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그것보다 더
지금 이 시각, PTW의 차세대 VR기기인 딥 다이버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10만명의 참가자 외에도 수천만 명이 온라인 스트리밍 방송을 통해 보고 있는 쇼케이스는 이 순간만큼은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는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폴리포디 디지털의 대표 미야우치 카츠노리는 그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중이었다.
그가 이전에 진행했던 ‘발표’와는 주목도의 차원이 달랐으니까.
자신의 앞에서, 모두가 똑같은 장비를 끼고 자신이 있는 무대를 빤히 바라보는 관객들의 모습은, 그의 정신과 신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같은 장비를 끼고 그들과 같은 눈으로 이 행사를 지켜보고 있을 8만 명의 참가자들의 시선도.
거기에 스트리밍 방송이나 PTW홈페이지의 공식 실시간 중계를 보고있는 유저들의 수를 합치면?
대체 지금 이 시각 지구 전체에서 몇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그 수가 적어도 수천만은 가볍게 넘을 테니까.
‘좋아.’
카츠노리는 심호흡을 했다.
나쁜 반응이 걱정되는가?
그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과 폴리포디의 직원들에게 이번에 개발하는 구란트리스모7은, 시리즈 최고의 작품, 아니 역대 최고의 레이싱 게임이라고 꼽을 수 있을 만큼 멋진 작품이었기에.
자신이 이번 시리즈의 부제를 ‘완벽(Perfect)’이라고 지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레이싱 게임으로써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게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과 직원들이 투자한 노력은, 두 번 하라면 도저히 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하긴 그렇게 쪼아대는데 퀄리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긴 하지.’
처음 상혁이 ‘공동 QA’를 제안했을 때, 카츠노리는 적어도 상혁이 어느 정도의 선은 지킬 것으로 생각했다.
적당히 각 개발팀의 대표끼리 모여서, 서로가 만든 게임을 칭찬하고, 개발 진행 상황을 체크하는 종류의 모임일 것이라고.
그러나 막상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나서, 카츠노리는 자신의 예상이 엄청나게 물렀다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공동 QA에 대한 협약서에 싸인을 하자마자, PTW가 타사의 프로젝트에 엄청나게 관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프로젝트에서 공개될 각 개발사의 게임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PTW 나름의 도움이었다.
“반사 효과는 지금보다 더 좋게 바꿔도 하드웨어에 여유가 있어요. PTW VR의 성능은 생각보다 더 높은 편이니까.
그러니 환경 효과를 만들 때는 8세대 콘솔 기준이 아니라 아예 9세대 콘솔에서 돌린다는 느낌으로 팍팍 잡아주세요.”
“그럼 부스팅 안 쓰는 일반 콘솔에서는 버벅댈 텐데요?”
“최적화에서 생기는 기술적인 문제는 저희 쪽에서 지원해드리죠.”
그런 식으로 현재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수준의 환경 효과를 더 부스트하라고 압박한다던가.
“750대는 좀 적네요. 라이선스 차량 숫자를 좀 늘리죠. 어차피 늘리는 김에 4자리 맞추는 건 어때요?”
“그거 계약 따내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럼 그건 저희 영업팀에서 지원해드리죠.”
“그렇다고 지금 리스트에 있는 이런 차량은 모델링 데이터를 구하기가···.”
“그럼 아예 실제 차량을 섭외해 드릴 테니 그걸 기반으로 모델링을 새로 잡자고요.”
일반적으로 개발 중인 게임에 타사가 개입하는 것은 절대 좋은 느낌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PTW에서 지원한 도움의 성향은 ‘간섭’하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PTW의 ‘간섭’은, 구현하고 싶었지만 콘솔 성능 때문에 타협을 본 부분을 어떻게든 구현해 낼 수 있게 해준다던가, 혹은 시간이나 비용 문제 때문에 포기하려 한 부분들을 도와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덕분에 폴리포디 직원들은 전에 없이 쾌적한 환경에서 개발을 진행할 수 있었다.
넣고 싶은 효과나 물리 엔진을 마구 적용해놓아도 PTW에서 알아서 최적화를 도와주기도 했고, 전 세계 자동차 회사에 영업팀을 보내 라이선스 협상을 따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모델링을 위해 실제 차량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떻게든 구해주기도 하고, 아이디어만 존재하고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에 대한 개발지원도 해 주었다.
그렇게 한쪽의 전폭적인 서포트를 받는 상황에서 개발이 막힐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폴리포디는 이례적으로 짧은 기간에 매우 높은 퀄리티의 그란트리스모의 정규 넘버링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이게 말이 되는 퀄리티인가를 의심할 정도의 결과물로.
그 과정에서 폴리포디가 PTW에게 받은 도움은, 이제는 이번 컨소시엄이 끝나고 차기작을 만들 때 PTW의 도움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의 전폭적인 지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온 게 지금의 결과물···.진짜로, 레이싱 게임의 이상이라 할 만한 걸 다 집어넣었더니 말도 안 되는 게 만들어져버렸어···.’
자사의 역대 타이틀을 포함하여 전 세계 어떤 레이싱 게임을 가져와도 대적할 작품이 없는 수준의 퀄리티.
노면의 미세한 차이, 타이어의 상태까지 주행에 영향을 끼치게 만든 미친 물리 엔진에, 비가 오는 날 차량이 충돌할 때의 충격으로 비산하는 빗물까지 현실적으로 표현한 환경 엔진.
게다가 역대 사상 최다를 자랑하는 차량의 라이선스까지.
‘포르셰도 복귀했고.’
원래 포르셰사의 차량을 게임에서 쓸 수 있는 라이선스는 DA가 독점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구란트리스모’시리즈에서도 포르셰 차량을 쓰지 못했었고.
그러나 그 독점 계약은, 2016년 말을 기준으로 풀려버렸다.
그 말은 2017년에 발매되는 이번 구란트리스모에는 포르셰의 차량들이 등장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 작품은 폴리포디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PS4용 콘솔에서 원래 발매 예정이었던 ‘스포트’를 취소하고 정식으로 발매되는 넘버링 작품이기도 하고, 독점 계약이 끝난 포르셰 시리즈가 게임에 정식으로 돌아온 작품이기도 했으며, 서양 유명 차량뿐 아니라 PTW의 도움으로 한국의 현대와 기아 차량도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무려 1257대의 라이선스 차량 개수.
그러나 이번에 늘어난 것은, 단순히 차량의 숫자만이 아니었다.
“이번 작품은 1인칭 시점에서 VR로 진행되는 플레이가 핵심이죠.
그 말은 차량 내부의 액세서리나 드라이버가 입고 있는 복장, 쓰고 있는 헬멧의 디자인까지 전부 유저의 시선에 직접 노출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번엔 액세서리도 최대한 들어가야 합니다. 유저가 자유롭게 복장을 바꾸고, 그 안에서 자신이 고른 복장을 입고 활동하는 것을 체감할 수 있게요.”
“그 말씀은···.”
“GP RACE, P1 Racewear, SCHROTH, Bridge Moto 같은 레이싱 슈트 제작사들의 라이선스도 따와야 한다는 이야기죠.”
“거기까지 합니까?”
“NBA 2K 시리즈에는 항상 가장 최신의 농구화가 들어가 있었어요.
그 게임 안에서, 농구화는 유저가 자신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런 부분도 구현되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비용이···.”
“그건 SANY에서 내기로 했잖아요?”
상혁이 웃으며 말했다.
“게임 만들면서, 남의 돈으로 하고 싶은 거 다 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요? 뒷수습은 저희가 할 테니까, 밀어 부쳐보죠.
게이머들은 좋아할 테니까요.”
“그럼 좋습니다. 저희도 그러면 좋죠.”
“좋아요. 그럼 다음은 스티어링 핸들이랑 가죽 장갑, 그리고 커스텀 페달 라이선스에 대해서인데···.”
웃으며 준비한 자료를 뭉텅이로 꺼내는 상혁을 보면서, 카츠노리는 조금은 PTW라는 회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째서 PTW라는 회사의 게임을, 유저들이 매번 몇 년씩 붙잡고 플레이 하는 것인지 알 것 같다고.
그가 본 PTW라는 회사는, 적어도 게임 개발에 있어서는 타협이란 단어를 모르는 회사였기에.
‘하긴, 콘솔 성능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부스팅 기능을 개발해서 끼워 넣게 하고, 최적화를 위해서 STC 같은 오파츠를 만드는 회사니···.’
그리고 지금은, 그 미친 인간들과 ‘함께’ 만들어낸 괴물을 전 세계에 풀어놓을 시간이었다.
‘가자. 역대 최고의 레이싱 게임이 뭔지 보여주자고.’
그렇게 카츠노리는, 상혁과 미리 맞춘 듯 똑같은 동작을 취하며 쇼케이스를 시작했다.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튕기는 모션으로.
그것은 이번 쇼 케이스에서 모든 진행자가 동일하게 취하기로 약속한 일종의 ‘결정 포즈’같은 것이었다.
-딱-
침묵속에서 울려퍼지는 작은 소리.
그러나 그 작은 소리가 불러온 결과는, 순식간에 2만명의 관객을 경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What the···!?!”
“Oh mon Dieu!!(하나님 맙소사!)”
“이게 VR?!!?”
내용을 보기도 전에, 단순히 그 ‘몰입감’만으로도 임펙트를 주기에 충분한 딥 다이버의 성능.
카츠노리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딥 다이버를 착용하고 있는 전 세계 참가자들을 맞이한 것은 어느새 1인칭 시점으로 사무실 안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 상혁이 보여준 것처럼, 정말로 ‘공간이동’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동시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이봐, 어딜 보는 거야? 집중하라고.”
그 순간 정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관객들이 일제히 정면을 보았다.
거기엔 CEO라는 직함 패널이 놓인 책상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말했지만 현재의 자네 성적은 리그 전체를 볼 때 그리 좋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어.
그렇다고 긴장은 하지 말라고.
우리가 자네와 계약한 건, 자네의 실력이 아니라 성장 가능성 때문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그래서 우리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네.
앞으로 당분간 자네를 안내하며 자네에게 레이스의 세계를 가르칠 멘토를 붙여주기로 말이야.”
“그걸 위해서 절 부르신 겁니까?”
대답을 한 것은 유저가 보고 있는 캐릭터가 아닌 플레이어의 뒤쪽에 있는 남자였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관객들은 일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는 동시에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을 보던 카츠노리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VR이라는 장비가 남이 하는 것을 옆에서 보면 매우 어색한 느낌을 주는 장비였기 때문에.
2만 명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똑같이 입을 벌리는 모습은 정말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러나 카츠노리는 관객들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을 VR 체험 시퀀스에서, 그들이 멘토역을 맡을 배우.
그 사람의 얼굴이 관객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을 테니까.
“스테론?”
한 관객이 터트린 탄성.
복싱 영화의 전설 ‘락키’의 주인공이자 레이싱 장르를 다룬 영화 ‘드레이븐’에서 주연을 맡았던 글로벌 슈퍼스타.
실버스타 스테론이 플레이어의 뒤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퇴까지 한 사람을 불러서 대체 뭘 시키려는 건가 했더니, 애 보기입니까?”
“그 아이가 우리 팀의 미래일세.”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죠. 남자는 남자의 할 일을 해야 하는 법일 테니.(Man's gotta do what man's gotta do.)
전 미리 서킷에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주게.”
스테론이 밖으로 나가자, 관객들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방향으로 보았을 때, 아마도 플레이어 본인 캐릭터의 목소리로 들리는 목소리가.
“저 늙은 퇴물은 누구죠?”
“알렉산더 실버리치.”
“그 괴물요?(The monster?).
오 맙소사. 저 그 사람의 레이스는 전부 다 봤어요! 나이가 들어서 몰라봤지만!”
“한때는 그랬지. 아주 오래전엔.”
“하지만 부상으로 은퇴했다고 들었는데요?”
“우리가 다시 불렀네. 자네를 위해서.”
“저를 위해서요?”
“그렇네.”
그렇게 말한 CEO는 정면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린 자네가 차세대의 괴물이 되어주길 바라네.”
순간 둔탁한 비트의 음악이 시작되며 장면이 전환 되었다.
시나리오를 작성한 PTW스토리 팀에서 추천한 음악으로.
The Score의 Unstoppable.
There's a moment
그런 순간들이 있지
In your bones when
뼛속 깊은 곳부터
When the fire takes over
불꽃이 타오를 때 말이야
Blood is running
피는 끓어오르고
Heart is pumping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마치 레이스 자체를 상징하는 듯한 가사를 배경으로 영화 트레일러같이 구성된 체험 시퀀스에 사람들은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치 어미 새를 따라다니는 아기 새처럼, 스테론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정상의 자리에는 서지 못한, 슬럼프에 빠진 루키 드라이버의 기분이 되어서.
자신들이 지금 서 있는 서킷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스테론은 마치 영화의 트레이닝 장면처럼 관객들에게 조언했다.
“노면의 상태를 잘 확인해(Check the road surface). 눈 감고도 서킷을 주행할 수 있을 만큼 서킷이 주는 감각에 익숙해져야 해.
베테랑은 아침에 신발 바닥으로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도 오늘의 도로 상태를 알 수 있어.”
그런 식으로 함께 서킷을 걸어 다니기도 하고.
“팀 메이트 와의 관계를 형성하도록(Communicate Your Teammate). 그들은 단순히 타이어를 갈아주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피트에 들러 다른 멤버들과 친분을 과시하기도 하고.
“차가 하는 말을 들어(listen to wyour car). 네 차는 네 애인이자, 파트너야. 적어도 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아픈 것인지 어디를 돌봐야 할지를 바로 알 수 있어야 한다고.
물론 네가 고치게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드라이버의 감각을 통해서 메카닉이 어디부터 살펴봐야 할지는 알 수 있을 테니까.”
차량 내부를 관찰하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네가 상대하는 적이 누군지 알아두라고(Know your enemies). 코너가 약한지, 아니면 브레이크 성능이 어떤지. 거기에 공략의 키 포인트가 있으니까.”
“차량의 특성을요? 몇 백대나 되는 데요?”
“몇 백대가 아니야. (Not hundred)”
스테론이 웃으며 말했다.
“몇 천대지(Thousands).”
관객들은 마치 영화의 예고편을 보는듯한 연출 속에서, 카츠노리가 전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신작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모든 힌트가 녹아있는 것이, 이 행사용 영상이었기 때문에.
‘수천 대의 차량용 라이센스라면 등장하는 차량만 4자리 수라는 건가? 역대 최다 급인데?’
‘이건 NBA 2K 시리즈에 있는 커리어 모드 같은 느낌의 싱글 플레이가 들어간다는 건가?’
단순한 선수 육성 모드가 아니라, 매 시리즈마다 백 스토리와 캐릭터, 그리고 드라마가 들어간 2K 시리즈의 커리어 모드는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2K시리즈를 사는 유저가 대부분일 정도로 현재 프렌차이즈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 있었다.
물론 기존의 구란트리스모 시리즈나 다른 레이싱 게임에도 커리어 모드 자체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시뮬레이션 화면에서 차량을 커스터마이징하고 참가할 대회를 골라 자신의 클래스를 올리는 것이지, 지금처럼 완전히 레이서의 시점에서 드라마틱한 연출과 함께 레이서 자체의 성장을 다루는 컨텐츠가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보고 있는 것이 단순히 게임의 디테일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인지, 아니면 실제로 게임 안에서 유저가 그것을 신경 쓰면서 즐길 수 있는 ‘플레이’가 포함되어있는 것인지, 관객들은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의 연출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간절하게 빌게 만드는 마력을, 영상은 품고 있었다.
‘제발 이런 느낌의 모드가 게임 안에 포함되어있다고 이야기해주세요.’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폴리포디에서 준비한 영상의 몰입감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퀄리티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상은, 이제 코트를 돌아다니던 것을 마치고 긴박한 레이싱 장면을 보여주며 음악의 템포를 올리고 있었다.
“달리려고 하지 말고, 드라이빙 하라고! (Don't run, drive!)”
거친 엔진의 배기음 사이로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스테론의 목소리가 관객의 귓가를 때리면서, 영상은 다양한 레이싱 장면을 연속해서 보여주며 마치 영화의 예고편 같은 느낌을 이어 나갔다.
We can be heroes everywhere we go
어디를 가든 우린 영웅이 될 수 있어
We can have all that we ever want
원하는 게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어
Swinging like Ali, knocking out bodies (*Ali = 무함마드 알리)
알리처럼 훅을 날려, 상대를 쓰러트려
Standing on top like a champion
챔피언처럼 정상에 올라
Keep your silver, give me that gold
은메달은 너나 가져, 금메달을 내게 줘
You'll remember when I say
넌 내 말을 꼭 기억하게 될 거야
We can be heroes everywhere we go
어디를 가든 우린 영웅이 될 수 있어.
배경으로 사용된 Unstoppable의 하이라이트 가사와 완벽하게 싱크된 영상이.
“서킷을 다스려!(Rule the circuit!)”
아슬아슬한 차이로 상대를 추월하면서.
“레이스를 지배해!(Dominate the race!)”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겁쟁이에게 쫄지 말고 네 베짱을 믿으라고! (Don't be scared of cowards, trust your guts!)”
라는 대사 직후에는 서로 충돌하여 공중에서 회전하는 차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스테론의 목소리.
“미안, 그건 예상 못했다.(Sorry, I didn't expect that.)”
용기 있게 밀어붙이라고 할 땐 언제고, 충돌사고가 나니 멋쩍은 목소리로 말하는 스테론의 대사는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스테론 특유의 소리치는 연기가 보는 이의 감정을 마구 두들기는 가운데, 영상은 스토리 안에 내재 되어 있는 갈등도 함께 보여주고 있었다.
재능은 뛰어나지만,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는 젊은 드라이버와, 재능이 부족해 노력만으로 도전하다 실패를 맛본 늙은 멘토가 함께 만들어가는 스토리를.
그것은 이것이 게임이 아니라 영화였다고 하더라도 한 번쯤은 보고 싶어질 만한 스포츠 물의 정석 같은 대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괴물이라 불리던 당신의 전성기에도 하지 못한 걸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거죠?”
“넌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말하냐고요!”
“어째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저에게 강요하는 겁니까!”
“넌 나보다 나은 사람이니까! ('Cause you're better than me!)”
카츠노리는 헤드셋으로 들려오는 스테론의 목소리를 들으며 회상에 잠겼다.
이 대사를 쓴 개발자들은, 폴리포디의 직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클리셰’로 가득한 싱글 플레이의 스토리를 작업한 작업자들은, 자신이 있는 회사의 직원들이 아닌 PTW의 스토리팀 직원들이었다.
전 세계에서 게임 스토리를 가장 잘 짠다고 알려진 전문가 집단.
그들이 처음 이 행사용 시퀀스에 대한 시나리오를 가져왔을 때, 카츠노리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거 너무 식상하지 않아요?”
그가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시나리오는, 그냥 ‘레이싱 영화’라고 떠올리면 자연스레 나올법한 대사들로 가득했으니까.
그러나 PTW의 스토리 팀을 이끄는 리드 시나리오 라이터인 혁찬은 그런 카츠노리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영화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이건 게임이잖아요?
게이머는 자신이 이 대사들을 실제로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할 겁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에겐 당연한 ‘그 대사들’이, 게이머에겐 자신의 귀로 가장 듣고 싶은 대사일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 동시에 마치 영혼이라도 빨린 것처럼 멍하니 영상에 집중하는 관객들을 보면서, 카츠노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혁찬의 말이 맞았노라고.
그리고는 자신이 혁찬에게 했던 과거의 발언에 대해 떠올렸다.
‘식상하다고?’
단순히 대사만 떼 놓고 본다면 그렇게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PTW에서 만들어낸 영상은, 대사의 단순함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매력을 담고 있었다.
거기엔 게이머를 위해 게이머가 듣고 싶어할 대사를 전달하고 싶은, 개발자의 ‘진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진심’은, 이제 모든 이의 가슴에 뜨거운 열망을 각인한 채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멈출 수 없는(Unstoppable)기세로.
간발의 차이로 체커 플래그가 내려가며, 미칠 듯이 열광하는 관중들의 모습.
환호하는 스텝들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물을 참는 치프 매카닉(Chief Mechanic).
그리고, 경기엔 참여하지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헤드셋을 들고 플레이어와 함께 한 스테론의 눈빛.
그 모든 것이, 이 멋진 영상 속 스토리에서 플레이어가 승리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검은 화면 속 하얀 텍스트.
음악이 완전히 끝나고, 오로지 목소리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스테론이 말하는 소리가 관객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내가 말했잖아. 넌 해낼 수 있다고.
이젠, 네가 챔프다.”
[I told you. you can make it.
Now you are the champ.]
딥 다이버로 체험하는 5분간의 몰입형 스토리 컨텐츠.
그 내용은 보는 이의 마음을 들끓게 했지만, 그런데도 입을 여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이 멋진 체험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맛보려는 것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 앞의 영상에 집중할 뿐.
그리고 그런 침묵 가운데, 스테론의 마지막 대사가 검은 화면 가운데 떠올랐다.
[Congratulations.(축하한다.)]
그것은 이 영상의 마지막 대사이자 스테론이 영상 속 플레이어에게 던지는 대사였지만, 관객들에겐 중의적인 의미로 느껴졌다.
이 멋진 게임을 하게 될 게이머들에게, 개발사가 보내는 축하의 메시지로.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애당초 저 대사를 집어넣은 혁찬은, 만약 자신이 게이머라면 축하받고 싶은 기분일 것이라고 생각해 저 대사를 썼기 때문에.
만약 지금 이 지구상에 누군가 축하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 멋진 게임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유저들일 테니까.
관객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방금 보았던 게임이 보여준 모습은, ‘그 정도로’ 멋지게 느껴졌다.
시대를 뛰어넘은 몰입감을 선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PTW의 새로운 게임용 디바이스 ‘딥 다이버’.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본 구란트리스모의 행사용 영상은, 레이싱 게임의 팬이라면 진짜로 눈물을 흘리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로망’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츠노리는,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 그 로망이 모두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대놓고 영상의 마지막임을 알 수 있는 텍스트가 나왔음에도, 관객들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눈앞에 떠 있는 텍스트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관객의 반응이 저렇게 조용하면, 발표자는 불안감을 가지게 마련이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자신이 준비한 것이 관객의 기대와 너무 다른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지금의 침묵은, 눈보라컨에서 디아볼로4를 기대하던 유저들에게 디아볼로 ‘임모탈’을 공개했을 때처럼 어색한 침묵이 아니었다.
여운.
카츠노리는 지금의 침묵이 관객들이 잠겨있는 여운의 잔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때때로 인간은 너무 멋진 것을 볼 때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이 본 것에 압도당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런 관객들이 모르는 점은, 카츠노리가 아직 구란트리스모의 놀라운 점에 대해서는 하나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이번 영상의 목적은, 오로지 새로 추가된 ‘커리어 모드’에 대한 느낌만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레이싱 게임의 팬이 아닌 사람들도 게임에 흥미를 가지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상이었다.
그리고 카츠노리는, 이제 진짜로 레이싱 게임 팬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게임 소개’를 할 시기임을 떠올렸다.
-딱-
그가 손가락을 다시 튕기자, 2만명의 참가자들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가상’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의 이벤트 장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앞엔, 영상이 시작되기 전처럼 마이크를 쥐고 있는 카츠노리가 여전히 관객들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입이 귓가에 걸릴 듯한 미소를 짓고서.
카츠노리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뒤늦게나마 환호성을 지르려는 관객을 향해 말했다.
“환호는 잠시 미뤄주세요.
저희도 압니다. 방금 그게 끝내주게 멋지다는 거.
하지만 아직 소리 지르기는 이르거든요.
저흰 아직, 겨우 저희가 PTW와 새롭게 만든 커리어 모드에 대한 소개만을 했을 뿐이니까.
저희가 준비한 건, 더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관객들에게 외쳤다.
“그럼 지금부터, 세계 최고의 레이싱 게임이 얼마나 멋진 모습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께 소개하겠습니다!”
“Yeeeeeeeeeeeeeeeeaaaaah!!”
“미친! 방금 건 진짜 미쳤어!! 근데 더 있다고?! 제 정신이냐?!?!”
“포르샤! MS! 보고 있냐?! 이제 시대는 구란트리스모가 지배한다!”
“역시 PTW가 최고다아아아!!! 폴리포디 사랑해요!!!”
대놓고 ‘세계 최고’를 언급하는 자신감.
그리고 ‘그것보다 더’를 언급하는 카츠노리의 목소리는, 그가 환호성을 미뤄달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미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