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마법의 심연
“저기, 워함마가 뭐 길래 그러는 거예요?”
서연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묻자, 상혁이 홱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손가락으로 서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단이다!!”
그러자 민준과 지수가, 양손을 번쩍 들며 서연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Heresy!!!”
“저기 이단이 있다!!”
그러자 서연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손날을 세워 두 사람의 머리에 춉을 날렸다.
“으악! 카오스가 공격한다!”
“황제폐하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두 사람 다 조용히 안 해요?”
서연의 눈빛을 받은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서연이 상혁을 보며 물었다.
“일단 뭘 만들려는 건지 설명을 해줘야 저도 그림을 그릴 거 아니에요. 대체 런던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온 거에요?”
상혁은 웃으며 자리에 앉아, 팀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중에 워함마40K아는 사람?”
역시나 멤버 중에서는 지수와 민준, 하린을 제외하고는 한명도 손을 들지 않았다.
상혁은 1987년부터 이어져온 이 장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 가야할까 고민하다가,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There Is Only War(그곳엔 전쟁뿐이다)’라는 카피가 가장 잘 어울리는, 워함마의 끔찍하면서 아름다운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다고 40K의 전신인 오리지널 워함마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길어질 테니까.
그래서 상혁은, 오리지널 워함마의 세계관 이후 4만년 후의 이야기를 다룬 첫 번째 시리즈, ‘워함마 40,000 : 우주 모험가’의 이야기로 설명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설명은, 무려 6시간에 걸쳐 이어진 장대한 설명의 연속이었다.
상혁은 나름대로 압축한다고 최대한 압축해서 설명한 것이었지만, 애당초 그 세계관 자체가 끔찍하게 복잡하고 깊이 있다 못해 설정끼리 충돌해서 터져나가는 세계관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긴 설명을 듣던 팀원들의 표정은, ‘대체 내가 이걸 왜 듣고 있는 거지’라는 표정이었다.
상대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하는 능력을 타고난, 서연을 제외하고.
“결국 오빠의 설명을 압축하면, ‘황제폐하’는 엄청나고, ‘빠워 아머’는 엄청 멋지며, ‘스뻬쓰 마린’은 우주 최강의 무적 전사들인데 심심하면 전멸하고, 인간은 조 단위로 죽어나가는 먼지 같은 존재인 세계관이라는 거네요?”
“그거 참 엄청난 압축이긴 한데, 얼추 맞아.”
“그리고 그 ‘스뻬스 마린’이란 존재가 그 절망적인 세계관에서 싸우는 이야기를, 하린 씨의 프로젝트에 넣고 싶다고요?”
“어.”
“흠···.”
서연의 앞에는, 상혁이 GW에서 얻어온 온갖 아트 자료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전에 자신이 작업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지만, 기본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로망엔 닮은 점이 있었다.
‘인류 최후의 보루’라던가 ‘악마와 싸우는 처절한 전투’같은 부분들이.
‘디자인은 일단 만든 건 다 폐기해야겠네.’
재미있는 디자인이었다.
서연이 현대에서 미래로 가는 과정의 디자인을 했다면, 워함마의 디자인은 역으로 먼 미래임에도 과거와 통하는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미래임에도 불구하고, 중세를 연상하게 하는 육중한 갑옷이나, 칼에 달아놓은 야만스런 톱날이라던가, 2차 세계대전에서 튀어나온 듯한 탈것의 디자인.
IP가 있는 작업을 할 때 중요한 것은, 기존의 것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서연은 금세 어떤 방향의 디자인을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그림을 이 게임의 팬들이 원할지, 어떤 디자인을 이 게임의 팬들이 좋아할지.
팬들의 입장에서, 팬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서연은 눈을 감고 상혁이 해준 이야기들을 장면으로 떠올렸다.
웅장. 장엄. 희생. 헌신. 폭력. 유혈. 전쟁. 용맹. 사명. 인내. 신앙. 의지···.
오래되어 낡은 개념이기에 소중한 느낌의, 워함마 팬들이 사랑하는 그런 가치를.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서연은 완벽하게 이 컨텐츠가 추구하는 ‘로망의 방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오케이. 저는 좋아요. 멋지네요. 웅장하고 장엄한 이야기. 한 줄의 대사만으로 전신을 떨리게 하는 가슴 시린 서사시. 수천만의 적들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며 굳건한 믿음으로 적 무리에 뛰어드는 강철의 용사.”
“뽀디 엠퍼러?”
“뽀디 엠퍼러.”
서연의 대답에 상혁이 만족한 표정을 짓자, 혁진이 손을 들며 말했다.
“어? 잠깐만요, 지금 분위기로 AD결정되는 겁니까?”
“어라? 혁진 씨도 관심 있어요?”
“밀리터리 좋아하는 사람 중에 워함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당연히 저도 하고 싶죠.”
“흠···. 하지만 그쪽은 IP 관리에 깐깐해서, 이번 게임은 디자인 바리에이션을 거의 줄 수 없어요. 그쪽에서 정해진 장비를, 정해진 방식으로 그려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그 따라가야 하는 디자인이 워함마 디자인이면, 그리는 거 자체가 기쁨일겁니다.”
“그럼 아까 왜 엠퍼러 안 외치셨어요?”
상혁의 질문에 혁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그건···?”
“거···거짓 황제에게 죽음을!!!”
“으악! 설마 했던 혁진 씨가 카오스였다니!?”
상혁이 손가락으로 혁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단이다!!”
그러자 민준과 지수가, 양손을 번쩍 들며 혁진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Heresy!!!”
“저기 이단이 있다!!”
“뽀디 엠퍼러!!!”
단지 아까와는 다르게, 그 무리에 ‘뽀디 엠퍼러!!’를 외치는, 서연이 끼어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상혁은, 미소 지으며 간단하게 인원 배정을 결정할 수 있었다.
서연과 혁진, 두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계열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갈리고 있었기 때문에.
“좋아요. 그럼 카오스 진영 디자인은 혁진 씨가, 우주 해병 디자인은 서연 씨가 맡으면 되겠네요. 서로 최대한 멋지게 잘 뽑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거짓 황제에게 죽음을!”
“뽀디 엠퍼러!!!”
신나서 외치는 두 사람의 외침을 들으며, 상혁은 바로 다음 안건의 검토에 들어갔다.
***
CEO의 변경은 PTW내에서 뜨거운 핫 이슈로 떠올랐다.
거기에 민준이 CEO로 바뀌면서 변화시킨 기존의 시스템도, 회사 내의 직원들에게, ‘앞으로는 기존과 많이 다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이슈가 된 것은, 콘테스트 제도의 폐지.
앞으로는 회사 내의 누구나 자유롭게 신청 후 팀을 꾸려 프로젝트를 상시로 꾸릴 수 있었다.
마치 동아리를 꾸려서, 게임을 만드는 느낌으로.
그리고 기존 직원들도 언제나 프로젝트들을 살펴보며 괜찮아 보이는 프로젝트에 지원하거나 투표를 할 수 있도록.
그것은 마치 게이머들이 자유롭게 프로젝트에 투표할 수 있는 스팀의 그린라이트(Greenlight)를 연상하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단지 그들이 뽑는 게임이, 앞으로 자신들이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제외하면.
가장 큰 변화는, 역시 R&D를 맡은 ‘PTW’와 스케일 확장을 맡은 ‘스케일업’으로의 분사였다.
회사를 반으로 쪼갠다는 결정에 많은 직원들이 우려를 표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건물에서 일하면서 소속만 변경된다는 소식에 직원들은 안도를 표했다.
그리고 민준은, 그런 직원들을 일일이 세 부류로 분리했다.
먼저, 개발에 관심이 많으며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만들고 싶어 하는 그룹.
그리고 자신의 작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싶어 하며 주어진 일을 높은 퀄리티로 마무리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그룹.
마지막으로 그냥 스트레스 받을 일만 없으면 높은 연봉이 보장되는 PTW에서 적당히 버티고 싶어 하는 그룹이었다.
물론 어느 그룹이든 업무 능력 자체는 보장되어 있는 직원들이다.
애당초 능력 없는 직원도, 강제로 파다완 수준까지는 끌어올려지는 게 PTW의 회사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민준은 첫 번째 그룹을 PTW소속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룹을 스케일 업 소속으로 나눴다.
그리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신규 개발에서 만들어진 기초 빌드를 키우고, 다듬으며,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을 시키고, 세 번째 그룹에는 기존 게임의 라이브 운영 및 업데이트를 맡겼다.
각 직원들에게 두 회사의 성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원하지 않으면 파트를 옮겨주겠다는 단서를 붙이며.
배치도 그대로였다.
단지 직원의 소속을 구분하는 마크가, 파티션 위쪽의 네임판에 새로 붙었을 뿐.
변화는 소리 없이 이뤄지고 있었지만,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코넥트’의 소형화를 담당했던, 거의 잊혀진 파트나 다름없던 인력들이, R&D를 맡은 PTW파트로 대거 소속되었다.
상혁이 맡겨놓고 방치해 놓은 사이에, 상혁의 예상보다 엄청난 물건을 만들어 놓은 상태로.
“이 정도면 바로 납품해도 되겠는데요?”
MS와 공동으로 개발한 코넥트는, 이제 거의 원래의 크기와 흡사할 정도의 크기로 돌아가 있었다.
물론 게임 성능을 제대로 내려면 좀 더 기기의 가격이 내려가야 가능하겠지만, 이미 지금 수준으로도 국방부 납품은 가능한 수준.
코넥트의 개발 진도를 확인한 민준은, 이번엔 ‘중2병 배틀러’의 진도를 확인했다.
어차피 모션 인식관련 기능을 개선하기 위해서 추진하던 프로젝트였기에, 상혁은 그부분에도 지속적으로 예산을 투입하고 있었고, 꽤 많은 비용이 그로 인해 지출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민준은, 이 골방에서 코딩만 하던 너드(Nerd)들이, 원래 자신이 기초 빌드를 맡았던 중2병 배틀러에 매우 해괴한 짓을 해 놓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출시해도 괜찮은 수준을 넘어서, 거의 모션 인식으로 돌아가는 마법 시뮬레이터라고 불러야할 수준의 마법 배틀게임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모션이랑 주문 설정이나 상성 같은 건···.”
“사실 코딩하다가 심심해서 이것저것 추가하다보니 만들어진 거라, 대부분은 모션만 가지고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주문을 외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오버인 것 같아서···.”
“제가 예상한 것보다 동작 인식률이 너무 좋은데요?”
“될 때까지 계속 AI를 학습시켰죠. 오류 계속 수정하면서요.”
“주문 모션은 어떻게 결정하셨어요?”
“아, 그건 쉬웠습니다.”
민준과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이, 엄청나게 두꺼워 보이는 바인더를 가져와서 책상위에 내려놓았다.
얼마나 뒤적였는지 너덜너덜해 보이는 바인더는, 거기 그려진 인간의 동작 그림이 더해져 무슨 마법서적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저희는 이걸 ‘그리모어’라고 부릅니다.”
민준은 그 책의 내용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상혁이 와서 봐야할 내용인 것 같아서.
***
“이런 미친, 이걸 진짜로 만들었다고요?”
연구실에 쳐 박혀서 코넥트 소형화와 게임 개발용 SDK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놓고 방치해놨더니, 이 미친 인간들이 취미로 괴상한 물건을 만들어놨다는 민준의 연락을 받고 상혁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연구원들이 ‘그리모어’라고 부르는 설명서의 내용을 보면서, 민준과 마찬가지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는 주문이 전부, 예전에 지수가 짰던 마법이론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거라고요?”
바인더에 적힌 주문은, 계열별로 못해도 수백종류가 가볍게 넘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상대를 양으로 만드는 주문부터, 기절마법, 안구에 빛을 쏘는 마법, 환영을 만드는 마법, 개구리를 토하게 하는 마법, 그림자를 묶는 마법까지···.
심심해서 만들었다고 하기엔 너무나 방대한 양의 결과물이었다.
“지금 코넥트의 모션 인식 성능으로 구현하기엔 너무 복잡한데?”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마법을 만들어 보려고 하다가 만들어진 물건이라서···. 그래도 거기 맞춰서 성능을 끌어올렸기 때문에 동작은 잘 됩니다.”
“혹시 이걸로 배틀하는 모습 보여주실 수 있어요?”
상혁의 질문에 연구원이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두 사람의 작업자를 불러왔다.
“여기 두 사람이 저희 개발팀 내 최고 고수입니다.”
“두 분 다 자기 소개 좀 해주실래요?”
“10서클 위자드. 멀린입니다.”
“마찬가지로 10서클 소서러, 간달프라고 합니다.”
“아니 닉네임 말고 이름요.”
“박봉춘이요.”
“서남길입니다.”
“좋아요. 박봉춘 씨, 그리고 서남길 씨. 지금 두 분께서 중2병 배틀러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마법 배틀을 시연해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상혁은, 나뉘어져 있는 두 방에 각각의 시연자를 들여보낸 후 민준과 함께 방에 들어갔다.
상혁은 박봉춘과 함께, 그리고 민준은 서남길과 함께.
그리고 지금은 거의 에프킬라 캔 크기 수준으로 작아진 코넥트를 기동시킨 후, 두 사람이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안보는 사이에 심심함에 미친 개발자들이, 반쯤 버려진 프로젝트로 뭘 만들었는가를 보기 위해서.
그것은 최초에 이능 배틀물로 지수가 기획했다가 상혁이 캐릭터 배틀물로 개조하고, 최종적으로 연구실 오타쿠들이 마법사 배틀물로 뜯어 고친 괴상한 게임의 최종 버전이 시연되는 순간이었다.
“어? 그건 뭐죠?”
한쪽 방에서 팔에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팔찌를 끼우는 봉춘을 보며, 상혁이 묻자 봉춘이 답했다.
“손가락 인식을 돕는 장치입니다. 손등 쪽 근육의 움직임을 추적해서, 손가락이 취하고 있는 형태를 감지하는 장치죠.”
“예?!”
상혁이 놀란 것은 봉춘이 말한 기술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해당 기술은 2020년이 넘어서 코넬 대학교에서 ‘FingerTrak’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될 기술이었다.
그것을 2007년도에, 그것도 상혁의 별다른 지시 없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상혁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건 왜 만드셨습니까?”
“주문 인식시키는데 손가락 움직임이 잘 안 먹혀서요. 코넥트의 모션 인식 센서만 가지고는 제대로 시전이 안 되더군요.”
사실 원래 버전은 상혁이 코넥트의 모션 인식 성능을 고려해서 손가락 모양보다는 팔의 움직임을 인식하여 주문이 동작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연구실에 처박혀 죽어라 이것만 만지던 공돌이들은 그런 코넥트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누구의 조언도 없이 미래에 나왔어야할 기술을 당겨서 개발한 것이었다.
순수하게, 지금 자기들이 가지고 놀고 있는 게임을 좀 더 재미있게 즐기겠다는 욕망 하나로.
봉춘은 손목에 찬 팔찌 형태의 장비의 전원을 넣더니, 게임을 구동 시켰다.
이미 그것은 상혁과 민준이 만들었던 이전의 ‘중2병 배틀러’와는 지구와 안드로메다만큼 떨어진 물건이었지만.
마법 배틀에 도움이 안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은 이미 옛저녁에 삭제된 이후였고, 지금은 딱 봐도 마법사같이 보이는 캐릭터들만 잔뜩 있었다.
게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식으로 캐릭터 셀렉트를 하는 것도, 무슨 주문 같은 동작을 취하면 해당 캐릭터가 선택되는 방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봉춘은 마치 진짜 마법사인것처럼 손가락을 꼬며 허우적거리더니, 자신이 커스터마이징 해놓은 캐릭터를 바로 불러왔다.
흰 머리에 잘생긴 미소년 캐릭이 로브를 입고 화면에 등장했고, 그 머리위에는 <위자드. 10 계위.> 라는 칭호 아래 Merlin이라는 캐릭터 네임이 새겨져 있었다.
게임의 모든 선택을 죄다 모션 인식으로 하게 바꾸어놓았는지, 봉춘이 팔을 이리저리 돌리자 순식간에 캐릭터가 선택되고 건넌방에 있는 남길과 대전 모드로 매칭이 잡혔다.
그리고 봉춘이 대기 화면에서 두 팔을 세로로 배치한 채 중간 손가락을 굽히자, 멀린 캐릭터의 주위로 알록달록한 색의 돌맹이들이 나타났다.
“그건 뭐죠?”
“기술적으로 설명하자면 AI의 보정방식을 정하는 단계인데, 컨셉으로 설명드리자면 본인이 쓸 마법의 계파를 정하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 학파는 주로 신비마법을 다루는 학파라 보라색 보석을 사용합니다.”
봉춘이 허공에 손을 뻗어 보라색 보석을 만지자 봉춘이 낀 팔목의 기기에 새겨진 문양에서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이후 제가 하는 모션의 보정 값이 신비 마법 계열로 변화됩니다. 그러니까 비슷한 모션을 취하더라도, 다른 마법이 아니라 신비마법 계열의 주문이 발동되도록 보정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뭐 그런···.”
‘개간지 나는···.'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상혁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화면위에 마치 붉은 스파크로 새겨 놓은 듯한 글자가 카운트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숫자도 바꿔놨네?’
속으로 감탄하며, 상혁은 숫자가 0이 되자 전환되는 배경 저편에 다른 마법사가 서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쪽에는 봉춘과는 다르게 팔에 푸른색 기운을 두르고 있는 수염 난 마법사, 간달프(남길)이 서 있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건너편 방의 남길이 건네는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성 효과를 먹였는지, 제법 마법사 같은 느낌이 드는 중후한 목소리로.
“또 만나게 되었군. 멀린.”
“이번이 4992번째 대전인가. 간달프. 이렇게 또 싸우게 될 줄이야.”
봉춘의 말에 남길이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답했다.
“우리 아까 3시간 전에도 이거 했잖아.”
“아, 대전 중에는 분위기 깨는 말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아, 그렇군. 미안하다. 다시 말해주지만 신비학파는 우리 뇌전학파를 이길 수 없어.”
“그건 해 봐야 아는 거겠지. 모든 마법의 아버지인 마스터 요다가 보고 있는 이상, 나는 절대지지 않는다!”
“좋다! 덤벼라! 격의 차이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열정적으로 떠드는 봉춘을 보며, 상혁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내가 모든 마법의 아버지가 된 거지?’
그러나 상혁의 그런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고, 두 사람은 코넥트 개발팀 전원이 2년 넘게 마개조한 ‘중2병 배틀러’의 시연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말 그대로 ‘마개조’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전투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