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첫번째 지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RFU(Rhythm For Us)의 모든 더빙 작업을 마치고 만족스런 표정으로 귀국길에 오른 성연은, 자신이 만든 게임이 다음 NE컨벤션의 핵심 컨텐츠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추호도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시골에서 만난, 순진한 학생들과의 만남.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에피소드들.
서툴던 학생들의 연주가 끝없는 노력을 통해서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그 노력의 피날레를 대회 결승전에서 터트리는 모습은 플레이하는 유저로 하여금 정말 잘 짜인 음악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었으니까.
분명 ‘감동’이란 측면에서, RFU의 스토리 라인은 플레이어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음악은 위대하니까.’
성연은 누구나 멜로디만 듣고도 알아차릴 수 있는 익숙한 클래식 곡 외에도, 오직 이번 게임에서 연주되기 위해 자신이 작곡한 음악들, 그리고 이전에 자신이 참여한 게임에서 가장 평판이 좋았던 음악들을 게임 안에 삽입해 놓았다.
PTW의 팬이라면 누구나 게임을 할 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체험할 수 있는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느낌일 것이고, 이 게임을 통해서 PTW의 게임에 입문하는 유저라도 분명 이 게임의 매력에 푹 빠질 것이다.
자신의 지도를 받으며, 게임의 처음부터 함께 제작에 참여한 연주자들도 모두 성연의 생각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번 2차 NE컨벤션의 피날레를 차지할 자격은, 분명 자신들에게 있을 거라고.
개발에 참여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PTW에 도착하고 나서,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나머지 2개의 게임을 테스트 해 보기 전까지는.
“비엔나는 어땠어요?”
“아, 좋더라. 한식이 좀 많이 그립긴 했지만.”
상혁이 타 준 커피를 입에 가져가자 향긋한 커피향이 코를 간질였다.
원래는 설탕이 없으면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성연이었지만, 상혁이 주는 커피는 즐거운 기분으로 마실 수 있었기에, 성연은 향을 즐기며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아, 이걸 마시니까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네.”
“비엔나도 커피로 유명하지 않아요? 비엔나 커피라고 이름도 가지고 있잖아요.”
“어. 녹음실 근처 카페에서 엄청 많이 마셨지. 그래도 네가 타준 커피가 좋아. 달진 않아도, 정성이 가득 들어간 느낌이라서.”
그렇게 커피를 홀짝이는 성연에게, 상혁은 업무 진행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이미 워크 패스트로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은 된 상황이었지만, 프로젝트 리더로써의 작업에 대한 완성도를 성연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기 때문에.
“전체 녹음 작업이 다 완료된 거죠? 이렇게 연주자들을 전부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오셨다는 건, 작업의 결과물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계시다는 이야기일거고요.”
“그렇지.”
커피잔을 든 채로, 성연이 미소를 지었다.
“장난 아닐걸?”
“그래요? 형이 그정도로 평가할 만한 수준인가?”
“그렇지. 적어도 음악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건 거의 감동의 덩어리 같은 물건이니까.”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시니 좋네요. 사실 나머지 두 게임이 전부 지금 말도 안 되는 퀄리티로 개발 중인 상황이라, 형네 프로젝트에 뭔가를 좀 더해줘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거든요.”
“아마 필요 없을 걸? 아직 다른 게임은 해보지 않았지만, 지금 기분 같아서는 전혀 질 것 같지 않아.”
“그래요? 그럼 내기나 할까요?”
“내기?”
“지금 형이랑 같이 녹음에 참여했던 연주자들이 회사에서 나머지 프로젝트를 둘러보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느 쪽을 더 높게 평가하는지, 그걸로 내기해보는 건 어때요?”
“이번엔 네가 질걸? 우리는 마지막 녹음이 끝나고 진짜로 한명도 빠짐없이 그 자리에서 감동받아서 펑펑 울었거든. 그에 반해 PTW본사에서 지금 만들고 있는 게임은 그래봐야 FPS랑 미연시잖아. 음악하는 사람한테 음악에 대한 찬가보다 멋진 게 뭐가 있겠어?”
“그래서, 쫄?”
“쫄이 뭐야?”
“쫄으셨냐고요.”
미소 지으며 상혁이 건넨 도발에 성연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10만원 빵.”
“좋아요.”
상혁은 손에 찬 전자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마 곧 결과를 알 수 있겠죠.”
상혁의 말대로, 그 시각 개발 2팀의 테스트 룸으로 들어갔던 연주단 멤버들은 성연을 찾아 부실을 향해 복도를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노크도 잊은 채, 부실의 문을 쾅하고 열고는 쇼파에 앉은 성연을 향해 외쳤다.
“선생니이이임!!”
음악이라는 것은 소통의 예술이다.
그리고 성연은 몇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수십 명의 멤버를 데리고 먼 타국에서 완벽한 게임을 위해 수만 번의 합주를 진행했었고.
그렇기에 지금의 성연은 단원들의 표정만 봐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성연은, 자신과 몇 달을 함께한 팀 멤버들의 충격에 빠진 표정을 보면서, 자신이 상혁과의 내기에서 또 졌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필사적으로 완성한 결과물보다 PTW본사에서 만들고 있는 ‘게임’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도.
***
“미친 이거 뭔데? 나 비엔나 가 있는 동안 이런 거 만들고 있었냐?”
“뭐 그렇죠. 하하하···.”
‘인조학원’의 테스트 플레이를 마친 성연이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자, 상혁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PTW 직원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사실 중 하나가, 이번 공개작 중 재미로는 ‘인조학원’을 따라올 게임이 없다는 평가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해 성연이 품고 있던 자부심을 산산조각 낼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AI 성능이 이 정도면 뭐 우리 공개작 중에서만이 아니라 그냥 다른 게임 다 합쳐서도 압살하겠는데?”
“아시잖아요. 민준이 걔가 괴물인거.”
“아니, 사실 악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연주자의 노력이 없으면 제대로 된 소리는 안 나오지. 이건 그 많은 대사를 전부 작성한 혁찬이 공도 크다고 봐야겠네. 하아···. 난 진짜로 이번엔 내가 담당한 게임이 제일 재밌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실망한 표정을 짓는 성연에게 상혁이 위로를 건넸다.
사실 MYOM의 퀄리티를 보면서 TOW의 개발을 총괄하던 자신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전혀 다른 재미를 추구하는 3개의 게임을 같은 평가 기준으로 놓는 것은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EOD가 ‘리얼함’을, 인조학원이 ‘재미’의 극한을 추구하는 게임이라면, ‘섬마을 칸타빌레’는 음악이 주는 기쁨을 통해서 ‘감동’을 추구하는 게임이었으니까.
상혁은 그 부분을 성연에게 주지시켰다.
“지금 만드시고 계신 게임도 충분히 좋은 게임이에요. 적어도 ‘감동’이란 측면에서는 3개의 게임 중 가장 좋은 평가를 줄 수 있을 테니까.”
“흠. 하지만···. 상혁이 너도 전에 비엔나에 가서 봤겠지만, 나랑 내 팀원들은 정말 ‘열심히’ 작업했거든. 적어도 최고의 게임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게임에 밀리는 결과가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데···.”
성연의 말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애당초 이 게임의 기본 시스템 자체가 연주하는 학생들의 ‘실력 향상’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실수나 버릇까지 모두 녹음하기 위해서, 성연은 실제 연주자들을 전부 아마추어로 고용해서 채워 놓았다.
그리고 아예 그 멤버들이 특훈을 받아가면서 점점 실력이 좋아지는 것을 게임으로 전달하려고 했고.
그건 마치 야구게임의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을 훈련시켜 프로야구에 데뷔시키는 과정을 찍겠다는 것과 비슷한 ‘미친 발상’이었다.
성연은 그 ‘자연스러움’안에서만 전달될 수 있는, 연주자의 연주 안에 담겨 있는 음악에 대한 기쁨, 그리고 선율 안에 묻어나오는 노력의 결과를 섬세하게 게임에 담고 싶어 했고, 상혁은 그런 성연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런 전폭적인 지원 아래서, 성연은 단기간에 연주자들의 실력을 급 향상시키기 위해 세계적인 클래식의 성지의 프로 연주자들을 엄청난 비용으로 장기 고용하고, 각 멤버들에게 개인 레슨을 지원하고, 멤버 전원의 체류비와 수많은 음향장비의 구매 비용을 요청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지휘 게임’의 궁극적인 모습을 게이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성연은, 그렇게 고생한 자신과 멤버들의 노력이 보상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다른 게임들이 ‘궁극의 모습’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야. 적어도 공개 행사에서 다른 게임에 밀린다는 느낌은 주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그런 평가를 받기 위해서 그 긴 시간 동안 팔에 쥐가 나도록 지휘봉을 휘두른 게 아니라고.”
“흠. 하지만 섬마을 칸타빌레는 지금 그 상태로 거의 완성된 거잖아요? 감동도 있고, 스토리 라인도 이미 확정이고, 시스템은 더 확장할 부분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게임이 가진 포텐셜 자체가, 이미 지금의 버전이 완성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죠.”
“그거야 ‘지금’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면 그렇겠지.”
성연의 말에 상혁이 물었다.
“흠, 형은 그럼 지금의 게임 시스템을 바꾸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네가 허락만 해 준다면.”
“뭘 하고 싶으신데요?”
“우리 게임에 커뮤니케이션 엔진을 넣어줘.”
성연이 상혁에게 요구한 것.
그것은 ‘인조학원’에 적용되어 있는 대화형 AI엔진.
커뮤니케이션 엔진을 자신이 개발 중인 게임에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성연의 요청을 받은 상혁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형.”
“어.”
“지금 인조학원에 적용되어 있는 커뮤니케이션 엔진에 들어있는 대사가, 유저가 게임 중 할 수 있는 모든 대화의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사람이 직접 쓴 거라는 건 아시죠?”
“알아.”
“그럼 그 말은, 지금 비엔나에서 그 힘든 과정을 거치고 돌아와서, 공개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쉬지도 못하고 전원이 대사 작업에 합류해야한다는 이야기라는 것도 아시죠?”
“알아. 섬마을 칸타빌레의 인게임 캐릭터들은, 전부 연주자 본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니까. 대사를 쓰려면 본인이 써야겠지.”
“대사 량이 장난이 아닐 거예요.”
“감수할게.”
“만약 최선을 다 해서 작업했어도 공개할 만한 수준의 퀄리티가 나오지 않는다면, 2차 NE컨벤션에서 게임 공개 자체가 제외될 수도 있어요.”
“어떻게든 해 테니까.”
개발자가 저렇게 말할 때,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본인부터가 뼈 속부터 개발자인 상혁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해봅시다. 민준이부터 불러야겠네요. 저도 당분간은 풀 철야 해야할거고.”
“민준이? 왜? 그냥 가져다 넣고 대사만 작업하면 되는 거 아냐?”
“애당초 인조학원에 들어간 AI엔진은 콘솔 성능을 전부 거기 몰빵하게 설계되어 있어요. 인조학원 안에 들어간 게임이 전부 단순한 형태의 레트로 그래픽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래서고요. 하지만 섬마을 칸타빌레는 그 성능을 그래픽이랑 사운드에 몰빵한 게임이잖아요.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면, 밑바닥부터 그 게임에 맞게 설계를 다시 해서 넣어야 돼요.”
“그 정도로 큰 작업일 줄은 몰랐어.”
“알았어도 해달라고 하셨을 거잖아요?”
상혁이 웃으며 말하자 성연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애당초 이 회사 자체가 개발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까지 갈 수 있는 힘을 주려고 만든 회사니까.”
“고맙다.”
“제가 고맙죠.”
상혁이 말했다.
“자기 게임에 욕심 부리는 개발자만큼, 게이머에게 소중한 존재는 없을 테니까요.”
***
허먼을 안내한 여성은, 실제로 게임 안에서 연주를 맡은 연주자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이 세션에서 안내를 하고 있는 모든 연주자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게임 안에서 연주를 맡았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녀는 공개 일주일 전까지 미친 듯이 필요한 대사를 써 나가면서, 하루 2~3시간만 자며 필사적으로 만든 게임을 플레이어가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행사 안내원 역할에 자원한 것이었다.
나머지 멤버들도 비슷한 기분이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허먼이 바로 앞의 관객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때, 속으로 매우 만족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점잖은 미소로 허먼에게 말했다.
“학생들이 기다립니다. 연주를 시작하셔야죠?”
“연주? 이건 지휘봉 같은데, 설마 지휘를 하라는 건가요?”
“예. 선생님께서는 이 마을의 학교에 있는 합주단의 지휘자로 파견 오신 거니까요.”
허먼은 단상에 있는 지휘봉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거대한 화면 안에서 허먼을 중심으로 앉아있는 캐릭터들이 일제히 자신의 악기를 연주 위치에 놓고 허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허먼은 속으로 막막함을 느꼈다.
‘지휘라고? 그게 공부 없이 바로 가능한 건가?’
잠시 고민하던 허먼은, 이 게임이 리듬게임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던 리듬게임과 완전히 다른 느낌의 화면이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던 정보였다.
‘그럼, 노트도 나온다는 이야기겠지. 어떻게 생긴 노트일까?’
허먼은 지휘봉을 든 채로 노트가 내려오길 기다렸지만, 화면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단지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만이 반짝이고 있었을 뿐.
“뭐하세요?”
그때, 뒤쪽에 있던 안내원이 말을 걸자 허먼이 자세를 유지한 상태로 답했다.
“노트 기다리는데요?”
“그냥 휘두르시면 됩니다. 화면을 잘 봐주세요.”
그녀의 말을 듣고 화면을 보니, 만화에서 볼 수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구름 같은 형태의 도형이 둥둥 떠다니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어쩌지?]
[지휘 같은 거 할 줄 모르는데?]
[일단 휘둘러볼까?]
[일단 휘둘러보자.]
[손을 내려!]
‘말풍선?’
황당하게도,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뭘 해야 하는지를 말풍선으로 보여주며 ‘권유’하는 형태의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리듬 게임이면서!
그것은 허먼에게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인 경험을 선사하고 있었다.
‘해보자.’
허먼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지휘봉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 화면에 뜨는 말풍선에 떠 있는 것처럼, 힘차게 손을 내리며 지휘를 시작했다.
-빰!!!!!!!!-
일제히 울리는 현악기의 소리.
수십 명의 학생들이 허먼의 손동작을 따라 자아낸 곡은, 허먼도 익히 들어본 적 있는 곡이었다.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 유명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처음으로 지휘했던 곡과 같은 곡.
제목이 없어 무제라고 알려진 베토벤의 7번째 교향곡.
Beethoven: Symphony No.7이, 허먼의 손끝을 따라 그 웅장한 멜로디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 생각보다 쉽네?’
연주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허먼은, 이 게임의 지휘라는 개념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멜로디의 호흡에 맞춰서 손을 휘두르기만 해도, 제대로 연주가 재생되고 있었으니까.
비록 허먼이 잘못 휘두른 타이밍에 맞춰서 곡의 진행이 꼬이기도 했지만, 연주 도중에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지휘 자체는 쉬운 흐름으로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허먼은 오히려 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는데, 자신의 손동작에 맞춰서 연주를 컨트롤 하는 독특한 감각이 그로 하여금 ‘지휘를 한다.’라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프로 지휘자가 보면 어이없어 할 정도로 실제의 지휘 동작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휘를 하고 있다 라는 ‘기분’만큼은 완벽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근데 좀 이상한데?’
허먼이 위화감을 느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자신의 움직임 때문이 아니라, 대놓고 끼어들 듯이 들어오는 불협화음이 들려 왔기 때문에.
허먼은 연주를 진행하면서 화면 속에 모여 있는 연주자들이 엄청나게 아마추어틱하게 연주를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치 허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연주자들을 비추고 있는 화면 속에서 말풍선들이 끊임없이 계속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엉망이다.]
[화음이 높아.]
[세컨드 바이올린이 너무 빨리 들어온다.]
[팀파니가 힘이 없어. 몸살인가?]
[연습이 부족하군.]
[이렇게 슬픈 베토벤이 있어도 되는 거냐?]
[그만하고 싶다.]
[중단할까?]
[멈추고 지적을 하자.]
화면의 안내를 따라서, 허먼은 지휘봉을 내렸다.
사실 음악을 잘 모르는 자신도 멈추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연주였기 때문에.
그것은 엄청나게 신기한 경험이면서 동시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경험이었다.
‘왜?’
이렇게 멋진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엉망인 연주를 보여주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방금 전 플레이 때 연주자들의 연주가 완벽했다면, 자신은 진짜로 감동에 전율했을 테니까.
허먼은 PTW에서 무슨 의도로 이렇게 엉망인 연주를 관객에게 체험시키는 것인지를 생각하기 위해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허먼의 뒤에서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예?”
“연주가 엉망이죠?”
“그러네요. 멋진 게임 일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엉망으로 녹음했을까요? 베타 버전이라 그런가?”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지금은 저 아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예요.”
“도움?”
“예. 도움. 아이들의 연주를 바로잡고, 음악이 주어야할 기쁨을 가르쳐 주는 거죠.”
그렇게 말하며, 안내원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화면 방향을 향해 손을 내밀며, 허먼에게 말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오신 거잖아요?”
그녀의 손을 따라 허먼은 다시 화면을 보았다.
[일단 문제점을 이야기해보자.]
[먼저 화음을 완성해야해.]
그리고 이 체험존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화면에 나오는 메시지대로, 연주자와 ‘대화’를 하면서 완성된 연주를 이끌어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을.
‘재미있겠다.’
허먼에게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