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우주 전함 함장의 로망
“우주 전함의 함장이라···.”
잠시 고민하던 현주가 상혁에게 물었다.
일단 듣는 것만으로도 멋질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상혁이 그리고 있는 구체적인 그림에 대해 듣고 싶어서.
“우주 전함이 나오는 작품이라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 어떤 느낌으로 만들 생각이야?”
“말 그대로, 우주 전함의 함장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게임이요.”
벽 전체가 화이트 보드로 되어있는, 회의실의 반대편 벽으로 이동한 상혁이 마커를 뽑아 들고 현주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기본적인 플레이 플로우 자체는 인디 게임인 FTL(Faster Than Light)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플레이어가 작은 함선부터 시작해서 우주를 돌아다니며 부품과 기술, 선원을 구해가며 자신의 함선을 업그레이드 해 나가는 거죠.
탐험 페이즈에서는 항로를 결정하거나 플레이어에게 제시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전투 페이즈에 돌입하면 함교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전함의 승무원들을 지휘하면서 전투지시를 내리는 거죠.”
“진짜 함장처럼?”
“진짜 함장처럼.”
상혁은 보드 가운데 세로로 긴 줄을 그었다.
그리고는 왼쪽엔 [시뮬레이션 파트], 오른쪽엔 [배틀 파트]라는 단어를 적었다.
“시뮬레이션 파트는 모든 상황이 플레이어의 결정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영돼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항구에 도착해서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선술집에서 한잔하면서 정보를 구하거나 선원을 모집한다거나, 혹은 조선소에 가서 함선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부속을 구한다거나, 아니면 퀘스트에 나온 대로 누군가를 만나는 미션을 플레이하려 한다면 그건 그냥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UI조작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실행되게 되는거죠.
[선술집에 간다] 버튼을 누르면 바로 선술집 화면으로 이동될 것이고 행성마다 디자인이 다른 SF분위기 물씬 나는 공간에서 외계인 바텐더가 넘기는 술을 홀짝이며 대화를 하게 되는 식으로.”
“플레이어가 걸어가는 파트가 없다는 거네? 아까 말한 VR멀미 때문에?”
“그것도 있고, ‘스페이스 시티즌’처럼 외계 행성을 돌아다니는 것도 충분히 멋은 있겠지만, 솔직히 길 찾는 것도 그렇고 그거 구현하는데 드는 노력을 다른 데 쓰는 게 더 현명할 테니까요.”
“이해했어.”
“아무튼, 그런 시뮬레이션 파트에서, 플레이어는 다른 장소로 이동 중에 랜덤 이벤트와 조우하기도 하고, 그 행성 출신인 선원에게 안내를 받는다거나 플레이어가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를 받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어요.
장소의 이동 과정은 생략되겠지만,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벤트 자체는 충실하게 전부 1인칭 시점으로 체험할 수 있죠.”
“이벤트라면 어떤 종류를 말하는거야?”
“예를 들면 ‘우주 전쟁’에 나오는 포드 레이싱을 구경하러 간다거나, 혹은 이벤트 상황에 따라 사건의 증인으로 법원에 출두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변호를 맡기도 하고, 아니면 우주 의회에 나가 수백 명의 외계인 대표들 앞에서 우주에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위협에 대해 증언을 하기도 하고, 범죄 현장에서 증거를 찾아 진범을 찾기도 하겠죠.”
“실제로 돌아다니는 공간을 만드는데 쓰이는 노력을, 차라리 이벤트 볼륨에 몰빵하겠다는 이야기구나?”
“맞아요.”
실제로 돌아가는 게임의 느낌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현주는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단순히 항구에서 함선의 업그레이드나 선원 모집만 수행하고, 우주를 돌아다니며 싸우는 것이 전부인 게임이라면 조금 밋밋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상혁이 말한 것처럼 이벤트의 볼륨을 늘려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가지는 재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꽤 재미있는 게임이 될 것 같아서였다.
“계속 설명해봐.”
“기본적으로 이 게임의 시뮬레이션 파트에서 살리고자 하는 건, 우주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형태의 ‘사건’들의 한가운데 유저가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예를 들어 구하려는 선원이 한 무법 행성에서 노예 신분으로 잡혀있는 검투사이고, 오늘 있을 경기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할 운명이라면, 플레이어는 자신의 선원을 동료로 전투에 참가시켜서 그 선원 후보를 구하게 만든다던가, 결정적인 순간에 함선을 불러서 경기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선원 후보를 빼돌려서 우주로 튀는거죠.
물론 그렇게 했을 경우 해당 세력이랑 전쟁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오, 뭔가 영화 같아!”
“맞아요. 이 게임의 목표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거니까.
그리고 배틀 파트 역시, 그런 느낌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상혁은 자연스럽게 배틀 파트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갔다.
“물론 버튼을 눌러서 홀로그램 느낌으로 UI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거나, 잠시 TPS시점으로 돌려서 우주선 외부의 전투 상황을 영화 같은 느낌으로 감상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게임의 전투 파트에서 플레이어가 보게 될 화면은 이런 느낌이 되죠.”
상혁은 화이트 보드에 함선의 함교를 비추는 1인칭 시점의 그림을 그렸다.
선원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리에 앉아있는 함장의 시선으로.
“함교의 모습 자체는 유저가 함선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계속 바뀔 거고, 선원들의 모습도 유저가 누굴 고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항해사, 메인 AI, 조타수, 오퍼레이터, 전술 장교 등의 ‘승조원’들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고, 거기에 유저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여러 스크린이 배치되어 있을 거예요.
적 함선의 종류라던가, 현재 함선 내부 상황이라던가.
그리고 모든 정보는 UI나 스크린으로도 파악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함선의 보고 체계를 통해서 파악하게 돼요.
‘워프 드라이브까지 카운트 5! 4! 3! 2! 1!’이라던가,
‘남은 에너지 실드 잔량 35% 이대로 공격당하면 2분 안에 뚫립니다!’라던가.
‘좌측 5번 구역 피탄! 화재 발생! 현재 화재 진압 중입니다!’
‘에에잇! 좌현! 탄막이 얇다! 뭐 하고 있나!!’
같은 느낌으로 승조원의 보고에 맞춰서 플레이어가 지시를 내리면서 게임을 하게 되는거죠.
그 전투 자체는, 시뮬레이션 파트와는 다르게 실시간으로 이루어질 거고요.”
“오오, 뭔가 멋질 거 같아!”
“멋지게 느껴지게 만들어야죠. 함선이 피격당하면 굉음과 함께 함교가 흔들리면서 화면과 동시에 선원들이 비틀거린다던가, 혹은 무리하게 동력을 끌어 쓰면서 조명이 나간다던가, 엔진이 피격 당하면서 비상 전력으로 전환되며 조명의 색이 변하거나, 강한 충격에 천장의 구조물이 무너져 내린다거나 하는 연출이 들어갈 거예요.”
그렇게 말한 상혁이 현주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걸 방금 테스트하신 PTW VR로 플레이한다고 상상해보세요.”
현주는 상혁의 말대로 게임의 모습을 상상했다.
조금 전 자신이 체험했던 그 엄청난 몰입감을 주는 기기로, 상혁이 말한 게임을 플레이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것은 SF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도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엄청날 것 같은데···.”
현주가 말하자 상혁이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 게임의 백미는, 사실 전투 파트가 아니에요.”
“어? 그래? 일단 설명만 들으면 전투 파트가 제일 박진감 넘치고 멋질 거 같은데?”
“하지만 실제로 해 보면,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건 상황에 따라 내릴 수 있는 제한적인 결정뿐일 테니까.”
“무슨 소리야?”
“예를 들어 전투 중에 조리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쳐요. 그럼 뭘 해야겠어요?”
“불을 꺼야겠지?”
“그렇죠. 불이 났다는데, 그걸 그대로 방치 할 수는 없잖아요? 물론 유저가 미리 함선에 자동 소화 설비를 배치했거나, 아니면 아예 화염 데미지에 면역인 선원을 데리고 있거나, 혹은 그 구역의 산소를 차단해서 불이 자동으로 꺼지게 만든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겠지만, 결국 ‘불을 꺼야 한다’라는 결론은 바뀌지 않아요.
다른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할 순 있겠지만요.”
“그럼 네가 생각하는 이 게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뭔데?”
“전략 파트죠.”
상혁이 말했다.
“이 게임에서, 전투는 크게 두 종류가 있을 거예요.
준비된 전투와 긴급 전투.
긴급 전투는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워프한 지역에서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서 거기에 휘말리거나, 혹은 이동 중에 갑자기 적 함선이 숨어있다. 기습한다거나 해서, 유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벌어지는 전투죠.
그때는 선원 전체를 긴급 전투 배치한 다음 바로 전투에 들어가요.
당연히 선원들의 숙련도에 따라서, 대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죠?”
“시간이 걸린다는 게 무슨 뜻이야?”
“예를 들어 갑자기 나타난 적을 사격하려고 해도, 포탄을 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거나 주포에 에너지를 충전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식으로요.
그때는 일단 상시 대기 중인 무기들로 대응하면서, 시간을 벌어서 적을 요격하는게 메인 플레이가 되겠죠.
혹은 갑자기 적이 함선 안으로 전투원들을 텔레포트 시킬수도 있고요.
그때는 이쪽도 긴급하게 전투 요원들을 해당 세션으로 출동시켜서 적과 백병전을 펼치게 해야겠죠.
적이 너무 많으면, 실드로 에너지를 돌려서 다시 워프가 가능할 때까지 버틴다거나 하면서.”
“오, 그것도 나름 재미있겠다.”
“하지만 그건 아까 말했던 ‘상황에 따른 대응’을 하는 것이고 진짜 전투는 ‘준비된 전투’에 있죠.
그건 퀘스트를 통해서 발생하는 전투라던가, 아니면 이쪽에서 적 함선을 먼저 색적하는데 성공했을 때 발생하는 전투에요.
그때는 긴급 전투와 다르게 과정 하나가 더 들어가죠.”
“그게 뭐야?”
“전략 페이즈요.”
상혁은 화이트 보드에 마커로 기다란 타원 두 개를 그렸다.
하나는 붉은 색으로, 하나는 푸른색으로.
“이 붉은 색이 적 함선이고, 푸른색이 플레이어의 함선이라고 치죠.
이런 식으로 홀로그램으로 전함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략 페이즈가 실행됩니다.
이때 플레이어가 함선에 설치한 AI 오퍼레이터와 전술 장교가 플레이어에게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전략에 대해 제시를 해요.
예를 들어 적 함선이 아군에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통신탑이 있는 자리를 때려 부수고 워프로 도망치자거나, 혹은 아군 전투원들을 적 함선 내부로 워프시켜서 적의 실드 제네레이터를 무력화 한 다음 공격을 시작하자는 식으로요.
플레이어는 그렇게 주어진 선택지 중의 하나를 고르거나 아니면 다른 전략을 골라서 전투를 개시합니다.
사실 이건 1:1 배틀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지만, 다대다 전투에선 의미가 큰 페이즈라고 볼 수 있어요.”
“어? 다대다 전투도 지원하는 거야?”
“멀티도 지원할건데요?”
“우와아···.”
“우주 전함이 나오는 게임인데, 1:1 배틀만 할 수는 없죠. 수백 대의 전함이 우주의 별처럼 반짝이는 가운데서, 자신의 전함을 타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로망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 그게 돌아갈까?”
“돌아갈 거에요. 트릭이 있으니까.”
“트릭?”
“대규모 전투에서는, TPS 시점을 막아두면 돼요.
그럼 유저가 볼 수 있는 건 홀로그램으로 된 전투 상황판이랑 함교 유리창으로 보이는 제한된 전투 화면이 전부가 되겠죠.
보이는 부분만 렌더링 하게 만들면 소모되는 시스템 자원의 양을 극도로 줄일 수 있어요.
안 보이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시스템이 시뮬레이션으로 처리하고요.
물론 STC로 최적화가 얼마나 가능하냐에 따라 달렸지만, 가급적이면 TPS 모드로 전투 장면이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싶긴 하네요.”
상혁의 말을 들은 현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보고 싶다.”
“어쨌든, 그런 전략 페이즈에서 유저는 자신의 함선 스펙, 그리고 상대의 함대 규모, 보유하고 있는 무기의 종류와 화력, 주변에 사용할 수 있는 지형지물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통해 전투를 어떻게 끌고 갈지 결정할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운 전략을 통해서 전투를 하다 발생하는 변수에 대해 실시간으로 대응을 하면서 전략을 수정하게 되겠죠.
대부분의 유저는 실시간 전투 파트가 주는 압도적인 멋을 보고 게임을 시작하겠지만, 결국은 게임의 시스템에 익숙해지면서 전략 파트에 중독돼서 게임을 계속하게 될 거에요.”
“그건 MYOM이랑 비슷하네.”
“그렇죠.”
현주의 말대로, MYOM역시 처음엔 화려한 모션과 이펙트에 이끌려 게임을 시작하다가, 결국엔 마나엔진이 가진 깊이에 매료되어 유저를 마법 연구의 길로 빠져들게 만드는 게임이었다.
이제는 게임에서 마법을 조작하는 시간보다, 마법서를 보며 마법 이론을 공부하고 촉매를 가지고 마법을 연구하는 시간이 더 긴 게임으로 유명할 정도로.
그러나 MYOM이 아직도 수많은 유저들로 하여금 7세대 콘솔인 X-BOX 360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매력은, 단순히 ‘쉽게 끌리는 요소’와 ‘깊이 빠져 들만한 요소’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두 요소가 함께 시너지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가장 눈에 잘 띄는 전투가 재미있는 것도 중요하고, 깊이 빠져 들만한 전략이 재미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깊이’를 주는 요소와 ‘화려함’을 주는 요소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거죠.
아무리 전투가 화려하고 멋져도 깊이가 없다면 금방 질리게 마련이고, 아무리 전략이 재미있어도 전투가 밋밋하면 게임을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니까요.”
“그건 맞는 말 같아. 실제로 연출이 멋져서 시작한 게임인데, 나중엔 오히려 스킵하고 싶어지는 게임들이 많으니까.”
“그게 두 요소 가운데 시너지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제일 직관적인 예가 슈퍼 로봇 대전이라고 할 수 있죠.
매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참전 작이랑 전투 연출에 집착하게 만드는데, 정작 게임을 할 때는 필살기 연출만 몇 번 보다가 전투 연출 꺼놓고 계속 시뮬레이션 파트만 하게 되잖아요?
저는 이 게임은 그런 게임이 되지 않았으면 해요.”
“이해했어. 자연스럽게 전략 페이즈에서 유저가 선택한 전략이, 전투의 흐름을 만들게 하고 싶다는거지?”
“CEO가 게임에 대해 잘 아시니까 개발자가 설명하기가 쉽네요.”
상혁이 웃으며 말하자, 현주가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헤헤···. 아무튼,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줘.”
“이걸로 부족해요?”
“그냥, 난 상혁이 네가 게임 설명하는 걸 듣는 게 좋거든.”
현주의 말에 상혁도 미소지었다.
그녀의 말은, 기획자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칭찬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두 사람은, 퇴근 시간이 넘어가도록 PTW VR을 위한 새 게임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후반엔 게임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보았던 SF 영화에 대한 토론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두 사람에게 있어 한없이 즐거운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개발자가 자신이 만들 게임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게임 개발과정에서 가장 즐거운 것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현주가 시계를 보며 말하자, 상혁도 자신이 휴대폰을 보며 이야기했다.
“그러게요. 저녁도 못 먹었네.”
“배가 고픈 줄도 몰랐어.”
“저도요.”
현주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체크 했다.
CEO가 된 이후로, 그녀는 거의 하루에 100건에 가까운 결제를 처리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상혁과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외도는, 역시나 휴대폰에 찍힌 수많은 워크패스트 알람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휴.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처리할 업무가 이렇게···.”
“무리하지는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상혁이 너도 지금 스크롤을 내리는 엄지손가락이 멈추질 않는데?”
“뭐, 그렇죠. 민준이한테 저 대신 자동결제하는 AI라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야하나.”
“만약 그런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괴상한 성격의 AI가 되겠네.”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칭찬이야. 난 너 같은 괴짜니까 이런 게임들을 상상할 수 있는 거로 생각하거든.”
그렇게 말하며 워크패스트 알람을 읽던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상혁이 현주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 아냐. 전에 십센트 회장하고 미팅 잡기 전에, 윈텔에서 미팅제안이 왔었다고 했잖아?”
“네.”
“그게 또 와서.”
“역시, 스컹크 웍스 때문일까요?”
“나도 그게 껄끄러워서 바쁘다고 미루고 있었는데, 상대가 그걸 알았나 봐.
‘윈텔에서 이직한 직원에 대한 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라고 보냈네.”
“그럼 스컹크 웍스 건은 아니네요?”
상혁이 말하자 현주가 짚이는 부분을 이야기했다.
“혹시 업무 제휴나 인수제안인가?”
“윈텔에서 업무 제휴를요?”
상혁은 현재 윈텔의 CEO를 맡고 있는 인물에 대해 떠올렸다.
애당초 스컹크 웍스에서 핵심 인력을 빼돌릴 수 있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그 사람을.
브라이안 크자르니크.
그리고 상혁이 기억하고 있는 그의 이미지는, 기술적 혁신보다는 원가 절감과 마케팅에 집중하는 타입의 경영자에 가까웠다.
‘윈텔에서 우리한테 바랄 만한 게 뭐가 있지?’
그때, 현주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상혁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
“또 뭐 있어요?”
“윈텔 말고 AME에서도 만나자고 하는데?”
“AME의 누구요?”
PTW는 윈텔과는 아직 협업을 진행한 적이 없었지만, AME과는 협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애당초 8세대 콘솔에 들어간 ‘콘솔 부스트’기능은, 해당 기능을 지원할 수 있도록 APU의 칩셋 설계가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래서 8세대 콘솔 APU는 SANY와 MS의 메인 칩셋 모두 AME와 PTW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협업은, AME의 임원인 니콜라스 도노프리오(Nicholas Donofrio)와 진행했었다.
그리고, 8세대 콘솔이 출시되면서 양사의 개발 협력은 자연스럽게 종료된 상태였고.
니콜라스가 어째서 다시 연락한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던 상혁이 현주에게 물었다.
“AME면···. 니콜라스 씨요?”
“아니, 이번엔 달라.”
“누가 만나자고 했는데요?”
“AME CEO. 리자 수.”
순간, 상혁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풀렸다.
어째서 지금 윈텔의 CEO가 애타게 PTW와의 만남을 원하는지, 그리고 AME의 CEO 역시 미팅을 제안한 것인지.
두 회사를 각각 독립적으로 놓고 보면 이유를 알기 어려웠지만, 두 회사가 동시에 컨텍을 해온 것을 보자 양사의 노림수가 보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물건’의 정체는, 상혁이 보기에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최근에 PTW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기술 중에,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기술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콘솔 부스팅 관련 요청이겠네요.”
“왜 그렇게 생각해?”
“AME는 원래부터 그 기술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윈텔은 지난번 갤럭틱 M 발표 이후로 이제야 알아차렸을 테니까요.
아마도 두 회사 모두, PC용 차세대 CPU에 콘솔 부스트 기능을 탑재하고 싶어 하는 거겠죠.
당연히, 경쟁사에서는 쓰지 못하게 하는 조건으로.”
“그렇게 할 거야?”
“정보를 가지고 조언하는 건 제 역할. 결정하는 건 선생님의 역할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현주에게 말했다.
“둘 다 만나보고, 결정은 선생님이 하세요.”
“좋아. 하지만 기술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으니까, 이번 미팅엔 상혁이 너랑 민준이도 함께 참여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어디부터 만나실 거에요? 아마 아직까진 윈텔이 PC시장 CPU 쪽에서는 강세니, 조건은 AME가 더 세게 걸 것 같은데요?”
상혁의 질문에 현주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예전에 상혁이 네가 했던 거, 나도 해보고 싶어.”
“예?”
“네가 고등학교 다닐 때, 유통사 관계자 두 명 불러서 했던 그거.”
“예!?!”
그녀의 말에 기억을 더듬던 상혁은 마리의 눈물 유통권을 두고 자신이 벌인 기행을 떠올리며 소리쳤다.
그때 자신이 벌인 행동은 게임 유통사의 영업사원 두 명을 두고 했던 객기에 가까웠고, 현주가 지금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그때의 두 사람과는 ‘급’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러나 현주의 태도는 당당했다.
적어도 본인이 알고 있는 PTW라는 회사는, 그 정도 객기는 충분히 부릴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결정은 양쪽 의견을 다 들어보고 해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만약 한쪽이 껄끄러워서 손을 뗀다면, 그쪽은 그 정도로 궁하지 않다는 의미가 되겠지.
키는 이쪽에 있어. 이럴 땐 좀 세게 나가도 돼.”
“그럼 선생님 말씀은···.”
“맞아.”
현주가 말했다.
십센트의 CEO, 망화텅과의 만남 이후, 좀 더 성장한 듯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윈텔과 AME, 그리고 PTW. 세 회사의 다음 미팅은, 삼자대면으로 진행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