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위화감
“게임 회사에 입사해서 자기 게임을 만들고 싶은 건 당연하죠. 면접 때도 그래서 저희한테 만들고 싶은 게임이 뭔지 물어보시고, 콘테스트도 그래서 진행하는 것 아닙니까?”
아직 마스터 급 진급은 못했지만 타 게임업체에서 7년차 기획자로 일하다 작년 말 PTW에 입사한 박윤재는 이번 기회에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있었다.
자신이 앞으로 5년을 더 열심히 일했어도 쉽게 주어지지 않을 기회를, 이곳에서는 모든 신입들에게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 아예 ‘시니어 이하’라고 못을 박고 자신들에게 팀을 꾸리라 권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윤재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로 보였다.
자신의 프로젝트가 1등을 차지하는 순간, 세계에서 가장 능력 좋은 개발자들이 전심전력으로 자신의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줄 테니.
게다가 젊은 나이에 벌써 10대 개발자 목록에 이름이 언급되는 회사의 CEO, 이상혁도 자신의 게임을 완성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고.
윤재가 보기에 그것은 엄청난 메리트였다.
앞서 있었던 허접한 아이디어 2개가 상혁의 손을 타면서 어떤 결과물로 바뀌었는지, 윤재도 이전 프로젝트 관련 자료를 봐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에 윤재는, 다른 시니어 직원들보다 경력이 비교적 긴 자신이 낸 프로젝트 제안서를 보고, 상혁이 자신의 팀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상혁이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의 프로젝트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결과는?
상혁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고르지 않았다.
7년간 업계에서 구르면서 배운 기술을 총 동원해서, 다른 프로젝트보다 압도적으로 깔끔하고 화려한 제안서를 작성해서 오픈했는데도, 상혁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고르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윤재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자기가 고른 게 1등할 텐데 이럴 거면 콘테스트는 왜 하는 거야? 기회를 줬다는 시늉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건 기만 아니야?’
아마 상혁이 선택한 게 하린이 아니라 윤재의 프로젝트였다면, 그가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현실은 윤재의 생각과는 달랐다.
그리고 윤재는, 곧 다른 팀의 팀장들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같은 팀장들이 치트나 다름없는 존재인 상혁이 콘테스트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공정한 경쟁을 해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물론 회사 대표에게 달려가서 콘테스트에 빠져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얼마나 당돌한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포기하기엔 윤재에게 이번 콘테스트는 너무나 큰 기회처럼 보였다.
게다가 상혁은 평소에 무례에 가까운 당돌한 질문을 받아도 항상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걸로 유명하기도 했고.
그래서 모인 팀장들의 모임.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신들의 요구는 지극히 합당하며 논리적이었다.
딱히 상혁에게 개발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경쟁이 끝난 이후에’ 공정하게 1위를 차지한 작품에 참가해달라는 부탁이다.
어차피 PTW에서 게임이 출시되기 위해서는 어떤 작품이 되었던 상혁의 개입은 불가피하니까.
그들은 단순히 개입하는 타이밍만 바꿔달라는 요청을, 상혁이 거절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공정함’에 대한 요구를, 상혁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상혁에게 있어서 콘테스트란, 회사 전체가 머리를 모아서 가장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뽑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벌이는 콘테스트가 아니다. 철저하게 유저가 가장 즐거워할 만한 아이디어를 고르기 위해 하는 것이 상혁이 생각하는 콘테스트의 정의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상혁은 자신이 참여한 프로젝트보다 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투표로 선정될 경우, 자신이 참여한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해당 게임을 개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린의 팀원으로써 최대한 재미있는 기획을 뽑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투표에서 진다면 그건 그만큼 상대방의 아이디어가 대단한 아이디어라는 소리니까 상혁으로써는 딱히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런데···.’
상혁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시니어 직원들을 보았다.
자신이 직접 면접에 참가했었기에, 이름부터 직책까지 상혁이 모두 기억하고 있는 그 직원들을.
‘콘테스트의 의미를 완전히 잘못 해석하고 있네. 아마도 자신의 게임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그런 거겠지.’
그 마음만큼은 상혁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에게 회귀 전, 지금의 반의 반 정도의 가치가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자신도 목숨 걸고 그 기회에 집착했을 테니까.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혁은,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순수하게 자신이 꿈꾸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
그것이 이들을 자신 앞에 오게 만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수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상혁이 CEO로 존재하는 한, PTW는 개발자의 자아실현이 아니라 유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회사여야했기 때문에.
“우선 다들 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몇 개 확인시켜드리죠. 우선, 저희는 개발자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아닙니다.”
상혁의 냉랭한 말투에 상혁을 찾아온 직원들이 혼란에 빠졌다.
‘게임 개발자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목적이란 말이지?’
그리고 상혁은, 그런 직원들에게 무엇이 자신이 생각하는 회사의 방향인지 알려주었다.
“저희는 유저에게 재미있을 것 같은 게임을 만드는 회사죠.”
“그 재미의 기준이 결과적으로 대표님의 참여에 달린 게 되지 않습니까?”
“잊었어요? 이전 콘테스트 때도 최종 투표는 전 직원이 참여한 선거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거?”
애당초 상혁이 참여했다고 해서 무조건 1등을 한다는 보장이 있는 콘테스트가 아니다.
순수하게 나온 결과물들을 비교해서 PTW의 직원들의 투표를 거쳐 다음에 자신들이 만들어야 할 게임을 고르는 과정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콘테스트였으니까.
게다가 딱히 1등만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지난번 콘테스트 때도 2등이었던 현주의 게임을 함께 제작했었다.
만약 괜찮은 아이디어라면, 그것이 1등을 하지 못한 아이디어라도, 상혁은 대표 권한으로 개발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이전에 ‘포수가 회귀를 숨김’역시 1등을 놓친 아이디어였지만, 지금은 회사의 주 수익중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상혁의 생각에, 기회 자체는 굉장히 오픈되어있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 말고도 회사에 능력 있는 마스터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차라리 제안서를 들고와서 ‘제 아이디어가 더 좋으니 닥치고 봐주세요!’같이 외쳤으면 더 좋았겠지만, 자기가 이기고 싶다고 남의 아이디어를 재미있게 만들지 말라는 제안은 CEO로써 용납하기 어렵네요.”
상혁의 개입으로 아이디어가 ‘재미없어진다는 이유’였다면, 상혁은 미련 없이 콘테스트 참가를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은 상혁에게 실질적으로 ‘재미있게 만들지 말라’라고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히 자신의 아이디어가 채택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으로.
그리고 그것은 상혁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 분위기가 좀 무거워진 것 같으니 가볍게 이야기 해보죠.”
상혁이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 시킨 뒤, 말을 이어나갔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은 저도 공감합니다. 그것 때문에 마스터 급 직원들의 팀 개설을 막은 거기도 하니까요.”
상혁의 말을 들은 윤재 일행의 표정이 확 밝아졌지만, 상혁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그 기회를 받았잖아요?”
“예?”
“제가 프로젝트를 고르기 전, 여러분은 본인들의 프로젝트를 어필할 여러 번의 기회를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마스터급 직원 누구에게나 팀 가입을 권유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어필해서 팀을 구성할 ‘평.등.한’ 권리가요. 그리고 전 그 ‘평등’ 속에서 제가 들어갈 팀을 고른 겁니다. 이게 불평등하다면, 대체 뭘 더 평등하게 해달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냥 칼 들고 와서 ‘내 게임을 당장 만들어!’라고 협박이라도 할 겁니까?”
내용은 날카로웠지만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단지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상냥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제가 만약 여러분의 프로젝트를 고르지 않았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는 거고요. 단순히 재미만 고려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재미보다 더 고려할 우선 사항이 어디 있나요?”
“저희 직원들이요.”
상혁이 말했다.
“이제 저희 직원들도 300명이 넘는 대규모 인력이 되었죠. 그중에 라이브 서비스 개발을 하는 인력을 제외하고, 앞으로도 인력을 더 뽑을 생각이고요. GOS때는 렌더링 센터 건설에만 2천억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압도적인 퀄리티로 세상에 감동을 전했었죠.그럼 이제 유저들이 저희에게 기대하는 게 뭘까요”
“GOS때의 감동이요?”
“격입니다.”
상혁의 말은 단호했다.
“50명이 개발하는 회사에 기대하는 게임의 기댓값과, 500명이 개발하는 회사에 기대하는 게임의 기댓값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저희는 그 기대를 충족시킬 의무가 있고요. 그러니까 제가 프로젝트를 고른 이유는,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저희 직원들이 배제되지 않고 골고루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규모도 고려한 결정입니다.”
옆에서 상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상혁이 하는 이야기에서, 자신이 아는 평소의 상혁과는 다른 가치관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러나 상혁은 서연의 그런 반응을 눈치 채지 못하고 눈앞의 직원들에게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제가 만약 여러분이라면, 지금 저에게 와서 이렇게 따질 시간에 본인 프로젝트에 집중하겠습니다. ‘내 프로젝트를 선택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요. 아니면 ‘CEO가 뭐 어쨌다고? 내가 진짜 게임이 뭔지 보여주마!’라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개발자가, 저한테 찾아와서 ‘이건 불공평해!’하고 징징대는 개발자보단, 훨씬 멋지지 않을까요? 물론 여러분들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상혁은 일부러 도발적인 내용으로 말을 끝냄으로써 직원들을 자극했다.
애당초 자신을 찾아온 이들의 마음속에, 자신의 개입만 아니라면 1등은 자기 것이라는 자신감이 차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혁의 계산대로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상혁은, 흔들리는 그들의 눈빛을 보며,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저는 오히려 지금 여러분이 저와 같은 팀이 아닌 게 여러분께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
“그렇잖아요? 이번 콘테스트에서 제가 참여한 팀을 이기면, 여러분은 한방에 ‘세계 10대 개발자를 이긴 개발자’가 될 수 있는 거죠. 물론 저는 아직 제가 거기 들어 갈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인건 맞죠.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유명 개발자를 대놓고 밟을 기회라는 건, 흔하지 않으니까요.”
훈계에서 도발로, 그리고 고무로 이어지는 상혁의 화술에 윤재일행은 완전히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대표역을 맡은 윤재는, 상혁이 말한 ‘유명 개발자를 밟을 기회’라는 말에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상혁의 말대로, 게임업계에서 이렇게 대놓고 다른 개발자와 승패를 가룰 기회는, 절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니까.
어느새 윤재의 눈은, 상혁을 이기고 자신이 최고의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판단을 잘못 한 것 같습니다. 대표님을 심란하게 해드린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윤재가 고개 숙여 사과하자 나머지 직원들도 함께 허리를 숙였다.
상혁은 그런 직원들을 보고 미소를 유지한 채 상냥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이렇게 찾아와서 말해준 것에 대해, 저는 굉장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용기를 낼 만큼 의욕적으로 콘테스트에 참여하고 계신데도 감사드리고요. 하지만 가급적 여러분이 콘테스트에서 저를 이겨주시는 게, 더 감사할 것 같네요. 그건 제가 선택한 아이디어보다 훨씬 뛰어난 게임 아이디어를 완성 해 주셨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요.”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길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가보세요.”
윤재 일행은 상혁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부실을 나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게임회사의 목적이···.”
“개발자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게 아니라고?”
“납득 가냐?”
“아니, 너는?”
“나도 안가. 물론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졌다는 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긴 했지만. 대표님 생각은 이해하기가 어렵네.”
그러자 입을 다물고 있던 윤재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왜 저렇게 유저한테 미쳐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거 같다.”
“어? 뭐?”
“유저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겠다. 저런 마음으로 게임을 만드니까, 유저들이 개발사를 위해서 이벤트를 열어주는 거라는 거.”
솔직히 상혁의 사상은, 자신의 입장에서 100%공감할 수는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개발자가 아닌 유저라면, 저런 마음으로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윤재는 생각했다.
그렇게 윤재 일행이 인사를 하고 부실을 나선 뒤, 상혁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않아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던졌다.
“아, 진짜. 더럽게 바라는 거 많네.”
“엥? 오빠?”
방금 전까지 상대를 감동시키는 일장연설을 한 장본인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 아니었기에, 서연이 놀라서 상혁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거 연기였어요?”
“아니? 단지 ‘나한테 징징댈 시간에 네 게임이나 더 다듬어라’라는 말을 매우 온화한 버전으로 돌려 표현한 것뿐인데?”
“아···.”
“뭐, 마음은 이해가 가니까.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난 개발자가 재밌는 게임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기 이상 실현을 목적으로 게임을 만들려고 하는 걸 좋게 보지 않거든.”
“뭔지 알 것 같아요.”
지금은 아니지만, 자신도 얼마 전까진 다른 의도를 가지고 개발에 임했기에 서연은 상혁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뭣보다 목적의 차이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 다는 것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번 코믹콘 참가 이후로, 서연은 뭔가 자신의 게임을 보는 눈이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이전엔 ‘상혁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느낌으로 기획을 보았다면, 지금은 순수하게 ‘어떻게 표현하는 게 더 재미있게 보일까?’를 생각하는 느낌으로.
그리고 그 눈으로 열심히 참가할만한 프로젝트를 보았다.
상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기획 자체만을 평가하면서.
그리고 그런 그녀가 내린 결론은, 결국 상혁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상혁이 만들려는 게임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로써는 그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이라 정확히 알기도 어려웠고, 뭣보다 다른 프로젝트보다는 상혁의 프로젝트가 압도적으로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에.
“저, 결심했어요.
서연이 상혁을 보며 말하자 상혁이 미소 지었다.
“다른 프로젝트는 다 봤어?”
“예. 이번엔 오빠 때문이 아니라, 제 의지로 결정했어요.”
“그럼 됐지. 그럼 다음으로 해야 할 건 알지?”
“네. 다녀올게요!”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린을 만나러 갔다.
자신이 참가하고 싶은 프로젝트의 인사 권한을 가지고 있는 시니어 직원, 하린에게 마스터 클래스 직원으로써 정식으로 가입 요청을 하기 위해서.
***
상혁이 하린과 지수에게 싱글 플레이의 스토리 라인 작업을 맡기면서 부탁한 것은 딱 한가지였다.
이야기에 소년 만화스러운 감성을 부여했으면 좋겠다는 것.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가, 싱글플레이를 하면서 마치 만화의 주인공이 겪는 느낌을 그대로 전달 받을 수 있도록.
그것은 얼핏 보면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주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당초 소년만화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성을, 게임에서 느끼게 하려면 개발자가 소년만화 수준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캐릭터 하나하나에 개성과 성향을 부여하고, 각자의 이야기 전개를 만들어 나가며, 소년만화 스타일로 적의 파워밸런스를 잡는 과정.
그것은 설정능력 하나만으로 PTW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받아낸 지수로써도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수는 최선을 다해서 설정 하나하나를 잡아나갔다.
설정 하나 하나를 잡을 때마다, 그걸 보았을 때 유저가 느낄 흥분을 의도적으로 계산하면서.
단지 평소엔 옆에서 같이 아이디어를 내주던 서연이 없어서, 조금 외로웠을 뿐이었다.
‘다시 오겠지?’
물론 지수도 잘 알고 있었다.
서연이 이 장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또 한 번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연이 합류하기를, 지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자신이 낙서를 끼적이고 있으면, 서연은 언제나 지수가 그리려는 것을 귀신처럼 알아채고는 바로 스케치로 그려주고는 했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물이 언제나 지수가 상상한 것 보다 좋았기에, 지수는 상혁이 서연을 신뢰하는 것 이상으로 서연을 신뢰하고 있었다.
기획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비주얼로 뽑아줄 수 있는 원화가란, 그만큼 귀한 존재였으니까.
“흠···. 이게 아닌데.”
이번에도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정 스케치를 끼적이려고 하는데, 생각대로 잘 그려지지 않았다.
중학생 때 중2병에 심취하여 나름 설정화를 많이 그렸었지만, 그건 그냥 설정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었지, 그림으로 재미나 로망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림 자체에서 느껴져야 하는 위압감이라던가, 캐릭터의 성격 같은 건 지수의 실력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요소들이었다.
“아, 이게 아닌데···.”
“줘봐.”
지수가 갑갑해하는데, 지수의 뒤에서 다가온 손이 지수가 그려놓은 스케치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슥슥 선을 그어 디자인을 완성해 다시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이거, 맞지?”
그것은 지수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아니, 지수가 생각하던 것보
다 더 멋지게 표현한 스케치였다.
“어···. 서연 언니?”
“어.”
“다시 오신 거예요!?”
“아직은. 일단 팀장님께 허락을 받아야하니까.”
그렇게 말한 서연은, 자신이 빠져 있던 동안 연습해서 새로 그린 포트폴리오를 내밀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와는 대조적으로, 굳은살이 빼곡히 박인 손을 내밀며.
“PTW 마스터 클래스 원화가 이서연입니다. 하린 씨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어, 하린 씨에게 정식으로 팀 가입을 요청합니다. 이건 제 포폴이고, 맡겨만 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역할을 수행하겠습니다. 부디 가입을 허락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서연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거짓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린은 조용히 서연이 건네준 포트폴리오를 넘겨받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감탄의 신음을 흘렸다.
‘이게 같은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
이전에 서연이 그린 컨셉아트가 ‘매력을 잘 잡아낸’ 컨셉아트였다면, 이번에 가져온 컨셉아트는 아예 로망이란 단어를 종이에 새겨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게임 화면을 그려놓은 그림만 보아도 게임이 미친 듯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트집 잡을 데가 단 한군데도 없었다.
오히려 가입해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끌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연에게 허리를 숙여 부탁했다.
“이제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네요. 서연 씨. 팀 가입을 환영합니다.”
“그 말은, 합격이라는 뜻이죠?”
“네. 환불은 안 됩니다. 무르기 없어요. 이 정도 그림이라니···. 이제 다른 팀 가신다고 하면 저주할거에요!”
“걱정 마세요. 그럴 일 없으니까.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저도 팀원이니까!”
서연이 세게 손뼉을 치고는 두 사람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빨리 작업 시작하죠! 저 때문에 일주일이나 늦었으니까. 대신 GOS때보다 압도적으로 유저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을 뽑아드릴게요!”
의욕에 찬 목소리를 내뱉으며, 서연이 탁자에 어지러이 쌓여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자신이 다른 프로젝트를 검토하기 위해 빠져 있는 동안, 상혁이 어떤 흉계(?)를 꾸며 놓았는지 확인하려고.
그리고 잠시 후, 서연은 상혁이 그리려고 하는 그림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는 ‘아’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소년만화?”
“네. 상혁오빠가 그렇게 말했었어요.”
“흠, 내가 빠져있는 동안, 이런 걸 하고 있었 구나···.”
설정을 보고 있던 서연은 계속 느껴지던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엄청 재밌어 보이기는 하는데···.’
잘 만들어진 캐릭터, 개성 있는 스킬, RPG와 FPS라는 걸출한 인기 장르의 조합.
그렇다고 플레이가 재미없어 보이거나 완성도가 낮은 것도 아니다.
분명 이런 게임이 있다면 자신은 100%플레이 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을, 그녀는 끝내 단어로 정의하지 못했다.
‘그냥 내가 이 장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서연이 미소 지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상혁과 지수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도 최선을 다해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서.