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히어로가 되는 법
게임이 발매되면 지급되는 막대한 성과급과 별개로, 해당 게임을 개발한 작업자 전원에게 PTW가 제공하는 6개월의 휴가 기간은, 그 기간에도 월급의 100%가 온전히 지급되는 유급휴가였지만 실제로 6개월을 풀로 쉬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애당초 PTW 직원들이라는 사람들이, 집에 있어 봐야 게임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취미가 없는 천상 개발자만 모여있는 집단이기도 했고, 다들 게임 플레이보다는 개발 자체를 즐기는 성격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몇몇은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장기간의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일부는 6개월 동안 방학하는 기분으로 미친 듯이 밀린 만화를 보고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EOD와 RFU를 개발한 개발팀 모두가 장기간의 발매 보상휴가 기간을 마치고 전원 회사에 합류하여 차기작을 위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이제부터 휴가 기간이 시작된 OGC 개발팀이었지만, 특이하게도 OGC 개발팀에서는 ‘차기작 프로젝트가 뭔지 보고 휴가 여부를 결정하겠다’라는 괴상한 의견을 내놓은 상태였다.
차기작 기획을 보고 재미있어 보이면 휴가를 반납하고 바로 개발에 참여하고, 만약 좀 별로 같으면 휴가를 다녀오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상혁은 MYOM의 핵심 개발자들이라 할 수 있는 8명의 탑주들과 거의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선행기획 과정을 거친 신규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그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상혁이 직접 주도하여 오픈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꽤 오랫동안, PTW내부의 프로젝트들은 직원들이 낸 아이디어를 상혁이 다듬어서 출시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상혁이 CCO의 권한으로 자신의 프로젝트를 강제적으로 개발 확정시킨 것은 아니었다.
직원 전체가 참여하는 내부투표를 통해 PTW가 차기작을 결정하는 프로세스가 이제는 완전히 회사 내부에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상혁은 자신이 탑주들과 함께 오랜 기간 만들어온 ‘Project Hero’의 기획을 내부 심사 페이지에 등록시켜 직원들의 평가를 받았다.
그것도 기획 참여자의 이름을 넣지 않은 무기명으로.
그리고 그 프로젝트는 기획안이 올라간 지 1주일 만에 기존에 차기작으로 유력하게 지목되던 나머지 프로젝트들을 모두 제치고, 압도적으로 1위 자리를 차지하며 최우수 기획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좋은데?”
결과 페이지를 보며 상혁이 중얼거리자, 민준이 다가와 말했다.
“좋은 기획이잖아. 오랜 기간 다듬은 만큼, 퀄리티도 좋았고. 올린 시점에서 1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올린 거 아냐?”
“그거야 그렇긴 하지.”
“근데 왜 그렇게 똥씹은 표정인데?”
민준의 말대로, 결과 페이지를 보고 있는 상혁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의 기획이 열광적인 호응 아래 가장 유력한 차기작으로 선정된 기획자의 표정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상혁이 그런 표정을 짓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생각보다 참가율이 너무 높다.”
2차 NE컨벤션을 위한 프로젝트부터 적용된 투표 시스템에는, 해당 프로젝트에 표를 던지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자신은 개발팀에 참여하고 싶지 않지만 PTW의 차기작으로써는 좋은 기획이라는 의사를 표현하는 ‘Good idea’ 버튼을 눌러 투표에 참여하는 방법.
그리고 만약 해당 프로젝트가 개발 진행 되게 된다면 자신도 해당 프로젝트의 팀에 참가하여 함께 게임을 개발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I'll be with you’ 버튼을 눌러 투표에 참여하는 방법.
전자는 게이머로써 그런 게임을 PTW에서 개발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발자로서 해당 게임을 함께 개발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등록된 Project Hero는, PTW게임 치고는 이례적으로 전체 개발팀의 90% 이상이 ‘I'll be with you’를 눌러 개발 참여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자신도 팀의 일원으로써 함께 이 게임을 완성해보고 싶다고.
그리고 상혁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도 이 높은 ‘개발 참여 희망 비율’ 때문이었다.
“이걸 다 들어주면 나머지 프로젝트는 진행 못 한다고.”
상혁이 말하자 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럼 이번엔 이거 하나만 만들면 되지. 애당초 개발자들의 의견이 이리저리 나뉘니까 동시에 3개씩 개발한 거 아냐? 이번엔 운 좋게 하나로 몰렸으니 하나에 집중하는 건 어때?”
“그 전에 1위 하던 프로젝트도 있잖아. 왠지 기회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상혁의 말을 들은 민준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상혁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적어도 이번 프로젝트에 한해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어? 왜?”
“여길 보라고.”
민준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자, 상혁은 그 손끝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상혁이 Project Hero를 올리기 전에 계속 1위를 차지하고 있던 프로젝트인 ‘가든 크래프트’의 메인 기획자.
‘로버트 미첨’의 이름 옆에 붉은 색의 투표 타입 표시 아이콘이 붙어있었다.
[Robert Charles Durman Mitchum - I'll be with you]
***
보통 프로젝트가 결정되고 나면 해당 프로젝트가 진행되기 프로젝트의 초안을 작성한 발안자가 주최하는 회의가 열린다.
그것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참가 의사를 밝힌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만들려는 기획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떤 재미를 주려고 하는지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하는 자리였다.
1차 NE 컨벤션을 준비하는 시기에 PTW에 참여하여 TAW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이후에 OGC의 개발팀에서 개발을 담당했던 로버트 찰스 더먼 미첨(Robert Charles Durman Mitchum)은 이전에 있었던 OGC의 미팅을 떠올리면서, 자신도 저 자리에 주최자로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 때문에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서 ‘가든 크래프트’의 기획을 하고 테스트 빌드를 만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얼마 전까지 내부 테스트 자리 1위를 공고히 유지하며 PTW의 차기 프로젝트로 주목받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개발자 한명이 대체 얼마나 오랜 기간 기획했을지 모를 엄청난 양의 기획서를 올리기 전까지는.
Project Hero.
기획의 제목만 보더라도 유저에게 슈퍼 히어로가 된 느낌을 전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그 기획은, 그가 읽는 내내 게임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상상 속에서, Project Hero는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게임 이상의 재미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프로젝트가 있으면서도, 그가 자신도 모르게 프로젝트 참가를 희망한다는 버튼인 ‘I'll be with you’를 클릭할 정도로.
그리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강당에 모인 지금까지도,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뭐, 시간은 많으니까.’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것을 위해 저렇게 재미있어 보이는 게임에 개발자로 참여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가 생각하기에 ‘가든 크래프트’는 아직 개선할 사항이 많기도 했고.
‘일단 이번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로버트 한명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아도, 이전까지 자신과 PTW의 차기작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다른 프로젝트의 팀장들이 수두룩하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로버트는 그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지금 올라온 Project Hero가 얼마나 PTW 내부 개발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조금 부럽게 만들고 있었다.
‘가든 크래프트는 1위였어도 참여 희망률이 30%가 안 됐었는데···.’
그것은 나머지 70%의 투표자가 ‘이런 게임이 있다면 해보고 싶긴 하지만, 내가 개발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로버트는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기획 퀄리티를 보면 몇 개월 준비한 내용이 아니었어. 분명 몇 년을 절치부심해서 만든 건데, 그것도 한명이 다 잡을 수 있는 기획의 양이 아니다.
분명 팀 단위로 묶여서 기획이 완성될 때까지 끝없이 다듬은 거겠지.
대체 누가?’
자신 외에 다른 프로젝트 팀장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다들 눈을 반짝이며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그 정도 퀄리티의 기획안을 작성한 개발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잠시 후, 단상으로 걸어 나오는 인물을 본 그들은, 한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위로 걸어 나와 단상 앞에 선 프로젝트의 발안자는, 지금까지 PTW의 모든 게임의 기획을 뒤에서 지원하며 전 세계 콘솔 게이머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임을 연속으로 출시한 PTW의 스타 개발자.
이상혁이였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꽤 오랜 기간 계속 남의 기획만 봐줬지 본인이 만들고 싶은 게임은 개발하지 않고 있었지. 이제 슬슬 움직이려는 건가?’
로버트가 그렇게 생각하며 무대를 보고 있을 때, 단상으로 올라온 상혁이 마이크를 집어 들며 인사를 했다.
“뭐, 자기소개는 안 해도 되겠죠?”
어차피 PTW에 다니는 개발자 중에 상혁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모르는 개발자는 없었기에, 상혁은 자기소개를 생략했다.
대신 상혁은, 뒤에 준비된 백스크린에 Project Hero란 제목이 떠 있는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띄우며 바로 프로젝트 소개를 시작했다.
이미 자세한 분량의 기획서로 대략적인 내용은 다 알고 있었지만, 발안자 스스로가 설명하는 게임의 매력은, 듣는이들을 순식간에 게임에 대한 상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이번 기획의 목적은, 매우 심플했습니다.
패드를 잡고 TV앞에 앉아있는 게이머들에게, 슈퍼히어로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죠.
물론 비슷한 게임은 이전에도 꽤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게임은 굳이 슈퍼 히어로가 아니어도 플레이어가 주인공이니만큼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영웅적인 과업을 대리 체험하게 해 주는 편이죠.
그래서 제가 포커스를 맞춘 방향은, 슈퍼 히어로의 영웅적인 과업보다는 히어로가 되는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자 화면에 모두에게 익숙한 마벨의 슈퍼 히어로, 거미의 능력을 갖춘 인간인 스파이디 맨의 사진이 떠올랐다.
“스파이디 맨은 유전자 조작 거미에게 물려서 슈퍼 파워를 갖게 된 히어로입니다.
3부작 버전 스파이디 맨 시리즈의 주인공은 과학관에서 거미에게 물리고 나서, 몸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집에 가서 쓰러지죠.
그리고 일어나보니 원래는 안경을 써야 했던 시력이 크게 향상되고, 쓰러지기 전에는 없던 근육이 몸에 생성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식장에서 좋아하는 여자애가 넘어질 뻔한 상황을 맞이하여 본인에게 초인적인 직감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죠.
자신을 때리러 온 양아치와의 싸움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주인공은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나갑니다.
거미줄을 쏴서 건물 사이를 날아가려다가 간판에 부딪히기도 하고, 후드티와 어설픈 가면을 입고 프로레슬링 시합에 나가 돈을 따보려고도 하죠.”
다음으로 나온 사진은 마벨의 경쟁사 소속 히어로인 ‘후레쉬’의 드라마 버전 사진이었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히어로의 사진을 띄워놓고 상혁을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다른 히어로도 비슷합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부여받아,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그 능력을 좋은 곳에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무능력자, 심지어 일반인보다 떨어지는 스펙의 주인공들이 초인적인 능력을 획득하고, 그것의 힘을 확인하는 과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합니다.
보통은 처음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힘을 개방했을 때, 다들 비슷한 소리를 지르더군요.
‘HEEEEEEEEEEEEEEHAAAAAAAAAAA!!!!!’
같은.”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는 상혁을 보며 개발자들이 움찔거리자, 상혁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당 슈퍼히어로의 배역을 맡은 연기자들도 생각했을 겁니다.
‘만약 내게 저런 슈퍼파워가 생긴다면, 난 어떤 기분일까?’하고요.
그리고 그들이 낸 결론은, 대체로 비슷하죠.
‘엄청나게 신나겠지?’라는 겁니다.
저는 그 감성을 유저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상혁이 프레젠터의 버튼을 누르자, 세상에 잘 알려진 수많은 슈퍼히어로들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혁은 그런 영상을 뒤에 놓고, 자신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있는 수많은 개발자 앞에서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스파이디 맨이 되고 싶어, 강철 인간이 되고 싶어, 천둥의 신이 되고 싶어.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게임들의 감성은, 그런 데서 기반을 둡니다.
이미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행보를 그대로 따라가는 데서 느껴지는 대리만족을 추구하죠.
그건 엄밀히 말하면 히어로를 따라 하는 것이지, 히어로가 된 기분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히어로가 된 ‘주체’가, 플레이어 자신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Project Hero의 가치이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간, 화면을 가득 메우던 슈퍼히어로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화면에 지금 상혁의 발표를 듣고 있는 청중들의 모습이 출력되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상혁의 말을 듣고 있는 PTW의 직원들의 모습이.
그리고 상혁은 갑자기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 화면을 보며 웅성거리는 개발자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저는 바로 여러분들이, 슈퍼히어로가 되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다시 화면이 전환되며, 상혁은 ‘슈퍼 히어로가 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넣으려 하는 3가지 요소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것을 위해, Project Hero는 주인공이 습득하는 능력이나 선택지와 관계없이, 다음의 공통 과정을 거쳐 히어로가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 과정은 바로 ‘자각’, ‘고뇌’, ‘결심’입니다.
플레이어는 마치 슈퍼히어로 영화의 1편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자신이 받은 알 수 없는 슈퍼파워에 대해 자각하며 그 힘을 하나씩 실험해 나갈 겁니다.
만약 플레이어가 얻은 힘이 ‘스파이디 맨’의 능력과 유사한 능력이라면, 다음과 같은 자각 과정을 거치겠죠.
‘어? 나 좀 세진 것 같은데?’
‘어? 나 좀 예민해진 것 같은데?’
‘어? 나 벽을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 슈퍼 점프도 되네?’
‘어? 손에서 거미줄도 나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며 ‘슈퍼 히어로 주인공’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그대로 느끼게 됩니다.
Project Hero에서, 게임은 유저에게 능력의 심볼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유저가 자신의 능력을 하나씩 확인하며 자신의 능력이 어떤 상징을 가졌는지 확인하고, 자신의 심볼을 결정하게 할 겁니다.
만약 플레이어의 능력이 하이퍼맨의 그것이라 하더라도, 플레이어는 굳이 하이퍼맨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후레쉬맨처럼 플레이할 수도 있죠.
그건 유저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심볼을 결정한 유저에게, 게임은 그에 맞는 고난을 던져줄 겁니다.
만약 힘 계열 초인이라면 때때로 더 강한 힘을 가진 빌런이 등장할 것이고, 아니면 플레이어가 가진 능력을 완전히 무력화 하는 역상성의 빌런이 등장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전까지 자각 과정에서 자투리 빌런들을 쓸어 담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플레이어는, 그 빌런들을 보며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겠죠.
그것이 ‘고뇌’입니다.”
그러자 화면에 녹색의 빛나는 돌 앞에서 괴로워하는 하이퍼 맨의 모습이 출력되었다.
“플레이어는 게임 플레이 과정에서 다양한 조력자와의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사이드킥일 수도 있고, 아니면 비밀을 공유하는 학교 친구일 수도 있으며, 여자친구일 수도 있고, 멘토일 수도 있죠.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전부 플레이어를 믿고 의지하며 응원한다는 거죠.
그런 그들의 조력 속에서, 플레이어는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 노력하게 됩니다.
만약 새 빌런을 잡는데 새로운 능력의 각성이 필요하다면, 조력자의 조언을 받아 훈련을 통해 해당 능력을 습득하고, 다른 히어로의 지원이 필요하다면 연락망을 통해 다른 히어로와 파티를 구성해 빌런을 잡을 수도 있겠죠.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주인공이 지키고 있는 도시에서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히어로들도 많아질 겁니다.
그 모든 과정은 플레이어의 의사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플레이어의 선택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상혁이 버튼을 누르자, 이번엔 무덤 앞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삼촌의 죽음 앞에서 영웅이 되기로 결심 한 ‘스파이디 맨’의 모습이었다.
“유저는 선택을 강요받을 겁니다.
후퇴할 것인가, 남에게 맡길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높은 자유도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합니다.
상성이 안 맞는다면 다른 히어로에게 맡기고 잠시 현장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게임을 편하게 플레이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의 빌런과 대적하려 한다면, 게임은 유저에게 매우 하드코어 한 난이도로 다가오게 되겠죠.
하지만 그 과정은 유저에게 한 가지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주게 될 겁니다.
일부러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으며, 고난의 길을 자처한 플레이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요.”
“그게 뭡니까?”
상혁의 설명을 듣던 로버트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상혁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상혁은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자부심(Pride)입니다.”
상혁이 말했다.
“저는 이 게임을 하는 유저들이 엔딩을 보며 자신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신의 선택으로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뚫고 나왔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되길 원합니다.
Project Hero의 모든 시스템은 그것을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고, Project Hero의 모든 스토리 루트는 유저가 엔딩을 향해 달리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도록 돕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유저는 정확히 자신의 한계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많은 빌런을 상대하며 자신의 능력을 강화하고 한계를 넘어 세상을 구하는 선택을 하게 되겠죠.
그로 인해 엔딩을 보는 순간, ‘아, 내가 한 모든 선택이 옳았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Project Hero의 개발 의도이자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그 정도 자유도를 구현한다는 것이, 개발에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압니다. 잘 알죠. 각 능력에 대한 기획을 설계하고 빌런과 주요 캐릭터들을 설계하는 데만 3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개발에 들어가게 된다면, 작업량이 말도 안 되게 많을 것도 잘 알고 있죠.
스토리의 분기가 많아질수록, 기획이 복잡할수록, 버그의 위험도 커지고 어느 부분에서 충돌이 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이 많은 인원이 전부 참여하더라도 개발 기간이 한없이 길어질 수 있는데, 그래도 진행하시려는 거죠?”
“예.”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뭐, 개발자가 게임 만드는데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겠습니까?”
상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만들려는 거죠.”
여기 모인 개발자 중에, 개발을 하는 데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로버트도 마찬가지였다.
로버트는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며 상혁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상혁은 그런 로버트를 보며 씩 웃어 보인 뒤 마이크를 들어 청중에게 말했다.
“로버트 씨 말대로, 분기와 이벤트 간 상호작용이 워낙 많은 게임이니 개발 기간이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어쩌면 개발 도중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겠죠.
‘이런 게임이 있으면 해보고 싶다’라는 망상을 하는 것과 그런 게임을 실제로 만드는 것 사이의 갭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저는, 이 프로젝트의 개발 기간을 3년으로 잡고 있고요.”
3년이면 PTW에는 매우 긴 시간이었다.
애당초 직원들의 평균 작업 숙련도가 업계 최고 수준인 PTW에서, 3년이란 기간은 업무 능력을 고려할 때 다른 개발사의 5~6년에 해당하는 기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러니 상혁이 말하는 ‘3년’이란 시간은, 이 게임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완성하는데 필요한 ‘난이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혁은 오히려 그래서, 이런 게임을 만들 회사는 오로지 PTW밖에 없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구현 난이도가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기획서를 앞에 두고도, 의지를 불태우며 눈을 반짝이는 개발자들이 모여있는 이 회사만이,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회사일 테니까.
이런 개발자들 앞에서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만이 중요할 뿐.
그것을 잘 아는 상혁은 마이크를 들어 PTW의 직원들을 향해 조용히 질문했다.
자신의 망상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빠질 것인지를.
“기획 의도에 대한 설명은 이대로 마칩니다.
누가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Who will be with me?)”
단 한 명의 직원도 빠짐없이 손을 드는 모습을 보며, 상혁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은, 자신이 상상하던 이상적인 개발사의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에.
“좋아요. 마치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분들이시군요.”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띄운 상혁이 말하자, 개발자들도 마주 웃어 보였다.
그리고 상혁은 그런 개발자들을 보고 마이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뛰어 들어갈 지옥 불에 관해 설명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