스도 이 정도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었다.
지금 호주에서 소리치는 관객들의 표정은, 거의 반쯤 광기에 휩싸인 듯한 눈빛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일본에 있는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했던 체험을, 지금까지 일본의 관객들도 똑같이 겪고 있었으니까.
3차 NE 컨벤션의 체험 내용은, 딥 다이버의 VR기능을 통해 전 세계에서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말은 호주에서 의자가 변신하며 관객들을 경악하게 만들 때 한국이나 일본의 행사장에 설치된 의자도 똑같이 변신하여 관객들을 흥분시켰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호주의 관객들이 플레이했던 체험판의 내용을 동일하게 일본의 관객들도 플레이했다는 이야기였고.
처음 행사에 대한 아이디어를 들었을 때, 칸베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가장 무섭고 끔찍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 광기에 휩싸인 눈빛이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그것은 호주에서 미야자키가, VR모드의 중계 권한을 일본으로 넘겼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하, 하하···.”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칸베는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바···. 반갑습니다. 이번에 간담 IP 의 새로운 게임을 발표할 디렉터 칸베입니다.”
점점 고조되어가는 행사 분위기 속에서, 드디어 시작된 마지막 쇼케이스.
그것은 지나치게 흥분한 관객들의 눈빛에 겁먹은 발표자의 떨리는 인사와 함께, 그 마지막 순서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