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수수께끼의 미션
“그래서···.”
상혁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제출된 제안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제안서를 가져온 카렌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개발 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겁니까?”
“예. 좀 더 높은 퀄리티를 위해, 개발 기간의 연장이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보강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안서에 써 놓은 대로 진행할 예정이고요.”
카렌은 상혁의 입에서 나올 ‘YES’를 기다렸다.
개발 기간 연장에 대한 사유도 명확했고, 무엇보다 유저들에게 더 임팩트 있는 게임을 완성하기 위한 연장이었으니까, 당연히 거절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예상과는 반대로, 그녀가 건네준 제안서를 꼼꼼히 살펴본 상혁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NO’였다.
“이건 안 되겠네요. 제안하신 개선 방향에 대해서, 전 반대하겠습니다.”
“예?! 반대요?”
기간 연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예 개선 자체에 대해 반대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카렌이 당황하는 사이, 상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뭣보다 이런 안건 자체가 개발팀 내부에서 나왔단 이야기가 문제가 될 수 있겠네요. MYOM월드 이벤트에 집중하느라 잠시 프로젝트 관리에서 손을 놓은 게 문제였나?”
“문제요?”
“카렌 씨, 앵무새처럼 제 마지막 말을 따라한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대화를 따라갈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일단 지금 당장 개발 1팀의 선임 급 개발자를 모두 모아주세요. 뭐가 문제인지 알려드릴 테니. 아니다, 제가 부르죠.”
상혁은 워크 패스트로 개발 1팀 선임 개발자들을 호출했다.
그러자 잠시 후, 이곳저곳의 다양한 파트에 흩어져 일하고 있던 개발1팀의 선임 개발자들이 상혁의 호출을 받고 삼삼오오 부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 웬 호출입니까?”
“무슨 일 있어요?”
거기엔 마스터 클래스도 있었고, 파다완 클래스도 있었다.
그렇게 선임 개발자 전원이 부실에 도착하자 상혁은 모여 있는 인원을 향해 말했다.
“다들 회의실로.”
일반적으로, 다른 개발사의 경우 CCO정도 되는 임원급 상사가 집합을 걸면 불편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마련이었지만 PTW는 그런 분위기의 회사가 아니었기에 다들 긴장감 보다는 얼굴에 궁금증을 띄우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상혁은, 마지막 인원을 따라 회의실에 들어가며 회의실의 문을 닫고 가운데 섰다.
그리고는 카렌이 자신에게 건네준 제안서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선임 개발자들을 향해 말했다.
“이거, 여러분들이 다 같이 만드신 거죠?”
“예.”
“우선 내용 확인을 하겠습니다. MYOM으로 올라간 유저들의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하여, 개발기간을 연장하고 게임 퀄리티를 높이는데 집중한다. 맞아요?”
전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렌더링 센터의 여유 성능을 활용하여 임팩트 있는 대규모 시네마틱 영상을 추가한다. 이것도 맞고요?”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상혁이 마지막 내용을 꺼냈다.
“기존에 작업되어있던 부분 중 퀄리티가 미비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재작업하고 싶다는 내용도 있네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문제가 되죠. 그게 선임 개발자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면.”
“욕심? 개발자가 욕심을 부리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그 욕심이 더 좋은 게임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거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중요한건 욕심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어디서 나왔느냐’죠.”
윗사람이 의욕에 넘치면 아랫사람은 피곤해진다.
그리고 그 방향이 게임이 지향해야할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고.
상혁은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제가 보기엔 다들 MYOM을 너무 의식하고 있어요. 왜 그러는지는 이해가 가지만, 그건 좋은 개발 방향성이 아닙니다.”
“개발자가 유저로 하여금 감동을 느낄만한 연출과 퀄리티를 지향하는 게 나쁜 방향성이라고요?”
“적어도 이 게임에서는 그러하죠. 이세계 의사 시뮬레이터는 ‘라스트 판타지’나 ‘월드 오브 전쟁 크래프트’가 아니에요. 이 게임에서 유저들이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건, 게임이 보여주는 이세계의 디테일이지 개발팀이 만든 웅장하고 멋진 시네마틱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MYOM과 GOS의 사례를 보면···.”
“그건 두 게임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고요.”
좀 더 쉽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상혁이 이야기했다.
“자, 제가 삼국지를 플레이 하려고 해요. 근데 내정에서 버튼 하나 누를 때마다 내정 회의 장면이 나오더니 신하들이 나와서 전부 한마디씩 한다고 해보죠.
‘주군, 이건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니 이게 더 급합니다.’
‘주군,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주군! 그것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그렇게 매번 뭐 할 때마다 진짜 신하들이 회의하는 것처럼 태클을 걸면 어떻겠어요?”
잠시 생각해보던 카렌이 말했다.
“리얼해서 재미있을지도?”
“어? 진짜 그러네? 젠장. 제가 예를 잘못 들었어요. 다시 예를들어보죠.”
살짝 이마를 친 상혁은 말을 이었다.
“카렌 씨가 문명을 플레이하려고 하고 있어요. 턴 넘길 때마다 이번 턴에 눌러놓은 모든 연구에 대한 시네마틱 영상이 나오면 어떨 거 같아요?”
“그건···, 갑갑하겠네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장르마다 유저가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핵심 재미가 다르다는 겁니다. MYOM의 월드 이벤트는, 말 그대로 유저들이 진짜 ‘마법사’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진행된 거고, GOS는 거대 로봇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콘솔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스펙을 한참 오버하는 시네마틱 영상을 넣은 거고요. 그럼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개발하는 게임은, 그런 영상미나 장대함을 전달하는 걸 핵심 재미로 삼은 게임입니까?”
상혁의 이야기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MYOM의 유저 반응을 과하게 인식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고, 그로 인해 무리하게 커다란 이벤트라던가 대규모 연출을 넣고 싶어 했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선임 개발자인 여러분들이 그런 욕심을 가지고 개발을 진행하는 동안, 실제 작업하고 있는 작업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피해요?”
“물론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작업이 굴러갔을지 예상이 가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노트북을 가져와 카렌의 앞에 놓았다.
“카렌 씨.”
“예.”
“워크 패스트 로그인해서 작업 결과물 승인 내역 좀 보내주세요.”
사내 업무의 대부분을 전자 결제 기능이 갖춰진 워크패스트로 작업하는 PTW에서는, 간단한 방식으로 다양한 양식의 보고서를 바로 뽑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혁이 요청한 것은, 하나의 결과물이 승인 받는 과정에서 해당 작업자가 얼마나 재작업을 요구 받았는가에 대한 통계를 정리한 보고서였다.
“이건···.”
“MYOM 발매 이전하고 이후를 비교해보면 어때요?
재작업 비율이 늘어났나요?”
“···예.”
확인도 안하고 단정 짓는 상혁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그랬기에 카렌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아셨나요?”
“뻔하니까요. 작업라인에서는 이전과 동등하게 작업을 진행하는데, 위쪽에서 개발 방향을 멋대로 변경하면 컨펌 단계에서 틀어지는 게 당연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혁의 말투나 표정엔 비난의 기색이 섞여있지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욕심을 가졌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런 방향을 지향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유저에게 사랑받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은 엄청나게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결과에요. 멋진 게임을 만들면, 유저들이 두고두고 언급하며 그 게임을 플레이하고, 감탄하고, 사랑에 빠지는 거죠. 사랑받기 위해서 멋진 걸 만들려고 하면 안 됩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PTW의 게임이 추구하는 방향이 유저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그런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GOS가 그랬고 MYOM이 그랬던 것처럼, 시대가 지원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노력을 투입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뭉클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게 PTW가 지향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했어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카렌은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뽕 차는’걸 보여줘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와서 그게 아니라고 하시면, 저희는 뭘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죠?”
카렌의 말에 상혁이 머뭇거렸다.
지금까지 ‘큰 스케일’ 위주의 게임을 연달아 발매한 것이, 개발자들로 하여금 회사의 방향성에 대한 오해를 사게 만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였기에, 상혁은 CCO로써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디보자, 지금 개발 1팀 선임 개발자가 총 23명이죠?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게 말한 상혁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안에 모인 개발자들은 서로를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어디로 튈지 모르는 CCO가, 이번엔 무슨 짓을 할지에 대해서.
그리고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을 때, 회의실로 들어온 것은 상혁이 아니라 현주였다.
“안녕하세요.”
“예?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CEO님이 왜···?”
“상혁 씨가 여러분께 전달해달라고 해서요.”
그렇게 말하는 현주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개발1팀 선임 개발자님들? PTW의 CEO로써 전달 드립니다. 오늘부터 여러분들은, 강제로 2주간 유급휴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요.”
“예!?!”
개발 사이클 중 가장 바빠야 할 시기에, 갑자기 선임 개발자 전부를 무려 한 달간 유급휴가 보내겠다는 현주의 발언은 방 안에 있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현주가 내민 것은, 인원수에 맞춘 23장의 포스트잇이었다.
“여러분들 전원, 휴가기간 동안 각자 종이에 적힌 장소로 여행가서 거기 적힌 대로 하라고, 상혁 씨가 말씀하셨어요.”
23명의 개발자가 받은 쪽지.
거기엔 각자가 가야할 여행지의 이름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지시 사항이 적혀 있었다.
[페루에서 마추픽추 구경하고 기니피그 요리 먹기]
[괌에서 돌고래 등지느러미 쓰다듬고 오기]
[베트남에서 악어고기 먹고 오기]
“이, 이걸 왜?!”
“글쎄요. 그냥 해보면 알 거라고, 그렇게만 전달 받았어요. 아, 물론 거북한 내용이거나 하면 미션 교체도 가능하다니까, 그건 상혁 씨한테 개인 연락해서 협상하도록 하세요.”
“그럼 그동안 개발팀은 어떡합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주가 미소 지었다.
“여러분이 없는 동안, 상혁 씨가 직접 개발 1팀 작업을 총괄하겠다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말한 현주는, 멍하니 앉아있는 직원들을 바라보다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뭐해요? 빨리 가시라니까?”
“지금요?”
“예. 바로 퇴근해서 여행계획 잡으시고 2주 안에 거기 적힌 대로 하고 오시면 됩니다. 아, 혼자 가기 싫으신 분들은 3인까지 동행 비용은 회사에서 지불할 테니 여럿이서 가셔도 되니까 그 점 참고하세요.”
결국 그렇게 그날 등 떠밀리듯 강제 휴가를 받은 개발1팀 선임개발자들은, 바로 다음날부터 하나 둘씩 해외로 강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유도 모르는 채로.
***
마추픽추에 가기 위해 페루로 온 카렌은 인상을 구기며 아구아스 깔리엔떼 (Aguas Caliente)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해외 여행은 딱히 신선한 경험이 아니었기에.
어릴 때부터 대학생활을 위해 미국에 오래 거주하기도 했고, 일을 위해 지금 머무르고 있는 것도 한국이었으니까.
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한국에 있는 직장의 상사가 시켜서 강제로 남아메리카에 있는 페루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상태였고.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그것이 본인이 바란 것이 아니고, 더욱이 일의 연장선이 되면 좋은 기분은 아니게 되어버린다.
카렌은 디지털 카메라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여기까지 오면서 수도 없이 내쉬었던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뭐, 어차피 여행의 즐거움 같은걸 느끼라는 거겠지.”
트래킹으로 마추픽추에 가기 위해서 들러야하는 작은 마을은, 고대 인류가 만들어낸 경이를 보기 위해 부푼 마음으로 떠드는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 안에서 유일하게 불만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카렌이 유일했고.
그러나 그런 강제 여행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기분을 그나마 낫게 하고 있던 것은, 이곳에 오는 길에 만난 일본인 부부의 존재였다.
“허허, 미야모토 씨. 오늘 날씨가 좋을 것 같다는데 좀 더 즐기시는 게 어떨까요?”
일본에서 아이를 데리고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페루까지 온 젊은 부부가 카렌에게 웃으며 인사하자, 카렌이 마주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참고 자료로 쓸 사진은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개발 중이시라는 게임이요? 이야, 부럽네요. 회사에서 참고자료 하라고 여행도 보내주고. 어째서 PTW가 세계 최고의 게임회사라고 불리는 지 알 것 같아요.”
“정말로 세계 최고의 게임회사라면,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는 걸 굳이 강제로 여행까지 보내면서 바쁜 개발자를 귀찮게 하지는 않았겠죠?”
“글쎄요. 바쁜 시기에 일부러 여기까지 보낼 정도면, 그 이상혁이란 분께 뭔가 이유가 있어서 보내지 않았을까요?”
일본인 부부가 웃으며 이야기 하는 이유는, 그 부부역시 PTW의 팬이기 때문이었다.
카렌이 PTW의 직원이라 밝히자마자 엄청나게 흥분한 두 사람은 저녁식사에 카렌을 초대하며 이런 저런 질문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카렌이 CCO인 상혁의 명으로 이 먼 곳까지 여행 왔다는 이야기에도 매우 흥분했었고.
카렌은 그런 그들의 감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논리를 가장 중요시 하는 그녀에게, 이건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말로 설명해도 알 수 있을만한 이유를 굳이 가서 확인하라고 하는 게 싫은 거예요.”
“자자, 그러지 마시고···.”
결국 카렌은 일본인 부부를 따라 기나긴 하이킹 코스를 걸어 올라가 마추픽추가 보이는 정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인류가 만들어낸 경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멋진 건 인정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순히 ‘세계를 보는 즐거움’을 알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라면, 굳이 여기까지 자신을 보내지 않아도 말로 해도 충분했을 것이기에.
‘자료 사진이나 찍어가야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거기엔 자신을 보며 눈을 반짝이던 일본인 부부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바라보던 유적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카렌이 묻자 일본인 부부가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좋네요.”
“좋아요?”
카렌이 유적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커다란 돌이잖아요.”
“좋죠. 어릴 적 티비에서 본 이후로,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사진으로도 어떻게 생겼는지는 볼 수 있지 않아요?”
“두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남자가 말했다.
“바로 여기서,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짐작도 가지 않는 방법으로 저 거대한 바위를 나르고 돌을 깎은 사람들이 있었겠죠. 이 공간에, 이 바닥에, 이 흙에. 그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 위대한 유적을 남겼을 거고요.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안겨주는 그런 물건을.”
그가 말하는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카렌의 가슴속을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수천 년 전에 있었던 그들의 목소리죠.”
“무슨 목소리요?”
“우리들이 여기 있었다.”
카렌의 동공이 커졌다.
새벽안개가 걷히며, 그 자태를 드러낸 유적의 모습은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을 어릴 적부터 동경했던 사람에겐 더욱 그러했고.
그러나 그녀를 놀라 게 만든 것은,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유적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유적을 보고 감동받은, 눈앞의 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웅장한 폭발도, 화려한 위용도 아닌, 단지 거대한 돌덩이 안에 들어있는 역사에 감동받은 부부의 모습.
그것은 카렌에게 자신이 지향해야하는 게임의 모습에 대한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잠시 실례할게요.”
흥분된 표정으로, 카렌은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누르며 사방을 뛰어다녔다.
여느 관광객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러나 그녀의 카메라는 유적을 향해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 유적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찍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는 인류의 흔적을 보고 그들이 보여주는 경이와 감탄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내 게임을 하는 유저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재미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성의 모습으로.
미션만 하고 바로 돌아올 예정이었던 카렌은 2주를 꽉 채운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부실로 찾아와 상혁의 앞에 자신이 찍은 사진을 내려놓았다.
2주 전만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기이한 지시를 내렸던 자신의 상사의 앞에, 자신이 미션을 통해 느낀 것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개발 1팀 리드 기획자 미야모토 카렌. CCO 이상혁님이 주신 명령을 멋지게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여기, 그 결과물입니다.”
상혁은 그녀의 대답에 미소 지으며 그녀가 건넨 사진 뭉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혁이 사진을 모두 확인하는 것을 기다린 카렌은, 상혁이 사진을 내려놓자마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정도면 잘 한건가요?”
“만점이네요.”
상혁이 말했다.
“뭐, 이정도 답안지면 제가 더 도와 드릴 건 없을 것 같습니다. 뭘 개발해야할지, 정확하게 알아내서 돌아오신 것 같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이번엔 진짜 멋지게 만들 테니까요.”
“MYOM보다?”
상혁의 질문에 카렌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저희가 주려고 하는 재미는, 그런 식으로 비교할 수 있는 재미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카렌의 대답에, 상혁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빡센 일정 속에서 2주를 빼드렸으니, 이제 그만큼 더 열심히 해 주세요.”
“맡겨주세요!”
그렇게 부실을 나선 카렌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개발 1팀의 선임 개발자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다들 비슷한 무언가를 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이번 여행으로 뭘 깨달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다들 좋은 표정이네요.”
이런 상황에서, 굳이 설명이나 지시는 필요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 방에 모인 모든 개발자들의 눈이, 갓겜을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럼 바로 시작합시다.
우리가 이번 휴가로 얻은 것을, 모두 쏟아 부어서.
MYOM과는 다른, 또 하나의 갓겜을 만들기 위해서!”
“Yeeeeeeeeeaaaaah!!”
의욕을 불태우는 개발팀의 모습.
그것은 게임 시장에 또 한 번 파란을 일으킬, PTW의 두 번째 폭풍을 암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