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전심전력
성능 테스트 겸 버그 확인을 위해 진행한 ‘최종 리허설’에서, 상혁은 실제 400명의 6서클 유저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상황을 산정하여 테스트를 진행시켰다.
탑주들의 통제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힘을 합쳐 마왕에 맞서 싸우는 유저들을 산정한 테스트를.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상혁은 지수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지수야.”
“예?”
“지금 이 시나리오는, 완전히 유저들이 탑주들 통제에 따른다는 가정 하에서 짠 시나리오잖아?”
“그렇죠.”
“근데 그렇게 유저들이 미리 짜여진 대로 잘 움직일까?”
상혁이 아는 일반적인 게이머들이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튀고, 언제나 개발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였기에 상혁의 그런 의문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수는 그런 상혁의 의문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눈빛으로 이렇게 답했다.
“할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짜여 있는 게, 이번 메인이벤트니까.”
그리고 지수의 말대로, 이벤트가시작한 지금 400명의 유저들은 일사분란하게 탑주들 통제를 따르며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마왕’에 맞서서, 자신들이 속한 또 하나의 세계인 ‘상아탑’을 되찾기 위해.
그렇게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400명의 유저들을 보며, 지수는 자신의 노력이 보답 받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뭐, 기왕 줄 거면, 최대한 임팩트 있게 주자고요. 저희가 넘겨주는 느낌이 아니라, 유저들이 쟁취하는 느낌이 될 수 있게요.”
“그래서, 그 임펙트를 통해서, 뭘 전달하고 싶어?”
“앞으로 유저가 어떤 게임을 하더라도, 평생 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경험이 좋을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는?”
“그걸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 MYOM은 특별한 게임이에요. 팀에 들어와서 상혁 오빠랑 처음 기획했던 게임이 MYOM으로 변한거기도 하고, 제가 처음으로 메인 기획을 이끌어가면서 한 프로젝트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게임은 마법을 현실에 재현하고 싶었던 제 욕심이 그대로 반영된 게임이니까요. 전 유저들이 이 게임에 대해서 제가 느끼는 느낌을 똑같이 느꼈으면 좋겠어요. 취미이자 놀이로서의 게임이 아니라, 그런 차원을 넘어선 특별함을 느꼈으면 좋겠는데···. 오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수가 상혁에게 물었고, 상혁은 가르쳐주었다.
지수가 바라는 느낌을 유저가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이벤트가 지향해야하는 방향성이 무엇인가를.
MYOM의 월드 이벤트는, 지수의 그런 바람에서 시작된 이벤트였다.
그리고 상혁은, 지수의 그런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력을 더했다.
“MYOM의 탑주는 직원이기 전에 게임 내의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탑주 전원에게 개성이 있고, 성격이 있고, 가치관이 있죠. 그 부분을 살려서 최종장에서 연주될 캐릭터 테마곡을 만들어주세요. 음악만 들어도 최종장의 연출을 떠올릴 수 있도록.”
상혁의 부탁대로 사운드팀 리더인 남성연은 대 편성 오케스트라를 사용해 각 탑주의 이미지에 맞는 최종장의 테마 음악을 작곡했다.
신비, 뇌전, 물, 화염, 바람, 나무, 강철, 바위.
각 탑을 상징하는 속성 각각의 개성이 살아있으면서도, 상혁이 요구한 ‘최종장’에 어울리는 웅장한 음악을.
그것은 별개의 분위기로 작곡된 8개의 곡이지만, 순서에 맞춰서 들으면 마치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을 듣는 느낌을 주는 그런 음악이었다.
“그래픽 팀에서는 각 탑주가 사용하는 최종 기술의 이펙트를 변경해주세요. 사전에 각 탑주들과 상의해서, 각자가 생각하는 궁극의 이상이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스킬이 완성되어야 합니다.”
그래픽 팀 역시 상혁의 부탁대로 직원 전체가 최선을 다해 스킬 이펙트를 작업했다.
단순히 화려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펙트 자체가 시전자의 ‘의지’를 담은 느낌으로 전달 될 수 있게.
“대사는 심플하게. 시나리오만 보면 ‘어라? 이거 좀 유치하지 않나?’ 수준이어도 좋습니다. 게임은 인터렉티브 컨텐츠에요. 대사만 나가는 게 아니니까, 대사가 나갈 상황, 배경, 음악, 연기, 카메라 워크까지 다 감안해서 대사를 짜셔야합니다.”
시나리오 팀 역시 대사 한 줄을 작성하기 위해 수없는 수정을 거치며 작업에 임했다.
이벤트가 이어질 약 2시간의 무대 위에서, ‘참가자’와 ‘관전자’ 모두의 마음에 깊이 남을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해서.
“완벽하게 준비된 무대 위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도를 결정짓는 건 배우의 연기입니다. 탑주 여러분들은 항상 MYOM이 마치 게임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개발에 임하셨죠. 그러니 이번에도 잘 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정말로 MYOM의 세계에 마왕이 나타났고, 여러분이 그것을 막아야하는 탑주라는 마음가짐으로 진심을 담아 연기해주세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건 회사가 지원할겁니다. 그래도 부담되신다면, 최종 이벤트에서의 탑주의 역할은 전문 배우에게 넘기겠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요.”
상혁의 말을 들은 적탑주, 나나미 루카가 손을 들으며 물었다.
“강요해도 들어야하는 상황 아닌가요? 저흰 고용인이고, 회사에서 필요하다고 하는 거잖아요?”
“제가 여러분께 요청 드린 것은 마나 엔진을 기반으로 한 마법 체계의 구축이지 최종장의 배우가 되어달라는 요청은 아니었으니까요. 이건 별개입니다. 거절하셔도 패널티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상혁은 ‘빠지고 싶은 사람은 빠져도 좋다’라는 단서를 달았다.
모두가 연기에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연기’라는 측면에는, 전문 배우를 사용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어차피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탑주를 모델로 만들어진 3D 캐릭터이지 탑주 본인들이 아니니까.
그러나 상혁의 말을 들은 탑주들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편하게 포기하셔도 됩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상혁은 이미 완성된 글로벌 이벤트의 리허설 시나리오와 음악을 그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이게 내 테마음악이라니’라는 감동을 느끼게 만드는 웅장한 음악들과, 마치 자신들의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해서 만든 것만 같은 대사들, 그리고 남한테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을 멋진 마법 연출들을.
그러니까 상혁의 ‘빠질 사람은 빠져라.’ 라는 말은,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말 그대로의 의미로 들리지 않았다.
듣는 사람들 모두, ‘빠지면 넌 X나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기에.
“후, 솔직히 개발기간 내내, 한국에 와서 여기 들어온 첫날부터 속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도 양피지까지 동원하면서 저희를 미치게 만들었었죠. 흥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서, 거의 반 강제로 계약을 하게 만드셨으니까. 근데 또 같은 수법을 쓰시려고 하시는군요. 분명히 받아들이는 순간, 엄청나게 후회할 만한 제안을 하시면서요.”
철탑주, 시 메이좐이 그렇게 말하며 탑주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들도 알고 있었다.
상혁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이 뒤에 지옥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나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다.
이미 최종장의 시나리오를 본 순간 결정 난 것이었기에.
“젠장. 또 속는 거 같은데, 저런걸 보여주고 빠질 테면 빠지라고 하는 건 너무 치사하잖아. 아오, 난 할래.”
녹탑주 마리가 말했다.
“분명 후회할게 뻔하지만 여기서 빠지면 그거보다 더 후회하겠죠? 저도 할래요.”
황탑주 카밀라가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 탑주들도, 앞 다퉈 참가의 의사를 표했다.
“어쩌면 코넥트 개발 중에 멋대로 프로그램에 손대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런 운명이 제 앞에 놓여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좋습니다.”
“신비 학파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연기 따위 얼마든지 해 드리죠.”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 거 같아서 무섭지만, 저도 하겠습니다.”
모든 인원들이 동의의 의사를 표하자, 상혁은 웃으며 계약서를 돌렸다.
그들이 처음 한국에 와서 보았던 것과 같은, 양피지 위에 작성된 계약서를.
“사인하세요.”
이번에도 계약서 검토 따윈 없었다.
어차피 무슨 조건이 있더라고 참여할 생각이었고, 어떤 고생을 하던 간에 PTW는 직원들의 고생에 반드시 보상하는 회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리고 이어진 리허설.
유명 연극배우 출신인 천하대 연극영화과 교수의 지도 아래, 호흡부터 발성까지 수없는 지도를 받으며 지수를 포함한 탑주들은 MYOM의 피날레를 장식할 ‘마지막 연극’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것은 끝없는 조율의 과정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지 않는 부분을 끊임없이 조율하여, 톱니바퀴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한 장의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
정확히 대사 분위기가 전환 되는 부분에서 음악의 분위기가 같이 반전 되도록 사운드 팀이 곡을 편곡하면, 이번엔 음악의 싱크에 맞춰서 이펙트의 길이가 맞아 떨어지도록 그래픽 팀에서 이펙트를 조절했다.
그리고 지금, 서클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선택받은 수백 명의 MYOM유저들과, 비전 포탈을 통해 그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게 된 나머지 유저들의 앞에서, 지금까지 PTW가 준비한 ‘노력의 결정체’가 펼쳐지고 있었다.
‘미친, 이러니까 유저 수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지.’
전장에 참여중인 유저들도, 그리고 서클 제한 때문에 관전중인 유저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할 만큼 전장의 모습은 ‘말도 안 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MYOM은 ‘Make your own magic’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게임 특성 상 계열별로 수천 개가 넘는 주문이 존재하며, 그 중에서 유저가 자유롭게 주문의 습득이나 강화를 하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 주문의 형태는 서클이 높아질수록 개성이 심화되며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뇌전을 다루는 백탑 소속의 마법사라도, 서클을 어떻게 세팅하고 주문을 어떻게 육성하느냐에 따라서 주문의 형태가 달라지고 효과 또한 달라지는 것이 MYOM이었다.
그리고 조합식.
금속을 다루는 철탑 소속 마법사가 강화시킨 바닥에 흙을 다루는 황탑 소속 마법사가 골렘 소환 마법을 사용하면 금속 골렘이 소환된다.
거기에 감전 효과를 가진 뇌전을 사용하면 데미지를 입지 않고 오히려 골렘의 신체에 뇌전이 깃든다.
그런 시스템의 게임이었기에, 애당초 유저가 참여하는 대규모 전투가 된 시점에서 이 전장 자체가 통제 불능한 전장이 되어 있었다.
이미 누군가가 사용한 거대화 마법부터 시작해서 용암으로 만든 거대한 닭과 나무 뼈대에 얼음으로 된 육체를 가진 늑대까지 온갖 마법 생물들과 주문들이, 전장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전장에 서 있는 지수와 탑주들은 상혁이 자신들에게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젠장. 상혁 씨가 리허설 때 했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지수가 쏘아낸 뇌전 마법을 수속성 방어막으로 막으려고 시도하는 유저들을 보면서, 메이좐이 속으로 투덜댔다.
그리고는 재빨리 철 기둥을 소환해 피뢰침처럼 사용해서 유저들이 뇌전에 직격되는 사태를 막았다.
그리고는 리허설 때 상혁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상혁 씨, 여기 시나리오에 전투가 개시되면 ‘알아서 유저들을 보호하며 싸운다.’라고 적혀있는데요? 정해진 주문을 쏘면서 싸우는 게 아니에요?”
“그게 불가능하니까요.”
“예?! 그럼 전투 시나리오는 아예 없어요?”
“예. 전에 설명 드렸을 텐데?”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았어요.”
“다시 말해드리죠. 이 게임의 월드 이벤트란 건, 절대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흘러갈 수 없어요. 전투가 개시되는 순간부터, 유저들은 온갖 마법을 다 쓰면서 전투에 참여할 겁니다. 저희가 어떤 식으로 시나리오를 짜던, 거기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을 거고요. 그러니까 사실 이 전투에서 탑주 여러분과 지수는, 유저들의 상황을 보면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어요.”
“저희가 실수하면요?”
“그럼 유저들이 왕창 죽어나가겠죠.”
[메이좐! 정신 차려! 한눈팔지 말라고!]
순간 철탑주의 앞으로 날아오는 붉은 색 화염 덩어리를 풍탑주 에르노 크리샤가 회오리를 날려 막으며 외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유저들은, 모두가 입을 쩍하고 벌리며 탑주들의 연기에 감탄했다.
‘오, 진짜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마왕으로 지수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이 월드 이벤트 자체는 거대한 ‘트루먼 쇼’처럼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단지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전부 배우였던 ‘트루먼 쇼’와 달리, 이 이벤트의 ‘트루먼’은 400명이 넘는 일반 유저들이라는 점이었다.
무대 안에 들어와 함께 연기하는 400명의 동료들을 속이기 위해, 상혁은 탑주들에게 한 가지 만을 요구했다.
본인이 될 것.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마왕이, 지수가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마왕이라 생각하라고.
그리고 자신들이 그것을 막아야하는 탑의 대마법사라고 생각하라고.
“마법을 상상에서 진실로 만들어낸 여러분이라면, 마왕의 존재도 진실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 MYOM를 개발해낸 여러분의 노력은, 그런 믿음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한 열정을 필요로 하니까.”
수도 없이 탈진할 정도로 빡세게 굴러갔던 수많은 전투 리허설들은, 버그와 부하를 테스트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탑주들을 ‘진짜 마법사’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세 사람이 우겨대면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는 법이지.”
고조되는 음악과 함께 점점 진지한 눈빛을 하기 시작한 탑주 들을 보면서, 상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지수가 자신에게 이벤트 기획을 가져온 날에, 자신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취미이자 놀이로서의 게임이 아니라, 그런 차원을 넘어선 특별함을 느꼈으면 좋겠는데···
오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TV 화면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유저에게, 이것이 ‘게임 이벤트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라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지수의 질문.
그것은 사실 오랜 시간동안 게임 개발자들이 생각하던 근원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었다.
‘고작 게임인데.’
‘어차피 죽으면 세이브 부르면 되는데.’
‘내가 왜 이런 이벤트에 진심을 다해야하지? 단지 게임일 뿐인데?’
게임은 유저가 ‘진지함’을 가질 때 가장 큰 의미와 재미를 전달 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유저에게 ‘진지함’을 강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 소설처럼 게임에서 죽으면 실제로 죽게 만들 수도 없는 법이고.
게이머의 인생은 게임 안이 아니라 밖에 있으니까.
결국 지수의 질문은 그 답을 찾지 못해서 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상혁은 그런 지수에게 이렇게 답했다.
“전심전력(全心全力).”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다.
단지 소설에 쓰인 글자 몇 줄을 보고 등장인물에 동화될 만큼.
영화에서 나오는 배우의 연기를 보고 그 배우의 감정에 동화될 만큼.
가수가 부르는 노래 가사를 듣고 작곡가의 마음을 이해할 만큼.
“지수야. 만약에 네가 길을 가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어머니가 다쳤다면서 따라오라면 따라갈 거야?”
“아뇨, 의심할 것 같은데요?”
“그럼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스포츠카가 끼이익! 하고 드리프트로 멈추더니 차 문이 열리면서 처음 보는 사람이 ‘설명할 시간이 없다. 우선 빨리 차에 타!’라고 말하면?”
“헉! 그건 탈거 같아요.”
“그런 거야. 생각보다 인간의 감정이란 건 상황과 진심이라는 무기에 잘 넘어가거든.”
[내가 쓰러지기 전엔! 여기 있는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겠다!]
[상아탑의 진정한 주인은, 여기 있는 마법사들이다! 마법은 너 따위의 욕심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필사적으로 주문을 시전하며 탑주들이 외치는 대사들은, 어찌 보면 ‘유치한’ 대사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애당초 그렇게 느껴지지 않도록, 음악부터 배경까지 모든 요소를 고려해서 이 무대를 준비해 놓았으니까.
“유치해도 됩니다. 유치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면 되니까.
오글거려도 됩니다. 오글거리지 않는 연기를 하면 되니까.
여러분이 전심전력으로 ‘진짜’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떤 유저도 여러분의 진심을 비웃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진심이 전염되면, 유저들도 생각하게 되겠죠.
우리가 만들어낸 이 ‘무대’가, 무대가 아니라 ‘진짜’라고.”
리허설 때 상혁이 했던 말대로, 탑주들의 혼신의 연기로 만들어진 진지함은, 순식간에 유저들 사이에 전염되기 시작했다.
눈을 뗄 수 없는 환상적인 그래픽과, 듣는 것만으로도 뽕이 차오르는 음악 속에서 자신들이 쏘아낸 마법이 무대의 한 장면을 함께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가장 커다란 기쁨을 느끼고 있는 존재는, 유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지수와 탑주들이었다.
[온다! 방어 주문을!]
어느새 유저들이 탑주들의 호령이 터지기도 전에 알아서 공격해오는 주문의 상성에 맞춰서 방어 주문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멀린은 마치 자신이 콘서트장의 가수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400명이 넘는 유저들이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통제를 따라 전력으로 전투에 임하는 모습은, 자신이 진짜로 마왕에 맞서 싸우는 마법사들의 집단의 수장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화염 주문이 오는 방향을 향해 수속성 주문을 날리고, 금속성 주문을 막기 위해 바위벽을 세우는 유저들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노래 가사를 단체로 따라 부르는 팬들을 보는 기분을 지수에게 느끼게 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이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들어간 노력이 전혀 아깝지 않은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지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강력한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여기 모여 있는 마법사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을 주기 위하여.
‘좀더, 더 신나게!’
400명의 유저들과 ‘개발자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가는 무대는, 그렇게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합치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수가 준비한 마지막 이벤트.
그 ‘피날레’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