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투자의 포텐셜
“좋아. 우선 말해두겠는데 구체적으로 우리가 다음 프로젝트에서 진행해야할 필수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
상혁의 말에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MS랑 계약한 거?”
“어. 덕분에 셧다운제 폐지까지 수월하게 이끌 수 있었고, 더불어서 PTW게임은 이제 X-BOX LIVE결제 없이도 무료 멀티가 가능하게 되었으니까. 우리 게임 때문에 발생하는 결제도 엄청 많았으니 손해 본 만큼은 메워줘야겠지?”
“그렇지. 앞으로도 MS와는 계속 손잡고 가야할 테니까.”
“그래서 신작 하나는 무조건 코넥트 전용 게임으로 가야해.”
“오케이. 그거까지는 이해했어. 근데 지금 회사 공모에 올라온 게임 중에 코넥트 전용 게임 기획이 있던가?”
“없어. 그게 문제지. 아무래도 전작이 MYOM이었으니까 거기에 이어지는 코넥트 전용 신작을 기획하는 건 아무래도 직원들에게 부담이 너무 크겠지.”
“그럼 어쩔 생각이야?”
“내가 해야지 뭐.”
“좋아, 그럼 코넥트 전용 게임은 아예 상혁이 네가 새로 기획한다고 알고 있을게.”
상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맡겨둬.”
“나야 뭐 항상 너를 믿지.”
“다음 이야기를 들어도 그 믿음이 계속될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계속 설명할게.”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로 향했다.
“일단 다들 궁금해 할 것 같으니 아까 말했던 ‘잘못 만들면 똥겜이 될 수 있는 게임’에 대해서 먼저 설명할게. 우선 기획에 대해 설명하자면, 지금 사내 기획 공모에 들어온 작품이고, 장르는 FPS야.”
“FPS?”
마지막에 출시한 게임이 FPS인데, 상혁이 다시 FPS를 개발하겠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은 민준이 물었다.
“연속으로 같은 장르를 만들겠다고? 우린 속편도 안내놓잖아?”
“뭐, 정확히는 이걸 만들겠다. 이렇게 확정한건 아냐. 단지 기획이 좀 신경 쓰이는 기획이라 그렇다는 소리지.”
“상혁이 네가 신경 쓰인다고 하면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 아냐?”
“그렇게 해석해도 무방하긴 하지.”
상혁이 씩 웃으며 마커의 뚜껑을 열었다.
“PTW에서 만들어야할 차기작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우선 다른 회사가 만들법한 게임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딱히 ‘우리 게임은 무조건 신선해야해’같은 힙스터스러운 이유 때문이 아니라, 굳이 다른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라면 ‘굳이’우리가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뭐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저희 회사의 매력이긴 하죠.”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히 말할게. 나는 외부 IP를 가져와서 만든 배틀로얄이나 TOW는 개인적으로 PTW스러운 게임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엑?! 그래요?”
“어. IP를 가져와서 만드는 게임은 기본적으로 그 IP가 가진 핵심적인 재미를 살리는 방향으로 개발하게 되니까, 그건 우리가 만든 재미는 아니게 되는 거지. 물론 게이머들 입장에서는 해당 IP가 줄 수 있는 재미의 완성형을 보게 되는 거니까 나름 즐거울지는 몰라도.”
“흠···. 일리 있네요. 원작에서 기대하던 재미를 직접 손으로 느끼는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기대하지 않던 재미를 찾아가는 느낌은 좀 부족하다는 뜻이죠?”
“바로 그거야.”
“그래서.”
이번엔 민준이 물었다.
“이번엔 오리지널 IP로 가겠다?”
“응.”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만들려는 건데?”
“여러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겠지. 첫째 조건은 아까 말한 대로 다른 회사에서 제공할 수 있을법한 재미를 가진 게임이 아닐 것. 둘째 조건은 방금 말한 대로 이미 재미를 품고 있는 원작이 존재하지 않을 것. 셋째 조건은 기획 자체가 투자의 포텐셜을 품고 있을 것.”
“투자의 포텐셜?”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수를 보며 상혁이 설명했다.
“그러니까 모든 기획은 최대 한계치가 정해져 있어. 예를 들어 테트리스. 만약에 테트리스를 만들려고 하는데, 거기 5천억쯤 쏟아 붓는다고 테트리스가 가진 재미가 5천억 원어치 만큼 올라갈까?”
“아, 그런 이야기구나?”
“응. 아이디어가 가진 포텐셜에 따라서, 이게 스케일을 확장하고 인력을 투입할 가치가 있는 게임이 있고, 그냥 아이디어 그대로 구현했을 때 가장 빛나는 게임이 있는 거지.”
“그럼 스케일 작은 게임은 안낼 거예요?”
“적어도 메인 프로젝트로는 적합하지 않겠지.”
상혁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신선한 아이디어의 게임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커져버린 회사의 규모를 고려해 프로젝트를 산정하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에.
“하지만 별도 레이블 같은 건 생각하고 있어. AAA급 규모로 개발한 프로젝트들은 PTW레이블로 발매하고, 직원들이 만든 기발하지만 스케일 작은 아이디어들은 별도의 인디 레이블로 발매하는 것도 좋을 것 같거든. 그리고 거기서 난 수익은 해당 프로젝트 담당자들하고 셰어하고.”
“아, 그거 괜찮네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메인 프로젝트니까, 우선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자.”
상혁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 회사에 이상적인 기획이란 건, 리스크가 커서 다른 회사에서 도전하지 않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개발력을 투입했을 때 아이디어의 포텐셜이 폭발하는, 그런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예를 들면 이런 아이디어 같은 거지. 동인팀에서나 나올법한 신선함을 품고 있지만, 정작 막대한 개발력이 없으면 만들기 어려운 그런 아이디어. 말 그대로 망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그런 게임인데, 막상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 그런 아이디어 말이지. 플레이 하는 유저로 하여금 ‘헉!? 이런 걸 만들었다고?!’라는 감탄사가 나올만한 아이디어 말이지.”
“그런 게 있어요?”
“몇 개 있더라고. 물론 좀 다듬긴 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디어들은, 상혁이 보기엔 재미의 ‘씨앗’만을 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씨앗에 제대로 비료와 물, 햇볕을 공급해주면, 무엇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라고, 상혁은 생각하고 있었다.
-탁 타탁 탁-
상혁이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적는 동안, 부실에 모인 인원들은 그런 상혁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잠시 후 화이트보드에 모든 조건을 적은 상혁이 옆으로 비켜섰다.
거기엔 검은 마커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차기작이 이랬으면 좋겠다.>
→ 동인 게임 같은 과감한 아이디어
→ 현재의 PTW가 제공할 수 있는 개발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스케일
→ 오직 이 게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경험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나는 차기작으로 선정하고 싶다.”
상혁이 CCO가 되면서, 원래는 콘테스트를 통한 내부 투표로 결정되던 프로젝트 선택 권한은 임원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게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팀원들은, 상혁이 생각하는 PTW스러움에 모두 동의하는 개발자들이었다.
“저는 좋아요. 괜찮은 조건인 것 같아요.”
“나도.”
“저도요.”
“나도 좋아.”
서연을 시작으로 민준과 지수, 현주가 동의하고 나머지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상혁의 방향성에 동의했다.
“그래서.”
상혁이 말했다.
그리고는 옆에 무선 인터넷으로 연결된 노트북을 조작해 미리 준비해둔 브리핑 화면을 띄웠다.
거기엔 방금 상혁이 말한 ‘똥겜’이 될 수도 있는 게임의 기획안이 띄워져 있었다.
“이게 제가 말한 차기작 후보입니다.”
상혁이 말한 PTW의 신작 FPS 기획.
그 표지는 거대한 폭발을 배경으로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도망치고 있는 한 병사의 사진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현대전?”
“어.”
“모던 ○페어나 배○필드랑 겹치지 않아?”
민준의 질문에 상혁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겹쳐.”
“배경이 같은데? 현대전이 트랜드인 건 알지만, 트랜드라는 건 그만큼 식상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잖아. 아까 네가 말한 조건하고는 안 맞는 것 같은데?”
“배경이 같아도, 게임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다르니까.”
그렇게 말한 상혁은 모니터에서 뛰어가고 있는 병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민준은, 상혁이 어떤 점이 다르다고 한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도망치고 있는 병사가 입고 있는, 마치 갑옷을 연상하게 하는 거대한 방호복.
그것은 미국 군대에서 폭발물을 처리하는 특수 부대.
EOD(Explosive Ordnance Disposal)에서 폭탄을 해체하는 병사가 입는 방호복이었기 때문에.
“폭탄 해체반? 폭탄 해체하는 게임을 만들겠다고?”
민준의 말에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도 처음엔 그게 되나? 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기획서의 다음 페이지 문구가 마음에 들더라고.”
상혁이 노트북을 조작해 기획서의 다음 페이지를 열었다.
거기엔 영어로, ‘세상에서 가장 느린 FPS(The slowest FPS in the world)’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
기본적으로 직원을 뽑는 PTW의 모토는, ‘삶은 타고나는 것, 열정은 쌓아나가는 것, 기술은 배우는 것’을 슬로건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게임에 대한 애정과 열정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기술은 보지 않는다가 PTW의 채용원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PTW에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경력자들도 많았지만, 정말로 게임 제작에 대해 하나도 모른 채로 입사해 직원이 된 개발자도 꽤 있었다.
물론 경험이 없는 만큼 더 빡세게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신입에게 기술을 가르쳐 파다완 클래스로 가려는 직원들이 넘쳐나는 PTW였기에 기술적인 부분을 전수받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그렇게 PTW에 들어온 직원 중의 한명이었다.
특이하게 미군 부대에서 이라크전에 파병 간 경험이 있는 제임스는 전역하고 플레이한 PTW의 게임들에 완전히 반해버렸고, 아무런 기술이 없는 상태에서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PTW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나 상혁은 제임스의 이라크전 파견 경력을 높게 사서 그에게 면접 제안을 보냈다.
한국까지 오는 비행기 표와, 면접 때 답변해야할 질문 리스트까지 첨부해서.
일주일간 착실하게 답변을 준비한 제임스는 한국에 와서 마침내 자신이 동경하던 개발자를 대면할 수 있었고, 조금 더듬거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PTW의 게임에 대한 애정을 최선을 다해 쏟아내었다.
그리고 상혁은, 그런 제임스의 ‘열정’을 높게 사서 제임스와 고용계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처음에 PTW에 입사할 때만해도, 제임스는 자신의 역할이 일종의 자문역할일 것이라 생각했다.
보통 미군 출신 개발자를 게임사에서 뽑는 이유가, FPS를 개발할 때 자문을 받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러나 상혁은 먼저 그에게 어떤 파트에 들어가길 희망하는지 물어보았고, 제임스는 프로그래밍을 배워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프로그래밍 팀에 넣어드릴게요.”
상혁은 제임스의 희망대로 그를 프로그래밍 팀에 배속시켰고, 제임스는 그곳에서 프로그래밍에 대해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했다.
그래도 제임스는 즐거웠다.
자신의 사수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전혀 짜증을 내지 않고 친절하게 기초부터 프로그래밍에 대해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 덕에 PTW에서의 매일매일은 그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사해 주었다.
이 회사에서 자신은, 전직 군인 출신 개발자 제임스가 아니라, 개발 2팀 프로그래머 제임스 윌리엄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열심히 프로그래밍을 익힌 제임스는 현재는 파다완 급 직원으로써 개발2팀에서 TOW의 개발에 참여한 핵심 인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개발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던 제임스는 과감하게 신작 기획 응모에 도전하기 위해 기획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틈틈이 익힌 기술로,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리얼한 FPS’에 대한 기획안을 작성했다.
“좋아, 이 정도면 되겠지.”
기획을 완성한 제임스는, 여러 팀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기획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회사 공모 게시판에 바로 올리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아서.
원래는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조언 받고 싶어서 기획안을 내 보인 제임스였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제임스 씨. 이건 안 돼요.”
“저희 회사가 아무리 정신 나갔어도 이건 진짜 통과 힘들걸요?”
“게임은 리얼하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에요.”
부정적인 피드백을 반복해서 받던 제임스는, 점점 오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분명 재미있을 것 같은 기획인데, 다들 안 될 거라고 평가하는 것이 기분 나빴기 때문에.
결국, 제임스는 기획안을 수정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초안 그대로 사내 공모 게시판에 자신의 기획을 업로드 했다.
이 거대한 회사의 개발자 중 분명 누군가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해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러나 PTW의 공모 게시판은 이미 등록된 기획안만 수백 종이 넘을 정도로 온갖 아이디어가 넘치는 공간이었고, 제임스의 볼품없는 기획서는 그 안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더 화려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기획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러나 제임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굳이 다음 프로젝트로 선정되지 않더라도,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 제임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기획안을 올리고 2주가 넘어서, 드디어 누군가가 자신의 기획에 코멘트를 남긴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부정적인 코멘트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제임스는 게시판에 올려놓은 자신의 기획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거기 달려있는 코멘트를 발견하자마자, 그대로 얼어버렸다.
[저는 이 아이디어가 좋은 거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언제쯤 시간이 괜찮을까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자신의 기획안에 처음으로 댓글을 달은 개발자.
코멘트의 옆에 달린 개발자의 이름은, 분명 제임스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이상혁]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조용히 버려질 뻔 한 그의 기획은, 그렇게 상혁의 손에 의해 그 꽃을 피울 기회를 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