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패러다임 시프트
“오랜만입니다. 이상혁 씨.”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이주용을 보며, 상혁은 허리를 편 채로 악수를 나눴다.
이전에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는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청년의 눈은, 지금은 여유와 현명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물론 그 안에 잠들어있는 장난기는 여전했지만.
“CCO로 직책이 바뀌고 나서는 처음 뵙네요.”
상혁이 말하자 이주용이 웃으며 답했다.
“전보다 어깨에 힘이 많이 빠진 모습이군요. CCO자리가 체질에 맞으시나 봅니다.”
“원래부터 경영인 체질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저쪽이 소문 무성한 PTW의 여성 CEO, 김현주 씨겠군요?”
상혁의 뒤에 서 있는 현주를 보며 이주용이 말하자, 현주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네! 네 넵!! PTW의 C,CEO! 김현주입니다! 마,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손을 내미는 현주를 보고 이주용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리 긴장하실 필요 없는데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단한 기업의 경영자분께 그럴 수는 없지요!”
반응이 재미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주용이 좀 더 현주를 놀리려고 하자, 상혁이 그런 주용을 제지했다.
“저희 불쌍한 선생님 그만 괴롭히시고 오늘 부른 용건을 말씀해주세요.”
“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이주용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쪽에 서 있던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에게 인사했다.
“삼정전자 전략기획실 실장 이무석입니다. 글로벌 게임 업계에서 이름 높은 이상혁 씨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 전략기획실이라면 그 대한민국의 경제를 뒤에서 좌지우지한다는···.”
“그건 그냥 소문일 뿐입니다. 저희는 단순한 정보 분석기관일 뿐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래서, 전략기획실 실장님께서 어째서 이 회의에 참석하신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무석이 주용을 바라보았고 주용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석은 며칠 전 임원 회의에서 나왔던 자료의 편집 버전을 상혁 앞에서 브리핑했다.
상혁은, 그 분석자료를 보며 때로는 감탄을, 때로는 고개를 젓기도 하며 보고의 내용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석의 발표가 끝나자 작게 박수를 치며 무석을 향해 말했다.
“대단한 분석이네요. 저희보다 저희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때로는 안에서보다 밖에서 보는 것이 정확할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분석의 정확도와는 별개로, 지금 보여주신 발표의 내용이 도출하고자 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조금 우려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상혁이 말했다.
“말하자면 지금 삼정에서는 와플의 와이폰에 대응하기 위해서 저희가 콘솔 시장에서 MS에 제공한 수준의 메리트를 삼정 측에 제공해드렸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주용이 상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문제는, 저 발표의 내용만 보고는 도대체 뭘 제공해달라는 건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저희는 게임 개발사니까요. 갤러틱 폰 전용으로 돌아가는 전용 게임이라도 만들어달라는 이야기는······. 아니겠군요.”
상혁은 잠시 생각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런 의도라면 모바일 게임에 노하우가 있는 다른 업체에 컨택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 테니까. 게다가 정말로 모바일 시장의 판세를 바꿀만한 힘이 있는 게임이라면, 개발사에서 절대 갤러틱 폰 전용으로 출시하고 싶어 할 리도 없고요. 게다가 게임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순식간에 비슷하거나 개선된 게임이 나와서 양대 마켓에 출시되겠죠.”
그러자 무석이 상혁의 말에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일종의 딜레마죠.”
“옳은 판단이지만, 방향성 제시는 되지 못하네요. 구체적으로 저희 쪽에 요구하는 게 뭔지 알지 못하면, 저희도 도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주용이 상혁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라, 조금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불렀을 뿐입니다.”
“대화요?”
“저희 조사로는 알 수 없었던, MS와 코넥트 양산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듣고 싶어서요.”
그것은 말하자면 대화를 통해 이 상황을 타개할만한 힌트를 얻고 싶다는 이야기였기에,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혁에게 있어 삼정전자와 이주용은 적어도 전에 받은 도움의 보답으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상대였으니까.
“좋습니다. 무엇이 궁금하시죠?”
“가장 궁금한 건, 어째서 SANY측이 협력을 거부하였냐는 겁니다.”
“그건 의외로 간단합니다. 단순히 돈 문제죠.”
“돈이요?”
“SANY의 엔지니어들은 저희 코넥트의 프로토타입을 양산했을 때 발매 가능한 최소 단가를 570달러 정도로 잡았습니다. 그건 웬만한 콘솔 기기 가격에 육박하는 금액이었기에, 저희는 받아들일 수 없었죠.”
“하지만 전략기획실의 분석으로는 코넥트의 가격이 지금보다 훨씬 비쌌다 하더라도 충분히 팔릴만한 가치가 있는 기기라고 하던데요?”
“저희는 유저가 살만하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사길 잘했다고 느낄만한 가격을 원했으니까요. MS는 저희의 생각에 동의해주었습니다. 물론 어느 한쪽이 모든 부담을 질수는 없었기에, 저희는 그때까지 코넥트의 개발에 들어간 개발비 전부와 기술 사용료로 받을 수 있는 라이선스비를 전부 포기했죠. MS에서는 대당 100달러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고 발매를 진행하기로 했고요.”
“꽤 큰 손해 금액인데, MS에서 받아들였습니까?”
“어차피 게임기에 들어가는 부품이란 건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발매 시점에서는 초고성능의 칩셋이라 하더라도, 1년만 지나면 가격이 내려간 구형 칩셋이 되어버리죠.”
어깨를 으쓱하며 상혁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MS에서는 높은 이익률을 갖춘 산업용 코넥트도 함께 생산했습니다. 성능은 2배 정도 차이 나지만, 가격은 10배 가까이 차이 나는 물건을 만들어서 판 거죠. 거기에서 나오는 이윤과 시간이 지날수록 내려가는 생산비의 조합이, 코넥트를 그 가격에 계속 시장에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라 보시면 됩니다.”
“SANY는 그 사실에 대해 몰랐습니까?”
“그렇게 될 것이니 함께 하자고 이야기는 했었죠. 단지 SANY는 6세대 콘솔 시장에서 PS2라는 전설의 명기를 성공시킨 이후였기에, 굳이 그 정도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를 못 느낀 걸 겁니다. 결국, 코넥트의 보급과 성공은 안에 들어간 전용 타이틀이 얼마나 유저들에게 매력적으로 접근하느냐에 달린 것이고, 실제로 MYOM이나 저스트 댄스 시리즈, 코넥트 스포츠를 제외하면 코넥트는 그리 메리트 있는 장비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SANY에서 간과한 것은, 그 모든 단점을 씹어먹을 만큼 MYOM이 잘 뽑혀 나왔다는 거죠.”
그것은 한 시장을 두고 싸우는 두 회사가 회사의 명운을 걸었던 도박의 결과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도박이 그러하듯, 한쪽은 돈을 따고, 한쪽은 돈을 잃게 되었고.
단지 그뿐인 이야기.
그렇기에 상혁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삼정이 이 이야기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애당초 현재의 PTW에서 모바일 게임 개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만약 게임을 만든다 하더라도 업체 하나의 휴대폰 시리즈를 위해서 게임을 만드는 것은 말 그대로 바보 같은 짓이었기 때문에.
‘그건 게이머를 위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지.’
그때, 고민하는 상혁의 안색을 본 주용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멋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 삼정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들어있지는 않네요.”
“단순히 기업과 기업이 서로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업 이야기니까요.”
주용은 상혁이 말한 내용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한 나라의 정점에 있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날카롭게 다듬은 사업적 감각이 경종을 울리는 느낌.
그 감각의 실체가 무엇인지 잠시 고민하던 주용은 상혁에게 질문했다.
“지금 서로의 목적이라고 하셨죠?”
“예.”
“MS의 목적은 콘솔 시장에서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이라는 건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겠습니다만, PTW가 코넥트 발매를 통해서 이루려던 목적은 뭐였나요?”
주용의 말대로, PTW는 MS와의 협업에서 얻어낸 이득이 그리 크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MYOM이 막대한 판매량을 거두긴 했지만, 사실 코넥트의 개발에 들어간 시간과 인력, 자금을 고려하면 기술료와 개발료까지 포기하면서 얻어낸 성과로는 터무니없이 작은 이윤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주용의 질문을 받은 상혁은 주저 없이 자신이 코넥트 발매를 통해 이루려던 목표에 대해 말했다.
“유저를 얻었죠.”
“유저를?”
“무석 씨에게 들어서 아시겠지만, MYOM은 저희 PTW의 작품 중에서도 7세대 콘솔을 통해 발매된 게임 중 가장 커다란 성과를 얻어낸 작품입니다. 평점뿐만 아니라 판매량에서도 기록할 만한 성과를 거뒀죠. 아마 현재 PTW의 팬 중에 어떤 게임으로 PTW라는 회사를 접했는지를 물어본다면, 적어도 40%이상의 팬들은 MYOM이 첫 게임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상혁의 대답은 이전에 무석이 분석했던 ‘확장 전략’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주용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상혁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코넥트라는 장비 자체의 목적은, 기존의 게임이 주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유저에게 전달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패드를 들고 화면 안의 캐릭터를 조작하는 기존의 게임 플레이에서, ‘동작’이라는 요소를 불러옴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된 거죠.그리고 그 동작 인식의 정점에 서 있는 게임이 현재로서는 MYOM이라고 할 수 있고요.”
상혁은 살짝 강조하듯 말했다.
“그런 ‘새로움’을 통해서, 저희는 매번 저희의 팬이 아닌 유저들에게 저희의 게임을 어필합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콘솔 게임을 하지 않았던 유저가, 어느 날 TV에서 MYOM을 플레이하는 광고를 보면서 생각하는 거죠.
‘와, 저건 정말 마법사가 된 기분이 들겠는데? 한번 해볼까?’
그렇게 MYOM과 코넥트를 구매한 유저가 MYOM을 재미있게 플레이했다면, 그 유저는 저희 회사의 다른 게임으로 눈을 돌립니다.
‘오, 저것도 재미있어 보여.’
저희 게임엔 고유한 스타일이 있습니다. 다른 게임에서 얻기 힘든 경험을 제공하고, 몇 회차를 진행하던 매번 다른 재미를 주며, 게임을 하며 얻은 지식이 게임을 잘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지키죠. 저희의 그런 아이덴티티에 익숙해진 유저는, 저희 게임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게임도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을 거야.’
‘저 게임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주겠지.’
그런 ‘이미지’를 쌓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유저는 저희가 어떤 새로운 게임을 내놓더라도 PTW라는 브랜드를 믿고 게임을 구매하게 되겠죠. 저희가 주려는 경험이 무엇이든, 그 게임은 저희만의 재미를 담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매번 그렇게 새로운 게임을 만들려면 이전에 얻은 노하우를 전부 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경영적인 측면에서, 새 고객은 기존 고객을 유치하는 것에 비해 5배 또는 10배 이상의 더 큰 비용을 요구한다는 게 상식인데요?”
“압니다. 그래서 PTW가 매출 규모에 비해 이익률이 낮은 거니까요. 목표가 돈이라면, 지금 저희가 하는 방식은 가장 멍청한 방식이겠죠.”
“그게 모두 유저를 위한 것이라는 건가요?”
“매번 같은 게임만 플레이하기엔 인간의 삶은 너무 짧으니까.”
상혁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벽에 걸린 게임만 봐도 배가 부른 느낌이 들고, 전원을 켠 지 몇 년이 지난 낡은 게임기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 그런 게임들. 패키지를 보기만 해도 플레이했을 때의 즐거움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의 덩어리. 그래서 언젠가, 유저가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때 ‘적어도 난 PTW가 있어서 개쩌는 게이머 라이프를 즐길 수 있었지.’라고 생각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PTW의 존재 이유이자 목표입니다.”
상혁의 말을 들으며, 주용은 PTW라는 회사가 게이머들에게 어째서 그렇게 사랑받고 있는지, 그 이유를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토록 순수하게 자신의 고객들을 사랑하는 회사를, 사랑하지 않을 고객들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반면에 그런 상혁의 순수함은 주용의 기분을 무겁게 만들기도 했다.
자신이 아는 삼정이란 회사는, 저런 순수함으로 굴릴 수 있는 회사가 아니었기에.
기업마다 기업을 구성하는 직원들의 성향이 있고, 회사가 굴러가는 방식이 있다.
어설프게 누군가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했다고 그대로 그 방식을 따라 하는 것은, 가장 빠르게 기업을 말아먹는 방법의 하나였으니까.
그것을 잘 아는 주용은 결국 이 미팅에서 자신이 PTW에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했다.
삼정과 PTW는, 기업으로써의 성향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래도 저런 젊은이 같은 순수함은 참 보기 좋긴 하군.’
당연한 이야기지만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며 젊은 나이에 대기업을 이끌어온 주용의 주변 인물은, 주로 그 치열한 승진 전쟁에서 승리하여 핵심 임원에 도달한 능구렁이 같은 인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치에 능하고, 처세에 강하며, 뼈속 깊이 야심으로 가득한 그런 사람들.
대기업의 임원으로써는 전혀 결격 사유가 없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지금의 상혁과 같은 순수함과 고객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단지 어떻게 최적의 효율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 성과를 올릴 수 있을지만을 고민하는 비틀린 열정이 있을 뿐.
그렇기에 주용은 이 젊은 사업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받는 기업이 고객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제품을 만드는지를 오랜만에 떠올린 기분이 들었다.
“말씀하신 대로, 스마트폰 사업 분야에서는 PTW와의 협업이 삼정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군요.”
“도움을 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대화였습니다. 새로운 경험이라. 생각할 만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후는 삼정의 엘리트들이 그것에 대해 고민할 차례겠죠. 저희 갤럭틱 폰에도 SARI같은 패러다임 쉬프트를 불러일으킬 그런 기능을 넣을 수 있도록.”
‘패러다임 쉬프트라.’
스마트폰 시장은 어려운 시장이다.
콘솔 게임 시장보다 진입 난도는 낮으면서 매출 기대치는 훨씬 높은 시장이기에, 온갖 업체가 스마트폰이라는 플랫폼으로 가능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구현해 냈기 때문에.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들더라도 패드보다 불편할 수밖에 없는 조작감.
터치로 한정되는 입력의 한계.
화면의 20% 이상을 항상 손가락이 가리고 있어야 한다는 단점 등 스마트폰은 이상적인 게임 플랫폼으로 보기엔 그 ‘무지막지한 접근성’을 제외하면 문제가 많다고 할 수 있었다.
게임이 아닌, 뭔가 혁신적인 새로운 시도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어? 잠깐만?’
그때, 상혁의 머릿속에 뭔가의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게임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게 있지 않을까?’
인사를 하려고 일어난 상혁이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동작을 멈추자, 방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주용은, 상혁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무석을 손으로 제지하며 조용히 상혁이 생각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콘솔 게임의 세대마다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게임들을 내놓던 이 젊은 천재가, 이 자리에서 무엇을 생각하려 하는가를 궁금해하면서.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이 지난 후, 상혁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주용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쩌면.”
“어쩌면?”
“저희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상혁은, 방금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 주용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SARI같은 AI비서역할을 하는 AI를, 갤럭틱 폰 전용으로 개발해주시겠다는 겁니까?”
주용의 말에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설명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건 아닙니다. SARI는 기본적으로 AI 비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AI이고, 저희가 가진 커뮤니케이션 엔진은 오로지 유저와 함께 게임을 하며 ‘친구’ 역할을 하는데 특화된 엔진이니까요. 친구에게 미용실 예약을 부탁하거나 인터넷 검색을 부탁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럼 그 OGC라는 게임에 들어가 있는 AI엔진을 스마트폰에 이식해주신다는 의미입니까?”
“설마요. 그건 애당초 8세대 콘솔 성능을 풀로써도 연산력이 딸려서 각 콘솔 개발업체에 AI연산 전용 칩을 추가해달라고 요청해서 집어넣은 AI입니다. 절대로 현재의 스마트폰에서 돌아갈 스펙이 아니죠. 넣었다간 스마트폰이 손난로가 되거나 배터리가 광탈할겁니다. 게다가 같은 기능을 하는 독립적인 AI를 단순히 플랫폼을 옮기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죠. 그럼 아예 콘솔용으로 개발한 OGC를 스마트폰용으로 출시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뭐 그것도 사양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그럼 구체적으로 뭐가 가능하다는 거죠?”
“경험의 확장입니다.”
상혁이 말했다.
“집에 돌아온 OGC의 유저들은 티비 앞에서 8세대 콘솔을 가지고 OGC를 플레이할 겁니다. 자신이 커스텀한 개성 있는 성격의 친구들과 즐겁게 웃고 떠들며 게임을 즐기겠죠.”
OGC라는 게임에 대해서는 주용도 잘 알고 있었다.
무석의 보고서에도 8세대 콘솔의 가장 혁신적인 게임이 될 것이라 적혀 있었고, 단순히 보고 들은 내용만 보더라도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 것 같은 재미를 가진 물건이었기 때문에.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대부분의 게이머는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학교나 직장도 가야 하죠. 그때는 사랑하는 ‘친구’들과 잠시 헤어져 자신의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당연히, 게임기를 학교나 직장에 들고 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휴대폰은 들고 갈 수 있죠.”
상혁이 미소 지었다.
“만약 OGC 안의 AI 친구에게 모닝콜을 부탁하면, 다음 날 아침 갤럭틱 폰으로 그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와 자신을 깨우게 한다면 어떨까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갤럭틱 폰으로 게임 안의 AI 친구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다면요? 점심을 먹고 나서, AI 친구와 영상통화를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커뮤니케이션 엔진을 스마트폰에 이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건 불가능하죠. 하지만 그렇게 제한된 형태로 특정 기능만 살려서 만드는 것이라면, 커뮤니케이션 엔진 전체를 이식하지 않더라도 현존하는 스마트폰 사양에서 충분히 구현 가능할 겁니다. 와플이 SARI라는 비서를 자신의 유저들에게 주었다면, 삼정은 커뮤니케이션 엔진을 통해서 갤럭틱 폰 유저들에게 ‘친구’를 줄 수 있을 겁니다. 집에서는 함께 자신과 게임을 즐기고, 밖에서는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그런 친구를요.”
상혁의 말에 주용은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누군가에게 그것은 장난감 같은 기능일지 몰라도, 어쩌면 와이폰 유저들이 처음으로 갤럭틱 폰을 부러워하게 되는 강력한 핵심 기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매력적인 기능이긴 하나 실용성 측면에서는 SARI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혁은 그런 주용의 염려에 쐐기를 박는 말을 해 주어 그의 염려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아, 그리고 단순히 모닝콜만 해주는 그런 AI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
“메일 체크, 일정 관리, 점심 메뉴 추천,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법을 알려준다거나 필요하다면 업무 도우미 역할도 할 수 있겠죠.”
“분명 아까는 SARI같은 AI 비서와는 다르다고···.”
“물론 다르죠. 그건 비서고, 이건 친구니까요. 그건 명령하면 해 주는 거고, 친구는 부탁해야 해 주는 겁니다. 개념이 달라요.”
“기능적으로는 같고요?”
“막 대하면 삐져서 호출도 안 받을 테니 그런 부분은 좀 사람 같은 면이 있겠죠.”
“삐져서 명령을 안 듣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주용의 말에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믿으세요. 지금 제가 말한 형태로 구현하는 게 유저한텐 훨씬 매력적일 테니까.”
주용은 상혁의 판단을 믿었다.
적어도 유저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데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이 세계 최고의 전문가라 할 수 있기에.
“만약 그렇게 해 주신다면 삼정에서는 요구하시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바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 쪽도 아직 개발이 한창이고, 연동 기능관련 대사는 아예 새로 써야 할 테니까요. 그 분량도 분명 만만치 않을 거고요.”
“저희 쪽에서 지원해드려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정확한 지원 규모를 산정하기는 어려우니, 자세한 건 회사로 돌아가서 저희 CTO와 이야기해보고 정리한 제안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삼정 전자 본사에서 있었던 그 날의 미팅은, PTW에서 갤럭틱 폰 전용의 AI 엔진 개발을 검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주용은, 상혁과 미팅을 가진 지 3일째 되는 날, 상혁이 약속한 제안서를 받을 수 있었다.
갤럭틱 폰 전용의 AI엔진인 BFF(Best Friends Forever)의 구체적인 사양과 예상 기능.
그리고 삼정에서 해당 엔진 구현을 위해 만족하게 해야 하는 최소한의 스마트폰 스펙에 대한 사양이 적힌 제안서를.
그리고 그 안에는, 아직 부족한 스마트폰 성능을 가지고 완성된 AI 성능을 구현하기 위하여 연산을 보조해줄 클라우드 센터의 건설에 대한 개요가 적혀 있었다.
‘못해도 3조는 들겠군.’
물론 이 제안서는 초안이었기에 실제로 협업 과정에서 비용이 얼마가 들어갈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비용이 얼마가 되더라도, 주용은 반드시 그 비용을 지출할 용의가 있었다.
상혁이 제안한 이 제안서는, 어쩌면 2인자의 자리에서 계속 안주하고 있는 삼정이 와플이란 거물을 쓰러트릴 수 있게 만드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였기에.
‘근데 이건 뭐지?’
주용은 한눈에 보기에도 합리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제안서 사이에, 상혁이 끼워 넣은 조건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하 업무 협력 관계가 지속 도는 동안, PTW는 BFF엔진의 지속적 업데이트와 갤럭틱 폰에서의 독점적 서비스를 지원한다.
상기 조건은 갤럭틱 시리즈의 모든 기본 앱에 광고가 삽입되지 않는 동안만 유효하다.]
“우리 기본 앱에 광고가 있었나?”
주용의 질문에 옆에서 함께 제안서를 검토하던 무석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있지도 않은 광고를 넣지 말라고 하는거지?”
“나중엔 넣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혁 CCO는 그걸 막으려는 것 같군요.”
“어째서?”
“워크 패스트에도 광고 하나 들어가지 않은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광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향인 것 같습니다.”
“광고라.”
주용이 말했다.
“까짓거 안 넣으면 그만이지. 우리가 무슨 광고회사도 아니고.”
주용이 시원하게 말하자 무석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시각, 상혁은 자신이 보낸 제안서를 다시 검토하며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100만 원 넘게 주고 산 스마트폰에 전단지 수준으로 광고가 넘치는 건 납득이 안 되지.”
그렇게 상혁은 나중에 두고두고 갤럭틱 폰의 유저들이 삼정을 욕하게 만드는 요소 하나를 제거했다.
이전에 자신을 도와주었던, 이주용의 1주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는 제안서를 내려놓으며, 다른 종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좋아. 이걸로 한 건 낙찰이니 이제 본격적으로 이걸 진행해볼까?”
[PROJECT: DOLL ‘I’ CONTEST]
상혁이 집어 든 기획서.
그것은 삼정과의 협업 때문에 잠시 미뤄두었던, 전 세계에 있는 ‘끼 있는 돌아이’들을 모으기 위해 상혁이 준비한 기획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